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7:07:35

미드웨이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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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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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 해전
The Battle of Midway | ミッドウェー海戦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의 일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BDs_and_Mikuma.jpg
CV-8 호넷 항공모함에서 출격하는 SBD-3 돈틀리스[1]
해전 종반인 1942년 6월 6일에 모가미급 중순양함 미쿠마를 공격하러 간 세 번째 공격대의 모습이다.
날짜
1942년 6월 4일 ~ 1942년 6월 7일
작전명
MI作戦 (MI 작전)
장소
미국령 군소 제도 미드웨이섬 인근 해상
교전국 [[틀:깃발|]][[틀:깃발|]][[미국|]]
지휘관 [[틀:깃발|]][[틀:깃발|]][[체스터 니미츠|]][2]
[[틀:깃발|]][[틀:깃발|]][[프랭크 잭 플레처|]][3]
[[틀:깃발|]][[틀:깃발|]][[레이먼드 스프루언스|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4]
[[틀:깃발|]][[틀:깃발|]][[클래런스 L. 팅커|]]†[5]
[[틀:깃발|]][[틀:깃발|]][[야마모토 이소로쿠|
야마모토 이소로쿠
]][6]
[[틀:깃발|]][[틀:깃발|]][[나구모 주이치|]][7]
[[틀:깃발|]][[틀:깃발|]][[야마구치 다몬|]]†[8]
결과
미국의 승리
영향
일본군의 공세 저지[9]
참전 부대 제16기동부대
제17기동부대
잠수함부대
미드웨이 수비대[10]
후방 경비대

연합함대 본대
제1함대
제2함대
제5함대
제1항공함대 등
전력 항공모함 3척[11][12]
전함 1척[13]
중순양함 7척[14]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7척
급유함 2척
항공기 365기




항공모함 4척[15]
순양전함 2척[16]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2척
급유선 1척
특설급유선 7척
항공기 264기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다수의 전투함
피해규모 항공모함 1척 침몰[17]
구축함 1척 침몰[18]
항공기 약 150기 손실
307명 전사


항공모함 4척 침몰[19]
중순양함 1척 침몰[20]
항공기 248기 손실[21]
3,057명 전사

1. 개요2. 서론3. 배경
3.1. 미군의 사정 -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다3.2. 일본군의 사정 - 칼 끝을 어디로 돌릴 것인가?3.3. 둘리틀 특공대
4. 전투 준비
4.1. 전초전 - "AF"가 어디인가?4.2. 일본군을 기만하라4.3. 승리병 - 일본 해군의 자만과 난맥상
5. 양군 전투서열
5.1. 미군5.2. 일본군
6. 전투
6.1. 전초전6.2. 미드웨이 기지 공방전
6.2.1. 일본군 기동부대의 기지 공습6.2.2. 미군 기지 비행대의 반격과 잠수함 노틸러스의 공격
6.3. 미군 항공모함의 행방6.4. 미일 기동부대 공방전
6.4.1. 미군 기동부대 공격대의 발진, 그리고 삽질과 낭패6.4.2. 미 뇌격기 부대의 축차공격과 전멸
6.4.2.1. 호넷 제8뇌격기대대의 공격6.4.2.2. 엔터프라이즈 제6뇌격기대대의 공격6.4.2.3. 요크타운 제3뇌격기대대의 공격
6.4.3. 미 급강하폭격기의 집중 공격, 그리고 운명의 5분6.4.4. 일본군 기동부대의 반격6.4.5. 미군 기동부대의 재공격
6.5. 해전 막바지
7. 정리8. 평가
8.1. 미국의 운8.2. 일본군의 패인
8.2.1. 잘못된 전훈 해석8.2.2. 학습능력 부재8.2.3. 승리병8.2.4. 공격 올인, 방어 등한시
8.3. 해전 이후
8.3.1. 미국8.3.2. 일본
8.3.2.1. 일본의 인지부조화
8.3.3. 여담
9. 이야깃거리
9.1. 요크타운9.2. 후치다 미츠오9.3. 일본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했다면?9.4. 미드웨이, 그리고 하와이 상륙전이 벌어졌다면?9.5. 그 밖의 이야깃거리들
10. 미디어
10.1. 영화, 애니메이션10.2. 서적10.3. 게임

[clearfix]

1. 개요

1942년 6월 4일부터 6월 7일까지 미드웨이 제도 주변에서 벌어진 일본 제국 해군 미 해군의 해전이다.

여러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미국이 압도적으로 승리했으며[22], 이를 기점으로 정점을 달리던 일본 제국의 전력은 점점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미국은 귀중한 전력인 항공모함을 1척 손실하는데 그친 반면[23] 일본은 항공모함 4척이나 손실한 것[24][25] 외에도 이 전투로 중부태평양에서 일본의 진격을 멈춰세웠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한 뒤에 이어지는 과달카날 공방전에서 미국이 일본에게 지속적인 피해를 강요하여 또다시 승리를 거두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실로 중요한 전투라 할 수 있다. 이 해전은 동부전선의 모스크바 공방전과 유사하게 수세에 몰렸던 태평양 방면의 미군이 숨 돌릴 시간을 얻고 전쟁의 판도를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너무나 유명한 해전이지만 실제 전투 진행 기록은 미군, 일본군 양측의 기록과 증언 등에서 많이 엇갈린다. 특히 과거에 사료의 발굴과 해석이 덜 이루어졌을 때 역사가와 저술가들이 극적인 상상력을 더해 잘못된 기술을 한 경우가 많았고, 이는 아직까지도 해전의 올바른 이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미드웨이 해전은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매우 지명도가 높은 전투이지만, 이 해전의 정확한 실상이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확정된 것은 전투가 끝난지 수십년이 지난 후이다. 현재에는 오류의 상당부분이 바로잡혔으나 여전히 미드웨이 해전을 다룬 미디어에는 극적인 재미를 위해 과장과 왜곡이 섞인 경우가 많다.

2. 서론

<rowcolor=white> 승전을 전하는 미국의 선전영상[26]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의 결정적인 승리 중 하나로 꼽힌다.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군에게 계속 밀리는 처지였던 연합국에게 있어 이 전투는 일본 해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가함으로써 전력을 다시 재보충 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다고 여겨진다. 실제로 미국의 에식스급 항공모함은 미드웨이 해전이 1년이 지난 1943년에서야 생산이 되기 시작했으며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 같은 비교적 작은 함선들도 최소한 반년을 기다려야 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승리가 없었다면 연합국은 전력 보충 전까지 최소한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본 해군에게 휘둘릴 수도 있던 것이다.

일본 제국 둘리틀 특공대와 같은 본토 폭격이 다시 발생하는 것을 막고, 피지, 사모아, 하와이를 공략한다는 2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교두보를 마련할 생각으로 "MI" 로 명명된 미드웨이섬 공략 작전을 감행하고자 했다. 일본은 이 작전을 통해 미 해군에게 진주만 공습과 같은 결정적 타격을 입혀 미국의 사기를 꺾어버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미국의 기만책에 걸려들어 미드웨이 공략에 대한 사전정보가 유출되어버렸고, 이에 부대를 잘못 배치하는 등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미국이 이 유출된 정보들을 이용해 일본의 공격 위치와 날짜까지 정확히 파악하여 매복하고 기다렸다는 것이다.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4척,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 3척이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일본은 이 전투에서 진주만 공습에도 참가한 적이 있는 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 4척의 항공모함을 잃는 뼈 아픈 패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보통 일본이 4척의 항공모함을 잃은 것이 가장 유명하지만 그외에도 중순양함 미쿠마를 잃었으며 미국은 항모 1척과 구축함 1척을 잃는 데에 그쳤다. 미국은 이러한 손실을 막대한 산업력으로 복구할 수 있었던 반면 일본은 전력 회복을 하지 못한 채 이어진 과달카날 전역에서도 패배하고 만다.

이 전투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해전 중 하나로 꼽힌다. 물론 미드웨이 해전을 미군의 반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분기점으로 보기는 어렵다. 전투 이후로도 연합국은 한동안 일본 해군에게 열세인 처지였지만 그럼에도 이 전투는 파죽지세로 밀려오던 일본 해군을 주춤하게 만들고 전역을 어느 정도 안정화시키며 과달카날 전역부터 시작되는 반격을 준비할 시간을 벌어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3. 배경

3.1. 미군의 사정 -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다

태평양 전선 개전 당시 태평양 전선에 참여한 미국(American), 영국(British), 네덜란드(Dutch),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n)로, 줄여서 ABDA 연합군은 사정이 좋지 않았다. 미국은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전쟁에 뛰어들었지만 전쟁준비를 다 마치지 못했고[27] 영국 영국 본토 항공전에 이어 북아프리카 전역과 지중해 전역이 전개되면서 병력을 보낼 여유가 없었다.[28] 호주는 원체 군사력과는 거리가 먼 나라였고, 네덜란드는 이미 본토를 나치 독일에게 대규모 공습과 폭격을 당해 사실상 없는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태평양 전쟁 초기 연합군은 중일전쟁으로 많은 경험을 쌓은 일본군을 상대로 전선을 유지하기는커녕 계속 후퇴하는 상황이었다.[29]

ABDA 연합군은 필리핀과 자바 해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며 사실상 와해됐다. 인도차이나 영국군은 일본군에 항복했고, 필리핀 바탄 반도에 고립된 미군 필리핀군 역시 일본군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해 영국군은 인도까지, 미국-오스트레일리아 연합군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이 있는 멜라네시아 지역까지 방어선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수적으로 가장 적었고 달리 오갈 데가 없었던 네덜란드군 자바 해전에서 연합군 해군의 아시아 함대가 박살나고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격파되자 사실상 연합군에서 이탈했고, 잔존 네덜란드 군인들[30]은 연합군 내에서 지분과 자체 지휘권[31]을 유지하지만 곳곳으로 흩어져서 연합군형태로 맞서싸울수밖에 없었다.

또한 인도양에서 벌어진 실론 해전으로 인해 잔존 영국 해군력이 한동안 동아프리카 뭄바사 항으로 도망을 치고 인도양 동부의 제해권이 일시적으로 일본군에게 떨어지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미국의 아시아 함대는 해체되었고 사령관인 토마스 찰스 하트 대장은 본국으로 귀환해야 했다. 심지어 자바 해전에서 연합군 해군을 지휘했던 카렐 도어만 제독까지 전사한 상태였다. 이렇게 태평양에서 일본에 대항할 국가는 사실상 미국만이 남았지만 미국조차 사정이 녹록치 않았다.

진주만 공습에 의해 피해를 본 태평양 함대는 전력의 중핵이었던 전함을 대부분 상실했다. 침몰한 전함들을 다시 건져 올려 진주만 독에서 수리 중이었지만, 전함은 수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 군함이었기에 8척 중 완전히 침몰한 2척을 제외한 6척은 미드웨이 해전이 한참 지난 1943년~1944년 즈음에야 다시 전선에 배치되었고[32], 그나마 피해가 덜했던 콜로라도급 전함 USS 메릴랜드는 1942년 6월부터 전열 복귀했으나 느린 속도 때문에 항공모함과 함께 움직이지 않고 미 서해안을 보호하는 백업함대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진주만에 없었던 덕분에 피해를 보지 않았던 USS 콜로라도는 개장을 마친 뒤 훈련을 하고 메릴랜드처럼 미 서해안에 있었고, 막 취역한 USS 노스캐롤라이나는 미 동해안에 있었다. 미국 정부는 이런 상황을 조금이라도 만회하고자 우방국이면서 당시 중립국이었던 칠레에 특사단을 보내, 칠레 해군에서 유일한 전함이며 14인치 포 10문을 장착한 알미란테 라토레(Almirante Latorre)를 구매 혹은 대여하고 싶다고 제안했으나, 칠레는 자국에 하나밖에 없는 금쪽같은 전함을 내주길 거부했다.

물론 전후 통계자료에서 알 수 있다시피 미국의 생산력은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으나, 전쟁 초기에는 무기 생산라인을 구축하고 그것을 실전에 투입하여 유의미한 전력으로 활용하는 데까지는 1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주간항모'라는 별명이 있었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생산량을 보여줬던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이 미드웨이 해전 이후 반년 정도 지나서야 생산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정규항모인 에식스급 항공모함도 1943년에서부터 실전 투입되기 시작했다. 가용할 자원이 많아도 제일 중요한 시간이 없는 관계로 이 당시 미국 태평양 함대의 전력은 정말 위기였던 것이다.

또한 외형적인 전력손실과 더불어 태평양 함대의 전반적인 사기도 땅에 떨어져 있었다.[33] 스스로 제일이라 자부하다가 자신들이 한 수 아래라고 얕보던 적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절름발이가 되었던 것이다. 태평양 함대 소속 고위장교들은 이제 남은 건 퇴역이나 한직으로 밀려나기뿐이라며 낙담하였고, 지휘부의 이러한 분위기는 자연스레 아래로 번지기 마련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반전한 사람은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새로 부임한 미합중국 해군 대장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었다. 니미츠는 태평양 함대 소속 장교들을 문책하지 않고 전원 유임시켰다. 당시에도 미 태평양 함대는 미 해군 내 엘리트들이 모이는 곳이었으므로 그들을 대신할 인재들을 다시 모으기는 쉽지 않았고, 진주만 공습의 경우 태평양 함대에게 책임을 물을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다.[34]

한편, 니미츠 제독은 당시 전함이 전부 침몰하고 남은 항공모함의 기동 부대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이를 잘 활용한다면 생산량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되기 전에도 일본 해군 항모 기동부대와 어느 정도 맞붙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과는 별개로 당장의 전력차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고, 전장의 주도권은 일본이 쥐었으므로 일본이 알아서 나서주지 않는 이상, 니미츠가 일본의 항모기동부대를 잡을 기회는 없었다. 미국은 남은 가용전력을 모두 모아 도박을 걸 수밖에 없었고 만약 거기서 태평양 함대가 전멸한다면 그 다음 일본의 목표는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였을 것이다.

미 해군이 할 수 있는 대응은 일단 보유한 항모 기동부대로 이제는 일본군 손에 넘어간 마셜 제도, 웨이크 섬, 마르커스 섬에 공습을 가하는 정도였다. 이 일련의 공습작전은 실전경험 축적 및 앞으로 있을 일본군과의 본격적인 전투에 대비하여 사기와 공격의지를 끌어올리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장의 전략적인 효과는 미미했기에 태평양 함대 내에서도 일본군은 미군의 공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분석하였고, 일본군 수뇌부 역시 미군의 공격 자체를 사소한 발악 정도로 치부하였다. 그러나 패배주의에 빠져서 곧 회담장으로 기어나올 것처럼 보이던 미국이 자꾸 일본 영토에 공습을 가하자 심기가 불편해있었고 이는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미드웨이 해전의 시초가 되는 중부 태평양 재공략을 기획하는 계기가 되었다.

3.2. 일본군의 사정 - 칼 끝을 어디로 돌릴 것인가?

