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6 12:03:43

틸지트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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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진행4. 조약 내용
4.1. 프랑스 - 러시아 간의 강화4.2. 프랑스 - 프로이센 간의 강화
5. 결과6. 여담

[clearfix]
Frieden von Tilsit ( 독일어)[1]
Treaties of Tilsit ( 영어)
Traités de Tilsit ( 프랑스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reaties_of_Tilsit_miniature_%28France%2C_1810s%29_side_A.jpg
불편해 보이는 표정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웃고 있는 알렉산드르 1세가 대비된다.

1. 개요

1807년 나폴레옹 동프로이센(Ostpreußen)의 틸지트(Tilsit)[2]에서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과 맺은 평화 조약. 보통 하나로 뭉뚱그려 틸지트 조약이라고 부르지만 정확히는 두 가지 조약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프랑스-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며 다른 하나는 프랑스-프로이센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이 조약을 통해 나폴레옹은 중부 유럽에서의 패권을 단단히 다지는 한편으로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말 그대로 나폴레옹의 리즈시절.

이 평화조약은 러시아 원정으로 무효화된다.

2. 배경

나폴레옹의 위세를 두려워 한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의 세력이 더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1806년 10월 나폴레옹이 보호자로 있는 라인 동맹의 가맹국인 바이에른 왕국을 침공하였고 여기에 영국 러시아 제국, 스웨덴, 작센 왕국이 호응하면서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발발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아직 전성기에서 내려오지 않은 상황이었고 10월 14일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에게 탈탈 털렸다. 17일에는 할레에서 베르나도트의 프랑스군에게 또 털렸으며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수도 베를린에서 꽁지빠지게 도망쳤다. 그리하여 10월 27일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에 무혈입성하였다. 처음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했던 작센은 프로이센이 탈탈 털리는 것을 보고는 바로 라인 동맹에 가입하여 프랑스 편으로 갈아탔다.

하지만 프로이센은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로 몽진하면서 끝까지 저항하였고 여기에 러시아도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프로이센군을 추격하여 폴란드 땅까지 진격한 나폴레옹은 프랑스군의 진격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킨 폴란드인의 열렬한 환대를 받았고 점령한 폴란드 땅에 위성국인 바르샤바 공국을 설립하였다.

폴란드를 점령한 나폴레옹은 쾨니히스베르크로 말머리를 돌렸다. 1807년 2월 7일 벌어진 아일라우 전투에서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6월 14일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을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말 그대로 발라버렸다. 프리틀란트 전투 이틀 후 프로이센 왕국의 임시 수도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마저 프랑스의 수중에 떨어지고 버틸 수가 없게 된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나폴레옹에게 사절을 보내 강화를 제의했다.

3. 진행

나폴레옹은 압승을 거두었음에도 러시아 사절단에게 비교적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고,[3] 이에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과 직접 평화교섭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틸지트에서 만난 양국의 황제는 며칠간 서로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양국 군대를 나란히 사열하고, 연극을 보고[4], 문학에 관하여 논하면서 친목질 우애를 다졌고 최종적으로 7월 7일에 양국 사이의 강화가 조인된다.[5] 그리고 이 때 알렉산드르 1세가 보여준 우애에 나폴레옹은 러시아가 완벽히 자신의 영향력에 들어왔다고 흐뭇해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륙 봉쇄령 당시 제대로 러시아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게 된다[6]

반면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에게는 외무장관 탈레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혹하기 짝이 없는 강화조건을 강요한다. 탈레랑은 군사적 승리를 무기로 지나치게 가혹한 조건을 부과하면 프로이센은 원한을 품게 될 것이고 프랑스는 평화를 유지할 수가 없다며 프로이센의 국력과 실력을 어느 정도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나폴레옹은 독일 권역에 오스트리아 정도만 강대국으로 인정하고 프로이센 따위는 2류국가 취급하면서 프로이센을 영토적, 금전적으로 완전히 거덜내는 조건의 평화 조약을 체결한다.

이미 프랑스와 나폴레옹을 상대할 여력이 없던 프로이센은 울며 겨자 먹기로 나폴레옹의 강화조건을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민족주의 성향과는 거리가 먼 현대의 사학자들도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에게 강요한 조약안을 '관 뚜껑에 못박기'라고 말할 정도이니(...). 어쨌든 그리하여 7월 9일에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에도 평화 조약이 체결됐고 프랑스 혁명 전쟁 이후 10년 넘게 총성이 끊이지 않던 중부 유럽에 간만에 평화가 찾아온다. 그러나 독일권의 타 국가들이 프랑스의 패권을 인정한 것과 달리 프로이센은 개혁과 동시에 비밀리에 재무장을 추진했고, 프랑스 또한 프로이센의 강화를 믿지 않아 프로이센의 요충지를 군사적으로 점령했는데 이는 1813년 해방전쟁으로 불리는 국면에서 프로이센 뿐만 아니라 모든 독일 지역에 민족 감정을 촉발시켰고 나폴레옹의 몰락에 일조한다.

