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10:16:12

타바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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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타바르카 튀니지 2.jpg
제네바 성채
파일:타바르카 튀니지 4.jpg
해변과 성채


1. 개요2. 역사
2.1. 길도의 난 (398년)2.2. 타바르카 전투 (703년)2.3. 제노바 지배기 (1540 ~ 1742년)2.4. 근현대
3. 갤러리


아랍어: طبرقة
영어, 프랑스어: Tabarka

1. 개요

파일:튀니지 타바르카 3.jpg

튀니지 서북부의 도시. 비제르트에서 서남쪽으로 80km, 베자에서 서북쪽으로 60km, 엘케프에서 북쪽으로 40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다. 알제리와의 국경에서 불과 6km 떨어진 국경 도시로, 인구는 약 4만명이다. 1542년부터 1740년까지 제노바 공화국이 섬 부분을 지배하였고, 산호를 캐어 합스부르크 왕가 등지로 판매하였다. 2세기의 지배 후 튀니스의 베이가 점령했으나 다시 한세기 만에 프랑스령이 되었고, 1952년 당시 독립 운동가이자 미래의 대통령인 하비브 부르기바가 프랑스 당국에 의해 이곳으로 유배된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는 산호 채집, 수중 촬영 축제, 매년 열리는 재즈 페스티벌 등으로 관광객을 유치한다. 동쪽 8km 지점이 해안에 타바르카 아인 드라함 공항이 위치한다.

2. 역사

파일:튀니지 타바카 3.jpg
타바르카 성채

2.1. 길도의 난 (398년)

파일:타바카 튀니지 6.jpg
시내 공공 정원의 로마 유적지

고대에는 로마제국 누미디아와 아프리카 속주 간의 경계 지점에 해당하였고, 당시 지명도 타바르카 (Thabraca)였다. 398년 베르베르계 아프리카 총독 길도[1]가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에 반대, 동로마 측에 충성을 표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서로마의 권신 스틸리코는 길도에 의해 두 아들을 잃은 후자의 동생 마스케젤 휘하의 5천의 갈리아 노병들로 구성된 진압군을 파견하였다. 길도는 정규군과 베르베르/흑인 용병까지 합쳐 무려 7만 대군을 모으며 위세를 떨쳤다. 압도적인 병력 차에 마스케젤은 협상에 나서는 척하며 적진으로 다가가던 중 현지 군단 기수 중 하나를 마주쳤다. 그는 기수에게 군기 (아퀼라)를 내리라고 지시했으나 거부하자 칼로 기수의 팔을 내리쳐 강제로 내리게 하였다.

멀리서 이를 목도한 다른 기수들도 항복이 결정되었다고 여겨 군기를 내렸고, 병사들은 마스케젤을 새 사령관으로 연호하였다. 전세가 급변한 것을 본 용병들은 도주하였고, 길도 역시 조각배에 올라 자신에게 호의적인 동로마로 도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항해 도중 그가 탄 배는 역풍을 맞아 타바르카 항구로 밀려왔고, 새 지배자에게 충심을 보이고 싶던 현지 주민들은 길도를 사로잡아 구금하였다. 동생의 복수를 두려워한 길도는 옥중에서 목메달아 자살하였다. 이로써 길도의 반란은 마무리 되었는데, 난을 평정하고 밀라노에 개선한 마스케젤 역시 스틸리코의 시기를 산 후 그와 함께 다리를 건너던 중 떨어져 익사하였다. 반세기 후 반달 왕국 시절 타바르카에는 수도원과 수녀원이 있었다.

