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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8080><colcolor=#fff> 대한민국 제17-19대 국회의원 정두언 鄭斗彦 | Chung Doo-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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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7년 3월 6일 |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 | |||
사망 | 2019년 7월 16일 (향년 62세) |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 실락공원 인근 | |||
본관 | 하동 정씨 | ||
재임기간 | 제7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 이명박 시정) | ||
2002년 7월 1일 ~ 2003년 11월 1일 | |||
SNS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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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8080><colcolor=#fff> 배우자 |
전처 이화익[1] 후처 구윤승[2] |
|
자녀 | 딸 정호희, 아들 정호찬 | ||
학력 |
서울창서국민학교 (
졸업) 배문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 졸업 / 71회)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 무역학 / 학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 영어영문학 / 학사) 조지타운 대학교 대학원 ( 정책학 / 석사) 국민대학교 대학원 ( 행정학 / 박사[3]) |
||
병역 | 육군 병장 만기전역 | ||
종교 | 개신교 ( 예장통합)[4] | ||
의원 선수 | 3 | ||
의원 대수 | 17, 18, 19 | ||
약력 |
제24회
행정고시 합격 노태우 정무제2장관 보좌관 이규성 행정조정실장 비서관 국무총리실 정무·정보·공보비서관 제7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 이명박 시정) 서강대학교 겸임교수 국제디지털대학교 초빙교수 제17대 국회의원 ( 서울 서대문구 을 / 한나라당) 한나라당 문화예술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 명지대학교 객원교수 제18대 국회의원 (서울 서대문구 을 / 한나라당) 한나라당 최고위원 제15대 여의도연구소 소장 제19대 국회의원 (서울 서대문구 을 / 새누리당) 제19대 국회 후반기 국방위원회 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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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직 정치인 겸 방송인. 그 외에도 공무원, 자영업자, 아마추어 가수[5] 등 다양한 이력을 남겼다. 제17-19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지역구는 서울 서대문구 을[6] 지역이었다.꽤 다사다난한 인생을 보내 “정치계의 풍운아”로 불리기도 했다. 2000년대 한때는 대표적인 친이 인사로 꼽혔으며, 이명박 정부의 개국공신으로 소위 왕의 남자로 불리며 당내 소장파를 대표하던[7] MB 정부의 3축( 이재오, 이상득, 정두언) 중 한 명이었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이명박의 친형 이상득 전 의원의 2선 후퇴를 강력하게 요구하다가 결국 이명박 정부에 찍혀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그렇게 정권 실세에서 한순간에 친이도 친박도 아닌 당 내 비주류 인사에 독고다이가 되어 2010년대엔 의원직만 유지하는 신세가 된다.
그래도 박근혜 정부 들어선 비박 인사로 촌철살인도 하며 나름 존재감을 보였지만, 2016년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참패와 함께 낙선하면서 정계 은퇴 선언까지 했고, 그 뒤로는 여러 시사 프로그램들에 출연하며 이제는 정치인이 아닌 나름 활발한 시사평론가의 길을 걷기도 했다. 허나 2019년 7월 16일, 자택에 유서를 남기고[8] 고향인 서울시 서대문구 홍은동 북한산 자락길 부근 산 속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경찰 조사 결과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 이렇게 그는 향년 62세의 일기를 끝으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머물게 되었다. #
사상적으로는 독재를 혐오하고 한국 보수가 과거의 군사정권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제대로 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위해 거듭나야 한다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은 인물이었다.[9] 덕분에 진보 진영에서도 어느 정도 괜찮게 평가하는 인물이었으며, 박근혜를 위시한 친박이랑도 많이 대립했다. ' 독재가 보수, 친북이 진보인 기괴한 나라'라는 말에서 그의 가치관을 대략 엿볼 수 있다.
2. 생애
2.1. 초년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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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 시절,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
1957년 3월 6일 서울에서 4남 1녀 중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군수를 지냈지만 병으로 가산을 탕진했고, 집안이 몰락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만주로 건너가 갖은 고생을 다 하다가 고향인 광주로 돌아와 결혼한 후에 무작정 상경하여 정성태 전 국회부의장의 수행기사로 일했고, 어머니는 모래내시장에 좌판을 펴서 5남매를 교육시켰다.
삼청국민학교를 다녔는데 경비가 강화되면서 무허가 건물이었던 집이 헐리게 돼, 그 후 몇 달 동안 그 자리에서 천막을 치고 버티다가 결국은 신촌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 신촌으로 이사를 하면서 주위의 도움을 받아 지금의 현대백화점 맞은 편에서 당구장을 하며 살게 됐다고 한다. 출처
정성태 전 국회부의장은 그의 먼 당숙뻘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를 각별히 아꼈고 일자리를 준 것이었다.[10] 어쨌든 그 덕분에 정두언은 서울창서국민학교와 배문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가정 형편은 넉넉하지 않은 편이었다고 한다. 단칸방에서 5형제가 함께 살다가, 외삼촌 집에 가서 지내기도 했다. # 가정형편도 어려웠지만 상당히 우울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늘 밖으로 돌았고 수시로 어머니를 구타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내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 너무 두렵고 싫어서 자기애 또는 자존심을 드러냈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
배문중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그는 팝송을 많이 불렀는데, 화장실에서 30분에서 1시간 정도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노래만 잘 하는 게 아니라 공부 역시 아주 잘 해서, 1973년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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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 시절 모습 |
그리고 경기고를 졸업한 뒤 1977년에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합격했고 서울대 2학년에 올라가면서 경제학을 선택했다. 대학 재학 중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사회문제에 의식을 가져 학생운동 서클에 가담하기도 하였으나 적극적 운동권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
대학 시절 'Spirit of 1999'라는 록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원래부터 엔터테이너 기질이 있어서 중, 고등학생 시절에도 오락부장이나 소풍 등에서의 사회를 도맡았다. 대학생 시절이나 사회생활 할 때도 술자리나 회식 또는 연수회를 가면 언제나 사회를 맡았고 분위기를 주도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12]
그 와중에도 고시 공부를 열심히 하여 서울대학교 무역학과 재학 중에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하였다. 그런데 우수한 고시 합격 성적에도 불구하고 연수 실습 점수가 0점이어서 공무원 임용이 취소될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그와 시비가 붙은 구청 인사 담당자가 앙심을 품고 0점 처리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본 다른 인사 담당자가 그를 수료시켰고, 공직에 입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뒤 행정고시 합격자들에게 부여되는 특혜인 기본병과장교 복무 대신 사병으로 자원 입대하여 강원도 양구군에서 복무하고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하였다. 전역 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행정 사무관시보에 임용되었다.
2.2. 관료시절
행정사무관시보 임용 후 정무제2장관실에 배속되었다. 원래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경제부처로 가고 싶었지만, 당시 미필이었던 탓에 지원 서열이 밀렸다고 한다. 노태우 정무제2장관을 보좌한 것을 시작으로 노태우가 정무제2장관에서 체육부장관으로 발령나자 그를 따라 체육부에 배속되어 서울 올림픽 개최 지원업무를 담당하였다. 군에서 전역한 이후 이후 20여 년간 체육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국무총리비서실 등을 거쳤다.(고시 합격 후) 공직 생활 중에 군대를 다녀오면 장교로 복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이왕 군대에 가서 고생할 거면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겪는 길로 가자는 생각에서 병사로 입대하였다.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를 하고, 강원도 양구군에서 힘든 군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육군 병장 만기 전역 후에 체육부로 복귀해 올림픽지원총괄업무를 맡다가 1985년 1월에는 행정조정실로 발령이 나서, 청소년대책반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행정조정실장 비서관으로 있을 때에는 상사의 순직을 보기도 했다.
