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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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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전 지역 발령일 : 2023.10.19
레바논 남부 접경지역(4km) 제외일 : 2024.08.07
파일:모로코 국기.svg 모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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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하라 모래방어벽 동쪽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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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모리타니아 여행경보_2024.07.01.png
누악쇼트, 누아디브, 인시리, 트라르자 및 아다르(우아단까지 일부지역)를 제외한 전 지역
2024년 7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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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사우디아라비아 여행경보_2020.01.25.jpg
사우디-예멘 국경 인근 180km 지역 (슈케이크(Shuqaiq), 아브하(Abha), 카미스 무샤이트(Khamis Mushait)市 포함)
국경 인근 80km 지정일 : 2017.04.21
국경 인근 180km으로 확대 지정일 : 2019.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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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지역 (튀니지(테베사, 엘웨드 동부, 오아글라 동부), 리비아(일리지 동부), 니제르ㆍ말리ㆍ모리타니(타만라셋 남부, 아드라르 남서부, 틴두프 남서부))
기존 출국권고 발령일: 2016.07.29
6개주 산악지역(부메르데스, 티지 우주, 베자이아, 지젤, 부아라, 보르즈부아레리즈)에 대한 부분적 해제일: 2024.07.01
파일:이란 국기.svg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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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탄발루체스탄 주, 튀르키예ㆍ이라크 국경지역, 페르시아만 연안 3개 주(후제스탄, 부셰르, 호르모즈건(Hormozgan))
2019.12.03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스라엘- 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 팔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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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지구를 제외한 전 지역
2023.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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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북부 시나이 반도(1단계(다합•샴엘셰이크 지역, 카이로 등 나일강 유역 도시 지역, 마르트루~지중해 유역),2단계(서부 사막, 시나이 반도 남부 일부지역(성캐더린•타바)) 지역 제외), 리비아 국경으로부터 30km까지(국경도시 Salloum을 포함)
2023.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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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접경지역(까세린주 샴비산 일대 포함), 리비아 접경지역 및 크사르 길랜 이남 사막지역 전역
2023.03.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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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보 델가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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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부르키나파소 접경지역 (Pendjari 국립공원 및 W 국립공원)
201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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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줌부라市 제외 전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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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가두구, 보보디울라소 제외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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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수단·지부티 국경 25km 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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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그라이 주, 소말리 주, 베니샹굴-구무즈 주, 감벨라 주, 오로미아 주 일부 (East Welega, West Welega, Kelam Welega, Guji, Borena 지역), 암하라 주에서 티그라이주 30km 접경지역, 수단&에리트리아, 케냐&남수단 국경 10km 접경지역, 아파르주에서 티그라이주 10km 접경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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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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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소말리아 국경 10km 이내 접경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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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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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드 주, 아다모와 주, 북서부 주, 남서부 주, 최북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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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소말리아 국경 100km 이내 모든 지역, 나이로비 북부 이스트레이, 가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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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베리아ㆍ기니와 국경을 접한 서부 지역 (Denguele주, Montagnes주, Bafing주), 초로고(Tchologo) 및 붕카니(Bounkani) 주(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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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irut | بيرو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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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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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틀:국기|]][[틀:국기|]]
베이루트 주
면적 19.8㎢
인문환경
인구 433,249명 (2017년)
2,145,527명 (광역권)
정치
시장 자말 이타니
파일:베이루트 종교.jpg
성 게오르기우스 마론파 대성당과 알 아민 모스크
파일:external/countryandtownhouse.co.uk/Beirut-city-scape.jpg
알 아민 모스크
파일:베이루트 시청.jpg
시청
파일:베이루트 비둘기 바위.jpg
루슈 락

1. 개요2. 역사
2.1. 고대
2.1.1. 팍스 로마나 (베리투스)2.1.2. 로마법의 중심과 몰락
2.2. 중세
2.2.1. 십자군기 (바루트)
2.2.1.1. 연이은 전란2.2.1.2. 이벨린 가문의 본진2.2.1.3. 바누 부흐투르
2.3. 맘루크 왕조2.4. 오스만 제국
2.4.1. 아사프 가문2.4.2. 사이파 vs 마안 가문2.4.3. 마안 가문
2.5. 근대
2.5.1. 러시아의 침공 (1772, 1773년)2.5.2. 불안 속의 번영2.5.3. 베이루트 빌라예트
2.6. 현대
2.6.1. 독립 이전2.6.2. 독립 이후: 최후의 번영2.6.3. 레바논 내전2.6.4. 내전 이후
3. 기후4. 종교5. 교통6. 관광7. 사건 사고8. 자매 결연 도시9. 매체10. 기타

[clearfix]

1. 개요

레바논의 수도로 별명은 중동 파리이다. 두바이가 뜨기 전에는 이 도시가 중동의 허브였고 프랑스풍의 유럽 같은 분위기로 각광받았다. 행정구역 상 시의 인구는 43만이지만, 광역권의 인구는 시의 거의 5배인 214만 명이 밀집되어 있다. 면적은 약 20km²로 여의도의 7배가 조금 안된다.[1]

기원전 3000년에 세워진, 역사만 5000년이 넘는 유서 깊은 도시이다. 그만큼 오랫동안 중동, 지중해 지역에서 중요한 도시이자 무역의 중심지였다. 로마 시대에 페니키아 지방에서 가장 로마화된 도시로써 라틴 문학과 지중해권 유수의 법학교로 유명했다. 십자군 지배기인 13세기 중반부터는 이벨린 가문의 중심지로서 예루살렘 왕국 내에서도 독자적인 자치를 유지했다.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끝난 후 이 도시는 오스만 제국에 복속되어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이 지배했으며 튀르키예인들도 유입되었다. 튀르키예에게는 이 도시가 지중해 방면에 있어 중요한 요충지였다.

2. 역사

베이루트는 성 지크프리트가 용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절벽 위에 세워진 항구 도시이다. 기원전 3천년 신석기 시대부터 주거지가 형성되었고, 르발루아 양식 등 여러 중석기 도구들이 출토되었다. 가장 오래된 주거지는 베이루트 강에 위치한 하중도에 형성되었는데, 후에 퇴적으로 인근 땅과 이어졌다. 기원전 2000년경 페니키아 인들은 약 50cm 너비의 사암을 쌓아 항구를 건설했고, 도시를 페니키아어로 '우물' 혹은 '샘'을 의미하는 비루타(혹은 베로트)라 불렀다. 한편 구도심 서쪽 미나 알 호슨에서 발견된 BEY194 유적 역시 페니키아 항구로 추정되었으나 확실한 조사가 벌어지기 전에 문화부 장관이 각계의 반발에도 건설을 허가하며 2012년 파괴되었다. 비루타라는 지명은 기원전 15세기 이집트의 아마르나 서신에서 처음 등장했고, 당시 비루타 국왕은 암무니라였다. 그후 도시는 아시리아, 아케메네스 제국를 거쳐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2.1. 고대

파일:베이루트 로마 포럼.jpg
파일:베이루트 로마 욕탕.png
베리투스 포룸 유적.
로마 시기 도시에는 거대한 공공 건축물과 기념물들이 세워졌다.
로마 목욕탕.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와 데메트리오스 1세의 중흥기는 후자가 기원전 150년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의 반란으로 사망하며 종식되었다. 5년 후 적법한 계승자인 데메트리오스 2세가 발라스를 죽이고 집권했으나, 그 역시 여론의 분노를 샀다. 그러자 이듬해 발라스의 장군이던 디오도투스가 반란을 일으켜 안티오크를 장악하고 발라스의 4세 아들을 안티오코스 6세로 즉위시켰다. 다만 얼마후 안티오코스 6세는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디오도투스가 왕으로 즉위했다. 페니키아의 도시들은 이에 저항했고, 기원전 140년 디오도투스는 그중 하나인 비루타를 파괴했다. 다만 2년 후 데메트리오스 2세의 동생 안티오코스 7세가 디오도투스를 격파하며 연이은 10년의 내전은 진정되었다.

파괴되었던 도시는 아마 안티오코스 7세의 치세에 페니키아의 라오디케아(Λαοδίκεια ἡ ἐν Φοινίκῃ)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다.[2] 다만 북쪽으로 150km 떨어진 시리아의 라오디케아( 라타키야)와 구분하기 위해 '가나안의 라오디케아'로도 불렸다. 당시 그리스식으로 건설된 장방형의 도시는 현재까지 베이루트 구도심의 기본 구조를 이루고 있다. 기원전 129년 안티오코스 7세가 사망한 후 셀레우코스 조는 쇠퇴했고, 혼란에 지친 시리아 인들의 초청으로 기원전 80년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가 일대를 장악했다. 베이루트는 그의 직접 지배령이었고 아르메니아령 페니키아의 치소였다. 다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고, 시리아와 페니키아는 기원전 64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에게 정복되었다.

2.1.1. 팍스 로마나 (베리투스)

파일:베이루트 로마 유적 1.jpg
카르도 가도와 데쿠마누스 막시무스 대로의 교차로.
인접한 계단은 로마 시대 기독교 박해로 사망한 '40인 순교자의 계단'으로 불렸다.

로마 지배 하의 도시는 라오디케아 대신 페니키아 지명 비루타에서 유래된 '베리투스'로 명명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악티움 해전에서 활약한 제5 마케도니아와 제3 갈리아 군단의 퇴역병들을 도시에 정착시켰고, 기원전 14년 자신의 고명딸 율리아를 기념하는 '콜로니아 율리아 아우구스타 펠릭스 베리투스'라는 이름의 식민도시 (콜로니아)로 지정했다. 인근에 티레, 시돈과 같은 대도시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한때 로마에 맞선 적이 있었기에 그러한 전력이 없던 베리투스가 선택되었다. 콜로니아 지정 후 로마 시민권자들의 대거 정착으로 도시는 빠르게 로마화 되었고, 베리투스는 페니키아 지역에서 유일하게 라틴어가 주된 언어로 쓰이는 곳이었다. 한편, 도시가 헌정된 율리아의 남편이자 개국공신인 아그리파는 베리투스를 각별히 여겼다, 그는 장엄한 극장과 원형경기장을 지어 검투사 대결 등 각종 구경거리를 제공했고, 그외에 목욕탕과 회랑 등 많은 공공 건물들의 건설을 후원했다. 다만 그 규모에 비해 현재 남아있는 유적은 매우 적은 편이다. 인근 로마 제후인 헤롯 대왕도 도시에 포룸, 신전 등을 건설했다.

로마 시대에 기존 헬레니즘 기의 도시는 항구의 남쪽과 서쪽으로 확장되었고, 서기 1세기 무렵 시가지 북부에 세워진 공동 바실리카는 다양한 색깔의 코린트식 기둥들이 늘어선 99m의 너비를 자랑했다. 현재 총리궁이 위치한 사라이 (세레일) 언덕을 기준으로 그 동편에는 큰 규모의 목욕탕, 서북면에는 히드포룸 (키르쿠스)이 들어섰다. 4세기 로마 지리서에 의하면 베리투스는 안티오크, 티레 라타키아, 카이사레아와 함께 레반트 지역에서 가장 우수한 히드포룸을 지닌 도시였다. 베리투스의 히드포룸은 지중해권의 경제가 쇠퇴하는 5세기까지 기능했다. 대규모 공공 목욕탕은 점차 증가하여 4개의 군집을 이루었고, 그와 함께 다수의 개인 욕탕들이 증가하자 로마인들은 베이루트 강 상류로의 수도교를 세워 늘어나는 수요를 충족시켰다. 약 10km의 수도교를 통해 수송된 물은 현재 사라이(세레일) 언덕 기슭의 리아드 앗 솔흐 광장에 있던 거대한 집수장에 모인 후, 복잡하게 얽힌 납 혹은 점토관을 통해 다양한 목욕탕 저수조로 분배되었다. 목욕탕의 일부는 10세기까지 부분적으로 기능했다.

