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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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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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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章玉)
도호 실암(實庵)
애당(愛堂), 우당(憂堂)
본관 안동 권씨[1]
출생 1861년 12월 15일[2]
충청도 괴산군 북상면 아성리
(現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 아성리 안심마을)[3]
사망 1947년 3월 9일 (향년 85세)
경기도 이천군 장호원읍 자택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20호
부모 아버지 권재형, 어머니 광주 이씨
형제 형 권석진[4], 권세진[5], 권용진[6], 권우진[7], 권형진[8]
배우자 인천 채씨[9]
자녀 아들 권영직[10], 딸 권정숙(權貞淑)
종교 천도교
최종 당적
상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1. 개요2. 생애
2.1. 출생 및 성장 배경2.2. 관직 생활2.3. 을미사변 가담 및 애국운동 참여2.4. 독립운동2.5. 광복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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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천도교 신자, 조선 육군 장교, 정치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태종 때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봉해진 권근의 17대손이며, 초대 검찰총장 및 제2·10대 법무부장관을 지낸 권승렬은 그의 7촌 재종질(再從姪)이다.

2. 생애

2.1. 출생 및 성장 배경

1861년 12월 15일 충청도 괴산군 북상면 아성리(現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 아성리 안심마을)에서 아버지 권재형(權在亨, 1813. 11. 29 ~ 1870. 5. 6)과 어머니 광주 이씨(1827. 8. 8 ~ 1890. 2. 12) 사이에서 6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6대조 권엄(權弇, 1669 ~ 1738. 1. 29) 대까지는 경기도 포천현(現 포천시)에 대대로 살아오다가 5대조 권당(權讜, 1709. 5 ~ 1767. 12. 14) 대에 이르러 경상도 안동대도호부(現 경상북도 안동시)로 이주해와 조부 권대철(權大喆, 1790. 7. 21 ~ 1840. 8. 20) 대까지 4대가 경상도 안동대도호부에 살다가 아버지 권재형 대에 마침내 충청도 괴산군으로 이주해와 살기 시작했고, 권동진이 이곳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아버지 권재형은 중군(中軍)을 역임했고, 둘째 형 권세진(權世鎭)은 1888년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했다. 셋째 형 권용진(權溶鎭, 1855 ~ 1928. 3. 17)은 1895년 통진군수(通津郡守)을 역임했다. 다섯째 형 권형진(權瀅鎭, 1858 ~ 1907. 4. 28)은 1885년 부장(部將)을 시작으로 1894년 기기국 방판(機器局幫辦),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 숙천도호부사(肅川都護府使) 등을 역임했으나 이듬해인 1895년에 남동생 권동진과 함께 을미사변 참여한 뒤 일본으로 망명했다. 사후 1908년 신원이 회복되었다.

2.2. 관직 생활

권동진은 일찍이 상경해 한성부 중부 정선방 포병계 교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돈의동 76번지)[11]로 이주했고, 이곳에 본적을 두었다. 연무공원(鍊武公院)을 졸업하고 1882년 5월 29일 남행 부장(南行部將), 1883년 2월 4일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 1883년 6월 25일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1883년 12월 29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副使) 등에 임명되었다. 이후 1884년 우영 전초 초관(右營前哨哨官), 1885년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을 거쳐 별군직(別軍職)에 임명되었고, 1887년 6월 29일 웅천현감(熊川縣監)을 거쳐 친군우영 초관(親軍右營哨官), 1887년 9월 28일 함안군수(咸安郡守)에 임명되었다.

함안군수 재직 중이던 1888년 11월 14일 경상도 관찰사 김명진(金明鎭)의 장계를 통해 고을 백성들의 세금과 이자를 거두면서 억지로 금과 돈을 빼앗아 착복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결국 1889년 1월 6일 파직되고 이튿날 평안도 영변대도호부(現 평안북도 영변군)에 유배되었다.

1890년 8월 11일 석방되었고, 1892년 7월 30일 안무영 중군(按撫營中軍), 1893년 6월 12일 내금위장(內禁衛將) 및 부호군(副護軍), 1893년 12월 12일 거문도진 수군첨절제사(巨文島鎭水軍僉節制使)에 임명되었다.

