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민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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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리아 민회 | 켄투리아회 | 평민회 | 트리부스회 | }}}}}}}}} |
1. 개요
쿠리아 민회(Comitia Curiata)는 고대 로마의 가장 오래된 민회이다. 부족 대표가 참여하여 정무관들에게 임페리움을 부여하거나 사제단을 선출하는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2. 상세
전승에 따르면, 로마 왕국 초대 국왕 로물루스가 나라를 건국한 직후 로마인들을 람네스(Ramnes), 티티에스(Tities), 루케레스(Luceres)의 3개 트리부스(Tribus: 부족)으로 편성하고, 각 트리부스는 10개의 쿠리아로, 쿠리아는 10개의 겐스(씨족)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왕은 로마 시민의 조언을 구할 필요가 있을 때 30개의 쿠리아에서 대표로 선출된 30명의 파트리키를 한 곳에 소집시켰다.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에 따르면, 쿠리아 민회는 팔라티노 언덕에 위치한 쿠리아이 베테레스(Curiae Veteres)에서 열렸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곳이 팔라티노 언덕의 북동쪽 부분일 거라고 추정한다.쿠리아 민회에 소집된 대표들은 국왕에게 자문할 수 있었으나, 국왕이 제안한 법안을 발의하거나 수정할 수 없었고, 오직 국왕의 정책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역할만 맡았다. 또한 왕이 사망한 후 인터렉스가 새 왕을 제안했을 때 승인하거나 거부하는 역할도 맡았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에 따르면, 이들은 평화와 전쟁을 결정하기도 했으며, 치안판사를 선출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테오도르 몸젠은 이들이 전쟁에 돌입하기 전에 조약을 파기해야 할 경우 왕의 결정을 추인하는 기능만 수행했다고 주장했으며, 이탈리아의 법학자 피에트로 드 프란시치(Pietro De Francisci, 1883 ~ 1971)는 이들은 왕의 정무관 선임 및 정책 수립을 추인하고 인터렉스가 새 왕을 뽑을 때 환호를 통해 받아들이는 역할만 맡았다고 추정했다. 그러면서 쿠리아 민회의 실질적인 역할은 특정 귀족이 사망하면서 남긴 유언장을 집행하고 후계자를 공식적으로 지정하고, 로마 시민이 또다른 시민을 입양하는 것을 승인하는 등 파트리키 가문 내 사안을 집행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에 따르면, 기원전 509년 로마 최후의 국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타도하고 집정관에 선출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는 타르퀴니우스 왕실에게서 몰수한 자산을 어찌할 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쿠리아 민회를 소집했다고 한다. 그 후 쿠리아 민회는 공화정 초기에 입법, 선거, 사법 기능을 갖춘 실질적인 권력기구로 변모했다.
쿠리아 민회는 사형을 선고받은 시민에게 대체 형벌을 부과하는 권한인 '프로보카티오 아드 포풀룸(Provocatio ad populum: 인민에 호소하다)'을 행사할 수 있었고, 원로원이 결정한 법안을 추인하고, 집정관을 투표를 통해 선출했으며, 정무관들에게 임페리움을 부여하고 사제단을 선출했다. 또한 파트리키와 플레브스 모두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지만, 오직 파트리키만 투표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민회가 열리는 장소가 비좁게 되자, 쿠리아 민회는 쿠리아이 베테레스에서 쿠라이이 노바이(Curiae Novae)로 이전되었다. 페스투스에 따르면, 이 곳은 콤피툼 파브리쿰(Compitum Fabricium) 인근에 위치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첼리오 언덕의 비쿠스 파브리키이(Vicus Fabricii) 구역에 세워진 건물이었을 거라 추정한다. 페스투스에 따르면, 다른 쿠리아 대표들은 새 집회 장소에 모였지만, 7명의 대표는 기존의 장소에 계속 남아서 민회에 참여했다고 한다.
릭토르가 원로원의 결정에 따라 민회를 소집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가운데 진행된 투표에서, 30명의 대표를 비롯한 부족민들이 한 자리에 모여들었다. 이후 민회에 상정된 법안이 낭독되었다. 이때 정무관들은 민회에서 자유롭게 연설할 수 있었지만, 민간인의 연설은 입법이나 사법 문제에 관한 투표인 경우에만 허용되었고, 집정관으로부터 발언 허가를 받은 후에야 할 수 있었다. 법안 내용을 접한 부족민들은 콘벤티오(conventio: 비공식 토론)를 수행 후 자체적으로 찬반 여부를 투표했다.
대표들은 다수표를 획득한 입장에 따라 투표 용지를 작성한 뒤 키스타(Cista)로 일컬어지는 상자나 바구니에 넣었다. 이후 키스타를 관리하기 위해 특별히 선임된 직원들이 개표 후 결과를 민회를 주재하는 집정관에게 보고했다. 찬성 및 거부 중 한 쪽에 과반수인 16표가 충족되는 순간, 투표는 즉시 종결되었다. 만약 투표가 일몰까지 끝나지 않을 경우, 민회는 해산되었고 다음날 아침 투표를 재개해야 했다.
집정관 선거의 경우, 후보자 발표와 실제 선거 사이에 최소 3일의 기간이 필요했다. 트리눈디눔( trinundinum)으로 일컬어지는 이 기간 동안, 후보자는 유권자들과 접촉했으며, 민회에서는 어떤 법률도 제안되거나 투표될 수 없었다. 유권자들은 투표일에 먼저 콘벤티오(conventio: 비공식 토론)를 위해 서로 모였다. 이후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이 연설하는 것을 경청한 뒤 논의 끝에 자체적으로 표결했고, 대표자들은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한 후보에 정식으로 투표했다.
이렇듯 로마 공화국 초창기에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던 쿠리아 민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입지가 위태로워졌다. 전쟁을 거의 매년 치르면서 군공을 세운 플레브스들이 오직 파트리키 대표만 투표할 수 있는 쿠리아 민회가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불공평하다며 불만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450년 12표법이 공표되면서 프로보카티오 아드 포풀룸을 행사하는 권한이 군사적 문제만 논하던 켄투리아회로 이전된 것을 시작으로, 쿠리아 민회는 수십년간 대다수의 권한을 상실했고, 단지 집정관, 법무관 등 주요 행정관의 선거 결과를 비준하고 임페리움을 공인하는 상징적인 역할만 맡게 되었다.
하지만 권력을 잃은 후에도, 쿠리아 민회는 집정관과 법무관에 의해 꾸준히 열렸다. 기원전 3세기 후반 무렵에 30명의 쿠리아 대표로 구성되는 체계는 폐지되고 파트리키 가문을 대표하는 릭토르 30명이 모이는 체계로 대체되었다. 또한 이들은 폰티펙스 막시무스의 주관하에 귀족이 남긴 유언장을 집행하거나 입양을 추인하는 역할을 계속 수행했다.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는 플레브스 집안에 입양됨으로써 호민관에 출마할 수 있는 권리를 여기서 인정받았다. 또한 쿠리아 민회는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남긴 유언에 따라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양되고 재산을 상속받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로마 제국 출범 후 쿠리아 민회는 더 이상 열리지 않았고, 로마 황제들은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겸임하면서 유언장 및 입양 추인을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