베리투스는 로마의 동방 속주들 중 가장 로마화된 도시로 여겨졌다. 이곳은 페니키아 해안의 로마 식민도시 4곳 중 하나였고,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완전한 유스 이탈리쿰(제국 세금 면제)이 주어졌다. 도시는 로마 개선문과 함께 거대한 성벽으로 보호되었고 내륙과 해안을 따라 연결된 효과적인 로마 가도 덕에 레반트 일대의 비단 거래와 포도주 생산의 중심이었다. 겪자 무늬로 지어진 거리는 다마스쿠스나 라타키아와 같은 당대의 대도시들과 거의 같은 넓이였다. 클라우디우스 황제 대에 이르러 베리투스는 바알벡(헬리오폴리스)을 포함한 베카 협곡까지 관할했다. 현재도 레바논 농경지의 절반 가까이가 위치한 베카 협곡은 기원전 1세기부터 로마령 시리아의 곡창지대였고, 여유분은 수도 로마에까지 수출되었다. 로마인들은 그 일대의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켰고, 농촌 행정구인 파구스 아우구스투스를 세웠다. 트라야누스 시대 베리투스는 거대한 포룸과 네크로폴리스를 지닌, 인구 5만의 대도시였다. 번영을 상징하듯, 바다에 면한 빌라 (저택)들의 바닥은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었고 현재 베이루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로마 황제들은 이렇게 완전히 로마화된 도시에 고급 문화의 발전을 촉진했고, 베리투스는 라틴 문학의 중심이 되었다. 로마 정착민 2세대인 네로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프로부스 (서기 25년경 출생)는 라틴 문법 및 문학과 철학의 대가로 제국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그외에 문법학자 헤르미푸스 등 일부 그리스인들도 두각을 드러내었다. 이렇듯 인문학의 중심이던 베리투스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후 3세기부터는 로마 법학의 중심으로 변모했고, 동시에 중요한 기독교 도시가 되었다. 3세기 말엽 설립된 베리투스 주교구는 안티오크 총대주교 하의 티레 대주교 산하에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주교는 후에 당시 제국의 수도이던 니코메디아의 주교를 역임한 에우세비우스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세례를 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동창이던 아리우스의 지지자였던 그는 4세기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궁정에서 아리우스파를 지지했고 339년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새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로 임명되어 2년 후 사망할 때까지 직위를 유지했다. 베리투스 주민의 로마인 정체성은 5세기까지 유지되었다.

2.1.2. 로마법의 중심과 몰락

파일:베이루트 깃발.gif
Berytus Nutrix Legum (베이루트, 법들의 어머니)
ㅡ 3세기 도시를 상징하는 라틴어 경구. 현재까지도 도시 문장에 아랍어 번역문[3]과 함께 적혀있다.

동로마 시대의 베리투스는 학문적,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의 번영을 이어갔다. 4-6세기 도시의 양대 정체성은 법학과 기독교로 대표되었고, 양측이 학문적으로 혼재한 곳이 바로 그 유명한 베리투스 법학교였다. 베리투스에 법학교가 언제 세워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고, 아우구스투스부터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까지 학자들 간의 이견이 분분하다. 그 위치 역시 불분명하다. 로마식 교육 시설인 오디토리아는 신전에 딸린 공립 도서관 옆에 지어졌는데, 전형적인 로마 도시 구조를 따른 베리투스에서도 마찬가지였고 5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학교가 '하나님의 성전' 옆에 있었다고 한다. 20세기 초엽 성 요르요스 성당들 (정교회 / 마론파) 사이의 시장을 발굴한 결과, 5세기 법학교 교사 파트리키우스의 묘비석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성 요르요스의 전신인 비잔틴 시기 아나스타시스 성당 부근에 법학교가 위치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확실한 것은 239년 니카사르 주교 그레고리우스 타우마투르구스에 의해 언급되었을 때에 이미 베리투스 법학교는 제국의 주요 법학 중심지였다는 것이다. 3세기 세베루스 왕조 시절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법학자이자 현지 페니키아 출신인 파피니아누스와 울피아누스가 그곳에서 강의했고, 베리투스 법학교 출신 변호사들과 법관들이 동방 속주들을 중심으로 제국 전역에서 기용되었다. 베리투스 법학교의 성장은 도시가 동방 속주들에 대한 로마 황제들의 칙령 보관소였던 것과 연관되어 있다. 수도에서 작성된 황제의 칙령들은 베리투스에 당도한 후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공표된 후 보관되었다. 이러한 기능은 서기 196년 처음 기록되었는데, 후에 보관소 부근에 세워진 법학교의 학생들은 최신 칙령들을 공부 교재로 삼을 수 있었다. 이는 베리투스 법학교가 카이사레아 알렉산드리아 등 다른 동방 도시의 법학교들이 지니지 못한, 차별화된 장점이었다.

파일:베이루트 동전.jpg
베리투스 유적에서 출토된 카라칼라 황제의 동전

3-4세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베리투스 법학교 학생들에게 고향에서의 각종 의무를 면제해주어 학업에 전념하도록 했다. 4세기 그리스인 연설가 리바니오스는 베리투스 법학교가 유복한 가문들의 젊은 학생들을 끌어모은다고 기록했고, 동시에 (그리스 문화권인데도) 교육상 라틴어가 쓰이는 것에 개탄했다. 다만 4세기 후반부터 본격화된 (셀레우코스 왕조에 이은) 2차 헬라화와 함께 도시의 주언어는 점차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대체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베리토스(Βηρυτός)로 불렸다. 한편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는 베리투스를 대주교구에 해당하는 메트로폴리스로 승격시켰고, 티레 관할이던 6개의 교구를 그 산하로 이전시켰다. 다만 이듬해 칼케돈 공의회에서 6개의 교구는 다시 티레 대주교에게 반환되었나 메트로폴리스 직위는 유지되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베리투스의 주교는 티레 대주교를 거치지 않고 안티오크 총대주교의 직접 관할에 놓였다.

5세기 무렵 베리투스 법학교는 제국의 법학교들 중 주도적인 위치에 올라 있었다. 그 교사들은 '교회의 스승들'로 일컬어질 만큼 존경받았고 동방의 법학 교육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425년 콘스탄티노폴리스 법학교가 그의 주요 경쟁 상대가 되었고, 두 학교는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아테네, 알렉산드리아, 카이사레아의 법학교들을 폐쇄한 후 제국의 유일한 법학 교육 기관으로 유지되었다. 전통적으로 정의의 집행자였던 로마 황제는 권력의 기반으로써 법학자들을 후원했다. 그중에서도 법학교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유스티니아누스는 베리투스 주교와 티레의 총독, 그리고 그 교사들에게 학교의 규율 유지를 당부시켰다. 25세 이전에 4년 과정을 수료해야 한다는 기존 제도가 5년제로 고정된 것도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한 것이었다. 5년 간의 학부 과정은 고전 법학 문서들과 제국 법령들에 대한 검토와 분석 및 판례에 대한 논의로 구성되었다.

한편 유스티니아누스가 로마법대전 편찬에 나설 당시 상당 부분이 울피아누스 등 베리투스 법학파에서 유래되었다. 이렇듯 베리투스 법학교는 테오도시우스와 유스티니아누스에 걸쳐 진행된 로마법의 성문화가 준비된 산실이었고, 533년 유스티니아누스는 그를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함께 제국의 3대 법학교로 승인했다. 그러나 551년 7월 9일, 페니키아 해안 도시들은 강한 지진으로 파괴를 겪었다.[4] 그중 베리투스에는 지진에 이어 해일까지 덮쳐 법학교를 포함한 시가지가 초토화되었고, 그 결과 각지의 학생들을 포함한 3만여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도시 재건을 위해 예산을 할당했고, 법학교는 임시로 시돈으로 이전되었다. 다만 최고의 교사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졌다. 그리고 560년, 베리투스에 이번에는 대화재가 발생했다. 재건이 한창이던 도시에 이는 결정적인 타격이었고, 제국의 경제난과 함께 다시 재건 시도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생존자들마저 기독교 교리 해석을 두고 대립했고, 635년 아랍인들에게 점령되었을 당시 동로마령 베리토스는 고작 마을 규모로 전락해 있었다.

2.2. 중세

이슬람 제국기에 베이루트는 다른 페니키아 도시들과 함께 준드 디마슈크(다마스쿠스 군구)에 속했다. 7-8세기 레바논 산지와 시리아 해안은 기독교 반란 세력인 마르다이트 (알 자라지마)의 수중에 있었고, 이들은 종종 해안의 도시들을 습격했다. 혼란은 동로마 측이 휴전 조건으로 1만 2천의 마르다이트를 본국으로 수송하고, 남은 세력도 708년 우마이야 왕공 마슬라마 이븐 압둘 말리크에 항복한 후 그의 군대에 편입되며 소멸했다. 그후 한적해진 레바논 산지에 3세기부터 로마의 동맹(포에데라티)으로써 시리아~요르단에 정착했던 아랍계 타누크 연맹[5]이 이주해왔다. (8세기 중엽) 압바스 칼리파 알 만수르는 그 족장들에게 동로마로부터 베이루트 일대의 해안을 지키고 교통망을 확보하게 했다. 족장들 중 한명인 아르슬란 빈 알 문디르는 759년 베이루트에 신-엘-필 공국을 세웠고, 이때 항구 주변 언덕에 이를 굽어보는 성채가 세워졌다. 8세기 말엽 칼리파 알 마하디의 강요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타나크 연맹은 10세기 말엽 파티마 왕조에 충성하며 이스마일파 시아 무슬림이 되었고, 그 칼리파 알 하킴과의 친분으로 드루즈로 최종 정착했다.

2.2.1. 십자군기 (바루트)

1099년 5월 19일 1차 십자군이 도시 북쪽의 나흐르 알 칼브를 지나자 베이루트 태수는 그들에게 농지를 건드리지 않는 대가로 식량, 황금, 안내인을 제공했다. 이에 반해 시돈의 영주는 십자군을 습격했으나 오히려 패배했고 이후 티레, 아크레 등지의 영주들은 베이루트의 관례를 따랐다. 1101년 9월 파티마 왕조의 팔레스타인 수복 시도로 벌어진 1차 라믈라 전투에서 베이루트 태수 사드 앗 다울라 알 카와시 역시 이집트군에 참가했다가 보두앵의 반격으로 패하고 전사했다. 10년이 지난 1110년 2월,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1세는 피사와 제노바 함대와 함께 베이루트를 포위했다. 5천의 관민은 공격군의 공성탑을 수차례 파괴하며 결사적으로 맞섰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5월 13일[6] 도시가 함락되자 흥분한 십자군은 저항에 대한 보복으로 가차없는 학살을 자행하며 본보기를 보였다. 십자군의 중요 항구 중 하나가 된 도시는 프랑스어로 바루트(Baruth)라 불렸다.

베이루트 함락 후 보두앵 1세는 자신의 플랑드르인 친척 풀크 드 기네스를 그 영주로 봉했는데, 1117년 그가 사망하자 도시는 다시 국왕령이 되었다. 그러던 1125년 고티에 1세를 시작으로 브리스바레 가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예루살렘 왕국의 갈릴리 공국 산하에 속한 베이루트 영주는 그 아래에 다시 요충지인 토론과 바니아스[7] 영주를 봉신으로 두었다. 한편 아들이 없던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2세는 장녀 멜리장드를 후계자로 정했고, 1128년 베이루트 영주 고티에 1세를 프랑스에 보내 그녀의 남편감이자 자신의 후계자를 모색하게 했다. 그렇게 다음 왕이 된 앙주 출신 풀크에 대해 현지 제후들은 반발했고, 멜리장드의 동생 알릭스가 안티오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풀크는 북상하여 왕국의 최북단인 베이루트에 당도했는데 곧 마주하게 될 트리폴리 백작 퐁스의 배신을 우려해 그곳에서 해로를 통해 안티오크로 향했다.

2차 십자군 당시 다마스쿠스를 포위한 현지 제후들은 곧 함락될 도시의 주인으로 베이루트 영주 기 1세를 지지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보두앵 3세와 독일, 프랑스의 군주들은 플랑드르 백작 티에리를 지지하며 맞섰다. 분열된 십자군은 결국 다마스쿠스 점령에 실패했고, 연합군은 해체되었다. 상심한 기 1세는 이듬해 사망했다. 1163년 3월에는 점차 강해지는 동로마 제국 장기 왕조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던 보두앵 3세가 베이루트에서 사망했다. 한편 브리스바르 가문은 베이루트 동남부의 타누크 계열 드루즈 세력인 바누 부흐투르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그에 지친 고티에 3세가 1166년 예루살렘 국왕 아모리 1세에게 영지를 매각하며 베이루트는 41년만에 왕실 직할령이 되었다. 이듬해 동로마 황족이자 키프로스 총독이던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훗날의 안드로니코스 1세)가 해임된 후 망명해오자 아모리는 그에게 베이루트 영지를 하사했다. 하지만 이듬해 안드로니코스는 5촌 조카이자 보두앵 3세의 과부인 마리아 콤니니와 사랑에 빠졌고, 사촌인 황제 마누일 1세의 소환에도 불응하고서 다마스쿠스의 누르 앗 딘에게 망명했다.
2.2.1.1. 연이은 전란
누르 앗 딘 이후 집권한 살라흐 앗 딘은 1179년 들어 대십자군 공세에 나섰고, 그의 조카 파루크샤는 바알벡을 거점으로 리타니 강을 따라 베이루트 근교 농지를 황폐화했다. 한편 예루살렘 왕국은 어린 군주 보두앵 4세가 등극한 후 섭정권을 두고 당파 갈등이 벌어졌고, 1182년 4월 섭정이던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가 왕국 진입을 일시 거부당하자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던[8] 베이루트에 체류하기도 했다. 그틈에 재차 공세에 나선 살라딘은 8월 수륙 양면으로 베이루트를 포위했다. 다만 그 주교 외드가 수비대를 이끌며 항전하고 보두앵 4세 및 33척이 십자군 함대가 구원에 나서자 철수했다. 그러던 1185-86년에 보두앵 4세와 5세가 연달아 사망하자 레몽과 대립하던 조슬랭 3세는 그를 속이고 아크레, 베이루트, 티레를 장악했다. 그후 조슬랭이 지지하던 기 드 뤼지냥이 즉위했고, 왕을 칭할까 고민하던 레몽은 반역자로 선포되고 베이루트 영지를 압수당하자 아내의 갈릴리 영지로 은퇴했다. 한편 아모리의 과부 마리아 콤니니와 결혼한 후 영향력을 얻은 발리앙 드 이벨린 역시 충성 서약을 거부하고 떠났다.