1987년 4월, 대규모 민주화시위가 일어났을 때는 4.13 호헌조치 결사 반대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그 해 일주일간 휴가를 내고 KBS 탤런트 공채시험에 지원하기도 했는데, 4단계 최종 시험까지 합격했지만 아내와 가족들의 만류로 인해 스스로 포기하고 만다.
1991년 미국으로 특별 유학, 2년간의 연수를 받았으며 이 기간 중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유학하면서 정책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국무총리비서실로 옮겨 국무총리실 정무 비서관, 정보 비서관, 공보 비서관 등을 지냈다.
2.3. 정치 활동
2000년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권유로 국무총리실에 사표를 제출하고 정계에 입문했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천년민주당 장재식 후보에 4%차로 석패하였다. 이 때의 패배로 상심이 커서 그는 우울증 등 어려움을 겪었다.이후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2개월간 병상에 입원했다. 그러던 그에게 국회의원 이명박이 찾아와 서울특별시장 선거캠프 합류를 권했다. "이명박의 컨셉이 시대정신에 부합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승낙한 다음 이명박의 서울시장 출마를 거의 혼자서 준비하다시피했다. 그 결과 이명박은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그 후 이명박 서울시장 시장 재임 시절,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으로 일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후보로 서대문구 을에 출마하여 이번에는 당선되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친이계의 핵심으로 이명박 캠프에서 활동했었다. 당내 경선 과정에서 상대한 박근혜 후보의 검증에 나서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를 낱낱이 밝히면 박근혜 좋아하시는 분들은 밥도 못 먹게 될 것이라는 폭로성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9년 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드러나며 재조명받기도 했다.
이후 이명박 후보 캠프의 선대위 기획본부장과 전략기획 총괄 팀장으로 활동하면서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다. 2007년 12월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대통령 당선자 보좌역이 되었다. 당시 언론에선 이명박 당선인을 따르는 친이계는 이명박의 친형이자 포항에서 내리 당선되면서 영남을 대표하는 이상득계, 이명박의 6.3 항쟁 동기이자[13] 과거 민주화운동 경력이 화려했던 이재오계, 서울시장 시절부터 함께 하면서 당내 소장파를 이끄는 정두언계로 나뉘어져 있다고 분석할 정도로 그야말로 MB 정권의 핵심 실세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초기에 남경필 등 소장파 의원들과 함께 이명박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에게 정권을 위해 2008년 총선에 불출마하라고 요구했고, 그 후로도 이상득 및 그 측근들( 임태희, 박영준 등)의 권력사유화[14]를 계속 비판하다가 결국 권력 핵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15] 이 때문에 이명박 당선의 1등 공신임에도 불구하고[16] 이명박 정권 내내 변방에서 돌았으며 심지어는 남경필, 정태근과 같이 이상득이 배후조종한 것으로 의심되는 불법사찰까지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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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0월 12일 기자회견 |
이때 야당 쪽에 영포목우회[17] 관련 정보를 넘겼다는 의혹을 받고 여권에서 융단폭격하자 눈물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많은 언론에서는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고 '권력 투쟁'이라는 프레임으로 보도해서 너무 가슴 아팠다고 말하기도 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 서대문구 을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0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출마하여 최고위원을 역임했다. 그 후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소장을 역임하였다. 2010년 전교조 회원명단 무단공개로 물의를 빚은 조전혁 의원 콘서트에서 조촐하게 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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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11월 『중앙일보』 인터뷰 모습 출처 |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로 나온 김영호 후보를 근소하게 이겼는데, 이건 정통민주당 홍성덕 후보가 야권 득표율을 깎아준 덕분에 겨우 신승했다는 평. 하지만 같은 해 솔로몬저축은행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이상득과 함께 기소되었다가 2014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정두언은 이 때문에 2013년 1월 23일 1심에서 징역 1년에 법정구속 판결[18]을 받아 구속되어 10개월간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2014년 대법원 무죄 확정 후 6,500만 원가량의 형사보상금을 받았으나 전액 기부하였다고 한다.[19]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서울 동작구 을에 출마한 나경원 후보 캠프의 고문을 맡았고 사실상 총괄선대본부장 역할로 선거를 지휘하여 나경원 의원이 당선하는데 기여하였다. 나중에 나경원은 2019년 7월 17일 정두언 전 의원의 장례식에 조문을 마치고 난 뒤, “전적으로 제 선거를 다 맡아 도와주셨던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두언 전 의원 역시도 2018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선거에 출마한 나경원에 대해 나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늘 자신과 같은 '비주류'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5년 중소가맹점들에 대한 카드수수료를 획기적으로 낮추는 법안을 발의하였다. # 신용카드 거래로 생긴 채권을 신용카드업자 외에 은행과 증권, 보험사도 매입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되었으며, 카드 수수료율 인하 경쟁을 통해 중소 상공인의 수수료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여신전문금융업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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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 국방위원장 시절. 주호영, 문재인, 유승민, 윤후덕, 권은희도 보인다. |
2015년 7월 24일 대한민국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국방위원장 시절 박근혜 정부의 한국형 전투기(KF-X) 개발사업에 대한 전면적인 감사원 감사를 요청하면서, KF-X 사업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같은 국방위원회 소속 유승민 의원과 함께 KF-X 사업 추진에 대한 재고를 주장했다. # 그리고 KF-X 사업 재검토할 것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요청하는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 #
2015년 10월 25일 박근혜 정부 2015 개정 교육과정 역사 교과용도서 국정화 논란에 대해 “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에 역행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자기 모순이고, 전략적으로도 큰 실책”이라고 비판했다. 2015년 11월 13일에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박근혜와 그 추종자들을 비판하며, "나라가 군정 종식은 됐어도 왕정 종식은 못 했다"라는 발언을 하여 주목받았다. 그리고 여당의 ‘ 친박 TK 패권주의’를 비판하며,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확고부동하다. 이들이 당을 주도하니 당이 수도권에 관심이 없고 민심을 알지도 못한다.", "그러니 수도권 의원들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불평하기도 하였다.
2015년 11월 14일에는 자신의 블로그에 ‘ 친박· TK’ 출신의 장차관과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에 대해 이들이 전략 공천이니 TK 물갈이니 하며 평지풍파를 일으키며 내년 총선에서 영남과 서울 강남 지역구에 뻔뻔하게 무혈입성하려 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고관으로 임명돼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들이 다시 국회의원으로 ‘임명’돼 그 부귀영화를 이어가겠다는 것"이니 이것은 불공정하다고 한마디 한 것.
다만 과연 이러고서도 친박이 당권을 쥔 새누리당에서 공천받을 수 있을지 많은 사람들의 걱정을 불러일으켰는데, 정작 본인은 자신의 지역구가 야당 강세 지역이라 공천을 신청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3번 연속 당선된 본인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공천 경쟁을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2016년 친박 주도의 공천 과정에서 비박계인 김무성 대표에게 이른바 비박 살생부 명단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언론에 터뜨려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 때 시사예능프로 썰전에서 유시민은 정두언이 살생부 명단이 있다고 폭로함으로써 정작 그 자신은 공천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분석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저런 잡음이 터졌지만, 비박계가 대거 공천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결국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하게 되는데...
문제는 그렇게 같은 지역에 출마한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출구조사에서 2위로 뒤졌다는 것. 17대와 19대 총선에서는 두 번 다 출구조사에서 낙선하는 걸로 나왔는데 정작 개표해 보니 당선이 된 적도 있던 터라 희망을 잃지 않는 듯했으나...
