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의 역사 | |||
[[아이슬란드/역사| 아이슬란드]] |
[[에스토니아/역사| 에스토니아]] |
[[라트비아/역사| 라트비아]] |
[[리투아니아/역사| 리투아니아]] |
[[스웨덴/역사| 스웨덴]] |
[[핀란드/역사| 핀란드]] |
[[덴마크/역사| 덴마크]] |
[[노르웨이/역사| 노르웨이]] |
리투아니아의 역사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373a3c> 고대 | 중세 ~ 근세 | 근대 | 현대 | |||||||
발트족 |
폴란드 왕국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폴란드 분할 | 러시아 제국 | 독일국 | 근대 왕국 |
제1공화국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 |
<colbgcolor=#7b383b>
소련 소비에트 리투아니아 |
소련 소비에트 리투아니아 |
제2공화국 | |
중세 대공국 |
나치 독일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 리투아니아 임시정부 |
[clearfix]
1. 개요
History of Lithuania. |
발트 3국의 구성국인 리투아니아의 역사를 서술하는 문서.
2. 고대사
발트어족에 해당하는 리투아니아인은 고대부터 중세 초까지 발트해 일대 늪지대에 고립되어 살았다. 고대 리투아니아인은 슬라브인과 비슷한 고대 다신교 신앙인 발트 신화 다신교를 신앙하고 있었다. 고대 슬라브 신화의 페룬에 해당하는 최고신 페르쿠나스(Perkūnas)를 숭배하는 전통이 무려 14세기까지 국교로 이어져왔다. 리투아니아인 뿐만이 아니라 인근의 프루센인, 리보니아인도 기독교가 아닌 다신교를 믿고 있었다. 게르만인이나 슬라브인과 다르게 로마 제국의 쇠퇴 이후에도 민족 대이동에 참여하지 않고, 계속 늪지대에 고립되어 살았던 이들 발트족에게는 기독교가 도입될 기회가 별로 없었다.이렇게 발트어족 상당수가 기독교 대신 고유의 다신교를 믿는 상황을 핑계로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이 발트어족들의 영토를 침략해 들어왔다.[1] 튜튼 기사단은 오늘날 칼리닌그라드 일대의 프루스인들을 정복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와중에 너무 많은 프루스인들이 잔인하게 살해당해서 프루스인들의 이웃해있던 리투아니아인이 튜튼 기사단을 무척 경계하고 미리 대비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유럽 최신의 무기와 갑주, 성채 건축술을 보유한 튜튼 기사단이었지만 늪지대가 많은 리투아니아에서 리투아니아인이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자 곤란을 겪었다.
3. 중세: 리투아니아 대공국
자세한 내용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문서 참고하십시오.파일:15th lithuania map.jpg |
서기 15세기 당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판도 |
리투아니아인들은 다른 발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12세기까지 부족끼리 갈라져 통일이 되지 않는 상태였지만, 튜튼 기사단의 위협 때문에 전 부족들이 하나로 단결하고 튜튼 기사단의 전법과 무기를 받아들이며 점점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민다우가스에 의해 1235년 흑 루테니아의 도시 나바흐루다크를 정복하고 1236년 부족 통일이 된 후 리투아니아 군주들은 루스 공국들을 상대로 결혼 동맹을 빌미로 상속을 주장하는 한편 가톨릭이나 정교회로 개종하는 척 하면서 타타르인들이나 튜튼 기사단을 기습공격하길 즐겼다.
