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민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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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리아 민회 | 켄투리아회 | 평민회 | 트리부스회 | }}}}}}}}} |
1. 개요
라틴어: Comitia Centuriata.영어: Centuriate Assembly.
로마 공화국의 4개 민회 중 한 형태. '백인대 집회', '병사회'로도 일컬어지며, 로마 공화국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민회로 손꼽혔다.
2. 상세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가 전하는 전승에 따르면, 로마 왕국 제6대 국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백인대장 제도에 따른 최초의 민회를 소집했다. 그는 첫번째 소집에서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백인대 단위의 공동체 설립을 위해 실시한 인구조사가 정확하게 수행된 것을 축하했다고 한다. 이 민회는 초창기에는 군사적인 문제만 논했고, 전반적인 국정은 쿠리아 민회에서 다뤄졌다.하지만 전쟁을 거의 매년 치르면서 군공을 세운 플레브스들이 오직 파트리키 대표만 투표할 수 있는 쿠리아 민회가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불공평하다며 불만을 꾸준히 제기했고, 파트리키들은 국가를 운영하려면 플레브스의 협력을 받아야 한다는 걸 깨닫고 권력을 점진적으로 양보했다. 기원전 450년 켄투리아회에서 선출한 10명의 대표가 머리를 맞대어 고안한 12표법이 공표되면서 사형을 선고받은 시민에게 대체 형벌을 부과하는 권한인 '프로보카티오 아드 포풀룸(Provocatio ad populum: 인민에 호소하다)'이 쿠리아 민회에서 캔투리아회로 넘어간 것을 시작으로, 켄투리아회는 쿠리아 민회로부터 대부분의 권한을 인계받으면서 대표적인 민회로 자리잡았다.
켄투리아회는 로마 시의 신성한 경계로 간주된 포메리움(pomerium) 외곽의 광장인 캄푸스 마르티우스(Campus Martius)에서 소집되었다. 민회에 소집된 시민들은 각자 무장한 채 자기가 소속된 백인대에 집결했다. 민회가 진행되는 동안 카피톨리누스 언덕과 야니쿨룸 언덕[1]에 붉은 깃발이 내걸렸다. 만약 외적이 쳐들어오면 붉은 깃발이 내려갔고, 민회는 즉시 해산되고 시민들은 즉각 적과 맞설 준비를 해야 했다.
켄투리아회는 사형이나 채찍형을 선고받은 이들에게 다른 형벌을 내릴 지 여부를 결정하는 등 사법에 관여할 수 있었고, 감찰관, 집정관, 법무관 등 고위 행정관 선거를 치렀다. 집정관과 법무관은 보통 7월에 켄투리아회를 통해 선출되어 1월에 취임했고, 감찰관은 평균적으로 5년마다 한 번씩 현직 집정관의 주관하에 2명이 선출되었다. 여기에 원로원과의 협의를 통한 법안 통과, 전쟁 선포 등도 다뤄졌다. 이렇듯 국정 전반을 다루는 민회에 출석한 백인대는 재산을 소유한 정도에 따라 구분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각 백인대는 아래의 계급으로 나뉘었다고 한다.
- 에퀴테스: 로물루스가 창설한 3개 백인대와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왕이 창설한 3개 백인대를 합친 기존 6개 백인대에 기마를 보유할 수 있는 부유한 시민들로 구성된 12개 백인대가 추가된, 총 18개 백인대가 여기에 해당되었다.
- 제1계급: 소득이 10만 아스를 초과하는 시민으로 구성된 80개 백인대. 주로 투구, 클리페우스(Clipeus, 둥근 방패), 전신 청동 갑옷 등을 갖춘 중장보병들이 여기에 해당했으며, 공성 무기 등 전투 무기를 제작하는 공병대 2개 백인대도 여기에 소속되었다.
- 제2계급: 소득이 75,000 아스에서 10만 아스 사이인 시민으로 구성된 20개 백인대. 사각형 방패와 사슬 갑옷으로 무장한 보병대가 여기에 해당한다.
- 제3계급: 소득이 50,000 아스에서 75,000 아스 사이인 시민으로 구성된 20개 백인대. 제2계급보다는 열악하지만 나름대로 갑옷을 갖출 수 있는 보병대가 여기에 해당한다.
- 제4계급: 소득이 25,000 아스에서 50,000 아스 사이인 시민으로 구성된 20개 백인대. 창과 글라디우스만 가지고 다닐 뿐 자신을 방어할 만한 무기는 갖추지 못한 보병대가 여기에 해당한다.