1187년 봄, 기 드 뤼지냥과 레몽 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전자의 명목상 장인 발리앙은 중재에 나섰으나, 레몽이 협상에 응하는 조건으로 베이루트 반환을 제시하자 기가 반발하며 결렬되었다. 분열된 십자군은 같은해 여름 하틴 전투에서 살라흐 앗 딘에게 대패했고, 아크레와 시돈에 이어 베이루트 역시 북상하는 술탄에게 항복했다(1187년 8월 6일).[9] 살라딘의 완승으로 끝날 것 같던 전쟁은 티레가 버텨내고 1189년 여름, 석방된 기 드 뤼지냥이 약속을 어기고 아크레를 포위하며 전환기를 맞았다. 3차 십자군이 집결하며 아크레는 가장 중요한 전장이 되었고, 1190년 베이루트의 아이유브 함대는 십자군인 척하며 봉쇄를 뚫고 포위된 아크레에 보급했다. 그럼에도 아크레는 이듬해 십자군에 함락되었다. 한편 왕위를 두고 기와 대립하던 티레의 코라도는 그의 후계자가 되고 베이루트 ~ 티레 해안을 지배한다는 합의를 이루었다. 그러던 1191년 말, 3차 십자군의 지도자 리처드 1세가 예루살렘 국왕을 칭하려 하자 코라도는 살라딘에 접근하여 자신이 왕이 된다면 베이루트 ~ 티레에만 만족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5년간의 전쟁에 지친 살라딘은 1192년 들어 협상에 나섰고, 그의 동생 알 아딜은 3월 리처드와 만나 참십자가 반환 및 자파(야파) ~ 베이루트의 해안 양도를 제안했다. 예루살렘 회복을 원하던 리처드는 이를 거부했고, 코라도를 암살한 후 7월 26일 아크레에 당도하여 베이루트 공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살라딘이 남쪽의 야파를 공격하자 리처드는 다시 남하했다. 그후 양측은 휴전했고, 예루살렘 왕국은 티레 ~ 야파의 해안에 재건되었다. 1192년 가을, 리처드가 떠난 후 베이루트를 들른 살라딘은 안티오크 공 보에몽 3세와도 휴전을 맺었다. 이듬해 살라딘이 사망한 후 내전이 터지자 독일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그 주요 지휘관인 브라반트 공 하인리히 1세는 1197년 9월 시돈을 점령한 후, 플랑드르 병력과 함께 북상했다. 10월 24일 해적 출신의 베이루트 아미르 우사마는 저항을 포기했고, 베이루트는 10년만에 십자군령이 되었다. 이로써 예루살렘 왕국은 베이루트 ~ 아르수프의 해안선을 확보했다. 그리고 1204년 술탄 알 아딜은 십자군과 휴전을 맺으며 야파 반환과 함께 그들의 베이루트와 시돈 영유를 인정했다.
2.2.1.2. 이벨린 가문의 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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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루트 이벨린 성채 유구. 기존 8세기 요새를 확장했고 6m 너비의 해자로 보호되었다 상세한 설명

이로써 1204년 십자군 영토는 1192년 살라딘의 제안대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발리앙의 아들이자 예루살렘 왕국의 원수 직을 맡고 있던 장 드 이벨린은 이복누이 이사벨의 지지 하에 수복된 베이루트의 영주가 되었다. 장은 1209년 결혼을 통해 아르수프 영주가 되는 등 이벨린 가문의 세력을 불렸다. 1224년 장은 키프로스의 섭정인 동생 필리프를 방문했는데, 이벨린 가문과 나머지 파벌 간에 열린 토너먼트 행사에서 반칙 여부를 놓고 분쟁이 일어 뤼지냥 파벌의 아모리 발라리가 이벨린 가문의 상대를 덮쳐 불구로 만드는 일이 있었다. 그후 필리프가 복수를 천명하자 장은 조사를 명분으로 아모리 발라리와 함께 베이루트로 돌아갔다. 1227년 필리프가 사망하자 장은 키프로스의 섭정도 겸했다. 이듬해 6차 십자군과 당도한 신성 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역대 황제|황제 겸 시칠리아 국왕 프리드리히 2세는 장을 연회에서 체포, 키프로스의 세금과 베이루트 영지를 요구했다. 장이 침착하게 변호하자 프리드리히는 그에게 명목상의 복속을 서약시킨 후 석방했다. 그후 일시적 무력 충돌 끝에 반이벨린 측의 아모리 발라리가 키프로스의 바일리(재상)가 되었다. 그후 장은 아크레 귀족회의에서 베이루트 영지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변호했다.

베이루트 귀속 문제는 20여년 간의 제국파 ( 기벨린)-이벨린 분쟁(롬바르드 전쟁)의 시작이었다. 1229년 프리드리히가 귀로에 오르자마자 장은 키프로스의 아모리 발라리를 공격해 격파했다. 1231년 가을 프리드리히는 새 십자군이라며 필랑기에리 휘하 2천여 병력을 파견했다. 필랑기에리는 대세가 기운 키프로스 대신 베이루트를 공격했다. 장이 병력 대부분과 출정했기에 시타델에만 소수의 수비대가 있었고, 그를 이끈 주교는 항복했다. 1232년 봄, 키프로스 국왕 앙리 1세와 트리폴리 부근에 상륙한 장은 베이루트를 기습했고 80명의 기사들과 수비를 맡은 아모리 발라리는 도주했다. 그후 필랑기에리의 동생 로타르가 재차 베이루트를 포위했다. 그럼에도 장은 카이사레아의 조카 장 드 브리스바르와 함께 제국파의 거점 티레로 남하했고, 결국 로타르가 그곳으로 소환되며 포위는 풀렸다. 참고 자료 그후 키프로스에서 제국군을 축출한 장은 1236년 초엽 사망했다. 장남 발리앙이 베이루트, 차남 장은 아르수프를 계승했다. 발리앙은 1243년 티레의 필랑기에리를 축출, 롬바르드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했다.

1246년 예루살렘 섭정에 오른 앙리 1세는 발리앙에게 전권을 부여했고, 그의 사촌 장을 공석이 된 야파-아슈켈론 백작에 봉하며 이벨린 가문은 사실상 예루살렘 왕국을 장악하게 되었다.[10] 그 중심인 베이루트는 아크레 다음으로 번영했고, 이벨린 궁전이 세워졌다. 1247년 발리앙이 사망한 후 두 아들인 위그와 장 2세가 차례로 계승했다. 한편 기사단이나 안티오크 공작과 달리 예루살렘 왕국은 남하하는 몽골군에 호의적이지 않았고, 발리앙은 템플러들과 몽골령 갈릴리를 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다만 몽골군에게 파괴된 시돈, 티레와 달리 베이루트는 그 공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후 이벨린 가문은 아인잘루트 전투 당시 맘루크 왕조의 승리에 일조했고, 이에 술탄 쿠투즈가 가릴리 반환을 약속했다. 다만 1261년 장 2세는 다마스쿠스에 있던 후임 술탄 바이바르스를 방문해 약속 이행을 청했으나 허사였다. 1264년 장 2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장녀 이사벨라가 계승했다.

1265년 술탄 바이바르스는 카이사레아, 아르수프를 함락하며 대십자군 공세에 나섰다. 이듬해 이사벨라 등 제후들은 휴전을 청했으나 바이바르스는 이를 묵살하고 사파드를 함락했다. 한편 이사벨라와 결혼한 키프로스 국왕 위그 2세가 1267년 맘루크 선박을 나포하자 바이바르스는 베이루트의 사절을 위협했다. 이에 이사벨라는 승조원 석방 및 손해 보상을 약속, 이듬해 이행하며 위기를 넘겼다. 그후 자파, 안티오크 등이 함락되고 트리폴리가 지속적으로 습격당하는 중에도 이사벨라는 7차 십자군 소식에도 불구하고 바이바르스와 단독으로 강화를 맺었다. (1269년 5월) 한편 위그 2세가 사망한 후 한동안 독신이던 이사벨라는[11] 7차 십자군에 동행했던 영국인 기사 하모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는 1년도 안되어 사망했고, 바이바르스를 이사벨라와 베이루트의 후견인으로 지목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키프로스-예루살렘 국왕 위그 3세는 이사벨라를 납치해 휘하의 제후와 결혼시키려 했고, 이에 바이바르스는 베이루트 공격을 시사하며 위협했다. 도시의 참사회와 템플 기사단마저 술탄을 지지하자 위그는 그녀를 석방했다.

그후 이사벨라의 신변 보호 명목으로 베이루트에는 일시적으로 맘루크 수비대가 배치되기도 했다. 다만 바이바르스는 이를 기회로 도시를 점령하지는 않았고, 이사벨라에 대한 후견인 역할에 만족했다. 1274년부터 이사벨라의 모친 알리스가 섭정을 맡으며 베이루트는 안정을 되찾았다. 1276년 이사벨라는 명목상의 카이사레아 영주 니콜라와 결혼했는데, 그 역시 이듬해 키프로스에서 살해되며 그녀는 3번째로 과부가 되었다.[12] 1278년 이사벨라는 기욤 발라리와 결혼, 이번에는 4년간 유지되었으나 1282년 이사벨라는 자녀 없이 사망했다. 그녀의 동생 에쉬브와 음프헤 드 몽포르 부부가 계승했다. 한편 위그 3세는 1277년부터 시칠리아 국왕 샤를 드 앙주의 수중에 있던 아크레 수복을 위해 1283년 여름 그곳으로 향했다. 다만 강풍으로 8월 1일 대신 베이루트에 정박했고, 곧 티레로 남하했다. 11월 그 영주인 장 드 몽포르가 사망하자, 베이루트의 음프헤가 계승했다. 위그는 그가 후사 없이 사망할 시에 왕령지가 된다는 조건 하에 승인했는데, 이는 3달 후 실현된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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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0년 옛 로마 목욕탕 자리에 세워진 성 (세례자) 요한 성당. 1291년 맘루크 점령 후 알 오마리[14] 사원으로 전환되었다.

그후 에쉬브 드 이벨린은 한동안 재혼하지 않고 베이루트를 안정적으로 다스렸고, 티레의 영주 마가렛과 함께 대표적인 여성 제후였다. 1285년 봄, 맘루크 술탄 칼라운이 북상하자 그녀들은 휴전 의사를 표하는 저자세를 보였다. 이듬해 신임 국왕 앙리 2세는 부왕이 숙원이던 아크레 지배권을 확립했다. 그러던 1291년 술탄 칼릴이 최후의 공세를 준비하자 재차 전운이 드리웠다. 마가렛은 티레를 조카이자 앙리의 동생인 아모리에게 넘겼고, 에쉬브는 앙리의 다른 동생 기와 결혼했다. 그해 4월 맘루크 대군이 아크레를 포위하자 베이루트의 수비대 역시 그 방어를 위해 차출되었다. 그러나 5월 18일 아크레는 함락되었고, 아모리는 키프로스로 도주했다. 술탄 칼릴은 부관 슈자이에게 레바논 해안의 평정을 맡겼다. 한달에 걸친 포위 끝에 시돈을 점령한 슈자이는 7월 21일 베이루트를 포위, 도시 지도부를 소환했다. 그들은 순응하여 성을 나섰으나 체포되었고, 이에 남은 수비대는 철수했다(1291년 7월 31일). 도시를 접수한 슈자이는 이벨린 성채를 파괴하고 성당을 모스크로 개조했다.
2.2.1.3. 바누 부흐투르
십자군 시기 베이루트 동남쪽 산지, 즉 가르브에는 부흐투르 부족이 있었다. 그들은 8세기 레바논 산지에 정착한 타누크 연맹의 한 갈래로, 드루즈 이슬람을 믿는 아랍 부족이었다.[15] 1110년 베이루트 점령 당시 십자군은 성안 뿐만 아니라 수비를 도운 인근 산지의 타누크 계열 아미르 아두드 앗 다울라의 아르슬란 가문까지 학살했고, 다마스쿠스의 아타베그 툭테긴은 그 자리에 부흐투르 가문을 두어 십자군을 견제하게 했다. 1120년에는 자지라 출신의 마안 가문을 가르브 남쪽 쇼우프에 정착시켜 그들을 보조하게 했다. 베이루트에서 다마스쿠스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부흐타르 부족은 부리 왕조의 국경을 방어했고, 1147년 6월 족장 부흐투르는 가르브의 아미르로 봉해졌다. 이듬해 2차 십자군의 다마스쿠스 포위 당시 가르브 출신 드루즈 궁병들은 수비에 크게 일조했다. 1154년 누르 앗 딘의 다마스쿠스 점령 후 아미르 자흐르 앗 딘 카라마는 그에 복속했다. 1157년 술탄은 카라마를 책봉하고 쇼우프와 베카 협곡 등 영지를 늘려주었다.[16] 이후 카라마는 사르함무르(사르흐물) 성채를 근거지 삼아 해안의 십자군 습격에 나섰다.

