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22:53:34

남방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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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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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 연표 사건
19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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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19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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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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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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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알라메인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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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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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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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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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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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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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바르샤바 봉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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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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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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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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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남방작전
南方作戰
Malayan Campaign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의 일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79px-Pacific_War_-_Dutch_East_Indies_1941-42_-_Map.jpg
날짜
1941년 12월 8일 ~ 1942년 2월 15일
장소
동남아시아 일대
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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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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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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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자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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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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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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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 연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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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령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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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자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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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자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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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망명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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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령 동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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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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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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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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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웨인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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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스틸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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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퍼시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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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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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히사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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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시타 도모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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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시타 도모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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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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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지 마사노부|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츠지 마사노부
]]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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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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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타구치 렌야|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무타구치 렌야
]]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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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명칭
]][[틀:깃발|
파일: 깃발.svg
깃발 명칭
]][[혼마 마사하루|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혼마 마사하루
]]
병력
병사 13만 명
항공기 253대
포 810문
대전자포 및 대공포 208여 문
병사 12만 5천 명
전차 265대
항공기 799대
포 440여 문
트럭 3,000여 대
피해규모
전사 7,500~8,000명
부상 11,000여 명
포로 및 실종 120,000명
전사 3,507여 명
실종 6,150여 명
전차 30여 대 손실
항공기 108~331대 손실 및 파괴
결과
일본군의 승리
영향
일본군이 동남아시아 전역 장악
1. 개요2. 배경3. 문제점
3.1. 일본군3.2. 연합군
4. 전역5. 결과6. 인물
6.1. 연합국6.2. 일본군
6.2.1. 일본제국 육군6.2.2. 일본제국 해군

[clearfix]

1. 개요

일본 대본영이 남방작전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생각건대 하루 아침의 일이 아니다. …(중략)… 크게 보아 양원한 국시(國是)[1]로 고려해야 할 바 였기 때문이다.
『청일전사』 제16편 제72장 「남방작전에 관한 대본영의 결심 및 그 병력」 제2초안[2]
남방작전()은 1941년 말 ~ 1942년 중엽에 걸친 일본군 동남아시아 점령전이다. 영어로는 말레이 전역 (Malayan campaign)이라고 부른다.

2. 배경

전반적 배경은 진주만 공습의 원인과 일맥상통한다. 중일전쟁이 길어지며 물자난은 가중되었는데, ABCD 포위망으로 전쟁에 필수적인 전략자원인 석유 수급이 어려워진 일본의 입장에서는 석유, 고무와 같은 핵심 전략자원 확보를 위해 서구열강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를 기필코 획득해야 했다. 사실 진주만 공습은 남방작전을 위한 과정에 불과했지 목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목적인 남방작전보다 과정인 진주만 공습이 더 중요시된 이유는 일본의 동남아 점령을 막을 유일한 군사적 위협이 미 태평양 함대뿐이었다는 데에 기인했다. 1941년, 동남아의 유럽 세력은 실로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프랑스 식민정부는 프랑스 침공으로 본국 정부가 독일에 항복한 뒤라서 일본군의 인도차이나 진주를 막을 세가 없었고, 비시 프랑스는 결국 이를 허용할 수밖에 없어 인도차이나 전역이 명목만 프랑스령인 사실상 일본령이 되어버렸다. 네덜란드도 본토가 독일에 점령당한 상태였고, 버마 말레이시아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도 힘겹게 본토를 방어하면서 동시에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국 세력과 싸우는 중이었다. 미국 필리핀 주둔군이 가장 큰 난관이었으나, 태평양 함대만 격파한다면 제해권 없는 미군이 필리핀을 방어해내긴 어려웠다. 마카오 동티모르 포르투갈 세력은 중립국으로서 무기나 팔며 전쟁을 구경하고 있었다. 본토가 아예 점령당한 프랑스나 네덜란드보다는 낫긴 하였지만, 굳이 고려 대상이 아닐 정도로 그 세력이 미미했다.

일본으로서는 어떻게든 동남아시아 전역을 확보해서 대동아 공영권을 완성시키는 것을 전략적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일본은 유럽전선에 휩쓸린 서구열강들이 프랑스처럼 식민지를 포기할 것이라 기대했고[3] 아울러 동남아시아만 모조리 장악하면 고립된 중국이 알아서 항복할 것이라 착각했다. 대본영은 진주만 공습이 성공한다는 전제하에 서태평양과 동남아시아를 모조리 석권하는 치밀한 전략 계획과 타임 테이블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3. 문제점

3.1. 일본군

사실 남방작전은 처음부터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우선적으로, 진주만 공습이 성공해야 한다는 가장 큰 전제가 무너지면 모든 작전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었다. 일본으로선 다행히도 진주만 공습이 성공하여 첫 고비는 넘겼지만, 이제부턴 그보다 더 큰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당장 일본이 점령해야 할 지역이 너무 넓었다.[4] 영국의 동아시아 최전선기지인 영국령 홍콩, 영국 동양함대의 기지이자 유럽에서 태평양으로 들어오는 가장 중요한 길목인 싱가포르, 미국의 서태평양 주요 기지들이 자리잡고 있던 필리핀 자치령, , 웨이크섬, 동남아 최대 석유 산지인 보르네오, 여기에 주요 항로를 장악하려면 자바 섬 수마트라 섬도 덤으로 점령해야 했다. 동남아 유일의 독립국인 태국이 어떻게 움직일지도 알 수 없었으며, 태국과 인도차이나를 방위하기 위해 버마까지 장악해야 했다. 이 정도의 규모면 나치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 수준의 규모였으며, 두 국가 모두 이 거대한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점령지를 유지하기에는 국력이 부족했다.[5][6]

안 그래도 이미 중국과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전쟁 중이었던 일본이, 아무리 길게 잡아도 1년, 짧게 잡으면 반년 정도만에 이 광대한 지역을 모조리 점령한다는 건 아무리 연합군이 약체화되어 있다 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홍콩의 영국군만 2만,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에만 10만, 필리핀에도 약 15만에서 20만이라는 무시할 수 없는 병력들이 방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해군력도 미국 태평양 함대를 제외하더라도 전함 2척을 중심으로 하는 영국 동양함대가 싱가포르에 배치된 상태였고, 필리핀에 전개한 미국 아시아 함대와 동인도제도에도 네덜란드 잔존 함대가 버티고 있었다.[7]

다음으로 동원할 수 있는 육상병력에도 큰 한계가 있었다. 이미 일본 육군은 중일전쟁 만주국 유지를 위해 100만에 가까운 병력이 중국 대륙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 전투에서는 우세를 점하고 있었지만, 광활한 중국의 영토 덕분에 점령지역의 확보를 위해서라도 현지에서 계속 병력 충원을 요청하는 상황이었다. 결론적으로 일본 육군은 남방작전에 따로 돌릴만한 병력 자체가 크게 모자랐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일본 자체의 해상수송능력 및 보급 능력의 한계가 있으므로 그나마 일본 육군이 남방작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병력보다 더 적은 병력만 수송 및 보급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일단 대본영의 추산으로도 전투 병력은 최대 12개 사단 정도만 동원 가능하다는 보고가 올라올 지경이었다. 그나마 일본 해군은 대부분의 병력과 장비를 동원할 수 있으나, 워낙 작전 지역이 넓고 일본 본토 등도 수비해야 할 이유도 있으므로 실제 각각의 작전지역에 투입되는 함선은 그렇게 많지 않거나 동원가능 기간이 심하게 짧았다.