남방작전이 예상 외로 큰 성공을 거두자 일본군 수뇌부에서는 이후의 진로를 두고 혼란이 빚어진다. 애시당초 태평양 전쟁은 미국에 기습적으로 큰 타격을 입히면 협상 테이블에 나올 거라 여기고 시작한 전쟁이었으나, 정작 미국을 협상에 이끌어 내는 방법을 두고 일본군 육군, 일본군 해군, 그리고 연합함대 수장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생각이 완전히 달랐다.[35]

중국 전선을 최우선으로 두던 육군은 남방 전선을 비롯한 태평양 방면에 더 이상 발을 걸치고 싶지 않았으므로 점령지의 방어를 강화하고 미군의 공격을 계속 막아내면 미국이 알아서 떨어져 나갈 거라는 수세적 전략을 주장했다. 반대로 일본 해군은 자신들이 확보한 전략적 우위를 바탕으로 공세에 나서면 미군이 확실한 타격을 입을 것이란 계산을 하고 있었으며 그 일환으로 호주 침공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호주 침공은 보급과 전력 동원에 문제가 있었으므로 육군에게 손쉽게 반박당했고, 이에 해군에서는 뉴칼레도니아-피지-사모아를 점령하여 호주와 미국 간의 연락선만 끊어 놓는 것으로, 호주를 고립시키는 전략으로 수정한다.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진주만 공습이 끝난 직후의 회의에서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들이 모두 건재하기 때문에 이들이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이후 전술된 미 항모에 의한 일련의 도서 지역 공격은 이러한 야마모토의 생각을 더욱 굳게 하였다. 이에 야마모토는 남방작전이 종료되는 즉시 중부 태평양 방면에서 미 해군에 공격을 감행하여 미국 항공모함을 끌어낸 다음 이들을 격멸한 뒤 강화협상을 한다는 안을 제시했다.[36]

하지만 야마모토 제독의 계획을 두고 일본군의 어느 누구도 그 계획에 동의하거나 지지를 표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야마모토의 원래 구상은 호주 침공이나 수세 전환이 아니라, 지상병력까지 동원해 미 해군의 본거지인 하와이까지 가서 미 태평양 함대의 잔존 항공모함을 소탕하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육해군 수뇌부는 항공모함의 전략적 가치를 높게 보지 않았다. 항공모함은 항공전을 위한 수상 활주로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세에 써먹을만한 물건은 아니었으며 일본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상 중요한 병기는 아니라고 여겼다. 당시만 해도 해상전 공세에 쓰이는 함선은 당연히 전함이었다. 따라서 일본 육해군 수뇌부는 미국 태평양 함대의 전함들이 진주만 공습으로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한동안 신경을 안써도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니 야마모토의 제안은 굳이 가서 싸워줄 필요도 없는데 일부러 찾아가서 공격하는 멍청한 행동이라고 여겼다.

결국 육해군 어느 쪽의 전략과도 일치하지 않는 야마모토의 구상은 육군과 해군 모두에게 외면받았다. 야마모토의 의중에 말려들지 않으려던 대본영 내 해군과 육군 수뇌부는, 1942년 1월 10일 열린 회의에서 하와이 공격 대신 피지/사모아 공격이 더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야마모토 혼자 이 결론을 뒤집을 수는 없었으므로 일단 연합함대는 피지/사모아 공격계획 입안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야마모토의 의중은 계속 하와이 공격에 있었다.

1942년 2월 20일, 윌슨 브라운 제독 지휘하의 미 항모 렉싱턴에서 발진한 미군기가 남동 솔로몬 제도의 일본군 주요거점이었던 라바울에 공습을 가하여 주둔 일본군 항공세력이 큰 타격을 입는 일이 발생했고 3월 10일, 뉴기니아 북부의 라에와 살라마와에 상륙하던 일본군을 다시 렉싱턴과 요크타운에서 발진한 미군기가 공격하는 일이 일어났다. 4함대 장관으로 해당지역 일본해군을 지휘하고 있던 이노우에 시게요시 제독은 해당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함대증파를 요청했고 이노우에의 요청과 해군 수뇌부의 의도를 종합해 호주와 미국 간 연락선을 차단하는 내용의 MO작전과 FS작전을 합의하기에 이른다.

MO 작전은 뉴기니 섬에 있는 뉴기니 섬 최고의 요충지 겸 항구 겸 비행장인 포트모르즈비(Fort Moresby)를 점령하는 게 목표인 작전으로 모르즈비의 앞의 두 글자를 따 와서 MO작전이며 일본에서는 모호작전(モ号作戦)이라고도 호칭했다. 포트 모르즈비는 호주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요충지로, 이곳을 점령한다면 동부 뉴기니에서의 연합군 교두보를 완전히 뺏어버리고 호주 북부를 직접 위협할 수 있게 된다.[37]

FS 작전은 솔로몬 제도 남단의 피지(Fiji)와 사모아(Samoa), 뉴칼레도니아를 공략하는 작전 계획으로 피지와 사모아의 앞글자에서 따 와서 FS작전이다. 작전 목표는 호주와 하와이를 잇는 보급선을 차단해서 호주를 영연방에서 이탈시킨다는 거창한 목표였다. 두 작전 모두 호주를 고립시키고 호주가 연합군의 동남아 방면 반격의 교두보가 되는 것을 봉쇄하여 자신들의 점령지를 공고히 하겠다는 의도가 컸다. 1942년 3월 13일, 일본 육해군 수뇌부는 공식적으로 FS 작전을 승인한다.

일이 이렇게 진행됨에도 야마모토는 여전히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한 발 물러나서 하와이 대신 미드웨이를 공격하는 방안으로 선회하긴 했지만, 진주만 공습으로 얻은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이용하여 이 계획을 어떻게든 밀어붙였다. 결국 진주만 공습 때처럼 자신의 직위를 걸고 벼랑끝 전술을 구사하고 나서야 마지못해 승인을 얻었으며, 군 내부에서는 야마모토의 독단에 반발하는 기류가 역력했다.
연합함대장관의 의견에 대해서는 매우 반론을 하면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나가노) 총장이 야마모토가 그렇게 말한다면 한번 시켜보자라고 말했다. 그렇게 (미드웨이 작전을) 결정하게 되었다. 진주만 작전이 성공했으니까. 그러냐, 그럼 야마모토한테 맡겨볼까 해서 (작전을) 결정한 것이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래서 울어버렸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미드웨이 작전을 하면 큰일난다 라고 말하면서 울어버렸다.
미요 카즈나리, 해군반성회 도중

내부 반발이 큰 작전을 강행한데에는 대가가 따랐다. 해군 수뇌부가 구상한 MO작전을 위해 제5항공전대를 제공해야 했고, 육군의 요구에 따라 알류샨 열도 공격도 같이 진행해야 했다.[38] 이렇게 MI작전으로 불리는 미드웨이 공격이 결정되었으나, 육해군 수뇌부 모두 탐탁치 않아했던 작전인 만큼 야마모토의 연합함대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이 작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작전의 주역이 될 항모기동부대의 지휘부에서도 반발이 있었으나 그 지휘관인 나구모의 정치적 입지가 약했던지라 어쩔수 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양군 수뇌부를 확실하게 끌어들일 더 이상의 뾰족한 수가 없던 야마모토 입장에서는 그저 답답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미국의 결정적인 행동이 상황을 반전시킨다.

3.3. 둘리틀 특공대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군과 국민들의 사기 고양을 위해서는 상대방에게도 진주만 공습 혹은 그에 준하는 상징적인 계기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며, 이에 군 상층부들에게 적극적으로 도쿄 폭격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군 수뇌부는 틈만 나면 불려가 빨리 방법[39]을 강구하지 않는다면서 루스벨트에게 한 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항공모함에서 육상 폭격기를 발진시키면 도쿄 공습이 가능하다는 구상이 등장했고, 해당 안건은 승인된 후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제임스 둘리틀 중령을 중심으로 한 둘리틀 특공대가 결성되어 성공하는 데에 이르렀다.

물론 중형 쌍발 폭격기 16대로 수행했던 둘리틀 특공대의 폭격이 진주만 공습과 비교한다면 대단한 물리적 피해를 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에게는 진주만 공습의 울분을 해소하고 적국의 수도에 폭탄을 떨어트린 첫 신호탄이 되었으며, 일본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얻어 맞고 혼란에 빠졌다.[40] 이는 폭격 그 자체보다는 벌건 대낮에 미군의 폭격기에게 일본 본토, 그것도 황궁이 있는 수도 도쿄가 대놓고 공격당했다는 상징적인 사실 때문이다. 특히 이것이 진주만 공습 때와 마찬가지로 항공모함을 동원한 공습이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진주만 공습 작전을 입안하고 성공시켰을 때 "앞으로 2년 동안 미 해군은 태평양 밖으로 못 나온다"라고 호언장담했던 일본 해군은 불과 4개월 만에 둘리틀 특공대의 폭격을 맞으면서 일본 육군과 대본영에 이 지경이 되도록 뭐하고 있었냐는 온갖 비난에 시달리며 해군에 대한 기대와 평판은 한순간에 밑바닥까지 추락해버렸다.[41]

해군이 비난당한 것은 특히 해상 경계가 철저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는데, 사실 해군은 둘리틀 특공대를 발견했었다. 국적 불명의 쌍발기 발견이라는 보고가 올라왔지만 기종이 PBY 카탈리나 수상기가 아니며, 미 해군은 카탈리나 외에 쌍발기를 운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시했던 것이다. 즉, 소극적으로 대응한 점은 비판받을만 하지만 기본적으로 일본이 미 해군에 대해 가진 정보와 일치하지 않았기에 무시했던 것이다. 그 당시 알고 있던 정보를 바탕으로 보자면 나름 합당한 판단을 내린 것이었고 항공모함에서 육상폭격기를 띄운다는 발상 자체가 당시엔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다. 막상 이 작전을 입안한 미군 수뇌부들 조차도 폭탄을 만재한 폭격기가 짧은 활주로에서 이륙하다가 추락하기라도 하면 대폭발이 일어날텐데 이런 위험천만한 작전이 가능하기는 한건가라는 의구심을 가졌을 정도로 도박에 가까운 작전이었다. 항공모함을 위시한 항공기 해상전의 개념 자체가 이 태평양 전쟁에서 처음 정립되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는 백데이터가 전혀 없었고, 그때만 하더라도 지상포격은 전함에서 담당하고 폭격기라면 근처 비행장에서 날아오는 것이 정석이라서[42] 항공모함에서 육상용 쌍발 폭격기를 띄운다는 발상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입장에서는 도쿄 해안선에 전함이 출몰한 것도, 근처 섬이 점령당한 것도 아닌데 본토에 폭격이 날아오니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일본 입장에서는 '천황이 거주하는 황궁이 있는 수도 도쿄가 대놓고 폭격당했다'는 점이 컸는데, 본토에 폭격이 일어났다는 건 '인계의 신'인 천황의 옥체가 폭탄에 상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육해군 대립이 심화된 일본 군부에서 이는 육군이 해군을 물어뜯을 최상의 건수였다. 즉, 해군은 이 사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시 한순간에 천황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멍충이들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이다.[43] 만약 미국이 똑같은 방법으로 일본 본토를 다시 공격한다면 해군은 육군을 주축으로 한 반대파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을 판국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해군 수뇌부는 태평양 함대를 공략해야 한다는 야마모토 제독의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야마모토 제독은 '미 항공모함은 큰 골칫거리다'는 판단하에 미드웨이 공격을 제안한 것이었으나, 이전까지는 아무도 항공모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무시되었던 것이다. 허나 '항공모함'에 '육상 폭격기'를 싣자 일본 본토까지 폭격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항공모함에 대한 평가는 180도 달라져 버렸다. 이렇게 되자 야마모토 제독은 혜안을 가지고 미드웨이 공격 안건을 제시한 셈이 되었고 수뇌부는 그 선견지명을 무시한 까닭에 이 험한 꼴을 당했다는 여론이 세워졌다. 이미 이전에도 일본 해군에서는 거의 선지자급으로 존경받던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말이 사실이 된 이상 체면 문제가 걸려 있던 해군에서는 야마모토 제독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대본영에서도 군말 없이 이 작전을 승인해 주었다.

더불어 육군에서도 정예 연대를 편성하여 상륙 부대로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거기에 더해서 해군이 요구한다면 항공모함의 기지인 하와이 그 자체를 점령하는 작전에도 동의하였고, 이에 따라 2사단과 7사단, 53사단이 하와이 침공을 위한 훈련에 들어갈 정도로 일본군은 이 공습에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육군이 갑자기 이렇게 해군의 작전에 협조적으로 나온 이유는 육군도 도쿄 공습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쿄 공습의 책임은 당연히 해상경계에 실패하고 미 항모기동전단의 접근을 허용한 해군에게 있지만, 도쿄 상공에서의 방공전을 실패한 책임은 육군에게도 일정 부분 있었던 것이다.

한편 미군은 일본군의 다음 공세를 대비하면서 일본군을 기만하고 정보를 캐내기 위해 두 번의 기만책을 시도했는데, 일본군이 매번 걸려드는 바람에 대박이 터진다. 곧 이어지는 문단에서도 후술하겠지만, 극비라고 숨기면서 진주만 공습을 준비해왔던 이전에 비해 이번에는 대놓고 공개하다시피 할 정도로 보안이 엉망이었다.

4. 전투 준비

4.1. 전초전 - "AF"가 어디인가?

1942년 5월 20일 야마모토 제독이 발신한 통신문이 미국 태평양 함대에서도 감청되었다. 일본 해군은 모든 통신문을 암호화하여 전달하고 있었고, 설령 감청당하더라도 해독하지 못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미 IBM에서 개발한 장치를 이용하여 암호문을 해독하고 있었고[44], 그 결과 일본군의 다음 공격 목표가 'AF'란 사실을 입수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AF'가 어디냐는 점이었다. 일본군은 미군이 장악한 지역을 A로 시작하는 두단어의 약자로 표시하였는데 진주만의 경우 'AH'였으며 'AF'의 경우 진주만의 북쪽에 있으며 비행장이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과 참모부는 3월에 2식 대정이 프렌치 프리게이트 솔에서 급유를 받고 진주만을 공습했을 때 AF에서 떠오른 정찰기를 조심하라는 경고를 감청하여 AF가 미드웨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모두가 이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본토의 높으신 분들 중에서는 하와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고, 남태평양의 어느 섬 또는 알류샨 열도를 지목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육군에서는 샌프란시스코라고 주장하면서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었다.

