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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장 (1961~198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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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1대 건설부장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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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8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1] 金載圭 | Kim Jae-gyu |
|||
출생 | 1926년 4월 17일[2] | ||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 이문리 (現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 80-6) |
|||
사망 | 1980년 5월 24일 (향년 54세)[3] |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
묘소 |
경기도
광주군
오포읍 능평리 산21-3 (現 경기도 광주시 능평동 산21-3) |
||
거주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7가 134-1 | ||
본관 | 김녕 김씨[4] | ||
호 | 덕산(德山), 덕촌(德村) | ||
재임기간 | 제5대 중앙정보부 차장 | ||
1973년 12월 4일 ~ 1974년 9월 18일 | |||
제11대 건설부장관 | |||
1974년 9월 18일 ~ 1976년 12월 5일 | |||
제8대 중앙정보부장 | |||
1976년 12월 6일 ~ 1979년 10월 2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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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6377a><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김형철, 어머니 권유금 | |
배우자 | 김영희 (1930년생)[5] | ||
자녀 | 슬하 1녀[6] | ||
친인척 | 친조부 김치권, 친조모 영월 엄씨 | ||
학력 |
안동공립농림학교 (졸업) 대구농업전문학교[7] (졸업) 한양대학교 대학원 ( 산업공학 / 석사 과정 수료) 한양대학교 일반대학원 ( 정치외교학 / 석사 과정 수료) |
||
종교 | 무종교 → 불교[8] | ||
신체 | 166cm | ||
의원 선수 | 1 | ||
의원 대수 | 9 | ||
약력 |
제9대 국회의원 (
유신정우회) 제5대 중앙정보부 차장 ( 박정희 정부) 제11대 건설부장관 (박정희 정부) 제8대 중앙정보부장 (박정희 정부) |
||
서훈 |
사우디아라비아 킹 압둘 아지즈 훈장[10] |
||
군사 경력 | |||
임관 |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기) | ||
복무 | 일본 제국 육군 | ||
1943년 ~ 1945년 | |||
대한민국 육군 | |||
1946년 ~ 1973년 | |||
최종 계급 | 중장 (대한민국 육군) | ||
주요 보직 |
육군대학 부총장 제6보병사단장 제6군관구사령관 육군보안사령관 제3군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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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정치인.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중앙정보부장 재임중이던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전가옥에서 열린 만찬 석상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을 권총[11]으로 저격해 살해한 10.26 사태를 일으킨 인물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튿날인 10월 27일 체포되어 1980년 5월 24일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교수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감했다.
한국사 시간에서는 10.26 사태를 설명할 때 등장하는 인물 중 한 명이며 그가 일으킨 10.26 사태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다.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김재규/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김재규/항소이유 보충서 문서 참고하십시오.
3. 여담
3.1. 생전
일본의 무사도를 숭배하였으며 노기 마레스케를 매우 존경하였다고 전해진다.박흥주 전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의 말에 따르면, 김재규는 인망이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중앙정보부장에 부임하고 난 뒤 남산의 고문실을 없애고 강압수사 금지 조치를 시행하였으며, 비대해진 기구를 축소하거나 해외정보업무 중심으로 중정을 개편하였다고 한다. 또한, 부장 판공비 8억 원을 내놓아 직원들의 퇴직기금을 마련해주었다고 말했다. 그의 중점부장 부임 초기인 1977년 기준 8억 원은 2023년 가치로 환산하면 54억 원에 달한다. 오마이뉴스
초등학교 4학년 때 일본 순사가 조선인 나무꾼을 구타하는 걸 보고 '이 순사 도둑놈이다'라고 했다가 유치장에 갇힌 적이 있다.[12]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던 안동일 변호사는 "김재규의 첫인상은 겸손하고 정중하였으며 대화를 나눌수록 진정성이 느껴졌다"고 평하였다.
김재규의 또다른 변호인이었던 강신옥 변호사는 김재규를 면회한 뒤 "아주 훌륭한 인물"이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김재규를 나라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이라 평가하며 안중근 의사와 역사적으로 같게 평가받을 인물이라고 말하였다. # 다시 말해, 네티즌들이 안중근에게 비교한 것이 처음이 아니라, 김재규의 최측근들 조차도 이렇게 얘기했다는 것.[13]
그를 부마항쟁에서 만났던 이는, 최루가스에 쓰러져 고통스러워 하던 어린이를 직접 구하려 했다고 한다. # 장준하 의문사 이후 그의 식솔들에게 조그만 전세를 얻을 수 있도록 손써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심지어 일요신문 1996년 1월 21일자 2~3면 기사에서 윤보선 측근인 이한두의 증언에 의하면, 김재규가 거사 21일 전에 이 사실을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 알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온화하고 아랫사람에게는 따뜻한 성격이었으나, 욱하는 성격이 폭발하면 지위를 막론하고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면모를 알 수 있는 일화로 10.26 사건 얼마전 김재규가 중정 1차장이던 윤일균과 함께 재미교포 사업가 김한조를 만난 자리에서 김한조가 말실수를 하자 김재규가 벌떡 일어나 김한조를 마구 구타하더니 급기야 권총을 뽑아들고 김한조를 겨눴다. 윤일균이 다급히 김재규의 손목을 내리쳐 권총을 떨어뜨려 가까스로 수습하였는데 김재규가 윤일균을 향해 "내 손목이 왜 이리 아픈가?"고 물었다고 한다.
김재규는 10.26사건 이전인 1979년 봄부터 '자유 민주주의', '위대의', '민주민권자유평등' 등의 휘호 6점을 남겼다고 한다.
1972년 3군단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유신헌법을 3번이나 읽어 본 뒤 불같이 화를 내며 "더러운 놈의 나라! 이것이 무슨 헌법이냐? 독재하자는 것이지!"라고 소리치면서 헌법책을 던져버렸다고 한다. # 이 당시에 3군단장에 근무한 사람 증언에 의하면, 이거 만든 사람 잡아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단다.
1979년 12월 1일 변호인단과의 3차 면담에서 김재규가 털어놓은 이야기에 의하면 김재규는 1977년 12월 19일 감옥에 갇혀 있는 김대중을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긴 뒤 모친에게 "어머니, 추운 감방에서 고생하는 한 분을 따뜻한 방으로 옮겨 모셨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또한 수감중인 시인 김지하의 면회를 허용해주고 김철 통일사회당 고문의 석방, 긴급조치 9호 위반자들 중 신부, 목사, 학생 14명을 석방시키기도 하였다.
박정희의 전화를 받을 때 일어서서 차렷자세로 받았고, 다른 사람한테 박정희를 지칭할 때는 항상 존칭을 썼다고 한다.[14] 또한 남은 여생을 박정희 무덤에 묘막을 짓고 시묘하며 보내겠다고 말하기도 하였으며,(또 다른 증언으론 박정희를 죽이고 자신도 박정희 무덤에 가서 자살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다만 이 말을 했던 시점은 10.26이 벌어지기 전이기에, 최종적으론 시묘살이를 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최후진술에서 박정희와는 친형제간도 그럴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고 말했다. # 실제로 김수환 추기경 역시 김재규가 자신의 입으로 친형제 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말했다고 회고했다. # 그러나 김재규는 10.26 이전에 수차례나 박정희의 암살을 시도했다고 법정에서 증언한 바 있고, 김재규의 수사를 총 지휘한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도 회고록에서 김재규의 언동에서 박정희에 대한 존경심이나 충성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으며, 10.26 직후 김재규를 목격한 국무위원들이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이고도 전혀 슬퍼하는 기색이 없는 걸 보고 의아해했다는 증언 등 위의 언급을 반박할 행적들이 많이 존재한다. #[15]
박정희와 친형제 이상으로 각별한 사이라는 것은 사실로 김재규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 친해진 김계원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박 대통령이 김재규를 매우 아꼈다는 증언은 많다. 김계원 비서실장의 말(회고록)이다.‘1965년 4월 대통령이 제1군사령부 시찰차 원주에 오셨다. 서울 상경 길에 “김재규 사단이 여기서 멀지 않지? 오늘 저녁은 재규 사단에 가서 한잔 하지” 하셨다. …저녁을 마치고 서울로 향하는데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 “재규, 저놈 참 괜찮아. 저 친구 내가 장군이라는 칭호로 불러줘야 되는데 버릇이 되어서 말이야. 꼭 고향집 집안 막냇동생 놈 같으니 말이야. 참 착한 자요.”’