일본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와조전술(蛙跳戰術), 번역하자면 " 개구리 뜀뛰기" 작전을 수립한다.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의 <세계전쟁사>에 따르면 이는 필리핀 민다나오로부터 술라웨시 보르네오에 이르는 광대한 동부 인니 도서지역을 효과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수립한 작전으로, 구체적인 방식은 다음과 같다.
  • 1. 공격기지에서 제공 및 제해권을 장악
  • 2. 목표지역을 공중과 해상으로부터 공격
  • 3. 지상군 투입으로 국지를 점령하고 비행장 건설
  • 4. 항공기를 추진시키고 국지적인 제공 및 제해권 장악
  • 5. 다음 목표에 대하여 공중 및 해상공격, 이때 지상군은 보급 및 재편성 실시

일본군은 이를 반복함으로써 강한 세력을 보유한 중요 지점을 파괴하고 나머지 부차적인 연합군 세력은 와해되는 것을 노린 것이다. 이 "개구리 뜀뛰기" 작전은 체스터 니미츠가 이끄는 미군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미국이 사용한 것은 이와 유사한 "바이패스(Bypass)" 전술이다. 육사 전사학과는 일본의 와조전술은 독일 기동전의 영향을 받아 적의 주력 지점을 적극 공략해 섬멸하지만 미국의 바이패스 전술은 적의 약점을 파고들어 차지한 후, 병참선을 차단하여 마비시킨 다음 주력은 서서히 말려죽인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설명한다.

어쨌건 일본군은 적은 병력을 가지고 최대한 신속하게 각지에 분산된 연합군을 각개격파하면서 주요 전략 거점들을 일일이 하나하나 빠르게 점령해 나가야 했다. 때문에 얼마 안 되는 일본군 내 소수의 상식인들은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연합군은 다 바보인 줄 아느냐?" 등의 회의론으로 자국의 미래를 염려했으며, 실제로 히로히토 천황도 "중국 땅도 넓은데 태평양은 그보다도 더 넓지 않은가?"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눈앞에서 기다리는 동남아시아의 과실들에 눈이 먼 경직된 군 수뇌부는 이러한 염려들을 깔끔하게 기억 속에서 지워 버렸다.

3.2. 연합군

사실 연합군도 제대로 된 준비가 전혀 없었다. 일본군이 언젠가 본격적으로 동남아시아를 침공해 올 것은 명백했고, 일본이 이를 위해 여러 작전 계획들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뤄질지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나마 홍콩이나 필리핀 등이 최우선 공격목표일 것이라 예측했고 이들 지역에서의 방위전이 준비되고 있을 뿐이었다. 더욱이 전쟁 이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당시에 일본 측의 주장으로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방어시설 및 군사기지 구축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동남아 일대에서 연합군의 방어태세는 부족했다.

연합군은 총병력 자체는 많았으나 넓은 동남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총병력은 큰 의미가 없었다. 넓디 넓은 동남아시아는 공격하는 일본군보다도 방어하는 연합군에게 더 큰 장애였다. 거기다 대부분이 섬으로 이루어진 동남아시아 지리 상황에서 병력의 재배치도 어려웠고, 그나마 육지로 이어진 지역들도 우거진 정글 때문에 도로나 철도의 부설이 거의 이뤄지지 않아 병력 재배치가 어렵긴 매한가지였다.

여기에 더해서 병력의 질도 좋지 않았다. 필리핀에 주둔하는 연합군은 최대 10만에 달했다. 그 구성은 미 주둔군 2만과 이제 막 창설된 필리핀군이었는데 제대로 완편되지 못한 부대가 많았고 장비는 2선조차 한참 뛰어넘은 구식에 수량도 매우 부족했다. 그나마 미군 휘하의 필리핀인 정예부대인 스카우트 연대는 대전차화기를 일부 보유하고 있었으나 소형 대전차포 몇 문이 전부였다. 미군의 경우도 숫자가 부족한데다가 드럼 요새같은 방어시설물과 요새를 제외하면 기본 장비 외에는 항공 전력 약간에 수십 대 남짓의 경전차, 기본적인 사단 포병 정도의 전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열악한 상황에도 필리핀의 연합군은 그나마 일본군과 싸우려는 의지가 가장 높았고 실제로도 가장 선전했다. 영국과 네덜란드 측은 상황이 더 나빴다. 영국이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에 배치한 군대의 경우 전차가 단 1대도 배치되지 않았으며, 식민지인 인도인으로 구성된 부대가 전체의 절반에 육박할 지경이었다. 해당 부대는 정글전 훈련 따위는 받은 적이 없던 데다가 사기까지 팍 떨어진 상태였다. 그나마도 우수한 인력과 전력은 유럽전선에 우선적으로 차출되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에 배치된 영국군은 전력이 더욱 부실해졌다. 네덜란드의 경우에는 현지 원주민으로 구성된 민병대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아직 일본군의 실상을 알지 못한 상황이었으므로 현지 원주민 민병대는 네덜란드를 위해 싸울 의지 자체가 거의 없었다. 이래서는 숫자가 아무리 많아봤자 실제 전투력은 바닥으로 치닫는다.

이런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해권과 제공권이었다. 그런데 미국 태평양 함대는 진주만에 있었을 뿐더러, 그마저 개전과 동시에 반신불수가 되었다. 자바에 배치되어 있던 네덜란드의 해군은 기량이 우수하고 항전의지도 높았으나 경순양함 이하의 수상함 전력과 잠수함이 주력이었다. 전함만 10척을 보유한 일본 해군을 상대로 진격을 지연시키는 것이면 모를까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개전 이후 무리하게 일본 해군에 맞서다 이 한줌의 전력마저 박살나 버렸다. 그나마 남은 건 영국 동양함대였는데, 군함인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비록 최신예 전함이긴 해도 그게 끝이었다. 리펄스는 1차대전형 구식 순양전함이었고, 이들을 뒷받침해줄 다른 주력함이나 지원함 세력이 크게 부족했다. 이 시기 영국 함대는 대부분 지중해 북해에서 독일-이탈리아 해군과 피터지게 싸우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처칠과 영국의 지도부는 전함 1척, 순양전함 1척, 항공모함 1척[8]을 주축으로 한 함대로 일본 해군을 충분히 견제할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뼈아픈 오판이었다. 아무리 주력 함대가 진주만을 털러 갔다 하더라도 이 정도는 연합함대에게 있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고, 결국 자신들과 상대의 전력을 오판한 영국 동양함대는 아주 처절하게 깨졌다.

