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16:15:24

NL(정파)

학생회의 계파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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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학생운동단체( NL 계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1987년~1993년1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1993년~2011년2
21세기한국대학생연합
2005년~2018년 해산3
한국대학생진보연합
2018년~활동 중
1: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건설 준비위원회’를 발족하기로 결의하며 자진 해산
2: 이적단체 지정
3: 진보당 성향은 진보대학생넷을 결성했고, 주권연대 성향의 남은 조직은 한국대학생진보연합으로 계승됐다.

운동권의 계파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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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논쟁
무림(MC) 학림(M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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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3차 사구체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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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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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제독PD(AMC)+ND+제파PD(AF)
2NL좌파+ND+제파PD(AP, AF)
3 현장파에 대응하는 학생운동 단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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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형성3. 핵심 사상과 주장
3.1. 핵심적 주장 요약3.2. 현실 인식3.3. 농민운동3.4. 외국에 대한 태도3.5. 주체사상 추종 논란과 종북 논란
4. 조직
4.1. 학생회4.2. 단결에 있어서의 문제
5. 비판
5.1. 정치행태5.2. 자정 시도
6. 현황7. 미래
7.1. 21세기 사회주의로의 변화7.2. 민족주의적 노선만 남긴 형태의 전향7.3. 범민족주의로 전향
8. 여담: 현존하는 종북주의자9. 참고자료10.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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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0년대 중반 성립된 운동권 민족주의 성향 정파. NL(National Liberation, 민족해방파)로 흔히 알려졌는데, 스스로는 NL이라는 용어 대신 금과옥조로 여기는 자주/민주/통일의 약어에서 따온 자민통 진영으로 불리는 것을 선호한다. 이후 진보정당운동에서 자주파로 불리며 평등파로 불리던 PD계열과 경쟁하였다.

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미국에게 종속되어 있는 민족모순이라고 판단하여 반미운동을 통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북한과 협력하여 통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였다.[1] 이중 일부는 종북 성향으로 이어져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흐름이 나타나거나, 심지어는 북한의 대남공작과 연계되기도 하였다.

80년대부터 30여년간 한국 진보운동의 주류였으나, 2013년 통합진보당 내란선동 사건 이후 NL의 어두운 면들이 많이 밝혀지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2014년 통합진보당이 정당해산 심판으로 붕괴한 뒤 대한민국 진보운동의 주도권은 PD계열 위주의 정의당이 가져가게 되었으며, NL은 진보당을 창당하여 재기[2]를 노리고 있다.

반미, 반서방, 반일, 친중, 친북[3] 성향을 띄고 있다.

2. 형성

1980년대 초중반에 학생운동권에서 돌출한 사구체 논쟁[4]을 통해 NLPDR, 즉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론(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cy Revolution)[5]을 주장하던 그룹은 세를 불려나가면서 CA와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두고 대립하였다.

1980년대 초반 학생운동에서 돌출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발생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5.18 민주화운동이다.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사에서 광주항쟁은 반미가 중요한 명제로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1970년대까지 재야와 대학생 등 민주화 운동 세력 대다수는 미국을 박정희 정권의 폭주를 저지하는 고마운 우방으로 보았으며, "그나마 미국이 있으니 간신히 숨통이 트인다"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유신 말기의 카터 정권 인권 민주화를 중시하며 박정희 정부와 사이가 껄끄러웠던 것도 이러한 분위기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민주화운동세력 내에선 북한에 대해서 통일을 이루어야할 같은 민족으로 대화와 협력의 대상으로 보았지만, 동시에 호시탐탐 적화통일을 노리는 침략자 무리라는 반북, 반공 정서도 같이 존재하였다.[6]

그러나 1980년대 들어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운동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신군부가 다시 정권을 틀어쥐는데, 미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7] 넘어가 버린 것이다. 특히 5.18 민주화운동 당시 미국은 신군부의 과잉유혈진압을 사실상 방관하였고, 카터 이후에 집권한 로널드 레이건 정권이 전두환을 미국에 초청하는 등 신군부의 집권을 지지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면서 학생운동 그리고 재야민주화운동 내부에 반미 정서가 폭발하기 시작한다.[8][9][10][11]

반미운동의 무풍지대 중 하나라던 대한민국에서 1982년의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같은 반미 시위가 터져나오고, 민주화운동 진영 전반에 반미정서가 자리잡게 된다.[12][13]

이러한 와중에 김영환의 강철서신을 계기로 주체사상이 유입되는데, 한반도에서 처음 만들어진 과학적 변혁이론으로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가 생겨난다. 그리고 1987년 6.10 민주 항쟁 국면에서 직선제 개헌이란 아주 간단명료한 슬로건을 내세워서 폭넒은 대중성을 확보하게 되면서, 대립하고 있던 CA그룹의 일부[14]마저 흡수하면서 범NL계열은 엄청난 양적팽창과 함께 학생운동의 주류가 되어 전대협 한총련을 주도한다. 이후 '애국적 사회진출' 이란 이름으로 학교를 떠나 노동운동과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다.

3. 핵심 사상과 주장

3.1. 핵심적 주장 요약

이들의 주장은 아주 거칠게 요약하면 자/민/통으로 표현된다. 1980년대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불타오른 반미정서와 폭압적인 군사독재 그리고 외국차관에 의존해서 성장한 재벌(매판자본)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상황에서 정립된 NLPDR이론은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 조국통일"을 3대 목표로 설정했다.

즉 한반도 남반부를 강점하고 있는 주한미군과 미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고(반미자주화), 이들의 하수인 파쇼독재 정권을 타도한 후에(반파쇼민주화), 자주적 민주정부를 건설해서 북한과 연방제 통일을 달성하자(조국통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것이 NL의 모든 것이다. 따라서 모든 활동이 남한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보는 미국과의 투쟁, 반미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 때문에 이 세상 모든 문제를 반미냐 친미냐로만 해석하게 되고, 수준낮은 음모론도 횡행해서 많은 조롱을 받는다. 때문에 반미투쟁과 그 외 투쟁의 온도차가 확연히 나타나며 이러한 NL계열의 인식에 대해 외부인 입장에선 상당한 위화감을 느낀다. [15]

이념이 좀 허황되지만 매우 단순하고 감성적이라서 열성적이며 운동세력의 다수를 차지한다. 물론 이론과는 관계없이 PD계가 조직력 구축에 소홀했고 내부 토론을 하는데 바빴던데 반면(안 좋게 얘기한다면 키배질), NL계는 "품성론"을 바탕으로 기본적인 조직력을 탄탄히 갖추었기 때문에 운동판에서 다수를 차지해왔다. 나쁘게 표현하자면 이론이 빈약하고 감성을 자극하는 수법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이론의 발전이 거의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이른바 승리적 관점이라는 이상한 시각으로 모든 행동을 긍정적으로 표현한다. 이게 버릇이 아니라 실제 이념으로 존재한다. 우리를 대표하는 위대한 영도자(수령이든 단체장이든)가 행하는 일에 실패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수단과 과정에 대한 고찰이 그만큼 부실하게 될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결과론적인 입장을 자주 취한다. 수직적 조직구도와 함께 PD계열이 가장 반발하는 부분이 이 항목이다. 친북은 그 차후의 문제고.

3.2. 현실 인식

현재의 대한민국을 미국의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로 보고 있다. 뉴라이트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런 주장을 한 안병직은 뉴라이트 초기 인사가 된다. 원래 이론은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이었는데 80년대의 3저호황 이후 약간 이론을 수정해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했고, 식민지반봉건론을 주장한 안병직은 일본 경제학자 나카무라가 주장한 중진자본주의론을 받아들여[16] 식민지 근대화론의 기초를 마련한다.

대한민국 정부를 미제의 꼭두각시 정부라고 판단하여 그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언뜻 보면 일본의 한국사 정체성/타율성론과 비슷하게 보이나 사실은 다른 이론으로, 이들이 카를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5단계설과 그 이후 좌파들의 논의를 검토한 결과 내린 결론이다. 물론 지금은 역사학계/사회과학계는 물론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대접받지 못하는 이론이지만, 1980년대 당시 제대로 성숙하지 못한 학생사회와 검열로 인한 정보부재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어려운 현상은 아니다. 이론이 말이 안 될 뿐이지. 다만 1980년대 말 PD계열과의 논쟁에서 완전히 박살난 이후에는 식민지 반자본주의론으로 한단계 업글하였다. 소위 식반자론. 어찌하던 남한은 미제의 식민지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와 반대로 북한은 외세의 식민주의적 침략과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민족 자립국가로 보았으며, 그 중 일부는 남한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바로 북한이고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남한보다 북한이 훨씬 자유롭고 자주적인 국가라고 여기는 오류를 저지르기도 했다. 따라서 남과 북이 힘을 합쳐서 외세인 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같은 민족끼리 자립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1960~70년대 북한을 사회주의 국가들의 모범으로 여겼던 타국 사회주의 진영들의 평가도 한 몫했다. [17]

이런 환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깨지게 되었지만[18], 행여나 북한이 남한보다 빈곤하더라도 남한은 미제에 종속되고 북한은 자립하여 정통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북한을 중심으로 두고 남한을 봐야한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3.3. 농민운동

NL은 남한사회를 봉건주의라고 보기 때문에 농민과의 연대를 중시하여 전농과 긴밀하게 연대한다.[19] 학생회가 한총련 계열이라면 거의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농번기에 농활을 갔는데,[20] 협동봉사라는 측면도 있지만 정치적인 이유가 더 강하기 때문에 한총련 지도부에서 각각의 학교에 지역할당을 해 누락되는 지역이 없도록 전국적으로 조직했다. 뭐, 그렇다고 PD 애들이 농활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의미가 좀 다르다. 실례로 어느 대학의 PD계열의 학생회에서 '학우들의 부모님을 돕자!'라는 취지로 한총련에서 내려온 할당구역을 무시하고 농사짓는 학생의 집 위주로 농활을 꾸렸다가 비판당한 일이 있었다.

3.4. 외국에 대한 태도

간단히 표현하면 반미( 반서방), 반일 친북, 친중[21]이다.

