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노스케팔라이 전투 그리스어: Μάχη τῶν Κυνὸς Κεφαλῶν 영어: battle of Cynoscephala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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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기원전 197년 7월 4일 | |
장소 | 테살리아 키노스케팔라이 언덕 | |
교전국 |
로마 공화국 아이톨리아 동맹 |
마케도니아 왕국 |
지휘관 |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
필리포스 5세 헤라클레이데스 아테나고라스 레온 니카노르 |
병력 |
총원: 25,500명 군단병: 16,000명 경보병: 8,400명 기병: 1,800기 코끼리 20마리 |
총원: 26,000명 팔랑크스: 16,000명 경보병: 2,000명 용병: 5,500명 기병: 2,000기 |
피해 | 700명 |
전사: 8,000명 포로: 5,000명 |
결과 | 로마 공화국의 그리스 패권 장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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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시기인 기원전 197년 테살리아의 키노스케팔라이 언덕에서 로마군과 마케도니아군이 맞붙은 전투. 로마 공화국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마케도니아 왕국을 굴복시키고 그리스에서의 패권을 확보했다.2. 배경
기원전 204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군주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급사하고 6살 밖에 안 된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즉위했다. 이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주 안티오코스 3세와 마케도니아 왕국의 군주 필리포스 5세는 동맹을 맺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이후 안티오코스 3세가 이집트령 시리아를 공격하는 사이, 필리포스 5세는 아나톨리아로 원정하여 이집트령 사모스를 포위하고 밀레투스를 점령하였으며, 페르가몬의 성전을 파괴했다.로도스와 페르가몬을 지배하고 있던 아탈로스 1세는 로마 공화국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하지만 로마는 당시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치르고 있던 중이라서 도와줄 여력이 없었고 군대를 보내는 대신 사절단을 보내 필리포스 5세에게 침략 행위를 중지하라고 요구했지만, 필리포스 5세는 이를 무시했다.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 바르카의 카르타고군이 대패하면서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종식되어 로마의 운신 폭이 넓어졌지만, 필리포스 5세는 침략 행위를 그만두지 않고 아테네, 페르가몬, 로도스 등과 전쟁을 벌였다.
로마 공화국은 아테네 등에게 구원 요청을 받고 필리포스 5세에게 침략 행위를 중단하고 점령지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가 점령지를 포기하지 않자 전쟁을 선포하고, 200년 가을에 그리스로 군대를 파견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마케도니아 왕국은 로마와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에게 고전했고, 필리포스 5세는 에페이로스 연맹의 배반으로 아오이 스테나 전투에서 결정적인 참패를 겪는다.
필리포스 5세는 연합군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기원전 198년 말부터 197년 초까지 이어진 로크리스 회담에서 연합국이 필리포스 2세가 장악한 이래 150여 년간 마케도니아 왕국의 영지였던 테살리아에서 완전 철수하라는 요구를 받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전쟁을 재개했다. 그는 보이오티아 동맹 및 스파르타를 끌여들어 로마에 대항하려 했지만, 두 세력 모두 얼마 안가 로마에게 돌아섰다. 다급해진 필리포스 5세는 로마 본국으로 강화를 요구하는 사자를 보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해 6월,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테살리아 동남부 지역의 펠라이 마을에 이르렀다. 