이때 미드웨이라고 짐작은 했으나 증거가 없었던 로슈포르 대령[45]의 태평양 함대 암호 해독반이 계책을 냈다. 당시 미드웨이섬에는 도청의 우려가 없는 해저 케이블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해저 케이블만을 사용하여 통신하면 일본이 통신이 하나도 없는 것을 의심하고 케이블의 존재를 눈치챌까 봐, 일부러 도청을 당할 것이 뻔한 무선을 통하여 알려져도 위험하지 않은 내용을 정기적으로 교신했다. 이 정기 무선 통신을 이용하여 미드웨이 기지에서 약속된 통신을 보내도록 하고, 일본군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감청하자는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미드웨이의 급수 시설이 멀쩡했음에도 불구하고 미드웨이 방어군에게 ' 해수 담수화 장치가 고장나서 식수가 부족하다'란 내용의 거짓 교신을 무선 '평문'으로 보내도록 해저 케이블을 통해 지시하였고, 그런 줄도 모르고 이 떡밥을 덥썩 물어 버린 일본군은 이틀 뒤에 'AF에 식수가 부족함, 추후 해수 담수화 장치가 필요할 것'이란 무전을 날렸다. 이 무전은 성공적으로 감청됐고 다음 공격 목표가 미드웨이란 사실이 판명됐다.[46]

당시 미드웨이는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최전방 요충지였으며 사실상 미 해군의 또 다른 육지항모라고 해도 무방했다. 특히 동태평양에는 이렇다 할 섬이 없기 때문에 미드웨이가 무너지면 그 다음은 바로 하와이였고, 하와이가 무너지면 바로 오스트레일리아나 미국 서해안이었다.[47] 이에 그 이전부터 요새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미드웨이가 공격지로 판명된 이상 더 많은 물자를 쏟아부어 방어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니미츠 제독은 미드웨이섬에 주둔한 해군과 해병대 지휘관에게 필요한 물자들의 목록을 보내도록 지시하고는 그보다 훨씬 많은 물자를 보내고, 거기에 당시 중령이던 방어 지휘관들에게 격려 차원에서 대령 계급장을 보냈다.[48] 여기에 일단 굴릴 수 있는 비행기는 싸그리 긁어모아 버팔로, 와일드캣, 빈디케이터, B-17 등의 항공기도 있는 대로 보냈다. 비행장 크기가 섬의 1/4을 차지하는 작은 섬에 항공기 124대가 북적거렸고, 대공포에다 지뢰까지 떡칠해 버렸던 탓에 설사 미 함대가 전멸한다 해도 미드웨이섬을 점령하기는 힘들 것이란 예상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준비상황이 100%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당장 위에도 나왔다시피 미 육군은 미국 서부 해안으로 올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로 만일을 위해 대부분의 폭격기들을 손에 꼭 틀어쥔 채 미 해군이 요구했던 수량에 미치지 못하는 숫자만 미드웨이로 보냈다. 각 군에서 급히 긁어모은 조종사들은 태반이 전투 경험은 커녕 비행시간조차 적었던 풋내기들이었고, 배치된 전술기들 상당수는 이미 그 당시에도 성능 부족과 노후화가 확연한 기종들이었다. 미드웨이 비행장의 전투기 세력 다수를 차지했던 버팔로는 이미 일본 주력기 제로센에 비해 열세임이 증명되었고, 급강하폭격기인 빈디케이터는 조종사들에게 '바이브레이터'라고 놀림받을 정도로 기체의 노후화가 심해서 날개에 비닐 테이프를 붙여야 할 정도였다. 그나마, 당시 최신기종인 F4F 와일드캣이나 TBF 어벤저[49]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그 수량이 너무 적었다.

4.2. 일본군을 기만하라

한편 태평양 함대의 항모 기동부대는 남태평양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산호해 해전이 끝난 틈을 타 니미츠 제독은 일본군을 기만하기 위해 두 번째 떡밥을 던졌다. 당시 보급 문제로 진주만을 경유하느라 산호해 해전에 참여하지 못한 윌리엄 홀시 제독에게 모든 항공모함을 이끌고 일본군의 툴라기 기지로 진출하여 전력을 노출시키라는 지시를 내린 것. 그 의미를 이해한 홀시 제독은[50] 충실히 그 명령을 수행했고, 일부러 정찰기가 있는 데까지 가서 대놓고 모든 병력을 보여 줬다. 더불어 남태평양에서 작전을 마친 기동부대가 도착하자마자, 니미츠 제독은 3일 만에 보급과 정비를 마치도록 한 후에 바로 미드웨이로 출격시켰다.

한편으로는 일본군의 주요 정찰 거점에 구축함을 파견하여 일본의 비행정을 통한 정찰을 방해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비행정을 이용하여 미군의 동향을 정찰하고 있었고, 이들이 중간에 잠수함을 만나 급유를 받는 장소들이 있었는데 여기에 구축함이 버티고 있으니 정찰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다. 그 결과 일본군은 태평양 함대의 모든 항공모함이 남태평양 지역에서 작전 중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기반으로 작전 계획을 수립했고, 전장에서 미국 항공모함을 발견할 때까지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작전 준비를 마치고 미드웨이에 파견된 미국 함대는 정규 항공모함 3척, 중순양함 9척, 경순양함 4척, 구축함 32척, 잠수함 19척이었다. 이 전력은 태평양 함대가 최대로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게다가 알류샨 열도 지역에도 병력을 배치해야 했고 테오볼드 소장이 지휘하는 제8기동부대에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13척을 할애해야 했기 때문에 실제로 미드웨이에 투입된 병력은 훨씬 더 적었다. 특히 가장 중요한 항모는 3척 뿐이었다. 개전 시점에서 미 해군이 가진 정규 항공모함은 총 7척이었는데 이 중 호넷, 요크타운, 엔터프라이즈를 제외하면 렉싱턴은 산호해 해전에서 격침, 와스프는 지중해 몰타에 있었고 새러토가는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서 브레머튼에서 수리 겸 개장을 받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레인저는 대서양 함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일본군과 비교하면 명백한 전력 열세였기 때문에 니미츠 제독은 영국의 태평양 방면 항공모함 3척 중에서 1척을 빌려오려고 접촉을 했는데, 막상 영국은 일본군의 다음 목표가 인도양 부근일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기에 "항공모함 빌려줘서 인도양을 상실하면 댁들이 책임져 줄 거요?"란 반응이 돌아와 못 빌렸다. 렌드리스에 의지 중이던 영국이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실론 해전의 패배 등으로 인해 인도 상실에 대한 영국의 공포가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태평양 지역 식민지들에 대한 지배력을 잃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돈줄인 인도까지 잃게 된다면 나치 독일과의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경제상황은 그야말로 파멸로 치달을 가능성이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51]

개전 이래 항공모함 작전을 지휘해 오던 홀시 제독이 피부병의 악화로 병원에 후송되는 바람에 프랭크 플레처 제독이 총 지휘를 맡게 되었고, 홀시 제독이 지휘하던 기동 부대는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이 지휘하게 됐다.

4.3. 승리병 - 일본 해군의 자만과 난맥상

그야말로 승리를 위해 두뇌 풀가동해 영혼까지 끌어모아 있는 것 없는 것을 다 갖다바친 미군과 달리 일본군은 승리병에 머리 끝까지 도취되어 자만한 상태였다.
파일:역시 일본 해군은 강해.jpg
역시 일본 해군은 강해 짤방으로 자세한 내용은 항목을 참조할 것.
나는 당시 '휴우가' 함장이었는데, 도상연습이 있어서, 미국통이라는 이유로 적색군(적군)의 총지휘관역이 됐어. 도상연습에서는 미군은 상당히 항속거리가 긴 비행기(육상기)로 색적(정찰)하지. 일본군은 함상기뿐. 미군은 일본군의 행동을 손바닥 위에 있는 것처럼 알 수 있었으니 하고 싶은 걸 얼마든지 할 수 있지. 그런데 내가 도상연습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것을 그대로 판정하면 사기에 악영향이라는 이유로 극도로 경미한 피해로 처리되어 작전 성공이라고 판정되었어.
― 상기 워게임의 적군 지휘관이었던 마츠다 치아키(당시 이세급 전함 휴가 함장)의 증언 # 아카이브

특히 작전 수립 단계에서 미드웨이 공격 계획 작성 전에 실행한 모의전에서 그 문제가 나타났다. 5월 1일 첫 번째 모의 전투는 미드웨이 해전을 예언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실제 상황과 흡사하게 전개됐다. 미해군 역할을 하는 홍군측 항모기동부대가 현실의 미 해군과 똑같이 미리 하와이에서 출항, 미드웨이 동북쪽에서 매복해 있다 일본 함대를 기습하여 미드웨이 해전 초반처럼 일본측 3척의 항공모함이 격침된 것이다. 그러자 연합함대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미 해군은 일본 해군의 미드웨이 공격에 대해 사전 정보가 없으니 그런 (매복) 전술을 사용할 수가 없다고 주장하여 격침된 함대를 원상복구 시켜 버렸다. 거기다가 이것을 지켜보던 야마모토는 우가키의 주장대로 홍군 함대가 미드웨이 공격 이후 하와이에서 출항하게 하였다.

그 다음 날 모의 전투에서 적군은 미드웨이 기지의 모든 전력을 발진하여 아카기와 카가가 집중 공격을 받고 격침되어 버린다. 그러자 '배 한 척이 폭탄을 이렇게 한꺼번에 얻어맞을 리가 없잖아'라는 우가키의 주장으로 결과를 아카기 3발 명중, 소파 및 카가 격침으로 고쳐 계속해서 모의전을 진행했다. 여기서 설상가상으로 이후 벌어진 뉴 칼레도니아 해전 모의전에선 우가키 본인이 격침시켰던 카가를 부활시켜 작전에 참여시켰다.

미드웨이 기지의 항공기들은 일본 해군 함대에 전혀 피해를 입히지 못했으므로 이런 발로 굴린 시뮬레이션도 결과적으로 맞기는 했다. 다만 실제 전투에서 문제가 된 것은 미드웨이 기지에 이어 공격을 개시한 미 해군의 항모였고, 이 모의전도 결국 미드웨이의 공략 자체는 성공했으나, 몇몇 함이 연료 부족으로 좌초되는 등 상당히 볼썽사납게 끝이 난 모양. 근데 '실전에서는 이렇게 되지 않도록 하자' 한 마디로 끝냈다고 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앞선 모의전 결과들이 진짜로 똑같이 일어난 것을 감안하면 일본군 측에서 지나치게 자신들을 과신하고 있었던 것.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무리한 모의전을 진행했는지는 불명이나, 당시 미드웨이 공략을 좀 더 뒤로 미뤄야 한다는 반대파들[52]이 있는 상황에서 미드웨이의 조기 공략으로 전쟁을 빠르게 끝내야 한다는 야마모토 제독의 주장을 밀어주기 위해서가 아니었겠냐는 것이 주요 추측이다. 여기서 더 얼쩡대면 동시에 너무 많이 벌려놓은 전선과 그에 따른 병력 분산 때문에 작전의 진행 자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

일단은 아카기의 피격탄을 바꾼 후에 당연히 실제로 9발을 맞으면 어쩔 거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일본으로써는 그런 식으로 항공모함을 잃는다면 이길 도리가 없으니 이 워게임은 의미가 없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런 상황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즉,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도 해당 상황이 실제로 발생하면 대응할 방법이 없으니 그냥 생각하지 않겠다는 셈. 일단 위의 만화처럼 어이없게 바꾸지는 않았고 아래에서도 반발이 꽤 있었던 것이 정설인데, 반응이 어쨌었든 결국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을 무시했다는 점은 바뀌지 않는다. 워게임에서 항공모함이 폭탄 9발을 맞고 침몰해 작전이 완전히 박살나는 암울한 상황에 빠지더라도 어떻게든 그에 대응하는 우발계획(contingency plan)을 생각해내는 것이 지휘관으로서 기본자세인데[53], 지휘관인 나구모든 사실상 항공작전의 총책임자인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건 해당 우발사태 발생시 그냥 답이 없다는 식으로 넘어간 것은 나태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한편, 이 워게임 사례는 일본이 항공모함 한 척의 손실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전쟁 수행 역량이 부족했다는 의미도 된다. 진주만 기습이라는 대성공으로 승리를 따내어 제해권을 빼앗았음에도 불구하고 항공모함 한 척이라도 운 나쁘게 박살나면 그냥 망해버리는 작전을 통해서만 미드웨이 점령 시도가 가능했을 지경이니, "이렇게 항공모함을 잃는 상황은 생각할 의미도 없다"는 판단은 역설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54]

한편 이러한 워게임 단계서부터의 나태함에 더해, 작전 입안부터 속행까지 일본군은 보안 의식이란 개념을 말아먹은 듯한 행보를 보이고 다녔다. 진주만 공습 때의 엄청난 철통 보안을 지켰던 그 일본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출항을 앞둔 승조원들이 "우리는 미드웨이 공격합니다" 식으로 떠들고 다녀 어렵지 않게 정보를 캐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야마모토 제독마저 아예 무선으로 모든 지시를 내렸고, 심지어 군함들 간에도 무선 통신에서도 미드웨이를 대놓고 떠들고 다녔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어떤 군함에서 이번 작전이 끝난 이후 승조원들의 편지 주소를 어떻게 해야 되냐고 묻자 다른 군함에서 미드웨이라고 답변한 일까지 있었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굳이 AF 낚시가 아니었어도 작전 목표를 안 들키면 그게 더 이상한 판.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수준이었는지, 워싱턴이나 영국군이 "비열한 쪽발이들이 페이크를 치고 있다"면서 니미츠 제독을 압박했을 만큼, 상식적으로 기만 작전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대놓고 정보가 흘러 나올 리가 없을 터였다.

물론 애초에 송출한 것 자체가 문제지만, 통신들을 평문으로 보낼 정도로 일본군이 미쳐버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주만에 버금가는 치명적인 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암호문으로 통신하는 것은 최소한의 보안 조치라고 하기도 힘들 만큼 보안에 신경써야 했는대 상대가 암호를 해독할 것을 우려해 보안을 강화하긴 커녕 그냥 방치 상태로 둔 것이다.

당시 미군은 정보 분야에 투자를 엄청나게 한 결과 일본군의 암호(전략암호 D, 미 해군 명칭 JN25b)를 80~90%를 해독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함정 함장보다 더 작전 개요를 파악할 수 있었다. 미드웨이 작전 직전에 일본군이 암호를 바꾸기는 했지만, 미군의 정보국은 일본군의 암호 교신 패턴을 거의 파악하고 있어서 미드웨이 해전 중 일본 해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55]

일본군은 MI작전에 참가하는 전력을 4개의 부대로 나눠서 해군 중장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지휘하는 제1항공함대(각각 정규 항공모함 2척씩으로 구성된 제1, 제2항공전대를 묶어서 구성), 알류샨 열도 방면을 공격할 북방함대, 미드웨이 상륙을 위한 침공부대, 야마모토 제독이 직접 지휘하는 본대로 편성했다. 일본 함대의 규모는 정규항공모함 5척, 경항공모함 3척, 전함 11척, 중순양함 13척, 경순양함 9척, 구축함 65척의 거대한 세력으로, 여기에 잠수함 22척과 수상기모함, 소해정 및 기타 보조 함정들을 합치면 거의 200척에 가까운 대함대였다. 특히 본대에는 당대 최강의 전함인 야마토도 포함되어 있었다.

문제는 각 부대들의 배치였다. 목표 지역의 거리가 있는 북방 함대를 제외하더라도 부대를 굉장히 넓은 간격으로 배치했는데, 이 때문에 이후 전투에서 어느 한쪽이 공격받고 있어도 나머지 전력이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실제로 항공모함들이 당한 이후에 전함으로 야간 공격을 시행하려고 했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서 미 해군을 따라잡지 못했다. 연합함대 수뇌부 및 야마모토 사령장관을 태운 야마토는 항공함대로부터 500km 후방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야마토의 통상 속도는 대략 27.5 노트 정도인데, 이 속도로 달리면 나구모의 항공함대의 위치에 도달하는데 10시간 가량이 걸린다. 2019년의 영화에서도 전투가 벌어지는 미드웨이 해역은 햇빛이 쨍쨍한데 야마모토가 있는 야마토는 폭우 속을 항진하고 있는 묘사로 표현하고 있다. 항공전이 예상되는 해역에 야마토를 이렇게 이끌고 나온 것은 전혀 쓸모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 200척에 달하는 함정 중 실제로 전투에 투입된 함정은 아무리 많이 쳐줘야 그 1/10 정도였다.