동쪽에선 지금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방의 구심점이던 키예프 대공국이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하자, 과거 키예프 루스의 영토에 해당하는 루테니아 영역은 현지 소규모 공국들만 남았고 리투아니아는 이 쪽으로 빠르게 확장했다. 구심점을 잃은 공국들은 어렵지 않게 리투아니아에 정복당했고 나아가 킵차크 칸국의 몽골인을 몰아내면서 오늘날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까지 영토를 확장했다.[2] 1362년 게디미나스 대공의 아들 알기르다스가 이끄는 리투아니아와 루테니아 연합군은 킵차크 칸국의 주 전력 중 하나였던 노가이 타타르 군대를 오늘날 우크라이나 중부에 있는 시니 보디 전투에서 격파했다. 그 결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국경은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 일대를 넘어 흑해 연안의 드니스트르강 하구까지 확장되었다. 하지만 튜튼기사단에서는 리투아니아인들의 배신과 확장에 위협을 느끼고 여러차례 십자군을 보내서 리투아니아를 침략하기를 멈추질 않았다.[3] 알기르다스의 지휘를 받는 리투아니아인들이 루테니아 일대로 영토를 계속 확장하는 동안 사모기티아인들이 튜튼 기사단으로부터 리투아니아 본토를 필사적으로 방어하였다. 이들은 리투아니아 본토를 방어해내는 데 어느 정도는 성공했지만, 대신 메멜 지방에 십자군이 세운 요새를 탈환하는 것은 실패했고, 메멜란트 일대의 리투아니아인들은 튜튼 기사단의 농노가 되어 한동안 비참하게 살게 되었다.[4]
이들의 다신교 신앙은 1386년 폴란드 왕국의 야드비가 여왕과 리투아니아의 요가일라가 결혼할 때까지 이어졌다.[5] 알기르다스 대공의 아들인 요가일라[6]는 야드비가 여왕과 결혼하기 위해서 폴란드인들의 주선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수도 빌뉴스의 페르쿠나스 신전과 그 주변을 둘러싸던 삼림[7]을 죄다 밀어버림으로써 기독교 국가로 이행하게 된다. 당시 리투아니아에서 폴란드와 동군 연합을 이룬데에는 튜튼 기사단이라는 공동의 적이 있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폴란드의 귀족 문화가 리투아니아인 지도층에게 매우 매력적인 최신 문화로 비쳤던 점도 컸다고 한다.
13세기 통일한 이래 리투아니아는 동유럽 지역의 큰 손으로 자라났고, 14세기 무렵부터 심각한 내전으로 정신이 없던 킵차크 칸국의 식민지였던 루테니아를 몰래 먹으면서 독립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결국 몽골 제국의 침략과 키예프 공국의 멸망으로 힘의 공백이 생긴 우크라이나 지역까지 몰래 집어삼킴으로써 오늘날의 조그만 리투아니아 지도만 보면 상상도 되지 않는 대국으로 거듭난다. 비타우타스 대공 치세의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영토가 넓은 국가였다.
낙후되고 인구도 적었던 리투아니아인들이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금세 대국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의 혼란한 시대 상황 즉 몽골-타타르의 철저한 파괴와 약탈로 과거 키예프 루스 땅에 살던 주민들 대부분이 생지옥을 체험하는 마당에, 서쪽에서는 튜튼 기사단이 철저한 파괴에 기반을 둔 무자비한 정복정책을 벌이던 상황이 있었다. 리투아니아인들은 정복 과정에서 적어도 철저한 파괴 행위는 하지 않았고, 과거 키예프 루스의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서 리투아니아인들을 해방자로 열렬히 환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8] 때문에 폴란드와의 동군 연합과 가톨릭 개종 이전 초창기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루테니아와 같은 문화와 정체성을 공유했다.