제공권으로 가면 상황은 더 암울했다. 미국의 경우 필리핀에 107대의 P-40 워호크와 35대의 B-17를 비롯해 상당한 전력을 배치했다. 외견상으로는 그럴듯 해보이고 실제로도 필리핀에 배치된 미국의 항공전력은 전쟁위험이 높아짐에따라 빠르게 증강되고 있었다. 하지만 개전 당시 필리핀에 배치된 미국의 항공전력은 항공기의 수량 및 성능, 파일럿의 기량에서 일본군에 열세였다. 대만에 배치된 일본군의 항공전력은 전투기 210여대를 포함한 약 550여대에 달했고 중일전쟁 등으로 실전경험이 풍부했다. 반면 미군의 B-17 폭격기와 P-40 전투기는 당시만해도 많은 문제점이 아직 개선되지 않은 초기형 기체였다. 영국군의 가용 전투기 대부분은 본토와 북아프리카에 있었고, 동남아에 있는건 미군이 공여한 구식 F2A 버팔로 뿐이었으며 수량도 충분치 못했다. 더군다나 항공모함이 1척도 없어 모든 항공 지원은 지상기지의 지원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해당 지역 내의 연합군은 사용 언어부터 달랐다. 서로 협동 전투나 훈련을 단 한 차례도 수행한 적이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무기와 탄약 등은 물론 신호체계마저도 호환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가면 해당 지역 내에 있는 연합군의 함대를 모두 모아서 혼성함대를 만들었는데, 통상적인 항해명령도 내리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당장 통역을 담당할 사람도 부족해서 기함에 있는 네덜란드 제독이 명령을 내리면 이걸 영국 순양함으로 통역해서 전달하고, 영국 순양함은 미국 구축함에게 상세하게 설명하는 식으로[9] 명령전달체계가 길게 늘어지는 상황이었다.

4. 전역

남방작전의 개시는 대체적으로 진주만 공습을 기준으로 설정됐다.[10] 공격 목표는 크게 다섯 곳으로 태국 점령,[11] 말레이 상륙, 루손 공습, 서태평양의 미국령 도서지역(, 웨이크 및 길버트 제도) 상륙, 홍콩 공격이었다. 개전과 동시에 기습을 가한 이후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와 버마를 점령하여 이들 지역을 잇는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 작전의 최종 목적이었다.

남방작전은 다수의 목표를 동시에 타격해야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병력이 분산되는 위험이 뒤따랐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의 성공으로 미 태평양 함대가 무력화되고 기습효과를 살림으로써 일본군은 이 수많은 공격을 모두 성공시켰다.

4.1. 태평양 도서

개전 초 일본군은 자국령이었던 북마리아나 제도 팔라우, 일본명 남양 군도를 중심으로 주변의 미국령 도서들을 빠르게 제압하기 시작했다. 필리핀을 제외하면 최서단의 미국령이었던 섬에는 진주만 공습과 동시에 일본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당시 괌 섬에는 미 해병대 1개 중대와 아주 약간의 소형함정만이 있었기에 단숨에 수비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제1차 괌 전투)

반면, 동시에 공격을 가한 웨이크섬에서는 미국 해병대의 거센 저항을 받아 1차 공격대는 몇 문 안되는 5인치 해안포 구축함 2척이 격침당하고 3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냈는데도 미군 전사자가 0명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내며 말 그대로 탈탈탈 털렸고, 제6전대의 중순양함 4척과 진주만 공습에서 돌아오는 제국 연합함대의 지원까지 받아가며 12월 23일에야 간신히 점령했고 그 와중에도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자세한 것은 웨이크섬 전투 참조. 사실 이 전투는 일본군이 남방작전 과정에서 치른 가장 격렬한 전투였다.

4.2. 영국령 홍콩

개전이 되기 전에 이미 영국령 홍콩 일본군에 의해 겹겹이 포위된 상황이었다. 일본군 중일전쟁의 와중에 이미 광둥성 해안지방을 점령했고, 1940년에 구룡 반도와 접한 중화민국 영토를 모조리 접수하여 영국군과 대치했다.

인도차이나 반도마저 일본군에 넘어가버리고, 홍콩의 군사적인 가치나 방어 가능성에 환상을 가지지 않았기에 동양함대도 개전 전에 이미 싱가포르로 기지를 옮긴 상태였다. 하지만 영국으로서는 전투도 치르지 않고 홍콩을 내주면 나중에 돌아오기 어렵기에 방어 준비에 나섰다. 영국군은 구룡반도 북단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13,000여 명의 홍콩 수비대를 편성하였다. 홍콩의 방어에는 또한 캐나다군의 왕립소총대대와 위니펙척탄병대대도 파견되었는데, 이는 전임 홍콩 방어 사령관이던 아서 에드워드 그라셋 소장이 캐나다 출신이라 귀국하면서 캐나다의 참모총장에게 홍콩 방어에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는 제안을 캐나다군이 받아들이면서 이뤄진 일이였으며, 캐나다군이 태평양 전선에 참여한 몇 안 되는 전투이기도 하다. 일본군도 홍콩과 인접한 이후로 언제든지 홍콩을 공략할 수 있도록 23군을 편성하고,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성부대로 제1포병사령부를 신설하여 언제든지 홍콩을 공격할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12월 8일, 일본기에 의해 카이탁 비행장이 폭격받는 것을 신호로 본격적인 홍콩 공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요새화된 구룡 반도 방어선 돌파는 시일을 들여 차근차근 하기로 했었는데, 하필 어느 똘기 충만한 연대에 의해 스케쥴이 크게 앞당겨져 버렸다. 공격을 맡은 38사단 중에서도 후미를 맡은 228연대가 전공에 눈이 멀어 공격을 감행, 원래 다른 연대가 맡기로 한 영국군 방어고지 하나를 와카바야시 도이치라는 장교가 이끄는 1개 중대의 돌격으로 공격 당일에 함락시켜 버렸다. 노발대발한 사단장이 당장 후퇴하라고 지시했으나, 연대장은 이를 무시하고 기어이 추가 공격을 가해 다른 고지까지 함락시켰다. 개전 초기 이런 돌격에 의한 방어선 돌파의 신화는 현지군 중심의 동남아 식민지군에게나 우연히 통했을 뿐이지만, 훗날 결과적으로는 일본군 육군에 근성론을 더욱더 불어넣게 되었다. 1942년 과달카날 전투부터 일본군 돌격 신화는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나며 소멸하기 시작한다.[12]

이를 본 다른 연대들도 자극받아 계획보다 앞서 적극적으로 공세를 시작했고, 격노한 사단 사령부와는 별개로 23군 사령관 사카이 다카시 중장은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전면공세를 하자고 결론, 포병을 동반하여 방어선을 공략하여 개전 3일만인 11일에 방어선은 완전 붕괴되어 현지인 수비대와 영국 해군 수병 몇 만명만이 있었던 영국군은 홍콩 섬으로 후퇴했고, 13일에는 구룡 반도가 완전히 일본군의 손에 떨어져버렸다.

