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3 01:11:27

칼 스파츠

파일:us_army_ww2.png 제2차 세계 대전 미군 장성급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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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 첨자 : 전사, 윗 첨자 : 육군 항공대, 윗 첨자 해병: 해병대, 윗 첨자: 전시 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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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58><colcolor=#fff> 칼 앤드류 스파츠
Carl Andrew Spaatz
파일:Carl_Spaatz.jpg
출생 1891년 6월 2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보이어타운
사망 1974년 7월 14일 (향년 83세)
미국 워싱턴 D.C.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미국육군사관학교
직업 군인
최종 계급 미국 육군/공군 대장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일생과 주요 경력
2.1. 초기 행적2.2. 군 경력의 시작과 제1차 세계 대전 참전2.3.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전설을 써내리다2.4. 대전 이후의 삶
3. 여담4. 매체에서의 칼 스파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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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arl Andrew "Toooey" Spaatz.

미국 군인.

육군 보병 장교로 출발하여, 초급장교때 조종사 자격을 취득하고 미국 육군항공대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모두 활약하였다. 일명 '폭격기 마피아(Bomber Mafia)'의 선구적 인물이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유럽전략공군사령관과 태평양전략공군사령관을 모두 역임했다. 그리고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 작전의 공식적인 최고지휘관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인 1947년에 미국 육군항공대가 미국 공군으로 분리되면서 초대 공군참모총장에 오르는 영광을 품에 안았다.

이 사람을 빼놓고는 유럽과 태평양에서의 미국 육군항공대의 활약을 논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나,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장군들에 비해 인지도가 비교적 낮은 편이다.

2. 일생과 주요 경력

2.1. 초기 행적

칼 스파츠는 189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출생했다. 이름에서 느낄수 있듯이 그는 독일계 미국인이다.[1] 이 인물의 carl 이라는 이름은 영어권에서 통상적으로 '칼'로 발음하지만, 사실은 독일의 대표적 이름 중 하나인 카를 이다. 원래의 성도 Spatz 였는데, 독일계 이름이라는 점이 너무 두드러지고 영어식 발음도 어려워서 나중에 a를 추가하여 Spaatz로 개명하였다. 한국어로는 '스패츠'로 적는 경우가 종종 보이나, 당시의 영상 발음 등을 고려하면 '스파츠'로 표기하는 것이 맞다. 그의 부친은 펜실베이니아 주 상원의원이었으며, 소규모 지역 신문사를 운영한 언론인이기도 했다.

2.2. 군 경력의 시작과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스파츠는 아버지의 영향력에 일정부분 힘입어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할 수 있었다. 칼 스파츠가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한 것은 1910년으로, 여러 전설적인 인물들이 포진한 1911년 입학 별들의 기수의 바로 한 학년 선배가 된다. 무사히 사관학교를 졸업한 스파츠는 1914년 보병 소위로 임관했는데, 잠깐의 보병 병과 생활을 거친 후 1915년에 미 육군통신대 항공반(Aviation Section, U.S. Signal Corps)[2]에 배속되었고 1916년에 정식으로 조종사 자격을 취득했다. 또한 존 조지프 퍼싱이 이끄는 멕시코 판초 비야 정벌전에도 참전하였다. 조종사 자격 취득 직후인 1916년 7월에 중위, 1917년 5월에 대위로 진급하는 등 순조롭게 경력을 쌓아나갔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칼 스파츠는 당시 프랑스에 있던 미군항공학교(American Aviation School) 책임자로 주로 근무했고 직접 전장에 나갈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종전 직전 불과 3주 동안의 기간에 실제 공중전투임무에 투입되었는데, 이 짧은 기간동안 그는 적기 3기를 격추하는 놀라운 공적을 세우며 육군 수훈십자훈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을 서훈받는다.

대전 종료 이후 전간기에는 육군 곡예비행팀인 '빅토리 론 플라잉 서커스(Victory Loan Flying Circus)'에 배속되어 미국 전역을 돌며 공중 곡예비행를 선보이기도 했고, 그 외에 지휘관 보직도 골고루 거쳤다.

특기할만한 경력으로, 1929년 1월에 후배 장교 아이라 이커(Ira Eaker)[3] 등 4명을 지휘하여 포커 C-2A 수송기를 개조한 Question Mark(물음표) 호를 타고 로스앤젤레스 상공에서 공중 급유를 받아가며 무려 150시간 동안(1월 1일부터 1월 7일까지) 단 한번도 착륙하지 않고 공중에 체공함으로써 당시의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였다. 조종사들은 1월 1일에 이륙하여 교대로 기체를 조종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책도 읽고 카드놀이도 하고 잠도 자면서 하늘에서 계속 지냈다고 한다. 비행 중 공중급유 37회, 식사와 물 등 공중보급 6회가 이루어졌다. 당시의 초창기 항공 기술 수준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혹은 거의 미쳤다고 말할만한 성과로, 비행기의 내구성 등 여러 선도적인 지표를 남긴 실험이다.
파일:question mark ari9.jpg
공중체공 세계신기록 수립비행중인 물음표 호(사진 아래 기체). 사진 위 기체로부터 공중급유를 받는 중이다.