중세 리투아니아의 역사를 다룬 독일과 폴란드의 역사서에는 비타우타스 대공이 가톨릭 신자와 정교회 신자, 그리고 발트 다신교 숭배자 이렇게 3가지 정체성을 동시에 소유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중세 리투아니아에서는 즉 다양한 정체성이 어우러진 국가였다. 리투아니아인의 가톨릭 개종 이후에도 리투아니아 민중 사이에서는 발트 토속 신앙과 가톨릭이 이중 신앙 형태로 공존했으며, 정교회를 믿는 루테니아인들도 어느 정도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같은 시기 폴란드와는 우크라이나 지방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관계였으나, 결과적으로 이득을 본 것은 리투아니아 쪽이었다. 이런 리투아니아의 전성기는 이와 같은 영토 확장이 중지되고, 동쪽 러시아 방향에서 모스크바 대공국이라는 강국이 들어서면서 끝났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지속적인 침탈을 막아내지 못했고, 비타우타스 사후 즉위한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9]와 카지미에시 4세의 4남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는 리투아니아 귀족들에게 엄청난 권한을 허락하며 대공권을 약화시켰다. 지그문트 1세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지만 폴란드인 정체성이 강했던 그는 리투아니아보다 폴란드에 집중했고, 결과적으로 리투아니아의 입지는 야기에우워 왕조대에 들어 약화되었다.
4. 근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대
자세한 내용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문서 참고하십시오.1569년 7월 1일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에 의해 루블린 조약이 서명됨으로써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폴란드 왕국과 함께 폴란드-리투아니아로 통일되었다. 폴란드의 왕이 연합국가를 통치하고, 왕은 크라쿠프의 세임(Sejm)에서 선출되도록 하였다. 다만 법전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법전을 근간으로 하였다. 리투아니아의 대공 선출 제도와 빌뉴스의 의회는 폐지되었다. 양국은 국경의 세관을 철폐하였으며 단일 화폐를 사용하게 되었다.
폴란드와 연합 이후 리투아니아는 대홍수 이전까지 전성기를 누리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루테니아 지역에 퍼져나간 리투아니아인들이 문화적으로 폴란드에 완전히 동화되면서 리투아니아어가 사용되는 영역은 점차 축소되어 갔다. 리투아니아의 수도였던 빌뉴스는 주민의 대다수가 폴란드인 및 폴란드화한 리투아니아인과 아슈케나짐 유대인들로 가득찼다. 빌뉴스를 비롯한 리투아니아 대공국 내 주요 성당들은 대부분 폴란드인 사제들이 관리하였고, 성당은 폴란드/문화를 전파하는 첨병 역할도 겸했던 것이다.
연방에서 리투아니아인의 입지는 점점 흔들리고 있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폴란드 왕국과 연합한 이유는 동쪽 루스 차르국의 압박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물론 리투아니아 대공이 폴란드 여왕과 결혼한 동맹 국가여서 리투아니아 귀족도 폴란드 귀족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다. 문제는 두 나라의 국력을 고려할 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서 주도권을 폴란드가 갖는 것은 자연스러웠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리투아니아가 폴란드에 합병된 것이기도 하다. 반 폴란드 성향의 리투아니아 귀족들이 폴란드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폴란드에서 군대를 일으켜 리투아니아 귀족들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루블린 조약으로 우크라이나의 관할권이 폴란드 왕국으로 이관되면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역은 크게 축소되었다.
또한 과거 용맹한 전사들이었던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점점 빚을 내서 사냥과 연회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다. 군인으로 참전하면서 권리를 증대시켰던 리투아니아 자영농들은 소귀족으로 편성되어 백수 생활을 하거나(...) 운이 나쁘면 농노가 되기도 하였다. 폴란드에서는 농노들의 신분 상승을 제한하기 위해서 유대인과 독일인과 아르메니아인 상인들이 대거 정착시키고 이들에게도 종교와 신분을 핑계로 제한적인 권리만을 허용했는데, 이 덕분에 리투아니아인들이 자생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을 형성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초의 리투아니아어 인쇄물은 16세기 프로이센 공국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출간되었다. 가톨릭에서는 민족어 대신에 라틴어를 고집한 것과 반대로[13], 프로이센 공국의 개신교 목회자들은 리투아니아인 농노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를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리투아니아어로 된 개신교 교리 책자들을 인쇄하는데 적극적이었다. 독일인이 리투아니아인보다 우대받던 프로이센 공국이었지만[14] 이러한 연유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서는 리투아니아인 교수들이 임용되었다.