4. 조약 내용

4.1. 프랑스 - 러시아 간의 강화

4.2. 프랑스 - 프로이센 간의 강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reussen-1806.jpg
서쪽 끝 보라색을 제외한 모든 색깔이 칠해진 부분이 1806년 프로이센 영토. 주황색이 틸지트 조약 체결 이후 잔존한 프로이센의 영토. 1795년 바젤 평화 조약으로 보라색 부분의 라인 강 서안 영토를 프랑스에 할양한 대신 기존 영토와 더불어 영국과 동군연합이었던 하노버 선제후국까지 포함한 마인 강 이북 지역의 북독일 지역의 종주권을 인정받았으나 전쟁 한 번 잘못 했다가 틸지트 조약으로 영토와 인구의 절반 이상[11]을 날려먹었다. 망했어요
이쯤되면 19세기 판 베르사유 조약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5. 결과

내용 면에선 다소 차이가 있으나 프로이센과의 조약은 베르사유 조약, 러시아와의 조약은 독소 불가침조약과 성격이 유사했다. 그리고 조약에 따른 영향도 비슷했는데 프로이센(독일)의 복수와 결국에 일어난 러시아(소련)와의 전쟁.

유럽에 마침내 평화가 찾아온 것처럼 보였지만,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특히나 굴욕적인 조약을 강요받은 프로이센에서는 프랑스에 대한 복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드높았다.

러시아 역시 틸지트 조약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영국에 농산물을 수출하던 러시아 귀족들이 대륙봉쇄령으로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합의의 상당수가 지켜지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오스만 제국 공략을 그닥 도와주지 않았고 올덴부르크 대공국의 주권을 존중하긴 커녕 낼름 먹어버려서 러시아를 빡치게 했으며 러시아 황실과의 결혼도 날아가버렸다.

결국 러시아-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의 불안불안한 평화는 조약 체결 후 채 3년이 지나지 않은 1810년 러시아가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에 공공연히 반항하면서 실질적으로 무너지고,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감행하면서 완전히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린다.

6. 여담

틸지트 조약 때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1세가 서로에게 보인 우애는 유럽 전역에서 크나큰 주목을 받았다. 둘 다 상당히 인기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유럽의 부녀자들 사이에서는 이 둘을 엮는 팬픽이 성행했으며 러시아가 친나폴레옹 노선을 타게 된 것에 불만을 가진 정치인들도 비꼬는 어조로 이러한 이미지에 부채질했다. 이때 나왔던 그림 중 제일 유명한 것이 문서 상단에 삽입된 이미지인데, 검색해 보면 당대에 그려진 둘이 입맞춤(...)을 하는 그림도 찾아 볼 수 있다. # 전쟁과 평화에도 잠깐 이 둘의 우애를 묘사하는 대목이 스쳐지나가듯이 나온다. 나폴레옹 본인이 직접 "알렉산드르 1세가 여자였으면 애첩으로 삼았을거야" 라고 말한 것도 컸다. 물론 다들 알듯이 이 우애는 얼마 가지 못한다.


[1] 직역하면 그냥 틸지트 강화라는 의미이다. [2]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주 소베츠크. 소베츠크는 물론 소비에트에서 온 단어이며, 이곳을 얻은 건 소련의 업적이라는 의미로 아직도 이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3] 비스와 강을 러시아와 프랑스 세력권 사이의 경계선으로 유지할 것을 사절단에게 분명히 전했다고 한다. [4] 여담이지만 2013년도 수능특강 영어지문 중에 이 때 나폴레옹이 연극을 통하여 암묵적으로 러시아에게 양국 사이의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싶다는 의사를 알렉산드르 1세에게 전했다는 관련 글이 있다. [5] 한가지 재밌는 에피소드가 전해져 오는데, 두 황제가 만나자마자 꺼낸 대화 주제가 바로 영국 뒷담화였다고 한다. 알렉산드르 1세가 '나도 프랑스만큼이나 영국 싫어함'이라고 하자 나폴레옹이 '올ㅋ 그럼 우리 친구 먹을 수 있겠네'라고 화답했다고(...). [6] 물론 러시아 입장에선 자신의 돈줄을 끊어버린 나폴레옹에게 뒤통수를 맞았다고 할 수 있다. [7] 스웨덴을 영국의 동맹관계에서 이탈시키고 대륙 봉쇄령에 강제로 참가시키기 위한 나폴레옹의 노림수였다. 결국 1808년 러시아는 스웨덴을 침공해 1809년 프레드릭스함 조약으로 핀란드 뜯어갔다. [8] 1797년 캄포포르미오 조약의 결과 이오니아 제도는 프랑스로, 카타로는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귀속되었으나 1800년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와중 러시아 해군이 이오니아 제도를 점령해 러시아와 오스만의 공동 보호국인 에프타니소스 공화국을 세운 상태였다. 카타로는 1805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의 결과 프랑스로 양도될 예정이었으나 역시 러시아 제국 해군이 점령한 상태였다. [9] 올덴부르크 대공은 황제 인척관계였기 때문에 이 시기 올덴부르크 대공국은 실질적으로 러시아의 영토였다. 즉 러시아를 달래기 위한 나폴레옹의 떡밥. [10] 러시아 귀족들이 가장 불만을 품었던 내용이기도 하다. 결국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면서 흐지부지. [11] 면적: 323,408㎦ → 158,867㎦, 인구: 975만 명 → 450만 명. [12] 다만 예비군의 시초격을 만드는 편법(일명 란트베어-Landwehr)을 이용해서 어떻게 어떻게 8만 명 정도의 군대 규모를 유지해냈고 이것은 1813년 독일 해방 당시 프로이센군의 병력 동원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한다. [13] 원래 프로이센에게서 뜯어내려던 배상금은 2억 800만 프랑이었으나 너무 가혹하다는 탈레랑의 주장으로 인해 1억 5350만 프랑을 거쳐 최종적으로 1억 2천만 프랑으로 낮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