일본군은 구룡반도만 점령하면 홍콩 공략은 끝이라고 생각했으나, 홍콩 총독과 수비대 사령관은 홍콩 섬에서 끝까지 싸워보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일본군은 구룡반도에서 홍콩 섬으로 이어지는 급수를 끊고 항복할 것을 권유했으나 영국 총독은 항복을 거부했고, 그 때문에 일본군은 도해작전을 계획해야 했다. 홍콩에는 최소 반 년치의 식량과 탄약과 유류가 준비되어 있어서 상륙만 막아낸다면 어떻게든 방어가 가능하다고 수비대는 생각했다. 거기에 수비대 사령관은 광동성 전역에서 반격을 진행 중이며, 길어봐야 몇 달 이내로 홍콩 주변의 일본군을 뒤치기할 수 있다는 국민당군 사령관의 말을 믿고 있었다. 사실 실제로 국민혁명군은 홍콩의 구원을 위해 최정예 부대이던 9전구의 부대들을 남하시키긴 하였고, 홍콩에 파견되었던 중국군 소장이던 진책 소장의 경우 일본군과 내통하는 5열을 분쇄하여 영국군이 전투에 집중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렇지만 중국 전선에서 일본군은 위기에 몰리면 어김없이 화학전을 실행했기에 화학전에 대한 대비가 부족한 중국군의 구원 시도 자체는 실패로 끝났을 확률이 매우 높다.

결국 12월 18~19일 이틀에 걸쳐 일본군은 결사적으로 도해를 개시하여 상륙에 성공했다. 상륙 직후 일본군의 거센 공세에 동부여단이 스텐리 반도로 스스로 철수하면서 일본군은 병력을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일본군의 공세가 서부여단이 담당하던 황니천 계곡으로 집중되면서 19일엔 서부여단장이던 존 로슨 준장이 전사하고 황니천 계곡이 함락되었지만, 고속정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일본군의 공세를 간신히 저지하는데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대담 저수지의 급수시설을 발견하고 급수를 끊어 홍콩은 바로 식수난에 빠졌다.

이 중 노스포인트 발전소를 지키던 퓨질리어 중대의 분투는 놀랍다 못해 눈물겹기까지 하다. 이들은 18~19일에 걸쳐 18시간 동안 발전소를 지키다가 결국 모든 대원들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며 전멸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대원들의 출신 성분. 중대원 중 노스포인트 발전소에서 일하던 홍콩전기회사 직원들을 제외한 대원들은 본래 지역 방위를 맡은 의용대인 홈가드의 노병들이었다. 이들은 나이가 너무 많아서[13] 실제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홈가드 명단에만 이름이 올랐을 뿐 제대로 동원되지도 않았다. 게다가 이 노병 중에는 무역 회사의 사장, 고급 사교 클럽의 총무, 귀족 신분의 귀금속 상인 등 홍콩의 저명한 상류층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발발하자 재산을 챙겨서 홍콩에서 탈출하기는커녕, 장교도 아니고 일개 병사 신분으로서 일본군과 끝까지 맞서 싸운 것이다.

잔존 수비대 및 영국 해군 수병들 등 영국군은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악착같이 공격해오며 거점 하나하나를 빼앗기는데다 파리시 산이 점령되면서 빅토리아 시티로 가는 길이 열렸고, 탄약과 식수마저 바닥나 더 이상의 저항이 어려워지자 결국 방어사령관이던 몰트비 소장은 25일 크리스마스날 페닌술라 호텔에서 일본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영국은 홍콩 함락을 막기 위해 장제스에게 중국군을 보내서 홍콩을 지원해달라고 부탁했고 장제스 역시 수락했으나 문제는 중국군 예비대가 홍콩에서 수백킬로미터 떨어진 운남, 광서의 내륙지방에 있는 상황에서 기계화가 안되어있다 보니까 도보로 행군해야 했다는 것이고, 홍콩 근처에도 도달하기도 전에 홍콩은 함락되었다.

애초에 영국은 극동방어에서 싱가포르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홍콩은 비록 일본과 전쟁 시 사수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으나, 그렇다고 무혈로 홍콩을 내 주기에는 전쟁 이후의 재확보에 지장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여 홍콩 방위를 포기한 것은 또 아니었다. 하지만 전투 개시 불과 18일만에 홍콩이 함락되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그래도 홍콩은 한줌밖에 되지 않는 영국군 노병들과 약간의 현지 홍콩인 부대들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싸워서 그래도 전체적으로 할수 있는만큼 했다고 평가받는다. 진짜 수치스럽게 함락된 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이후 홍콩은 점령 일본군의 야만적인 통치로 말 그대로 조리돌림 당했다. 페닌술라 호텔은 토야 호텔로 이름이 바뀌었고,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거리 이름이나 기타 영어 이름의 거리들은 몽땅 일본어로 개명되었으며, 학교 및 공공장소에서는 영어 사용이 금지[14]되고 일본어가 공용어로 지정됐다. 그리고 조선에서처럼 신사참배를 강요해 빅토리아 피크에 홍콩신사가 들어서기도 했다.[15] 홍콩에 거류하게 된 일본인은 과거 영국인의 자리를 빼앗아 1등 국민이 되고 영국인 중국인 계통의 홍콩사람들은 졸지에 2류 아니면 3류로 굴러떨어졌다. 아무리 식민지 초기 영국인들이 중국인을 2등 국민 취급해서 "개와 중국인 출입금지" 등의 간판이 여러 곳에 있었다지만, 아예 이성을 잃은 일본인보다는 나았었다. 홍콩 경찰도 해체되어 일본 제국 육군 헌병이 그 자리를 대신했으며, 서슬 퍼런 공포 정치를 펼쳤다. 일본군은 홍콩 곳곳에서 민간인 학살을 벌이기도 했다.[16] 태평양 전쟁 기간 중 홍콩 총독을 역임한 일본군 장성 3명 모두가 전후에 전범으로 단죄받았다. 아무튼 이 때의 악연으로 인하여 홍콩은 지금도 반일 감정이 매우 강하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천하의 대영제국이 고작 아시아의 일본 따위에게 패하고 왕령 식민지를 내주었다는 소식은 아시아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장제스는 외교부에 영국이 과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도 홍콩을 계속 사수할 의지나 능력이 있을지를 타진하면서 그 전까지 크게 건드리지 않았던 홍콩 영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고, 동남아시아의 영국인 휘하의 아시아인 엘리트들도 영국인들도 이제 보니 신이 아니고 한낱 여느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반항적으로 변해갔다.

한편 홍콩 바로 옆에 있던 마카오는 일단 중립국인 포르투갈의 영토였으므로 일본군도 굳이 점령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마카오는 중립국 항구로서 기능을 계속했으며, 이 곳을 통해 포르투갈이 일본에게 석유 등의 물자를 판매하고, 일본이 중국을 감시하는 창구 중 하나로 사용하였다.

4.3. 필리핀 자치령

당신은 이제 운이 다했소... 당신의 보급도 이제 반으로 줄어들었소... 그러나 당신의 명예와 명망은 높이 사질 것이오.
혼마 중장, 필리핀 전투 당시 맥아더 장군에게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67px-Invasion_of_the_Philippines%2C_1941.jpg
나는 돌아올 것이다. (I shall return.)
더글라스 맥아더가 호주로 탈출하면서 남긴 말[17]
역시 개전과 동시에 필리핀도 공격을 받았다. 사실 필리핀의 미 극동군 항공세력은 개전이 되면 즉시 대만의 일본군 비행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선제 공격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공격에 나서기도 전에 일본군의 맹공을 받고 핵심 항공전력 상당수를 상실해야 했다. 항공기 자체 숫자도 적었을 뿐더러 일본군의 제로센 Ki-43 하야부사를 상대하기에는 P-40 워호크는 역부족이었고, 무엇보다 파일럿의 기량면에서도 미군은 일본군보다 많이 부족했다.