기사
김종필과와도 둘이 친밀하다고 하나 중앙정보부 시절 차지철과의 충성경쟁 중 그의 가족을 심문하고 자택을 압수수색한 적도 있어 마냥 좋지는 않았다.
김재규는 나와 동갑이지만 육사는 박 대통령과 동기생(육사 2기·46년 입교)이다. 고향도 경북 구미로 박 대통령과 동향인데다 중·고등학교 교사를 한 경력이 있어 국민학교 선생님 출신인 박 대통령은 젊어서부터 그를 따뜻하게 살펴줬다. 박 대통령에게 김재규는 차지철과 비교(5·16 군사반란 때 처음 만남)하면 인연과 세월의 깊이가 달랐다. 아랫사람을 앞에 두고 좀처럼 하대하지 않던 박 대통령도 “재규” “재규”하며 그의 이름을 편하게 불렀다. 혁명 뒤 김재규는 6사단장과, 6관구 사령관에 이어 육군방첩대장, 보안사령관을 지내고 3군단장 중장으로 예편해 바로 유정회(73년) 국회의원이 됐는데 박 대통령의 특별한 배려가 아니고선 설명할 수 없는 영전의 연속이었다. 박 대통령 입장에선 김재규처럼 30여 년을 알아온 인물을 옆에 두면 안전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했음직하다. 대통령이 그렇게 믿음을 준 자한테 목숨을 잃었으니 사람의 일이란 허망하기 그지없다.
김종필 소이부답
실제로 그는 요직 중의 요직이라 할 수 있는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라는 양대 정보기관의 수장을 지냈고, 고도성장기의 요직 중의 요직이라 할 수 있는 건설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다만 이 친밀함이 지나쳐 박정희는 김재규를 친동생인 양 지나치게 격이 없이 대하고 혼내기도 했다고 한다.
- 朴 대통령이 김재규를 대할 때 동생처럼 대했지요.
『네, 朴 대통령이 아무에게나 말을 안 놓는데, 김재규는 동생처럼 얘기해요』
- 朴 대통령이 김재규를 너무 몰아세워 그에게 미안한 감정 같은 것은 못 느꼈나요.
『미안한 느낌은 없으셨던 것 같아요. 김재규를 너무 믿고 귀여워했어요. 「저놈은 야단쳐도 괜찮다」는 식이었지요. 김재규는 자기대로 다 컸는데, 「여기 있는 놈들 전부 나보다 나은 놈이 없는데 나를 멸시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 어떻게 보면 朴 대통령이 차지철보다 김재규를 더 신뢰한 것 같지 않나요.
『네, 맞아요』
- 김재규도 朴 대통령을 진심으로 깍듯하게 모셨지요.
『네, 그럼요』
- 朴 대통령이 차지철에게 대하는 것은 김재규와는 달랐지요.
『그렇게 친밀하진 않았아요. 뭔가 간격을 두고 있었던 것 같아요』 김계원 인터뷰
『네, 朴 대통령이 아무에게나 말을 안 놓는데, 김재규는 동생처럼 얘기해요』
- 朴 대통령이 김재규를 너무 몰아세워 그에게 미안한 감정 같은 것은 못 느꼈나요.
『미안한 느낌은 없으셨던 것 같아요. 김재규를 너무 믿고 귀여워했어요. 「저놈은 야단쳐도 괜찮다」는 식이었지요. 김재규는 자기대로 다 컸는데, 「여기 있는 놈들 전부 나보다 나은 놈이 없는데 나를 멸시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 어떻게 보면 朴 대통령이 차지철보다 김재규를 더 신뢰한 것 같지 않나요.
『네, 맞아요』
- 김재규도 朴 대통령을 진심으로 깍듯하게 모셨지요.
『네, 그럼요』
- 朴 대통령이 차지철에게 대하는 것은 김재규와는 달랐지요.
『그렇게 친밀하진 않았아요. 뭔가 간격을 두고 있었던 것 같아요』 김계원 인터뷰
김재규는 자신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임할 때 중앙정보부에 자신의 심복들을 심어놓았다. 의전과장 예비역 해군 보병대령[16] 박선호는 그가 대륜중학교 체육교사로 잠시 재직할 때 가르친 제자이며, 수행비서 육군 포병 대령 박흥주는 사단장 시절 그의 전속부관이었다.
김재규는 대한민국 국군에서 최초로 명예면관[17]을 당한 장교이기도 하다. 광복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47년 6월, 군경체육대회가 열렸는데 자기 부하를 강제로 연행하려는 미 육군 장교와 대립각을 세우며 칼로 위협하다 면관을 당한 적이 있다. 이후 고향인 경북 선산으로 내려와 대륜중학교에서 체육을 가르쳤는데 이때의 제자 중 유명한 사람들이 꽤 있다. 위에서 말한 박선호와 전 국회의장 이만섭[18] 등이 그 예다. 그러나 면관 1년 4개월 만에 군에 복귀하였다. 정부수립 초기 군과 경찰은 서로 총질까지 하는 등, 사이가 굉장히 좋지 않았다.[19]
김재규의 주치의의 증언에 의하면 김재규는 유신독재 시절 "데모하는 학생들을 처벌하지 말라"는 지시를 대학총장들에게 내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어떤 대학총장에게는 "학생을 잡아가라고 하는 사람이 스승이냐!!!"라면서 꾸짖기도 하였다.
김재규의 지인인 김진우 전 판사가 주진우 기자와 한 인터뷰에 의하면[20] 김영삼이 국회에서 제명당했을 때 박정희는 김영삼을 구속하라고 지시했으나 김재규가 설득하여 지시를 철회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김진우 전 판사의 증언에 의하면 김재규는 1979년 시베리아 철도사업의 위원장을 맡은 적이 있다. 당시 상공부 장관이 김재규에게 차관보를 보내 업체선정에 대한 로비를 하였으나 김재규는 "난 정책만 결정하지, 이권에는 개입 안 한다"며 로비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그외에도 김재규의 종친회 부회장이 삼양라면 상무이사로 재직하던 시절 김재규에게 삼양라면 한 박스를 선물했으나 바로 돌려준 적도 있고, 심지어 자신의 누이동생을 통한 로비조차 한 번도 들어준 적이 없었다고 한다.
1978년 말 유신독재에 대한 학생들의 시위가 극심해지던 시절, 김진우 전 판사는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면담하며 "데모한다고 중정에서 막 잡아넣으면 안 된다. 학생들을 석방하고 학교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러자 김재규는 맞장구를 치며 "어쩌면 내 생각과 그리 같느냐? 나라를 걱정해서 데모도 못 하는 젊은이들이 어떻게 국가가 위급하면 나라를 지키느냐?"고 말하면서 그런 자신의 뜻과 다르게 장관들이 말을 안듣는다고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였다.