결국 33,852표(39.9% 2위)를 얻어 낙선했다.[20] 안그래도 서대문구와 마포구는 더불어민주당 강세인 곳이라[21]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정두언 의원이 마지막 서대문의 보루격이었는데, 20대 총선에서 정두언이 낙선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재오마저도 은평구 을에서 낙선하면서 서울 7권역[22]은 싹 다 더불어민주당이 장악했다.[23]
20대 총선 낙선 후 극심한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 가죽벨트로 목을 맸는데 제법 튼튼한 벨트로 목을 매었다고 여겼는데 벨트가 끊어져 자살에 실패했다고 말했다. 그 뒤에 그래도 삶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기 위해서, 인터넷 강의로 독학하여 심리상담사와 분노조절장애 상담사 자격을 취득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낙선하고도 새누리당 까기에 여념이 없는데, 2016년 5월 한 인터뷰에선 새누리당이 20대 총선에서 참패한 이유를 들며 "(지금) 새누리당의 정체성이 독재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보수가 떠난 거다. 보수의 정체성이 독재· 권위주의는 아니지 않나. 지금의 새누리당은 거의 권위주의가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분위기로 가고 있다"며 "그러니까 당연히 중도 신당도 필요없고 제대로 된 보수정당, 제대로 된 우파 정당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2.3.1. 서대문구 을에서의 그의 위상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 험지인 서대문 을 지역구에 공천을 받았으나 현역 장재식 의원에게 불과 4% 차이로 석패했다. 당시 은평, 서대문, 마포의 6개 선거구 중에서 한나라당이 유일하게 패한 지역. 이후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 캠프에 영입되어 시장 당선에 기여하고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임명되었다.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관악구 을과 함께 서울에서 보수정당의 양대 험지로 통하던 서대문 을 지역구에 16대 총선에 이어 2번째로 출마하여 노무현 탄핵 역풍을 뚫고 당선되었다!!! 그가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남가좌동, 북가좌동 일대에 가재울뉴타운을 유치한 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데다가[24] 새천년민주당 안완길 후보와 민주노동당 이상훈 후보가 열린우리당 박상철 후보의 표를 어느 정도 잠식한 것이 정두언 후보의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전년도인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이 당선되면서 일약 정권 실세로 떠올랐다. 그의 지역구에 통합민주당에서 단 한 명도 공천 신청자가 없었을 정도였다. 17대 대선에서 이명박에게 썰린 정동영의 출마설이 나돌았지만 동작구 을에 공천되었다. 결국 통합민주당은 후보자 등록을 며칠 앞두고 김상현 전 의원의 아들 김영호 후보[25]를 전략 공천했고, 선거 결과 정두언 후보가 서울 강북 지역 최고 득표율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26]
-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18대 총선 때처럼 김영호 후보와 맞대결했다. 전년도인 2011년 서울시장 보선에서 당시 무소속이던 박원순이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꺾고 당선되는 등 여론이 한나라당의 후신 새누리당에게 불리하게 전개된 선거였지만 17대 총선 때처럼 정통민주당 홍성덕 후보가 민주통합당 김영호 후보의 표를 잠식하는 바람에 정두언 후보가 625표차로 당선되었다.
- 서울의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 중 17, 18, 19대 세 번의 총선에서 모두 이긴 단 둘뿐인 새누리당 국회의원[27]이다. 용산구가 강남3구의 뒤를 이어 보수정당의 강세지역인 점을 감안하면 16대 총선[28]까지 보수정당의 험지에서 3회 연속으로 보수정당 소속으로 당선된 정두언의 위상을 알 수 있다.
-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진영, 이재오 등이 공천에서 탈락한 가운데서도 살생부 논란이 부담스러웠는지 새누리당은 다시 해당 지역구에 공천을 해줬다. 사실 친박계에선 눈엣가시로 여기고 컷오프하려 했지만, 해당 지역구에 신청자가 없어서 그냥 공천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진박 감별사 논란과 계파 갈등이 불거지며 대중에게 밉보여 결국 새누리당은 참패하고, 친박 때문에 덤탱이 쓴 정두언 역시 낙선하고 만다.[29]
2.4. 정계 은퇴 이후
2.4.1. 방송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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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정 전 국회의원과 TV조선 이것이 정치다 진행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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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1 사사건건에서 정청래 전 국회의원과 대담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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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BS "색다른 시선"에서 강훈식 의원과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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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러브FM " SBS 정치쇼" 정태근 전 의원, 이재익 PD와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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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N " 판도라" 정청래 전 의원과 MC 김승우와 함께 |
20대 총선 이후 사실상 정계 은퇴를 하면서,[30] 2016년 5월 23일부터 10월 21일까지 TV조선의 정치시사프로인 정두언·김유정의 이것이 정치다의 MC를 김유정과 함께 맡기도 했다. 이 밖에도 종편과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서 패널로 출연하였다.
정청래 전 의원과 함께 KBS1 사사건건, MBC 표준FM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MBN 판도라에 고정 출연했었다.[31] 그리고 가까운 사이인 정태근 전 의원과 함께 SBS 러브FM 정치쇼에도 출연했었다.
2.4.2. 정치 평론
2016년 10월 박근혜 정권 몰락의 신호탄이 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나서는 더 강경하게 박근혜와 친박을 비판해 오다가, 남경필 경기도지사와 김용태 의원이 새누리당을 탈당한 바로 다음 날인 2016년 11월 23일 원외 인사 몇 명과 함께 전격적으로 새누리당을 탈당했다. TV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더이상은 이 당에 남아 있는 것조차 치욕스러워서 탈당한다', '보수의 가치인 자유민주주의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독재가 보수는 아니잖아요'라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그러나 비박계가 주동하여 창당한 바른정당에는 합류하지 않았다. 이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유승민 의원이 바른정당을 장악하려는 듯한 모션이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으며, 바른정당 소속 남경필 경기도지사의 대선 캠페인을 잠깐 돕기도 했다.이후부터는 정치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2017년부터 MBN의 시사예능프로인 판도라에 고정 패널로 출연하고 있는데, 정치 판세를 분석하는 능력은 나름대로 괜찮은 편이다. 좌우를 떠나서 상당히 균형감 있고 진영논리에 구애받지 않는 분석들을 많이 내놓았다. 애초 포지션이나 이념상 모두까기에 유리하고 본인도 나름 시니컬한 포지션을 유지하다 보니 일각에선 일명 작두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물론 빗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럴 땐 또 농반진반 사과도 잘하는 편. 박정희에 대해서도 보수가 아니라며 ' 독재가 어떻게 보숩니까? 자유민주주의가 보수지. 친북이 진보라는 말도 잘못된 거에요.'