압도적인 항공전력으로 미군 항공세력을 궤멸시킨 일본군은 바로 필리핀의 핵심이라 할 만한 루손 섬 상륙을 개시했다. 대만에서 출병한 일본 제14군은 루손 섬 북부 아파리 등지로 상륙했고, 12일에는 팔라우에서 출발한 16사단이 방어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루손 섬 남부 레가스피에 상륙, 북상하기 시작했다. 상륙 단 5일만인 13일에 일본군은 이미 클라크필드까지 진격했고, 남북으로 협격당할 위기에 몰린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은 전쟁 전에 수립된 계획대로 방어 및 지연전으로 전환하여 본국으로부터의 증원을 기다리는 것으로 전략을 변경했다. 이에 미군은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를 오픈 시티, 즉 무저항도시로 선포한 뒤 포기하고 전 병력을 바탄 반도로 후퇴시켜 최후의 방어전을 개시했다.

1942년 1월 7일부터 시작된 바탄 전투에서 미군은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하며 일본군의 마닐라 항 이용을 막아내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좁은 바탄 반도에는 10만에 달하는 미군과 필리핀군 병력이 몰려 있었다. 거기다 예상치 못하게도 연합군을 따라 들어온 피난민까지도 함께 있었기 때문에 미군은 보급 문제로 허덕여야 했고, 게다가 열대 질병까지 창궐하는 상당히 열악한 상황에 몰려 있었다.

바탄 반도 내부 상황 뿐 아니라 외부 상황도 절망적이기 짝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필리핀 방위계획의 기본 골자는 바탄 반도에서의 농성으로 적이 마닐라를 이용하지 못하게 강제하는 동안 막강한 미 태평양 함대가 증원 병력과 함께 필리핀에 도달하여 적을 박살내는 것이었다. 문제는 구원투수가 될 태평양 함대가 반신불수가 됐다는 점이었다. 사실 전략적인 면에서 보자면 진주만 공습이 성공한 시점부터 필리핀 전역의 승패는 이미 결정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가 문제였을 뿐. 여기에 바탄 반도 전투가 한창 진행 중인 와중에 말레이와 싱가폴이 함락되고 동인도 제도에서는 ABDA 함대가 자바해 해전에서 일본군에 완패함으로써 이제는 호주까지도 일본군의 위협에 노출되며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만 갔다.

결국 맥아더는 바탄 전투 와중인 3월 12일, 루스벨트의 철수 명령을 받고 호주로 탈출했다.[18] 맥아더가 탈출한 이후 휘하 군단장이었던 웨인라이트 소장이 중장으로 진급하고 루손군을 비롯한 필리핀 전체의 지휘권을 인계받았다.

한편 초기의 공세가 실패한 이후 일본군은 관동군으로부터 병력과 화기를 증원받은 뒤 대대적인 해상/항공지원까지 받아가며 4월 3일, 최후공세를 개시하여 미군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화력과 병력의 열세 속에 루손군은 4월 9일 일본군에 항복했다. 루손군이 항복한 이후에도 웨인라이트 중장이 지휘하는 마지막 수비대는 마닐라 만을 감제하는 코레히도르 요새에 농성하며 저항을 이어나갔다. 일본군의 거센 공격 끝에 5월 7일 웨인라이트 중장이 항복했다. 자세한 것은 드럼 요새를 참고.

남부 필리핀 지역은 일본군의 가용병력이 부족하여 꼭 필요한 지역만 장악하고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으나 루손군의 항복 시점 즈음에 증원병력들이 도착하며 공격에 나서서 남부 필리핀도 전부 장악하였다. 일본군은 남부 필리핀 중에서도 주요 도서인 세부, 피나이, 민다나오에 상륙하여 미군을 격파했으나, 주력 섬멸에는 실패했다.

잔존 미-필리핀군은 주력을 보존한 채 안전한 내륙 산악지대로 철수하여 게릴라전을 준비중이었다. 몇몇 부대는 이미 부대를 해산시키고 나누어 게릴라전을 수행중인 상태였다. 따라서 필리핀 중-남부의 미군에게 항복을 받아내기가 복잡한 상황이었다. 결국 웨인라이트 사령관이 이미 항복한 포로들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일일이 지휘관들을 설득하여 항복이 진행됐다. 하지만 중부-남부의 연합군은 대부분 필리핀 현지인으로 구성됐기 때문에 굳이 미군 지휘관들을 따라 포로수용소를 들어갈 바에야 차라리 걍 탈영해서 각자 집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계속 내륙 산악지대에 남아 기회를 엿보며 맥아더가 진짜로 돌아올 때까지 게릴라전을 이어나가는 선택을 했다. 최종적으로 (부대를 아예 해체해버리거나 고립된 소규모 병력 정도를 제외한) 필리핀의 모든 제대의 항복이 완료된 것은 6월 9일의 일이었다. 일본은 이날 필리핀 점령을 선포했다.

필리핀 침공은 원래 1942년 2월 중순까지 50일 안에 마무리짓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하지만 예정일보다 4개월 가까이 초과되어 일본군은 상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손실을 강요받았다. 그 결과 혼마 장군은 14군 사령관직에서 보직 해임되어 한직을 돌다가 이듬해 8월에 예편했다.

4.4. 태국-영국령 말라야

마찬가지로 개전과 동시에 인도차이나 주둔 일본군이 국경을 넘어 태국으로 진군했다. 태국군과 일본군의 몇시간 동안의 산발적 교전 이후 양측간 교전행위는 종식되고, 일본군의 태국 영토 진주 및 통행권, 군사기지 이용의 권리가 주어졌다. 이와 동시에 태국도 추축국에 가담했다.

12월 10일, 영국 동양함대가 말레이 해전으로 전멸당하는 것으로 일본군의 제해권이 확립되었고, 일본군은 육군을 말레이 반도 동해안 곳곳으로 상륙시키며 영국군 방어선을 무력화시키는 한편, 주력부대는 태국 국경에서부터 남하하여 서해안 도로를 따라 남하, 12월 30일에 콸라룸푸르를 점령하고 1월 하순경에 싱가포르를 포위하는데 성공, 끝내 야마시타 토모유키가 영국군 사령관 퍼시벌로부터 항복을 받아낸다. 더 자세한 것은 싱가포르 전투를 참고.

4.5. 네덜란드령 동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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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의 수마트라 섬에서 시작해 동쪽의 뉴기니 섬으로 끝나는 남방작전 최대의 하이라이트지만, 워낙 수비하는 네덜란드군의 병력이 적어 큰 전투는 거의 일어나지 않고 일본군에 의한 일방적인 공격과 점령의 연속이었다.