김진우 전 판사가 부마민주항쟁 당시 부산지방법원장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김재규는 부산에서 기관장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군인들이 절대로 국민들에게 총을 쏴서는 안 된다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또한 국민들도 군인들에게 잘 협조하도록 당부하여 무고한 사상자가 나오지 않도록 힘쓰기도 하였다. 회의가 끝날무렵 김재규는 "이런 상황에서는 ' 제3의 길'밖에는 없다"는 말을 남긴다. 부산지방법원장은 김재규가 말하는 제3의 길이 무엇인가 의아해 했지만 10.26 사건이 터진 뒤에야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되었다고 한다.
김진우 전 판사는 1970년 김재규가 충의공파 초대 종친회 회장을 맡던 시절 처음 알게 되었는데, 김재규의 첫 인상은 친절하고 당당한 사나이였다고 회고한다. 종친회 일로 서로 의견이 충돌하여 듣기싫은 말을 여러차례 하여도 김재규는 조용히 들어주었고 나중에는 격려까지 해주었다고 한다. 1976년 김재규는 김진우에게 중앙정보부의 특별보좌관 직을 제의하며 자신은 중앙정보부를 해외정보 업무기능의 비중을 높인 진정한 정보기관으로 거듭나게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김진우는 고사하였지만, 훗날 자신이 그 직을 맡았다면 김재규를 따라갔을 지 모른다며 아찔해했다고 한다.
이철 전 국회의원의 증언에 의하면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한 후 김재규는 자신의 선산학교 후배인 고교 교사에게 "민청학련 사건의 관련자들은 의로운 일을 한 사람들이며 공산주의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이런 무고한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박정희에게 분개하였다고 한다. # 참고로 이철은 민청학련 사건에서 사형 판결을 받기까지 했던 사형수였다. 따라서, 박정희 관련 인사에게는 인식을 좋게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는데, 김재규만큼은 좋은 평가를 했다.
10.26 사건 4일전 국무회의에서 김재규는 국무위원 중 유일하게 부마민주항쟁 관련하여 박정희에게 직언을 하였다. 부마민주항쟁의 원인은 무거운 세금과 잘못된 시정[21], 낮은 임금과 제약받는 노동권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직언한 것이다. # 그러나 박정희에겐 우이독경. 소 귀에 경 읽기였고, 결국 4일 뒤...
유신 독재에 항거하는 학생들을 전부 빨갱이로 몰아서 취직을 포함해 아무것도 못하는 폐인으로 만드는 박정희의 통치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방식으로 생긴 '자생적 빨갱이'가 북한에서 넘어오는 '진짜 빨갱이'보다 무서운 존재"라며 박정희에게 정책의 시정을 요청했으나, 단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김재규는 평소에 유능한 인재들이 빨갱이란 이유로 탄압받는 일에 안타까워 하였고,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원인이 개인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인재들이 잘못된 이념에 빠지도록 몰아가는 사회 제도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사형 직전까지 쓴 옥중 수양록을 보면, 본인은 사형을 피할 수 없더라도 동조한 부하들을 어떻게든 살리고자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변호를 맡은 안동일 변호사와의 접견에서 자기보다는 부하들을 위해 변호해달라고 부탁하였으며, 법정에서도 본인은 죽더라도 부하들은 선처해달라며 재판관들에게 호소하기도 하였다. 또한 부하 가족들의 생계를 염려하여 자신의 남은 재산으로 이들을 돌봐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 김재규의 부인인 김영희씨가 김재규의 유언에 따라 부하 가족들의 교육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를 해준 덕분에 김재규의 부하 자녀들은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
끝으로 나의 부하들은 착하고 순한 양 같은 사람들입니다. 무조건 복종했고 선택의 여유나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저 하나가, 중앙정보부장 지낸 사람이 총책임 지고 희생됨으로써 충분합니다. 저에게 극형을 주고, 나머지는 극형만 면해 주도록 부탁합니다. 특히 박 대령은 단심이라 가슴 아픕니다. 매우 착실하고 결백하며 가정적인 사람입니다. 청운의 꿈이 있던 사람입니다. 군에서 곤란하더라도 여생을 사회에서 봉사 할 수 있도록 극형을 면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재규의 최후 진술)
문제는 밑에 친구들인데 무슨 방법으로든지 살리고 싶다. 법도 정상참작이 있을 법한데...
관세음보살님 저 젊은 사람들 살려주소서(1월 21일)
박흥주 대령 살릴 길 없겠는가. 한량없이 마음에 아프고다. 박선호 군 선량한 얼굴, 경비원들 저 무심한 표정들 살리고 싶다.(1월 23일)
부처님께 서원한다. 박선호, 박흥주 외 경비원 일동, 김계원, 정승화 장군 극형만은 면제되게 해 주십시오.(1월 24일)
저 젊은 생명 여하히 하겠는가. 나에게 끝까지 충성하고 있지 않는가.(음력 12월 29일)
김재규 옥중수양록
박흥주 대령 살릴 길 없겠는가. 한량없이 마음에 아프고다. 박선호 군 선량한 얼굴, 경비원들 저 무심한 표정들 살리고 싶다.(1월 23일)
부처님께 서원한다. 박선호, 박흥주 외 경비원 일동, 김계원, 정승화 장군 극형만은 면제되게 해 주십시오.(1월 24일)
저 젊은 생명 여하히 하겠는가. 나에게 끝까지 충성하고 있지 않는가.(음력 12월 29일)
김재규 옥중수양록
제 부하들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제 명령에 복종한 죄밖에 없습니다. 과거 일본에서도 부하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나보다는 그들(부하들)을 위해 열심히 변론해주십시오.
안동일 변호사와의 접견 #
안동일 변호사와의 접견 #
서명숙 현 제주 올레 이사장이 민주화 운동으로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사기 혐의로 들어온 한 ‘장군의 부인’을 만난다. 이 장군의 부인은 수감 중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을 하지만, 죽인 이가 다름 아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소식에 안면을 바꾸었다고 한다. '김재규 장군이 그랬다면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며 서명숙에게 김재규가 군 시절 얼마나 참된 군인이었는지 조목조목 들려주었다고 한다. #
이 사람이 세운 학교도 있다. 지금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에 있는 중경고등학교가 그 학교로, 원래는 서빙고동 지금의 한강중학교 위치가 학교 위치였다. 중경고등학교는 설립 당시에는 군 간부 자녀 전용학교였던 걸로 유명했는데, 최초의 특수목적고등학교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 덕분에 박정희 정권 당시 후덜덜한 빽을 지닌 자녀들의 총집합소 비슷한 곳이 되었던 과거가 있다.
그 시절에 학교 스쿨버스가 청계고가차도[22] 위를 휙휙 날아다녔다는 도시전설이 있고, 지금 육군사관학교 비슷한 스타일의 교복은 폭풍간지였다고. 그런데 10.26 사건 후 학교 부지가 몰수크리. 마침 중경고 근방에는 오산고등학교[23]가 있었고, 한강중[24] 근처에는 용강중학교(당시에는 용산여자중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두 학교 위치를 바꿔버린 것.[25][26] 그 와중에 교훈이며 교표며 싸그리 갈렸다가 1999년에 와서야 교훈은 원래대로 환원됐다.