반미주의 노선을 걷던 NL그룹은 2000년대 이후 중국이 미국의 대항마로 급부상하자 빠르게 친중 성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중국이 전세계적으로 고립된 북한의 유일한 동맹국이자 후원국인 것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태도 탓에 과격한 배타적 국수주의라는 비판과 함께, 시대착오적인 반일, 반미적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다는 비판을 듣는다. 거기다 NL들의 주 성향인 반일감정 또한 친중과 맞아떨어진다. 항상 미제타도, 일제타도를 외치는 NL들이 중국과 손잡자고 주장하는 건 그간의 행태를 보아하면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미제의 하수인인 반통일수구세력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입장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진보좌파 사상이 국제주의, 사해평등주의 성향을 띄어온 것과 다르게 NL그룹은 한국의 수출주도형 경제구조 등을 고려하지 않은[22] 고립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성향은 외국과의 국제협력이나, 한국군 해외파병 문제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PD들이 해외파병에 대해서 '명분 없는 전쟁' 혹은 '한국의 이미지 악화가 우려'[23] 라는 의견을 내놓으며 반대할 때, NL들의 파병 반대 이유는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이라서'(...) 위에도 서술했듯이 똑같은 FTA인데 한-미 FTA와 나머지 국가와의 FTA를 대하는 온도차가 명백하다.[24]

이들이 동경하는 것이 중국식 정치체계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연하게 중국의 일당정치체제의 권력결정자들 기준으로 중국식 정치체계를 동경하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까 대중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중국의 공산당 체제가 자신들이 그토록 만들고자 했던 체제이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보자면 자신들이 주도하는 유신체제 즉 NL이념에 기반한 독재가 이들이 원하는 지향하는 정치체제의 이상향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중국에게 더욱 호의적일 수밖에 없고 추종국가이니 더더욱 친중적 마인드가 극단적인 반미와 정 반대적 상호대립관계를 보여주는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입장에서도 NL계의 입장이 드러나는데 NL계 본진격인 민중당에서 중국편을 들며 시위대들을 나무라는 성명을 냈다. 친중 반미적 성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NL답다는 평을 받았으며, 신좌파와 PD계를 포함한 진보권에게도 비판을 받았다. 이후 중국의 과격 진압이 대두되자 그나마 다른 기관에서 중국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실 이마저도 과격진압을 비판하는 정도의 논조이지 홍콩시민에 대한 지지 선언은 아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당시에는 러시아편을 두둔하며[25] 미국과 우크라이나를 비난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

3.5. 주체사상 추종 논란과 종북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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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民統(자민통)은 북한공산집단의 대남적화통일 전위조직인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의 강령과 지도노선에 따라 결정적 시기에 민중봉기를 유발하여, 헌법이 상정하고 있지 아니한 방법으로 현 정권을 타도하고, 외세를 축출(자주)한 후, 민중이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민족자주정권을 수립(민주)한 다음, 연방제로 남북을 통일할 것(통일)을 목적으로 구성된 지하조직 - 주사파 학생운동의 주요 분파인 '자주·민주·통일그룹'에 대한 1991년 대법원 판결(91도2341 #, 91도2671 #)
노태우 정권과 첨예하게 대립했던 NL의 리즈시절 80년대 말에는 북한의 선전 멘트에 매우 충실히 반응해 한국전쟁은 남한의 북침으로 발발했다고 믿고, 남한의 원자력 발전소는 미국이 북한을 두려워하여 준비한 핵무기라고 믿는 등 여러모로 순진한 모습을 지녔었다. 물론, 주체사상을 들여온 김영환도 그렇고 당시 운동권들도 동의하는 사실이지만, 주체사상에다가 수령론꺼지 받아들여 종북적 태도를 취한 이들은 NL전체에서 따졌을때 극소수에 속한다. 문제는 90년대에 그 극소수들이 NL다수파가 되어서 운동권 전체의 이미지를 나락으로 떨어뜨려서 그렇지. 이들 중에는 주체사상의 품성론(혁명가는 이론보다도 실천을 중시해야 한다는 주체사상의 이론)만 받아들이고 수령론은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이 더 많다. 이진경은 이들보다 비주사NL이 수로는 가장 많았다고 주장했는데 이진경은 NL이 아닌 PD 이론가라서 사실인지는 불명확하다.

몇몇 정파는 이념으로 주체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남한에서는 직접적으로 표방하기 힘들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는다. 다만 NL계열 단체의 강령 등에서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체사상 자체가 아바이 수령 아래 대동단결이라는 굉장히 수직적인 정치 구조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수의 NL단체들은 수직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윗선에서 내려온 명령에 복종하며, 의문을 제기하면 대동단결을 해치는 반동분자로 낙인찍힌다. 이런 위계질서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절차를 넘어선 항명은 인정하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NL은 국가보안법이 노리고 있는 메인 타겟이다. 반면 PD계열 단체들은 어지간해서는 국가보안법으로 엮기 어려운지 주로 파업 가담이나 시설물 파괴 등에 대해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식으로 잡아가는 수법이 많이 쓰인다.

예전 안기부 시절에는 NL보다는 PD들이 주로 타겟이었다고. PD계열로 활동하던 사람이 조사받던 중에 조사관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NL은 병신이라 가만 놔둬도 한계가 있지만 PD는 미리 싹을 밟아놔야 한다라고 했다나. 80년대까지만 해도 소련이 시퍼렇게 살아있었고, 당시 ND-CA-PD로 이어지는 계통의 운동권은 소련식 현실사회주의를 이상사회로 설정했었다. 지금에 와서야 이전에 추구했던 소련이 무너지고 그 한계를 인식함과 동시에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반대에 초점을 맞추고, 북유럽식 복지국가나 독일식 사민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것으로 변화하면서, 일반 대중들이 보기에도 비교적 합리성이 있는 사상으로 평가되는 PD보다는 공상적 민족주의자로 평가되는 NL이 경계를 받고 있지만 당시에는 그 반대였다. 더욱이 조직을 중시하고 조직적인 면이 강한 NL에 비해 PD계열은 조직 자체보다는 개인을 더 중시했고, 조직을 경시까지 했다. 그런데 문제는 정치는 무엇보다 정당이라 조직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건 민주주의일수록 더욱 부각되는 문제인데 이런 이유로 PD계열은 더욱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는 형국이 되었다. 물론 머릿수 많은 NL이라고 딱히 뭔가를 이뤄볼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하지만 노태우 말기 이후로는 PD보다 NL이 주 타겟이 되었는데, 소련과 수교하고, 거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이 붕괴되면서 PD들이 힘을 얻기 힘들어진 반면에[26], 1993년 설립된 한총련의 주축이 된 NL들이 여러 사고를 일으켰고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이런 경향은 사라지지 않아[27] 1997년 프락치 오인 살인사건 이후 한총련 자체를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NL탄압에 들어갔다. 당시 전경들 말로는 PD가 그냥 좌파라면 NL은 레알 빨갱이들이라고.

1990년대 초 PC통신시대에 하이텔의 노동운동관계 동호회에서는 김씨 일족 문서가 HWP파일로 만들어져 유통되기도 했다. 숨기기 좋은 통신망과 전자매체를 이용했기 때문에 인터넷과 웹사이트 이용도 빠른 편이었다. 이러다가 한 번 크게 탈이 난 적이 있는데, 아무나 초창기 구글 검색에 관련 단어를 치면 소위 북한관계 학습문서가 좌르륵 걸려나왔는데 그게 십중팔구 노동운동단체 아니면 노조 웹사이트였다. 그만큼 이 쪽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갔다는 이야기.

아무튼 NL 중 거의 죽어간 상태였던 주사파 세력은 인터넷 시대를 맞이하여 2000년대 초중반까지 주체사상 총서, 김일성 회고록 심지어 대남방송 녹취록 같은 문서들을 무차별적으로 유포하면서 나름 대중화를 시도했으나, 결국 공안기관의 실적만 올려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4. 조직

1990년대 NL이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약칭 전국연합)이란 합법적 전국조직을 설립했을 때 지역별로 산하 단체들이 만들어졌는데, 그때 맺은 인연들이 이후에 정치적으로 구심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중에 경기동부연합, 울산연합, 인천연합이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특히 경기동부연합은 다른 지역 활동가와 조직에도 상당한 지도력을 행사했다. 이들 3대 정파은 사안별로 대립하기도 하고 연합하기도 했다. [28]

1990년대 초중반 학생운동권 내에서 주체사상의 해석을 둘러싸고 주류 강경파(자주단결, 자주대오, 주사, 비선으로 불림)과 비주류 온건파(혁신대오, 사람사랑, 노선대)로 분열하면서 한총련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웠지만, 비주사NL PD 등 다른 정파나 운동권 외부에서 보기에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맹목적인 친북성, 폐쇄적인 조직운영, 고립주의, 승리적 관점(정신승리론), 폭력성, 부정부패 등 NL그룹의 문제점은 양쪽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당시 한총련을 장악하고 있는 자주단결 그룹의 패권주의와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을 지적하면서 등장한게 사람사랑[29], 노선대[30]인데, 그럼 이들이 나중에 학교를 졸업하고 어디로 갔느냐? 바로 경기동부연합이다.[31]

4.1. 학생회

대학에서도 학생회를 '애국적인' 학생들로 이루어진 '조국통일의 첨병'으로 여기기 때문에 학생회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학원 자주화'가 학내 최우선 목표가 되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학생회를 장악하려 한다. 덕분에 학생회를 둘러싼 비리와 폭력사건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한총련의 꽉꽉 채워진 할당량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학내 문제에 대해서 비교적 신경쓰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이런 식으로 학생회 장악을 노골화 하다보니, 이미 여러 대학에서 부정투표 등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진보적 학생회 전부가 NL계 학생은 아닌데, NL계가 이들의 이미지를 다 깎아먹기 때문에, 최근에는 뉴라이트의 지원을 받는 학생회라든지 비운동권이 다소 강해질 정도.
게다가 좀 정상적인 PD계열이 세가 강해지면 학내 문제해결보단 이들의 세를 누르는데만 열을 올린다. 뉴라이트가 강해지는데도 보통 총여학생회와 교지편집위원회, 알바, 학교 청소부 노조를 중심으로 세를 키우는 PD들 예산 삭감하려고 노력하느라 공멸해버리는 경우도 쉽게 보인다. 바이마르 공화국 공산당 사민당마냥

4.2. 단결에 있어서의 문제

NL계열은 PD계열에게 '통큰단결'이라고 항상 손을 내밀며 연합하려 하지만 수직적 상명하복의 조직구조상 소수파인 PD계열은 NL계열의 머릿수 때우기로 흡수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반발한다. 사실 손을 몇 번 잡았다가 PD계열이 데인 경우가 꽤 많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의 분당과정 자체가 PD 계열이 데이는 과정의 연속이라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NL계열은 PD계열을 통큰 단결을 저해하는 종파주의자라고 깐다. 마찬가지로 PD계열은 NL계열을 북한식 독재 정권이라고 깐다. 주변에 정의당 관련 인사가 있다면 이와 관련해 물어보자, 직접 NL PD를 언급하지 않아도 통진당 계열 인사라고 하면 학을 뗀다.[32]

NL그룹은 매번 '적들과 싸우기 위해 통 크게 단결하자'면서 연대, 연합을 부르짖었다. 거기에 호응해서 PD나 시민운동 세력과 함께 단일조직을 만들면 상대적 다수인 것과 함께 타 계파들이 제대로 세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이용하면서 조직을 장악하고, 조직을 장악하고 나서는 대놓고 부정을 저질러왔고 이런 부정들이 드러나면 부정행위에 대해 애써 덮어주거나 방관을 하면서 혹은 이런 부정행위들마저 옹호하면서 조직을 완전하게 타락시켜왔다. 이렇게 망가진 단체가 학생운동에서 한총련, 80~90년대 재야운동세력의 연합체였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그리고 민주노동당, 결정적으로 통합진보당 이다.