2.3. 을미사변 가담 및 애국운동 참여

그는 평소 정난교, 우범선, 이두황, 이규완, 장석주, 유길준 개화파 인사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시위대(侍衛隊) 장교(將校)로 복무 중이던 1895년 10월 8일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 등이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이에 다섯째 형 권형진(權瀅鎭, 1858 ~ 1907. 4. 28)을 비롯해 정난교, 유길준, 이두황, 유혁로, 안경수, 영선군 이준용, 박준양(朴準陽), 조희연, 조희문(趙羲聞) 등과 함께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다. 을미사변 직후 조희연, 유길준, 우범선, 이두황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고, 일본에서 3년간 육군부 내 사무를 연구하고 일본 내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문물, 제도를 시찰했다.

그 뒤 일본에서 동학 교주 손병희를 만났고, 동학에 입교해 도사(道師)가 되었다. 이후 1904년 2월 손병희의 명령으로 오세창 등과 함께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해 개화 운동 및 민족운동을 전개했고, 을사조약으로 고종이 무력화되자 귀국해 1906년 2월 천도교 대헌(大憲)을 제정하고 초대 천도교 중앙총부 전제관장(典制觀長)을 역임했다. 1907년 7월 29일 김홍집· 정병하·조희연·유길준· 장석주·이두황·이범래(李範來)· 이진호·조희문 등과 함께 신원이 회복되었고, 1907년 9월 2일 중추원 부찬의(中樞院副贊議) 및 경흥부윤(慶興府尹)에 임명되었으나 1달 만인 10월 2일 중추원 부찬의 직을 사임했다. 1907년 11월에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후신으로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조직한 뒤 실업부장에 취임해 실력양성운동에 종사했다.

2.4. 독립운동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손병희, 오세창과 함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8년 8월 14일 천도교 중앙총부로부터 오세창· 최린·정광조(鄭廣朝)· 홍병기(洪秉箕) 등과 함께 독립운동 준비위원에 임명되어 3.1 운동의 기초 준비작업을 실행했다. 1919년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최남선·최린 등이 초고를 쓴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뒤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쳤다. 이후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체포되어 구금되었으며, 1919년 8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경성지방법원에서 담당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내려졌고,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이른 바 내란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이 그 관할 재판소로 지정되었다. 1920년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소요 혐의에 대해 공소를 수리하지 않는다는 판결이 내려졌고, 이에 공소하여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위와 같은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징역 3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36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파일:권동진(1919년).jpg
191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출옥 후에는 경기도 경성부 화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 82번지로 이주해 본적을 옮겼고, 이후 경성부 숭인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157번지로 이주했다. 1927년 2월 15일 신간회 창립총회에 발기인 및 창립준비위원으로 참여했고, 총회 당일 간사 전형위원에 선임되었다. 이어 2월 17일 제1회 간사회에서 홍명희의 부회장직 사임에 따라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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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1929년 7월 22일 모 경찰서 형사과에서 요시찰인 카드에 부착된 사진. (중·우) 1929년 12월 21일 경기도경찰부 형사과에서 촬영된 사진.

그 뒤 1929년 허헌·홍명희· 이관용· 이원혁(李源赫)· 조병옥· 주요한·손재기(孫在基)· 한용운·김무삼(金武森)· 김항규(金恒圭)· 이종린 등과 함께 광주학생항일운동에 호응해 결의문을 발표하고 민중운동을 일으키고자 계획했으나, 미연에 발각되어 1929년 12월 13일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기도경찰부 고등과에 체포되었고 서대문형무소 구치감에 투옥되었다. 이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취조를 받은 뒤 1930년 1월 6일 기소유예 석방되었다.

1931년 신간회가 해소된 뒤에는 천도교 종단 업무에 전념해 1932년 4월 5일 천도교 구파 임시대회에서 천도교 대령(大領)에 선출되었고, 12월 23일 박인호(朴寅浩)가 제4대 천도교 교주에 취임하자 대종사장(大宗司長) 겸 장로(長老)에 임명되었다. 한편 사회운동에도 관심을 가져 1931년 5월 14일 사회영 중앙실비진료원(社會營中央實費診療院) 유지회 제1회 이사회에서 이사장에 임명되었고, 1932년 5월에는 민중의료기관인 조선이료회(朝鮮理療會)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33년 11월 4일에는 보성전문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회 발기총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기부금 모집 실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34년 4월에는 재단법인 여자의학전문학교 발기준비회에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35년 2월 20일 경성보육학교 유지회 임시총회에서 유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36년 5월 22일에는 을지문덕 묘산 수보회 발기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그해 6월 6일에는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기념사업회 위원회의 기부금 모집 실행위원에 선임되었다.
파일:권동진(1938년).png
1938년 당시 권동진.