<사나이 결심>이라는 노래를 좋아했다고 한다. # 이 노래를 조용필이 불렀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김재규와는 무관하다. 조용필이 이 노래를 발표한 것은 1989년 9집 앨범을 발표할 때이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원곡이 따로 있는데, 1949년에 남인수가 발표한 '해 같은 내 마음'이란 곡이다. 이후 조용필이 이 노래를 리메이크한 것.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육신 목록에 자신의 조상인 김문기의 이름을 넣도록 하기 위해 학계에 압력을 가한 적이 있다. 사육신 문서 참고. 이는 사육신만 알고 삼중신을 몰라서 벌인 촌극이다.
1950년대 말 대령 시절에 참모총장 송요찬 장군에게 브리핑을 하다가 실수를 하여 송요찬 장군이 그를 크게 질책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욱한 김재규 대령이 욕을 퍼부으면서 "옷 벗으면 그만 아니냐!!"고 문을 걷어차서 나가버리는(!) 행패를 부린 사건이 있었다. 송요찬 장군은 어이가 없어서 그 자리에선 화도 못 내고 김재규 대령을 영창으로 보내버리려 했는데, 이를 이종찬이 말려서 육군대학 부총장 자리를 제의함으로 처벌을 피했다 한다.
다만, 이때는 송요찬 장군 본인의 무리한 요구도 문제였다. 김재규 대령의 사단은 당시 사단장이 다른 업무로 부재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사전 통보없이 갑자기 불시에 방문해서 김재규 대령에게 부재중인 사단장의 업무보고까지 요구하며 이것저것 트집을 잡았는데, 선술했듯 평소엔 온화하다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폭발하는 성격이 나온 것이다.
첫 번째 결혼을 실패한 후, 김영희와 재혼하여 외동딸 김수영을 두었다. 그리고 당시 3대 요정 중의 하나였던 선운각[27]의 마담 장정이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었다. 김재규는 당시 유부녀였던 장정이가 이혼한 후, 공병부대를 동원하여 서빙고동의 중경학원 용지에 약 200평대 부지에 고급주택을 지어주었고 15년간 동거했다고 한다. 장정이는 선운각 마담으로 일하던 당시, '몸빼', '억척이' 등으로 불릴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희는 단 한 번도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안동일 변호사는 "안가에서 질펀하게 노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 않느냐"라고 했다. 링크
사실, 그 시절에는 조선시대 혹은 전통시대적인 윤리관이 강하게 남아 있어 재력이나 권력이 있는 남성이 첩을 하나 두는 것 정도는 큰 흠이 되질 않았는데, 김재규의 변호를 맡았던 안동일 변호사는 박정희는 심했다고 평가했다. 왕이 후궁을 두는 것 자체는 비판 받을 일은 아니지만, 채홍사를 통해 많은 여성을 궁궐로 불러들인 연산군은 비판을 받은 것과 비슷한 이유인 것이다. 김재규가 이를 생전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밝히지 않고 변호사에게만 털어놓은 것은 이런 파장을 의식한 것이다.
남영동 대공분실과 더불어 고문수사로 악명높은 서빙고 분실을 세운 사람이 김재규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재규 또한 10.26 이후 서빙고 분실에서 고문수사를 받아야 했다.
3.2. 사후
전두환은 10.26 사건 이후 김재규에게 "왜 거사 후 자살하지 않았느냐? 당신이 한 자리 차지하려고 그런 것 아니냐??"며 힐난했다. 훗날 5공 청문회에서 국회의원이 된 김재규의 변호사 강신옥이 전두환에게 "당신이나 자결하라"는 말로 일갈한 적이 있다.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원로이자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 대표인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2012년 8월 인터뷰에서 "33년이 지난 지금까지 국민과 역사가 김재규 부장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고 말했다. 기사
사후 김재규의 유족들은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는 관측도 있었는데 사건 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유족 측은 해당 사건에 대해 얘기하는 걸 꺼렸을 정도였다. <선데이 서울> 1991년 24권 47호(12월 1일)를 통해 일가 구성원 4명의 근황이 공개되었고 모친은 1998년 <동아일보> 인터뷰 당시 "내 아들이 영웅인지 죄인인지는 본인이 말할 게재가 아니며, 내가 할 말은 재규가 무척 효자였다는 것뿐"이라고만 언급했으며, 조카(동생 김항규의 차남)조차도 1999년 <부산일보> 인터뷰 기사 등지에서 해당 사건을 잊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예 아픈 역사 취급하기도 했다. 동생 김영규는 중위 때인 10.26 이후 무기를 다루지 않는 부대만을 전전하다 대령으로 예편했고 # 마음을 가다듬고자 기독교와 불교 서적을 독파했다. 군인으로 있었을 적 신분상 한동안 인터뷰를 사양했지만 2002년 10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 형 김재규에 대해서는 "모든 게 사필귀정이다. 형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가족의 손을 떠난 지 오래며 나는 군인의 본분에 맞게 충실히 살고자 노력 중" 이란 식으로 말했다. #
김재규가 살던 서울 동소문동 옛집은 사후 모친이 관리하다 그녀마저 사망한 뒤 2006년 멸실되었다. 장정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김재규 사후 어렵고 빈곤하게 살고 있으며 2012년 <스포츠서울닷컴(현 더팩트)> 보도에 따르면 이들이 살아 온 서빙고동 집은 원래 김재규의 중경학원 소유 부지 일부에 있었으나 10.26 사태 이후 그 재단이 신군부에 의해 강탈되어 1986년부터 서울시교육청 소유로 되어 있었다. 이에 장정이 일가는 2003년경부터 "20년 이상 취득 의사를 밝히고 이 집에서 살아왔다"며 시교육청을 상대로 소송을 벌여 2006년 2심에서 1심 판결이 뒤집혀 승소했지만 2010년 대법원 측이 시교육청의 손을 들어주었고, 2012년 3월 법원 측이 4월까지 퇴거하도록 요청서를 전달했으며 시교육청 측이 이들에게 기초생활수급자 지원 및 정부 임대아파트 거주를 위해 노력한다고 밝혔다. #
김재규는 10.26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 자신의 아들에게 "나 없이도 잘 살아야 한다"라고 했다고 하며, 김재규의 아들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아버지를 말렸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동아일보 기사) 이는 그의 어머니인 장정이가 막장으로 살았기 때문인데, 김재규 사후인 1985년에 부동산 사기로 구속된 사실이 보도된 것 외엔 행적이 전무하다 <여성중앙> 1990년 8월호를 통해 그간의 사정을 밝혔고, <민주신문> 단독보도에 따르면 2009년 3월 뇌졸중을 앓다가 사망했다. #
동생 김항규는 사건 후인 1979년 10월 30일 보안사에 끌려가 30여일 간 억류된 상태로 강압적 수사를 받으며 서진기업을 내놓으라고 압력을 받았고, 이에 따라 12월 3일 서울 중구 신당동 360-18 대지 889㎡ 등 15건, 현금 15억원 등을 강제로 빼앗겼다. 이후 김항규 자신이 경북 봉화군 현불사로 2년여 간 숨어 다니면서 대한불교 불승종에 귀의했고, 일가는 부산 등으로 내려가며 뿔뿔이 흩어졌다. 부인이 약국 장사로 생계를 이어갔으며 1985년에 가족 전부가 다시 만나기도 했다. 김항규는 그 사이 불승종신도회장을 지내며 1989년 2월 10년 전 강탈행위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냈고, 3월에는 서울민사지법에 재산반환 청구소송도 냈다. 그러나 1990년 국가 손배소송 건은 시효가 지났다며 기각되었고, 그 상태로 1997년에 사망했다.( 1995년 당시 마지막 인터뷰, 1999년 4월 2일 <동아일보> 기사)
부인도 사건 이후 계엄사 합수부의 강압수사로 인해 경북 선산 토지 등을 빼앗기자 그녀의 친정아버지(김재규의 장인)가 재산 일부를 딸에게 떼내주어 10.26 관련자 유족들을 돕게 했고 그녀 자신도 1988년 가톨릭에 귀의했다. # <여성중앙> 1990년 4월호에 그간의 행적이 보도되었으며 같은 해 국가와 학교법인 숙명학원 등을 상대로 소유권 이전등기 말소소송을 냈으나 1992년 1심 및 1995년 2심(92나12287)에서 패소당했다가, 1997년 대법원 상고심( 95다38240)에서 원심이 뒤집혀 재산을 되찾았다. 현재 김재규의 유족은 수백억대의 재산을 가지고 유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기사 당시 동아일보의 기자였던 김충식이 쓴 남산의 부장들에 따르면 제주 지역에서 수렵장을 건설하겠다는 청탁을 김재규가 받아들였는데, 이를 김정렴 실장이 제지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28] 당시,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의 주장에 따르면 장충동에 있는 자신의 30억짜리 집을 1억 주고 뺏어가서 10.26 이후에 전두환에게 돌려받았다고 한다. 다만, 어폐가 좀 있는 것이 상기한 것처럼, 전두환은 김재규에게 10.26 사건을 일으키자, 왜 자결하지 않았냐고 힐난했기 때문에...