상술했듯 부흐투르 부족과의 지속적인 전쟁은 1166년 베이루트 영주가 도시를 국왕에게 매각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얼마 후 카라마가 사망하자 베이루트 영주[17]는 그 장성한 세 아들들을 결혼식에 초대한 후 살해했다. 그후 십자군은 지도자가 부재한 사르함무르를 공격해 파괴했다. 카라마의 막내아들 자말 앗 딘 핫즈는 모친과 함께 사르함무르를 탈출했고, 누르 앗 딘은 그에게 작은 영지를 내렸다.[18] 한편 1187년 하틴 전투 후 베이루트에 접근하던 살라흐 앗 딘은 해안의 칼데에서 핫즈의 환영을 받았고, 그후 도시가 점령되자 핫즈는 가문의 복수를 완수했다고 여겼다. 살라흐 앗 딘은 부흐투르 가문의 가르브 지배권을 회복해주었다.[19] 다만 1197년 십자군이 베이루트를 재점령한 후 그 영주가 된 이벨린 가문은 배후 지역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있어 전임자들보다 더욱 적극적이었다.[20] 아이유브 왕조의 내전에 있어 부흐투르 가문이 다마스쿠스의 왕공 이스마일과 대립하던[21] 1242년 10월, 십자군은 베이루트 북쪽 케세르완에서 아미르 나즘 앗 딘 무함마드와 동생 샤라프 앗 딘 알리를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위기의 상황에서 핫즈 2세와 사드 앗 딘 키드르, 그리고 형제의 당숙 자인 앗 딘 살리흐가 공동 아미르가 되었다. 십자군의 중흥, 맘루크 왕조의 발흥과 몽골군의 침공 등 혼란의 시기에 그들은 모든 진영과 어느 정도의 우호를 맺는 중립 외교에 나섰다. 그 이중성에 분노한 시리아의 앗 나시르 유수프는 1255년 다마스쿠스 병력과 베카 계곡의 베두인들로 구성된 토벌군을 파견했으나 핫즈 2세는 아이타트(알레이)에서 그를 격파했다. 그후 핫즈 2세는 십자군과의 우호를 강화했다.[22] 한편 1259년 몽골에 복속했던 핫즈 2세는 이듬해 아인잘루트 전투 때에는 양 진영 모두에 파병하는 분산 투자[23](?)로 위기를 넘겼고,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 휘하에선 십자군에 대한 첩보 활동 등 그의 보조병으로 활약했다. 그럼에도 바이바르스는 여전히 부흐투르 조에 대한 의심을 늦추지 않았고, 그들은 외관상으로 순니 무슬림임을 드러내며 술탄의 호감을 사려했다. 1268년경 바이바르스는 세 아미르들을 트리폴리 백작과의 내통 혐의로 감금했는데, 1278년 후임 술탄 바라카 칸에 의해 석방되었다.

그후에도 부흐투르 조와 베이루트 간의 친선은 이어졌고, 1280년 영주 음프헤는 베이루트 출신 망명자들 송환 및 가르브 주민들의 베이루트 공격을 자제시키는 대가로 살리흐에게 슈에파트 부근 농지를 양도했다. 1288년 술탄 칼라운은 부흐투르 조를 포함한 레바논의 현지 족장들의 영지를 모두 압수했고, 이듬해 트리폴리 정복 이후 그 할카(비맘루크 기병) 주둔군의 수입원으로 두었다. 당시 주요 아미르였던 키드르는 아들 나시르 앗 딘 후세인에게 지도권을 넘겼다. 1291년 베이루트 등 레반트 해안을 정복한 술탄 칼릴은 해안 방어의 주력을 이루던 산지의 노련한 농민병들이 전통적인 족장들 휘하에서만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에 입각하여 부왕의 중앙집권화와 절충을 모색했다. 1292년 술탄은 부흐투르 왕조의 영지를 일부 회복시키며 동시에 그들을 할카 부대에 편성했다. 1294년 앗 나시르 무함마드 때에는 옛 영지 전부가 주어졌고, 이에 1299년 부흐투르 조는 3차 홈스 전투에서 패주하던 맘루크군에 피난처를 제공했다. 이는 케세르완의 드루즈인들이 패잔병들을 공격해 약탈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2.3. 맘루크 왕조

파일:맘루크 시대 시리아.jpg 파일:베이루트 이맘 하피지.jpg
맘루크 시대의 시리아 베이루트의 저명한 이맘 하피지(아부 아므르 압둘라흐만 알 아우자이) 영묘.
맘루크 시기 베이루트에 남은 거의 유일한 유적이다.

맘루크 시대 베이루트는 다마스쿠스 주에 귀속되었고, 북쪽의 비블로스부터는 트리폴리 주에 속했다. 제국의 2인자로써 시리아 부왕이던 다마스쿠스 총독들은 가르브의 부흐투르 가문과 우호를 유지했다. 부흐투르 아미르들은 그의 지위에 따라 맘루크 군대 내에서 일정 수준의 계급과 지휘권이 주어졌다. 14세기 초엽 나시르 앗 딘 후세인은 3인대장, 살리흐의 손자 샴스 앗 딘 카라마 이븐 부흐투르는 10인대장이 되었다. 1305년 후세인은 핫즈 2세의 아들들인 사촌 무함마드, 아흐마드와 함께 맘루크 군의 케세르완과 주르드 지역 드루즈-알라위-시아파-마론파 반란군 진압을 도왔다. 원정 도중 무함마드와 아흐마드 형제가 사망하며 후세인의 지위는 공고해졌다. 1306년 술탄은 부흐투르 아미르들에게 베이루트 항구 수비를 맡기며, 키프로스 왕국의 해상 습격을 당국에 알리고 케세르완의 튀르크멘 정착민들과 공동 대처하게 했다. 부흐투르 조는 다마스쿠스 북쪽 관구의 치소인 바알벡의 순환적인 할카 병력의 감독과 협력을 받았다. 1307년 카라마가 사망하자 후세인은 그의 직위와 영지를 얻었다.

1313년 술탄의 지시에 의한 토지조사로 일대의 영지들이 재배치되었고, 아미르들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영지로 전임되었다. 다만 후세인은 다마스쿠스 총독 탄키즈에게 부흐투르 병력은 고향 밖에선 소멸할 것이라며 설득하고 뇌물을 바쳐 회복했다. 결국 술탄은 부흐타르 조의 세습 영지를 승인했고, 이러한 봉건 체제는 남부 레바논 산지에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1314년 20인 대장이 된 후세인은 1348년 은퇴 시까지 수차례 키프로스-제노바 해군의 습격을 격퇴하는데 일조했다. 1326년 베이루트를 방문한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도시가 작지만 시가지가 아름다우며 대사원이 화려하다고 기록했다. 당시 도시 주변의 과수원에서 수확된 과일은 이집트로 수출되었다. 14세기 후반의 아미르 시하브 앗 딘 아흐마드는 쇼우프 지역의 자두 나무를 베어 화살을 만들라는 당국의 명령을 거역, 드루즈 농민들의 손실과 부역을 방지하여 그들의 존경을 얻었다.

1382년 아흐마드가 사망한 직후 제노바 해군이 베이루트를 습격했고, 그를 계승한 동생 사이프 앗 딘 야흐야는 이를 격퇴하지 못했다. 다마스쿠스 총독은 야흐야의 군사적 무능과 베이루트의 순니 무슬림과 현지 시아 무슬림 간의 갈등에서 후자에 동정을 보인 것을 들어 그를 고발했고, 양측은 대립하게 되었다. 한편 킵차크계 바흐리, 체르케스계 부르지 맘루크 간의 대립에 있어 야흐야는 후자를 지지했다.[24] 전자를 지지한 케세르완의 튀르크인들은 베이루트 주변 구릉지대[25]에 이어 부흐투르 조의 본진 가르브를 공격했다. 아이납, 아라문 등 부흐투르 거점들은 버텨내었고, 1390년 부르지 술탄 바르쿠크는 맘루크 정규군과 베카 협곡의 부족들을 원군으로 파견해 구원했다. 다만 바르쿠크는 부흐투르 조나 케세르완 튀르크멘의 영지를 그대로 유지시켜 전자의 지나친 성장을 견제했다. 한편 부흐투르 조는 베이루트에서 비단, 올리브 기름, 비누 등을 수출하고 이집트의 맘루크 관료들과 사업 관계를 맺으며 영리 사업을 육성했다. 그러던 15세기 전반 술탄 바르스바이가 아미르 이즈 앗 딘 사다카를 베이루트의 무타왈리(태수)로 봉했다.

이는 가문 최초였고, 동시에 이븐 야흐야는 아미르 아슈린(맘루크 20명의 지휘관)에 오르며 부흐투르 조의 권력은 극에 달했다. 1425년 이븐 야흐야는 인근 바누 알 하므라의 아미르와 함께 맘루크 조의 키프로스 원정에 동참했다. 그후 후자는 술탄에게서 베이루트의 자산을 수여받았는데, 그가 맘루크 장교에 의해 암살된 후 자산은 이븐 야흐야에게 주어졌다. 바누 알 하므라의 신임 아미르는 베이루트의 부흐투르 구역을 공격하고 베카 협곡에서 이븐 야흐야를 매복하려 했으나 다마스쿠스 총독에게 처형되었다. 1496년 부흐투르 조의 최고 아미르 자말 앗 딘 핫지는 다마스쿠스 총독을 설득해 베이루트 태수이던 바니 알 하느쉬의 아미르 나시르 앗 딘 무함마드를 해임하게 했고, 이후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1505년 나시르 앗 딘은 반란을 일으켜 베이루트를 습격, 자말 앗 딘의 비누 저장고를 파괴했다. 한편 부흐투르 조로부터 드루즈인들에 대한 영향력을 잠식해 가던 바누 마안의 아미르 파크르 앗 딘 우스만 역시 부흐투르 조에 대항하여 나시르 앗 딘을 지지했고, 1512년 맘루크 당국은 재차 그를 베이루트 태수로 봉했다.

2.4. 오스만 제국

1516년 시리아 정복 후 오스만 제국은 맘루크 시대의 시돈, 베이루트 윌라야를 합쳐 다마스쿠스 에얄레트(도) 산하의 시돈-베이루트 산작을 창설했다. 초대 산작베이는 기존 베이루트 태수이던 나시르 앗 딘이었다. 그는 4명의 드루즈인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통치했는데, 그들 중 세명은 마안 가문 출신이었고 나머지 1인은 타누크 연맹 출신이었다. 1518년 나시르 앗 딘은 아직 시리아에 있던 오스만 술탄 셀림 1세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한 후 처형되었다. 한편 1516년 오스만 정복 당시 부흐투르 조의 주요 지도자 샤라프 앗 딘 야흐야는 다마스쿠스에 있던 셀림 1세에게 복속을 표했고, 가르브의 영지를 승인받았다. 이때 마안 가문의 파크르 앗 딘 역시 복속을 표했다고도 하는데 불분명하다.

그러나 야흐야는 2년 후 나시르 앗 딘의 반란을 지지했다는 추궁으로 다마스쿠스 총독 잔비르디 알 가잘리에 의해 투옥되었다. 그후 베이루트에 대한 부흐투르 조의 영향력은 쇠퇴했고, 오스만 제국은 같은 튀르크계인 아사프 가문과 사이파 가문에게 레바논 해안을 맡겼다. 전자는 베이루트 북쪽 케세르완, 후자는 트리폴리 북쪽 아카르를 근거지로 삼았다. 베이루트 동남쪽 산지의 드루즈인들은 부흐투르 조에 이어, 그와 경쟁과 협력을 반복하던 마안 가문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레바논의 패권을 노렸다. 시돈-베이루트 산작은 외면상으로는 태수와 그 휘하 병력의 군관구였으나 실상은 현지 부족장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과전인 일티잠을 지녔고, 제국에 세금을 납부하지 않고 군사 원정에 참여하지 않는 등 자치를 누렸다.