- 제5계급: 소득이 11,000 아스에서 25,000 아스 사이인 시민으로 구성된 30개 백인대. 가벼운 복장에 필룸 및 투석으로 전투에 임하는 벨리테스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렇게 에퀴테스부터 제5계급까지 188개 백인대가 구성되며, 여기에 목수(fabrii tignarii), 대장장이(fabrii aerarii), 나팔 연주자(tubicines), 코르누[2] 연주자(cornicines), 연락병(Accenti) 등 5개 백인대가 추가되어 총 193개 백인대가 민회에 참석했다고 전해진다. 각 백인대는 구성원들간의 비밀 토론 끝에 입장을 정한 뒤, 백인대 대표가 투표 용지를 작성한 후 키스타(Cista)로 일컬어지는 상자나 바구니에 넣었다. 이후 키스타를 관리하기 위해 특별히 선임된 직원들이 개표 후 결과를 민회를 주재하는 집정관에게 보고했다. 193표 중 과반수인 97표가 충족되는 순간, 투표 절차는 그대로 종료되었다.
가장 부유한 시민이 모인 백인대에는 20명 내지 30명 정도밖에 안 되었고, 그보다 못한 시민이 모인 백인대는 수백 명 내지 수천 명이나 되었지만, 한 백인대가 한 표를 행사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20명 내지 30명이 행사하는 한 표와 수천 명의 한 표는 같은 비중이었다. 또한 상위 그룹부터 투표를 했기 때문에, 18개의 에퀴테스 백인대와 80개의 제1계급 백인대만 해도 총 98표로 과반수인 97표를 넘겼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 에퀴테스와 1계급 시민들의 의사에 따라 민회가 좌지우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품은 평민들은 민회 구성 방식에 꾸준히 이의를 제기했고, 기원전 494년 평민회를 별도로 구성해 호민관, 평민 조영관을 선출해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고자 했다. 기원전 3세기경, 켄투리아회의 구조가 변화되었다. 이에 따르면, 켄투리아회를 구성하는 백인대는 1계급~5계급까지에 각각 70개씩의 백인대를 배정하고 프롤레타리아(무산자)로 구성된 23개 백인대를 추가해 총 373개로 늘어났다. 전통에 따라 표수는 193개로 유지하되, 하위 4개 계급의 백인대들은 2~3개 백인대가 하나씩의 투표권을 가지면서 총 100표에 프롤레타리아의 표까지 더해서 105표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반면 기사 및 1계급은 기사들의 18표+1계급의 70표로 88표의 투표권만 가져갈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기사계급 및 제1계급의 의사만 반영되던 상황이 어느정도 해소되었지만, 새로 의중을 반영할 수 있게 된 2계급 역시 부유층이었기 때문에 1계급과의 의견차는 적었고, 하위 계층의 의사반영은 여전히 요원했다. 특히 가장 낮은 순위의 백인대인 프롤레타리아는 언제나 마지막으로 투표했기 때문에 선거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었고, 인구 조사를 할 때도 무시되었다.
기원전 2세기에 켄투리아회의 운영 방식과 권한이 재차 수정되었다. 기원전 150년, 에퀴테스는 제1계급에서 완전히 분리되었으며, 에퀴테스에 속하는 시민의 부는 제1계급보다 10배 이상 되어야 했다. 기원전 123년 호민관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켄투리아회의 결정에 따라 직책에서 해임된 이들은 정치 경력을 지속할 수 없으며, 켄투리아회의 승인 없이 시민을 처형하거나 추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여기에 5개 계급의 모든 백인대에서 추첨을 통해 '특권을 가진 백인대장'(praerogative centuria)을 선출하고, 그가 먼저 투표를 행사하는 법안도 통과시켰다.
기원전 82년 술라의 내전을 통해 절대 권력을 장악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켄투리아회의 운영 방식을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시대의 방식으로 환원해 로마법에 대한 파트리키의 통제를 강화시켜서 또다른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등장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기원전 70년 집정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술라의 개혁을 폐기하면서 켄투리아회를 원래대로 돌려놨다.
그 후에 벌어진 로마 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지중해 세계의 절대 권력자로 군림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이 수행한 개혁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켄투리아회의 동의를 받아내는 형식적인 절차를 반드시 실시했다. 서기 5년엔 <발레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법>이 공표되었다. 이에 따르면, 켄투리아회에 참석하는 백인대는 10개로 축소되며, 600명의 원로원 의원들과 3000명의 에퀴테스 및 평민들을 여기에 배치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민회 운영 및 선거에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느라 곤욕을 치러야 하는 원로원 의원들을 만족시켜서 자신이 구축한 체제를 지지하도록 유도하면서도, 민회를 완전히 통제하기 위한 술수였다.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원수정이 자리잡으면서 민회의 역할은 갈수록 무의미해지고 소집도 뜸해지다가 14년 티베리우스 황제가 켄투리아회가 집정관과 법무관을 선출하는 권리를 박탈한 후 사실상 무의미해졌고, 어느 시점부터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