게다가 야마모토 사령장관을 비롯한 연합함대 수뇌부는 소위 지휘관 선두라는 전통[56]을 깨고 함대결전의 선두에 서야 했을 연합함대 기함 야마토를 전장에서 한참 떨어진 후방으로 빼냈다. 즉 실질적인 주력인 나구모의 제1항공함대를 현장에서 직접 지휘하려 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하와이 진주만의 지상기지에서 효율적인 지휘 연락체계를 구성한 체스터 니미츠 제독과 같은 시스템을 만들려 하지도 않았다. 이런 부분은 작전 지휘에서 비효율을 가져왔는데, 지휘에 필요한 통신 및 지휘 장비, 인원 구성 면에서 아무리 거대한 전함이라곤 하나 일개 함선인 야마토와 지상 기지의 효율성은 차이가 크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당장 이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미 해군의 경우 야마모토와 동급이라 할 수 있는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하와이 진주만의 지상기지에서 작전을 총지휘했고, 미드웨이 현장의 지휘는 그 현장에 있는 플레처와 스프루언스가 맡았다.

이런 상황에서 야마토는 지휘함 역할을 한다는 핑계로 현장에서 멀리 떨어지는 바람에 사실상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지휘부가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다지만 해전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지휘부에게는 가장 크고 튼튼한 전함, 미드웨이 당시는 야마토급 전함 기함으로 주어진다. 미군의 윌리엄 홀시 역시 아이오와급 전함 미주리를 기함으로 주력 항공모함 전단과 함께 행동했다. 스프루언스의 경우는 학창 시절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보냈다는 당황스러운 이유로 기함을 포틀랜드급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로 정했다가 카미카제를 맞아 기함을 구형 뉴멕시코급 전함 네임쉽 뉴멕시코로 옮기고, 또다시 카미카제 2연타를 맞고 홀시와 마찬가지로 아이오와급 전함 뉴저지로 기함을 옮기는 고생을 해야 했다. 27노트인 야마토는 항공모함과 동행하기엔 느리다고 생각했다면 후일의 오자와 지사부로처럼 항모를 기함으로 삼거나 혹은 공고급에라도 기함을 옮겨야 했다. 야마모토가 전함 무용론을 적극적으로 설파하던 항공주병론자였기에 이런 핑계의 설득력은 더욱 떨어진다.

후일의 과달카날 전역 같은 일회성 전투로 끝나지 않는 광범위 전역을 통제해야 하는 사례라면 상황이 또 달라지지만, 전술적 대규모 함대결전에 가까운 미드웨이에서는 지휘통신체계의 유지가 더 중요했고 그것을 위해서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제1항공함대와 동행할 필요가 있었다. 미군과 같은 효율적인 지휘체계가 도입되지 않은 일본군 입장에서는 함대결전급 대규모 전투를 현장에서 직접 상황을 확인 및 대응하며 지휘해야 하는 직책이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다. 정 지휘부가 위험에 노출된다는 점을 고려해야 했다면, 아예 니미츠의 태평양함대 사령부처럼 연합함대 수뇌부를 안전한 지상기지로 옮기고, 현장 지휘관인 나구모에게 플레처나 스프루언스처럼 충분한 재량권을 보장해 주고 야마토를 비롯한 전투함들은 항공모함과 함께 일선에 투입시켜야 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일본군은 이를 수행할 만한 지휘체계의 능력도 부족했고 그럴 의지도 부족했다.

문제는 그 뿐 아니다. 항공모함 기동 부대를 전함부대의 앞으로 내세운 것도 문제가 된다. 항공모함의 중요성이 대두된 후에도 존재한 전함 유효론의 핵심 논지가 항공모함을 전함이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었을 정도였고, 실제로 전함은 상대의 보조함들의 기동을 방해하는 막강한 존재감[57]을 유지했기에 항모 시대가 열린 후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중요한 위치를 유지했다. 전함이 괜히 바다의 움직이는 요새라 불린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국가의 존망을 건 중대한 작전에서 당연히 전함이 움직여야 했는데, 그 전함을 그냥 뒤에 처박아두고 허약하다고 비웃음 사던 항공모함을 냅다 전면에 내던진 것이다.

또한, 귀중한 주력함을 어이없게 날려버릴 수 있다는 것을 첫 대전쟁에서부터 입증해온 잠수함에 대한 대책도 전무하다시피했다. 당시 일본 해군의 어설픈 대잠 역량을 둘째치더라도, 애초에 고작 12척의 구축함으로 주력함 4척을 보호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상설이다. 전함의 부재 또한 잠수함 위협을 가중시키는데, 전함에 대잠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함이 존재하면 그 전함 때문에 상대의 함대가 잠수함의 침투를 지원하기 곤란해지며, 전함이 가진 압도적 존재감이 잠수함의 공격을 분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해군이 이렇게까지 느슨한 자세로 싸움에 임한 것은 진주만 기습 이후로 계속된 일방적인 전투를 거치면서 미군이 잔뜩 쫄아 있을 거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야마모토는 미드웨이가 점령되고 나서야 미 해군이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일견 어이없어 보이는 부대 배치 또한 이를 감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야마모토를 비롯한 일본군의 그 누구도 미군이 쫄기는 커녕 악에 받쳐서 ' 진주만을 기억하라! 12월 7일을 기억하라!(Remember Pearl Harbor! Remember December 7th!)'는 구호 아래 복수심을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는 걸 몰랐으며[58], 그래서 현재 역사가들은 이를 두고 승리병이라고 일컫는다. 당시 일본군의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자만심에 대한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안일함의 또다른 예로, 진주만 공습 당시 제1, 제2항공전대와 함께 제1항공함대를 구성했던 제5항공전대( 쇼카쿠, 즈이카쿠)가 이 작전에서 빠진 것을 들 수 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들 역시 제1항공함대 소속으로 MI작전에 참가했어야 하나, 작전 입안 중 MO작전에 2척의 항공모함을 지원하기로 함에 따라 둘만 먼저 전장에 나가게 된 것이다. MO작전은 산호해 해전으로 이어졌고, 이 전투에서 항모들이 저마다 피해를 입고 전열에서 이탈하게 되면서 결국 미드웨이 침공 불참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즈이카쿠의 경우 쇼카쿠와 달리 배 자체의 피해가 경미해, 함의 수리를 서두르고 큰 피해를 입은 기존 항공대 대신 다른 항공대를 배속시키면 충분히 작전 투입이 가능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과 그에 배속된 항공대를 쇼군 다이묘, 전함 주포마냥 일체화된 존재로 취급했기 때문에 항공대가 항공모함을 옮겨다니며 작전한다는 개념이 없었다.[59] 이러한 경직된 사상 덕에 여차하면 투입이 가능했던, 일본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항공모함 1척이 가장 중요한 전투의 순간에 발이 묶여 있었다.

설령 이러한 사상이나 절차상 문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야마모토 제독을 비롯한 군 상층부에서 전력을 최대한 끌어모으려는 생각이 있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즈이카쿠를 완편 상태로 참가시켰을 것이지만, 야마모토 제독을 비롯한 군 상층부는 즈이카쿠를 미드웨이 침공에 참가시키려는 그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심각한 피해를 입고 빈사 상태로 돌아온 요크타운을 긴급 수리해서 억지로 참전시켰던 미 해군의 행보와 매우 대조되는 장면이다.[60] 또한, 그때까지 일본 해군이 진주만 공습을 비롯한 서전에서 거둔 화려한 전과와 산호해 해전의 결과로 인한 MO작전의 실패가 하나같이 항공전력의 숫적 우세와 연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행보이기도 했다.

문제는 끝나지 않는데, 제1항공함대를 이끌고 있는 나구모 주이치 제독은 원래 항공전과는 전혀 무관한 수뢰전 전문가라는 것이다.[61] 그뿐 아니라 나구모 주이치는 함대파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그 때문에 조약파이던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충돌도 잦았다. 쉽게 말해 전문 분야도 아닌데다 상부와 알력을 빚고 있는 사람에게 일선 지휘를 맡겼다.[62] 그나마 나구모 본인도 항공전에 대한 자신의 식견 부족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공전과 관련된 야마모토의 명령에 대체로 순응하고 있었고, 일선에서 이뤄지는 항공작전에 대해서는 참모들의 의견을 거의 그대로 따라갔으므로 연합군이 미처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전쟁 초기에 대전과를 거둘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참모진의 능력이 중요해지지만, 나구모 옆에 있는 참모장 쿠사카 류노스케도 항공작전을 수립하고 진행하는데엔 능력이 모자랐던터라 실질적인 항공작전의 수립과 실행은 항공참모였던 겐다 미노루(당시 중좌)의 몫이었다. 그러나, 겐다는 당시 일개 중좌(중령)에 불과했기에 경험과 전체 전황을 조망할 식견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후대에서는 항공병과에 조예가 깊고 1항공전대를 육성한 경험이 있던 오자와 지사부로[63], 야마구치 다몬이 어떤 형태로든 기동함대 전체 지휘를 맡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곤 한다.[64] 하지만, 미드웨이 해전 당시 오자와는 기수가 나구모와 하나 차이밖에 나지 않았지만 남견함대 사령장관으로 부임한지 수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고, 야마구치 역시 연공서열에서 밀려 있었다.[65] 이들을 중장급 자리인 기동함대 사령관에 앉히는 거나 참모장으로 보내는 것은 연공서열을 중시하던 당시 일본 해군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간기부터 대표적인 항공주병론자이자 명목상 실전부대를 총지휘하는 직책인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라면 진주만이나 미드웨이처럼 자신의 목을 걸고 반 공갈로 강하게 추진한 작전에는 자신이 직접 참가해서 나구모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도 있었겠지만, 야마모토는 상술한 대로 보신주의에 젖어 전쟁 기간 중에는 자신이 쓸모없는 물건이라고 말하고 다녔던 전함에 틀어박혀 안전한 후방에서 턱짓으로 지시를 내릴 뿐이었다.

이렇게 일본 해군 안에는 불안 요소가 산재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이를 제대로 인식한 사람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5월 25일부터 각 함대들의 출항이 시작되며 MI작전의 막이 올랐다.

그러나 5월 말, 6월 초에 이르러 위에서 언급된 미군의 부산하고도 수상한 움직임(비록 항공모함을 직접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이 계속 포착되면서, 미군이 일본군의 의도를 알고 있다는 정보가 야마모토에게 전달되었다. 앞서 가는 나구모 제독 역시 이 정보를 알고 있었으나, 야마모토와 나구모 모두 이 정보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해당 정보를 접수한 본대에서 제1항공함대와 연락하려다가 "나구모 제독도 통신을 들었을 것이니 굳이 본대의 위치를 노출시킬 필요는 없다."는 진언을 받아들여 제1항공함대에 정보를 보내지 않았는데,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나구모 제독은 기습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무선 봉쇄 덕분에 이 정보를 듣지 못했으며 결국 이것이 커다란 패착이 됐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 결과로는 나구모 제독도 미군의 움직임을 이미 알았다는 것이 정론이다.

이런 어이없는 행동의 원인은, 미리 짜놓은 계획이 헝클어지는 것을 원치 않은 데다[66] 미드웨이와 하와이 사이에 미리 배치해 둔 잠수함들이 미 항공모함의 접근을 알려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 잠수함들은 이미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은 또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이 잠수함 부대의 지휘관은 미드웨이 공격 작전에 별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가 뒤늦게 잠수함 부대를 전개하는데, 제때 전개했어도 이미 늦었다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전개가 늦었다는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한 일본군의 실책은 확실한 전력 우세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 해군이 진주만 공격으로 인해 심대한 타격을 받고 전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진주만 공격이 끝난 직후 미 해군 태평양 함대에 남은 전력은 중순양함 몇 척과 소수의 구축함,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한 척을 포함한 항모 세 척 뿐이었다. 그러나 미 해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전력을 복구하기 위한 노력을 기했고, 결국 미드웨이 해전 시점의 미 해군 태평양 함대가 엄연히 주력함인 중순양함을 7척 확보할 수 있었던 반면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일본 해군이 미드웨이 작전의 선봉으로 세운 것은 순양전함 2척과 중순양함 2척이 전부였기에 전함의 존재를 고려하더라도 주력함 전력에서 오히려 열세였다.

일본 해군 연합함대가 확실하게 앞섰던 것은 항공모함의 숫자와[67] 함재기의 수 정도였는데, 해당 강점마저도 미드웨이 섬에서 발진한 육상기들의 존재로 인해 상쇄되었다.

5. 양군 전투서열

5.1. 미군

미국 해군 태평양 함대 - 항공모함 3척(엔터프라이즈, 호넷, 요크타운), 중순양함 7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7척, 잠수함 19척, 함재기 233기, 육군소속의 육상기 127기

5.2. 일본군

일본 제국 해군 연합함대 - 정규 항공모함 4척, 경항공모함 4척, 수상기모함2척, 전함 11척, 중순양함 11척, 경순양함 9척, 구축함 65척, 잠수함 11척, 함재기 248기, 수상기와 비행정 16기[70]

6. 전투

6.1. 전초전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만 하루전인 1942년 6월 3일 오전 8시, 일본은 알류샨 열도의 더치 하버에 공습을 감행했다. 그리고 애투 섬과 키스카 섬에 대한 상륙 작전도 병행됐는데, 미군의 저항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북방에 파견된 제8기동부대의 사령관 테오볼드 소장이 "일본 놈들이 알래스카를 공격할 것이다."라면서 부대를 엉뚱한 곳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양 측 모두 별다른 손해 없이 공습은 마무리되었다.

한편 이 소식을 전해들은 미 태평양 함대 사령부는 일본군이 자신들이 예측한 범위 내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 만족하고, 곧 미드웨이에 일본 함대가 출현할 것이므로 정찰을 강화할 것을 지시하였다.

6월 3일 오전 9시, 미드웨이에서 파견된 PBY 카탈리나 정찰기가 미드웨이에서 930km 떨어져 있는 해상에 있는 일본 제 2 수뢰전대를 발견했다. 이로서 미군은 일본 함대의 위치를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군은 미드웨이 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다음날 오전까지도 미군 함대의 위치와 미군 함대가 미드웨이 주변에 존재하는지도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했으며, 다음날 아침에야 미 함대의 존재와 위치를 파악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정보전에서의 성패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패를 가른 시발점이 되었다.

정찰기를 통해 일본 함대의 위치를 파악한 미군은 곧장 B-17 폭격기를 출격시켰다. 오후 4시경 일본 선단에 도달한 B-17 폭격기들이 일본 함대를 폭격하였으나 수평폭격의 한계로 인해 실패했다. 이어서 미군은 어뢰를 탑재한 PBY 카탈리나 비행정을 동원하여 새벽 1시경 다나카 라이조 제독의 수송 함대에 뇌격을 가해 수송선과 유조선에 피해를 주었다. 하지만 속도가 떨어지는 수준의 피해였으며, 작전 참여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6월 3일 오전 9시, 미드웨이 정찰기가 일본 함대를 처음 발견했을 때, 나구모 제독은 정찰기와의 접촉은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상황으로 여기고 그냥 보고만 올리고 말았으며 다음날 새벽에 미드웨이를 공격한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정찰을 통해 일본 함대의 위치를 파악한 미군 함대 지휘부는 일본 함대와의 교전 예상 지점으로 함대를 이동시켰고, 다음날 있을 대규모 교전을 대비하여 승조원들에게 만반의 준비를 시켰다.