2.4.1. 아사프 가문

파일:베이루트 아사프 모스크.jpg
아사프 모스크

1305년 맘루크 왕조의 다마스쿠스 총독 아쿠쉬 알 아크람은 레바논 산지를 토벌한 후 베이루트 북쪽 케세르완에 튀르크 인들을 정착시켰다. 3백여 기병을 이끌고 비블로스와 베이루트 사이를 순찰하던 그들 중 일부는 1365년 키프로스군의 알렉산드리아 습격에 놀란 맘루크 권신 얄부가에 의해 베이루트를 지키기 위한 다마스쿠스 병력을 지원하도록 도시에 배치되었다. 케세르완에 남은 튀르크 아미르 중 한명이던 아사프는 1516년 오스만 정복 후 셀림 1세에 의해 일대의 군수로 봉해졌고 비블로스와 베이루트의 수조권을 받았다. 이듬해 그는 가지르에 근거지를 세웠고, 1518년 부흐투르 조의 쇠퇴와 함께 레바논 산지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같은해 아사프가 사망한 후 아들들간의 내분이 벌어졌다. 이복형제인 하산과 후세인에게 패배한 카이트베이는 베이루트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다마스쿠스 총독 잔비르디를 매수할 자금을 모았다. 이에 하산과 후세인이 화해하려 남하했으나, 베이루트에 입성하던 그들은 카이트베이의 매복에 당해 피살되었다. 이로써 카이트베이는 케세르완과 비블로스, 베이루트를 장악했다.

비록 1521년 그를 동맹인 잔비르디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음에도 카이트베이는 별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기존 동맹이던 하바이쉬 부족을 영지에서 축출하는 오판을 저질렀고, 이에 그들은 하산의 아들 만수르[26]를 옹립해 반란을 일으켰다. 카이트베이는 베카 협곡의 베두인들과 연합해 이를 진압했으나 1523년 사망했고, 그는 아들이 없었기에 조카 만수르가 지위를 계승했다. 만수르는 하바쉬 가문을 중용했고, 사이파 가문을 아카르에 보내 카이트베이 사후 자립해 있던 슈아입 가문의 무함마드 아가를 견제하게 했다. 1528년 만수르는 휘하의 사이파 가문, 드루즈 산지의 마안 가문과 연합해 슈아입 가문을 격파하고 무함마드 아가를 암살했다. 그후 사이파 가문은 아카르에 봉해졌고, 만수르는 레바논 일대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후 1541년까지 그는 바트룬의 오스만 관료와 케세르완의 현지 쉬아 셰이크 등 경쟁자들을 죽이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특히 베두인 부족인 바누 알 하느쉬의 셰이크들을 자신이 가지르에서 개최한 연회에서 죽인 것이 유명하다.

만수르는 정치적 구심점이 없던 마론파 기독교도들이 순니 경쟁자들보다 덜 위협적이라 판단, 세금 감면 및 물가 인하 혜택으로 그들의 케세르완 정착을 유도해 현지 시아 무슬림들을 견제하게 했다.[27] 16세기 후반 만수르는 베이루트 ~ 바트룬에 이르는 해안뿐만 아니라 홈스, 하마 등 내륙 도시들의 수조권도 장악하여 시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자치 세력이 되었다. 비록 시간에 맞춰 오스만 제국에 세금을 납부했음에도 오스만 제국은 그의 지대한 영향력에 큰 염려를 표했다. 특히 1570년 오스만 제국의 키프로스 정복 당시 취득한 화기를 만수르가 그대로 쌓아두고 마론파 각료들을 통해 유럽 세력과 접촉하는 등의 모습이 당국을 긴장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1579년 술탄 무라트 3세는 트리폴리 에얄레트를 신설하고 사이파 가문의 유수프를 총독으로 봉하여 아사프 가문을 견제하게 했다. 기존 봉신과의 관계가 역전된 상황에서 1580년 만수르는 57년의 재임 끝에 사망했다. 만수르의 아들 무함마드는 1585년 이집트에서 조정(포르테)으로 향하는 상단이 아카르를 지날 때에 이를 약탈했다는 누명으로 코스탄티니예에 구금되었다.[28]

1585년 포르테의 해임에 대해 유수프가 항의하며 양측은 틀어졌고, 이에 1586년 무함마드는 석방되어 트리폴리를 제외한 에얄레트 전역에 대한 수조권이 주어졌다. 다만 포르테는 1589년 여름 마안 가문의 파크르 앗 딘 2세에게 베이루트 항구의 수조권을 하사하는 등 그를 견제했다. 한편 무함마드의 지나친 과세는 여론의 반발로 이어졌고, 특히 유수프는 조세 양도를 노골적으로 거부했다. 무함마드의 마론파 각료 기용을 의심하던 포르테는 1590년 유수프를 재차 트리폴리 총독으로 봉했고, 그는 아사프 가문의 마론파 각료들을 체포했다. 분노한 무함마드는 1591년 아카르로 진군했으나 바트룬과 트리폴리 사이에서 유수프의 지시에 의해 총으로 암살당했다. 아들이 없던 무함마드의 죽음은 아사프 가문의 종말로 이어졌다. 유수프는 후바이쉬 부족을 축출, 쉬아 세력과 연대하며 케세르완을 장악했다. 1593년 유수프는 무함마드의 과부와 결혼하며 아사프 가문의 본거지인 가지르와 베이루트까지 얻었는데, 그 둘은 다른 영지들과 달리 트리폴리가 아닌 다마스쿠스 에얄레트 소속이었다.

2.4.2. 사이파 vs 마안 가문

파일:레바논 유수프 파샤.png
1600년경 유수프 사이파의 영지

쇼우프, 티브닌 등 내륙의 산지들과 아크레, 시돈, 베이루트의 항구에서 염세(鹽稅) 징세권을 지니던 파크르 앗 딘 2세(파크렛딘)은 1593년 말엽, 다마스쿠스 총독 무라드 파샤에 의해 시돈-베이루트 산작 베이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법적으로 베이루트는 그의 관할에 있어야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유수프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그러던 1598년 다마스쿠스 총독 세이드 메흐메드 파샤는 파크렛딘에게 베이루트와 가지르를 수복하게 했다. 베이루트 북쪽 나흐르 알 칼브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파크렛딘은 유수프의 동생 알리를 전사시키며 승리했고, 베이루트와 가지르를 장악했다. 다만 1년 후 유수프는 파크렛딘과 협상, 막대한 배상금을 대가로 두 영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1602년 베이루트-시돈에 더하여 사파드 태수에 임명되며 막대한 권력자로 부상한 파크렛딘은 1606년 반란을 일으킨 알레포 총독 알리 잔불라드가 유수프 휘하의 오스만 군대를 격파하자 반군 측에 가담, 유수프로부터 재차 베이루트와 가지르를 장악했다. 이로써 마안 가문의 영지는 베이루트 ~ 자파 해안에 이르러 13세기 초엽 예루살렘 왕국을 연상시켰다.

다만 이듬해 무라드 파샤의 진압군이 승리를 거두자 파크렛딘은 그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쳐 처벌을 면했다. 그 무렵 파크렛딘의 아들 알리가 부친 대신 시돈-베이루트 태수가 되었다. 한편 1600년을 전후로 토스카나의 메디치 가문은 새로운 십자군을 추진하며 레바논 산지의 마론파 기독교도들을 후원했고 그들에 우호적이던 파크렛딘과도 접촉했다. 토스카나인들은 그와 새 십자군 및 베이루트에서의 무역 특권 등을 논의하려 했다. 이를 두차례나 거절하던 파크렛딘은 토스카나 측이 본래 잔발루드 반군[29]에 제공하려던 무기를 그에게 넘겨주자 협상에 응했고, 1608년 장래의 십자군 지원을 대가로 군사 원조 및 유사시 망명지 제공 등의 조건으로 토스카나 대공과 조약을 맺었다. 한편 1611년 무라드 파샤의 죽음과 함께 파크렛딘은 포르테의 호의를 잃었고, 마침 유럽과 이란 전선이 모두 평온했기에 오스만 제국은 다시 레반트에 개입할 수 있었다.

신임 그랜드 와지르 나수흐 파샤는 파크렛딘에게 세크반 (용병 부대)를 해산하고 그가 요새화한 앗 샤키프(보포르)와 수바이바(님로드) 성채를 반환하도록 명했다. 파크렛딘이 거부하자 다마스쿠스 총독 하피즈 아흐메드 파샤가 토벌에 나섰다. 파크렛딘은 한차례 반격에 성공했으나 대군을 이끌고 온 아흐메드 파샤가 시돈 항구 등 교통로를 봉쇄하자 궁지에 몰려 해상 봉쇄에 나선 오스만 제독을 매수한 후 토스카나로 망명했다(1613년 가을). 한때 파크렛딘과 동맹했던 사키파 가문은 오스만군의 샤키프 성채 함락을 도운 대가로 아흐메드 파샤로부터 베이루트와 가지르 영지를 하사받았다. 1614년 6월 포르테는 과거 아사프 가문의 견제를 위해 트리폴리 에얄레트를 세운 것처럼 시돈 에얄레트를 신설하여 마안 가문을 제어하려 했다. 그 총독은 마안 가문의 수조권을 쇼우프 산지에만 국한시켰다. 그러나 같은해 11월 나수흐 파샤가 사망한 후 1615년 쵸엽 시돈 에얄레트는 해체되었고, 한때 시돈 총독에게 베이루트를 반환했던 사이파 가문은 재차 도시를 장악했다. 얼마후 다마스쿠스의 아흐메드 파샤 역시 해임되었다.

2.4.3. 마안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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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파크르 앗 딘 2세의 영토

이로써 제국 내의 적들이 사라지자 파크렛딘은 포르테와 협상에 나섰고, 그의 아들 알리는 샤키프와 수바이바 성채 파괴 및 막대한 공납을 대가로 부친이 지녔던 시돈-베이루트와 사파드 태수로 봉해졌다(1615년 12월). 이듬해 신임 다마스쿠스 총독 체르케스 무함마드 파샤는 베이루트와 가지르를 마안 가문에 넘겼다. 사이파 가문은 마안 가문에 반대하는 드루즈 족장들을 지원헤 그들을 약화시키려 했지만, 드루즈 산지에서 벌어진 4차례의 전투는 마안 군대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이후 알리와 숙부 유누스는 사이파 가문을 격파, 유수프의 아들 하산을 포로로 사로잡고 베이루트와 가지르를 접수했다. 알리는 동맹인 타누크 부족들에게 베이루트와 가르브의 일티잠을 주었다. 하지만 그후 마안 가문과 타누크 부족 등의 동맹들은 베이루트의 재산 분쟁으로 갈등했다. 한편 포르테의 사면을 받아 1618년 가을 레바논으로 귀환한 파크렛딘은 드루즈 공동체를 재규합, 시아파 부족들을 토벌 및 회유하여 복속시킨 후 마침내 자신의 부재 동안 마안 가문을 괴롭히던 사이파 가문에 대한 원정에 나서 그 본거지인 아카르를 약탈했다.

히슨 아크라드( 크락 데 슈발리에)에서 농성하던 유수프는 파크렛딘에게 배상금과 함께 비블로스, 바트룬을 넘겨주었다. 이로써 과거 아사프, 사이파 가문과 마찬가지로 마안 가문은 트리폴리와 다마스쿠스 에얄레트에 걸친 영지를 지니게 되었다. 한편 사이파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파크렛딘을 불러들였던 포르테는 그가 강성해지자 다시 유수프를 트리폴리 총독에 봉하며 세력의 균형을 꾀했다. 그러나 1619년 파크렛딘은 로비 끝에 유수프를 일시 해임시키는 등 포르테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1621년 그는 포르테의 묵인 하에 출병하여 트리폴리 시타델을 포위했고, 유수프는 그에게 케세르완과 베이루트의 자산을 매각했다.[30] 1622년 파크렛딘은 트리폴리 총독위에 대한 우마르 파샤와 유수프의 대립에 있어 전자로부터 아카르와 브샤리를 영지로 얻었는데, 포르테가 후자를 트리폴리에 임명하고 그가 자신의 새 영지을 인정하자 우마르 파샤를 데리고 베이루트로 돌아왔다.

1623년 파크렛딘은 다마스쿠스 총독 무스타파 파샤를 사로잡는 대승을 거두었고, 1625년 유수프가 사망하자 그 이듬해에 트리폴리를 장악했다. 1629년까지 그는 바알벡, 홈스, 하마, 살라미아 등 시리아 중부를 장악했고 라타키아 ~ 야파에 이르는 해안을 지배했다. 1630년대 파크렛딘의 세력이 다마스쿠스를 위협하기에 이르자 오스만 제국은 1633년 쿠추크 아흐메드 퍄샤 하의 토벌군을 파견해 파크렛딘을 체포, 2년 후 처형했다. 한편 1633년 토벌 당시 드루즈 공동체 내부 마안 가문의 경쟁 가문인 알람 앗 딘 세력은 파크렛딘의 외가이자 동맹인 부흐투르 가문의 유력자들을 초청한 후 학살했다. 이로써 한때 레바논 중부를 지배한 부흐투르 가문은 멸족되었고, 마안 가문은 대부분 학살된 파크렛딘의 가족들 대신 동생 유누스의 후손들의 지도 하에 1697년 가계가 끊길 때까지 레바논에서 영향력을 유지했다.