이 시기 필리포스 5세도 마케도니아군을 이끌고 테살리아에 침입한 로마군을 격퇴하려 했다. 이리하여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을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펠라이 마을을 점거한 플라미니누스는 다음날 아침 안개가 가득한 상황에서 적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인근의 키노스케팔라이 언덕에 정찰병을 보냈다. 그런데 때마침 필리포스 5세가 보낸 마케도니아 정찰병들도 그 언덕에 있었다. 곧 안개가 걷히면서 두 정찰병들은 같은 언덕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들은 잠시 놀라다가 곧 교전에 착수했고, 마케도니아 정찰병들이 상대를 밀어냈다. 이에 로마 정찰병들은 적이 출현했음을 알렸고, 플라미니누스는 즉시 기병대와 경보병을 파견했다.그들은 언덕 아래까지 추격하던 마케도니아 정찰병들을 격퇴하고 언덕 꼭대기로 향했다. 그러자 필리포스 5세도 구원군을 파견했고, 양측은 키노스케팔라이 언덕 정상에서 맞붙었다. 곧 수적으로 우세한 마케도니아 경보병 및 기병대가 상대를 언덕 아래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필리포스 5세는 언덕 정상에 본대를 이동시켜서 유리한 위치에서 로마군과 대치하기로 결심하고, 팔랑기타이들에게 키노스케팔라이 언덕 정상까지 행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무렵, 플라미니누스는 언덕 아래에서 전투 대형을 갖췄는데, 이때 우익에 전투 코끼리 20마리를 배치했다. 이 코끼리들의 반대편에 있는 마케도니아 팔랑기타이들은 아직 언덕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플라미니누스는 전황을 쭉 살펴본 뒤, 좌익에서는 아군이 밀리고 있지만 우익에서는 적이 여전히 언덕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이에 그는 승부수를 뒀다. 밀리고 있는 좌익에 구원군을 보내는 대신, 우익에 주력군을 파견하여 언덕을 오르느라 전열이 흐트러진 팔랑기타이들을 치기로 한 것이다.
우익에 배치된 레기온들은 명령이 떨어지자 언덕 정상을 향해 신속하게 이동했고, 코끼리들은 언덕 주위를 돌아가서 아직 대형을 갖추지 않은 마케도니아 좌익의 측면으로 진격했다. 곧 언덕 정상을 장악한 레기온들은 이제 막 언덕을 기어오르고 있는 팔랑기타이들에게 달려들었고, 코끼리들도 측면을 요격했다. 그러자 팔랑기타이들은 전의를 급격히 상실하고 패주했다. 로마군 우익 부대는 이들을 추격하다가 곧 중단하고 이때까지 로마 경보병 및 기병대를 밀어붙이고 있던 마케도니아 우익 부대의 배후로 돌아갔다.
마케도니아 우익 부대는 적이 배후에 있다는 걸 감지하자마자 전의를 상실하고 달아났다. 이 당시 필리포스 5세는 전황을 좀더 잘 보기 위해 언덕 정상에 전차를 세웠다. 그는 곧 좌익과 우익 모두 무너졌다는 걸 깨닫고, 전차를 버려두고 도주했다. 이리하여 키노스케팔라이 전투는 로마군의 압승으로 종결되었다.
4. 결과
역사가 폴리비오스의 기록에 따르면, 로마군은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700명이 전사한 반면, 마케도니아군은 8,000명이 죽고 5,000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고 한다. 그 후 필리포스 5세는 더 이상의 전쟁은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템페에서 연합 대표단의 요구 사항을 모두 받아들였다,아이톨리아 사절단은 필리포스 5세를 제거하자고 주장했지만, 플라미니누스는 단호히 거부했다. 대신 필리포스 5세의 차남 데메트리오스 왕자를 볼모로 데려갔고, 1천 탈렌트의 배상금을 받았다.
그리스 전역은 플라미니누스를 '그리스의 해방자'로 칭송했고, 필리포스 5세는 두 번 다시 로마에 대적하지 않았다.
마그네시아 전투, 피드나 전투와 함께 로마 레기온이 팔랑크스를 상대로 승리한 전투로 자주 분석된다. 특히 구릉지에서의 전투, 로마군 우익 분견대의 전술기동 등 팔랑크스의 경직성과 레기온의 유연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상술한 것처럼 당대에는 마케도니아인들을 제외한 그리스인들에게 그리스가 마케도니아로부터 해방된 전투로 여겨졌으나, 정작 현대 그리스에서는 19세기부터 시작된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마케도니아 왕국을 자신들의 역사로 여기기 때문에 이 전투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암흑기의 시작으로 여긴다. 문화적으로 슬라브화된 오늘날의 북마케도니아 또한 마케도니아 왕국을 자신들의 역사로 여기는지라 키노스케팔라이 전투가 마케도니아 몰락의 시발점으로 인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