한총련도 초창기에는 '생활/학문/투쟁의 공동체'란 슬로건하에 비록 NL이 우위이긴 하나 PD계열도 중앙조직 간부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구조였으나 1995년 모든 중앙조직을 NL강경파가 싹쓸이하고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로 슬로건을 바꾸더니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96년 연세대 사태로 하향세에 접어들기 시작하고 97년 들어 한총련 출범식 과정에서 벌어진 전경사망 사건과 이석 치사 사건으로 완전히 나락으로 빠졌다. 다만 그동안 쌓아 놓은 것이 있기 때문에 어찌어찌 땜빵하다가 2000년대 중반 들면서 완전히 사망했다.

권영길, 노회찬, 심상정 등 노동운동 출신이 창당한 민주노동당에서도 NL이 2001년부터 온갖 협잡과 부정, 폭력, 날치기로 각 지구당을 장악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2004년 이후 당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시기에 초창기부터 당에 헌신하면서 부유세 복지국가를 대안으로 제시했던 정책팀과 이론가들이 모조리 당을 떠나고 그야말로 빈껍데기가 되어버렸다. 대표적인 게 우석훈 박사, 진중권 등이다. 결론은 다들 아시는 대로...

5. 비판

"NL은 한국 사회를 변혁시키기에는 충분히 세력이 크지 않고, 한국 진보를 망치기에는 충분히 세력이 크다"라는 말이 있다.

5.1. 정치행태

NL계열이 민주노동당에 조직적으로 가입하고 장악하면서 크게 물의를 일으켰는데, 민주노동당을 장악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1년 군자산의 약속 이후에 민주노동당에 조직적으로 입당한 NL계는 온갖 편법, 탈법, 불법, 조작, 폭력적인 방법으로 지역조직들을 차례로 장악해 나갔다.

예를 들면 가장 흔한 방법이 위장전입을 통한 지역조직 장악이었다. NL계열 조직원들이 특정 지역구로 단체로 위장전입한 다음에 해당 지구당(현 당협위원회)의 위원장 선거에서 몰표를 던져서 자기네 인물을 위원장으로 만들어서 해당 지구당을 장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시 단체로 다른 지역구로 위장전입해서 역시나 기존 당원들에 비해서 숫적 우위를 확보한 다음에 다시 위원장 선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기네 숫자를 불리기 위해서 주민번호 등을 도용해서 유령당원들을 대거로 입당시켜서 대리투표만 한 다음에 다시 탈당시키는 탈법 사례도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범NL계 내부에서도 이런 짓거리를 가장 많이, 가장 악랄하게 저지른게 바로 현재는 정의당에 들어가 있는 인천연합이다. 인천 남동갑지구당 사건[33], 용산 지구당 사건이 대표적으로 이런 일들이 반복되자 기존의 PD계열(평등파)이나 무정파 계열 당원들이 격렬하게 반발했으나 NL계의 조직력을 총선/대선에 이용할 생각만 하고 있던 기존 지도부[34]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장악한 지구당에 배정된 대의원들도 당연히 NL계열 인사들로 도배해서 결국 2004년 총선 직후에 전당대회를 통해서 중앙조직까지 장악했다. NL계를 이용하고 있다고 착각했던 기존 PD계 지도부들도 결국 다 쫒겨난 것이다.[35][36]

2012년 진보계열 정당들의 선거연대인 통합진보당의 당권파로 조직논리를 앞세운 부적절한 경선행보를 보이고 있다. #(현재 기사 삭제됨) 다만, 선거부정은 참여계가 먼저 저질렀다. 이석기, 김재연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선거 사태가 일어나면서, 80년대에 쓰이던 NL과 PD라는 말이 모두 나오게 되었다. 특히 진중권에게 NL의 모습이 다 까발려졌는데, 'NL이 학생회를 장악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장악하고, 대물림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을 국회의원이 되면 희석을 시켜야하는데, 이러한 비민주적인 방법을 국회까지 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오를 했다'고 평가했다. [37]

또한 김진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진보의 올바른 노선은 PD이고 NL은 진보의 울타리에서 쫓아내야 한다."라고 평했다. 결국 보수의 주 타깃, 진보의 계륵이 되어버렸다.

현재 제도정치권내에 존재하는 수많은 NL계 출신 정치인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비판이 자주 나온다. 2000년대 들어서 세대교체를 명분으로 상당수 NL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과 민주당, 열린우리당을 통해서 정치권에 진출하였다. 이들은 일괄적으로 86세대로 분류되면서 한국정치의 희망으로 포장되었다.

우선 보수우익으로 전향하면서 뉴라이트라는 이름으로 한나라당을 통해서 정계에 입문한 사람들은 과거 극단적인 친북반미 노선을 주장했던 것에 대한 컴플렉스인지 이제는 극단적인 반북친미 노선을 타고 있다. 거기에 과거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을 '인류의 태양'으로 찬양하던 것의 반동인지, 이제는 대한민국의 전 독재자들인 이승만과 박정희를 '민족의 영웅'으로 추켜세우고 있다.
반면에 민주당계 정당을 통해서 정치권에 진출한 NL들은 아직도 그 시절의 친북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는게 아니냐는 의혹도 자주 제기된다. 북한 인권이나 탈북자 문제에 대한 침묵, 북미협상에서 언제나 미국의 양보만을 주장한다는 점, 대북협상시에 일관된 유화적인 태도 등이 자주 거론되며 특히 임수경 전 의원이 탈북자에게 배신자라고 쏘아붙인 사건 등이 화제가 되면서 이들이 아직도 운동권 시절의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그외에 진영을 가리지 않고 NL 운동권 출신들이 툭하면 음모론을 들고 나오는 장면도 흔하게 보인다. 무슨 사건만 일어나면 한나라당 계통에서는 "모든게 좌파의 음모다", "종북주의자의 소행이다"이라고 몰아붙이며 민주당계 혹은 진보정당 소속들은 "모든게 국정원의 조작이다", "조선일보의 마녀사냥이다"는 식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5.2. 자정 시도

NL의 핵심 활동가였던 민경우[38]가 2009년 출판한 <진보의 재구성>에선 현 NL 운동의 한계 및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한국은 미국의 정치 군사적 식민지인가?’, ‘농촌 인구가 급감한 현실에서 노농동맹에 기초한 통일전선이 여전히 의미 있는가?’, ‘현대와 삼성은 매판자본인가?’, ‘지사적 풍모와 금욕적 생활 태도가 요즘 청년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는가?’, ‘일국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국은 미제의 식민지'라는게 1980년 후반 정립된 NLPDR론의 가장 중요한 전제인데 NL이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39][40] 그러나 이 책은 NL 내부에 눈꼽만큼의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으며, 얼마 뒤에 민경우는 NL운동을 정리하고 보수 우파로 전향한다. 그리고 통합진보당 경선 부정부터 시작해서 NL계열인사들이 보여주고 있는 추태를 보고 있자면 아무것도 변한게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의당에 결합한 NL 출신들은 이전과는 다른 태도들을 보이고 있는데, 국민의당의 한 예비후보가 인천연합 출신 이정미 후보의 전국연합 활동을 들어 정의당이 공산주의자를 공천하였다고 공격하자, 이에 대해 이정미 후보는 "북한은 보편적인 민주주의와 인권이 지켜지지 않고 있는 국가"이며, "북한의 3대 세습도 보편적 상식에서 볼 때 납득할 수 없다"고 밝혔다. 오히려 북한 찬양을 멈추면서 NL특유의 민족주의노선과 단결력으로 대학과 정의당 내에서 영향력을 얻고있는 추세이다.

최근에는 경기동부연합과 진보당도 국민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는 북한문제에 대해선 언급을 줄이고 노동자 문제와 지역현안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편이다.

6.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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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주단결계열[44] : 반미, 반일, 통일운동 중심이며, 반보수정당 투쟁[45]이 주 관심사. 독자적 진보정당운동[46]이나 노동운동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
    •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 한때 NL을 대표하는 통일운동 조직이었으나 90년대 중반 '새로운 통일운동체 논쟁' 이후 단결계열의 원로 조직으로 남아 영향력은 미미해진다.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을 학생조직으로 두었다. 2024년 김정은의 통일조직 폐쇄 지시로 해산하였다.
    • 국민주권당 :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 국민주권연대(주권연대) 등으로 활동하던 인사들이 진보당에서 탈당하여 2023년 결성한 정당.
    •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 : 명목상은 한총련 - 한대련 의 뒤를 잇는 NL계 대표 대학생 운동조직. 한대련까지는 혁신계열에서도 참여하였으나 대진연은 사실상 남총련 위주의 단결계열 단일 정파 조직으로 남았다. 민권연대-주권연대와 노선을 함께함.
    • 민중민주당 : 위의 대진연-주권연대그룹과는 별개로 코리아연대[47] - 환수복지당으로 강원 충청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그룹.
    • 민주주의자주통일대학생대표자협의회(민대협) : 한총련 와해 후 한대련이 등록금 문제 등에 집중하는 것에 반발하며 한총련의 반미운동 전통을 지키려는 서울지역 대학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그룹. [48]
  • 민중운동
    • 민주노총 국민파, 전국회의 : 민주노총 내에서 NL계의 영향을 받는 노동운동가들을 국민파라고 한다. 지역단위 노조들이 대중적 이미지를 만들고자 당시에는 많이 퍼져있었던 NL 민족주의 운동과 결합한것. NL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도 이곳에 합류한다. 이들은 민주노총 내의 우파를 맡아  민주당계 정당과 협상하고 노동법을 개정해 노동환경을 개선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국민파 리더중의 한명인 권영길이 1997년 대선에 국민승리21 후보로 출마하면서 국민파 일부는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에 일정부분 기여하였다. 국민파 최대조직이었다가 2020년 이후 분리된 '민주노동자 전국회의'(전국회의)는 사실상 진보당계 조직으로 인식된다.
    •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통합진보당-민중당-진보당을 꾸준히 지지하는 농민운동 조직.
  • 기타
    • 정의당 내 NL 출신 그룹 : 통합진보당이 분당되면서 정의당에도 NL 출신 그룹이 참여하였다. 인천연합, 광주전남연합의 온건파와 함께서울 그룹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북한의 인권실태를 비판하고 3대 세습을 반대하는 등 사실상 기존 NL세력과는 정치 노선이 많이 달라진 상태이다. '꿈꾸는 고래'[49]라는 학생조직도 운영하였다.
    • 더불어민주당 내 NL 출신 그룹 : 전대협, 한총련 활동을 하다가 민주당계 정당으로 옮겨간 이들도 많이 있다. 이들은 과거 NL계열 활동에 대해서는 언급하는 것을 꺼리며, 현재는 사실상 북한에 유화적인 자유주의자에 가까운 활동들을 하고 있다. 이인영, 우상호, 임종석
    • 비주사 NL(NL 좌파) : CA 출신으로 NL의 대중노선을 따랐지만 주체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그룹. 80년대후반-90년대초반 서울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관악자주파'등으로 불리다가 21세기 진보학생연합등으로 이어졌다. 하태경 등 일부는 뉴라이트로 전향.