6월 3일 미군이 하루 종일 4일 아침께 있을 해상전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일본 해군 수뇌부는 미군 함대의 존재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다음날 새벽 있을 미드웨이섬 공격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고, 미 함대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에 대해서는 전혀 예측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6.2. 미드웨이 기지 공방전

6.2.1. 일본군 기동부대의 기지 공습

내가 있던 진지 옆으로 폭탄이 떨어졌다.
정말 아슬아슬했다.
나와 함께 있던 해병대 대공포병들은 18~22살의 청년들이었다.
그렇게 침착한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
난 깨달았다. 승리가 우리의 것임을.
- 영화감독 존 포드[79]

6월 4일 새벽 3시를 기점으로 일본 해군과 미드웨이섬 방어군은 각각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새벽 4시, 미드웨이에서 전투 정찰 임무를 띤 미군 카탈리나 비행정과 F4F 와일드캣들이 이륙하여 일본 함대 수색에 나섰다.

새벽 4시 30분 드디어 일본 함대에서 제로센, 급강하 폭격기로 구성된 총 108기의 항공대가 이륙하여 미드웨이섬으로 출동했다. 제 1항공전대의 아카기는 지하야 다케히코 대위가 지휘하는 99식 함상폭격기 18기와 시라네 아야오 대위 지휘하의 0식 함상전투기 9기를, 카가는 함폭대의 총 지휘를 맡은 오가와 쇼이치 대위 지휘하 99식 함상폭격기 18기, 이즈카 마사오 대위 휘하 제공대 9기를 출격시켰다. 제 2항전에서는 히류와 소류 모두 97식 함상 공격기 18기, 0식 함상 전투기 9기를 출격시켰다.이때 나구모 제독은 노련한 조종사들을 후위로 뺀 다음, 경험이 적은 조종사들을 1파로 보냈다. 공격대 지휘관은 히류 97식 함상 공격대 지휘관 토모나가 죠이치 대위였다. 원래 공격대 지휘관은 후치다 미츠오 중좌[80]였으나 맹장염 수술을 받았기에 항공기 탑승이 불가능했고, 그 대신 자신이 신임하는 부하인 토모나가 죠이치 대위를 항공대 지휘관으로 추천했다.

한편 나구모 제독은 행방이 묘연한 미국 항공모함을 의식해 정찰기들을 발진시켰으며, 일부 정찰기는 함선 공격용 철갑탄을 무장하여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문제는 20기나 정찰에 투입한 미군과 달리 8기만 날렸다는 점이다. 그 넓은, 면적만으로 따지면 프랑스 국토만한 해역에서 (상대적으로) 쬐끄만한 미군 항공모함을 발견하기 위한 정찰기 숫자로는 매우 부족한 수준이었다. 한편, 토네급 중순양함 토네에서 발진시키기로 되어 있던 정찰기가 캐터펄트 고장으로 발진이 30분 늦어졌고, 이게 나중에 일본군이 패배하는 원인 중 하나로 꼽혀 왔었다.

새벽 5시 30분, 초계에 나선 미군 정찰기가 미드웨이로 날아가는 일본 해군 항공대를 발견했고, 그 25분 후에는 다른 정찰기가 일본 제1항공함대 제2항공전대(소류, 히류가 포함된)를 발견하여 보고를 올렸다. 이 당시 미국의 항모기동부대는 제1항공함대의 동북쪽 320km 지점에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총지휘관이던 플레처 제독은 일본의 항공모함이 다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곧 마음을 바꿔서 자신이 이끄는 CV-5 요크타운은 나머지 2척의 항공모함에 대한 예비대로 활용하기로 마음먹고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CV-6 엔터프라이즈와 CV-8 호넷을 동원하여 남서쪽의 일본 함대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스프루언스 제독은 약 250km 거리까지 접근한 후에 공격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함대를 이동시켰다.

6시가 되자 미드웨이의 레이더에서도 일본군 대편대가 탐지되었고, 미드웨이의 모든 폭격기, 공격기 전력들은 일본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곧바로 출격했다. 15분 후 일본군 편대가 미드웨이 인근 상공에 모습을 드러내자 미리 상공에서 대기중이던 F2A 버팔로와 와일드캣들이 기습적인 공격을 가하여 히류 함상 공격기 2기와 소류 97식 함상 공격기 1기를 격추시켰지만 곧이어 제로센들이 반격에 나섰다. 결국, 미드웨이의 전투기 부대는 편대장 팍스 소령을 비롯한 많은 조종사들이 희생당했고 살아남은 조종사들의 전투기도 엄청난 손상을 입는 등 완전히 박살났다.

별다른 손실을 입지 않은 토모나가 대위의 부대는 미드웨이섬을 폭격했고 수도관, 디젤유 저장소, 중대 본부, 수상기 격납고, 탄약고 등이 완전히 박살났다. 하지만 활주로는 의외로 멀쩡했고 이미 수비대 전원은 콘크리트 방공호로 대피한 상태였다. 미군 수비대의 피해는 전사 11명, 중경상 18명으로 집계되었다.

일본 공격대는 섬에 미리 떡칠해 놓은 대공포 탓에 상당히 심한 타격을 받았다. 히류의 경우 호위 전투기 9기 모두 귀환 했으나 2기는 재투입 불가 수준으로 손상되었고 함공대의 경우 2기 미군 전투기에 의해 격추, 1기 대공포에 의해 격추, 1대 실종, 5기 재투입 불가 수준 손상을 입었다. 소류는 1대가 대공포에 의해 격추 되었고 1기 중파, 함상공격기 4기 재투입 불가 수준 손상을 입었다. 아카기는 대공포에 제로센 1기가 격추되었고 3기의 제로센이 전손 판정을 받았으며 5기의 함상 폭격기 역시 전손 판정을 받았다. 카가의 경우 1대의 제로센과 함폭기 1대가 대공포에 의해 격추되었다. 미드웨이 공습에서 일본군은 총 11기 손실, 14기 중파, 29기 손상을 입었고 20명의 조종사가 사망 실종하며 22.4%의 손실을 입었다.[81]

7시를 전후로 마무리된 공격의 성과를 관찰한 결과 미군의 저항이 심해 2차 공격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토모나가 대위는 함대에 2차 공격이 필요하다고 타전했다. 나구모를 비롯한 일본 함대 수뇌부도 72기의 함상 폭격기로 한 번에 미드웨이의 지상 기지를 무력화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치 않았기에 후속 공격을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의 기습을 절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 나구모는 기존에 미 항공모함이 나타나면 상대하기 위해 대비시켜놓았던 대함용 어뢰/철갑탄으로 무장된 폭격기들의 무장을 지상 공격용 폭탄으로 바꾸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게 큰 참상을 불러올 오판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렇게 재무장 하는 것은 바로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교체가 되는 것이 아니었고 나구모가 재촉을 해도 무장변경으로 90~120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82] 그렇게 정비반이 바쁘게 무장을 바꾸며 절반이상 완료될 무렵 이때 하와이에 있어야 할 미군의 항공모함 함대를 발견했다는 정찰기의 보고를 듣고 나구모는 충격을 받는다. 다시 무장을 바꾸자니 육상공격은 무산되는 것이었고 다시 무장변경 동안 무방비 위험이 어느 정도 있었기에 고민 끝에 나구모는 다시 무장을 대함용으로 바꾸라고 지시하였으며 적 항공모함이 발견되었으니 빨리 다시 교체하라는 나구모를 비롯한 상부의 독촉으로 일본 항공모함의 격납고 상황은 개판이자 불씨 하나만 튀어도 위험한 아수라장이 되어버린다. 위험한 폭탄을 제대로 정리하지도 못하고 그냥 구석에 밀어놓고 재무장을 하는 둥 난리였다.[83]

6.2.2. 미군 기지 비행대의 반격과 잠수함 노틸러스의 공격

비슷한 시간 미드웨이에서 발진한 미군 공격대들이 7시 5분 일본 함대 상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랭던 파벨링 대위가 이끄는 VT-8(제8뇌격비행대)소속 TBF 어벤저 6기[84]와 제임스 콜린스 대위가 이끄는 육군 항공대 소속 B-26 4기로 뇌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들은 우연히 동시에 일본 함대 상공에 만났기 때문에 연계작전이 불가능했던데다, 어뢰의 신뢰성도 떨어졌기 때문에 피해만 입은 채 공격에 실패한다.

4기의 B-26 중 2대가 격추당했고, 제임스 무리 중위의 기체였던 Susie-Q는 제로센에게 쫓기다가 아카기 비행갑판 바로 위로 날아서 겨우 도망쳤으며, 이 과정에서 갑판에 기총을 난사해 승조원 2명을 사살했다. 하마터면 나구모 주이치를 비롯한 일본군 수뇌부들이 전멸할 뻔했던 이 사건이 이후 나구모의 판단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어밴저의 상황은 더욱 나빠서 파벨링 대위를 비롯한 6기 중 5기가 격추되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앨버트 어니스트 소위의 기체도 피격되어 18살의 후방사수 바실 린치가 전사했으며, 당시 17살이었던 무전수 해리 페리어는 기절했다.[85] 한참 B-26과 VT-8의 공격이 진행되고 있던 7시 10분 월리엄 H. 브로크먼 주니어 소령이 이끄는 나왈급 잠수함 USS 노틸러스는 북서쪽 수평선 너머 폭연과 대공포화를 발견하고 일본군 기동함대로 접근하기 시작했고 8시경 일본군 기동부대의 한복판으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이 잠수함 하나로 인해 일본군은 큰 손해를 보게 된다.

노틸러스가 기동함대 한복판으로 접근하고 있던 7시 55분경 로프턴 R. 헨더슨 소령[86]이 이끄는 SBD 돈틀리스 16대가 일본 제1항공함대 상공에 도착하였다. 헨더슨 소령은 비행대를 8기씩 2개의 비행중대로 나누어 각각 히류와 소류를 공격하기도록 했고 엘머 글리던 대위에게 1개 비행중대의 지휘를 맡겼다. 하지만 일본 함대 상공을 초계하던 제로센에 걸려서 6기의 돈틀리스가 공격을 시도하기도 전에 격추당하고 말았다. 헨더슨 본인도 제로센에 격추당해 전사했다. 이때 헨더슨은 이왕 죽는 거 동귀어진의 심정으로 카가에 충돌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해수면에 추락했다.
[87] 이후 글리던 대위가 지휘권을 이어받아 남은 10기의 돈틀리스를 이끌고 히류를 공격했다. 그러나 돈틀리스가 떨어뜨린 폭탄은 모두 빗나갔다. 히류 또한 대공포로 돈틀리스를 공격했지만 한대도 격추시키지 못했다. 폭격을 마친 돈틀리스는 철수 도중 제로센에게 2기가 더 격추당하여 8기가 미드웨이로 귀환했으나 이 중에서 6기는 다시 비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대파된 상황이었다.

핸더슨 소령의 공격이 한참 진행 중이던 8시 10분, 17분 노틸러스는 기동함대의 선두 부대에 공격을 가하기 위해 자세를 잡던 도중 나가라에 의해 폭뢰공격을 받고 잠항을 했다. 25분 노틸러스는 기리시마를 향해 어뢰 2발을 발사했으나 한 발은 불발되었고 한 발은 기리시마가 여유롭게 피하는데 성공했고 30분 다시 폭뢰공격을 받아 잠항으로 서쪽 외곽으로 피하였다.

동시에 헨더슨 소령의 부대에 이어서 8시 30분경에 벤자민 노리스 소령이 지휘하는 구형 SB2U 빈디케이터 급강하 폭격기 11기가 도착했으나 이들 역시 피해만 입은 채 공격에 실패했다. 핸더슨 공격대와 빈디케이터들이 박살나던 동안 이스턴 섬에서 발진한 윌터 스위니 대위가 이끄는 B-17 폭격기 15기가 수평 폭격을 가했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인해 실패했다.[88] 종합하자면 첫 공격은 성과가 제로였다. 노리스 소령이 지휘하는 SB2U 빈디케이터 편대는 2기가 격추되고 1기가 불시착했으며 스위니 대위가 지휘하는 B-17의 피해는 없었다. 공격이 한참 진행 중이던 9시 서쪽으로 잠항하여 도주했던 노틸러스가 재접근했고 대공포를 쏘아대는 소류를 발견하고 접근하였다. 9시 10분 마지막 어뢰를 소류에 조준하던 도중 호위 역할을 맡고 있던 나가라와 아라시가 접근하여 폭뢰 공격으로 무산시켰고 계속해서 공격해 오는 이 잠수함을 잡기 위해서 아라시 함장 와타나베 야스마사 중좌는 노틸러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약 1시간 동안 3차례나 공격을 가해온 노틸러스호를 추격하기로 한 이 결정은 10시 25분 단 5분만에 전세를 뒤집는 대공격을 불러오게 된다.

8시부터 9시까지 한시간 넘게 진행된 미군의 공격으로 일본 함대는 대혼란에 빠진다. 미군 조종사들의 공격에 맞서 일사불란한 회피기동을 할 때마다 함상 작업이 중지되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부족한 시간을 더 잡아먹게 된 판국에 진형 한복판에 끼어들어 어뢰 공격을 감행한 미군 잠수함 노틸러스를 잡으러 다니느라 항공모함, 호위함정 할 것 없이 함대 진형이 죄다 흐트러지고 말았다. 거기에다 미드웨이에서 출격한 항공기들의 공격과 이들을 막으려는 제로센들의 요격이 진행되는 와중에 1차 공격대가 함대 상공에 도착해서 착함을 기다리는 등 바다와 하늘 모두 그야말로 개판에다 난장판이 되었다. 미군처럼 무전기와 레이더가 충실하고 별도의 통제 시설까지 건실히 갖췄다면 아군 함정들과 항공기들을 적절히 통제하여 이런 상황을 대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시 일본 함대의 통제 수단은 수신호, 발광 신호, 조명탄, 연막이 전부였고 통제 시설이라곤 일본 항모 특유의 좁아터진 함교 뿐이었다. 이런 혼란스런 상황은 제1기동함대 수뇌부들의 상황 파악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하나 주목할 점은 이 때 일본 함대가 거둔 전과는 모두 제로센에 의한 것이었을 뿐 대공포화에 의한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일례로 헨더슨 부대에서 격추된 돈틀리스는 전부 초계하던 제로센들이 대함 공격 전후에 격추시킨 것이며, 대공포는 아예 단 한 대도 격추시키지 못했다. 출격한 16기 중 헨더스 소령을 포함한 6기는 일본 함대 공격 전에 초계하던 제로센에 격추되었고, 남은 10대가 히류 공격을 시도했으며, 이후 퇴각 중 2기가 추가로 제로센에 격추되었다. 더군다나 미드웨이에서 출격한 미군 조종사들은 대부분 신참들이어서 대공포화를 제대로 회피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미드웨이 해전에 참전한 전 미군 조종사 중에 가장 미숙한 대원들로 구성된 헨더슨 부대의 경우 전투 경험은커녕 미드웨이에 오기 전까지 돈틀리스 조종 경험도 없었다. 때문에 일반적인 급강하 폭격을 하지 못하고 낮은 각도로 진입하여 폭격하는 전술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폭격 전술은 대공포화에 당하기 딱 좋은 전술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방공망이 수준 이하일 경우에나 통하는 전술이었다.