종교 개혁의 영향은 소 리투아니아[15]에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도 전파되었다.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의 참모였던 미칼로유스 라드빌라 유오다시스[16]는 대공국 도시 곳곳에 개신교 교회와 부속 초등학교들을 건설하였으며, 대공국의 농민들이 최소 21헥타르에 달하는 농지를 경작할 수 있는 권리를 장전하였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개신교 선교는 개신교 성경이 루테니아어로 번역되면서 가속화하는 듯 하였으나, 결국 17~18세기 예수회의 활동으로 저지되었다. 예수회 역시 성경을 루테니아어로 번역하면서 농민들에게 가톨릭을 교육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16세기 후반 리투아니아 대공국에는 300개가 넘는 개신교 교회가 세워졌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폴란드의 간섭에서 벗어나 진정한 독립을 향유하기를 바란 귀족들은 칼뱅주의에서 사상적 배경을 찾았다. 1560년대에는 좀 더 급진적인 개혁사상이 칼뱅주의에서 파생되어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유행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반 삼위일체 성향 교회 유니테리언이었다. 17세기 초반 세임은 후술하는 대홍수 이후 개신교 귀족들이 스웨덴과 협력했다는 이유로 칼뱅교회와 유니테리언 교파를 탄압하였고, 리투아니아 대공국 내 유니테리언 인구는 프로이센 공국이나 네덜란드, 잉글랜드 등으로 이민하게 되었다.
1600년에는 스웨덴 국왕 칼 9세[17]가 리보니아를 침공하자, 루테니아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명장 얀 카롤 호드키에비치[18]가 폴란드 후사르 기병 3천여명을 이끌고 칼 9세가 직접 지휘하는 스웨덴군 정예 기병대를 여러차례 제압하였다. 1611년 스웨덴군을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에서 축출한 그는 1605년부터 1618년까지 루스 차르국으로부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동부 영토를 수비해냈으며, 1620년에는 노령의 나이로 폴란드-오스만 전쟁에 참전하여 승리에 공헌했다.
얀 카롤의 활약과 윙드 후사르 기병의 힘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영토를 보전하는데 성공했지만, 그의 죽음 이후 리투아니아는 루스 차르국과 스웨덴에 많은 영토를 내주기 시작했다. 스웨덴은 윙드 후사르에게 국제적인 망신을 당한 후 칼 9세의 아들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군사 개혁을 강행하며 유럽의 강대국으로 거듭나는 사이,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부실한 행정 능력으로 인해 병력의 제한이 생기는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 스웨덴의 부사관과 참모들이 날이 갈수록 수준이 올라갈 때,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믿을만한 보병 전력이 부족해서 국가 예산을 탈탈 털어 외국인 용병 보병을 고용해야 했다.
4.1. 쇠퇴
연방 국력 쇠퇴의 분수령이 된 이른바 대홍수 때 루스 차르국의 군대는 우크라이나 일대 외에도 리투아니아 대공국 국경 지대를 침공하여 대공국의 군사 요충지이자 주요 도시였던 스몰렌스크를 함락시켰다. 이러한 혼란 과정에서 평소 폴란드에 불만이 있던 라지비우 가문[19]의 개신교도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리투아니아인 마그나트(대귀족)들이 폴란드로부터의 독립과 스웨덴과의 동군연합을 주장하며, 연방을 침략하는 스웨덴군을 지원하였다.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지휘하는 코자치 봉기 및 러시아의 개입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는데, 대홍수 초반 루스 차르국 군대를 격파하고 인망을 모았던 야누시 라지비우(리투아니아어 이름은 요누샤스 라드빌라/Jonušas Radvila)가 스웨덴 국왕 칼 10세 구스타브와 함께 스웨덴-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을 설립할 것을 선언한 케다이니아이 조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야누시가 조약 서명 두 달 이후 사망하면서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스웨덴 편에 항복해야 할 지 아니면 폴란드 편에 서야 할지 우왕좌왕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스웨덴군이 폴란드-리투아니아 각지를 약탈하면서 민심이 이반하는 사이에 1656년 폴란드군에 연속으로 두 차례 대패하고 덴마크로 방향을 틀면서, 리투아니아와 스웨덴 사이의 동군연합 계획도 물건너갔다.루스 차르국의 지속된 침략과 영토 상실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점차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1700년 마그나트(대귀족)간의 내전이 발생했다. 17세기 말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는 가장 권세를 떨치던 사피에하 가문[20], 그리고 이에 맞서 라지비우 가문, 비시니오비에츠키 가문, 파츠 가문, 오긴스키 가문이 내전에 참가했다.