여담으로 칼 스파츠는 공중급유를 하다가 호스가 빠지면서 고옥탄가 항공유에 흠뻑 젖기도 하는 등.. 참고로 이때의 공중급유는 지금처럼 자동화된 시스템이 아니라, 급유기가 급유호스를 내려보내면 승무원이 이를 직접 잡아서 급유구에 끼우는 원시적인 방식이었다. 초창기 미 육군항공대 전설적인 멤버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한편으로는 맛이 간 사람들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이다. 이 실험은 1월 7일에 물음표 호의 엔진이 고장나 마침내 착륙하면서 종료되었다. 이후 점검하여 보니 물음표 호는 심각할 정도로 엔진 마모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칼 스파츠는 이때의 공적으로 두번째 육군 수훈십자훈장을 서훈받게 된다. 칼 스파츠의 초창기 공중급유 업적을 기려, 현재 미국 공군은 매년 가장 뛰어난 공중급유대대에 '칼 스파츠 대장 트로피'를 수여하고 있다. 이 트로피에는 공중급유를 받는 물음표 호가 새겨져 있다(바로 위 사진). 2022년도 칼 스파츠 대장 트로피를 수상한 미 공군 제100 급유비행단 제351 공중급유비행대대. 다만 이때 칼 스파츠가 수립한 공중체공 세계신기록은 금방 깨지는데, 불과 1년 뒤인 1930년 6월에 헌터 4형제라는 민간인들에 의해 무려 553시간 40분 체공시간이라는 신기록이 세워진다. 진짜로 미친 것은 미국의 항공기술 발전이었다.

이 외에도 여러 보직을 거쳤고 1935년에는 고급장교가 되기 위한 핵심 코스인 켄터키 주 레븐워스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에도 입교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에 임시 준장으로 진급하고, 헨리 아놀드의 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2.3.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전설을 써내리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전 세계가 전화에 휩싸이자 1942년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은 칼 스파츠를 임시 소장으로 진급시키고, 유럽을 관할하는 제8공군사령관으로 부임하도록 하였다. 1943년 3월에는 임시 중장으로 진급, 이어서 1944년 1월에는 유럽 전체의 미 육군항공대를 총지휘하는 유럽전략공군사령관에 착임하였다. 유럽전략공군사령관 칼 스파츠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직속 지휘를 받았으며, 이 말은 반대로 하면 칼 스파츠의 상관은 오로지 아이젠하워 뿐이고, 그 외에 유럽 전역의 모든 미 육군 항공세력은 그의 것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사실 아이젠하워는 스파츠의 웨스트포인트 1년 후배인데, 워낙 아이젠하워가 초고속 진급을 한 터라 직위상으로는 오히려 상관이 된 케이스이다.[4] 이와 별개로 스파츠와 아이젠하워는 사적으로도 절친한 사이였으며, 전쟁 지도에는 큰 지장은 없었다. 다만 아래에 서술되는 폭격 방식 논쟁에서 아이젠하워는 전술 폭격 및 무차별 폭격을 강하게 지지하여, 특정 산업 목표물에 대한 정밀 폭격을 지지하는 칼 스파츠와 대립하였다.
파일:carl 800px-thumbnail.jpg
유럽전선 미 육군항공대 지휘부와 함께 한 칼 스파츠. 왼쪽에서 두번째가 아이젠하워 연합원정군 최고사령관, 세번째가 칼 스파츠, 네번째가 제임스 둘리틀 당시 제8공군사령관이다.