라고 말했다. 이후 2019년 판도라에선 더 나아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독재와 관치경제로 박살낸 박정희는 보수의 적"이라는 발언도 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일인 2017년 5월 9일 JTBC의 개표방송 ' 2017 우리의 선택 국민이 바꾼다-특집 뉴스룸'에 출연했는데, 손석희가 투표하고 왔냐고 질문하자 "부끄럽지만 기권했다. 고민했지만 선택할 후보가 없었다"고 말했다. 참고로 정두언은 2012년 대선도 사실상 기권했다고 밝힌 바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분( 박근혜)이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찍지 않았다. 비난받을 얘기를 고백하는 것"이라며 중간에[32] 기표하고 나왔다고 한다.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월간 정두언'이라는 꼭지에 나와 보수적인 시각에서 정치 판세를 분석·논평했었다. 김현정의 뉴스쇼는 격주로 '월간 정두언'과 '월간 정청래'를 내보내는데, 정두언 전 의원과 정청래 전 의원은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함에도 서로를 매섭게 비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2017년 4월 뉴스쇼에서 월간 정두언과 월간 정청래를 동시편성하며 두 사람이 처음 뉴스쇼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두 사람은 기존의 날선 태도에서 벗어나 판도라에 함께 출연하는 인연으로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면서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명박도 국정원 특수활동비에 관련있음이 밝혀진 이후로, MB의 측근이었지만 지금은 저격수 역할을 하고 있어 많은 여론과 언론이 그의 입을 주목하였다. 내부고발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의 심리 상태나, 행동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다. 2018년 1월 18일 JTBC 뉴스룸과의 인터뷰에서 MB는 종쳤다는 멘트로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 이 말의 가장 큰 근거는 최측근이었던 김희중 전 실장이 등을 돌린 일이다. 또한 다른 인터뷰에서는 이명박이 대선 당시 ' 경천동지할 세 가지 일'이 있었고,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돈이 필요[33]했을 거라고 주장하였다. 단, 그 세가지 일이 어떤 일인지는 죽어도 밝힐 수 없다고. 그리고 김윤옥 여사의 특활비 사적유용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한편 당시 있었던 민간인 사찰 건에 특활비가 쓰였으며 이것이 박근혜 정부 당시 블랙리스트보다 훨씬 큰 폭탄이 될 것이라고 발언했다.[34]
또한 대선 과정에서 당락이 뒤바뀔 수도 있었던 '경천동지할 3가지 일'이 있었다는 폭탄 같은 썰을 흘렸다. 하지만 이것들은 자신이 죽기 전에나 말할 것이라며 주변인들의 집요한 물음에도 함구하거나 말을 돌렸다. 하지만 MB 수사가 점점 진행될수록 뭔가 꿍쳐둔 것을 슬금슬금 풀더니 결국 2018년 3월 2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 중 1가지가 김윤옥 여사와 관련되어있다고 발언했다. 대선 기간 중 김윤옥 여사가 뭔가 사고를 쳤으며 정두언 의원이 사재까지 털어서 입막음을 시켰으나 당선 이후에도 한동안 협박당하며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 2018년 3월 19일 서울신문 기사에서 김윤옥 여사가 미국 뉴욕의 사업가로부터 돈다발이 든 명품백을 받았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현지언론을 매수하는 과정에서 정두언의 서명이 있는 각서 등이 증거로 드러났다. # 물론 이 사건이 정두언이 언급한 사건인지는 당장 알 수 없지만, 어느 정도 의심은 가는 상황이다.
하지만 채널A나 MBC에서 MB 측 및 측근들에게 연락을 돌려본 결과 이들은 대꾸할 가치도 없으며 정두언 혼자 멋대로 한 얘기라고 받아쳤고, 심지어 한 측근은 '정두언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대답하여 진위는 더욱 불분명한 상태. 그러나 정 전 의원의 썰은 사실로 드러났다.[35]
그런데 이 보도가 나오고 얼마 후 정두언이 말한 "당선 후에도 청와대에 계속 이권을 요구한 사업가(명품백을 준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다)"가 직접 인터뷰한 게 나왔는데, 이 사람 말로는 청와대에 이권을 요구한 적도 없고 정두언이 사재를 털어서 돈을 줬다는 것도 거짓이며, 정두언이 써준 각서도 받고 나서 얼마 안 가 버렸다고 한다. 자기는 밀린 후보 홍보물 제작비용을 받으려 했던 건데 정두언이 돈 대신 각서를 써주는 걸 보고 잔금 받는 것을 포기했으며 왜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입장. 정두언을 고소할 생각까지 하는 중이라고 한다.
이후 월간 정두언 인터뷰에서 한 대부분의 예측이 다 맞아떨어졌다. 박근혜 항소 포기, 이명박의 영장실질심사 참석 포기 등을 한 달 전에 예측했다. 덕분에 정두언은 현업 정치인보다 평론가 쪽이 더 천성에 맞는 것 같다는 일부 사람들의 평도 받게 되었다.
MB 구속 당시에는 생중계가 아니라 나중에 뉴스로 봤다고 한다. 한때 토사구팽 당한 입장이라 속 시원할 것도 같지만 복잡한 기분이라서 그러지 못했다고. MB가 서울시장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자기 직언은 웬만해서는 다 들어줬는데 대통령이 된 뒤 그러지를 않게 되어서 갈라졌다며 씁쓸함을 내비쳤다.
본인 자서전에도 언급했듯이 정두언 의원은 모든 대한민국 정부의 말로가 비슷했던 것은 근본적으로 대선자금 때문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대선 당시 아무리 돈을 준비해도 부족하기에 외부에서 지원을 받고, 그 과정에서 친인척들이 관리하게 되니까 친인척 비리가 발생하고, 한편으로는 당시 돈을 받은 자들에 대해 정부 탄생 이후 대가를 지불해야 하다 보니 낙하산 인사가 발생하고..라는 사이클을 모두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이명박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대기업 사장을 했던 몸이라 돈이 많아서 대선 당시 누구에게 돈을 받을 필요가 없는 입장이었다. 거기다 당시 한나라당의 정권교체가 확실시되는 상황이라 경선만 잘 되면 대선은 굳이 크게 선대위를 꾸릴 필요가 없어서 당시 이명박에게 기대를 했다고 한다. 누구에게도 돈을 받지 않고 자기 스스로 다 대선을 치르면 모든 정부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으로 휘둘리지 않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고...
하지만 돈에 너무 집착했던 이명박 일가는 결국 대선 도중에 대선의 판도를 흔들 수 있는 수준의 뇌물과 부정청탁을 일삼았고, 결국 그것은 이명박 정부 당시의 이상득 구속을 비롯해 훗날 자신들을 옥죄는 자충수가 되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 돈에 대한 집착은 당시 본인의 부모 세대가 가난했기에 돈에 집착했던 것과 비슷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고도 그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더 많은 돈을 쥐려고 했던 것이 패착이었다 평했다. 여러 언론에서 이 발언을 수차례나 했기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다가오며 4.27 남북정상회담을 봤는데 전 세계 생방송을 통해서 스스로 못박은 만큼 김정은도 나중에 딴말하기 어려울 것이라 평했다. 국회 비준에 대해서는 하는 것이 좋지만 북미정상회담이 끝나고 나서 하는 게 좋다며, 서두를 필요가 없다 평했다. 다만 북미정상회담이 끝난 이후부턴 북한이 핵을 포기할 의사가 별로 없어보인다며 북핵 문제가 장기 미제가 될 것 같다고 우려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자유한국당은 대패할 것이 확실하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거쳐 당이 완전히 사당화되고 직언을 하는 자들이 사라졌기에, 지금 자유한국당은 홍준표 사당화가 된지라 설령 지방선거에서 패배하더라도 홍준표 체제가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홍준표 대표에 대해서는 보수를 궤멸시키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 같다며, 민주당 선대위원장이나 다름없다고, 완전히 망조가 들었다 평했다. 민주당 의원 몇몇이 민주당을 위해서 종신 대표를 했으면 좋겠다는 말이 있다는 것에 대해 진심일 거라고 말하기도.
창원 빨갱이 발언에 대해서는 거기에 민중당, 정의당 지지인들이 많은데 그들을 빨갱이라 생각하지만 그걸 다르게 말하려다 오히려 저런 망언이 나온 것 같다며, 애초에 같이 국회에서 정치하면서 빨갱이라 생각하다니 그게 사람이냐고 깠다. 또 경상도 사람들을 이상한 사람들로 만든다고. 현재 자유한국당의 근본적인 문제는 결국 당의 사당화 작업이고, 그걸 바꾸지 않는 한 당의 몰락은 피할 수가 없다고 평했다.