사피에하 가문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많은 고급관직을 독점했었는데, 1700년 당시 카지미에시 얀 사피에하가 리투아니아 총사령관, 알렉산데르 미하우 사피에하는 리투아니아 궁내청 장관, 베네딕트 파베우 사피에하는 리투아니아 재무부 장관의 지위에 있었다. 사피에하 가문은 궁정에서 큰 발언력을 가져 다른 대귀족 가문에는 불리한 법령을 제정, 실행하여 다른 가문 사람들이 중요한 관직에 오르는 걸 방해했다.
이러한 일은 보다 약한 대귀족과 일반 귀족들에 의한 반 사피에하 연합을 결성하는 결과를 낳았고, 사피에하 가문은 11월 18일에 발키닌카이 전투에서 귀족연합군과 맞서 싸웠지만 패배하여, 미하우 세르바치 비시니오비에츠키에게 가문의 본거지인 루쟈누이 궁전이 파괴되었다. 이후 사피에하 가문은 대공국 내에서 패권을 상실하여 두 번 다시 이전의 지위로 돌아가지 못했다. 내전 이후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정치불안이 계속되어 여러 대귀족 가문들이 사피에하 가문이 상실한 관직과 영지를 둘러싸고 싸우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러한 분쟁의 영향으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곧이어 시작된 대북방전쟁에서 스웨덴의 군사원정 진격로가 되어 국격이 크게 실추되었다. 패권을 상실한 사피에하 가문은 반국왕파의 리투아니아 연맹을 조직하여 스웨덴과 결탁해 리투아니아의 분열을 초래했다.
5. 근대: 러시아 제국의 지배 기간
폴란드 분할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은 상식적이고 단결된 결정을 내리기는 커녕, 서로 이권다툼을 하기에만 바빴다. 결국 1795년 3차 폴란드 분할이 완료된 이후 리투아니아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21] 그리고 다수의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러시아한테 붙었다. 특권을 상당수 보존해준다고 약속한 러시아를 내버려두고 자신들의 특권을 낮추고 개혁을 진행하려는 자기들 국왕을 도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빌나 현, 코브노 현, 수바우키 현으로 삼등분된 러시아 제국 지배 시절의 리투아니아
상술했다시피 리투아니아인은 14세기에 들어서야 기독교를 받아들였는데, 이는 유럽 국가 가운데 가장 늦은 것이었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후에도 리투아니아인 상당수(특히 농민들)는 이중 신앙을 유지하거나 무늬만 기독교인으로 아예 발트 다신교를 그대로 신앙하는 경우가 많았다.[22] 그러나 오늘날에는 러시아 제국의 강점기를 계기로 역설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가톨릭 신앙심이 강한 나라중에 하나로 거듭났다. 폴란드 분할 이후 러시아 정교회를 강요하던 러시아는 종종 가톨릭이나 리투아니아어를 탄압하긴 했지만, 리투아니아인 귀족 지주들은 대부분 그대로 계급을 유지시켰다. 가톨릭은 탄압받지만 계급은 그대로 유지된 상황에서 리투아니아인 귀족 지주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가톨릭의 성도인 로마[23]에서 찾기 시작했다.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리투아니아어를 가정 내에서 사용하는 방식으로 보존하고 일부러 라틴어 어휘를 대거 도입하면서, 리투아니아어를 지키기 위해서 분투노력했다.
