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21:20:08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대한민국의 주요 선거·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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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6월 15일 제3차 개헌으로 부통령직 폐지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이후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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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대한뉴스 영상
{{{#!wiki style="margin: -7px -12px;" 1978년 12월 12일
10대 총선
1981년 3월 25일
11대 총선
1985년 2월 12일
12대 총선
}}}
투표율 77.7% ▲ 0.6%p
선거 결과
파일:11대 총선 결과.png
정당 지역구
전국구
총합 비율
[[민주정의당|
민주정의당
]]
90석 61석 151석 54.71%
[[민주한국당|
민주한국당
]]
57석 24석 81석 29.34%
[[한국국민당(1981년)|
한국국민당
]]
18석 7석 25석 9.05%
[[민권당|
민권당
]]
2석 0석 2석 0.72%
[[신정당(1981년)|
신정당
]]
2석 0석 2석 0.72%
[[민주사회당(1981년)|
민주사회당
]]
2석 0석 2석 0.72%
[[민주농민당|
민주농민당
]]
1석 0석 1석 0.36%
[[안민당|
안민당
]]
1석 0석 1석 0.36%
[[무소속|
무소속
]]
11석 - 11석 3.98%

1. 개요2. 특징
2.1. 관제 조작선거2.2. 부산 북구의 무투표 당선
3. 개표 결과
3.1. 지역구3.2. 전국구3.3. 지역구 선거 결과
4. 여담

[clearfix]

1. 개요

1981년 3월 25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로 대한민국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해 치러졌으며, 투표율은 77.7%를 기록했다.

184석의 지역구와 92석의 전국구를 선출했으며 1선거구당 2석의 중선거구제였다. 정치활동 규제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정치인은 물론 구 민주공화당계 인사조차 대거 출마를 금지당한 상태에서 여당( 민주정의당)과 관제야당(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민주사회당, 민주농민당)만으로 치러진 선거였다. 게다가 전국구 배분 방식이 다수당에 극도로 유리하게 짜여졌는데, 지역구 의석에서 1위를 한 정당이 전국구 의석의 2/3를 독식한다는 황당한 조항이 생겼다. 또한 상술하였듯 기존 정치인들이 대거 정치활동이 규제되고 신군부에 영합하는 사람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지역구와 전국구를 막론하고 초선의 비율이 매우 높았다.

이 선거부터 후보자 기호가 다시 추첨제로 되돌아갔다.

2. 특징

2.1. 관제 조작선거

신군부에 의해 정치활동 규제를 당하지 않은 신민당 출신 정치인들이 민주한국당( 유치송 총재)을, 민주공화당 출신 정치인들이 한국국민당을 차렸다. 하지만 국군보안사령부 국가안전기획부가 창당 자금을 제공하고 공천자 명단, 당직 임명까지 관여했다. 심지어 민정당에 공천을 신청했더니 민한당에서 공천을 받았다는 어이없는 사례도 있었을 정도. 이는 훗날 신상우 민한당 사무총장 등의 증언으로 실체가 더 확연해졌다. 이후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 창설 전까지 한국의 정치는 북한, 중국, 투르크메니스탄과 다를게 없는 사실상의 일당제로 굴러가게 된다. 따라서 11대 총선은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북한식 관제선거로써 한국 총선 중 최악의 흑역사로 꼽힌다.

해당 선거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이른바 '정책지구'를 들 수 있다. '정책지구'란 주요 야당 당수들의 지역구에 다른 유력 야당 후보의 출마를 금지시켜 해당 당수의 당선을 보장해주는 암묵의 룰이었는데, 이는 명백히 정치참여의 자유를 박탈하는 반헌법적 행위에 해당된다. 그리하여 경기 평택-안성(민한당 유치송), 충남 천안-아산-천원(국민당 김종철), 서울 강남( 민사당 고정훈)이 정책지구로 지정되었으나, 국민당 김종철 총재가 전국구 출마로 선회하면서 천안-아산-천원이 뒤늦게 정책지구에서 제외되고 민한당 후보가 급조되는 촌극이 빚어졌다.

2.2. 부산 북구의 무투표 당선

부산직할시 북구에서 민권당 김명중 후보가 등록무효 처리되면서 무투표 당선이 일어났다.