파크렛딘의 지배기에 그의 중농 & 중상주의와 함께 베이루트, 시돈, 아크레 등의 항구들은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유럽인들에게 개방된 베이루트는 13세기 십자군 시대 이래 가장 큰 유럽발 정치, 경제적 침투를 겪었다. 베이루트와 시돈은 대유럽 비단 수출의 주요 거점이었고, 그를 중개하던 마론파 기독교도들이 왕래했다. 1594년 파크렛딘은 두 도시를 요새화했고, 상업 증진을 위해 칸(숙소 겸 창고)을 세웠다. 한편 1630년경 파크렛딘은 영지 내의 근대석 성채 건설에 있어 동맹인 토스카나 대공국에 도움을 구했다. 1631년 토스카나 대공은 설계자 프란치스코 키올리와 건축가 프란치스코 파그니 등의 전문가들을 파견했다. 베이루트에 있어 후자는 수로 및 교각 건설을 감독했고, 전자는 도시에 아랍과 토스카나 양식이 혼재된 궁전을 건설했다. 베이루트의 파크렛딘 궁전은 고유의 대리석 분수와 광활한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19세기 말엽에 이르러 이 시설들은 잔존하지 않았다.

2.5. 근대

파크렛딘의 몰락 후 1660년 포르테는 레바논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위해 시돈 에얄레트를 세웠다. 그후 그랜드 와지르 쾨프륄뤼 메흐메드 파샤가 레바논 산지로 원정하자 마안 가문과 동맹인 시하브 가문은 시리아 산지로 도주했다. 포르테는 마안 가문과 적대하던 알람 앗 딘 가문을 드루즈 공동체의 지도 세력으로 삼았다. 그러나 1667년 마안 가문의 아흐마드는 베이루트 외곽에서 그들을 격파하고 레바논 산지의 패권을 회복했다. 1674년 시하브 가문의 무사가 아흐마드의 딸과 결혼하며 양측은 동맹을 강화했고, 그들의 카이스 파벌은 알람 앗 딘의 예멘 파벌과 지속적으로 대립했다. 그러다 1697년 마안 가문의 후사가 단절되자 앞선 결혼으로 태어난 아미르 하이다르가 계승했고, 그의 시하브 가문은 1841년까지 드루즈 공동체를 이끌었다. 1711년 그는 아인 다라 전투에서 예멘 파벌을 격파하여 드루즈 공동체를 통합했고, 시돈-베이루트-트리폴리의 오스만 당국과도 친선을 유지했다.

1732년 하이다를 계승한 아들 물힘은 휘하의 탈후크 부족에게 베이루트를 습격하게 한 후, 이를 근거로 시돈 총독에게 도시를 맡은 부총독의 무능함을 지적함으로써 베이루트를 영지로 얻었다(1749년). 다만 4년 후 동생 아흐마드와 만수르에게 폐위된 물힘은 베이루트로 은퇴했다. 물힘의 아들 카심은 시돈 총독의 도움으로 숙부들에 도전했으나 실패했고, 물힘은 1759년 사망했다. 그후 아흐마드와 만수르 간의 내전이 터졌고, 시돈 총독은 베이루트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후자를 지원했다. 그 결과 아흐마드가 데이르 알 카마르로 은퇴하고 만수르가 드루즈 산지의 단독 아미르가 되었다. 1760년대 이집트를 장악한 군벌 알리 베이는 아크레를 기반으로 갈릴리를 통치하던 자히르 알 우마르와 동맹하고 시리아 진출을 꾀했다. 만수르 역시 그 동맹에 가입했다가 포르테의 문책을 당한 후 페위되었고 물힘의 다른 아들이자 오스만 제국과 친했던 유수프가 아미르로 추대되었다.

2.5.1. 러시아의 침공 (1772, 17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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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함대의 레반트 개입

알리 베이의 암살 이후 단독 해동에 나선 자히르 알 우마르는 1771년 시돈을 장악했다. 이듬해 유수프는 시돈 총독 다르위쉬 파샤와 도시를 포위했는데, 이에 자히르는 오스만 군대를 분산시키고자 러시아 함대에게 유수프의 영지인 베이루트의 포격을 의뢰했다. 유수프는 러시아 함대가 당도하기 전에 포위를 풀었다. 그럼에도 6월 18일 러시아 함대는 베이루트를 포격하기 시작했고, 21일 상륙을 시도했다. 그후 이틀간의 심한 폭격 후 23일에 러시아 군대는 베이루트에 상륙, 수시간 동안 시내와 바자르를 약탈하여 상품과 현금 등 약 55만 키르쉬어치의 약탈물을 얻었다. 러시아군은 28일 유수프가 배상금을 지급한 후에야 철수했다. 베이루트에 대한 자히르의 야심을 경계한 유수프는 다마스쿠스 총독 우스만 파샤에게 베이루트의 방어력 보강을 의뢰했고, 이에 그는 알리 베이를 배신한 제자르 아흐메트 파샤(알 자자르)를 도시의 무하피즈(수비대장)으로 삼아 마그레브 병력과 함께 파견했다.

제자르 파샤는 베이루트의 수비를 강화했고, 유수프는 20만 스페인 리알을 대가로 알 자자르를 죽이라는 이집트측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나 제자르 파샤가 포르테를 위한다는 명분 하에 베이루트를 자신의 근거지로 삼자 유수프는 그에게 퇴거를 명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유수프는 우마르 파샤에게 제자르 파샤의 퇴거 명령을 청했지만 역시 거부당했다. 우마르 퍄사는 알 자자르가 자히르로부터 베이루트를 잘 수비할 것이고, 그곳을 기반으로 반격에 나설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에 상관없이 영지를 빼앗겨 배신당했다고 여긴 유수프는 드루즈 병력을 조직해 알 자자르를 축출하려 했으나, 후자는 분열된 드루즈 부족들을 매수하고 이간질시켜 유수프의 군대를 와해시켰다. 이에 유수프는 알 자자르의 축출을 위해 자히르와 동맹했고, 이에 우마르 파샤가 토벌군을 파견했으나 자히르에게 격퇴되었다. 고무된 유수프는 자히르를 통해 러시아 함대의 지원을 얻어내었다.

1773년 7월 6일, 10척의 러시아 함대는 222문의 대포 및 1200명의 알바니아 용병대와 함께 베이루트 앞에 나타났다. 한달 간의 협상 끝에 유수프는 30만 키르쉬의 조공을 바치고 도시를 러시아의 보호 하에 두기로 했다. 그 대가로 러시아 제독 코주코프는 저번과 달리 베이루트를 약탈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8월 2일 포격이 시작되었고, 항구 일대와 성탑들이 파괴되었다. 그 굉음은 40km 남쪽 시돈에서도 들릴 정도였고, 아랍측 기록에 의하면 다마스쿠스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베이루트가 크게 파괴되었지만 심한 타격에도 제자르 파샤는 항복을 거부했다. 이에 러시아 포병들이 베이루트 인근에 상륙해 공격했고, 여러군데 성벽이 돌파되었지만 유수프는 도시를 그대로 돌려달라며 진격을 멈추게 했다. 그후 코주코프는 육해 양면으로 도시를 봉쇄하여 수비대를 항복시키려 했고, 자히르와 유수프는 베카 협곡으로 남하하던 트리폴리 총독의 원군을 격퇴했다.

9월 말엽 제자르 파샤는 협상에 나섰다. 코주코프 혹은 유수프가 자신을 처형할 것을 두려워하던 제자르 파샤는 자히르를 섬기는 조건으로 본인과 수비대의 안전 보장을 받은 후 항복했다(1773년 10월 10일). 제자르 파샤와 8백 마그레브인 수비대는 아크레로 호송되었고, 유수프가 도시를 장악했다. 포위 동안 34명의 전사자와 96명의 부상자를 낸 코주코프 제독은 유수프가 약속한 배상금의 전액 납부를 거절하자 드루즈 인질 만수르를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다만 유수프가 선금을 제공하자 그에 만족한 제독은 함대와 함께 귀환했고, 3백명의 알바니아 용병대를 남겨 가택연금된 만수르를 감시하고 도시에 주둔하게 했다. 알바니아 병력은 1774년 초엽까지 주둔했고, 시돈의 프랑스 영사에 의하면 그들은 러시아 국기를 계양하고 거대한 예카테리나 2세의 초상화를 주요 성문에 걸어 행인들이 경의를 표하게 했다고 한다.

2.5.2. 불안 속의 번영

파일:레바논 정세 1774.png 파일:베이루트 지도.jpg
1774년 자히르 알 우마르의 영토 오스만 시대 구시가지 출처

이로써 자히르는 베이루트 ~ 가자에 이르는 레반트 해안을 장악했으나 1775년 오스만군의 토벌로 아크레에서 전사했다. 우마르의 몰락 후, 그를 배신했던 제자르 파샤는 시돈 총독이 되었고 유수프는 베이루트, 슈우프, 비블로스, 베카 협곡의 영지가 주어졌다. 우마르를 토벌했던 오스만 제독 하산 파샤는 유수프에 대한 시돈 총독의 권력은 미리 핫즈 세금 징수에 국한되었음을 명시했다. 그러나 1776년 제자르 파샤는 유수프에게 3년치를 미리 납부할 것을 명하고, 후자가 반응하기도 전에 베이루트를 점령해버렸다. 이후 시하브 가문의 내전이 터지자 제자르 파샤는 누구든 자신에게 더 많은 자금을 바치는 자를 지원했고, 1778년 베이루트에서 출정하여 유수프를 비블로스에서 포위해 막대한 배상금을 얻어낸 후에야 철수했다. 1783년 내전에서 패배한 유수프는 베이루트로 온다면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제자르 파샤의 제안에 따라 도시로 향했으나, 당도 직후 체포되어 아크레로 압송되었다. 그곳에서 유수프는 제자르 파샤에게 복위시 막대한 배상금 납부를 약속해 석방된 후 드루즈 산지로 돌아가 재집권했다.

1788년 제자르 파샤는 유수프에게 약속 이행을 촉구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제자르 파샤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맘루크들을 지원했다. 맘루크 반란은 일단의 맘루크들이 제자르 파샤의 하렘과 간통한 것이 드러나 처벌당한 후 숙청이 가해진 것으로 촉발되었다. 베이루트의 마그레브 병력 지휘관인 알 자부리는 반군의 지도자인 살림을 죽이라는 제자르 파샤의 명을 거부하고 반란을 지지했다. 그러나 아크레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반군은 궤멸되었고, 이후 제자르 파샤는 유수프에 보복 원정을 가하여 베카 협곡 남부에서 그를 격파했다. 1789년 9월 제자르 파샤는 유수프의 먼 친척인 마론파 기독교도 바시르 시하브 2세를 아미르로 옹립했다. 유수프는 이듬해 재차 제자르 파샤를 설득해 권좌 회복을 노렸으나, 바시르 시하브의 요청에 의해 처형되었다. 제자르 파샤는 후에 오스만 해군에 의해 베이루트에서 축출되었으나 곧 지위를 회복했다.

제자르 파샤는 아크레를 제외한 다른 항구들처럼 휘하 맘루크들에게 도시를 맡겼다. 그의 지배기에 베이루트는 시돈, 티레, 라타키야, 트리폴리와 함께 아크레 다음가는 해군 기지였다. 농업과 무역의 성장으로 베이루트는 시돈, 아크레와 함께 번영했다. 그중에서도 베이루트는 그의 근거지인 아크레 다음가는 도시였다. 1804년 제자르 파샤가 사망한 후 술레이만 파샤 알 아딜이 시돈 에얄레트를 얻었다. 그러던 1819년 그가 사망하자 제자르 파샤의 동맹이던 레바논 산지의 바시르 시하브 2세가 잠시 도시를 수중에 넣었다가 전 트리폴리 총독 무함마드 아가 바르바르가 거점으로 삼기도 했다. 한편 1820년대 시돈 총독이던 압둘라 파샤는 전비를 확보하기 위해 시리아의 목화 수출을 독점하던 자신의 거점 아크레를 수입 또한 독점하게 했다. 그러나 이는 역효과로 이어져 유럽 상인들은 아크레 대신 베이루트로 몰렸고, 프랑스 영사관 역시 베이루트로 이전되었다.