대한애국당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아직도 있었냐면서 벌써 사라진 줄 알았다는 말을 했다. 조원진 의원의 문재인 미친 XX 발언에 대해서는 자신이 미친 거 아니냐고 디스. 멀쩡했는데 이상해졌다면서 당대표 되면 다 그런 건가 싶다고. 저건 그냥 극우라고 한다. 아무튼 보수든 극우든 국민들은 멀쩡한데 정치인들이 이상해서 다 궤멸시키고 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민주당에서도 공천소동이나 대선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면서 이대로라면 문재인 정부도 이전 정부와 같은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다고 평했다. 홍준표 때문에 묻힌 거지 여당도 문제 많다며, 지방선거가 끝나면 야당도 정리가 되겠지만 여당도 시끄러울 것이라 평했다.
드루킹 여론조작 사건에 대해서는 그냥 스스로 특검을 해서 당당하게 다 정리를 해 버리는 게 본인들에게 있어서 좋을 것 같다 평했다. 사실 드루킹 자체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지만 여당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어차피 특검하는 데는 한두 달이 걸리는지라 지방선거가 다 끝난 뒤이기 때문에 해서 별로 선거에 불리하지도 않다고 한다. 원래 총선 대선 다 치러 본 사람으로서 여론조작은 많든 적든 늘 일어나고 협박도 많이 겪지만 그런 점에서 김경수는 실수했다고 평했다.
바른미래당에 대해서는 근간이 너무 미약하기에 결국 지방선거가 끝나면 존립을 걱정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작을수록 뭉쳐야 되지만 여기도 공천소동을 못 피해서 그렇다고. 안철수나 유승민이나 그렇게까지 통 큰 정치를 하며 활동해 본 적이 없어서 다음 대선 때도 사실 크게 명함을 내미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재 한국 정치사의 문제는 새 인재를 영입하지 않고 이전 사람을 계속 쓰는 건데 새로 유입할 생각 자체가 없는 거라고 한다. 영국 보수당의 경우에는 당의 존립을 위해서 원로들이 스스로 젊은 인재들에게 양보하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고 평했다.
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의 판세에 대해 비관적으로 전망했는데, 선거 직전이 될수록 당의 상태가 안 좋아지자 대구경북 이외에는 완전히 말아먹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지방선거는 그의 예상대로 되었고, 자유한국당은 엄청난 내홍에 휩싸이고 바른미래당은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현재 그가 방송에서 하는 말들을 본다면 방송이니 좋게 포장해줄 뿐이지 이대로 가면 보수정당은 가망이 없다 이 한마디로 요약 가능하다.[36]
2018년 12월, 한 언론 기사에 따르면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일식집을 개업했다. # 또한 유튜브 방송에도 뜻이 있다고 한다.
개업 후 인터뷰에선 자영업자 되보니 인건비 부담을 실감한다며 문재인 정부의 임금 상승 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근데 장사는 오픈빨인지 잘 된다고...[37] 그 외 문재인 정부도 적폐청산 운운하더니 되레 적폐가 쌓이고 있는 것 같다며 이러면 참여정부 2기가 아닌[38] 자신들이 비판하는 이명박근혜 정부 2기가 될 것이라고 디스했다.
이명박에 대한 인간적인 감정이 아예 없어진 건 아닌지 이명박의 몸이 안 좋다고 하자 보석을 받아들이는 게 어떠냐고 말했다. 다만, 종합건강검진을 거쳐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본인 말처럼 현역 정치인으로서의 삶은 끝났지만, 보수 진보 할것없이 그의 팬층은 탄탄한 편이었고 그래도 나름 잘나가는 정치 평론가로 제2의 인생을 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5. 사망
2019년 7월 16일 자택에 유서를 써 놓고 나간 것을 부인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과 소방당국은 드론과 구조견 등을 동원해 수색한 끝에, 오후 4시 25분 경 서대문구 홍은동 북한산 자락길 부근에서 숨진 정 전 의원을 발견했다. #[39] 오후 2시 30분 홍은동의 한 아파트 인근 북한산 자락 산책로까지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차량으로 이동 후 내렸다고 한다. #그는 사망 당일 오전 11시 30분부터 30여 분간 평소처럼 SBS 정치쇼 화요일 4부 코너 보수의 품격 코너에 정태근 전 의원과 함께 고정 방송 출연을 했었기에 당황스럽다는 반응이 많다. # 과거 2017년 TV조선 방송 강적들에 출연해 박근혜 5촌 살인사건을 주제로 이야기하는 도중에 이슈가 된 사건들 말고도 의문사가 더 있으며 자신도 해당이 될까 봐 두렵다라고 발언하였던 것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부 커뮤니티 및 네티즌들은 기 사 댓글로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와 절친한 관계인 정태근 전 의원은 "(정두언 전 의원이) 오늘 밥 먹자고 했는데 내가 어머니께 간장게장 사줘야 해서 가야 된다고, 연락하겠다고 한 게 마지막 대화가 됐다"며 "그렇게 힘들면 밥 먹자고 하지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점심 먹었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하다"며 울먹였다. 그와 가까운 사이였던 김용태 전 의원도 "지난 주에 안부 전화를 할 때만 해도 극단적 선택을 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
정두언 전 의원이 부인과 함께 운영하던 일식집은 한동안 영업을 중지하기도 했다. #
다만, 생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4선 도전에서 낙선하고[40] 아내와 이혼[41]을 했고, 낙선의 아픔 등으로 인해 우울증을 앓았으며 자살시도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관련 인터뷰. 측근에 따르면 우울증 극복을 위해서 몇 시간씩 산행을 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었다고 한다. #
정두언 전 의원 측근인 김용태 전 의원이나 정태근 전 의원, 그리고 정치계에선 라이벌이었지만 이후 방송 활동 등을 통해서 친해진 정청래 전 의원도[42] 현장에 찾아가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정청래와 함께 판도라에 자주 (반고정으로) 출연했고 정두언의 고등학교 동창 절친이자 대학교때까지 친구였던 탁석산 박사는 다음 판도라 방송에 출연해서 10대 시절부터 정치인이 되기까지 정두언을 추모[43]하는 이야기를 했다.
SBS 정치쇼 프로듀서겸 DJ이기도 한 이재익 프로듀서는 2019년 7월 17일 방송 전 오프닝을 통해 어제 방송의 추억을 되새기며 애도를 표했으며 이재익 프로듀서는 이날 울음을 꾹 참고 진행을 계속 이어가면서 방송 이후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찾아갈 예정이라고 한다.