이 기간동안 칼 스파츠는 휘하에 아이라 에이커, 헤이우드 헨셀, 제임스 둘리틀, 그리고 커티스 르메이 등 쟁쟁한 폭격기 마피아들을 거느리고 나치 독일에 대한 전략폭격을 총지휘하여 독일을 노릇노릇하게 구워버리는데 열중하였다(...) 특히 칼 스파츠는 나치 독일에 석유를 공급하는 생산시설과 라인을 폭격으로 파괴하는데 집중하였다. 이는 일명 '제2차 세계 대전 석유 전역'(Oil campaign of World War II)이라 해서 영문 위키에도 문서가 따로 개설되어 있을 정도로 중요한 전략적 작전의 일환이다. # 칼 스파츠는 이른바 '주간 정밀 폭격 (미국 육군항공대) vs. 야간 무차별 폭격(영국 공군)' 논쟁에서, 산업시설에 대한 주간 폭격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밀어붙인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1945년 3월에는 임시 대장으로 진급하여 마침내 별 4개를 달았다. 독일의 항복으로 유럽 전역이 마무리되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위헤 헤르만 괴링의 심문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45년 7월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칼 스파츠를 임시 대장에서 정규 대장으로 임명하였고, 동시에 칼 스파츠는 1945년 7월 태평양 전선으로 이동하여 태평양전략공군사령관에 취임하였다. 이 시기 일본에 대한 전략폭격 막바지 작전을 총지휘했다. 현재의 시각에서 보자면 전쟁이 거의 끝나가는 무렵에 칼 스파츠 대장 같은 거물급 지휘관을 굳이 태평양 전역으로 다시 이동시킨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는데, 사실 칼 스파츠가 태평양으로 온 것은 일본 본토 침공을 위한 몰락 작전의 육군 항공작전을 총지휘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1945년 8월 6일과 8월 9일 행해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 작전의 공식적인 최고 지휘관이 된다. 당시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의 승인과[5] 미국 전쟁부장관 헨리 스팀슨,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의 확인을 거쳐[6] 미 육군부참모총장 토머스 T. 핸디(Thos. T. Handy) 대장의 명의로 내려진 원자폭탄 투하 작전 명령서는 '미 전략공군사령관 칼 스파츠 대장'을 그 수신자로 하고 있다.[7]
파일:gen-handy-order.jpg
원자폭탄 투하 명령서. 수신자 칼 스파츠 대장.[8]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작전 때의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폴 티비츠 대령이 B-29 에놀라게이를 조종하여 원자폭탄 투하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티니안 기지로 귀환하자, 칼 스파츠 대장은 수훈십자훈장을 미리 준비해놓고 활주로에서 기다리다가 폴 티비츠 대령이 B-29에서 내리자마자 훈장을 수여했다. 티비츠 대령은 4성 장군인 전략공군사령관이 직접 흙먼지 날리는 활주로까지 나와 자기를 기다리고 훈장을 수여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폭격기에서 내리며 담배 파이프를 입에 물려다가 황급히 왼손에 감춰야 했다. 이 장면은 여러 사진과 영상으로 촬영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파일:Spaatz_decorated_Tibbets.jpg
폴 티비츠 대령에게 수훈십자훈장을 전수하는 칼 스파츠 대장(왼쪽 인물).[9] 폴 티비츠의 왼손에 담배 파이프가 보인다.

2.4. 대전 이후의 삶

대전 이후 1946년 2월에 헨리 아놀드의 뒤를 이어 미국 육군항공대 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이어 1947년 9월 마침내 육군항공대가 독립하여 미국 공군으로 분리되면서 칼 스파츠는 초대 미국 공군참모총장에 임명되어 군 경력에 화려한 정점을 찍게 된다. 칼 스파츠는 1948년 6월 30일에 공식적으로 퇴역했다.

퇴역 이후에도 칼 스파츠는 미국 공군역사재단 이사장, 뉴스위크의 군사 담당 편집자 등 여러 활동을 이어나갔다.

칼 스파츠는 1974년 7월 14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향년 83세로 사망하였으며,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는 미국 공군사관학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여담

  • 아이젠하워는 전후에 제2차 세계 대전 유럽전역에서 가장 큰 공헌을 한 장군으로 오마 브래들리와 칼 스파츠 2명을 꼽았다.
  • 칼 스파츠는 나치 독일의 미국 등 연합국에 대한 항복(프랑스 랭스, 1945. 5. 7.), 나치 독일의 소련에 대한 항복(독일 베를린, 1945. 5. 8.),[10] 일본의 미국 등 연합국에 대한 항복(일본 도쿄만, 1945. 9. 2.) 등 2차 세계대전의 대표적인 항복 조인식 세 군데에 모두 참석한 유일한 장군이다.
  • 미 공군의 전설적인 트리플 에이스 로빈 올즈 준장이 꼬맹이였던 시절, 칼 스파츠 소령의 옆집에 살았다고 한다.[11]

4. 매체에서의 칼 스파츠

2000년 방영된 미국 TV 영화 뉘른베르크에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헤르만 괴링에 대한 심문자로 등장한다.

대체역사소설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 주인공 유진 킴의 선배로 후반부에 등장한다.

국방TV 역전다방 제48화에서 원자폭탄 투하 작전의 배경과 경과를 설명하면서 빈번히 언급된다.