당시 일본 해군은 미, 영 해군이 도입했던 대공방어에 효율적인 윤형진을 도입하지 않은 상태였다. 레이더가 없었던 일본 해군은 호위함들을 가급적 최대한 함대 바깥 쪽에 배치하여 원거리에서 내습하는 적기나 적함 탐지용으로 사용했는데, 이렇게 되면 각 함들간의 거리가 지나치게 벌어져 효율적인 대공화망을 구성할 수가 없었다. 또한 개함 대공병장에도 문제가 있었다. 기함 아카기는 구식인 10식 45구경 12cm 고사포를 장착하고 있었으며(미드웨이 작전 후 신형 고사포로 교체 예정이었음) 고사포좌의 위치가 너무 낮게 붙어 있어 직상방이나 반대방향으로의 사격이 불가능했다. 카가의 경우 아카기보다 신형인 89식 40구경 12.7cm 고사포를 장착하고 있었으나 구식인 91식 고사기(사격통제기)를 사용하고 있었다(나머지 세 척은 94식 고사기 장착, 91식은 사격제원 입력과 계산, 추적이 수동으로 이루어지는데 반해 94식은 반자동식이라 대응 시간까지의 텀이 길었다.). 아카기와 카가에 비해 히류와 소류는 그나마 신형 대공포와 고사기를 장착하고 있어서 사정이 조금 나았다. 그러나 4함 모두에서 근거리 방공을 담당하는 96식 25mm 대공포는 사거리가 너무 짧고 수동으로 포좌를 조종해야 하며 급탄이 탄창식이어서 지속사격이 불가능하다는 치명적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물론 사거리는 소구경 기관포의 한계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고 저 시절에 탄창식 기관포도 일반적으로 사용되기는 했다. 물론 미국의 기관포에 비해서 탄창을 자주 갈아줘야 하니 불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저런 쓰레기같은 물건이 추축국 대공기관포 중 2위는 하는 물건이라는 게 함정. 추축국 대공 화력의 문제는 40mm급 기관포의 부재가 제일 큰 원인이다. 종합적으로 일본 주력함의 대공화기로는 유효한 개함방공이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고 실제 적의 공습을 피하는 데는 대공사격보다 상공엄호기나 회피기동에 크게 의지했다. 이 날 일본 항공모함이 이 날 자함의 고사포로 확실하게 격추시킨 미군기는 카가가 격추한 돈틀레스 1기 뿐이라는 것만 보아도 일본함선의 개함 대공방어 능력이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토록 빈약하고 비효율적인 대공포화는 얼마 안 가 일본함대에게 비극의 단초를 제공한다.

6.3. 미군 항공모함의 행방

한편 나구모 제독은 2차 공격을 위해 당시 대기 중이던 공격대에서 함선 공격용 무기들을 탈거하고 육상 공격용 폭탄을 장착하라고 지시한 상황이었다. 이는 명백한 나구모의 독단이었는데, 야마모토는 반드시 함상공격기의 절반은 대함용으로 무장한채 대기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89] 독단이라고는 해도 야마구치 다몬이 2차 공격대의 발함을 요청하기도 했고, 1차 공격대장도 2차 공습이 필요하다고 진언한 상황이라 나구모만 탓하기도 어렵기는 하다. 미드웨이에서 날아든 미군 항공기들의 공격도 나구모의 판단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앞서 언급한 아카기의 함교에 거의 들이받을 뻔한 B-26이 나구모의 판단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도 한다. 죽음의 위기를 겪은 나구모가 미드웨이 비행장의 역량을 실제 역량 이상으로 고평가하고 겁먹게 만든 셈이다.

이런 와중에 아까 토네에서 뒤늦게 발진했던 정찰기가 플레처 제독이 지휘하던 17기동부대를 발견하고 보고를 올렸지만, 함종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다가 무전기 고장으로 그 보고조차 늦게 들어온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나구모 제독은 15분 가량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다 일단 아카기, 카가가 포함된 제1항공전대에는 무장 전환 작업을 중지하고 적의 함종을 파악할 것을 지시했다.

그 사이 미드웨이에서 발진한 미군 공격대의 습격이 이어졌지만 역시 기량 부족이었던 까닭에 별다른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단 폭탄은 날아오니 회피 기동을 해야 했으므로, 이번에도 무장 전환 작업이 중단되는 등 난장판이 또 벌어졌다. 핸더슨 공격대의 공격이 끝났을 무렵 아까 그 정찰기가 추가로 "항공모함은 없었다"라는 보고를 올린 덕분에 나구모 제독은 안심할 수 있었으며, 무장 전환 작업 재개를 지시했다. 그런데 그 정찰기에서 다시 "항공모함 1척을 봤던 것 같다"고 보고를 번복하는 바람에 나구모 제독과 참모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 미드웨이에서 파견한 공격 편대인 SB2U 빈디케이터, B-17들이 또 함대 상공에 나타나면서 대응할 시간을 더 빼앗겼다.

당시 일본 해군의 교리를 그대로 따를 경우, 함재기의 발진 과정에 필요한 절차들인 무장, 급유, 이동, 엔진 예열, 기타 등등을 아무리 서둘러도 당시 일본의 항공모함과 함재기와 항모 승조원들로서는 1차 공격대의 귀환 이전에 함재기들을 출격시킬 수 없었다. 정찰기의 보고를 접수한 직후 바로 출격 지시를 내렸어도, 함재기들의 출격이 완료될 때까지 토모나가 공격대는 최소 30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그나마도 귀환하는 기체들이 멀쩡하고, 적의 공격이나 기타 지연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실제로는 1차 공격대의 함재기 중 다수가 심한 피해를 입어서 한시바삐 착함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미군의 추가공격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함대 방공을 위해 전투기들을 수시로 띄워야 했다. 또한, 적기가 전투기들의 방어를 뚫고 공격하면 이를 회피하기 위해 항공모함이 회피기동을 할 수밖에 없으며 그 동안 함재기가 뜨고 내리지 못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비행 갑판 위에 계류되지 않은 비행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협이 된다. 더군다나 함종, 규모, 위치 모든 게 불확실했으므로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함재기들을 보냈다가는 허를 찔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정들이 맞물린 탓에 그 시점에서는 공격대를 발진시킬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것 저런 것 다 무시하고 함재기를 날려보냈다 한들 그 시점에서는 이미 늦었다. 정찰기의 보고가 들어온 시점에서 이미 미군 함재기들은 일본 함대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6시 30분 경에 치쿠마의 5번 정찰기가 미 항모전단 머리 위를 통과했지만, 악천후 때문에 미 항모전단을 못 보고 지나갔다. 미군 항모전단에서 공격대를 발진시킨 시간이 7시니까, 치쿠마의 5번 정찰기가 일을 제대로 했다면 일본군은 대책을 짜낼 시간을 얻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후 미군 급강하 폭격기들이 들이닥쳤을 때, 비행 갑판 아래의 격납고 안에는 연료와 무장을 가득 채운 함재기들이 가득하고 각종 무장들은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격납고 여기저기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로 인해 명중률은 높으나 뇌격에 비해 낮은 파괴력을 가진 급강하 폭격[90]임에도 불구하고 이 함재기들과 폭탄들이 유폭해서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만약 이러한 유폭이 없었다면 일본의 항공모함 중 절반 정도는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6.4. 미일 기동부대 공방전

6.4.1. 미군 기동부대 공격대의 발진, 그리고 삽질과 낭패

정찰기와 미드웨이 기지의 보고를 통해 일본 항모기동부대의 상황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던 미국 항모기동부대 수뇌부는 일본군을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도착하자 공격 타이밍을 저울질하다가 마침내 공격 명령을 내린다.

오전 7시, 미국 항모기동부대는 즉시 공격 부대를 발진시켰다. 이에 3개의 항공모함으로부터 도합 152기의 항공기가 출격했다.

후술할 미군 뇌격기 부대의 참상은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미군의 경험과 준비 부족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당시 미해군항공대의 경우 이러한 대규모 장거리 대함공격을 상정한 훈련을 한 적이 없었다. 때문에 당시 미 항모비행부대의 공격은 전술 레벨에서 실수가 이어졌고, 전혀 의도치 않았던 축차공격으로 이어졌다. 반면 일본은 이미 수차례 대함공격을 성공했고, 전투 경험 면에서 미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군 각 항공모함의 비행대는 각각 4개의 비행대대로 구성되어 있다. 구형 TBD 데버스테이터로 구성된 뇌격기 대대, F4F 와일드캣 전투기 대대, SBD 돈틀리스를 장비한 급강하폭격기 대대와 정찰비행 대대.[91] 각 비행대대의 지휘관은 소령이며, 이 4개 대대로 구성된 각 항모 전체의 비행대 지휘관은 중령이다.

오전 7시, 비행대에 출격 명령을 내린 스프루언스 제독은 함대 상공에서 편대를 이룬 후에 공격하러 가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대한 기록 및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혹자는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16기동부대가 항공모함간의 전투를 해보지 못한 탓이 컸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한편 플레처 제독은 요크타운의 비행대에게 날아가면서 편대를 형성하도록 지시를 해 둔 상황이었다.

한편 일본 항공모함에서 파견한 공격대에게 공격당할 것을 대비하여 미국 항공모함 기동 부대는 세 척이 제각기 흩어져 활동했으며, 그 결과 일본 함대의 타격력 분산에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었다.

함재기를 발진시키고 있던 엔터프라이즈에서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 몇 대가 말썽을 부려 출격이 늦어지자 다급해진 스프루언스 제독은 7시 52분, 그냥 기다리지 말고 곧장 공격에 나서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상공에서 대기 중이던 항공기들은 그 즉시 일본 함대를 찾아 비행을 시작했다. 엔터프라이즈, 호넷, 요크타운 3개의 항공모함에서 도합 152기의 항공기들이 발진하여 대규모 편대가 형성되었다.

한편 앞서 제1항공함대를 노렸다가 호위함정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났던 미국의 나왈급 잠수함 SS-168 노틸러스[92]는 기회를 엿보다가 일본의 구축함 아라시를 발견했는데, 그대로 가면 꼼짝없이 아라시한테 포착당할 상황이라 먼저 선제 공격을 했으나, 유효타를 주지 못해 아라시의 폭뢰 공격을 피해 잠수해야 했다. 노틸러스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다시 살짝 부상했으나 하필 아라시가 아직 남아 있어서 별수없이 재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계속 찝적거리는 노틸러스에게 정신이 팔린 아라시는 본대에서 뒤쳐졌고, 황급히 본대를 따라 항해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 아라시의 행적은 본 해전의 절정을 이끌어낸다.

한편 출격 후 날아가면서 호넷 비행대에서 심각한 분열이 발생했다.

호넷의 비행대에는 지휘 계통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호넷 비행대의 총지휘관 스탠호프 링 중령은 부하들에게 권위주의적이고 강압적인 똥별적인 태도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본인의 과시욕과 내리갈굼이 너무 과해 부하들의 큰 불만을 사고 있었다.[93] 게다가 과거 조종 경력에서 사고를 친 전과 때문에 부하들에게 그 자질까지 의심받고 있었다. 때문에 링 중령에 대해 부하들의 불만이 상당했고, 일부 부하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될 각오까지 하고 지휘관을 교체해 달라고 요구하려 하는 등 거의 항명 직전의 폭발 상황에 도달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링은 상사들로부터는 꽤 총애를 받았고 미드웨이에서 한 삽질에도 불구하고 제독까지 승진했다.[94]

결국 이날 출격한 호넷의 비행대에서 편대가 와해되는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전투가 끝난 후 호넷의 함장 미처 대령이 왜곡된 보고서를 올렸기 때문에 호넷의 비행대 내에서 정확하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이후에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해당 부대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당일 사건을 재구성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호넷에서 출격한 후 8시 30분경 제8뇌격기대대의 대대장 존 C. 월드론 소령[95]이 비행대 총사령관 링 중령에게 현재 비행대가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서 자신이 말하는 방향으로 틀어야 한다고 링 중령에게 건의했다. 하지만 호넷 비행대의 총지휘관 링 중령은 전 부하들이 무선으로 듣는 상황에서 자신의 권위에 정면 도전했다고 생각하며 월드론 소령의 제안을 기각했다. 이에 한동안 링 중령과 티격태격하며 말싸움을 벌이던 월드론 소령은 결국 독단으로 제8뇌격기대대의 방향을 틀어 비행대에서 이탈해 버리며 항명했다. 이때 월드론 소령은 링 중령에게 "Well, the hell with you."라는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우리말로 치면 순화해서 해석한다 해도 "당신 멋대로 하쇼!" 정도의 표현이니 당시 상황이 얼마나 험악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월드론 소령의 직감대로 호넷의 제8뇌격기대대는 마침내 일본함대를 발견했고 곧 공격에 들어갔지만 그의 제8뇌격기대대는 끝내 전멸해버리고 만다. 상세는 후술할 내용을 참고.

월드론 소령의 제8뇌격기기대대가 이탈한지 30분 가량 지난 9시경 호넷 비행대 중 와일드캣 전투기 10기로 구성된 제8전투기대대의 연료마저 바닥났다. 제8전투기대대의 대대장 사뮤엘 미첼 소령은 링 중령에게서 아무런 지시가 없자 링 중령에게 보고도 없이 와일드캣 10기를 이끌고 호넷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귀환 중 연료가 고갈되어 10대 모두 해상에 불시착했다. 10명의 파일럿들은 구명보트에서 상어와 사투를 벌이는 등 4~5일간 바다를 헤매다가 8명은 구조되었으나 2명은 안타깝게도 실종되고 만다.

이제 돈틀리스들만 남은 링 중령의 호넷 비행대는 계속 서진했으나, 설상가상으로 10시경에 중무장을 한 제8폭격기대대의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의 연료가 바닥나기 시작했다. 이에 제8폭격기대대의 대대장 로버트 존슨 소령도 링 중령에게 보고 없이 돈틀리스 17대를 이끌고 귀환했다. 링 중령이 절대로 대형을 이탈하지 말라고 명령했으나 제8폭격기대대는 이를 가볍게 씹고 무시했다. 귀환 도중 연료 부족으로 돈틀리스 3기가 해상 등에 불시착했다. 마지막으로 링 중령을 수행하던 제8정찰비행대대의 돈틀리스[96]마저 연료가 떨어져가자 이들 역시 링 중령에게 보고도 없이 기수를 돌려버렸다. 링 중령은 하는 수 없이 먼저 발길을 돌린 부하들 뒤를 따라 모함에 귀환했고, 귀환하자마자 전투 보고서도 제출하지 않은 채 자신의 선실에 틀어박혀버렸다.

전투 후 호넷의 함장 미처 대령은 이날 전투에 참여한 각 예하 비행대 지휘관의 전투보고서를 상부에 올리지 않았고 자신의 전투보고서만을 스프루언스 소장에게 제출했는데, 이 때문에 미처 대령이 링 중령 사태에 관련된 일을 고의로 은폐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고 있다. 미처 대령의 전투보고서는 이후 생존자들의 증언과 불일치하는 부분들이 여럿 있다. 보고서를 받아든 스프루언스 소장도 내용이 뭔가 의심스럽다면서 격노하기도 했다. 미드웨어 해전 이후 미처 대령은 제독으로 승진[97]했으나, 스프루언스 소장은 미처를 한직으로 보내버렸다.

한편 엔터프라이즈 소속 비행대의 경우 상술한 바와 같이 함대 상공에서 편대 구성을 하려다가 이를 전격 취소하고 일본 함대로 향하는 중에 비행단 전체의 편대 구성을 시도했으나, 그만 중간에 각 비행대대별로 뿔뿔이 와해돼버리고 만다. 그나마 엔터프라이즈의 제6급강하폭격기대대는 다행히 원래 계획한 경로로 날아갔지만, 일본 함대는 이미 북쪽으로 변침해버린 뒤였다. 엔터프라이즈의 제6전투기대대는 호넷의 제8뇌격기대대를 엔터프라이즈의 비행대로 착각하고 뒤따라가다가 그만 그마저도 놓쳐버렸고, 그 결과 본 전투 내내 엉뚱한 곳에서만 겉돌고 있었다. 엔터프라이즈 비행대 중 제6뇌격기대대만이 우연의 일치로 일본함대와 제대로 합칠 수 있었으나, 그나마 요크타운의 비행대만이 건재를 유지한 채 일본함대 상공에 도달했지만, 막판의 전술적 착오로 인해 뇌격기들과 급강하폭격기들이 따로 움직이게 되었다. 상세는 후술할 내용 참고.