여야 정치권도 한목소리로 애도를 표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
유서의 전체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김용태 전 의원에 따르면, 유서에는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고 한다. 타살의 흔적이 전혀 없기에 유족의 요청에 따라서 부검 없이 장례 절차를 밟을 거라고 한다. # 유서에 대한 내용이 언론에 좀 더 공개됐는데, 가족에게 미안하고 사랑하며 장례식은 조용하게 치르고 돌아가신 어머니 곁에 화장해서 묻어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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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7월 17일 빈소 |
윤석열 당시 서울중앙지검장과 정몽준 전 의원,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 강기정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도 조문했다. 조국 민정수석비서관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한때 같은 친이계였던 친이계 좌장 이재오 자유한국당 상임고문도 빈소를 찾아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가 출연했었던 MBN 시사교양 프로그램인 판도라에서 MC를 맡고 있는 배우 김승우도 빈소를 찾아 조문하면서 끝내 눈물을 터트리기도 했다. 또한 같이 단짝처럼 방송에 같이 출연했었던 정청래 전 의원은 장례기간 내 빈소를 찾았고, 본인의 SNS에 정두언 전 의원을 위한 헌시를 남겼고, 상심이 컸던 탓인지 발인이 끝날 때까지 모든 방송출연을 불참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이재오 전 의원과 자신의 변호사를 통해 고인의 죽음에 대해서 안타깝다는 심경을 밝혔다. 정두언 전 의원과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안타깝다고 했다. 이 전 대통령은 현재 조건부 보석 상태이기 때문에 조문은 못하는 대신 근조 화환을 빈소에 보냈고, 유족들은 이 전 대통령의 화환을 영정 옆에 놓았다. 이 전 대통령 뿐만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화환 또한 영정사진 옆에 놓였다. #
2019년 7월 19일 오전 발인이 엄수되었으며, 화장 후 유해는 오후 1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분당메모리얼파크에 안장되었다. #, #
3. 유쾌한 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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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9월 정두언의 희망 메시지, 4집 음반발매 쇼케이스 출처 |
정치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재주가 많은 사람이기도 했다. 노래를 잘 해서 서울대 재학 시절에는 'Spirit of 1999'라는 록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했으며, 각종 모임에서 사회를 맡거나 분위기를 주도하는 역할을 많이 맡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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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언 ― 희망 (2009) |
4집 음반까지 낸 가수이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곡으로 2009년에 발표한 ‘희망’이라는 곡이 있다. 이 밖에도 친분이 깊은 또래 가수 설운도와 함께 무대에 올라 함께 노래를 부른 적도 있다. 동료 국회의원들의 행사나 각종 행사에 축사 대신에 축가를 불러주었다고 한다. 다만, 조용필이나 송창식처럼 노래를 잘 부를 자신은 없었기 때문에 전업 가수로 활동할 생각은 접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기로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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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언 ― 걱정말아요 그대 (2016년 제20대 총선 선거송) |
그리고 자신의 선거 음악도 손수 부르기도 했다.
5공화국 하에서 공직 생활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고, 사표를 쓸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다면 사표를 내고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다 어릴 적부터의 꿈이던 영화배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라 일주일간 휴가를 내고 KBS 탤런트 공채시험에 지원하기도 했다. 서류 전형, 면접, 카메라 테스트, 연기 테스트, 최종 면접 순의 전형에서 수많은 경쟁률을 뚫고, 4단계 최종 시험까지 합격했지만 아내와 가족들의 만류로 인해 스스로 포기하고 만다. 정계 은퇴 후에는 연기자로 전업할 마음이 있었는지, 뮤지컬 학원, 연기학원 등을 다니고 직접 감독들도 찾아가 봤는데 뽑히진 못했다고 한다.
부모님이 신촌에서 당구장을 운영했었는데, 덕분에 당구 실력도 좋았다고 한다. 정두언, 나를 키운 건 8할이 당구.
4. 여담
-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를 만든 것으로 유명한 정율성이 정두언 의원의 친척(큰 삼촌뻘)이다. # 하지만 가까운 친척은 아니었던지라 원래부터 알았던 것은 아니고, 2005년에 광주에서 정율성 국제음악회가 열렸을 때 정율성이 아버지의 가까운 인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
- 정태근 전 의원과 여러모로 행적이 비슷해서인지 '정브라더스'라고 묶어서 불리기도 한다. 2017년에는 정봉주 전 의원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정봉주의 정치쇼' (이후 진행자는 김용민, 이재익으로 바뀜)에 <정두언, 정태근의 보수의 품격>이란 코너로 타계 전날까지 출연했다. 이 외에도 남경필 당시 경기도지사 및 김용태 의원과 친한 사이였으며, 그래서인지 바른정당 입당은 거부했지만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한 남경필은 곁에서 도와주기도 했다.
- 바른정당 대선 경선 과정에서 남경필을 도와줄 때, 이명박 前 대통령 예방 관련 대화가 오가자, 정두언이 남경필에게 이명박을 예방해 봤자 좋을 게 없다면서 예방하지 말라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45]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남경필은 보수정당계 출신임에도 이명박을 예방하지 않았다. 또한 남경필은 이명박을 예방한 유승민을 구태정치라면서 비판하기도 했다.
- 유승민 전 의원과 정치적으로 대립하기도 했지만, 사적으로는 괜찮은 사이였다고 한다. 유 의원은 2019년 7월 17일 그의 장례식장을 가장 먼저 찾기도 했다. 같이 2002년 대선 이회창 캠프에서 일하면서 친해졌다고. 둘은 서울대학교 76학번 동기이기도 하다. 유승민은 경제학과, 정두언은 무역학과(이후 국제경제학과로 개칭)로 그 당시엔 학과가 달랐지만, 95학번부터는 두 과가 합쳐져서 경제학부로 통합되어 단일 학과가 되었고 동문회도 같이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따지고 보면 같은 학과 출신인 셈이다. 하지만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는 서로가 친이, 친박계로 갈라져 피 튀기는 설전을 벌였지만, 사적인 감정이 아니었기에 쿨하게 서로를 인정했다. 박근혜 정부 당시, 유승민 국방위원장의 후임 국방위원장이 정두언이었으며, 두 명 모두 KF-X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국정교과서 문제에도 서로의 입장이 비슷했으며, 심지어 2015년 친박에 찍혀 유승민이 날라간 원내대표 사태 때는 왕조시대의 잔재가 남아있다며 매섭게 비판했다. 물론 바른미래당 쪽 사람들은 정두언 전 의원이 유승민 의원에 대해서도 꽤나 쓴소리를 날려대어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서로 사적인 감정 때문에 싸우는 관계는 아니었다. 그의 별세 소식을 접한 유승민 지지자들 역시 무척 애석한 마음을 표하며 추모하였다. 발인이 끝난 뒤 유승민은 “20년 가까이 같이 정치를 해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가니 정말 가슴이 아프다”며 “고인이 하고자 했던 정치를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20년 함께 정치했는데 허무" 故정두언 배웅한 유승민.
- 유진룡 전 장관과도 절친이라고 한다. 본인과 비교하면서 본인의 절친이지만 존경하는 친구이며, 본인 같은 사람보다는 10배는 뛰어난 인물이라 밝혔다. 그러면서 박근혜 정권이 유진룡 전 장관을 뽑은 건 잘한 일이라 했지만 그 뒤로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면서 아쉬움도 표출했다.
- 국민대학교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를 했는데, 당시 지도교수(!)가 이후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도 맡는 김병준 국민대학교 행정정책학부 명예교수였다고 한다. 참고로 둘은 3살 차이다.
-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논란이 되었던 연극 환생경제에 출연한 바 있다. 번데기(서울 세종로 제1대학 교수) 역이 바로 정두언 당시 의원이었다. 다만 이후 정두언 전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평하는 것을 보면 깔 땐 까지만 칭찬할 땐 칭찬도 하는 그런 수준이었다.
- 2018년 연말 들어 유시민 작가가 정계에 복귀한다는 식으로 주장해서 언론의 정치, 시사면에서 이름이 많이 언급되기도 했다. 이에 일부 보수 지지층에겐 왜 가만있는 잠룡을 여권 대권주자로 띄우냐고 원성을 사기도 했다. 그런데도 꾸준히 언급하는 거 보면 본인 나름대론 주관이 있는 모양. 다만 유시민 작가 본인이 정계 복귀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고, 주변 사람들도 딱히 어떤 반응이나 입장, 신호가 없는데 왜 정두언 전 의원이 그것도 성향이 다른 진영 사람을 먼저 나서서 운을 띄우는 건지 의아하다는 반응들도 많았다. 뭔가 당시엔 유시민 작가한테 꽂힌게 있었던 모양.
