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 Augur |
1. 개요
고대 로마 사제단의 일원. 자연적 징후, 특히 새의 행동을 기반으로 원로원, 집정관 등이 결정한 정책에 대한 신의 뜻을 해석하여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한국어로는 주로 점복관, 조점관 등으로 번역된다.2. 기원
로마 학자들은 아우구르(Augur)라는 단어는 새를 의미하는 아비스(avis)와 본다라는 뜻의 스페케레(specere)의 합성어인 아우스피키움(auspicium)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많은 현대 학자들은 그보다는 "증가하다", "번영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어근인 아우게오(augeō)에서 유래했다고 추정한다.로마는 점술에 관해 에트루리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아우구르가 수행하는 점술, 특히 조점술은 에트루리아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것을 볼 때, 라틴족 또는 이탈리아 토착민들의 오래된 관습이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저서 <점술에 관하여(De divinatione)>에서 로마 점술과 에트루리아 점술의 주요 차이점 중 하나로 에트루리아엔 아우구르가 없었다는 점을 들었다.
조점술은 갈리아, 움브리아, 고대 그리스 및 소아시아에서도 종종 행해졌지만 다른 점술 방식보다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직 로마인만이 여기에 큰 비중을 두고 국가 전반의 정책을 결정할 때 조점술을 반드시 봤으며, 조점술을 볼 때의 절차와 규칙을 체계적으로 정했고, 이에 관한 방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들은 가장 강력한 권능을 행사하는 신인 유피테르가 새를 통해 자신들에게 계시를 내리고 있다고 확신했고, 조점술을 보는 아우구르는 대대로 높은 권위를 누렸다.
3. 역할
아우구르는 국가와 관련된 사안에 대한 신의 계시를 묻고 해석하는 임무를 맡았다. 왕국 시대엔 국왕의 왕위 계승이 신에게 승인되었는지 여부를 알아보았고, 공화국 시대엔 고위 행정관 및 사제의 취임, 공공 사업과 관련된 신의 계시를 알아봤다. 만약 아우구르가 신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할 경우, 행정관 선임이 취소될 수 있었고, 민회 소집이 다른 날로 변경될 수 있었으며, 국가 정책 역시 변경될 수 있었다.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426년 집정 무관이 독재관을 선임하는 것이 신들의 뜻에 부합한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을 때 아우구르가 이에 대한 신탁을 얻기 위해 조점술을 행했다고 한다. 또한 기원전 168년 켈트족과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군대를 소집했을 때 아우구르는 불길한 날을 골랐다는 이유로 로마 시민군은 원정을 떠날 수 없고 오직 라틴 동맹군만 집정관의 지휘하에 켈트족과의 전투에 투입되어야 한다고 선포해 원로원의 재가를 얻어냈다.
아우구르는 트라베아( 토가의 일종), 리투우스(lituus: 사제 지팡이), 카피스(capis: 희생 제물을 위한 특별한 그릇) 등을 상시 갖추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원로원의 지시를 받고 점술을 실시했다. 번개가 난데없이 치거나 우박이 쏟아지는 등 기상 이변이 발생했을 때 이를 해석하거나 희생동물을 잡았을 때 내장을 살펴봄으로써 신의 뜻을 확인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지만, 주로 조점술을 통해 신의 계시를 얻고자 했다.
아우구르의 조점술은 '아우스피키아 엑스 아비부스'(auspicia ex avibus)라 일컬어졌다. 이들은 유피테르의 대표적인 메신저로 일컬어지는 수리나 까마귀의 비행을 가장 주목했다. 때로는 새의 울음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특히 딱따구리, 수리, 까마귀, 부엉이, 물갈매기의 울음이 주목받았다. 만약 새들의 울음이 동시에 들릴 경우, '좀더 권위를 가진' 새의 울음을 우선시했다. 예를 들어, 수리의 울음은 딱따구리 등 다른 새의 울음보다 우선했다. 또한 로마인들은 새가 높게 날 경우(프라이페스(praepes)) 큰 행복이 찾아온다고 믿었고, 낮게 날 경우(인페라(infera)) 덜 행복해진다고 여겼다.
하지만 공중에서 비행하는 새를 특정 시각 및 장소에서 정확히 관찰할 수는 없었기에, 아우구르는 다른 방식의 조점술도 실시했다. 그들은 먼저 관찰이 이뤄지는 작은 공간인 테스쿰(tescum)을 지팡이로 그어서 표시했다. 이때 지팡이로 테스쿰 전체에 걸쳐서 두 개의 선을 그었다. 첫번째 선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졌고, 두번째 선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며 첫번째 선과 교차했다. 그런 다음 선의 끝을 연결하여 직사각형을 만들고 점술 의식을 실시했다. 이 의식은 로마 인근의 지정된 장소[1] 또는 숙영지 내 아우구르가 머무르는 천막에서 실시했다. 이후 닭을 테스쿰 안에 넣고 모이를 줘서 그것을 쪼아먹는 모습을 관찰했다. 닭이 모이를 잘 먹으면 길조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길하다고 여겨졌다.