그외에 아직도 법외 재야운동 성격에 머물러 있는 몇몇 단체들이 있지만[50], 이들의 영향력은 거의 사라진 상태라고 믿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최근 이 또한 시민사회단체를 하면서 진보정당에 친분과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시각 또한 만만치 않다. 대표적인 예로 정의연을 드는데, 정의연의 대표인 윤미향의 남편인 김삼석은 남매간첩단 사건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적이 있었다는 것. 윤미향은 정의연 활동을 하면서 프랑스의 북한 간첩 브누아 케네데와 접선한 바 있으며, 문재인 정권의 대일 외교 정책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언론 보도 등으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7. 미래

권모술수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데에 그 한계가 있다. 이런 한계 때문에, 앞으로도 NL이 어떤 조직의 주도권을 잡게될 가능성은 갈수록 희박해질 것이다. 우선 타 세력 입장에서는 NL에서 통큰단결을 하도 부르짖어서 손을 잡았는데, 정작 그 이후에는 "우리가 이 단체를 어떻게 키우겠다" 같은 비전은 일절 없고 우리 아니면 안된다라는 식의 통 작은 마인드조직 내부의 권력투쟁에만 몰두할 뿐이니 환장할 노릇이다. 이러니 도무지 신뢰를 얻을 수 없다.

두 번째로 이들이 내세우는 이론과 조직문화가 너무 낡은데다, 개량에도 적극적이지 않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위에서 말한대로 철저히 상명하복적인 조직문화[51]는, 조직 내부의 주도권 쟁탈전에는 효율적일지 모르지만 대외적으로 봤을 때 저 조직은 왜 저렇게 권위적이고 꽉 막혔느냐, 왜 저렇게 구시대적으로 노느냐는 비판만 받게 된다. 정치집단이 제 3자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면, 도대체 집단 내부의 권력쟁탈이 무슨 소용일까? 즉,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식으로 제 살 깎아먹기만 반복해온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통합진보당을 거하게 말아먹고 나서 생긴 민중당의 경우 계급계층 조직을 꾸리고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하며 상향식 민주주의의 형태를 표방하고 있으나 아직 의심의 눈총을 거두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역사적으로 보면 NL은 목표로 삼은 조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국 주도권을 장악하는데는 성공하지만, 정작 대중적인 외연확장에는 실패하고 결국 한줌도 안되는 NL활동가들만 남아서 또 다시 다른 세력들에게 대동단결하자고 울부짖는 모습으로 흘러왔다. 이런 사례는 전민련, 전국연합, 한총련,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등등 수도 없이 많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이런 패턴이 한 30년쯤 계속되니 이제 다들 NL이라면 손사래를 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결국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을 연달아 망가뜨리면서 한국 진보 정치세력이 중소세력으로 전락하게 만든 내부의 적, 좀 노골적으로 말하면 대역죄인으로 단단히 찍히게 되었다.

근본적으로 극단적인 이중잣대 흑백논리에 찌들어 있으면서 스스로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이들은 언제나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마치 로보트처럼 상부의 지시대로만 움직이는 상명하복식 위계질서를 이루고 있다.[52] 또한 정권을 향해선 언제나 소통하라고 외치지만, 정작 자신들은 외부의 비판에는 귀를 꽉막고 불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런 행태를 보여주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들의 현실인식이 '자민통'에 맞춰져 모든 것을 진영논리에 기반하여 판단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된대로 이들은 현대 한국을 제대로 된 자본주의조차 이루지 못한 식민지국가, 매판자본가에 의한 미제의 하수인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이때문에 자신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수구꼴통, 개량주의자, 반통일세력이라고 간주한다. 이때문에 문제점을 지적하는 외부의 비판은 자신들이 활동에 위기감을 느낀 반통일세력의 음모로 규정짓고 자신들이 정당한 길을 걷고 있다는 증거로 여긴다. 또한 외부의 비판에 호응해서 시대변화에 맞춰서 혁신하자는 내부의 목소리는 반통일세력에 휘둘리는 변절자로 낙인찍어서 말살해버린다. 이렇듯 우리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고립적 사고방식이 점점 강화되면서 내부적으론 자기들끼리의 결속력을 강화되지만, 개방화되고 지식과 정보가 공유되는 시대적 추세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외부확장은 한계에 달한 상태이다.

반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런 사고방식과 폐쇄적 환경속에서 조직의 결속만을 강조하다 보니 대중적인 시점에서 봤을땐 허무맹랑하거나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르고도 왜 문제인지 인식하지 못하거나, 조국통일을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의 사례로는 학생운동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안겼던 1997년 전남대 이종권 치사 사건, 한양대 이석씨 구타치사 사건 등이 있고, 2010년대에도 인명사고는 아니지만 통합진보당 아메리카노 커피 사건으로 비웃음을 사거나 국회의사당에서 최루탄을 터트리는 등의 일을 저지르고 있다.

이들의 미래는 크게 두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뉴라이트처럼 소위 전향 이후에 철저하게 자기가 과거 머물렀던 이념의 반대로, 그러나 행동습성은 그대로 가는 행태[53]을 보일 수 있다. 또 하나는 지금처럼 철저하게 고립된 상태에서 극소수파로 지리멸렬하게 계속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미래가 언제가 될지는 누구도 모른다. 일단 21세기에도 NL계 단체들이 그럭저럭 세는 유지하고 있다. 울산연합이 대표적인 NL계 세력인데, 실제로 2016년 당시엔 울산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울산연합계 무소속 인사들이 의석을 2자리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의당 내부에서도 그들의 끼리끼리 단결력이 어디 가지는 않아서, 인천연합의 단결력은 여전하다. 민중연합당을 전위당이라는 이유로 썩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NL계 인사들이 울산에서 지속적으로 힘을 얻고 있는 현 상황을 탐탁지 않아 하는 좌파들도 꽤 많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NL계 세력이 제법 강한 걸 보면 그 생명력이 놀라울 정도다.

'미국의 식민지 한국'이라는 논리가 한국의 성장으로 인해 점점 흔들리면서, 과거 NL성향이었던 집단은 남을지언정 이론적인 의미에서의 NL은 갈수록 세력이 약해지고 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G11에 넣으려고 하거나, 신남방정책과 같이 (좌파적 시각에서 봤을때)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펼치는 모습에서 NL의 이론적 기반이 많이 흔들리는 상황이다.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는 식민지국가라는건 말이 안되고 세계적으로도 언제까지 개발도상국인 척 할거냐고 트집을 잡힐 정도로 선진국이라는 인식이 확고해졌기 때문에 이념의 토대부터 큰 변혁 없이는 버티지 못할 상황이다. [54]

중국 역시 시진핑 집권 이후로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걸 떠나 현대 세계의 일반적인 가치기준에서 봐도 심하게 일탈하고 있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데다 홍콩 범죄인 인도법안을 홍콩의 정치 시스템 내에서 처리하는데 실패하자 아예 본토의 전국인민대표대회를 동원해 홍콩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켜버려 사실상 일국양제를 붕괴시켜버리는 폭거를 저지르고 있어 아시아 민주국가의 대표적 친중 정당인 대만 중국국민당마저 미국과 수교를 공식 요구할 정도로 친중에서 발을 빼고 있는 지경이라 향후 NL과 중국의 밀월도 파국을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정파가 특정 외세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는 스탠스를 취하는 것 자체가 그다지 몸에 맞은 옷은 아니었을 것이다.[55] 혹은 어차피 선거에서 이길 생각이 별로 없고 의회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공감대가 없는 집단이니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소중화 버전 쪽으로 매몰될 가능성도 대단히높다고 할 수 있다. 아니면 중국과 대립하는 일본, 유럽연합을 때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거나.

7.1. 21세기 사회주의로의 변화

2020년대 기준으로 NL의 주류인 진보당은 반미 반제국주의와 평화통일에 대한 내용들을 내걸고는 있지만 핵심적인 정책이나 활동은 정의당이나 노동당 같은 정당과 큰 차이가 없다.[56] 2024년 22대 총선에 나선 진보당 지역구 후보들을 보면 거대담론이나 진보적인 정책의제 같은 건 찾아보기 힘들며 기성 제도권 정당들과 차별점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그린벨트 해제하고 뭘 짓겠다, 유치하겠다 등등의 지역개발공약 일색인 팜플렛만 보면 국민의힘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우경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이런 점 때문에 더불어민주당과의 후보단일화도 손쉽게 성사되었다.

북한 체제의 모순 심화와 이에 대한 비판적 시각 확산으로 볼 때 과거처럼 큰 말썽을 일으켜서 운동판을 조져 놓거나 운동판에 대한 대중의 부정적 정서를 고취시키거나 우익의 공격 빌미를 주는 일은 앞으로 없을 것으로 보인다. '평화통일'을 강조하긴 하지만 기존에 주장하던 연방제 통일이 아니라 그냥 모호하고 포괄적인 개념에 그치고 있고... 서유럽 공산당들이 1970년대 대거 유럽공산주의로 갈아탔던 것처럼, 앞으로 NL은 단순 사회주의 세력으로 변화하여 개량주의 정치세력으로 자리를 잡거나[57] 심지어는 한대련/청지의 경우에서 보듯 그냥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을 지지하는 쪽으로 갈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58] 서유럽 공산당들, 가깝게는 일본공산당이 걸어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게 될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 그러한 추세이다.

대체로 이러한 행보는 노조 관료, 노동조합 상근자들에 기반하여 나타나고 있다. 개량주의와 스탈린주의는 모두 노조 관료들에게 매력적인 사상이기 때문이다. 스탈린주의의 약빨이 다하면서 개량주의적인 방향으로 우경화하는 것이다. 서유럽 유로코뮤니즘의 역사가 그대로 NL 개량주의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NL의 정통성을 계승하기 때문에 반미, 민족주의적 색채는 여전히 강하게 띤다. 이전의 주사파처럼 북한을 갖다가 이상적인 사회로, 김일성 · 김정일 · 김정은을 지상락원으로 인민을 령도할 영웅적 존재로 여기지 않을 뿐이지...[59]

7.2. 민족주의적 노선만 남긴 형태의 전향

말 그대로 민족주의적 성향을 제외하고는 성향의 상당수를 수정한 경우다.[60]

한대련 같은 대학생 단체들은 아예 사회주의적 색채가 사라진, 민족주의적 관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면에서 좌파 성향이 약화된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이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도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의 민주주의(노동해방, 성평등 등...)가 아니라 형식적인 민주주의(공정선거, 공약 준수...) 선에서 그치고 있고... 이 두 단체는 문재인 후보를 비판적 지지 선언하며 우경화하였다. 어쩌면 문재인이 정권을 잡음에 따라 더불어민주당이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떠오른 2017년 이후의 정세 속에서는 과거 NL이었다가 친노로 우경화한 세력이 완전히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를 잡을 수도 있다. 혁명성이나 진보성을 내세우던 다른 세력들이 대체로 그랬듯 그저 새로운 지배세력의 일부로 편입되는 것이다. 어쩌면 한대련이나 청지 같은 완전 우경화한 운동 단위들 같은 경우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기존 운동권과 대립할 수도 있다.[61]

어찌되었든 소위 말하는 운동권의 범위 내에서 보자면 이들은 NL에서 민족주의만을 남기고 우경화한 것이다.[62] 이러한 현상은 NL의 기본 사상이 민족주의와 자/민/통에 있고, '민족주의에 기반한 일국 사회주의'를 추구하던 것에서 그 일국 사회주의의 이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민족주의에 기반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돌아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민족국가를 건설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민족의 영광을 드높일 수만 있다면 아무나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히려 민족주의를 지나치게 추종하는것이야말로 위험하다.