[1] 미국이 앵글로색슨계 국가라고 하여 영국계가 가장 많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다수인데, 실제로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혈통을 차지하는 것은 영국계가 아니라 독일계이다. # 즉 미국은 가장 대표적인 독일계 혈통 국가이다. 특히 유명한 군인들 중에 독일계가 상당히 눈에 띄는데, 당장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인물들만 보더라도 육군의 대표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해군의 대표인 체스터 니미츠가 모두 독일계이다. 태평양 전역의 미 6군 사령관이었던 월터 크루거 대장은 아예 독일 이민 1세대이다. [2] 이때는 아직 육군 항공대가 되기도 전이며, 통신대에 부속된 일개 항공'반' 신세였다. 그러나 이곳은 먼 훗날 전세계를 주름잡을 미 육군항공대/미 공군을 호령할 헨리 아놀드 등 쟁쟁한 인물들이 포진해 있는 곳이기도 했다. [3] 미 육군항공대 초기 인물 중 핵심적인 멤버로, 이 사람 또한 '폭격기 마피아'(Bomber Mafia)의 대표 멤버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대한 폭격을 지휘했다. 헤이우드 헨셀, 그리고 커티스 르메이가 당시 아이라 에이커의 직속 부하였다. 세계대전사를 접하다 보면 반드시 한번쯤은 듣게되는 이름이다. [4] 굳이 따지자면 아이젠하워는 4수생 나이로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했기 때문에, 나이로는 칼 스파츠보다 형이었다. [5] 문서상으로는 해리 트루먼은 원자폭탄 투하 작전 명령에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원자폭탄 투하는 어디까지나 군사작전이고, 대통령이 개별 군사작전을 직접 지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 알려져있다시피 원자폭탄 투하의 실제적인 최종 승인자는 분명히 트루먼 대통령이며, 본인 스스로도 이렇게 인지하고 있었다. [6] 이들 2명은 당시 트루먼 대통령을 수행하여 포츠담 회담에 가 있었기 때문에 공식 명령을 내릴수 없는 위치였다. 만약 포츠담 회담이 아니었으면 공식 명령서의 발신 명의는 조지 마셜이 되었을 것이다. [7] 물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문서에도 잘 설명되어 있듯이, 원자폭탄 투하작전을 실제적으로 관할했던 인물은 레슬리 그로브스 소장이었다. [8] 이 명령서의 주요 내용은, 1945년 8월 3일 이후 기상이 허락하는 대로 히로시마, 고쿠라, 니가타, 나가사키 중 한 곳에 첫번째 원자폭탄을 투하할 것과, 두번째 원자폭탄은 추가 승인절차 필요 없이 사령관(칼 스파츠)의 판단으로 가급적 빨리 투하할 것이다. [9] 가운데 선글라스를 낀 인물은 토마스 S. 파워(Thomas S. Power) 당시 육군항공대 준장이다. 토마스 파워는 제21폭격기사령부(사령관 커티스 르메이) 휘하 제314폭격비행단장을 거쳐, 1945년 8월에 태평양전략공군사령부에서 칼 스파츠 사령관의 작전참모로 재직했다. 미 육군항공대의 기존 폭격 교리는 고고도 산업시설 정밀폭격이었으나, 토마스 파워는 제314폭격비행단장 시절 일본 도시를 상대로 저고도 야간 광범위 소이탄 폭격을 실제로 시험해보고 이것이 효과가 크다는 것을 입증하여, 상관인 커티스 르메이와 함께 근본적인 전술 변경을 이끌어낸 주인공이다. 즉 일본 도시에 대한 소이탄 싹쓸이 폭격을 실체화하는데 크게 기여한 사람이다. 냉전 시절 대장까지 승진하여 커티스 르메이 공군참모총장 휘하에서 전략공군사령관을 지냈으며, 전략핵폭격 전략의 강력한 옹호자이기도 했다. 그는 케네디 대통령에게 "(소련과의 핵전쟁 후에) 미국인 2명과 소련인 1명이 남으면 우리가 승리한 것이다"라는 무시무시한 발언을 했다고 전해진다. 오죽하면 그 커티스 르메이가 토마스 파워에 대해 "그는 새디스트이다"라고 평가했을까... [10] 나치독일은 당초 미국 등 연합국 측에 대해 1945년 5월 7일 정식으로 항복했으나, 대독 전선에서 말 그대로 인명과 물량으로 독일을 저지한 소련이 "왜 우리를 빼놓고 니들 맘대로 항복하고 항복을 받아주는가?"라고 항의하여 결국 5월 8일에 베를린에서 다시 소련에 대한 항복조인식을 하게 되었다. 칼 스파츠는 일종의 옵저버 자격으로 미군 지휘부를 대표하여 여기에도 참석했다. [11] 로빈 올즈의 아버지가 무려 빌리 미첼의 부관 출신이었고, 미국 육군항공대 초창기 멤버들은 죄다 기지 주변에 몰려 살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