한국 미술계의 대형 스캔들인 천경자 미인도 위작 사건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미인도는 한때 김재규의 개인 소장품이었는데, 10.26 사건 후 김재규의 재산을 몰수하는 과정에서 이 그림이 국가로 귀속되어 1980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이후 위작논란이 시작되었다. 즉, 김재규가 이 작품의 위작 여부를 알고 있었는지, 작품을 소장하게 된 경위가 어떤 지를 밝히는 게 위작논란의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일단은 김재규의 남동생에 의하면 "형수가 그 그림이 진품인지는 알지 못하고 걸었다"라고 인터뷰한 바가 있고 검찰에 의하면 김재규의 부인이 친한 오모 대령의 부인에게서 받은 그림이라고 한다. 처음 이 논란이 시작되었을 때는 단순히 전 소유주라는 사실 이상의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2016년 그 사건이 터지고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다루면서 김재규의 업적을 깎아내리기 위한 신군부와 미술계의 결탁이라는 가설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시인 정호승은 1992년에 김재규 사형 전후를 배경으로 한 3권짜리 장편소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를 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을 인용한 이정미 재판관은 "본래 수학교사가 꿈이었는데, 고등학생 때 10.26 사태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보고 법률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
2018년 1월 24일경,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자칭 '애국순찰팀'이 김재규의 묘비를 훼손하였다. 이 건 보배드림에서 '고 김재규 장군의 묘 근황'이라는 제목으로 먼저 알려지기도 했다.
생전에 살던 자택은 성북구 보문동 7가에 있었다. 김재규의 수사 진술서에 자세한 주소가 나와 있다. 정릉동에 김재규의 집으로 알려진 다른 건물이 있는데 폐건물 상태이다.
2020년 이후 김재규의 묘소는 봉분에 호석이 둘러졌다. #
4.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유신정우회|]] |
1973 | 입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73 - 1980 |
탈당 정계은퇴 |
5. 선거 이력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6377a><tablebgcolor=#fff,#1c1d1f><tablewidth=100%><rowcolor=#fff><rowbgcolor=#06377a>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73 | 제9대 국회의원 선거 | 전국구 |
[[유신정우회|]] |
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 | 당선 | 초선[29] |
6. 사후 복권 움직임
1979년 10.26 사건 이후 제명당해 기록말살형에 가까울 정도로 김재규의 흔적은 지워졌다. 또한 김재규는 사건 당시 " 차지철과의 권력 싸움에서 밀려나자, 홧김에 주군을 공격한 독재 정권 부역자" 정도에 불과하였다.그러나 제6공화국 출범 이후 그에 대한 재평가가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함세웅 신부의 재평가 주장을 비롯하여 시사iN 등의 일부 언론과 문영심 작가, 김재규를 변호했던 안동일 변호사, 천정배 의원 등이 김재규 재평가에 힘을 실어줬고, 공화국 시리즈 등 드라마에서도 비교적 호의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월간지 신동아 1996년 10월호에선 김재규를 특집 기사로 다루었고, 최후진술이 담긴 육성 테이프를 최초로 공개하면서 신동아 독자들에 의한 재평가 여론이 일었다. 당시 김재규의 최후 진술을 듣고 감동 받은 많은 독자들이 신동아의 편집실로 전화하여 "김재규를 그동안 잘못 알았다. 명예회복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달하였다고 한다.
2010년대 들어 박근혜 정부가 집권한 이후 김재규 재평가론은 다시 힘을 얻기 시작하는데, 박근혜의 실책에 대한 반발, 조롱으로 "의사 김재규"라는 유머 컨텐츠가 인터넷 커뮤니티 상에서 유행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김재규 드립을 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어디까지나 드립이었고, 그가 진짜 의사라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헌데 이러한 유머 소재로써의 흥행을 통해 대중들에게 언급되는 일이 많아지며 김재규 본인과 당시 사건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게 된 것은 어찌 보면 행운이었다. 김재규가 인지도를 얻으면서 그가 살아생전 남긴 글과 행적들 역시 진지하게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김재규는 평소에도 민주주의와 민주 개혁 세력들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며 이들을 알게 모르게 도와왔다는 사실, 부마민주항쟁 당시 학살극이 벌어질 뻔한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한 사실[30] 등이 발굴되고 알려지며 김재규 지인들이 밝힌 미담 등과 함께 자연스럽게 진지한 재평가에 대한 중요한 정보들도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재평가 흐름에 정점을 찍게 만든 것이 바로 2016년 말 벌어진 한국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였다. 1970~80년대 독재 정권에서나 일어날 법한 박근혜의 후안무치한 행각과 헌법 부정으로 인해 퇴진 운동이 불붙으며 자연스럽게 그 아버지인 박정희와 그의 독재정권을 종결시킨 김재규에 대한 관심도도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게다가 최순실의 아버지인 최태민이 사라져야 한다고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비록 그의 암살이 대한민국의 민주화로 이어지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의 행동이 박정희의 절대 권력을 깨부순 것은 사실이고,[31] 이전부터 보여온 친민주화적 행각이 대중들 사이에서 조명 받으며 재평가 움직임은 대중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직후 2016년 말에서 2017년 초, 인터넷 상에선 김재규 의사라고 불리기도 하며 그에 대한 드립과 진지한 논쟁이 지속해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디시인사이드 (구)주식 갤러리는 '10·26 의거 명예회복 추진위’라는 조직까지 꾸리고 재평가에 앞장서고 있다. 여기에 일찍이 2013년 김재규와 10.26 사건에 대한 재평가가 담긴 평전인 문영심 작가[32]의 <<바람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역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부상한 대중의 김재규 재평가 여론과 맞물려 빛을 발하며 배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2016년 12월 17일 대한민국의 유력 일간지이자 진보매체 중 하나인 경향신문에 박근혜가 묻어버린 ‘박정희 신드롬’이라는 기사가 올라오고 기사의 상당 부분이 김재규 재평가에 대한 내용이 할애되었다.