애초에 NL이라는 집단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 자본주의의 발전이 아직 고도화되지 못한 1980년대에, 대다수 대중의 의식과 시야가 국민국가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고 어려서부터 '애국애족'이라는 덕목을 갖다가 세뇌받으며 자란 세대가 대학에 입학하여 '나라 꼴이 엉망'인 것을 보고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거기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북한이 나름대로 경제성장도 이루었고[63] 표면상으로는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미국과 맞짱 뜨는 모습을 카와이하게 여긴 나머지 북뽕과 국뽕을 조합한 칵테일에 거하게 취해 갖고는 '식민 지배자 미국 놈들과 매판자본을 몰아내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 연방제 통일을 실현하는 것'을 갖다가 '애국애족'이라고 여긴 결과 등장한 것이 NL인데, 북한 관료 독재 체제의 몰락과 함께 더 이상 그것을 '애국애족'이라 규정할 수 없게 되니까(...) 새로운 방식으로 애국애족이라는 기존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 결과 가운데 하나가 남한의 지배계급 가운데 민족주의적인 분파를 기반으로 삼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NL 성향의 노래패인 우리나라가 1999년 결성 이래 18년 동안 보인 행보나 곡의 가사 내용 변화를 보면 이러한 흐름을 잘 파악할 수 있다. 원래 노래패 우리나라는 한총련 시절에 결성되었는데, 2000년에 나온 1집 앨범을 보면 해당 앨범에 실린 주한미군 철거가 정도는 우습게 보일 정도로 강성 NL 성향의 노래들이 잔뜩 수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노골적으로 범민련 활동을 고무하고 응원하면서 '달려가자 전사여, 연방 통일 조국으로!'라 외치는 '범민련 전사'라는 곡이 있는가 하면[64][65], 대놓고 국뽕 거하게 들이키고 지은 '조국의 품 안에서 나의 삶은 빛나라' 같은 곡도 있다. 대놓고 김돼지 일가를 찬양하는 내용이 없기에 이적 표현물은 아니며 멀쩡하게 음원 사이트에서도 유통되고 있긴 하지만, 비NL 성향의 운동권이 들어도 불편한, 내지는 곡은 좋은데 가사가 아깝다 느껴질 정도의 곡들을 무더기로 뽑아내던 시절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 곡이라고 쓴 것들을 보면 북한의 모 선전 사이트를 연상케 하는 제목의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노골적으로 연방제 통일[66]을 하자는 내용의 <3대 헌장 높이 들고 통일을 합시다> 등등... 도대체 이게 어떻게 해서 음원 사이트에서 팔리고 있나 궁금한 곡들이 부지기수다(...)[67] 그런데 201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이러한 성향은 차차 퇴색되어 가고, 도종환 시인의 시에다 곡을 붙인 노래들이라든지[68], 특별히 NL 성향 없이 민족주의적 내용을 담아 낸 노래들이라든지, 아니면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를 추모하는 노래라든지... NL은커녕 좌파적이라 하기도 어려운 곡들을 뽑아내고 있다.

이러한 행보는 대체로 청년학생들이나 과거 NL 노선의 청년학생 운동을 했던 세대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다. 노동계급 기반성이 약하거나 본인이 노동계급이지만 중간계급적 허위의식에 깊이 매몰된 미조직 노동계급인 경우 이런 행보를 많이 나타내고 있다. 앞의 유로코뮤니즘으로 돌아선 경우에는 노동계급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개혁주의적인 방향으로 변화했다면, 이쪽은 노동계급에 기반이 없다 보니까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남기지 않고 그저 민족주의자로 돌아선 것이다.[69]

7.3. 범민족주의로 전향

또 일부 NL은 환빠로 전향하는 양상도 보이고 있다. 이미 2000년대부터 범민련을 비롯한 강성 NL들 사이에서 환빠 분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NL 운동 자체가 찌그러지고 NL 사상과 이론이 한계를 갖다 드러내면서 최근에는 NL 출신 환빠가 급증하는 추세다. 북한 체제에 대해서 실망하고 회의감을 느끼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그래서 뉴라이트로 돌아서지도 못하고 친문으로 돌아서지도 못하자 주화입마해서는 배달민족의 영광 운운하는 환빠 사상에 매력을 느끼게 되는 거다. 애초에 NL 사상이 먹혀들 수 있었던 배경에 민족주의가 있는 걸 감안하면, NL 사상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했을 때 환빠로 흑화하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결과 환빠들의 행태는 날이 갈수록 안드로메다로...

물론 북한 찬양을 완전히 포기하고서 환빠로 흑화하는 것은 아니라, 북한 찬양과 환빠질이 결합된 완전체도 간간히 보인다(...) 오죽하면 친북적 스탈린주의를 추구하는 노정협에서조차 이건 아니라 말할까? 이쪽은 대체로 좀 나이가 있고 위의 경우처럼 노동계급 기반은 없는 경우에 주로 나타나는데, 과거 범민련에서 활동했던 고령의 NL운동가들이 이런 경향을 자주 보인다.

사실 이들의 이상향이었던 북한도 고난의 행군으로 경제가 완전히 망가지자 2000년대 들어서 뜬금없이 평양에 단군릉을 조성하는 등 국수주의 정서를 통치에 활용하는 작태를 보이고 있다. 경제난으로 인민들의 삶이 박살난 상태에서 미제와의 대결의식을 고취시키고 독재와 핵개발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민족에 호소하는 것이다.

8. 여담: 현존하는 종북주의자

사이버민족방위사령부를 예로 들면서 그래도 이런 종북들은 존재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애초에 여기는 1980년대의 NLPDR과는 상관이 없고, 처음에는 황길경이 대부분 자기가 만들어낸 북한 관련 동인설정을 모아 판타지 소설처럼 쓴 것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이걸 추종하는 사람들과 NL과는 관련이 적은 비사상적인 종북주의자[70]들이 모이면서 생긴 일종의 사회 병리 현상이다. 진지하게 혁명 이론에 입각해서 북한 체제를 지지하는 게 아니라 사상적 움직임 없이 그저 추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NL 운동 노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봐도 만무하다. 이들은 민족적 영광이라는 허상을 쫒기만 할 뿐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현실의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점에서 정치세력이라고 보기에도 힘들다.

재외교포들 중에서도 종북주의자가 상당히 많이 보인다. 이들을 보면 북한 체제를 갖다가 노골적으로 찬양하고 북한을 '북부조국'이라 칭하며 지상락원이라고 칭송한다.[71] 신은미 등처럼 그나마 멀쩡한 상류층 도시 평양시만 보고 북한도 멀쩡하고 평범한 나라라고 쉴드치는 경우도 있다. 사실 신은미보다 더 노골적으로 북한을 찬양하고 추종하는 재외교포들이 널리고 널렸다. 개중에는 나름대로 진보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데 번지수를 잘못 찾아서 북한을 찬양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나, 이것 역시 1980년대의 NLPDR 노선과는 상관이 없고, 그저 기능론적으로 입각하자면 개개인적인 일탈 현상이라고도 해석할 수도 있다. NL과의 연관성이 아예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미 미국인이거나 사회적 경제적 생활의 기반의 거의 대부분이 미국에 있는 등 한국에 영향력을 미치기 힘든데다가 정작 미국은 공산당 가입 경력이 아예 입국 거부 사유가 될 수 있고 시민권은 아예 상상도 하기 힘든 나라인지라 미국에서도 제대로 된 활동을 하기는 어렵다.

9. 참고자료

  • <그들은 어떻게 주사파가 되었는가> - 한 NL운동가의 성찰과 고백
    지은이 - 이명준(가명) 2012년 6월 바오 펴냄
    필자는 서울 모 대학의 96학번 NL운동권 출신으로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하다가 2008년 탈당한 이후에는 평범한 사무직노동자로 살고 있다. 이책에선 때묻지 않은 상태로 대학에 입학했던 새내기들이 사회정의를 갈망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학생운동을 시작해서 어떻게 골수 주사파가 되어가는지를 자신의 체험에 근거해서 매우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엠팍 불펜에 올리기 시작했던 시리즈 글이었는데 딴지일보, 오유 등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 퍼지면서 화제가 되었고, 2012년 6월달에 정식 출간되었다. 때마침 통진당 비례대표 부정경선 사건으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NL주사파 그룹의 민낯이 드러나던 시기라서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현재 엠팍 불펜에 올라왔던 글들은 출간과 동시에 삭제되었고, 딴지일보에만 내용의 일부가 남아있다. 딴지일보 게시판 연재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 - 전 NL 운동가의 자기고백 "주사파는 진보가 아닌 파시즘"
  • <경기동부> - 종북과 진보 사이, 잃어버린 우리들의 민주주의
    지은이 - 임미리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위원 2014년 3월 이매진 펴냄.
    필자는 경기동부의 근거지인 성남시가 바로 철거민들의 강제이주로 벌어진 1971년 광주대단지사건의 현장이며, 이석기를 비롯한 경기동부의 핵심인사들 상당수가 바로 성남출신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철거민 강제 이주와 공권력의 업악속에서 성장한 광주대단지키드들이 자신들만의 유대감, 그리고 외부에 대한 배타적 시선으로 경기동부를 형성해나갔다고 분석한다. 논문 발췌요약본(링크 삭제됨)
    국민TV와의 인터뷰 - 임미리 “언론들 고립에만 초점 맞춰”(현재 기사 삭제됨)
  • 박찬수의 NL 현대사
    한겨레신문 박찬수 논설위원이 연재했던 NL운동의 연대기. 1986년 NL운동의 태동부터 현재까지를 다양한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2017년에 인물과사상사에서 <NL현대사>란 제목으로 에피소드를 몇 개 더 추가해 단행본화됨. 그 후 한겨레 박찬수 논설워원은 한미우호증진에 기여해 해리스 주한미국대사에게 상을 받았다.
  •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사 (1997~2019)
    학생운동이 전환점을 맞이한 1997년부터 2019년까지의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사를 정리한 글이다. 소위 말하는 '광주전남연합' 산하 NL 활동가들에 대한 자세한 인식을 얻을 수 있다. 여담이지만 전남대는 NL 학생운동의 총본산으로 '반미구국의 철옹성'으로 불렸던 곳이다.

