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8 14:33:49

테살로니카 칙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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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내용4. 영향

1. 개요

380년 2월 27일, 로마 제국 서방의 황제 그라티아누스와 동방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 니케아 신경을 수호하고 이단을 정죄하겠다는 의지를 전국에 공표한 칙령.

2. 배경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론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로 확정되었지만, 이단으로 정죄된 아리우스파의 기세는 수그러들긴커녕 갈수록 거세졌다.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하고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였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정작 말년에 접어들면서 이해하기 쉽고 에우세비우스 등 총애하는 신하들도 믿는 아리우스파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고, 아리우스를 단죄하려던 아타나시오를 유배보냄으로써 반 아리우스파 인사들을 냉대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 제국을 분할한 콘스탄스, 콘스탄티우스 2세 형제가 각각 니케아파와 아리우스파 성향을 공공연히 드러내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두 종파는 황제를 등에 업고 상대 세력을 제압하고자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제국의 국론이 분열되었고, 그리스도인 간의 갈등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두 형제 사후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된 배교자 율리아누스는 그리스도교를 약화시켜서 로마 다신교를 부활시키기 위해 이러한 종파 갈등을 의도적으로 부추겼다. 율리아누스가 페르시아 원정 도중에 전사한 후 집권한 발렌티니아누스 1세 발렌스 형제도 니케아파와 아리우스파를 각각 선택하면서, 이러한 분열은 쉽사리 해결되지 않았다.

378년 8월 9일, 동방 황제 발렌스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프리티게른이 이끄는 고트군과 맞붙었으나 참패를 면치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발렌티아누스 1세의 장자이자 당시 서방 황제였던 그라티아누스 게르만족의 연이은 침략에 맞서느라 발칸 반도를 휘젓는 고트족을 토벌할 여력이 없었다. 이에 아버지 대 테오도시우스가 반역죄로 처형된 뒤 고향인 히스파니아로 돌아가 은퇴 생활 중이던 테오도시우스 1세를 불러서 379년 1월 19일 동방의 황제로 선임해 고트 문제를 해결하게 했다.

테오시우스가 기세등등하던 고트족을 어느 정도 저지하는 데 성공할 무렵인 380년 2월, 두 황제는 테살로니카에 만나 종교 문제를 어찌 해결할 지 논의했다. 두 사람 모두 확고한 니케아파였기에, 아리우스파 등 이단들을 단호히 정죄해 국론을 통합해야 한다고 여겼다. 일설에 따르면, 테오도시우스가 테살로니카에서 심각한 질병을 앓았을 때 테살로니카의 주교 아촐리우스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회복되었고, 이에 이단을 타도하고 신의 뜻을 확고히 알리기 위해 칙령을 공표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380년 2월 27일, 그라티아누스와 테오도시우스 1세, 그리고 명목상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의 군주였던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연명으로 테살로니카 칙령이 선포되었다.

3. 내용

IMPPP. GR(ATI)ANUS, VAL(ENTINI)ANUS ET THE(O)D(OSIUS) AAA. EDICTUM AD POPULUM VRB(IS) CONSTANTINOP(OLITANAE).

Cunctos populos, quos clementiae nostrae regit temperamentum, in tali volumus religione versari, quam divinum Petrum apostolum tradidisse Romanis religio usque ad nunc ab ipso insinuata declarat quamque pontificem Damasum sequi claret et Petrum Aleksandriae episcopum virum apostolicae sanctitatis, hoc est, ut secundum apostolicam disciplinam evangelicamque doctrinam patris et filii et spiritus sancti unam deitatem sub pari maiestate et sub pia trinitate credamus. Hanc legem sequentes Christianorum catholicorum nomen iubemus amplecti, reliquos vero dementes vesanosque iudicantes haeretici dogmatis infamiam sustinere ‘nec conciliabula eorum ecclesiarum nomen accipere’, divina primum vindicta, post etiam motus nostri, quem ex caelesti arbitro sumpserimus, ultione plectendos.

DAT. III Kal. Mar. THESSAL(ONICAE) GR(ATI)ANO A. V ET THEOD(OSIO) A. I CONSS.
임페라토르 그라티아누스, 발렌티니아누스, 테오도시우스 아우구스투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신민에게 보내는 칙령.

우리는 관용과 절제의 대상이 되는 모든 다양한 국가가 충실한 전통에 의해 보존되며, 로마의 주교 다마소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베드로에 의해 공언되고 있는 신성한 사도 베드로에 의해 로마에 전달된 종교를 계속 공언하기를 바란다. 사도의 거룩한 가르침과 복음의 교리에 따라 동등한 위엄과 거룩한 삼위일체 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느님을 믿어라. 우리는 이 법의 추종자들에게 가톨릭 그리스도인의 칭호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를 믿지 않는 자들은, 우리의 판단에 따르면, 어리석은 미치광이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이단자라는 수치스러운 이름으로 낙인찍을 것이며, 그들의 수도회에 교회의 이름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첫째로 신성한 비난의 처벌을 받을 것이며, 둘째로 우리가 하늘의 뜻에 따라 가기로 결정할 우리의 권위의 처벌을 받을 것이다.

3월 말부터 3일째 되는 날, 테살로니카에서 그라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제5차 집정관과 테오도시우스 아우구스투스 제1차 집정관이 공표한다.