리투아니아의 도심지에는 유독 가톨릭 성당들이 많은 게 특징으로, 러시아의 탄압이 심해질 때마다 리투아니아인은 가톨릭을 중심으로 뭉쳤다고. 그 대표적인 유적지가 리투아니아 제4의 도시인 샤울랴이에 있는 ' 십자가 언덕'이다.[24] 십자가 언덕은 18세기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에 의해 분할당했던 시절에 사람들이 십자가를 세우기 시작한 것에 유래됐고, 소련 치하에 있던 시절에 민족의 성지로 꼽히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리투아니아의 민족 정체성과 신앙심은 연방이 무너진 뒤에 핍박받으면서 더 강조되었다.
다른 발트 국가인 라트비아나 에스토니아 입장에서 기독교는 “외국인 지주들이 외국어로 예배 보는 문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데 비해, 리투아니아인에게 있어서 가톨릭은 민족의 자존심과도 같은 것이었다. 러시아 제국 지배 기간 동안 에스토니아인이 여전히 겉으로만 기독교를 믿는 이교도 취급받은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에스토니아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무신론자 비율이 많은 나라가 된 것과 다르게, 소련 붕괴 이후 리투아니아의 가톨릭 교회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6. 현대사
러시아 제국 치하의 리투아니아아인은 민족 의식이 강하고 교육열이 유달리 높았다. 1904년 기준 문해율이 70%에 달했으며 러시아 정부의 탄압을 피해 몰래 동프로이센에서 인쇄된 책을 밀반입하여 가정에서 자체적으로 리투아니아어를 교육시켰다.결국 리투아니아는 20세기 초에 벌어진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독립을 쟁취했다. 러시아 제국이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붕괴하면서, 독일 제국에 무조건 양보한 뒤 전쟁을 중단해버렸다.[25] 독일은 리투아니아에 리투아니아 왕국이라는 괴뢰국을 설립하고 독일 귀족인 빌헬름 폰 우라흐를 민다우가스 2세로 추대했으나, 결국 독일 제국조차 얼마 안가 1차대전의 패전국이 되었고, 이렇게 리투아니아인들은 민족자결주의에 의거해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비에트 러시아는 독일 제국이 붕괴한 지 이틀만인 11월 13일에 전격적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파기를 선언, 리투아니아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붉은 군대는 1919년 1월 초 빌뉴스를 비롯한 리투아니아 영토의 2/3를 점령했고, 뒤이어 카우나스까지 포위했다. 그러나 붉은 군대는 얼마 안 가 폴란드군의 공세에 밀려 총퇴각했고, 빌뉴스는 4월에 폴란드군에 점령되었다. 리투아니아는 빌뉴스 반환을 요구했으나 폴란드는 거부했다. 폴란드의 지배는 7월 14일 붉은 군대가 빌뉴스를 재점령함에 따라 종식되었으나, 이번에는 소비에트 러시아가 계속 점령했다. 하지만 붉은 군대는 바르샤바를 목전에 두고 8월에 대패함에 따라 다시 동쪽으로 후퇴했다. 빌뉴스는 8월 26일 리투아니아에 반환되었다.
리투아니아는 폴란드로부터 수복한 수바우키 지역[26]을 지키려 했으나 이어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쟁에서 대패, 폴란드에 우호적이게 국경이 조정되었다. 하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쟁의 종전은 국제사회의 압박에 의한 것이었고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27]를 노린 폴란드는 리투아니아 태생의 폴란드인 장군 루챤 젤리고프스키를 앞세워 재침공, 빌뉴스에 괴뢰국인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을 만들고 뒤이어 합병하였다. 따라서 1920년- 1939년 사이 리투아니아의 수도는 카우나스였다. 위 볼셰비키와의 전쟁부터 폴란드와의 전쟁까지 있었던 세 차례의 전쟁을 리투아니아 독립 전쟁이라 부른다.
