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우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 노빌리오르 라틴어: Servius Fulvius Paetinus Nobili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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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마르쿠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조부) 마르쿠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아버지)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아들)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손자) |
참전 | 제1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55년 |
전임 |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롱구스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
동기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
후임 |
스키피오 아시나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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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기원전 4세기 중반에 투스쿨룸에서 로마로 이주한 뒤 집정관을 연이어 배출한 노빌레스 가문인 풀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마르쿠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조부 마르쿠스는 기원전 299년 집정관 마르쿠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일 것으로 추정되며, 아버지 마르쿠스는 이름 외에 알려진 바 없다.기원전 255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오르기 이전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두 집정관은 전년도 집정관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가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완패한 뒤 살아남은 로마군 장병들을 구출하는 임무를 맡고 300척 또는 350척의 함대를 이끌고 아프리카 해안으로 향했다. 그들은 도중에 코수라 섬[1]을 점령한 뒤 아스피스로 향했다. 카르타고 해군은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200척의 퀸퀘레메를 동원했다.
양측은 아스피스 북쪽의 헤르마이움 곶 앞바다에서 맞붙었다. 해전의 양상은 거의 전해지지 않으나, 카르타고 함대가 해안에 몰린 뒤 로마군이 코르부스를 통해 적선을 옮짝달싹 못하게 한 후 단숨에 올라타서 제압했다는 이야기는 전해진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카르타고 전선 16척이 침몰하고 114척이 노획되었다고 한다. 로마군의 손실은 거의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에서는 카르타고 해군이 에크노무스 해전의 참상으로 인해 경험 많은 선원들을 많이 잃어서 로마군을 저지하기는 역부족이었으리라 추정한다.
노빌리오르와 파울루스는 적 해군을 격파하고 아스피스에 도착하여 생존병들과 합류한 뒤 인근 일대를 대거 약탈하여 식량을 확보한 후 이탈리아로 귀환했다. 그러나 그 해 7월 중순 카마리나와 시칠리아 남동쪽 모퉁이인 파사로 곶 사이의 해상에서 폭풍을 만났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두 집정관은 폭풍이 밀어닥치는 상황에 겁을 집어먹고 전 함대에 해안가로 어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경험많은 선원들은 이런 상황에서는 해안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어야 안전하다고 주장했지만 집정관들이 이를 묵살해버렸고, 결국 수많은 배들이 암초에 걸려 가라앉았다고 한다.
폴리비오스의 기록에 따르면 총 464척의 전선 중 384척이 침몰했으며, 300척의 수송선도 손실되었고, 10만 명 이상의 인력이 바닷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두 집정관은 목숨을 건져 얼마 남지 않은 생존병과 함께 귀환한 뒤 헤르노마이움 해전 당시 확보한 적선의 뱃머리를 전리품 삼아 기원전 254년 1월 개선식을 거행했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 원로원은 카마리나 참사를 두 집정관의 오판보다는 자연재해로 간주했기에 개선식을 허락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또한 이후로 코르부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볼 때, 코르부스 때문에 피해가 더 많이 났다고 판단한 로마군이 코르부스를 더이상 쓰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아들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는 이름만 언급되었을 뿐 행적은 알려진 바 없으며, 손자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는 기원전 189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1]
현재 판탈레리아 섬. 시칠리아에서 남서쪽으로 100km 떨어져 있고 튀니지 해안에서 동쪽으로 60km 떨어진 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