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호 | 우봉(禹峰) |
본관 | 풍산 홍씨[1] # |
출생 | 1878년 12월 29일 |
한성부 서부 적선방 도염동계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도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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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6년 1월 19일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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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홍충희는 1878년 12월 29일 한성부 서부 적선방 도염동계(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도렴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3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보병과를 졸업한 뒤 육군 부위(副尉)를 지냈다. 이후 대종교에 입교한 그는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권동진을 도와 3.1 운동에 참여한 뒤 김규식, 김찬수(金燦洙) 등과 함께 북간도로 망명했다.1919년 8월 지린성 왕청현 서대파구(西大波溝)[2]에서 서일, 현천묵, 김좌진, 계화, 이장녕, 김규식, 이범석, 조성환, 박성태(朴性泰)· 정신 등과 함께 정의단(正義團)을 개편하여 군정부를 편성하였다. 이후 동년 12월에 북로군정서로 개칭하고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 때 대대장 서리겸 제2중대장으로 김좌진· 나중소· 박영희 등과 함께 참전하여 활약했다. 이후 대한독립단에 합류하여 연해주에서 활동했다고 전해지나, 이를 증명하는 기록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1934년 김영숙(金永肅)·김서종(金書鍾) 등과 함께 하얼빈 안평가(安平街)[3] 에 대종교 선도회(大倧敎善道會)를 설치하여 포교활동을 통하여 한인들이 민족정신을 배양하고 독립정신을 고취할 수 있도록 힘썼다. 1942년 일본 경찰의 대종교 탄압사건으로 대종교 지도자들이 대거 검거되자 피신하여 은둔생활을 하다가 8.15 광복 후 서울로 귀환했고, 1946년 1월 19일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홍충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1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