동인도제도 최초의 공격은 12월 15일, 브루나이 상륙으로 시작되었다. 영국령이었던 사라와크(북보르네오)에 가해진 일본군의 상륙은 당연히 유전지대의 확보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영국군의 방어가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어 북보르네오의 일본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목표를 점령했다. 24일에는 쿠칭이 함락되었고, 1월 11일에는 네덜란드령 남보르네오의 타라칸에도 일본군이 상륙했다. 이후 24일에 발릭파판이, 2월 10일에 반자르마신이 함락되면서 보르네오 섬은 일본군의 손에 떨어졌다. 이 와중에 발릭파판 앞에서 미군 구축함전대가 일본 수송함대를 기습하는데 성공, 수송함 3척을 격침시키는 데 성공하여 개전 후 첫 승전으로 미국 전역에 보도되었다.(미:마카사르 해협 해전/일:발릭파판 해전) 그런데 이때 격침된 수송선들은 빈 배였다.

보르네오 섬 동쪽의 셀레베스 섬에도 공격이 이루어졌는데, 섬 북단 메나도에 가해진 공격은 상륙전이 아닌 일본군 공수부대에 의한 공중강습으로 태평양 전역 최초의 공수작전이었다. # # 1월 11일, 해군육전대 공수부대에 의해 메나도 비행장에 일본군 공수부대 1개 대대가 투입되었다. 네덜란드군 수비대는 거세게 저항했으나 공수부대에 의한 공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덕분에 일본군을 몰아내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다음날 2차 공수작전, 그리고 첫 공수작전과 동시에 개시된 상륙작전 등으로 일본군의 증원이 연거푸 오자 결국 패퇴, 항복하고 말았다.

어쨌든 메나도를 무사히 점령하는데 성공했고, 이를 발판으로 2월에 티모르 섬과 발리 섬을 공격했다. 티모르 섬에서는 다시 공수부대가 투입되었고, 이 와중에 일본은 중립국이었던 포르투갈령 티모르를 무단으로 침공, 영토사용권을 강제로 얻어냈다. 티모르 침공에 대한 연합국의 공격을 우려한 대본영은 2월 19일, 호주 북단의 포트 다윈을 연합함대를 동원해 폭격하여 남부의 위협을 제거했다.

한편, 말레이 해전 승리로 제해권을 쥔 일본군은 수마트라 섬 최대의 유전지대인 팔렘방을 공격했다. 2월 14일, 일본 육군 공수부대인 제1정진단이 우선 투입되어 비행장과 유전 지대를 공격했다. 이를 막는 방어군은 3,000여 명인데 그중 절반이 현지인 부대로 제대로 된 전력이라 하기에 어려웠고, 나머지 병력 중 1천여 명은 급파된 호주군 병력이라 현지 지리를 잘 몰랐다. 결국 일본군은 이틀에 걸친 공수작전으로 비행장을 뒤이은 육군 상륙부대의 지원으로 유전과 정유시설까지 확보, 동남아 최대의 유전 및 정유시설을 얻을 수 있었다. 여기서 메나도 공수전에 투입된 병력은 해군육전대 요코스카지대, 팔렘방 공수전에 투입된 병력은 육군 제1정진단으로 각각 소속이 다른데 이는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에 기인한 결과로 서로 자존심싸움 때문에 각각의 공수부대를 운용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남은 것은 자바 섬뿐이었다. 자바 섬 상륙을 막기 위해 ABDA 연합함대가 출격, 2월 27일 일본군 수송선단을 포착하여 공격했으나 일본군 함대가 우루루 몰려오면서 오히려 역관광, 압도적인 전력차 속에서 분전했으나 네덜란드 경순양함 데 로이테르와 자바, 네덜란드 구축함 코르테놀, 영국 구축함 엘렉트라와 주피터가 격침당했고 데 로이테르에 승선하고 있던 연합함대 사령관 카렐 도르만이 전사했다.(제1차 자바 해전) 뒤이어 2월 28일에서 3월 1일에 걸쳐 후퇴하려던 연합군 함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미국 중순양함 휴스턴, 오스트레일리아 경순양함 퍼스, 네덜란드 구축함 에베르첸이 격침당했다.(순다 해협 해전) 3월 1일 오후, 살아남은 잔존함정에 대한 공격까지 이루어져 영국군 중순양함 엑스터와 구축함 엔카운터가 격침되었고 후퇴하던 미국 구축함 포프도 결국 격침당했다.(제2차 자바 해전) 이를 모두 합쳐서 자바 해전이라고 통칭한다.

이렇게 연합군 함대가 완전히 괴멸되는 틈을 타 일본군은 2월 27일과 28일에 걸쳐 자바 섬의 동서 양쪽에 상륙했다. 동쪽에 48사단, 서쪽에 2사단, 그리고 각 사단을 지원하는 지원부대까지 대대적으로 상륙시킨 일본군은 말레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은륜 부대(자전거 부대)와 치하를 투입해 신속하게 진격했다. 물론 이 시점까지 자바 섬에는 연합군이 10만여명 정도 남은 상태였으나, 병력 중 절반이 네덜란드를 위해서는 별로 싸울 생각이 없는 인도네시아 현지주민 민병대였고, 사실상 저항능력과 의지를 상실한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는 지상에서의 저항조차 제대로 못했다. 결국 최후의 거점인 반둥에 집중포화를 얻어맞은 후인 3월 8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는 항복을 선언했다. 이후 일본군의 공격은 뉴기니 접수로 이어졌고, 뉴기니 침공은 1942년 이후 남태평양 전역의 원인이 된다.

번외 이야기로 이 당시 기가 막힌 방법으로 탈출한 네덜란드 함선이 있다. 소해정인 아브라함 크리인센(HNLMS Abraham Crijnssen)은 자바 함락 직후 다른 연합군 함대와 함께 자바에서 탈출하려 했다. 탈출은 상당히 어려웠는데 이미 자매함인 HNLMS Pieter De Bitter는 3월 2일 수라바야에서 일본군에게 노획당했고, 역시 또다른 자매함인 HNLMS Eland Dubois과 Van Amstel 또한 3월 8일 격침당했다. 이 때문에 아브라함 크리인센 호는 특별한 방법을 써야 했는데, 바로 배를 섬처럼 위장하는 것이었다. 육지의 나무와 풀을 가져다가 배에 빽빽하게 심어서 가까이 접근해도 선박인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크리인센은 자바를 탈출하는데 성공한 마지막 함선이 될 수 있었고, 3월 20일 오스트레일리아의 프리맨틀(Fremantle)에 도착했다. 도착 후엔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태평양 전쟁 종전 후 네덜란드로 복귀, 1960년에 퇴역했다. 해당 함선의 모습