4. 영향

식자들은 테살로니카 칙령이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확정하는 것이었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고 니케아 공의회를 주관한 이래, 로마 황제들은 율리아누스를 제외하고 그리스도교를 일관되게 지지했으며, 국가 정책에 그리스도교 진흥을 반드시 반영했다. 황제의 언행과 칙령이 곧 제국의 정책이던 고대 세계에서 황제들이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하니, 그리스도교는 실질적으로 국교나 다름없었다.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국교로 확정짓는 칙령은 앞으로도 선언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모두가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대표적인 종교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칙령은 비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아리우스파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테오도시우스는 381년 5월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소집해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고 성령의 신성을 명확히 했다. 아리우스파 주교들은 정통 주교들로 대체되었고, 아리우스파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영구 추방되었다. 몇 달 후인 381년 1월 10일, 테오도시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일리리쿰 에우트로피우스(Illyricum Eutropius) 칙령을 반포했다. 이 칙령은 테살로니카 칙령보다 급진적이었다.
이단자들은 명시적으로 명명된 포티누스인들, 아리우스인들, 아노오이아인처럼 니케아 신경을 따르는 도시들과 교회들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그 후 테오도시우스는 니케아파가 아닌 모든 그리스도교, 특히 아리우스파를 억압하고 그가 다스리는 동방 영토 전역에 니케아 정교회를 세우는 데 사력을 다했다. 이로 인해 아리우스파 신자들의 거센 반발을 사서 제국 내에 그의 정통성을 시험하는 반란이 종종 일어났지만, 테오도시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종교 정책을 밀어붙였다. 황후 아일리아 플라킬리아 역시 남편의 뜻을 받들어 공개적으로 병자, 고아(특히 소녀), 과부, 굶주리는 사람들을 돌보면서, 그들에게 정통 교리를 설파하고 아리우스파를 배척하라고 가르쳤다.

이렇듯 이단을 상대로 공격적인 정책을 밀어붙인 데 비해, 이교도에게는 관용을 베풀었다. 그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이교도를 능가했지만, 여전히 많은 이교도가 잔존했고 영향력있는 이교도 지식인, 관료 및 장군도 상당했다. 테오도시우스는 이단은 그리스도교를 해치는 화근이니 뿌리를 뽑아야 하지만 이교는 잘 설득하면 자발적으로 개종할 거라 여겼고, 고트족의 분란과 사산 왕조의 위협이 강해지는 상황에서 그들을 적대해 분란을 초래하는 건 현명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는 재위 초기에 유능한 이교도를 요직에 앉히곤 했다. 희생제 금지령을 내리거나 짐승의 내장을 꺼내 점을 치는 등 미신 행위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권고' 수준에 그쳤다.

반면,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는 이교를 적극적으로 억압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모든 미신적 관습을 금지하고 마녀 및 마술사들을 처형한다는 칙령을 반포했으며, 오랜 세월 로마의 신들을 모시던 최고 신관, 즉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책에서 물러난 뒤 원로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로원에 설치되었던 승리의 제단(Altar of Victory)을 폐쇄했으며, 로마 건국 때부터 줄곧 함께 했던 베스타 신전의 해체를 시작했다. 382년, 그라티아누스는 이교도 사제들이 재산을 물려주는 걸 금지했고 모든 이교도 사제들의 특권과 면책권을 박탈했다. 또한 모든 이교도 사원들과 성소들은 정부에 의해 몰수되며 그들의 수입은 황실 재산으로 전용된다고 선언했다. 오랜 세월 로마 다신교를 신봉했던 사람들은 그의 이 같은 정책에 큰 충격을 받았고, 원로원은 승리의 제단을 재건하고 베스타 신전을 복구시켜 달라고 청했다. 심지어 일부 그리스도인 관료들도 제국의 분란을 염려해 황제를 만류했다. 그러나 그라티아누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급기야 교회법을 따르지 않는 관료들을 처형한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383년, 브리타니아에서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그라티아누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그라티아누스의 이교 억압 정책에 반감을 품은 이들이 대거 가담했고, 그라티아누스는 결국 반란군에게 패배해 목숨을 잃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발렌티니아누스 2세 마저 축출하려던 막시무스에게 전령을 보내 그가 이탈리아의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용인해준다면,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막시무스의 지위를 인정해줄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이에 막시무스는 384년 평화 조약을 체결해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일리리쿰 서부에서의 종주권을 인정했고, 자신은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의 황제로 공인되었다. 이후 막시무스는 이교도들을 온건하게 대하는 정책을 실시해 그들의 환심을 샀다. 특히 386년에 사원들과 축제들을 돌보는 것은 이교도들의 독점적인 특권이라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했다.

387년, 막시무스는 평화 협약을 위반하고 이탈리아로 진격해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축출했다. 테오도시우스는 막시무스에게 선전포고했고, 388년 7월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가 이끄는 로마군을 파견해 막시무스를 공격했다. 막시무스는 이에 맞서 사브 강 근처의 사스키아에 진영을 두고 적과 대치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몇 번의 전투에서 모조리 패했고 병사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여기에 프랑크 족이 북부 갈리아를 침략하면서 막시무스의 입지는 더욱 악화되었다. 막시무스는 아퀼레이아로 달아났으나 적에게 포위되자 항복했고 자비를 간청했지만 곧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리하여 로마 제국 전체의 권력을 손에 쥔 테오도시우스는 막시무스가 이교에 온건적인 태도를 취한 것에 대응해 자신을 그리스도교 수호자로 내세우며 본격적으로 이교 탄압 정책을 단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