10. 같이 보기



[1] 평등파인 PD 계열은 계급모순을 근본적인 문제로 보고 노동운동과 연계할 것을 중시 [2] 2023년 전주시 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강성희의원을 당선시키는 저력을 보이며 원내정당으로 복귀. [3] 일부는 종북 [4] 사실, 한국에는 무려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좌익운동은 물론 해방정국 동안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여운형계 사회주의 운동, 진보당, 사회대중당 등 합법적인 혁신정당에서 활동하던 혁신계 잔존세력들이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통일혁명당을 만들어서 북한과 연계를 시도하거나, 혹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등의 지하혁명 조직을 만들기도 하였으나 결국 6.25 전쟁의 여파 속에서 막강한 반공주의적 탄압으로 인하여 북한 쪽 공산당과 연계된 집단은 물론, 결과적으로 그와는 전혀 상관없던 온건 성향의 사민주의정당까지도 완전히 절멸되었다. 결국, 서방 국가들의 현대정치사와 비슷한 궤적을 걸을 가능성이 있었던 이념정치의 토양이 사라져 버렸으나, 박정희 독재와 유신시대는 새로운 세대들에게 대중적 저항의식을 심어 주었으니, 서양 국가들의 정치사에서 사회당, 사민당 등이 존재하며 지속적으로 세대를 거쳐 저항이나 개혁의 구심점 노릇을 한 것과는 달리 그 시대의 한국의 활동가들에게는 (과거의 진보주의 운동, 사회주의 운동 등이 절멸당해 버린 이래) 그러한 과거의 교범이 없었다. 따라서 사구체 논쟁의 형태로 "지금 이 시대에 어떤 이론, 이념에 따라 반정부, 반독재 투쟁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는 것은 거의 필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5] NL의 뿌리는 기본적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일국 사회주의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1 세계대전 당시 '만국의 노동자의 일치 단결'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허황되었다는 전제에 기반하고 시작한다. 1차대전이 일어나자 각국의 노동자들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보다 국가의 안위를 생각하며 민족주의에 기반한 전쟁을 지지했다. 이 전제 위에 개별 국가의 사회주의 혁명은 해당 국가의 노동자 계층이 스스로 달성해야한다는 공산주의 혁명 이론이다. 이 이론은 '일국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시 말해 스탈린주의로 정리가 되고,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경계가 명확하지 못한 동아시아의 중국과 한국에 전파되면서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혁명 이론으로 바뀌어나가게 되며, 현재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로 변화되게 된다. 사실 이와 같은 주장은 세계 약소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본디 레닌의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최종 단계라는 제국주의론에 기반한다. 이에 따라 서방 제국에 의해 지배받는 식민지 국가와 선진국의 노동계급은 단결을 하기 어려우니 우선 제3세계 후진국의 민족해방 운동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철저한 국제주의 노선의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의 본질적인 반동주의적인 측면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이런 비판에 대하여 이들은 제국의 압제자보다 약소국의 압제자가 타도하기 쉽다고 주장한다. 이 논리가 그들이 후진국의 독재자나 권위주의 정권을 비판하길 꺼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서방의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제3세계의 민족주의는 지지할지라도 자국(선진국으로 분류되는)의 민족 운동은 반동으로 보고 비판한다. 반대로 한국의 NL들은 아직도 20세기 마인드로 한국이 미제의 식민지라는 가설로 민족주의를 부르짖으니 뭔가 기괴한 게 탄생한 것이다. 레닌주의 극좌파의 경우 미제국주의의 영향력에 맞서 북한을 두둔하고 친중적인 성격(한국 좌파만의 특징은 아니다.)을 보인다. 그런데 대다수 남한 대중들의 인식은 반제국주의 국가라 지칭되는 북한과 중국은 엄연히 6.25 전쟁을 전면전으로 확대한 침략자고 반대로 미국은 이들을 저지한 수호자라는 것이니 괴리가 클 수밖에 없다. 또한 한국이 빠른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통해 선진국 반열에 올라서면서 구세대의 감상적 민족주의가 약화됨에 따라 한국 사회가 미제의 신식민지라는 주장은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는 이상 대다수 대중들 사이에서 납득하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심지어 남한 사회구성체 자체가 이미 제국주의에 접어들었다거나 거기까지는 아니라도 아(亞)제국주의적 성격을 띤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과거에 한국 경제가 덜 발전했던 군부독재 시절에 등장하여, 아무런 업데이트를 거치지 않은 채 남한이 아직도 '신식민지 반봉건 사회'라 규정하는 NL(혹은 스탈린주의 계열 PD) 운동권의 반제론은 먹혀들지 않게 되었고 점점 대중운동으로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예외적으로 선진국임에도 자국의 민족 운동을 지지하는 경우가 있는데 민족 볼셰비즘이라는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도 상당히 기괴한 이념으로 보이지만 의외로 역사가 오래되었다. [6] 예를 들어 재야대통령으로 불리던 장준하는 강경한 반공주의자였고, 유신정권 당시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문익환 계훈제는 미군 통역장교 출신으로 친미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외에도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던 개신교 목사들의 상당수는 미국 유학파였다. 실제로 1970년대까지도 민주화시위대에서 '반공전선 이상없다, 김일성은 오판말라'같은 플래카드를 들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언론의 자유, 공정선거, 인권, 서민층 권익 보장 같은 보편적, 제도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수준이 대세였다. 이외에 중남미에서 유래한 종속이론 등이 보급되는 정도였다. [7] 미국의 카터 행정부가 심각한 지지율 하락으로 레임덕에 시달리는 시기 [8] 주한미군사령관 존 위컴 대장이 '한국인은 레밍' 운운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 위컴 대장의 레밍발언의 내용은 '전두환 같은 독재자를 생각없이 찬양하고 떠받드는 한국인들이 있는데, 그런 인간들은 마치 레밍쥐나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지금도 위컴을 인종차별주의자, 오만한 미제국주의자 등으로 까는 사람들이 많은데 명백하게 와전된 발언이다. '아메리카 트라우마'라는 문헌에서도 나오지만 위컴 대장은 개인적으로 전두환을 증오하는 사람이었다. 또 리차드 워커 주한미대사는 1982년 <더 스테이트> 회견에서 한국 민주화운동가들을 "버릇없는 아이들"이라 폄하한 바 있었다. [9] 동 시기에 국무부도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 세력을 개처럼 까고 있었지만, 냉전 상황 속에서 한반도에 친미정권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 미국의 기본정책이었기 때문에 전두환 정부를 마지못해 인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10] 사실 미 대사관을 비롯한 미 당국은 투옥된 김대중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 때문에 김대중의 명줄을 잡고 있던 전두환에게 이리저리 휘둘린 측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어찌하던 그런 속사정까지 알 수 있을 리 없었던 대학생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미국놈들도 사실 다 똑같은 놈들이었어!!"라고 외치게 된다(…). [11] 2016년 기사 [12] 1970년대까지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섰던 인사들의 상당수가 이런 반미정서의 돌출에 불안감을 느끼고 침묵하거나 오히려 친정부적인 스탠스로 기울어진다. 대표적인게 윤보선, 천관우, 강원용 목사, 지학순 주교. 바로 지금도 회자되는 윤천지강이다. 이 시기 운동권에서 터트렸던 굵직굵직한 사건에는 어지간하면 '반미'라는 모토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반미정서가 고양되면서 민족주의가 타오르게 된다. 농민운동권 역시 1980년대 중반 수입개방을 기점으로 농민들의 생계가 위협받자 반미 감정이 피어올랐다. [13]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이전까지는 대한민국이 '전 세계적으로 반미운동의 무풍지대'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당시의 시대상은 미국 까기미국 옹호의 충돌 시대였다고 할 수도 있다. 1980년대서부터 시작하여 소련이 무너지는 1991년을 최정점으로 하며, 근래에는 조지고 부시는 아버지와 아들의 시대까지 이어졌던 대략 한 세대 동안의 기간은 사실상 소련이 존재하던 시절 같이 반미주의가 대한민국에 들끓던 시대였기 때문. 즉, 그 시대는 종속이론의 시대였으며, NL주의의 모든 핵심은 사실상 종속이론이 제시하는 '특수한 역할'을 한국 땅에서 NL주의자들이 새로 규정하고 정립한 저항이론의 핵심으로 삼으면서 시작되기에 이른다. 1986년 필리핀 민주혁명을 기점으로 레이건 행정부가 '친미 범위 속 민주화' 기치를 담고 새로 만든 '저강도 전략'도 운동권들 사이에서 파급돼 반미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으로 썼다. [14] 이들은 '비(非) 주사NL로 불리게 된다. [15] 일례로 NL 그룹은 한미 FTA 반대 투쟁에는 올인했지만, 그 이전 한EU FTA반대 투쟁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EU FTA를 비준했으니 ILO협약을 준수하라면서 투쟁의 근거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 한중 FTA에는 전농이 투쟁에 나서고 민중당에서도 이를 일부 받아들이긴 했지만 한미FTA때와는 투쟁 횟수나 선언 횟수나 몇 배 이상의 차이를 보일 정도. 진보 성향의 시민사회단체와 노동운동세력들이 투자자국가제소제 등 한미FTA의 내용을 반대하고 나선 것과는 달리, 비슷한 내용의 FTA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상대국가가 누군지에 따라 행동하는게 달라지는 모습이 눈에 띄어 "NL계는 FTA의 내용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미국하고 싸운다니까 거리로 몰려 나온다"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이다. 그 덕분에 2002년 미군 여중생 압사 사고로 인한 촛불집회가 벌어졌을 때 일반참가자들과 대립해서 깃발논쟁이 벌어진 바가 있다. 2016년 말의 청와대 앞 촛불집회 때도 같은 짓을 해서, 탄핵 문제에서 자기들 주장으로 이슈를 옮기고 청와대 돌격하려다 빈축을 사기도 했다. [16] 사실 그가 주장한 식민지반봉건론도 일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에게서 심대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17] 실제로 김일성은 1960년대 이후 자신의 독재권력을 확립해가며 소련과 중국 모두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독자노선을 취하긴 했다. 