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라틴어: Tiberius Sempronius Gracch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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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12년 |
출생지 | 미상 |
사망지 | 이탈리아 남부 루카니아 |
지위 | 평민 귀족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아버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조카) |
참전 | 제2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15년 |
전임 |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
동기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1]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2]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
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13년 |
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동기 | 소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
후임 |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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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평민 귀족이자 장군. 노예 부대를 이끌고 한니발 바르카를 상대로 활약했으나 결국 전사했다.2. 생애
기원전 238년 집정관을 역임한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의 아들이다. 기원전 216년 최고 조영관에 선임되었으며, 같은 해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이 최악의 패배를 당한 뒤 독재관에 선임된 마르쿠스 유니우스 페라의 기병장관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적군에게 포위된 카실리눔 주민들에게 보급품을 보내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기원전 215년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가 동료 집정관이 될 예정이었으나, 취임하기 직전에 실바 리타나 전투에서 보이족의 매복 공격으로 전사했다. 따라서 재선거가 실시되었고,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압도적인 표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두 명의 평민 출신 집정관을 용인하지 않았고, 불길한 징조를 핑계로 마르켈루스의 취임을 무효화했다. 이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새 집정관으로 임명되었다.이 당시 로마군은 칸나이 참패의 여파로 인해 병력 보충에 차질을 빛고 있었다. 이에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갖가지 조치가 내려졌는데, 그 중 하나는 노예들을 징집하는 것이었다. 그는 전공을 세우면 해방시켜주겠다는 조건으로 징집된 수천 명의 노예들을 지휘하여 캄파니아 해안을 따라 시누에사에서 리터눔으로 남하했다. 이때 쿠마에 시가 로마에 계속 충성을 바칠 테니 한니발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즉시 쿠마에 시로 이동했고, 뒤이은 한니발의 공세를 격퇴했다. 또한 한니발과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 사이를 오가던 사절단이 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함선을 상륙하려 하자 즉시 저지했다. 그해 말 한니발이 겨울을 나기 위해 캄파니아에서 아풀리아로 이동하자 곧바로 추격하여 루케리아에서 겨울을 보냈다.
기원전 214년, 전직 집정관이 된 이후 한니발의 부하 한노가 브루티움에서 산니움으로 이동하는 걸 저지하라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집정관의 지시에 따라 베네벤툼으로 이동하여 한노를 상대로 회전을 벌였다. 그 결과 그라쿠스의 노예군이 대승을 거두었고, 한노는 겨우 2천 명만 수습하여 전장을 이탈했다.( 1차 베네벤툼 전투) 하지만 패주하는 한노를 추격하다가 루케리아에서 역습을 받고 패퇴하였다. 노예부대는 큰 승리를 쟁취한 공로를 인정받아 해방되었고, 이후에도 그를 따랐다. 또한 그는 기원전 213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아들 소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했다. 이후 루케리아에서 카르타고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치르느라 로마로 귀환할 틈이 없었기에, 기원전 212년 집정관 선거를 치를 독재관을 따로 세우는 데 동의했다.
기원전 212년 새 집정관에 선임된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베네벤툼에서 한니발과 동맹을 맺은 카푸아로 쳐들어가면서, 그에게 기병대와 경보병대를 이끌고 루카니아에서 베네벤툼으로 이동해 그곳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에 따라 군대를 이동시키면서, 루카니아 부족 동맹 지도자 플라부스의 안내를 받았다. 그러나 플라부스는 한니발이 타란토를 공략한 뒤 카르타고 편을 들기로 마음먹고, 그를 카르타고군에게 바침으로써 자신의 뜻을 한니발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삼니움인 마구스가 지휘하는 카르타고군은 약속 장소에서 플라부스의 인도를 받는 그를 기다렸다. 결국 매복에 걸려들고 소규모 호위대와 함께 혈투를 벌였으나 끝내 전사했다. 마구스는 그의 시신을 한니발에게 보냈고, 한니발은 이를 화장하였다. 그가 이끌던 해방노예 부대는 주군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뿔뿔이 흩어졌다.
그의 조카 대 그라쿠스는 훗날 로마의 탁월한 장군이자 정치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또한 대 그라쿠스의 아들들인 그라쿠스 형제 역시 평민들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역사에 길이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