1938년 4월 4일 천도교 구파 교인대회에서 제4대 박인호 교주가 고령을 이유로 퇴임함에 따라, 교주제가 폐지되고 이종린이 대종사장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권동진은 최고 고문에 해당하는 대표장로(代表長老)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수년전부터 준비해오던 천도교 구파 주도의 독립운동이 발각되어 1938년 2월 17일부터 황해도경찰부에서 관련자들을 색출, 검거해 취조하기 시작했고, 그해 5월 1일에 이르러서는 김재계(金在桂) 등 중앙 간부 4명, 지방 간부 1명을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및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검사국에 송치해 천도교 구파 종단을 위협했다. 결국 대표장로로 있던 권동진은 대종사장 이종린, 장로 오세창 등과 함께 전격 전향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이종린이 중일전쟁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향하게 되자 천도교 종단 활동에 점차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경성부 계동정(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북촌 140-60번지 자택에 은거하면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2.5. 광복 이후

1945년 8.15 광복 후 1945년 11월 22일 《 매일신보》가 《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속간하게 되자, 고문에 취임했다. 1945년 12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영성식(奉迎盛式)에서 김성수· 이인과 함께 김구 주석에게 봉영문(奉迎文)을 봉정(奉呈) 했고, 12월 3일 삼일동지회 결성에 참여해 고문에 취임했다. 1945년 12월 9일에는 대한국민총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2월 14일에는 군소정당 22개를 통합해 신한민족당을 결성하고 총재에 취임해 본격적으로 우익 정치인이 되었다. 12월 23일에는 순국선열추념대회 부위원장에 선임되었고, 1945년 12월 20일 조선독립촉성종교단체연합대회에 참여해 고문에 추대되었다. 1945년 12월 말에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장에 선임되었다.
파일:권동진(1946년).png
1946년 당시 권동진.

1946년 2월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 성립되자 신한민족당 총재로서 의원에 선출되었고, 4월에는 국민당, 한국독립당이 통합되자 고문에 취임했다. 1946년 5월 이준 열사 추념대회 준비회 결성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같은 달 의열사(義烈士) 안중근 선생 기념사업회 결성에 참여해 고문에 취임했다. 그리고 1946년 6월 조선건민회(朝鮮健民會) 고문에 임명되었다.

1947년 2월 4일 개최된 기미독립선언 기념 전국대회 준비위원 선거위원회에서 명예회장에 선출되었다. 그 뒤 1947년 3월 9일 오전 9시 20분 경기도 이천군(現 이천시) 장호원읍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85세. 그의 유해는 천도교식으로 장례를 치른 뒤 화장된 후 충청북도 괴산군 선영에 안장되었다가 1966년 5월 18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1980년 청주시 상당구 수동 삼일공원에 권동진을 비롯해 민족대표 33인 중 충청북도 출신인 손병희· 권병덕(權秉悳)· 신석구· 신홍식(申洪植)의 동상이 함께 건립되었다.

[1] 추밀공파 수(脩)2계 33세 진(鎭) 항렬을 써서 권중현(초명 권재형)의 일가 조카뻘이다. 후손들은 대동항렬이 제정된 이후 태어났기에 이를 따라서 장남 이름이 34세 영(寧) 항렬을 써서 권영직(權寧直)이고 장손자 이름이 35세 오(五) 항렬을 써서 권오범(權五範)이다. [2] 1919년 8월 1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는 11월 13일생으로 기재돼 있고, 1929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862년 12월 8일생으로 기재돼 있다. [3] # [4] 權奭鎭. 1842. 5. 18 ~ 1893. 1. 11. [5] 權世鎭. [6] 權溶鎭. 1855 ~ 1928. 3. 17. [7] 權宇鎭. 1855 ~ 1930. 5. 23. [8] 權瀅鎭. 1858 ~ 1907. 4. 28. [9] 仁川 蔡氏. 1920년 5월 24일 별세. [10] 權寧直. 1887 ~ 1951. 1. 13. [11] 이 지번에 현재 권동진집터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