6.4.2. 미 뇌격기 부대의 축차공격과 전멸

9시 20분부터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미 해군의 3개의 뇌격기대대가 순차적으로 일본 함대를 공격했으나 일본군에게 거의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못한 채 10시 40분경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09시 20분에 제8뇌격기대대가, 09시 37분에 제6뇌격기대대가, 10시 10분에 제3뇌격기대대가 뇌격을 개시했다. 각 뇌격기대대의 공격시간은 약 30분이었다. 따라서 제8뇌격기대대가 전멸하기 전에 제6뇌격기대대가 공격을 시작했으며, 제6뇌격기대대가 공격을 마친지 몇 분후에 제3뇌격기대대의 뇌격이 시작되었다.

미 뇌격기부대의 실패 요인은 아래와 같이 요약된다.
  • 축차공격
    3개의 뇌격기대대가 순차적으로 공격한 것은 전혀 의도했던 바가 아니며, 앞선 단락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대규모 해전에 대한 실전 경험 부족과 지휘관과 부대원들의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삽질의 결과물이다. 전술 미스로 인한 의도치 않은 축차공격이 뇌격기대대의 전멸을 야기한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 전투기부대 호위의 부재
    또 뇌격기부대를 운용함에 있어 저고도까지 침투하여 어뢰를 발사해야 하는 뇌격기 주변에는 전투기 부대의 호위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윗 단락에 나와 있는 일련의 삽질들로 인해 3개의 뇌격기대대 가운데 2개 대대[98]가 전투기대대의 호위를 받지 못한채 단독으로 뇌격에 임했으며, 결국 일본의 베테랑 조종사들이 모는 제로센에 의해 손쉽게 격추되고 말았다.
  • 어뢰 성능 불량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어뢰의 성능과 신뢰성에는 항공어뢰든, 중어뢰든 상관없이 큰 문제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항공기에 의한 대함 뇌격은 적 전투기와 대공포화에 노출되기 쉬운 전술이다. 여기에 당시 미군 어뢰의 극악한 신뢰성으로 인한 까다로운 투하조건과 당시 미군 주력 뇌격기였던 TBD 데버스테이터의 저성능[99]이 겹치면서 미군 뇌격기들은 전술적으로 굉장히 불리한 조건에 놓였고, 결국 대다수의 미군 뇌격기들은 어뢰 투하조차 못하고 격추당했다. 전투기의 호위가 붙었던 요크타운의 제3뇌격기대대를 비롯하여 소수의 뇌격기들이 어뢰를 투하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미 전투기들에게 난타당해서 공격대형이 흐트러진 상태에서 산발적으로 투하된데다, 투하하자마자 항주장치나 뇌관이 먹통이 되곤 하면서 결국 한 발도 명중시키지 못했다.
  • 전술 미스 및 부대원들 간의 갈등
    일본군도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미군 역시 이처럼 역사상 그 유래가 없었던 대규모 항모전에 대한 실전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각 비행대 발진에서부터 전술적 삽질을 거듭했고 이는 축차공격 및 전투기 호위 부재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더해 호넷 비행대 지휘관 링 중령과 부대원들 간의 갈등으로 비행대가 와해된 것은 호넷 뇌격기대대 전멸의 중요한 한 원인이 되었다.

추가로 일본군도 이 파상공격에 대해서 악착같이 대처했는데, 조함을 잘하는 것으로 유명하던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아카기의 함장을 밀어내고 자신이 대신 회피기동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00]
6.4.2.1. 호넷 제8뇌격기대대의 공격
09시 20분경, 링 중령의 본대가 엉뚱한 곳을 비행하고 있는 동안, 본대에서 이탈한 존 C. 월드론 소령이 이끄는 호넷의 제8뇌격기대대 15기는 정말 그의 말대로 일본 함대를 정면에서 발견하고 곧바로 뇌격에 돌입했다. 그러나 구려터진 항공어뢰와 전투기 호위의 부재 탓에 아무런 성과도 없이 일본 초계 전투기인 제로센 24기에 모두 격추당하여 비상 탈출에 성공한 조지 게이 소위를 제외한 29명의 탑승원 전원이 전사했다.[101]

사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월드론 소령의 호넷 제8뇌격기대대 뒤를 엔터프라이즈 소속의 제6전투기대대가 일본 함대 앞까지 쫓아왔다. 그런데 제6전투기대대는 앞서 가는 뇌격기대대가 엔터프라이즈 소속의 제6뇌격기대대라고 착각하고 있었으므로, 앞선 뇌격기들이 강하하여 뇌격이 돌입하자 상공에 대기하면서 무선으로 지원 요청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 소속이 다른 제8뇌격기대대와 제6전투기대대는 주파수가 달라 무선 통신이 불가능했다. 윌드론 소령의 제8뇌격기대대는 애타게 지원 신호를 보냈으나 제6전투기대대는 무선을 수신하지 못한채 제8뇌격기대대가 전멸할 때까지 상공을 선회하기만 했다. 제6전투기대대는 6600m 상공에서 선회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름에 가려 아래에서 제8뇌격기대대가 전멸하고 있는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6.4.2.2. 엔터프라이즈 제6뇌격기대대의 공격
뒤를 이어서 09시 37분 제8뇌격기대대가 거의 전멸해가고 있던 시점에 유진 린제이 소령이 이끄는 엔터프라이즈의 제6뇌격기대대 14기가 도착하여 뇌격에 돌입했다. 제6뇌격기대대는 엘리 대위가 이끄는 중대와 린제이 소령이 이끄는 중대로 나뉘어 뇌격에 들어갔다.

그러나 제6뇌격기대대 역시 전투기 호위를 받지 못했다. 앞서 서술된 것과 같이 제6뇌격기대대를 호위해야 할 제6전투기대대는 중간에 흩어져 엉뚱하게 제8뇌격기대대를 따라갔는데, 이때문에 제6전투기대대는 제8뇌격기대대를 따라 먼저 일본 함대 인근 상공에 도달해 있었지만, 이 과정에서 과도하게 연료를 소모하여 정작 제6뇌격기대대가 전투기 지원을 애타게 요청했을 때는 연료가 떨어진 바람에 지원해 줄 수 없었다.

결국 전투기 호위의 부재 속에 엔터프라이즈의 제6뇌격기대대는 엘리 중대가 먼저 카가를 향해 접근했으나 엘리 대위를 포함한 5기가 격추되었고 2기가 생존하여 항공어뢰를 발사하였다. 그러나 카가의 함장 오카다 지사쿠 대좌는 카가를 급히 좌측으로 틀어 어뢰를 피했다. 린제이 중대에서는 린제이 소령을 포함한 4기가 격추당하고 3기가 생존하여 항공어뢰를 발사하였으나 카가의 오카다 함장은 급격히 우회전하여 어뢰를 피해나갔다. 이렇게 제6뇌격기대대 역시 단 한발의 어뢰도 명중시키지 못했다.

그래도 앞선 제8뇌격기대대와 달리 전멸은 면하고 총 5기의 뇌격기가 생존하여 전투현장에서 빠져 나왔는데, 이는 일본군의 제로센들이 앞선 제8뇌격기대대를 공격하느라 기관포탄을 소모했기 때문이었다. 귀환하던 5기의 뇌격기 중 1기는 도중 엔진이 멈추면서 해상에 불시착하고 4기만이 엔터프라이즈로 귀환했는데 1기는 손상이 심해 바로 처분되었다. 해상에 불시착한 탑승원 2명은 해상에서 상어의 공격 및 굶주림과 갈증, 일광화상 등에 시달리며 무려 17일 동안 태평양을 표류하다가 구조되었다.
6.4.2.3. 요크타운 제3뇌격기대대의 공격
곧이어 10시 10분 랜스 매시 소령이 이끄는 요크타운의 제3뇌격기대대 12기가 도착해서 일본 함대의 가장 앞쪽에 있던 항공모함 히류에 공격을 가했다. 요크타운 소속의 비행대는 편대를 갖추어 날아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제3전투기대대의 F4F 와일드캣 전투기들의 호위가 제대로 이루어졌다. 이 제3전투기대대대의 지휘관은 타치 위브 전술의 창시자였던 존 태치 소령이었다. 와일드캣 호위기 편대는 태치 소령의 지휘에 따라 타치 위브 전술을 선보이면서 그런대로 뇌격기들을 보호했다. 그러나 주옥같은 MK.13 항공 어뢰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히류를 향해 발사된 어뢰 5발 중 한발도 명중되지 못했다. 또 호위 전투기 세력 또한 열세였던 까닭에 뇌격기들은 요격에 그대로 노출되었고[102] 요크타운의 제3뇌격기대대도 일본 군함에 이렇다 할 피해를 주지 못한채 데버스테이터 뇌격기 12기 가운데 제로센의 요격에 10기가 격추당했고 2기는 연료부족으로 해상에 불시착했다. 뇌격대원 24명 중 매시 소령을 포함하여 21명이 전사했다.[103]

이처럼 3개 항모에서 출격한 뇌격기대대들은 단 한발의 어뢰도 명중시키지 못하며(영화에서는 명중했으나 불발인 장면도 나온다) 거의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한채 거의 모두 전멸하는 참극을 겪었다. 일본 함대를 지키던 제로센 초계기들의 조종사들은 최고의 기량을 가진 베테랑들이었다. 일본 제로센들은 요령 있게 미군 뇌격기들을 흐트러뜨린 뒤 집중 공격을 가했다. 게다가 3개의 미군 뇌격기대대 중 2개는 앞서 말한 삽질들 때문에 전투기들의 호위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요크타운의 제3뇌격기대대는 제3전투기대대의 제대로 된 호위를 받았음에도 일본군의 초계기들에게 전멸당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들 뇌격기대대의 희생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다. 미드웨이섬 항공대에 이은 이들의 반복된 공격 덕분에 일본 해군은 전열을 정비할 귀중한 시간을 잃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제로센들도 뇌격기를 방어하기 위한 반복된 전투로 피로가 누적되었고 전투과정에서 실탄과 연료를 소모하였다. 이에 보충을 위해 일부 제로센들은 착함을 한 상태여서 방공망을 구축하고 있던 전투기들 수가 줄어들었고 그나마 남아 있던 일본의 방공 전투기들이 히류에 돌진해온 미국 뇌격기 부대와 태치 소령의 전투기 부대를 처리하기 위해 모두 함대 동남쪽 상공의 저공으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이게 극적인 반전의 계기 중 하나가 된다. 일례로 태치 소령이 이끌던 요크타운 소속 4기의 와일드캣 편대는 타치 위브 전술을 사용하며 4:10의 숫적 열세 속에서도 일본군 전투기들을 상대로 1대가 격추당하는 동안 3대의 제로센을 격추하며 분전, 일본군 전투기들을 20분 가량 저공에 붙잡아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태치 소령의 편대는 2배 이상의 숫적 열세로 시종일관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훗날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당시 일본 함대의 고위 지휘관들은 미군의 목숨을 건 공격에서 사무라이를 연상했다고 술회했다.

그리고, 곧 그들의 희생은 헛된것이 아니었음이 증명된다. 모두가 요크타운의 제3뇌격기대대와 제3전투기대대의 히류 공격에 정신이 팔려 있던 오전 10시 22분 경이였다.[104]

6.4.3. 미 급강하폭격기의 집중 공격, 그리고 운명의 5분

10시 22분부터 시작된 미군 급강하폭격기들의 집중 폭격으로 일본 항모 4척 중 카가, 아카기, 소류 이 세 척이 대파당하게 된다.[105] 이 공격에 참여한 항공대는 엔터프라이즈 소속의 제6폭격비행대대( 웨이드 맥클러스키 소령 지휘), 요크타운 소속의 제3폭격비행대대(맥스 레슬리 중령[106]지휘)이며, 엔터프라이즈 소속의 제6정찰비행대대도 함께 참여했다. 제6정찰비행대대와 제6폭격비행대대가 협공하여 카가를 격침시켰고, 제6폭격대대는 아카기를 격침시켰고, 제3폭격비행대대는 소류를 공격하여 격침시켰다.

이 공격을 두고 후치다 미츠오는 그의 저서에서 운명의 5분(Five Fateful Minutes)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설명한 바 있다. 즉 이미 갑판 위에 공격대가 다 올라와서 발진할 준비가 끝난 상태였고 5분만 여유가 있었다면 순식간에 전부 날아올라 미함대를 쳤을텐데, 그 5분이 지나기 전에 공격을 받아 무방비상태로 맞은 것은 물론이요 갑판 위에 있던 함재기들이 불씨가 되어 공격을 더 치명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사총서 등 공간사를 살펴보면 당시 1시간에 걸친 축차공격으로 인해 갑판 위에서는 함대의 상공방어를 맡은 제로전들이 계속 이착함하고 있었으므로 후치다가 말하는 그런 대규모 공격대를 준비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오늘날 후치다의 저서는 왜곡된 내용이 많아서 사장되었고 '운명의 5분'이라는 표현도 후치다가 잘못 서술한 내용들과 연관지어 언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잘 안쓰이고 있다. 서구측을 보자면, 미드웨이 해전을 일본측 시각에서 본 도서로 번역출판된 책은 후치다의 '미드웨이' 가 거의 유일했으므로 2000년대 들어서까지 '운명의 5분' 이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나 최근들어 전사총서, 제1항공함대 전투상보 등의 일본 사료를 통한 연구가 이루어져 이러한 시각이 어느 정도 고쳐졌다.

엔터프라이즈 소속의 제6폭격비행대대와 제6정찰비행대대는 일본 해군이 있을 곳으로 예상된 지점에 도착하였지만, 일본 함대가 이미 변침해 버린 관계로 발견하지 못했다. 당시 공격대를 이끌고 있던 엔터프라이즈 비행단장 C. 웨이드 맥클러스키 소령이 전투기 비행대 출신인지라 선공필승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돈틀리스 폭격기의 본래 순항 속도보다 빠른 190노트의 속도로 날아 연료가 슬슬 부족해질 때였다. 결국 남서쪽으로 좀더 비행을 해보고 귀환하기로 결정했는데, 때마침 정말 운 좋게도 가느다란 항적을 하나 발견하였다. 이 항적을 따라가면 일본 함대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맥클러스키 소령은 추적을 시작했다. 이 항적이 바로 아까 노틸러스를 잡으려다 뒤쳐진 아라시의 항적이었다.

이들 엔터프라이즈 소속 SBD들은 요크타운의 제3뇌격기대대와 제3전투기대대가 아직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던 시점인 10시 22분에 일본 함대의 서남쪽 방향으로 항모 카가의 상공에 도착했다. 제로센들은 요크타운의 뇌격기들과 전투기들을 막으려고 모두 일본함대 동남쪽 상공의 해수면 근처로 내려가 있어서 방해가 될 전투기 세력도 없었다.[107] 상공을 감시하던 카가의 견시병들도 모두 저공에 있던 미군 뇌격기들에 익숙해진 터라 고공에 있던 급강하 폭격기들을 일찍 발견하지 못했다. 카가 견시병들이 급강하 폭격대를 발견하기 이전 10시 19분 히류의 제2 견시원이 히류 기준 좌현 고도에서 발견하고 함교로 보고 했고 야마구치는 즉각 발광 신호로 급폭 경고 신호를 보냈으나 그 시점은 이미 카가 견시원들도 엔터프라이즈 급강하 폭격대를 발견했던 시점이고 이미 미군은 각도를 잡고 급강하를 시작한 시점이었다.[108]
敵機直上、急降下!
적기 직상, 급강하 !
일본 해군 항공모함 카가의 견시원이 급강하 폭격을 시도하는 미 해군 항공대의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대를 목격하고 전파한 보고.