인터뷰에 응한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과거 발언내용인 2004년 8월 11일 한겨레21 기사와 최근 발언 내용을 비교하면 그의 김재규에 대한 평가가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몇 년 전까지는 김재규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나, 2013년 5월 17일 한겨레 기사를 통해 재평가 여지가 있음을 밝혔고 2016년 12월 17일 경향신문 기사에서도 마찬가지 입장임을 알 수 있다. 경향신문 기사를 참고하면 한 교수는 지금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쳐내는 시기라고 규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측면이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과거 한 교수는 '대한민국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게 될 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아래 기사 참고.
한 교수는 “
박정희 정권은 당시
부마항쟁을 비롯한 일련의 민중저항을 통해 어차피 붕괴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며 “김재규의 행위가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한 교수는 “김재규의 행동이 민주화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그 뒤 실제로 5·17 쿠데타를 통해 더욱 폭압적 군사정권인
전두환 체제가 들어선 점에서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2004년 8월 11일 한겨레21 기사
↓2004년 8월 11일 한겨레21 기사
김재규는 보수우익계의 마지막 대륙형 인간
(중략)
김재규의 거사는 자유민주주의 회복엔 완전히 이르지 못했어도, 여성연예인들이 대통령 술자리에 불려가는 일만은 확실히 차단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득세한 나라에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 의사의 계보는 대가 끊어지고 말았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가 뒤를 이은 셈이다.
(중략)
대한민국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게 될 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2013년 5월 17일 한겨레 기사
(중략)
김재규의 거사는 자유민주주의 회복엔 완전히 이르지 못했어도, 여성연예인들이 대통령 술자리에 불려가는 일만은 확실히 차단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득세한 나라에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 의사의 계보는 대가 끊어지고 말았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가 뒤를 이은 셈이다.
(중략)
대한민국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게 될 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2013년 5월 17일 한겨레 기사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김재규가 살아나는 것은
박정희 신드롬에 치명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규는 10·26의 주범일 뿐만 아니라, 중앙정보부장 시절 박 전 대통령에게
최순실의 부친
최태민의 비위사실을 알린 당사자다. 한 교수를 김재규를 ‘박정희의 충신’이라는 관점에서 재평가해야 한다며 “유신시대의 자료를 꼼꼼히 읽으면서 김재규란 사람이 자기가 잘릴 수도 있는데 박정희의 충신으로서 자기 몸을 던져서 최태민을 막으려 했던 것을 알게 됐다. 그때 최태민을 막았다면 오늘의 불행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런 내막이 최근 들어 다시 알려지면서 집회에 김재규 얼굴이 들어간 깃발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생기는 게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중략)
한 교수는 “그래도 박정희가 박근혜보다는 낫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그는 “박정희에게는 그래도 충신들이 있었다. 김재규 중정부장이나 박승규 민정수석처럼 자신의 직을 걸고 최태민 보고서를 올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김정렴 비서실장도 다른 비서관들에게 최태민과 어울리지 말라고 지시할 정도로 유신정권의 핵심 참모들은 분별력과 상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드러난 바로 볼 때 박근혜 정권의 참모 중에 최순실 문제에 대해 올바른 소리를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 아니냐”며 씁쓸해했다.
2016년 12월 17일 경향신문 기사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삼성공원 묘지에 위치한 김재규의 묘소[33]는
10.26 사건 당시 김재규를 변호했던 변호인단이나[34] 몇몇 민주화 운동가들, 그의 생전 부하들만 찾는 쓸쓸한 묘소였다. 박정희 신드롬이 한창이었을 땐 박정희의 추종자들이 찾아와 김재규의 묘비나 제단의 글자를 훼손하거나 심지어 추모비를 산 밑으로 굴려 떨어뜨리기까지 하였다.[35] 그러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높아진 이후 그를 추모하는 젊은이들이 묘소에 김재규의 영정을 갖다놓거나 주변을 꽃다발이나 헌정시 등으로 장식하여 현재는 제법 묘소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재평가 받은 것과는 별개로 유족들이 왜 훼손된 상태로 묘비를 놔뒀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텐데, 2013년 당시 김재규 유족과의 인터뷰에서 '훼손된 것도 역사의 일부'라는 취지로 내린 결정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 그리고 덧붙인 "훗날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다."라는 부분에서 무언가 의미심장함이 느껴지기도 한다.(중략)
한 교수는 “그래도 박정희가 박근혜보다는 낫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그는 “박정희에게는 그래도 충신들이 있었다. 김재규 중정부장이나 박승규 민정수석처럼 자신의 직을 걸고 최태민 보고서를 올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김정렴 비서실장도 다른 비서관들에게 최태민과 어울리지 말라고 지시할 정도로 유신정권의 핵심 참모들은 분별력과 상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드러난 바로 볼 때 박근혜 정권의 참모 중에 최순실 문제에 대해 올바른 소리를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 아니냐”며 씁쓸해했다.
2016년 12월 17일 경향신문 기사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 직후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제단 위의 술병은 시바스 리갈. 10.26 사건 당시 연회상에 올라온 술로 유명한 그 술이다. 탄핵소추 이전부터 김재규의 기일이나 10월 26일엔 꼭 누군가가 시바스 리갈을 두었다고 한다.
참배객들이 쓴 글들. # 박근혜 탄핵 인용 직후의 방문.
언론에서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김재규의 묘소에 추모객이 늘어나는 현상을 주목하고 있다. 중앙일보, 해럴드 경제
채널A의 보도에 의하면, 최순실 게이트 이후 김재규 관련 책들의 판매량이 18배 이상이나 급등했다고 한다. #
시사IN의 정희상 기자가 김재규를 재평가하기 위해 시작한 스토리펀딩 프로젝트 '김재규, 역사의 심판대 다시 오르다'는 목표금액 1천만원을 270% 초과한 2,700만 2,900원을 모금하며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가결된 2017년 이후 5사단 독수리연대를 비롯하여 3군단과 6사단 등, 부임했던 부대에 다시 초상화가 걸리고 역대 지휘관 목록에 표기되는 등 부분적으로 나마 다시 복권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정보원 홈페이지에서도 역대 원장들 중 한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기무사의 2017년 계엄령 모의 사건 이후 고강도 개혁이 시행되며, 기무사의 후신인 " 군사안보지원사령부"에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김재규의 사진이 다시 내걸릴 전망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다만 사령관실이나 회의실은 사령부 자체가 신설되는 만큼 사진 자체를 치우고, 사진은 역사관 같은 곳에 함께 걸릴 거라는 모양.
2019년 5월 국방부는 "국방장관 및 장성급 지휘관 사진 게시 규정안"을 개정해 예하 부대의 역대 지휘관 사진들을 역사 기록 차원에서 차별없이 게시하라는 훈령 개정안을 하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김재규 전 중정부장이 지휘관을 지냈었던 육군 3군단과 제6사단 홈페이지에 사진과 약력이 게시될 수 있게 될 예정이다.
2019년 7월 31일에 3군단과 6사단에 김재규의 사진을 새로 걸었다는 공식 보도가 나왔다.