전쟁을 수행하는 집정관 및 고위 행정관들은 중요한 전투를 치르기 전에 언제나 조점술을 실시해 신들이 자신들과 함께 한다는 것을 병사들에게 널리 알림으로써 사기를 고양하고자 했다. 물론 그렇게 했다가 불길하다는 결과가 나오면 곤란했기에, 아우구르와 사전에 합의해서 웬만한 것은 전부 길조라고 해석했을 것이다. 하지만 간혹 조점술로 인해 곤경에 처하는 일도 있었다. 기원전 249년,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항구 도시인 드레파나에 기반을 둔 카르타고 해군을 기습 공격하기 위해 자정에 123척의 함대를 이끌고 드레파나 항구로 출진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전투의 향방을 알아보기 위해 닭들이 모이를 쪼아먹는 의식을 진행했다. 그런데 닭들이 좀처럼 모이를 쪼아먹지 않아 병사들이 불안해 하자, "먹기 싫으면 물이나 마셔라!"라고 외치며 바다에 던져버렸다. 이후 드레파나 해전에서 참패한 그는 닭을 함부로 대해 신들의 노여움을 사 패전을 초래했다는 이유로 고발당해 막대한 벌금을 부과받고 자살했다.
아우구르는 주로 국가의 정책의 가부 여부를 신에게 묻는 역할을 맡았지만, 로마인들의 사적인 문제에도 종종 개입했다. 로마인들은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신들의 뜻을 얻기 위해 이들에게 조점술을 봐달라고 의뢰하곤 했다. 이를 아우스피키아 프리바타(auspicia privata: 개인적 조점술)이라고 하는데, 가장 일반적인 상황은 바로 결혼식이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12표법이 제정된 후 평민들이 '귀족과 평민의 결혼을 금지한다'는 법을 폐지하라고 요구했을 때, 귀족들은 귀족만 맡을 수 있는 아우구르가 결혼식의 성립까지 결정하므로 귀족과 평민이 결혼하는 것은 신의 뜻에 어긋난다고 반박했다고 한다. 그러나 평민들의 요구가 갈수록 거세지고 급기야 성산 사건이 발발하자,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귀족과 평민의 결혼을 허용했다.
4. 역사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로물루스는 팔라티움 언덕에 수리 12마리가 있는 것을 보고 그곳에 로마 시를 세웠다고 한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이 도시가 조점술을 통해 건설되었고, 전쟁과 평화, 국내와 해외의 모든 것이 조점술을 거친 후에야 이뤄졌다는 사실을 어느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또한 리비우스는 누마 폼필리우스 왕 통치 기간 동안 아우구르가 정식으로 도입되었으며, 기원전 509년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등이 혁명을 일으켜 로마 공화국을 세울 무렵에 3명의 아우구르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아우구르는 로마 공화국 초기에는 오로지 파트리키만 맡을 수 있었지만, 기원전 300년 오굴니우스 법(lex Ogulnia)이 도입되면서 평민도 아우구르를 맡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본래 아우구르 사제단의 추천을 통해 선발되었지만, 기원전 154년 호민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제안에 따라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
아우구르 사제단의 수는 처음엔 3명이었다가 기원전 3세기 무렵에 6명, 포에니 전쟁 무렵에 9명으로 늘어났고,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시대에 15명으로 늘어났다. 술라는 민중파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아우구르를 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아헤노바르부스 법을 폐지했지만, 기원 63년에 부활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독재관으로 집권하던 때에 1명 더 늘어나서 총 16명이 되었다. 기원전 44년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아우구르를 선거를 통해 뽑는 법안을 다시 폐지했지만, 이듬해 집정관 아울루스 히르티우스와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가 부활시켰다.
기원전 30년 모든 정적을 물리치고 최고 권력자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이 로마에 팍스(Pax: 평화)를 회복시킴으로써 신이 정한 '평화의 조건(pax deorum)'을 달성했으니 점술권(ius augurum)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점을 원로원으로부터 인정받고, 아우구르를 직접 선임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일부 학자들은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호칭 자체가 신들의 계시를 알아볼 수 있는 아우구르를 직접 선택할 정도로 존엄한 인물이라는 점을 내세우려는 아우구스투스의 복안에 따라 창조된 것이라고 추정한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13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사망한 뒤 공석이 된 폰티펙스 막시무스까지 도맡았고, 이를 토대로 국가 신탁에 대한 사제직 통제권을 확보해 '승인되지 않은' 신탁의 유포를 억제하는 권한을 사용했다.
그 후 로마의 역대 황제들이 국가 최고 사제로서 막강한 권위를 누리는 동안, 아우구르는 이렇다할 권력이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지만 명예직으로서 이를 맡은 이들에게 명성을 부여했다. 그러다가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공인한 뒤 기독교가 로마 세계의 대표적인 종교로 자리잡으면서 쇠락하다가 테오도시우스의 이교 박해 이후 사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