4.6. 영국령 버마

태국이 일본과의 군사동맹을 맺게 되면서 버마 식민지도 일본의 침공 위협에 노출되었다. 문제는 10만에 달하는 영국군 병력이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포로로 잡히고 해상세력도 괴멸되어 버마 식민지를 방위할 제대로 된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원래 일본군은 전략적 가치가 별로 없던 버마를 공격할 계획은 없었지만 필리핀, 말레이, 네덜란드령 동인도, 뉴기니 등이 생각보다 너무도 쉽게 점령되자 크게 고무되어 1941년 12월 버마 공격을 결정하게 된다. 당시 버마에는 1만 4천명의 병력이 방위를 하고 있었는데 다른 식민지군들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한 부대들이었다. 영국은 버마보다는 인도를 사수하기로 방침을 결정하고 버마 방위를 돕겠다는 장제스의 제안도 거부했다. 그러나 막상 버마를 지킬 수 없다는 버마 총독 레지날드 스미드의 보고에 장제스의 제안을 수락했지만 버마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여 어떠한 협조도 거부했다.[19] 1942년 1월 일본군의 버마 공세가 시작되자 영국에서 급파된 사령관 알렉산더 해럴드 장군은 버마 사수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모든 물자와 시설을 파괴하며 버마 북부와 인도로 후퇴했다. 3월에 버마의 수도 랑군이 함락되었고 주요 거점들이 모두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 와중에 중국원정군을 지휘하고 있던 조지프 스틸웰 장군은 일본군의 전투력을 얕잡아보고 반격만이 효과적인 버마 방어라고 주장했다. 1942년 3월 일본군이 만달레이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스틸웰은 휘하 2개 사단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하지만 영국은 중국군을 전혀 돕지 않고 일방적으로 철수해버렸고 중국군은 일본군에게 포위되었다. 결국 스틸웰은 4일만에 패배를 인정했지만 모든 책임을 중국군의 기량에게 돌렸다. 하지만 이 상황을 타개한 것은 쑨리런이 지휘하는 중국군 38사단이었다. 중국군 38사단은 포위된 영국군과 민간인들을 구출했고 영국군과 중국군은 모두 피난길에 올랐다. 중국군 38사단을 제외한 모든 부대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200사단장 다이안란이 전사했으며 가뜩이나 부족한 장비들도 잃어버렸다. 일본군은 버마를 장악하고 중국-버마 국경을 차단하여 윈난 성을 위협하면서 버마 루트를 차단했다. 장제스는 급히 버마 국경에 3개 사단을 파견하였으나 일본군은 더 이상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5. 결과

"승리의 과실이 우리의 입 안으로 너무나 빨리 들어오고 있소."
쇼와 덴노, 1942년 그의 생일(4월 29일)에
1942년 5월, 일본은 작전대로 동남아시아 전역을 완전히 지배하는 데 성공한다.[20] 태국은 일본의 군사동맹에 가담했고, 나머지 유럽 열강의 식민지들은 일본의 손에 떨어졌으며, 호주와 인도양에서의 해상 위협도 연합함대의 공격으로 제거되었다. 불과 반 년 만에, 그 넓디 넓은 동남아시아 전역을 큰 피해 없이 완전히 제패한 것이다. 아무리 연합군의 사정이 열악하다 하더라도 남방 작전 기간 내내 일본군이 보여준 모습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거기다 열악하다고만 할 수도 없는 것이 오히려 수적으로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연합군이 일본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필리핀 같은 경우 숫적 우위는 물론 B-17, 스튜어트 전차 등 장비까지 충실하게 갖추고 있었다. 일본 또한 전쟁 기간 내내 중국에 상당한 전력을 투입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태평양 전역에 투입할 수 있는 육상전력은 제한적이었다. 더군다나 남방작전은 단기간에 동시에 복수의 거점을 공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지라 그 부족한 전력도 상당 부분 분산이 불가피했다. 특히 은륜부대와 말레이, 싱가포르 전역에서 이루어진 기만작전[21]을 보면 그 이전 중국에서 삽질하던 경우나 몇 년 뒤 섬을 방어하면서 반자이 돌격, 집단자살, 가미카제나 하던 모습과는 180도 달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급하게 먹은 음식은 체하는 법이라고, 일본은 넓디 넓은 점령지를 억지로 유지하기 위해 상당한 병력을 할애해야 했으며 열악한 보급역량 상당수도 동남아시아로 돌려야 했다. 그리고 인도군 등과 같은 식민지군과 연합하여 공동 작전을 펼치기도 하였지만 학살 등 일본군의 비상식적인 행동 + 자원수탈로 인해 유럽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시켜 준 현지인들이 일본을 적대시하고 과거의 지배자들과 협력하여 반일투쟁을 벌이게 되어 투입병력은 더 늘어만 갔다. 결국 이는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확대되어 장기전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일본은 고대하던 석유, 고무 등의 전략자원 수급이 가능해졌고, 일시적으로나마 대동아 공영권을 완성시키는데 성공했다. 1942년 5월은 일본 제국의 최전성기였다.

참고로 흔히들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통해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것으로 다들 전하지만 실제로는 남방작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말레이 상륙이 진주만 공습보다 두 시간 앞서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일본은 최후통첩 수준에 불과한 선전포고문을 미국에게는 사후에라도 제출한 반면 영국 측에는 그 정도 수준의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 즉, 중대한 국제법 위반 사례로 지적할 수 있다.

6. 인물

6.1. 연합국

6.2. 일본군

6.2.1. 일본제국 육군

  • 남방군 총사령관 데라우치 히사이치 대장[22] 참모장 츠카다 오사무 중장
  • 남방직속군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방면
      • 제 21사단 사단장 타나카 히사가즈 중장 | 제 21독립혼성여단, 제 3비행집단, 제 5비행집단, 제 21독립비행대, 제1정신단
    • 필리핀방면
      • 제 14군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 참모장 마에다 마사미 중장
      • 제 16사단 사단장 모리오카 스스무 중장 참모장 와타나베 사부로 대좌
      • 제 48사단 사단장 츠치하시 유이츠 중장 참모장 카와고에 모리지 대좌
      • 전차연대
    • 말레이방면
      • 제 25군 사령관 야마시타 토모유키 중장 참모장 스즈키 소사쿠 중장 / 츠지 마사노부: 일본 25군 작전참모. 남방작전 계획의 초안을 담당함.
      • 근위사단 사단장 니시무라 타쿠마 중장 참모장 이마이 카메지로 중장
      • 제 5사단 사단장 마츠이 타쿠로 중장 참모장 카와고에 시게사다 대좌
      • 제 56사단 사단장 와타나베 마사오 중장 참모장 후지와라 타케시 대좌(버마방면으로 참전했다)
      • 제 18사단 사단장 무타구치 렌야 중장 참모장 타케다 히사시 보병대좌
      • 제 1전차단
    • 난인방면
      • 제 16군 사령관 이마무라 히토시 중장 참모장 오카자키 세이자부로 소장
      • 제 2사단 사령관 마루야마 마사오 중장 참모장 오오기 요시에 대좌
      • 제 56혼성보병단
      • 제 3전차연대
    • 타이 버마방면
      • 제 15군 사령관 이이다 쇼지로 중장
      • 제 33사단 사단장 사쿠라이 쇼조 중장
      • 제 55사단 사단장 타케우치 유타카 중장
    • 방면[23]
      • 남해지대 제 55보병단 지대장 호리이 토미타로 소장, 제 144혼성보병연대, 제 55산포병연대 제1대대, 제 1야전병원
    • 보르네오방면
    • 지나파견군
      • 제 23군소속일부군 제 38사단 사단장 사노 타다요시 중장 홍콩 전투참전, 제 4사단 사단장 키타노 켄조 중장 필리핀 전투참전