- 문재인 정부 시절 주중대사직을 제의받은 바 있다. 정태근 왈 주중대사직 제안이 왔는데 어찌할까 묻자 장관직도 아닌데 주중대사 가서 뭐할거냐고 조언해줬더니 그 말을 따랐는지 결국 제안을 거부했다고 한다. 만약 이때 제의를 수락했다면 이후 민주당 인사로 활동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이후 얼마 안가 안타깝게도 생을 마감하고 만다.
- 정두언 의원의 1주기를 맞아 유튜브 채널이 개설되어 몇몇 인물들이 추모했다. 2021년 7월 2주기에 맞춰 정두언 의원의 사후 출판기념행사를 준비했으나 코로나 사태로 인한 거리두기 단계 강화로 중단되었다. 1주기와 2주기 추모행사를 준비했던 정태근 전 의원의 말에 따르면 원래 출판회와 추모 모임에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 김형오 전 국회의장 등이 참석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
5. 저서
연도 | 출판사 | 제목 |
2001 | 한울(한울아카데미) |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 |
2006 | 지식더미 | 최고의 정당 최악의 정당 |
2011 | 나비의활주로 | 한국의 보수, 비탈에 서다 |
2011 | 나비의 활주로 | (개정판)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 |
2017 | 21세기북스 | 잃어버린 대한민국의 시간 |
2021 | 블루이북스미디어 | 정두언, 못다 이룬 꿈[46] |
6. 선거 이력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8080><tablebgcolor=#fff,#1c1d1f><tablewidth=100%><rowcolor=#fff><rowbgcolor=#808080>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2000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서대문 을 |
|
31,304 (42.68%) | 낙선 (2위) | |
2004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
|
39,734 (45.59%) | 당선 (1위) | 초선 | |
2008 |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 36,931 (59.07%) | 재선 | |||
2012 |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
[[새누리당| |
35,380 (49.39%) | 3선 | ||
2016 |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 33,852 (39.87%) | 낙선 (2위) |
역대 선거 벽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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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총선 (서울 서대문구 을) | 17대 총선 (서울 서대문구 을) | |
18대 총선 (서울 서대문구 을) | 19대 총선 (서울 서대문구 을) | |
20대 총선 (서울 서대문구 을) | }}}}}}}}} |
7.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2000 - 2002 | 정계 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02 - 2003 | 탈당[47] |
|
2003 - 2012 | 복당 |
[[새누리당| |
2012 - 2016 |
당명 변경 정계 은퇴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16 - 2019 |
탈당[48] 사망 |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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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계륜 의원직 상실 (2006.2.10.) * 송파 갑 맹형규 사퇴 (2006.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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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
나경원 사퇴 (2011.9.28.) * 동대문 갑 장광근 의원직 상실 (2012.3.15) * 성북 을 김효재 사퇴 (2011.8.24.) * 노원 갑 현경병 의원직 상실 (2011.6.10.) * 은평 을 문국현 의원직 상실 (2009.10.22.) * 강남 을 공성진 의원직 상실 (2011.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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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처와는
20대 총선 낙선 이후
이혼했다고 알려져 있다.
[2]
2018년 초에
재혼했다.
#
[3]
박사학위논문 : 행정종합정보화시스템의 수용에 작용하는 정보격차의 영향 분석 : 서울시 공무원의 태도를 중심으로 (2004).
[4]
높은뜻광성교회 안수집사다.
[5]
4장의 앨범을 냈다. 다만 노래 실력은 아무래도
음악 전공자가 아니니만큼 프로 가수까진 아니고 그럭저럭 하는 수준. 젊을 때는 꿈이
연예인이어서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상태에서도
개그맨 시험이나 탤런트 시험을 봤었고 가요제 같은 대회도 나갔었는데, 다 탈락했었다고 한다. 정계 은퇴 후에 라디오 방송이나
판도라 같은 TV 방송에서 스스로 밝혀서 알려진 사실. 이후 자신이 어릴 적부터 모친이 항상 원해왔다던 소원인
고위공무원 임용을 위해
행정고시 공부에 몰입하였다고 한다. 그의 사후, 고교와 대학 시절 친구였던 철학자 탁석산 박사가 밝힌 바로는 연예인이 정말 되고 싶어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며 괴로워 했었다고 한다.
[6]
남가좌, 북가좌, 홍은, 홍제3동 지역이다. 후술하겠지만, 2000년
16대 총선 때 서울 7권역(
마포구,
서대문구,
은평구)에 출마했던 6명의 한나라당 후보들 중 유일하게 낙선했을 정도로 서대문구 을은 당시만 해도 서울에서
관악구 을과 더불어
보수정당의 양대
험지 중 상험지였다. 그런 곳에서 보수정당 소속으로 3선이나 거머쥔 것이다.
[7]
당시 정두언을 비롯해
정태근,
남경필,
정병국 등 한나라당 소장파들은
박근혜보다는 그나마
이명박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지지했었다.
[8]
사실 낙선 직후에도 한번 자살 충동이 있었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후술되어 있지만 이혼 등 가정사까지 얽혀 모든 게 공허하고 삶의 의미를 잃은 것 같았다고...
[9]
한국에서
YS 이후의 소위 온건~개혁 혹은 진짜 보수라 자칭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이념과 어긋남에도 판세 때문에 독재자를 추켜세우거나 아님 아예 언급을 안 하고 외면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두언은 죽는 날까지 독재는 보수가 아니며 심지어 보수의 적이라고까지 직설적으로 표현한 인물이었다. 그는 죽음의 시점에서 나를 바라보면 굳이 비굴하거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하며 살 이유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10]
이 때문에 그의 가족은 정성태 전 국회부의장을 큰아버지라 불렀다고 한다.
[11]
권영수,
조태용,
최재형,
김대기,
최성준,
박상옥,
최중경,
조원동이 동기생이다.
[12]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시절에도 이따금씩 자신의 노래를 담은 음악 앨범을 만들었는데, 마지막으로 낸 앨범이 2009년에 낸 4집이었다.
[13]
고려대 동창은 아니다.
이재오는
중앙대학교를 나왔다(대학원은 고려대를 졸업). 다만 1964년
6.3 항쟁에 같이 참가하여 투옥된 적이 있다.
[14]
정두언 본인이 처음으로 만들어낸 말이라고 한다.
[15]
혹은 정권 인수위원회 시절
국세청을 통해서 이명박의 비리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다가 걸려서 거세당했다는 썰도 있다.
정봉주 전 의원이
나는 꼼수다에서 주장했던 내용. 훗날인 2018년, 본인도 어느 정도 인정을 했다. 국세청에 관련 자료를 요청했는데 당시엔 MB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관련 자료를 살펴보고 방어논리를 만들려고 했다가, 이를 의심한 MB에게 쓸데없는 짓 한다는 잔소리를 들었고 이후 사이가 많이 틀어졌다고 한다.
[16]
빈말이 아니라 당시 한나라당 주요 인사들이 대부분 방관하거나 아니면
박근혜 캠프에 있을 때, 처음부터 MB와 함께 한 정말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17]
포항시 출신 5급 이상 중앙공무원 친목단체. 포항시 출신인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숱한 의혹의 대상이 되었다.
[18]
보통 정치인들 사건은 중형이 아니면 1심에 징역이 나와도 판사가 법정구속되지 않게 하는 경우가 많고 대법원까지 가서 유죄확정이 되어야 구속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례적으로 법정구속되었다. 거기다가 재판도 구속재판치고 길어졌기에 정두언은 실질적으로 억울하게 나온 징역 시간의 대부분을 살아야 했다. 일단 정두언이라는 인물 자체가 친박계 입장에서는 괘씸죄로 찍힌 인물인데다가 이상득을 위시했던 친이계 역시 그의 거침없는 행보에 거리를 두던 상황이었다.