양차 대전 중의 기간에 빌뉴스는 폴란드의 영토에 속하게 되었지만 리투아니아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빌뉴스를 법적 수도, 카우나스를 임시수도라고 규정하였다. 그래서 1938년의
그러나 리투아니아는 여러 정치적 혼란 끝에 독립영웅 안타나스 스메토나에 의해서 군부독재로 변모한다. 그리고 국방력이 엉망이 된 끝에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40년, 일단 ' 자발적으로' 소련에 합병되어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이후 나치 독일이 이 지역을 침공하여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중 91%가 사망했다고. 전쟁 이전에 리투아니아에 살던 유대인 및 폴란드에서 피난 온 유대인까지 대략 206,800명 정도가 학살되었다. 결국 2차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면서 리투아니아는 다시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소련에 대항하던 게릴라들[28]은 물론 죄 없는 일반 양민들까지 정치범으로 몰려 시베리아 정치범 수용소에 강제수용당한 것은 리투아니아의 슬픈 흑역사. 이런 리투아니아의 슬픈 역사를 보고 싶다면 수도 빌뉴스에 있는 KGB박물관을 꼭 방문하길 바란다.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인 1991년에 노래 혁명을 통해 독립했다. 1989년 발트 3국이 독립하기 전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를 거쳐 빌뉴스로 이어지는 약 600km를 수 백만 명의 사람들이 인간 띠를 이은 '발트의 길'은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유명하다. 발트의 길은 동원된 인원 수와 인간 띠가 이어진 거리가 그 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이렇게 소련에게 당한 게 많음에도 소련 시절 잔뜩 만들어둔 블라디미르 레닌 및 이오시프 스탈린 동상과 흉상은 하나도 없애지 않고 유료 공원(!)에 전시하고 있다.
2004년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와 함께 유럽 연합에 가입했고 같은 해에 NATO에도 가입했다. 현재에도 유럽연합과 나토 양쪽 다 가입한 회원국이다.
7. 관련 항목
[1]
이전에 몇몇 선교사들을 보내 기독교를 전파하려 했지만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했다. 사실 이들이 발트족들이 신성시하는 숲의 나무들을 베고 강압적으로 기독교를 전파하려 드니 당연히 원주민들 입장에선 신성모독으로 여겨져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2]
몽골 제국의 계승제국들은 자신들의 식민지들이었던 키예프 루스에 해당하는 동유럽 국가들을 식민지배하면서 직접 식민통치하기도 했었지만, 워낙 광범위한 식민지를 다스려야되기 때문에 직접 식민통치와 간접 통치 방식를 병행하면서
세금과 전쟁
포로,
노예, 자원 등을 약탈하는 것는 식으로 동유럽 국가들을 식민지배 했다.
[3]
이러한 역사 때문에
리투아니아는
유럽 국가인데도 불구하고
십자군을 좋게 보지 않는다. 다른 유럽국가에서는 십자군에 대한 낭만과 환상이 있는데 반해, 리투아니아에서는 자신들을 핍박한 침략자의 모습으로 묘사한다. 리투아니아의 역사극이라던가 설화 같은데서도 이러한 모습이 많이 나온다.
[4]
1336년에는
필레나이 요새에서 기사단과 전투를 벌이던 리투아니아군과 주민들이 기사단에게 노예로 팔려가지 않으려고
함락 직전에 집단자살했다. 근현대에 필레나이 군민의 최후는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들에게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상징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5]
발트 다신교는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농민들에게 (
기독교를 믿으면서 동시에 발트 전통 신앙도 믿는) 이중 신앙의 형태로 살아남는다.
[6]
폴란드어 이름은 야기에우워.
[7]
로무바(Romuva)라고 불렀는데, 현대 리투아니아의
고대 신화 재현운동을 하는 단체 이름이기도 하다.
[8]
자세한 내용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항목 참조
[9]
요가일라의 차남. 형은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였는데 형이
바르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폴란드 국왕으로도 즉위했다.
