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ae Romanae[1]
1. 개요
<rowcolor=#fbe673> 터키의 안타키아(안티오크)의 로마 가도 | 레바논의 유서 깊은 도시 수르( 티레)에 남아 있는 로마 가도 |
2. 건설 목적과 건설 주체
가도를 놓은 첫 번째 목적은 '군대를 원활하고 빠르게 파견하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도의 여왕이라 불리는 아피아 가도는 처음에는 카푸아까지였으나, 이후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장악하게 되면서 브린디시까지 연장되었다.두 번째는 '물류 이동'이다. 대표적인 예가 일명 아예 가도 이름이 ' 소금 길'인 살라리아 가도.
보통 이런 도로 계획을 짜는 사람은 재무관인데, 이를 기리기 위해 초기 가도의 명칭은 보통 해당 가도를 계획한 사람의 이름을 따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가도는 주로 로마 군단병들이 만드는데, 이 또한 명예로운 일로 여겼다. 어떤 군단병들이 이 가도를 만들거나 수리했는지 등을 기념하는 비석을 옆에 세웠을 정도. 그리고 이 특성을 따, 문명 5 로마의 전용 유닛인 군단병은 가도 제작 기능이 있다.
3. 가도의 건설
로마 가도의 건설방법
로마 가도는 단단한 돌과 각종 건축 재료를 동원해 매우 튼튼하게 만들어졌다는 게 특징이다. 주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 도로가 놓일 곳을 철저히 벌목한다. 도로 뿐만 아니라 도로 양 옆으로 수십미터를 모두 벌목한다.
- 도로가 놓일 땅을, 아주 단단한 지반이 드러날때까지 깊게 판다.
- 도로의 너비 규격에 맞게 양옆으로 연석들을 놓는다. 너비는 도로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인 왕복 2차로는 6m~7m 정도였다.
- 커다란 돌들이 도로의 기반으로 놓여진다.
- 그 위에 작은 돌들을 놓고, 모래 또한 촘촘히 더해져 돌들의 틈을 메꾼다.
- 이 위에 자갈들과 점토를 섞어 붓는다.
- 수레들이 왔다갔다하며 지금까지 쌓은 재료들을 단단히 다짐과 동시에 표층의 재료들을 쏟아주고, 물 또한 뿌려 잘 굳도록 한다. 재료들은 수평의 널판지에 의해 한번 평평해지고, 이어서 롤러에 의해 평탄해진다. 이 과정들을 반복하며 표층이 완성된다. 표층의 재료들은 도로의 종류와 도로의 위치에 따라 달랐고, 그 지방에서 채석할 수 있는 재료들 중 가장 좋은 재료들을 선별해 사용했다. ( 석회암, 화산재, 콘크리트, 시멘트, 석재)
- 도로의 사이드는 살짝 경사가 져있어서, 비가 오더라도 비가 가운데 고이지 않고 양 옆으로 빠져나가도록 했다.
- 완성된 표층은 비가 오더라도 젖거나 스며들지 않고 '거북이의 등껍질'과 같이 빗물을 튕겨내고 흘려보냈으며, 매끄럽고 평탄했다.
- 도로 양 옆으로 20 m씩에는 배수로를 파놓았는데, 이 배수로는 확인되지 않은 마차들이 도로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기능했다. 이 배수로와 도로 사이의 벌목된 공간은 야생동물이 갑작스레 공격하거나, 도로의 약탈자들이 매복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 또한 했다.
- 도로 양 옆에 1 로마 마일(약 1,481미터)마다 이정표( 마일스톤)을 세웠다.
이탈리아의 로마 가도에 대한 설명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마 제국의 도로에 대한 기록은 3세기 말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당시의 것으로 당대의 가장 큰 도로는 29개로, 제국의 113개 속주에서 국영도로(간선도로)는 총 372개로 도로 길이를 합치면 8만 5천㎞에 달했다. 또, 로마제국의 포장된 간선도로 총 길이는 8만 5천 ㎞지만[2] 지선도로(支線道路)까지 합치면 40만 ㎞ 이상에 달했다. 물론 도로건설 기술이나 경제력에서 각 지역마다 차이는 있었다. 주요 도로나 보조 도로는 둘 다 포장되거나 북아프리카의 경우처럼 자갈이 깔린 비포장 상태일 수도 있다. 이런 비포장 도로는 자갈 도로(viae glareae 또는 sternendae)라고 하였다. 보조 도로 다음으로는 흙길(viae terrenae)도 있었다. 로마의 도로에는 말 두 마리 마차를 기준으로 해서 마차의 수레에 맞는 홈을 파기도 했는데, 이를 두고 훗날 철도의 표준궤의 기준이 되었다고 하나 여기에는 설이 분분하다. 표준궤 문서 참고.