6.2.2. 일본제국 해군



[1] 국가 정책의 기본 방침 [2] 나카츠카 아키라, 『경복궁을 점령하라』에서 재인용함. 제2차 세계대전은 물론, 러일전쟁 전인 청일전쟁 시기의 인식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3] 그런데 사실 비시 프랑스조차 인도차이나 식민지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상황이 안 좋으니 일본군의 진주를 허용했을 뿐이지 전쟁이 끝나면 독일을 등에 업고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을 도로 몰아내겠다는 것이 비시 정부의 복안이었다. 실제로 비시 프랑스가 임명한 인도차이나 총독은 비시 프랑스가 망한 1945년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물론 허수아비긴 했다. [4] 동남아시아의 섬들은 2만 6천여개다. [5] 그래도 나치 독일이 상황은 일본보다 나았던 게 소련은 대륙이지만 동남아시아는 인도차이나 반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섬들이다. 독일군이야 공군이 제공권을 잡은 후 육군이 진격하면 되었지만, 일본군은 항공대가 제공권을 잡은 뒤 해군이 제해권을 잡고 육군이 상륙작전을 실행해야 되는데, 이걸 수없이 반복해야 했다. [6] 점령지를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한 독일의 역량이 부족했다는 말은 엄밀히 말하자면 틀린 말이다. 동남아시아와 달리 동유럽은 독일 본토와 가까웠고 인프라도 잘 깔려 있었다. 무엇보다도 스탈린의 폭정으로 인해 대규모 민심이반이 발생해 잘만 하면 동유럽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좋은 기회를 나치즘이라는 배타적인 이념으로 무장한 독일은 태생적으로 살려낼 수 없었고, 결국 현지 민심을 무시하고 동유럽 민족들을 탄압한 대가를 제대로 치르게 된다. 다만 우크라이나와 발트 해 쪽은 예외로, 이들 동네는 워낙에 반소련 감정이 심해서 1945년까지 친독 파르티잔이 버젓이 활동했으며 독일군에 자진입대하는 사람들까지 있었지만 전쟁 말기 일본은 이런 것도 없었다. [7] 아시아 함대와 네덜란드 해군은 둘 다 잠수함을 주력으로 삼고 있었다. [8] 원래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 인도미터블이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순양전함 리펄스와 함께 싱가포르에 파견될 예정이었으나 인도미터블은 수리를 받아야 해서 결과적으로 파견되지 못했다. [9] 영국과 미국은 영어를 사용하지만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는 서로간에 어휘의 차이가 약간 있고 군사용어상의 차이도 좀 있어서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단순히 억양과 발음의 차이 이외에도 미국식 영어와 영국영어에는 여러가지 차이가 존재하는 데, 단어가 아예 다른 경우도 있다. 가령, truck과 lorry라든가, elevator와 lift라든지, trunk와 boot 등등... 심지어 아예 뜻이 반대인 경우도 있는데, to put somehing on the table 의 경우 영국에서는 (다 같이 둘러앉은 테이블 앞에 안건을) 상정한다는 말이고, 미국에서는 (손에 들고 있던 안건을 테이블위에 내려놓는다/내던진다 에서 유래해서) 계획이나 제안 들을 연기/보류한다는 의미로 정반대의 뜻이다. 실제로 2차대전중 미국과 영국 수뇌부 간에 이러한 사례가 있었다. 양측 다 중요하다고 여긴 안건을 다루자는 의미로 대화하던 중 한쪽은 그것에 대해 논의하자는 말로 했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폐기하자는 것으로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10] 말레이 침공의 경우에는 밀물 때를 고려하여 진주만 공습보다 70분 빠른 동경기준 8일 새벽 2시 15분이었다. [11] 실질적으로 버마를 침공하기 위한 준비단계에 해당했다. 영국령 버마는 해역이 봉쇄당해 외부세계와 고립된 중국의 사실상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버마를 점령함으로써 중국이 전쟁을 포기하게 만들거나 최소한 중국의 전쟁 수행능력을 약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중요했다. [12] 과거 문서에선 와카바야시 도이치 중위가 과달카날 전투에서 똑같이 돌격 중 전사했다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와카바야시 도이치가 사망한 1943년 1월 14일 그의 중대가 소속된 228연대는 오스틴 산에서 미군 27연대의 공세를 방어중이었다. 출처: Forgotten Fights: The Battle for Guadalcanal's Mount Austen, 1942 [13] 최연소 대원이 55세였다고 하니 말 다했다. [14] 의외로 현지에서 널리 쓰이던 광둥어의 사용은 금지하지 않았다. [15] 이것은 나중에 홍콩이 해방된 후 성난 군중에 의해 박살난다. [16] 이 같은 만행은 이후 일본령 싱가포르에서도 똑같이 반복되었다. [17] 그리고 3년 후 벌어진 필리핀 탈환전에서 승리하면서 이 말을 실천했다. [18] 맥아더는 가족과 함께 미-필리핀군 수비대와 최후까지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마셜에게 밝혀 미국 지도부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맥아더 같은 고급장교가 적의 포로가 되거나 전사하는 위험을 감수할 의사가 전혀 없던 루스벨트는 맥아더에게 탈출할 것을 강경하게 관철시켰다. [19] 심지어 버마의 군사지도를 주는 것도 거부하다가 막판에야 번역도 안된 한장을 대사관 편으로 보내서 중국군은 지도도 없이 작전해야 했다. [20] 이는 최종적으로 모스크바의 점령에 실패하여 부인할 수 없는 실패로 막을 내린 바르바로사 작전과는 대비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인도양-중국-태평양으로 이어져야 했던 일본 제국의 삼면전선에서 대영제국과 네덜란드 식민제국을 사실상 이탈시켜 전선을 둘로 줄여버린 거대한 전략적 성취였고, 1944년 중반으로 접어들어 인도 방면의 군대가 증강되고 무타구치 렌야의 삽질로 동남아시아의 일본군이 자멸하기 전까지 영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다만, 하도 남방 작전의 범위가 넓다 보니 100% 성공이라고 할 수는 없는게, 코코다 트랙 전투가 실패하며 포트모르즈비를 비롯한 뉴기니 섬 남부 점령은 실패했다. 파푸아뉴기니는 동남아시아가 아닌 오세아니아에 해당하긴 한다만 남방작전의 점령 목표 중 하나였고 호주를 견제하고 연합군의 교두보 마련을 막으려면 필수적으로 점령해야 하는 상당히 중요한 섬이기도 했다. [21] 사실 영국군이 싱가포르 요새를 중심으로 간신히 버텼다지만 일본군 역시 탄약이나 화력이 상당히 부족했다. 이 점이 노출되지 않도록 포격 후 잽싸게 포병을 멀리 재배치시켜 다시 포격을 함으로써 영국군이 일본군의 화력을 과대평가하게끔 기만했다. [22]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아들. [23] 타이와 버마방면으로 간 제 55사단소속이 남해지대라는 명칭으로 공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