7.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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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문
정한용이 정주영 회장이 연상되는 거대 재벌총수로 나오는 드라마.[36] 여기서는 실명 대신 정보부 부장이라는 호칭 아래 백찬기가 열연했다. 사진상의 김재규와 상당히 비슷했고 원래 정치자금 문제로 박정희와 같이 회장님에게 충고하는 1회성 출연이었으나 의외로 인기를 끌어 고정 게스트화 되었다. 여기서 박정희로 나온 사람은 연극인 이진수. 박정희와 정보부 부장 2명은 실제 인물과 꽤 비슷했기 때문에 당시에도 인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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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극장 - 12.12편
KBS에서 방영된 12.12 사건 세미 다큐 드라마. 여기서는 김재규라는 이름으로 초기부터 나온다. 역시 백찬기가 김재규를 맡았고, 드라마 진행상 10.26 사건 이후 전두환에게 체포되면서 리타이어된다. 이 다큐 드라마에서 박정희는 이창환, 최규하는 김성겸, 전두환은 박용식으로 이후 정치드라마의 고정 배역의 시초가 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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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의 세월
유인촌이 주연을 맡은 당시 건설회사 대표였던 이명박의 전기 드라마. 이휘향에게 정치공작을 지시하는 부장님으로 백찬기가 나왔다. 김재규라는 이름은 언급되지 않으나, 몇 번의 출연 후 작중에서 대사로 각하를 저격했다는 언급이 나와 그가 김재규임이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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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공화국
김동현이 맡았다. 6사단장 시절로 나왔는데 비중은 실로 미미했다. 이후 김동현은 코리아게이트에서 장태완 소장을 맡게 되었으나, 2005년 제5공화국에서 같은 배역을 맡은 김기현의 포스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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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공화국
박근형이 극강의 김재규 연기를 보여주었다. 역대 최강의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김재규가 차지철을 쏠 때에 "이 새끼 너 건방져!"는 가히 명대사로서 차지철과의 말싸움과 그 싸움이 끝나고는 "이 개새끼!"라고 뇌까린 적도 있다. 10.26 사건을 일으키기 전 총을 겨누며 일본어로 '고로시마스(죽여버리겠습니다)'라고 중얼거릴 때의 포스는 압도적이다. 10.26 사건을 다룬 영상 매체에서 김재규가 '고로시마스'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은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온다. 그 장면에선 아이러니하게 박정희의 사진이 배경으로 보이면서 총을 겨누니 가히 긴장감을 일으키게 만드는 명장면.[37] 박정희를 저격한 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더 이상 언급이 없다가 5.18 민주화운동 이후 4공을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차지철과 말싸움을 주고받으면서 개그 캐릭터화가 될 뻔 하였으나 배우의 포스로 그나마 무게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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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게이트
사극에서 정도전 전문배우로 유명했던 김흥기가 김재규 역을 맡았다. 제4공화국과 같은 시기에 방영되어 드라마는 신통치 않았고 4공에 묻힌 감도 있다. 배우가 배우인지라 연기력은 훌륭했지만 워낙 4공에서의 박근형 포스가 막강했던지라 그에 비하면 살짝 역부족. 그런데 드라마 초반에는 중앙정보부장 시절에도 안경을 착용하지 않았다가 후반부에 착용한다. 이 드라마 19화와 마지막 화인 20화는 김재규의 일생이 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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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람들
백윤식이 열연했다. 김재규와 박정희 살해 사건을 주제로 한 블랙 코미디 영화. 이런 류의 풍자 코미디가 드문 한국에서는 괜찮은 수작이다. 다만 조롱에 중점을 둔 나머지 영화 속 청와대 사람들에 대한 묘사의 리얼리티는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다. 특히 박정희, 김재규가 얼마나 친했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영화 내내 실소가 나올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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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공화국
이것도 명품 역사 드라마. 여기서도 김재규는 상당한 포스의 캐릭터로 등장한다. 연기자 김형일은 실제 김재규와 외모, 분위기가 매우 비슷하며 얼굴은 잘 생긴 김재규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다만 김형일은 183cm의 큰 체격에 성우 출신 답게 중저음의 묵직한 목소리인 반면, 김재규의 경우 166cm의 그렇게 큰 키는 아니며 목소리는 경상도 억양의 다소 높고 빠른 톤이었다.[38]
여담으로 이 배역은 같은 드라마에서 전두환을 맡은 이덕화가 김형일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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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말년
현재는 관련된 원문이 삭제되어 짤만 존재하는 상태. 여포가 동탁을 살해하는 장면. 이말년 시리즈 하차 이후 이말년 서유기를 연재하기 전 삼국지를 검토한 적이 있긴 하지만 만화로 사용하려고 그린 것은 아니고, 모 패션업체와 콜라보레이션 작업 때문에 그린 그림이다. 한동안 이말년 신혼집 방에 전시되어 있었다. # 링크에 들어가보면 당시 같이 그렸던 전두환과 노태우로 패러디한 이각과 곽사가 김재규로 패러디한 여포를 낙양성에서 쫓아내는 그림도 있다. 실제 역사와도 유사한 게, 여포(김재규)가 동탁( 박정희)를 죽였으나, 정작 이후 이각과 곽사( 전두환과 노태우)가 권력을 잡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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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그림자
김병기가 연기한 김재욱 중정부장. 실존 인물 김재규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이는 그가 차지철을 참고한 역할인 장철환과 대립하고 있다는 점, 장철환이 그에게 전면전을 선포하려 하자 차수혁( 이필모)이 "김 부장은 각하와 동향( 경북 선산)으로 특별한 신임을 받고 있다"고 진언한 점 등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김재욱은 정권이 바뀐 후에도 죽지 않고 사업가로 변신하여 강기태( 안재욱)를 뒤에서 지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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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
김재규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김훈(태권V)의 과거 회상에서 김부장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며, 김훈은 신군부에게 대통령을 시해한 김부장과 한패라는 누명을 쓰고 고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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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스페셜 ‘부마항쟁 40주년 특집 1979’
2019년 10월 방송된 다큐멘터리로 부마항쟁 당시의 상황과 10.26 사건을 보여줬다. 여기서는 배우 박동빈이 김재규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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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부장들
2020년 1월에 개봉한 영화로 김충식의 저서 <남산의 부장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코리아게이트와 김형욱 실종 사건 및 10.26 사건을 중심 소재로 하고 있으며 배우 이병헌이 연기했다. 김규평 중앙정보부장이라는 가명으로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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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파일:서울의 봄_김동규.jpg
배우 차건우가 연기했다. 극중 배역명은 김동규. 비중은 조연 정도고 대공분실에서 수감된 모습과 자고 있다가 고문 받는 모습밖에 나오지 않지만 이 영화의 시작점이 된 인물이다.
- 김재규 역을 맡지 않는 연기자 중에서는 정해균이 김재규를 닮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6년 12월 기준으로) 네이버에 정해균을 검색하면, 자동완성으로 김재규가 뜰 정도. 특히, 극중 긴머리를 하고 있을 때 많이 닮았다는 말을 듣는데, 10.26 사건 이후 머리를 풀어헤치고 현장 검증을 하고 재판을 받을 당시의 모습과 매우 닮았다. 배우 박철민도 많이 닮았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박철민은 순하고 둥그러워 보이고 능글맞은 이미지지만[39], 정해균은 날카롭고 도도한 이미지라 기본적으로는 서로 인상이 많이 다르다. 이 기사에서도 정해균과 박철민이 가장 닮은 배우라고 꼽혔다. # 그 중 김형일이 계속 언급된다.
8. 관련 문서
9. 참고/관련 문헌
- 비운의 장군 김재규 - 오성현 저. 낙원사. 1995.
-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1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3.
-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김재규 평전 - 문영심 저. 시사IN북. 2014.