로마 도로의 최소 폭은 직선 구간에서 2.45 m, 굽은 구간에서는 4.9 m였다. 포장도로에는 잡석을 깐 노반을 깔았으며, 밑에 여러 층을 두어 기반을 단단히 다지고 건조한 상태를 유지하며 돌과 잡석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 진창길이 되지 않도록 막았다. 사람이 다니는 보도는 양 옆에 깔고 우마차가 다니는 차도를 중간에 두어 경계석까지 깔았다. 또한 경계석 옆으로 배수로 파놓고 도로도 정 중앙을 살짝 높여서 배수로로 배수가 잘 되도록 설계했다.
4. 튼튼한 내구도를 가진 편리한 교통의 중추
로마의 가도들은 진짜로 틈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중세를 거치면서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돌을 빼갔음에도 아직도 모양새가 상당히 그럴싸하다. 처음부터 수리를 자주 하지 않아도 도로가 오래 기능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기나긴 세월을 거처 남은 돌덩이도 풍화되었을 터임에도 비교적 돌 도둑이 적었던 가도들은 옛날 모습이 지금 모습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꽤 멀쩡하게 생겼다. 대부분 이탈리아의 간선 국도는 물론 예전 로마 제국 땅이던 곳 역시 로마의 가도에 아스팔트나 철도만 깔고 쓸 정도이다.
가도는 군대, 관리, 민간인, 제국 내 연락망, 무역 상품의 효율적인 육로 수송을 제공하였다. 로마의 길은 작은 지방 도로에서부터 도시, 주요 도시, 군사 기지를 연결하기 위해 건설된 광범위하고 장거리 고속도로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가 있었다. 이 주요 가도는 종종 돌로 포장되고 금속으로 처리되었고, 배수를 위해 경사가 있으며 보행자 길, 교각, 배수 도랑이 측면에 있었다. 가도는 정확하게 조사된 코스를 따라 놓였고, 일부는 언덕을 관통하거나, 강과 계곡에서 교량으로 통과했다. 부분적으로 뗏목이나 습한 땅 위에 기초를 쌓아 지지했다. 당대 로마의 가도는 전세계 어느 지역을 둘러봐도 비길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매우 선진적인 도로 체계에 속했으며 이용객들에게 쾌적함을 제공했다.[3]
때문에 2세기 이레네오는 "로마인들은 세계평화를 이룩했고, 우리는 도로를 따라 바다를 건너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나 두려움 없이 갈 수 있다."라고 했다. 17세기 프랑스 시인 라 퐁테뉴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잘 정비된 로마 가도는 로마 제국이 다른 국가보다 물류와 사람이 원활하게 이동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로마 가도는 수천 년 동안 로마의 영토였던 곳에서 주요 도로망으로 기능했고 지금도 유용하게 사용된다. 전술했듯이 현재의 이탈리아 도로 가운데서도 로마 가도를 이용한 부분이 꽤 있다.
고대 로마에서 구축한 로마 가도의 전체 지도를 알고 싶다면 이 링크를 참고하기 바란다. 기타 현대 로마가도들의 모습들과 지도들
5. 주요 가도
5.1. 이탈리아의 주요 로마 가도
- 살라리아 가도: 로마→아스콜리피체노→포르코다스콜리
- 라티나 가도: 로마→카푸아
- 아피아 가도: 로마→브린디시
- 발레리아 가도: 티볼리→코르피니오→아트리 페스카라
- 클로디아 가도: 로마→사트루니아
- 카이킬리아 가도: 라킬라→줄리아노바
- 옛 아우렐리아 가도: 로마→안세도니아(코사)
-
미누키아 가도: 베네벤토→브린디시
이 가도는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 때 전면 개조가 되어 이름이 아피아-트라야나 가도로 바뀐다. - 플라미니아 가도: 로마→리미니
- 아이밀리아 가도: 리미니→피아첸차
- 플라미니아 가도: 아레초→피렌체→볼로냐
- 카시아 가도: 로마→아레초
- 안니아 가도: 볼로냐→아퀼레이아
- 포스투미아 가도: 제노바→베로나→아퀼레이아
- 포필리아 가도: 리미니→아르티눔
- 안니아 가도: 카푸아→레조칼라브리아
- 새 아우렐리아 가도: 안세도니아(코사)→포플로니아
- 에밀리아 스카울리 가도: 포플로니아→제노바
-
발레리아 가도: 메시나→팔레르모
이 가도는 시칠리아 섬에 있다.
5.2. 이탈리아 이외 지방의 주요 로마 가도
-
도미티아 가도: 제노바[4]→나르본
남프랑스를 가로지르는 가도다. -
에그나티아 가도: 디라키움→마케도니아 지방
아피아 가도의 종점인 브린디시에서 배를 타면 디라키움에 도착한다. 에그나티아 가도는 그 디라키움에서 시작된다.
6. 함께 보기
[1]
고전
라틴어로 '비아이 로마나이', 단수로는 비아 로마나(via Romana)
[2]
예컨데
갈리아에서만 21,000 ㎞ 이상의 도로가 개선되었고,
브리타니아에서는 최소 4천 ㎞ 도로가 개선되었다고 한다.
[3]
비슷한 시기 강대국인 중국
한나라에는
비포장도로만 3만 5천 km가 있었고, 포장도로는 전무했다.
[4]
제노바가 확실한지는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