3. 개표 결과

파일:11대 총선 결과 지도.png

3.1. 지역구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지역구 의석 현황
지역 민주정의당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민권당 신정당 민주사회당 민주농민당 안민당 무소속 <colbgcolor=#eeeeee,#2d2f34> 합계
서울 14 11 1 0 0 1 0 0 1 28
경기 12 10 1 0 1 0 0 0 0 24
강원 6 4 2 0 0 0 0 0 0 12
충남 8 5 2 0 0 0 0 0 1 16
충북 4 1 3 0 0 0 0 0 0 8
전남 10 9 1 0 1 0 0 1 0 22
전북 7 6 0 0 0 0 0 0 1 14
부산 6 5 0 1 0 0 0 0 0 12
경남 10 1 3 1 0 1 1 0 3 20
경북 13 5 5 0 0 0 0 0 3 26
제주 0 0 0 0 0 0 0 0 2 2
전국 90 57 18 2 2 2 1 1 11 184

3.2. 전국구

전국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인


5,776,624 35.6% 61


[[민주한국당|
파일:민주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3,495,829 21.6% 24


[[한국국민당(1981년)|]]
2,147,293 13.3% 7


1,088,847 6.7% 0


676,921 4.1% 0


524,361 3.2% 0


227,715 1.4% 0


144,000 0.9% 0


122,778 0.7% 0

파일:원일민립당.png
76,863 0.5% 0

[[한국기민당|
파일:한국기독민주당.png
]]
103,893 0.6% 0

파일:통일민족당.png
87,977 0.5% 0


[[무소속(정치)|
무소속
]]
1,734,224 10.7% -
총합 16,207,325 100.0% 92

여당 민주정의당의 득표율은 35.6%로 그리 높지 않았지만[1] 2인 중선거구제와 전국구 2/3 1당 배분 조항이라는 여당에 지극히 유리한 선거제도에 따라 지역구에선 과반에 가까운 90석, 전국구 2/3인 61석을 더해 총 151석으로 과반(139석)을 훌쩍 넘었다. 관제야당인 민한당이 81석(21.6%), 국민당이 25석(13.3%), 군소관제정당인 민권당(6.7%), 신정당(4.1%), 민사당(3.2%)이 각각 2, 2, 2석, 무소속이 11석 등이었다.

3.3. 지역구 선거 결과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지역구 국회의원 항목 참조.

4. 여담

  • 선거 공보물이 모두 흑백 포스터로 통일되었다. 때문에 이 시기 군소정당들의 상징색이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 신성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용산구 선거구에서 한국국민당의 공천을 받고 본명 강신영으로 출마했다가 민주정의당 봉두완 후보, 민주한국당 김재영 후보에 밀려 낙선한 선거였다. 신성일은 공직선거에서는 법에 의해 반드시 본명을 써야하므로 후보자 강신영이 배우 신성일이라는 사실이 유권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서 낙선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영화계 최고 스타의 출마로 인해 세상의 주목을 받았던 선거구였고 선거벽보에도 후보자 강신영이라는 글자 밑에 예명 신성일이라고 표기했던만큼, 강신영이 배우 신성일임을 몰랐을 유권자는 사리분별이 어두운 일부 노인층을 빼고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의 그러한 주장은 낙선으로 인한 절망감을 해소하기 위한 핑계로 보면 된다. 이 일을 계기로 신성일은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법적 절차를 밟아 강신성일로 개명했다.
  • 북한 최고인민회의 선거와 다를게 없었던 관제선거의 악명에 묻혔지만 그럼에도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활용한 개표방송이 시작되었다는 의의는 있다. KBS에서 1981년 총선을 앞두고 별개의 선거개표전산시스템을 갖춰서 이를 활용하여 개표방송을 진행했던 것. 1981년 3월 25일자 <8시에 만납시다>에서도 일부 영상이 나온다.
  • 전라남도 선거구 한 곳( 해남군- 진도군)과 제주도 선거구에서 민주정의당 당선자가 없었다. 전남에선 여러 시군을 묶은 선거구에서 난립한 후보들의 출신지에 따른 소지역주의가 일어났고, 제주에서는 특유의 궨당[2] 문화 때문이었다.


[1] 참고로 신민당 돌풍이 불었던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35.2%, 여소야대라는 결과가 나온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34%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2] 친척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