[10]
이걸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아담 미츠키에비치였다. 이 사람은 도회지 리투아니아 귀족 출신이라, 리투아니아 출신임에도 리투아니아어 시는 없고 폴란드어로만 시작을 하는 시인이라는 복잡한 정체성을 지니게 되었다. 때문에 아담 미츠키에비치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서로 자기네 시인이라 자랑하는 모습이 있다. 일단은 폴란드 문화원이 아담 미츠키에비치를 선점하면서, 대외적인 이미지는 폴란드 이미지가 강하다. 추가로 고향이 지금
벨라루스 영토라, 벨라루스에서도 은근히 자기 시인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다.
[11]
18세기 무렵 남자 농노는 200루블, 여자 농노는 100루블에 매매되었는데 반해서, 귀족들이 타고 다니는
말의 가격은 500루블이었다. 당시 연방의 귀족들이 농노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12]
남유럽으로 치면
이베리아 연합이 형성될 당시
포르투갈 왕국 귀족들은 이를 기뻐했지만 훗날 포르투갈이
스페인으로부터 각종 차별을 받은 것 때문에 현대
포르투갈인이 이베리아 연합 시절을 좋게 평가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포르투갈 왕국이 무력을 통해 스페인으로 독립한 것과 달리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또다른 외세들에 의해
폴란드 왕국과 함께 멸망하여 자신들의 힘으로 폴란드로부터 독립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13]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부터
미사와 전례를
라틴어 대신 자국어로 거행할 수 있게 되었다.
[14]
리투아니아인 학생들은 보통 일부러
독일인처럼 보이려고
독일어로만 말하며, 자신이 리투아니아인인 걸 숨기려고 했다.
[15]
독일어로는 메멜란트(Memeland)라 부르는, 현재의
클라이페다 일대.
[16]
폴란드어 이름은 미코와이 라지비우
[17]
칼 9세는 연방의 국왕이었던 조카
시기스문드를 폐위시키고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다.
[18]
벨라루스어 이름은 얀 카롤 하드케비치, 리투아니아어 이름은 요나스 카롤리스 호드케비추스.
[19]
리투아니아의 아스티카스 가문에서 폴란드인 귀족들과 통혼하면서 분가한 가문이다.
종교 개혁 시기 칼뱅교회 등 개신교로 개종하였으나 이후 상당수의 가문 구성원들이 가톨릭으로 재개종하였다.
[20]
리투아니아인 가문은 아니고
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루테니아인 출신 가문이다.
[21]
수세기 전에
튜튼 기사단에게 정복당해 독일화가 완료된
동프로이센의 메멜 지역 제외.
[22]
만약에 리투아니아인 농부들의 이중 신앙이 아니었으면, 구전으로 전해온 발트 신화의 형태가 오늘날까지 전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23]
가톨릭 교회의 본산인 이유도 있고, 리투아니아 전설에 따르면
네로 황제 때 일족과 북쪽으로 떠나 리투아니아 땅에 정착한 팔레몬이 리투아니아인의 조상 중 한 명이라고 한다)
참고).
[24]
원래 샤울랴이 일대는 15세기 무렵에는 요가일라의 가톨릭 개종 정책에 가장 반감이 심했던 지역이었다.
[25]
제1차 세계 대전 와중에
소비에트 러시아와
독일 제국이 맺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참조.
[26]
원래 리투아니아령이었으나 1918년 7월 18일
페르디낭 포슈가 제안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경선에서 폴란드령으로 정한 지역이다. 오늘날에도
양국간 국경선으로 유지되고 있다.
[27]
당시에는 폴란드인과 유대인이 다수였다
[28]
약 6만명 가운데 2만명은 필사적으로 죽기 아니면 싸우기로 굴자 대대적으로 군대를 보내 마구잡이로 폭격하여 아주 몰살시켰다. 그리고 나머지는
시베리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