-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 - 안동일 저. 김영사. 2017.
- 김재규 장군 평전: 혁명가인가, 반역자인가? - 김삼웅 저. 두레.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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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대 이진설 |
제24대 서영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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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문민정부 | 1994년 교통부와 통합 | |||
제25대 허재영 |
제26대 고병우 |
제27대 김우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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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복 이전 창씨개명에 의한 일본식 이름은 金本 元一(かねもと もとかず, 카네모토 모토카즈/김본 원일).
[2]
1926년 음력 3월 6일. 족보상으로는
1925년
10월 4일(향년 54세). 최후 진술에서 본인은 1926년생이 아닌 1924년 음력 3월 6일(양력 4월 9일)생이라고 주장했다.
[3]
교수형으로 사망했다. 만약 최후 진술이 사실이면 56세.
[4]
충의공파 26세손 ○규(○圭), ○기(○基) ○규(○奎) 항렬이다.(
족보)
[5]
金英熙, 1930년 6월 8일생.
김해 김씨로, 김완근(金完根)의 딸이다.
김재규 사형 집행 이후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백산이 난 바람에 딸을
미국으로 보낸 뒤
성남시로 이사가 살았으며
2020년 기사에선 미국에서 산다는 정황이 나온다.
# 다만 언론 노출을 하지 않는다.
#
[6]
김수영(金秀映)에서 김소영으로 개명했다.
김포대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학교법인 김포대학' 이사장 전홍건(全弘健)의 부인으로, 김재규의 사형 집행 이후 어머니인 김영희와 헤어져 한 사업가를 따라 미국으로 도피성 이민을 했다가 미국에서 전홍건을 만나 결혼했으며, 2000년경 한국으로 귀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홍건은 1948년 2월 17일생으로, 김포대학 설립자이자 전 학장인 전신용(全信鎔, 1919. 3. 27. ~ 2012. 5. 22.) 전
한일은행장의 삼남이다.
[7]
경북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의 전신이다.
[8]
10.26 사건을 일으키고 수감된 이후에
불교에 귀의했다.
관련 출처. 또한 사형당하기 직전 염주를 움켜쥐었다는 얘기도 있다.
[9]
서훈이 취소되었다.
2006년
3월 21일 정부는 서훈을 취소할 수 있도록 개정된
상훈법 규정에 따라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포함한 공직자 및 기업인 174명에 대한 서훈을 취소했으며,
10.26 사건의 주범 김재규 또한 그 대상에 포함되어 8개 훈·포장을 박탈당하였다.
# 단, 외국에서 받은 훈장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임의대로 취소/박탈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10]
당시 건설부 장관으로서 몸소 중동에 방문해 (한국 기업을 통한) 중동 개발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공을 인정받아 수훈.
[11]
정확히는 단축형 모델인 PPK. 그리고
박선호의
S&W M36을 빌려 확인사살.
[12]
아버지가 찾아오자 풀어줬다고 한다. 출처는 안동일 저서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
[13]
2002년 대선 당시 강신옥이 정몽준 캠프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정몽준이 박근혜와 연대를 추진하려 하자 박근혜가 강신옥의 과거 이 발언을 문제삼아 심한 반걈을 들어냈었다고 한다. 결국 강신옥이 정몽준 캠프에서 나왔지만, 박근혜와 정몽준의 연대는 끝내 무산되었고 대선 직전 박근혜는 이회창을 지지하며 한나라당으로 복당하였다.
[14]
심지어
10.26 사건 이후 재판 과정에서도 항상 "대통령 각하"라고 존칭을 쓰면서 말한다. 또 궁정동에 대한 이야기는 심지어 재판정에서 박선호의 증언을 제지하면서까지 막았다. 당시
박정희조차
김영삼과
김대중의 사생아 문제가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음에도 "남자의 허리 아래는 거론하지 말라"(이는
이토 히로부미도 생전에 했던 말이었다. 이토는 생전에 매우 문란한 인물이었다.)고 일축할 정도로 당시 시대에 남자의 성생활 문제를 언급하는 게 금기시되었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15]
다만 이 부분은 유신 이후 박정희의 행보를 보고 김재규가 존경심을 잃어 태도가 변했다고 해석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 실제로 김재규가 박정희의 여성편력이나 최태민에 대한 태도 등을 보고 박정희에게 실망했고, 이것이 10.26의 원인이 되었다는 추측도 존재한다.
[16]
대한민국 해병대사령부 해체 후 해병대 인원들은 해군 상륙전 계열 병과 인원들로 서류상 변경되었다.
[17]
예편과 비슷
[18]
이만섭이 중학교 3학년때 왔었다고 한다. 본인이 언급한 부분으로 김재규가 이만섭 본인을 많이 아꼈다고 한다.
[19]
전부 좋지 않은 건 아니고 광복군 출신과 일제 순사 출신과의 사이.
[20]
인터뷰의 출처는 2005년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발행한 <기억과 전망> 제12권의 인터뷰 기사 '잃어버린 진실을 찾아서: 김진우가 본 인간 김재규'
[21]
이 중 하나는
광주대단지사건이었다고 한다.
[22]
마이크로버스 이상은 통행금지였다.
[23]
참고로 중경고가 공립화된 후인
1983년부터는 이 학교도 중경고와 마찬가지로 잠시 남녀공학으로 운영하였으며, 1990년 중경고가 현 위치로 이전함과 동시에 다시 남학교로 돌아갔다.
[24]
당시에는 남학교였다.
[25]
다만 이들 학교가 현 위치로 교환한 것은 그보다 한참 후인
1990년의 일이다. 이와 동시에 한강중학교와 용산여자중학교는 남녀공학으로 바뀌었다.
[26]
하필이면 한강중이 이전한 곳에도 근방에
남중인 오산중학교가 있어서 현재는 여학생의 비율이 높다. 원래 남학교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아이러니.
[27]
선운각의 에이스 기생이 바로
정인숙이었다.
[28]
남산의 부장들, 김충식, 707~708쪽
[29]
1973.12.19
중앙정보부 차장 임명에 따른 의원직 사퇴
[30]
차지철의
킬링필드 발언의 신뢰성에는 논란이 있지만, 박정희의 발포명령 발언만큼은 일관되게 증언했다.
[31]
그러나 얼마 못가 전두환이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8년 가까이 전 정권보다 더 억압적이고 박정희 시기엔 없던 민간인 학살과
일당독재도 일어났으며, 이후 9년 가까이 지나 민주화되었다.
[32]
SBS 환경 다큐멘터리 '물은 생명이다' 의 원고 집필로 유명, 이외에 2016년에는
통합진보당 내란선동 사건에 대한 재고찰과 관련한 내용을 담은 <<이카로스의 감옥>>을 집필하기도 했다.
[33]
묘소 위치를 자세히 설명한 글 링크
[34]
당시 변호인단들은 김재규의 인품에 반해, 수십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김재규를 장군이라 칭하며 추모하고 있다.
[35]
추모비 하단에 금이 가있는 것은 이 때의 흔적이다.
[36]
여담이지만 정한용은
영웅시대에서는
정몽구 역할을 맡았었는데, 외모가 정몽구와 정말 많이 닮았다.
[37]
그런데 이것은 영화 택시 드라이버 표절 냄새가 나긴 한다.
[38]
김형일은 중저음의 묵직한 톤이었으며 말투도 느릿하고 점잖은 편이다.
[39]
차지철역을 임원희가 맡지 못하는 이유도 이것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