또 장 폴 사르트르 살바도르 아옌데 등 이 시기 방북한 해외 사회주의 인사들이 북한을 고평가한 바도 있고. 물론 북한의 대외 선전용 의도도 있었겠나만, 어찌되었건 이 당시 북한의 경제는 나름 그럭저럭 돌아가고 있었을 때기도 했다. 이런 점을 봤을 때 의외로 '자주적이고 평등한' 북한이라는 환상이 나름 일리가 있어보이는 사례는 있었다. 물론 동구권이 몰락하고 또 과거에 검열 및 억압되었던 정보들이 풀리면서 이러한 환상은 처참히 무너져 갔지만. [18] 1989년~1990년 당시 한창 남북 화해 분위기에 따라 북한에 다녀온 학생운동가와 사회운동가들이, 자신들을 환영하기 위해 오밤 중에 주민들을 깨워서 숙소 근처에 동원시켜 놓은 것을 보고 "얼굴에 피곤하다고 쓰여있는 사람들 데리고 뭐 하는 짓인가"라고 생각하면서, 적어도 남한이 북한보다는 자유롭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종의 임수경 쇼크의 남한버전? [19] 문제는 비주사 스탈린주의자들 입장에서는 북한(김씨왕조)이 전제주의 국가라는 점에 있지만. [20] 현재 많은 대학에서는 행사의 의미로 정착되어가고 있다.학점 따러 가는 인원도 대다수다. [21] 한자무용론 주장 등을 보면 문화적 친중이라고 보긴 애매하다. 일반인 사이에서는 한자 혼용은 반대하더라도 교육 자체는 나쁠 게 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나, NL들은 민족주의에 의거하여 한자를 배척한다. 북한 자체가 이미 그렇게 했고, 한자를 반대한다면서 "그게 일재의 잔재다, 우리 한글이 우수하니 우리민족끼리 하자"라는 주장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한자 병기는 일본의 잔재라며 한자를 몰아내자는 시위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사실 러시아의 지배를 받은 폴란드에서 러시아어를 바우는 사람이 많은 등, 여러 국가들 역시 이웃나라에게 지배 경험을 겪었다 해도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경우가 많다. 역사 문제와 별개로 현재진행형 시점에서 국제 사회에서 인접 국가와의 교류는 활발할 수밖에 없으며, 셋 다 한자문화권에 속하기에 한중일 3국이 뭔가의 수렴점을 찾을 수 있을 공통점이자 그 뿌리가 한자인 셈이다. [22] 한국의 경제구조가 수출주도형인 것을 식민매판세력의 의도적인 정책 결과라고 인식하는 듯한데, 인구 수도 5000만명에 북한을 합쳐봤자(그들이 구매력이 없는 것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겨우 7천만이고 자원도 극단적으로 부족한 한국의 사정상 수출지향적 경제는 필연적이다. [23] 친미성향의 우파 인사들 중에서도 이런 이유로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기도 했다. 2003년 이라크 파병 동의안 국회 표결때 한나라당 내에서도 반대표가 속출한 것도 이런 관점이다. [24] 한중FTA에 대해서 NL계열의 일부인 전농이 반대선언을 한 적 있으나 같은기간 한미FTA에 대해 반대성명과 시위를 한 횟수에 비해선 수 배의 차이가 있다. 전농은 중국산 김치 등으로 인해 자기 밥줄이 걸려있다는 차이도 있고. [25] 소련 시절에는 PD가 소련을 옹호했다. 소련이 일본하고 연대하는 모습이 자주 있었기 때문이었다. [26] 이 무렵에 대부분의 PD들의 행보는 네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로 보수주의 우파나 자유주의 중도좌파로 전향한 경우, 둘째로 사회민주주의로 우경화한 경우, 셋째로 서유럽의 신좌파 노선을 받아들인 경우, 마지막으로 트로츠키주의 국제사회주의로 갈아탄 경우. 국제사회주의는 1990년에 들어왔고 트로츠키주의는 1995년에 들어왔다. [27] 운동권들은 민주화 운동가인 김영삼, 김대중을 지지하긴 했으나, 이 양김은 온갖 고초를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정치를 수행했다. 결국 민주주의 정권인 YS/DJ 때도 한총련 등은 결국 폭력 동반 시위를 일으켰다. 훗날이 돼서야 이들은 노무현 정권 시기 힘을 얻었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대통령 중 친노 입장을 지지하며 존속한 상태이다. [28] 그런데 공식적으로 이들은 정파의 존재에 대해서 함구한다. 특히 일반 당원들과 외부에 대해서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따라서 이들 삼대연합의 활동방식은 각종 진보적 조직과 지역위원회 활동가들을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두고 사안에 따라 바지사장으로 내세운 인물을 조종해 전화로 지침을 내린다. 그리고 각종 공직선거와 당직선거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29] 사람사랑 그룹은 경기도 지역에서 특히 강세를 띄었는데 바로 경기동부연합이 이때부터 자신들의 후배를 지원하고 있었다. 일각에선 경기동부가 조직적으로 후배들을 포섭해서 사람사랑 그룹을 만들었다고 보기도 한다. [30] 서울에선 서울대와 고려대, 경희대가 중심이었고 2000년대 이후로는 노동자학생연대선봉대(약칭 노선대)라는 간판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를 거쳐서 통진당, 민중연합당, 민중당, 진보당까지 이르고 있다. [31] 사실 경기동부도 처음에는 NL운동을 시대에 걸맞게 개량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여타 사회운동가들한테 세련되게 운동한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있다. 운동의 모범이다같은 칭찬을 들었지만, 머릿수를 불려서 주도권을 쥐게되자 자신들이 그렇게도 비판했던 패권주의와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을 똑같이 보여주었다. 때문에 NL계열 내부적으론 "우리가 주사파라는 것은 오해"라고 항변하지만 외부에서 봤을 땐 하는 짓이 똑같으니 그놈이 그놈이라는 인식이 깊게 박혔다. [32] 한 학교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을 예를 들 수 있다. H대는 옛날부터 NL계가 강한 곳이었는데, 2010년도 초반에 여러 민중민주주의단체들과 정당 조직들이 여러 강연회, 세미나를 열면서 세를 불려간 적이 있었다. 그러자 NL계가 중심인 H대의 총학생회는 강연자의 학교 초대에 미온적으로 대처하고, 학생처가 강연을 불허하자 여기에 동조하는 등 다른 운동권 학생들을 억압하는 행위를 일삼았다. 강연회나 세미나를 취소시킨 이유는 그 연사들이 진보신당, 민주당(2013년), 진보정의당 등의 정치인들이어서 학생들이 접하기에는 너무 정치적이기 때문 이었다. 그 전에 H대 총학생회는 통합진보당의 여러 인사들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고 당원가입서를 배부하는 등 이미 NL계 정치인들은 초대한 전례가 있었던 데다가, 심지어 일손이 부족해서 노동자연대나 진보정의당원들에게까지 도움을 받은적이 있었던 이후였는데도 말이다. [33] 2002년 10월 26일 남동을(준) 창립총회을 앞두고, 90여명의 기존당원(중동지구당의 PD쪽의 당원 20여명, 경기동부연합 세력 12명 포함)을 힘으로 누르기위해 인천연합 쪽 부평갑.을지구당 소속 당원 73명이 당권신청 마감일인 9월 30일 주소 변경(지구당 이동)을 신청했다. 갑자기 당원이 90여명에서 1백 60명으로 불어나고 인천연합은 모든 당직을 '싹쓸이' 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냈으며 결국 73명 중 13명은 남동갑지구당에, 60명은 남동을지구당 창당사업을 기약하며 지구당을 재이동해 '전쟁'을 보류한 사건이다. [34] 권영길, 노회찬, 심상정 등 [35] 자기들끼리 분열해서 동상이몽하고 있던 PD계(평등파)는 2004년 6월 전당대회때 지도부 선거에서 전멸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연합했지만, 그 뒤에도 2006년까지 모든 당직 선거, 후보자 경선에서 거의 전패했다. 결국 2004년 총선에서의 화려한 제도권 데뷔가 무색하게 민주노동당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냥 망했다. [36] 여담으로 이 방식은 후일 산업화나 밭갈기처럼 인터넷 커뮤니티를 장악하는 방법으로 자주 사용하게 된다. 기존 사용자들은 여기 아니더라도 활동할 곳은 많다며 자리를 뜨고, 운영자들은 밭갈기를 온 세력이 만든 트래픽에 꿀을 빨거나 극단적으론 운영자가 이들의 편을 들어서 장악이 끝난다. 그리고 장악이 끝나면 이를 잠시동안 유지하면서 이름값을 끝까지 사용한 뒤 원래 활동하던 사이트로 돌아가고 하나의 사이트가 몰락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37] 사실 그 동안 썼던 NL을 비판하는 글이 이제와서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하는 게 정확하다. 진중권은 독일로 유학을 떠나기전 1980년대 후반 서울대 PD계열의 이론가였던 이진경, 조국 교수와 함께 '주체사상비판'이란 책을 출판하면서 NL계를 신랄하게 비판한 과거가 있다. 특히 이 책에서 저자들이 NL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한게 반지성주의였다. 맹목적인 친북성, 조직보호의 명분하에 저지르는 각종 사건사고 등 NL계의 병폐가 대부분 반지성주의에서 파생된 문제라고 분석했다. 진중권은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서 2000년대 초반 조독마(인터넷 조선일보 독자마당)에서 보수 네티즌들과 일당백을 하며 인터넷키보드워리어로 이름날리던 시절에 NL계가 민노당에 대거 입당하려는 조짐이 보이자 NL계 인사들하고 장기간 키배를 뜨기도 했다.[72] 결국 진중권은 이대로 가면 당은 NL의 위장막으로 전락하고 진보정당 운동은 실패할 것이라고 우려를 표시하면서 민주노동당을 탈당하였다. [38] 민경우는 NL내에선 특정 분파에 치우치지 않는 비교적 중립적인 인물로 이때문에 수많은 NL계 단체가 참여한 범민련과 통일연대 사무처장을 오랜기간 지낼 수 있었다. [39] 이건 PD 등 다른 계열에서 20년 전부터 던졌던 질문이긴 한데... [40] 당시 민경우와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던 인물이 정의당의 청년 정치인으로 각광받았던 조성주(정치인)이다. 조성주도 학생 시절에는 NL계열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에서 활동했으나, 이후에는 NL그룹과 거리를 두다가 결국 제3지대로... [41] 학생운동 내에서는 사람사랑, 노선대 등 [42] 한의계 진료모임 길벗, 약대동아리 늘픔, 스무살의 자격, 에코로드, 사실 위의 진실 IMFACT, 인권더하기법률, 이공계 지식공동체 CUBE가 소속되어 있던 모임. 2011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사를 받았던 '자본주의 연구회'도 이곳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 외 문화운동, 계열별 학술모임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하부 조직에서 비민주적인 운영방식이 비판을 받은 바 있다. 2000년대 들어 학생회 운동이 퇴조하자 다양한 관심사별로 그룹이 조직된다. 위의 연합 동아리들의 활동은 다양한 부분에 걸쳐있어 회원들 중에는 단순히 학술, 봉사목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단체 자체를 NL 조직으로 규정하기는 어려우나 각 조직의 운영진이나 이들을 지도하는 선배 라인은 경기동부연합 계열 출신으로 통합진보당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길벗과 늘픔을 제외하면 2018년을 전후해서 사실상 활동이 없어지고 새로운 동아리들을 만들어가며 활동중. [43]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일부 후보들은 NL단결(민권연대) 계열 [44] NL강경파, 자주대오, 주사, 비선 등으로 불리기도 함 [45] 오랫동안 민주당 비판적 지지 경향. [46] 정당을 결성하기는 하지만 선거에 나가 당선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공개적인 활동을 위해 결성. [47] 중부지역당 계통으로 알려져 있다. [48] 서울대 애국학생연대(애학련)와 국민대, 명지대 등의 자주단결계열이 중심 [49] 그동안 정의당 내 인천연합은 노유진의 정치카페등을 듣고 자발적으로 가입한 리버럴-사민주의 당원들이나 지속적으로 대학생위원회나 생활도서관과 같은 진보성향의 동아리, 전국학생행진내 인맥을 통해 세력을 포섭해왔던 PD들과는 달리 통합진보당 분당 사태 이후 후배 조직원들을 포섭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정미 의원 이후로 공식적인 인천연합 계열의 정치인을 길러내지 못해 쇠퇴하다가, 권중도 서울시 청년학생위원장의 주도로 2016년 초부터 진행된 청년둥지사업이 성공적으로 안착하여 꿈꾸는 고래라고 하는 정의당 외곽조직이 되었다. 