[19]
참고로, 함께 기소되었던
이상득은 징역 1년 2개월의 유죄가 확정되었다.
[20]
이는 기존에
신촌의
연세대학교나
이화여자대학교 등을 중심으로 한 대학가로 인해 더 진보적이라고 여겨졌던
서대문구 갑 지역구에서 새누리당 후보가 기록한 득표율보다도 더 낮은 득표율이었다. 다만 서대문구 갑 지역구에는
국민의당 소속 후보가 출마하지 않아 중도보수 성향을 지닌 지역 유권자들의 표가 덜 분산된 탓도 있었다.
[21]
마포구는 특히 더 심하다. 진보 성향의 유권자가 많은 대학가 지역이기 때문.
[22]
서대문구, 마포구,
은평구,
경기도
고양시, 경기도
파주시로 다니는
서울특별시 시내버스 번호를 말한다.
[23]
그리고 경기도까지 포함한 7권역 12석(서대문 마포 은평 2석씩, 고양 4석, 파주 2석)은
심상정을 제외하고 모두 더불어민주당이 차지하게 되었다.
[24]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유치한 가재울뉴타운은 그로부터 12년 후에 그의 낙선을 불러온 한 원인이 되었다. 뉴타운 건설로 인해 민주당 지지성향이 강한 1970~80년대생 부부들이 해당 지역에 대거 입주했기 때문.
[25]
17대 총선에서
서대문구 갑 지역구에 출마한 바 있다.
[26]
정두언과 함께 이명박의 남자로 불리던
이재오는 이 선거
은평구 을 지역구에서 정치 신인이자 심지어 군소정당(
창조한국당) 후보였던
문국현에게 1만 표 정도 차이로 져 낙선하고 만다. 물론 문국현이 의원직을 잃어서
2010년 재보선에서 다시 당선되긴 하지만.
[27]
나머지 한명은
용산구의
진영 의원. 그리고 20대엔
민주당으로 이적.
[28]
서대문구 갑 선거구를 비롯하여 은평구 갑을, 마포구 갑을 모두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되었는데 서대문 을만
새천년민주당이 당선될 정도로 서대문구 을은 서울에서도
민주당계의 성지였다.
[29]
참고로 서울에서 동일 지역구 연속 4선에 성공한 20대 기준 현역 의원은 진영이 유일한데, 진영도 20대 총선에서는 당을 옮겨
더불어민주당으로 4선을 한 것이기 때문에 서울에서 같은 당으로 같은 지역구에서 내리 4선을 한 사례는 아직 없다. 이후엔 불출마했고... 21대 기준으로도 가능성이 있던
김성태,
추미애,
박영선은 다 개인사정이나 장관직 등 이런저런 이유들로 불출마했고,
김용태도 출마 지역구를 바꿨기에 서울의 같은 지역구 내리 4선은 한동안 보기 힘들게 되었다. 이후 2024년
22대 총선까지 가야,
19대 총선부터 내리 4연속 당선된
더불어민주당 의원 4명이 그 타이틀을 가져가게 된다. (
안규백,
서영교,
박홍근,
이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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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도 방송에서 본인은 정치계를 이미 떠났음을 여러 번 언급했다.
[31]
그래서 이둘 콤비를 사사건건에선
정정당당으로 부른다.
[32]
즉, 무효로 인식되게끔.
[33]
뉘앙스상
비자금 등의
검은 돈이다.
[34]
공개방송에서 얘기한 바로는 영포라인이 정치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각종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마구잡이로 사찰했다고 한다. 요컨대 본인들의 청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바로 사찰해서 털어버리는 짓거리를 저질렀으며 이명박 전 대통령은 소위 정부 비판 세력 척결의 기치 아래 이런 막장짓거리를 방조했다고. 이 과정에서 정두언 전 의원도 사찰당했으며 이건 정권을 잡은 것이 아니라 이권을 잡은 것이라며 회의감을 느꼈다는 투로 말했다.
[35]
일단 감안해야할 점이 사건 당시 시점인데 지금
이명박의 비리는 대부분 대통령 시기 벌어진 일로 그 규모가 더 거대해질 수밖에 없지만 정두언이 언급한 사건은 선거전의 일로 정두언의 말마따나 선거 판도를 바뀔 수 있을 만한 일이기에 당시엔
경천동지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36]
그리고 정두언이 생전에 남겼던 이 말은 결국
2020년 총선에서 어느 정도 현실화가 되어버렸다.
[37]
여담으로
정청래 전 의원을 비롯한
판도라 팀들도 가게에 방문해 축하해줬다.
[38]
문재인 대통령이 막혀있다며
노무현 전 대통령과 비교하기도 했는데, 노 전 대통령이 남 얘기는 안 듣고 자기 얘기만 하는 것 같지만 결국 보면 남의 얘기도 반영되어있는 반면(
이재오는 노무현과
청와대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사학법 논쟁에 대해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이 원하는 대로 해주라고 여당인
열린우리당 당대표에게 요구하는 걸 보고 그런 걸 고려할 여유가 있다고 평했다), 문 대통령은 경청은 열심히 하지만 결국엔 그 말 안 듣고 자기 생각대로만 간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
[39]
경찰이 휴대전화 위치 추적을 했지만 정두언 전 의원의 휴대전화가 정 전 의원과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경찰이 정 전 의원을 발견하는 데 시간이 걸린 것으로 알려졌다.
[40]
선거에서 3연승을 했다가 한 번 낙선한 것이 뭐가 큰 일이냐고 할 텐데, 정치인이라는 직업이
연예인처럼 대중들로부터의 인기와 지지로 먹고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떨어졌다는 것은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잃었다는 얘기기 때문에 그만큼 공허감과 우울감이 매우 크다.
[41]
이 때 이혼한 전처가 이화익갤러리의 대표이자 한국화랑협회 회장인 이화익이다.
[42]
2017년부터 현재까지 가깝게 지낸 인연으로 사석에서도 자주 만났었다고 하며, 사고 발생 직후 사고 소식을 듣고나서 정두언의 자택을 방문했다. 두 사람 모두
MBN
판도라와
KBS1
사사건건 등에 매주 고정 패널로 출연하던 중이었다. 여담이지만 정두언의 지역구였던
서대문구 을과 정청래의 지역구인
마포구 을은
경의중앙선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다.
[43]
고등학생 때부터 미련하리만큼 착했고, 군복무에서도 초임 공무원 생활에서도 남들보다 특권받는 걸 싫어하고 남에게 베푸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고 한다. 본인이 재수생일 때도 본인 공부도 바쁜데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못하는 편이었던 다른 재수생 친구를 가르쳤고, 결혼한지 얼마 안 되었던 시기, 자기 부서에 알콜중독 수준이던 후배가 있었는데 그 친구를 걱정해서 알콜중독 안 걸리게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44]
2019년
7월 18일
황교안은
문재인
대통령,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심상정
정의당 대표와
청와대에서 회담을 지냈다. 회담을 마치고
문재인 대통령이 저녁 식사를 제안했는데,
황교안은 일정이 있어서 거절을 했다. 그 일정은 바로 정두언 전 의원 장례식 조문이었다고 한다.
[45]
참고로 남경필 역시 정두언 못지않게 MB 정권의 홀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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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출간, 동료 정치인과 기자들이 함께 책을 썼다.
[47]
공직 취임으로 인한 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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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