이로써 베이루트는 다마스쿠스의 외항으로서 기능하며 시리아 해상 무역에 있어 아크레의 독점을 깨고 몇년간 일대의 무역 중심지로 번영했다. 1만까지 줄어들었던 인구 역시 점차 회복되었다. 포르테, 드루즈, 맘루크의 세 파벌이 도시의 지배권을 두고 싸우던 1832년 메흐메드 알리의 아들인 이브라힘 파샤가 이끄는 이집트군이 베이루트를 비롯한 시리아를 정복했다. 이집트와 동맹이던 바시르 시하브 2세는 베이루트와 시돈 등의 수조권을 얻었고, 도시는 이집트령 레바논의 주도로 중시되었다. 1840년 오스만 제국은 영국 등의 도움과 함께 반격에 나섰고, 찰스 네피어 휘하의 영국 함대는 8월 11일 베이루트 앞에 나타났다. 도시의 영국 공사 리처드 우드는 바시르 시하브 2세에게 이집트와의 동맹을 파기할 것을 설득했다. 다만 아미르는 레바논에 이미 3만에 달하는 이집트군이 주둔 중이고, 프랑스 영사로부터 프랑스군이 이집트를 돕기 위해 육로로 진군 중이라는 소문을 들은 후였기에 거절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도움은 외교적인 것에 그쳤다. 영국 측은 메흐메드 알리가 임명한 총독 술레이만 파샤에게 도시를 포기하고 시리아를 떠나라 통보했고, 주민들은 이집트 주둔군에 반기를 들었다. 다만 1만 5천에 달하는 이집트 병력에 비해 소규모였던 영국 함대는 스토포드 제독의 본 함대와 합류한 후에야 9월 11일 도시를 포격하고 1천 5백의 오스만 병력 등을 베이루트 북쪽 주니에에 상륙시켰다. 오스만 측에 가담한 바시르 시하브의 사촌 바시르 카심 등 일부 드루즈 군대도 그에 합류했다. 격전 끝에 9월 25일 베이루트는 거의 장악되었고, 10월 3일 이집트군은 철수했다. 8일 후 바시르 시하브는 오스만 제국에 항복했고, 바시르 카심이 아미르로 등극했다. 바시르 시하브는 포르테에 4백만 피아스터를 내고 프랑스에 망명하려 했지만 거절당했고, 결국 런던과 몰타의 선택지 중 후자를 택했다. 그는 150여명의 가솔들과 베이루트를 떠났고, 이듬해 시하브 가문이 축출되며 드루즈 산지는 내전에 돌입했다. 한편 몰타에서 11개월간 지낸 후 포르테의 사면을 받은 바시르 시하브는 이스탄불로 이주해 1850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2.5.3. 베이루트 빌라예트

1775년 아크레로 옮겨졌던 시돈 에얄레트의 주도는 오스만 재정복 직후인 1841년 베이루트로 이전되었다. 19세기 중반 들어 베이루트는 서구 열강들과 깊은 정치, 경제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베이루트의 비단 등 품목들에 대해 눈독을 들인 유럽인들은 그곳을 시리아의 주요 항구이자 무역 중심으로 변모시켰다. 열강들 중에서도 프랑스인들의 영향력이 가장 돋보였다. 이러한 지역 횡단 무역의 번성으로 수르소크 가문과 같은 상업 세력들이 득세하여 거래와 제조업 분야의 대가를 이루었고, 이로써 베이루트는 유럽 열가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주요 교역 상대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한편 19세기 들어 레반트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장악력은 약화되었고, 권력 공백을 틈탄 정치 종교적 갈등이 일었다. 1842년 메테르니히의 조언대로 술탄 압뒬메지트 1세는 베이루트의 총독에게 레바논 산지를 드루즈와 마론파의 두 자치 구역으로 분할하게 했다. 그럼에도 양측의 대립은 1860년 레바논 산지 분쟁으로 이어졌고, 드루즈인들의 학살을 피해 도주한 마론파 기독교도들이 정착하며 베이루트의 종교적 다양성이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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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루트에 진주하는 프랑스 군대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오스만 제국의 승인 하에 일대의 치안 회복을 명목으로 프랑스 군대가 파병되었다. 1830년대 이브라힘 파샤의 참모자이었기에 레반트 정세를 잘 알던 장군 보포르 드 오풀 휘하의 6천 병력은 1860년 8월 16일 베이루트에 상륙했다. 프랑스군은 1861년까지 주둔했고, 나흐르 알 칼브에 기념비를 새겼다. 유럽인들의 왕래 및 정착과 함께 베이루트는 더욱 근대적인 도시로 변모해갔다. 대표적인 예시로 현재 아메리칸 대학교의 전신인 미국 개신교 선교학교가 1863년 설립되었다. 주민들은 지역의 안정을 위해서는 무역에 종사하여 경제적 번영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현지 기업가들의 청원에 시리아 총독 메흐메드 라쉬드 파샤는 베이루트 시의회 설립을 인가했다. 이는 오스만 제국 하의 아랍 지역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지역 의회였다. 도시 유지들의 모임에서 선거를 치러 구성된 의회는 향후 수십년간 베이루트의 행정에 중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1864년 행정 개편으로 시돈 에얄레트가 폐지되자 잠깐 다마스쿠스의 시리아 빌라예트에 편입되었던 레반트 해안은 1888년 베이루트 빌라예트로 개편되었다. 이는 라타키야, 트리폴리, 베이루트, 아크레, 베카 산작으로 구성되었다. 주도 베이루트는 이미 영국 회사가 식수를, 프랑스 회사가 가스를 공급할만큼 국제적인 도시였다. 1894년 프랑스 기술자들은 도시에 근대식 항구를 세웠고, 1907년에는 다마스쿠스와 알레포로 이어지는 철도가 놓였다. 베이루트와 마르세유 간에는 항상 무역선이 왕래했고 도시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은 다른 유럽 국가들을 능가하게 되었다. 1911년의 베이루트의 인구는 3만 6천의 무슬림, 7만 7천의 기독교도, 2천 5백의 유대인, 4백의 드루즈인과 4천 1백의 외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20세기 초엽 베이루트 시장이던 살림 이븐 알리 살람은 근대적인 삶을 영위하며 도시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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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경 사라이(세레일) 언덕

근대 들어 베이루트의 중심은 항구의 배후 지역인 세레일에 형성되었다. 17세기 아미르 파크르 앗 딘 2세가 권력의 상징으로 감시탑(부르즈 움무 답부스)을 세운 후 일대는 베이루트의 권력 중심지로 성장했다. 19세기 초엽 레바논을 장악한 이집트 사령관 이브라힘 파샤가 주둔한 후 1853년 오스만군의 병영이 건설되었고, 군사 병원이 추가되었다. 베이루트 총독 파우드 파샤가 기존 병영을 2층 건물로 증축하여 총독 관저로 삼았다. 1863년에는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성 루이 카푸친 성당이 세워졌고 1898년 오스만 술탄 압둘 하미드 2세는 건축가 요세프 아프티모스의 설계에 입각한 세레일 시계탑을 건립했다. 프랑스 위임통치 기간에 군사병원은 법원으로 개조되었다. 한편 총독 관저는 1991년 개발과 재건 위원회를 위한 3층 건물로 개조되었고 1999년에는 총리 집무실 겸 관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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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확장 과정

2.6. 현대

2.6.1. 독립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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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시리아 양식의 베이루트 시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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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시대 도시 계획의 산물인 순교자 광장(ساحة النجمة) 부근의 시계탑 7거리(Place de l'Étoile)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약체화된 오스만 제국은 속주 여러 곳을 유럽 세력에게 두들겨 맞으며 빼앗기거나 할양해주며 국토가 쪼그라들었다. 이미 이집트- 수단은 무함마드 알리의 독립으로 떨어져 나갔고 리비아 아프리카 식민지들도 이탈리아- 오스만 제국 전쟁으로 이탈리아에 넘겨야 했으며 이 곳도 결국 마그레브와 함께 프랑스에게 떼 주었다. 프랑스는 레반트 속주인 레바논, 시리아를 복속시켰다. 한편 1차대전 중 아랍 대봉기 당시 오스만 조정이 다마스쿠스와 베이루트에서 아랍 민족주의자들을 처형한 일이 있었다. 1916년의 그 사건을 기리며 과거 러시아군의 포격을 상징하던 대포 광장은 순교자 광장으로 재명명되었다.

2.6.2. 독립 이후: 최후의 번영

1943년 레바논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는 중동의 금융과 교육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고[31] 동서양이 만나는 곳으로 불리며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곳이었다. 1959년에는 제3회 지중해 게임을 개최할 정도였다. 더구나 1970년대에는 오일 머니 아라비아 반도 각 국가에서 베이루트의 금융가와 부동산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경제 호황을 맞았고 특급호텔들이 줄줄이 지어졌다. 도시가 빠르게 팽창하면서 역사적인 건물들이 현대적인 고층건물들로 재개발되었다. 자연히 베이루트는 눈부신 스카이라인을 가졌다. 이 땐 아직 아랍에미리트가 발전하기 전이라 중동 일대의 금융업은 베이루트에 의지했다.

2.6.3. 레바논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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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무슬림 구역과 기독교 구역으로 양분한 녹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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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베이루트 내전 1982.jpg
PLO의 무기고로 쓰이던 카밀레 샤몬 시립 운동장, 이스라엘군의 공습 후

그러나 레바논 내의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증폭되었고, 경제 성장의 과실이 제대로 분배되지 않으면서 결국 1975년 레바논의 마론파 가톨릭 이슬람으로 내전이 발발하고 만다. 1977년 내전의 첫번째 시기가 끝났지만 이때 도시는 동쪽은 기독교, 서쪽은 이슬람교로 분열되었고, 1982년에는 다시 이스라엘의 침공으로 도시는 한 번 더 큰 피해를 입었다. 베이루트 도심, 그중에서도 특급호텔들이 몰린 해변가는 전략적 요충지가 돼서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다. 가장 격렬했던 곳은 내전 발발 직전에 개장한 홀리데이 인 빌딩(Holiday Inn Building)으로 이 건물에서만 사상자가 3000명이나 나왔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침공과 극한 내전이 지속되자 마침내 1980년 미국이 개입했다. 미국은 레바논과 당시 관계가 가까운 우방인데다 미국인들이 많이 살던 도시가 베이루트였으므로 팔레스타인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으로부터 미국 자산을 보호하고 평화를 중재한다는 명분으로 미합중국 해병대를 보냈다. 그리고 옛 주인인 프랑스도 비슷한 시기에 인도적 간섭을 이유로 해군보병 및 특수부대 등으로 구성된 군대를 파병하여 두 초강대국이 이 내전에 끼어들었다.

1983년 4월 18일, 베이루트 주재 미국 대사관이 자살 폭탄 테러를 당해 미국인 17명을 포함해 총 6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같은해 10월 23일 미군 기지와 프랑스군 기지에 폭탄 테러가 발생해 미 해병대원과 프랑스군 305명이 목숨을 잃었다. 두 사건 모두 미국은 헤즈볼라의 소행으로 보았다. 이후 미국은 헤즈볼라를 극렬하게 적대하며 어떻게든 뿌리뽑으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고 오히려 헤즈볼라가 인기를 얻게 되었다. 헤즈볼라 사령관 하산 나스랄라는 팔레스타인인들을 결집시켜 이스라엘군에 결사항전하도록 했다. 이렇게 레바논 내전은 미국, 프랑스, 이란, 이스라엘, 심지어 시리아까지 힘 좀 쓴다는 나라들이 다들 한발씩 걸치며 혼돈으로 치달았다.

2.6.4. 내전 이후

레바논 전체에 크나큰 상처를 남긴 내전은 1990년에야 끝났다. 지금도 종파들끼리 철저히 분리돼서 거주하고 있고 그 사이에는 주민들이 쌓은 장벽들이 있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는 북아일랜드 벨파스트가 있다. 그나마 벨파스트는 평화 협정 후에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끼리 같은 학교에 다니는 등 교류를 하고 있지만 베이루트는 갈 길이 멀다. 당장 이 도시에서는 같은 기독교도도 사회 주류인 마론파 가톨릭과 비주류인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성공회 등은 소외되었으며 이들 소수 기독교 교파들은 되려 무슬림과 사이가 좋을 정도다.[32]

이후 라피크 하리리 대통령의 지도 하에 재건이 추진되었고 레바논은 어쨌든 다시 일어서며 2000년에는 아시안컵까지 개최했다. 이스라엘이 대회 전 남부 국경에서 병력을 동원해 위협하기도 했으나 별 탈 없었다. 하라리 대통령은 2005년 암살당했고 이 때 배후로 시리아가 지목되자 내전 이후부터 레바논에 쭉 주둔하면서 민중으로부터 침략군이라며 반감을 사던 시리아군도 철수했다.

현재의 베이루트는 중동에서 가장 활기찬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비록 중동의 경제적 중심지 역할은 두바이 도하 아라비아 반도의 신흥국으로 넘어갔지만 레바논의 상대적으로 자유분방한 분위기 때문에 인근 국가에서 부호들을 비롯한 많은 중동인들이 향락을 즐기러 와 중동과 아랍권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도시다. 실제로 대부분의 아랍 국가에서는 보기 어려운 비키니 차림의 여성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아랍 부자들, 특히 걸프 연안의 부호들이 부동산이나 요트 등 자산을 이 도시에 잔뜩 갖고 있다.

또한 레바논은 아랍권 가요계를 이끌 정도로 방송,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발전했기 때문에 아랍권 전체에서 인기가 많은 가수들과 연예인들 다수가 베이루트에 거주지나 별장을 두고 있다. 덕분에 내전 이전만큼은 못해도 중동 유수의 휴양 도시로 발돋움했으며 동(東)베이루트를 중심으로 고급 상점들과 고층 빌딩, 레지던스, 아파트, 호텔이 즐비하다.