이들은 전국 대학생 진보동아리연합을 표방하며 그 이후엔 정의당 색을 버리고 완전한 대학생 조직으로 바뀌었다. [50] 범민련의 뒤를 잇는 원로들의 단체 [51] 평화/평등/표현의 자유와 같은 이야기들을 이들도 떠들지만 자기들 내부관리는 자신들 주장과 정반대로 움직이고 행동하는 게 당연하다고 본다. [52] 상부의 지시에 조금이라도 의문을 제기하면 바로 조직에서 축출된다. [53] 특히 NL에서 전향한 뉴라이트의 경우 숭배의 대상만 바뀐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즉 김일성 숭배하다가, 이승만, 박정희로 갈아탄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 여기에 과거에는 무조건 북한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다가, 이제는 무조건 미국 중심으로 세상을 본다는 비판까지. 즉 종북반미에서 반북종미로. 세계를 폭넓게 보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좁은 시야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54] NL측은 21세기 한국의 사례를 '아제국주의'라고 이해한다. 아제국주의는 분명히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사례이다. * 부연 설명을 하자면 인도 제국은 분명히 대영제국의 식민지였고 인도 인민은 당연히 영국 시민보다 열등한 취급을 받았던 건 맞다. 하지만, 인도 제국은 엄연히 베르사유 조약체결국이자 국제연맹창립국이었으며 (이는 식민지 자격으로는 유일무이한 사례) 인도 제국군은 식민지군으로서의 동원 수준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인도의 전통적인 외교 전략과 부합하기도 하는 자의적 의지를 지니고 인도 근교의 파병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아니, 식민지의 독립이 시간 문제가 되어가는 2차대전 즈음 특히 남방 작전 이후에는 영국이 형식상으로는 동원령을 발동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인도에 구원(문자 그대로 SOS) 요청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영국이 '더 이상 인도의 안보를 책임질 수 없다'는 게 현실로 증명되면서 인도의 반영 투쟁(Quit India. 인도를 떠나라)은 더욱 격화되었고 결국 영국은 전후 독립을 확약하고 나서야 인도군을 세계 각지로 파병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이런 사례를 지켜본 식민지 조선의 친일파 지식인들 또한 일본 제국의 범주 내에서 아제국이 되자는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했으며, 현대 한국 또한 미국과의 관계에서 대중국 포위망에 자의적으로 가담함으로서 미국 체제 내에서의 아제국을 추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 또한 NL의 일각에서는 일본도 일종의 식민지 아제국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미국이 오랫동안 전후 냉전 체제를 해체하려고 하는 일본 정치인 특히 총리나 외무상을 좌시하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매수(각복전쟁과 미키 내림), 내각 붕괴, 선거 패배 유도, 원인 불명의 질병 그리고 의문사, 심지어 (안보투쟁의 경우) 대중봉기까지 포섭(안보투쟁에 동조하는 극우파를 경유하는 CIA의 전학련 자금 지원)해서 미일관계를 단속해 왔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제는 일본도 미국의 체제에 자발적으로 협력하고 있으며 플라자 합의 등 일본에게 치명타가 된 조치도 이런 관계의 결과물(미국의 결정적 요구를 거절하지 못함)이라는 것. 출처 : 마고사키 우케루,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 * [55] 그리고 비록 미국을 상대할 때보다는 약한 목소리였다지만 NL계의 공식 요구사항 중 하나가 대중 FTA 반대였다. 전농이 중국산 김치 수입때문에 각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56] 다만 정의당의 경우는 기존의 노동운동 중심 정당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등 꽤 우클릭이 이루어진 상태긴 하다. 노동당의 경우는 그 반대로 상당히 좌경화해 공식적으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 되었다. [57] 진보당이 이러한 성향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노동당에서는 진보당의 노선을 사민주의로 규정하기도 했다. 물론 흔히 생각하는 제3의길과 같은 사회민주주의 우파가 아닌 남미에서의 사회주의와 비슷한 맥락으로써 그렇다는 것. 실제로 진보당의 노선의 방향성은 남미의 21세기 사회주의와 상당히 유사하다고 평가받는다. [58] 아직도 버티고 있는 강성 NL 조직인 범민련과 련방통추가 있지만 여기는 그냥 70대 이상 노인들의 친목 모임 비슷하게 흘러가는 관계로.. [59] 그러한 이유로, 이쪽과 노정협 같은 스탈린주의 PD를 비교하면 노정협이 더 친북으로 보일 지경이다(...) 주체사상 항목을 참고하면 자세히 나와 있지만 PD 가운데 친북 PD가 엄연히 존재한다. 친북 NL이 북한을 우리 민족의 주체적인 정권이기 때문에 지지하거나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면 친북 PD는 북한을 사회주의적 생산 관계와 양식이 확립된 정권이기 때문에 지지하는 입장을 보인다. 물론 북한에서 사회주의적인 소유 관계가 확립된 것은 맞지만 생산력 수준이 자본주의 최고수준에 한참 못 미치고 노동자 민주주의가 자리잡지 못한 전체주의 체제라는 점에서 사회주의적 생산 양식이 확립된 것은 아니다. 그나마 형식적으로 존재하던 무상복지 혜택들도 쿠바와 달리 사실상 이름뿐인 상태로 전락하였고... NL=친북, PD=반북 등식에 익숙한 일반적 대중에게 진보당의 논평과 노정협에서 발행하는 노동자 정치 신문(노정신)에 실린 기사를 동시에 보여 주면서 어디가 NL이고 어디가 PD냐 묻는다면 바꿔서 대답할 확률이 높다(...) 어떻게 보면 노정협의 사상도 '시대에 뒤떨어진 좌파 이념'의 PD 버전인 셈이다. [60] 민족주의적 자유주의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며, 실제로 이런 이념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이들을 엄밀한 의미의 자유주의라고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오히려 좌익 내셔널리즘에 가깝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신 페인처럼 좌파적 색채를 버리고 중도좌파 좌익 내셔널리즘 정당으로 변모한 경우도 있으며, 구 동구권의 좌파 정당들도 탈냉전을 거치며 공산주의를 버리고 사회민주주의 좌익 내셔널리즘 정당으로 온건화된 경우가 많다. 사실 이념 변천의 궤적만 보면 이런 경우와 훨씬 유사하다. [61] 한대련과 청지는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 당시에 기존 운동권과 함께 '박근혜 정권 퇴진 전국 대학생 시국회의'라는 이름으로 함께 활동한 바 있다. 그러나 박근혜 추방이라는 목표를 실현한 이후 서로 상반된 행보를 보이고 있다. [62] "남한의 정치 지형에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어찌되었든 이는 우파로 전향한 것이라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렇게 보기는 힘들다. 사회자유주의를 염두에 두고 쓴 말인 듯 한데, 그렇게 봐도 한국과 유사한 정치 체제를 가진 국가 중 이들을 범좌파로 취급하지 않는 경우는 사실 드물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주체사상, 더 나아가 사회주의를 포기했을 지 몰라도 좌파 색채와 지향성을 포기한 적 없다. [63] 북한은 김일성 1인 독재 체제가 구축되기 전까지만 해도 경제적으로도 남한보다 훨씬 잘 살았고 경제성장률은 1969년까지 남한을 앞질렀다. 1970년대에 김일성 1인 독재 체제가 구축된 이후에도 북한은 그런 대로 끓여먹고 살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 막 빈곤에 허덕이거나 사람들이 굶어죽어 나가는 일도 없었다. 북한이 이렇게 막장화된 것은 김일성 1인 독재 체제의 정점에서 김일성 본인이 죽고 김정일이 정권을 잡던 무렵에 때 맞춰서 고난의 행군이라는 극심한 경제난에 직면하면서부터이다. 즉 한참 NL들이 북뽕 거하게 맞고 있던 시점의 북한은 비민주적 독재국가이긴 하지만 그래도 경제적으로는 끓여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는 사회였다. [64] 가사는 노답이지만 곡 자체는 퀄리티가 좋다. 쓸데없이 고퀄리티... [65] 가사 전문: 함성소리 들려온다 거센 파도와 같이 / 민중의 바다가 열렸다 통일이 밝았다 / 그 얼마나 목 메이게 불러왔던가 / 사랑스런 통일 조국이여 터질 듯한 심장이여 / 달려가자 전사여 연방 통일 조국으로 / 3대 헌장 정신 드높이자 범민련 전사여 // 범민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동지여 / 마지막 남은 핏방울까지 통일에 바치자 / 그 얼마나... (이하 동일) [66] 사실 여기서 말하는 연방제 통일이 북한 측이 주장하는 연방제 통일이라고 해석할 직접적인 근거는 없지만... 만일 그렇다면 음원 사이트에서 팔릴 리도 없겠지. [67]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가 제한적이지만 확대되고 있다는 뜻이다. [68] 도종환 시인이 민주당 국회의원인 관계로, 우리나라 대표 멤버인 백자가 국회방송에 출연하여 도종환 시인의 시에 곡 붙인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69] 울산연합은 한국 노동운동의 근원인 울산에서 정규직 노조를 기반으로 성장한 그룹이고, 인천연합도 거슬러 올라가면 1980년대말 인천 부평 · 계양 및 부천 등지의 공단지대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화하면서 출발하였다. 경기동부는 모든 NL조직들이 통일운동에 집중할때 <노동자학생연대선봉대>라는 학생조직을 운영하면서 노동자연대투쟁에 참여하면서 세를 불렸다. 또한 이들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양극화 문제가 대두되자 일반노조 같은 비정규직 노조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렇듯 노동자계급에 어느 정도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개량 주의 행보를 보이면서도 좌파적 색채가 남는 것이다. [70] 뉴라이트와 관계가 없지만 일뽕인 이들이 있듯이 대부분은 이해하기 힘든 여러가지 사유로 종북이 된 이들이다. [71] 북한에 여행 다녀와서 후기 올리는 건 기본이다. 김일성의 저서 '세기와 더불어'를 돌려 보는 건 기본. 이들의 주 서식지는 시애틀 한마당(줄여서 한시애틀)이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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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이 당시 진중권이 인터넷에서 공개적으로 NL계를 계속 공격하자, 주변에서 진중권과 NL계 핵심인사들간의 비공개 대화 자리를 주선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 나온 NL계 간부가 "지금 수령님이 살아계시다면 무슨 일을 했을꺼 같소? 나라면 진보정당을 하셧을꺼 같은데."라는 발언을 하더라고 진중권이 훗날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런 놈들하고 무슨 일을 같이 하냐'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