2.2. 타바르카 전투 (703년)

647년 수페툴라 전투와 670년 카이로우안 설립 후 본격화된 이슬람 제국 마그레브 정복( 무슬림의 마그레브 정복 전쟁)은 698년 카르타고 함락과 함께 진전되었다. 그러자 로마- 베르베르의 여왕 카히나가 현지인들을 이끌고 저항하여 메스키나 전투 등에서 승리하며 이슬람 정복에 대한 대항마로 떠올랐다. 리비아로 잠시 물러났던 우마이야 왕조 군대는 702년 재차 서진하였고, 카히나 역시 베르베르 연합군과 함께 동진하였다. 양측은 현재의 알제리-튀니지 국경인 타바르카에서 마주쳤고, 격렬한 전투 끝에 우마이야 군이 승리하였다. 카히나는 산지로 피신했다가 현 알제리령인 비르 엘 카헨에서 살해되었고, 709년까지 마그레브 전역은 우마이야 왕조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 분수령이 된 전투가 타바르카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2.3. 제노바 지배기 (1540 ~ 1742년)

파일:타바르카 튀니지 3.jpg 파일:튀니지 타바르카 2.jpg
제노바 공화국령 타바르카의 모습

1540년 제노바 공화국 안드레아 도리아가 사로잡은 튀르크 해적 투르굿 (드라구트)을 석방하는 대가로 시가지에서 300m 떨어진 섬을 오스만령 튀니스 총독으로부터 할양받았다. 제노바 당국은 귀족 가문 중 하나인 로멜리니 가에게 섬을 맡겼고, 1553년부터 고용주 카를 5세에게 그가 좋아하는 산호를 캐어 바쳤다. 로멜리니 가문은 자신들이 많은 자산과 큰 궁전을 소유하고 있는 제노바 근처 펠리지의 주민들을 이주시켜 타바르카를 식민화하였다.1738년 산호초가 소멸되고 현지 아랍인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2세기에 걸쳐 섬에 정착한 대부분의 타바르치니들은 사르데냐 근해의 무인도이던 산 피에트로 섬으로 이주하여 새 도시인 카를로포르테를 세웠다. 이주는 무인도에 식민 사업을 벌이고 싶던 사르데냐 국왕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의 주도로 이루어졌다.[2] 다른 이들은 인접한 산탄티오코 섬의 칼라세타에 재정착하였고, 그 후손들은 현재까지도 타바르카식 제노바 방언을 구사한다.

 다른 이들은 스페인령 신타바르카 (타바르카 누에바)로 이주하였다. 남은 제노바 인들도 1741년 혹은 1742년 성채를 오스만령 튀니지의 베이에게 항복하였다. 1740년 형 후사인 베이에 반란을 일으켜 그를 죽이고 집권한 알리 베이는 정당성 확보를 위해 이듬해 제노바령 타바르카 섬을 점령하였고, 1500명의 기독교도 포로와 투니스에 개선하였다. 같은해 유누스는 프랑스령 캅 네그흐를 점령하였다. 그럼에도 알리 베이는 1756년 알제에 망명했던 조카인 후사인 베이의 아들 무함마드 알 라시드에게 폐위되어 처형되었다. 타바르카에는 한때 교회로 쓰이던 굴과 기독교 건축에 속하던 벽의 일부 등이 남아있다. 근처 해안에는 2개의 오스만 시절 성채가 있고, 그중 하나는 보수된 상태이다.

2.4. 근현대

파일:타바카 튀니지 7.jpg
1900년 전후의 타바르카 전경. 좌측의 제노바 성채, 우측의 튀르크 성채가 보인다

그후 어촌 마을로 남았다가, 20세기 들어 동쪽 해안을 따라 리조트 단지가 들어서며 휴양지로 개발되었다. 상술한 대로 튀니지의 초대 대통령 하비브 부르기바의 유배지이기도 하였다. 현재까지도 이탈리아 인들이 자주 방문한다.

3. 갤러리

파일:타바카 튀니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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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튀니지 타바르카 8.jpg
섬 맞은 편의 촛대바위

파일:타바카 튀니지 1.jpg

파일:타바카 튀니지 8.jpg
좌측의 촛대바위, 중앙의 극장, 우측의 오스만 시절 요새

파일:튀니지 타바르카 7.jpg

[1] 반란을 일으킨 기존 총독인 형 피르무스를 제압하여 총독으로 봉해졌으나 그 역시 폭정을 펼치다가 반란을 일으킨다 [2] 따라서 그의 이름인 카를로가 도시 이름에 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