2000년대 후반부터 건축 붐이 일어 새로 지어진 휘황찬란한 레지던스와 고층 건물들이 내전 때 훼손된 호텔 등과 함께 있는 대조적인 풍경도 있다. 예시 2010년대에는 시리아 내전 IS의 테러 공격으로 인해 치안이 불안정하고 위험해졌다가 IS가 쫓겨나고 테러 조직으로 쪼그라들자 2020년대에 들어서며 다시 안전해졌다.

한편 레바논이 종파 갈등으로 연립 정부 구성에 실패하면서, 정치적 불안이 심각한데다 몇 달 동안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가 쌓여 위생상 심각한 문제가 되기도 했다. IS가 거의 물러간 후에는 트리폴리에 비하면 개선된 편이다. 누적되었던 쓰레기도 다 치웠다.

2024년 2024년 이스라엘-헤즈볼라 전쟁 속에서 베이루트 내 헤즈볼라 지휘부 공습이 발생했다.

3. 기후

지중해성 기후(Csa)에 속하는 지역으로 측정 이래 최고 기온은 40.4°C이고 최저 기온은 0.2°C이다.

4. 종교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공존하는 도시로 기독교인이 전체인구의 약 35%이고 무슬림이 약 63% 정도이다. 베이루트의 동부지역에는 주로 기독교도들이 거주하며 서부에는 주로 이슬람교도들이 거주한다.

5. 교통

베이루트로의 진입은 레바논의 유일한 민간공항인 베이루트 국제공항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남쪽으로는 전쟁을 겪었던 이스라엘이고, 동쪽과 북쪽은 내전으로 고난의 행군을 겪고 있는 전쟁 중인 국가 시리아, 서쪽으로는 아름다운 지중해가 펼쳐져 있기에 이동 방법은 항공편을 이용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서 사실상 섬이나 마찬가지이다.

사회간접자본 자체가 내전 탓에 형성조차 안 되어 있다. 한때는 레바논내의 철도 요충지[33]였으나, 영업정지인 상태인 지금은 다 옛날 이야기. 다른 중동 국가인 아랍 에미리트의 수도 두바이가 자체 지하철 시스템 두바이 메트로를 운행하고 카타르도 수도 도하 경전철을 개통해 운행하기 시작한 것과 달리 여기는 대중교통 그딴 거 없는 곳으로 우버를 부르거나 노선이 부실한 시내버스를 이용하여야 하며 그냥 속 편하게 공항에서 렌트카를 이용해 자가운전을 하고 다니는 편이 낫다.

6.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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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심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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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만 인근 신도심의 모습

베이루트의 주요 관광지로는 루슈 락(Rouche Rock), 아메리칸 대학교 베이루트 캠퍼스(American University of Beirut/AUB)[34], 나이제 광장(Nijeh Square) 등이 있다. 나이제 광장은 위의 사진 중 가장 마지막 것으로 주변에 이슬람 모스크, 마론파 성당, 정교회 예배당 등 각종 종교시설이 모여있는 독특한 곳이라 할 수 있겠다. 구도를 잘 잡아서 사진을 찍으면 여러 종교 시설이 한번에 보이게끔 찍을 수도 있다. 특히 여기서 사회 주류인 마론파도 교황의 수위권을 따르는 가톨릭이라 성모상을 흔히 볼 수 있다.[35] 베이루트 사진들 갤러리

나이제 광장에서 바다 쪽으로 가면 "I LOVE BEIRUT"라는 팻말이 있는 SOUKS라는 쇼핑몰이 있는데 세속주의를 추구하는 국가답게 자유분방하고 모던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히잡을 둘러싼 여자부터 탱크탑이나 나시티를 입고 돌아다니는 젊은이들이 많이 다니는 젊음의 거리로 서울특별시로 치면 명동이나 강남, 홍대, 이태원 격이다.

파일:베이루트 비둘기 바위.jpg
비둘기 바위, 일명 루슈 락

자연경관으로는 루슈 락(Rouche Rock), 람레트 알바이다 해변(Ramlet al-Baida Beach)이 있으며 루슈 락에서는 배타고 바위를 가까이 들어가보는 체험을 할 수도 있다. 베이락이라고도 하는데 현지인들은 잘 못 알아듣는다.

해변가를 주변으로 고급 리조트, 호텔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으며, 맛있는 맛집도 많은 편이다. 다만 한국인의 입맛에는 약간 안 맞을 수도 있는데 할랄 푸드의 특성 상 피를 다 빼버리는 조리법을 쓰기 때문에 한국 특유의 마블링이 살아있는 고기는 없다. 아메리칸 대학 베이루트 캠퍼스(AUB)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광경 또한 멋있으니 시간이 있으면 한번 가보는 것도 좋다.
파일:베이루트 레바논.jpg 파일:베이루트 종교.jpg
마론파 가톨릭의 본산인 세인트 조지 성당의 모습
파일:레바논 종교.jpg

파일:external/countryandtownhouse.co.uk/Beirut-city-scape.jpg

알 아민 모스크 일대의 전경. 알 아민 모스크와 세인트 조지 성당은 근동 지역에서 이슬람과 기독교 간의 공존 사례로 곧잘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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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루트 강을 지나는 수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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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부의 로마 유적

오랜 역사 덕에 고대 로마 유적부터 중세 이슬람 사원 및 십자군 유적, 근현대의 유럽식 건축물까지 다양한 시대와 문명의 흔적이 남아있다. 건축이나 역사를 좋아한다면 시돈, 티레, 바알벡 등과 함께 레바논의 필수 여행지이다.

7. 사건 사고

레바논의 바닷가는 높은 절벽이 있고 풍경이 아름다워 다이빙 명소로 꼽히지만 바위가 많아서 다이빙을 하기에는 매우 위험하다. 2015년 9월 30일 Ain Mreisseh에서 다이빙을 하던 청년이 머리를 부딪혔지만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던 이 일어났다. 2021년 6월 10일 라우쉬 바위라는 수십 미터 높이 절벽에서 다이빙을 하던 관광객이 모터보트 위로 떨어져 즉사한 사건이 있었다.

7.1. 레바논 다이빙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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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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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자매 결연 도시

9. 매체

10. 기타

  • 유엔 서아시아 경제사회위원회, 아랍 항공운송기구, 아랍 은행 연합 등 여러 국제 기구들이 이곳에 위치한다.


[1] 조선 시대 성저십리를 포함한 한성부의 크기가 베이루트의 2배가 넘는 44km²였다. [2] 셀레우코스 왕들은 보통 자신이 세운 도시에 직계 가족의 이름을 붙이는데, 안티오코스 7세의 어머니 이름이 라오디케아였다. 그리고 그후 셀레우코스 조에 라오디케아란 이름을 가진 왕비는 나오지 않는다. 안티오코스 7세의 형제이자 그의 사후 복위한 데메트리오스 2세 역시 후보로 제시될 수 있으나 그의 두번째 치세는 4년으로 짧았고, 내전으로 얼룩졌다. [3] بيروت أم الشرائع [4] 이 지진으로 내륙의 헬리오폴리스의 신전군 역시 파괴되었다 [5] 본래 타누크-아즈드 연맹이었으나 대부분 이라크로 이주해 라흠 왕국을 세웠고, 남은 세력이 타누크 연맹이다. [6] 십자군 연대기 작가인 풀케르 드 샤르트르의 기록, 알베르 드 엑스는 5월 27일로 기록. [7] 1129년 십자군령이 된 다마스쿠스 방면의 요충지. 1137년 장기 왕조에 빼앗겼으나 3년 후 재점령했고 1157년이 누르 앗 딘이 도시를 일시 점령하나 곧 철수했다. 결국 1164년 누르 앗 딘이 점령한 후 이슬람 측에 계속 남았다. [8] 1174년 갈릴리 상속녀 에스키바와 결혼한 후 갈릴리 공국 하에 있던 베이루트를 얻은 것으로 여겨짐 [9] 혹은 8월 9일 [10] 왕국의 주요 도시들 중 베이루트, 아르수프, 야파, 아슈켈론이 이벨린 가문의 직할령이었고 카이사레아의 장 역시 친척으로써 그의 편이었다. 시돈의 그라니어, 티레의 몽포르 가문 정도만이 대적할만한 세력이었으나 그들 역시 이벨린 가문에 호의적이었다. [11] 정확히 말하면 독신은 아니고 37세 연상인 전 시돈 영주 줄리앙과 사귀었다.. [12] 아이러니하게도 니콜라를 죽인 이는 이사벨라의 오촌 당숙인 보두앵 드 이벨린이었다. [13] 음프헤에게 두 아들이 있었음에도 위그는 이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장의 과부이자 자신의 누이인 마가렛을 영주로 봉했다. [14] 칼리파 우마르를 기린다. [15] 본래 그 지도자인 알리 이븐 알 후세인의 증조부의 이름에서 기인한 바누 아비 압둘라로 불리다가 알리의 아들 나히드 앗 다울라 부흐투르의 활약 이후 바누 부흐투르로 불리게 되었다. [16] 전쟁 시에 카라마는 다마스쿠스의 기병 40명과 거둘 수 있는 만큼의 세금을 가질 수 있었을 정도로 누르 앗 딘의 신임을 받았다. [17]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일 수도 있다. [18] 한편 핫즈의 숙부 샤라프 앗 다울라 알리 역시 십자군의 공격에서 살아남아 아라문을 근거지로 삼으며 분가를 세웠다. [19] 살라딘은 핫즈를 가르브의 7개 마을에 대한 아미르로 승인했고, 이로써 부흐투르 가문은 중흥할 수 있었다. 살라딘의 사후 내전에서 패하고 살카드로 물러난 알 아프달은 핫즈와의 연대를 모색하기도 했다. [20] 십자군을 불신하던 핫즈는 이벨린 가문과 어떠한 합의도 거부했고, 1222년 다마스쿠스 아미르 알 무아잠 이사는 그의 영지를 확인했을 당시 이벨린 가문의 횡포를 고발했다. [21] 나즘 앗 딘 무함마드는 아이유브 내전에 있어 앗 살리흐 이스마일의 다마스쿠스를 노리던 (미래의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의 지원 요청에 응했다. 이에 1240년 이스마일은 가르브와 쇼우프를 십자군에 양도했다. [22] 1256년 협조의 대가로 시돈의 영주로부터 베이루트 남쪽 다무르의 농경지를 할양받았다. [23] 1259년 몽골군이 남하하자 핫즈 2세와 살리흐는 그 장군 키트부가에 복속을 표하여 가르브의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다만 이듬해 아인잘루트 전투 당시 그들은 핫즈 2세가 몽골, 살리흐가 맘루크 측에 참전하며 승리한 측에 선 아미르가 상대방을 위해 탄원해주기로 했다. 유례를 찾기 힘든 분산 투자 결과 살리흐는 술탄 쿠투즈를 설득해 핫즈 2세의 사면을 얻어내었고 부흐투르 조는 무사할 수 있었다. [24] 대표적으로 1389년 폐위된 바르쿠크를 도와 다마스쿠스를 포위했다. [25] 이때 부흐투르 조의 동맹이자 바누 알 하므라에 속한 아비 알 자이쉬 아미르 8명 중 7명을 죽이며 궤멸시키고 아르슬란 가문을 공격함 [26] 형제들을 죽였음에도 카이트베이는 아들이 없었기에 조카를 살려두었다. [27] 그 결과 1545년 비블로스 등지의 마론파 가문들이 가지르 부근 등 케세르완 마을들로 이주했다. [28] 하지만 오스만 문서들은 그 카라반이 레바논 산지의 마안 가문에 대한 원정을 이끌던 이브라힘 파샤 휘하 2만 정병의 호위 하에 안전히 도착했다고 증언한다. [29] 토스카나인들은 잔발루드 반군이 쇠락하기 전 그들과 십자군에 대한 지원 및 레반트 항구들에서 토스카나인들의 특권 등을 규정한 조약을 맺은 바 있다. [30] 그럼에도 유수프는 그해 10월 포르테가 개입한 후에야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31] 이 도시에 무려 아메리칸대학 중동캠퍼스가 들어섰다. 두바이가 뜨기 전에는 여기가 두바이 같은 곳이었다. [32] 실제로 소수 종파 기독교인들은 마론파 보단 무슬림들을 지지할 정도다. [33] 해안가 도시를 잇는 노선과 시리아를 향하는 노선이 분기했다. 오스만 시절에는 욥바와 카이로까지 갈 수 있었다. [34] 아메리칸 대학교는 한국의 10-20대 어린 세대들에게는 인지도가 거의 없지만 원래 법과대학, 경영학과 등 사회과학계열이 강세고 동문들도 유명인사가 여럿 있는 유서 깊은 동부 대학이다. 워싱턴 D.C에 있다. 신한공사 총재를 역임한 정환범 선생도 이 학교에 유학했다. 한국에서 인지도가 거의 없어서 이 학교에 한인 비중은 낮은 편이다. [35] 가톨릭이 주류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 여기에 오면 친숙함을 느끼게 된다. 분위기나 기후, 그리고 사람들 생김새까지 비슷하다. 물론 기독교 역사는 베이루트 쪽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구하다. 사실 유럽보다도 더 오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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