최적의 공격 위치에 있었던 엔터프라이즈의 제6폭격비행대대와 제6정찰비행대대는 항공모함 카가를 먼저 공격하였다. 이들은 미드웨이 기지의 초보 조종사들과는 달리 스스로 베테랑이라고 자부할 만큼 경험 많은 조종사들이었기에 그야말로 완벽한 급강하 폭격을 선보였다. 카가는 16문 89식 12.7cm 고각포와 25mm 대공기관포를 쏘며 저항했지만 정확한 사격제원 조차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6번째로 급강하를 한 VS-6 소속 존 퀸시 로버츠 소위의 SBD를 격추하는데 성공했으나 그걸로 끝이었다. 4번째로 강하를 개시한 VS-6 갤러허 대위가 비행갑판 뒤쪽 엘리베이터 근처에 500파운드 항공폭탄을 명중시킨것[109]을 시작으로 2개 비행대 28대. 폭탄 합계 50발 앞에 결국 카가는 회피 기동에도 불구하고 여러 발의 폭탄을 얻어맞았다. 카가에 대한 명중탄은 공식적으로 5발이지만, 워낙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맞다 보니 맞는 쪽은 물론이고 때린 쪽도 정확하게 몇 발이 명중했는지 모를 지경이었으므로 실제로는 10발 전후로 명중한 것으로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여기에 연료와 무장이 가득한 전투기, 여기저기 굴러다니던 무장들이 유폭을 일으키면서 카가의 비행 갑판과 격납고가 절반 이상 날아가고 남은 구역들도 불지옥으로 돌변했다. 이 와중에 함교도 직격탄을 얻어맞아[110] 카가의 지휘부는 몰살당했다. 함장 오카다 지사쿠 대좌를 포함해 부함장인 가와구치 마사오 대좌, 항해장 몬덴 이치지 중좌, 포술장 미야노 도요사부로 소좌, 통신장 다카하시 히데카츠 소좌 등 장교 10명이 전사한다. 항공 장교였던 아마가이 다카하시 중좌가 함장직을 인수했지만 그는 퇴함명령을 내리지 않고 곧바로 탈출해버렸다.

카가는 집중된 공격과 지휘부의 몰살로 대응이 늦어진데다 아마가이 중좌가 퇴함명령을 내리지도 않고 탈출해버리는 바람에 이 해전에서 격침당한 일본 항모들 중 최대의 인명 피해를 기록하게 되는데, 총 811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당시 참전한 파일럿 더스티 클리스[111]는 피아 식별을 위해 갑판에 큼직하게 그려 넣은 일장기에 명중한 폭탄도 있었고, 아예 갑판 위에서 대기 중이던 제로센에게 명중한 폭탄까지 있었다고 증언했다. 꽤나 혼란스러웠던 당시 상황 탓에, 일본군과 미군 양쪽 모두에서 당시 카가를 비롯한 일본군 항모의 비행 갑판에 함재기들이 가득했다는 증언이 있는 반면 당시 미군 현장 지휘관들의 보고서에는 비행 갑판 위에는 소수의 제로센들만 있었다고 기재되어 있다.[112] 카가는 마이카제와 하마카제의 뇌격처분을 받았다.

아카기는 처음에 카가가 얻어맞고 있을 때 비교적 가까이 있었으나 운 좋게도 폭격기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유인즉, 원래 폭격 수칙대로 하자면 앞장선 윌머 갤러허 대위의 제6정찰비행대대가 멀리 떨어진 아카기를 공격하고, 뒤따르는 리처드 베스트 대위의 제6폭격비행대대가 가까운 카가를 공격하며, 맥클러스키 소령은 가장 마지막에 아카기를 공격하고 공격 장면을 촬영해야 했다. 그 이유는 최대한 동시에 폭격을 감행함으로서 적함이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런 대규모 대함 공격의 경험이 부족했던 데다, 원래 전투기 비행대 출신에다 폭격대 지휘관이 된 지도 얼마 안 된 비행대 지휘관 맥클러스키 소령은 이 수칙을 못 떠올린 채 카가를 제6정찰비행대대가 공격하고, 아카기를 제6폭격비행대대가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가까운 카가를 향해 급강하를 시작해 버렸으며, 맥클러스키를 수행하던 제6정찰비행대대도 카가 쪽으로만 갔던 것. 원래 수칙대로라면 맥클러스키를 수행하며 앞장서던 제6정찰비행대대가 상대적으로 멀리있던 아카기를 공격하고, 제6정찰비행대대의 뒤를 따르던 리처드 홀시 '딕' 베스트 대위의 제6폭격비행대대가 카가를 공격해야 했다. 하지만, 멕클러스키로부터 지시를 받은 제6정찰비행대대는 카가로 달려들었고, 제6폭격비행대대들은 대부분 맥클러스키 소령의 명령과 상관없이 미해군의 교리에 따른 베스트 대위의 명령(뒤따르는 제6폭격대대가 가까운 카가를 폭격한다)대로 카가로 몰려가 버렸다. 두 비행대 지휘관의 명령이 엇갈린 이유는 두 조종사가 동시에 무선발신을 한 탓으로 추정된다. 당시 무전기는 기술의 한계로 인해 발신하는 동안은 무전을 수신할 수 없었다. 그대로였으면 아카기는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만, 공격 수칙과 순서를 떠올린 베스트 대위가 제6폭격비행대대와 제6정찰비행대대가 모두 카가를 향해 급강하를 시작한 것을 알아채고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강하 직전 급히 강하 대형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선술한대로 그의 폭격기 대대원 대부분은 이미 카가에 강하를 해버린 상태였고 베스트 대위에게는 에드윈 크로거 중위와 프레드릭 웨버 소위만 남은 상태였다. 처음에 베스트 대위는 바로 아카기로 방향을 틀지 않고 선회하며 멕클러스키와 자기의 대대원들의 성과를 관찰한 후 추가 공격은 불필요하다고 판단해 근처에 있던 다른 항공모함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 항공모함이 바로 아카기였다. 고작 3대의 폭격기로 항모를 공격하기로 한 이 터무니없어 보이는 결정이 아카기의 운명을 바꿔 버렸다.



베스트 대위와 2대의 편대원들은 카가를 향해 급강하 시도 도중에 이탈했기 때문에 고도도 낮아진 상태였고 본래 순서대로 강하를 시작하는 일반적인 미군 교리와 달리 본인이 중앙에 위치하고 좌우측 뒷편으로 편대원들이 뒤따르는 빅 대형 그대로 10시 26분 능숙한 솜씨로 아카기를 폭격을 개시했다. 베스트 대위는 아카기 우현의 대형 연돌을, 크로거 중위는 함수 쪽 일장기를, 웨버 소위는 함미 부분의 발진 대기 중이던 적기를 타겟으로 강하를 시작했다. 아카기 쪽에서는 카가와 거리가 꽤 있었기 때문에 카가가 수십 대의 돈틀리스에게 집중공격을 당하고 끝내 불덩어리가 되는 것을 보면서도 본인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놀랍게도 이 베스트 대위의 공격대의 기습에 아무 준비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10시 25분 아카기 갑판에서는 기무라 일등비행병조의 제로센이 발진을 마친 상태였다. 기무라가 발진한 직후 아카기의 견시원들이 좌현 상공에서 3기의 급강하 폭격기를 발견하고 다급히 적 급폭 직상방!!!이라고 외쳤으나 이미 베스트 편대가 강하를 시작한 상태였다. 아카기 대공포반은 미군 공격기를 너무 늦게 발견한 관계로 좌현의 12cm 고각포는 쓸 수도 없었고, 25mm 고사기관포에 예광탄을 물려 쏘는 것이 가능한 대응의 전부였다. 그 외에는 우현 전타로 원을 그리며 회피기동을 하면서 공격이 빗나가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카기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대응이었다. 우측 윙맨이었던 크로거 중위가 투하한 첫 번째 1000파운드 항공 폭탄은 빗나가 함교 앞, 좌현에서 5~10m 떨어진 바다에 착탄했고[113], 베스트 대위가 투하한 1000파운드 폭탄이 비행 갑판 한복판의 중앙 엘리베이터를 관통해 상부 격납고 안에서 폭발했다.[114] 이 폭발로 아카기의 소화설비와 방화 커튼이 망가졌고, 바로 옆에 있던 무장을 가득 실은 뇌격기들과 12cm 고각포 탄약 보급시설을 시작으로 다른 항공기와 무장들이 유폭하면서 아카기의 내부를 불지옥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직후 마지막으로 좌측 윙맨이었던 웨버 중위의 1000파운드 항공폭탄이 비행갑판 좌현 뒤 가장자리를 관통한 후 바다로 떨어졌지만 폭발하면서 아카기의 키와 유폭 방지 물펌프를 고장내 버렸다.[115][116]

이에 아카기의 함장인 아오키 타이지로 대좌는 나구모 주이치 중장에게 퇴함명령을 내려줄 것을 건의했으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나구모는 이를 거부했으며 참모장인 겐다 미노루와 쿠사카 류노스케는 그저 눈치만 보기 급급했다. 그러다 10시 43분 함교 바로 앞의 제로센이 폭발하며 검은 연기 기둥이 치솟자 그제서야 겁에 질린 쿠사카가 퇴함 명령을 건의했고 나구모가 이를 받아들인다. 퇴함 도중 쿠사카는 발을 삐었고 아카기의 비행대 대장인 후지타 미츠오 중좌는 폭발에 휘말려 두 다리가 모두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나마 다른 수병들이 그를 발견해 목숨만을 건져 나구모가 탄 구명정에 탈 수 있었다.[117] 이후 아오키 대좌는 항공장인 마츠다 쇼고 중좌의 퇴함 건의를 받았음에도 거부하다가 결국 상관인 제4 구축대 대장 아루카 코사쿠 소장이 명령하자 퇴함하였다. 아카기는 아라시, 마이카제, 하기카제의 뇌격처분을 받았다.

엔터프라이즈의 급강하폭격기 부대가 막 공격을 시작한 시점에 소류는 북서쪽으로 항해중이었고, 공격기 발진을 위해 우현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이때 소류의 견시원들은 VT-3의 공격을 관측하느라 남쪽 하늘에 집중하고 있었고 함교에서는 부장 오하라 히사시 중좌가 카가를 향해 달려드는 맥클러스키의 제6급강하폭격기대대를 보고 있었다. 이때 기적처럼 맥스 레슬리 중령이 이끄는 요크타운 소속의 제3급강하폭격기대대가 일본 함대 북서쪽 방향으로 접근해 소류를 목표로 강하를 시작했다. 소류의 견시원들은 남쪽에 집중하느라 북서쪽에서 등장한 요크타운 급강하 폭격대를 빠르게 발견하지 못했고, 폴 홈버그 중위를 선두로 이미 좌현 40도 고각 방향, 5000m 거리에서 강하를 시작한 시점에서야 구름 사이 적 급폭기!!!라는 보고를 올렸다. 그러나 이미 선도기는 강하 중이었고 2번기도 500m 뒤에서 강하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소류는 우현 대공화기들이 공격에 대응할 수 있도록 좌현 방향으로 급히 선회했으나 좌현 함수와 함미를 노리고 2개의 급강하 폭격기 소대가 동시에 강하 중이라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최종적으로 총 세 발이 명중했는데, 선도기 홈버그 중위의 1000파운드 항공폭탄이 함수에 명중한 것을 시작으로, 한 발은 함미, 한 발은 함체 중앙에 명중했다. 셋 다 1000파운드 항공폭탄이었고 중앙 한 발은 격납고 내부까지 관통한 뒤 터지는 바람에 소류 또한 아카기와 마찬가지로 한순간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어 결국 아카기, 카가를 따라 최종적으로 침몰했다. 소류의 함장인 야나기자와 류사쿠 대좌는 퇴함을 거부하고 전사했고, 소류는 이소카제의 뇌격 처분을 받았다. 이 때까지도 퇴함하지 않고 소류에 남아 화재진압 작업을 하던 승조원들은 함이 뇌격 처분을 받은 이후 탈출해 이소카제의 구조를 받았다. 소류 승조원 중에서는 711명의 사망자와 실종자 피해가 발생했다.

히류는 급강하 폭격기 공격에서는 벗어나 있었으나, 요크타운 소속 제3뇌격기대대의 공격을 받고 있었던 상황이라 서로를 지원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과거에는 히류가 나머지 3척과 멀리 떨어져 있어 급강하폭격기 공격을 피한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실제로 당시의 일본 함대 진형을 보면 히류 소류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실제로는 히류를 향한 공격이 먼저 시작되었지만 뇌격기 대대는 공격이 이루어지는 속도가 급강하 폭격기에 비해 느려 작전 완료까지 약 30분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제3뇌격기대대보다 늦게 도착한 급강하 폭격기 대대들이 5분만에 다른 일본 항모 3척을 격침시키고 돌아간 후에도 히류를 향한 뇌격기들의 공격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술된 것처럼 제3뇌격기대대 역시 한 발의 어뢰도 맞추지 못한 채 전멸했고, 4척의 항공모함 가운데 히류만이 무사히 살아남았다. 여기에 맥스웰 레슬리 중령이 제3정찰기대대 대장인 윌리스 숏 대위에게 히류를 격침시키라고 명령했는데 숏 대위 및 그 휘하 비행대는 요크타운에서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잘못된 명령으로 여겨 무시해버렸다.

아카기에 탑승하고 있던 나구모 제독은 간신히 탈출하여 구축함 키시나미를 거쳐 경순양함 나가라로 사령부를 옮겼다. 나구모 제독은 자신의 주특기였던 수뢰전[118]을 실시하기 위해 미군 함대를 향해 자신의 함대를 전진시켰다. 미국 함대도 자신들처럼 수상함으로 최후 결전을 벌이러 접근할 것이라고 믿은 탓이었다.

6.4.4. 일본군 기동부대의 반격

히류는 아직 건재하다.
( 飛龍ハ健在ナリ )

이쪽이 지금부터 항공전의 지휘를 맡겠다.
( 我レ今ヨリ航空戦ノ指揮ヲ執ル )
히류에서 발신된 신호[119]

10시 40분경 히류를 공격하던 요크타운 소속의 제3뇌격기대대가 전멸하면서 미군 항모에서 발진한 비행대의 일련의 공격은 일단락되었다. 일본군의 항공모함 4척 중 3척이 10시 22분부터 약 5분여만에 격침의 운명을 맞게 되었고, 히류 1척만이 살아남게 된 상황이었다.

요크타운의 제3뇌격기대대가 전멸한 직후인 10시 40분, 아카기가 불길에 휩싸이고 나구모가 아직 아카기 함상에 있던 그 때, 제1기동함대의 차석 지휘관인 8전대장 아베 히로아키 제독은 히류에 타고 있던 제2항공전대장 야마구치 다몬 제독에게 발 급강하 폭격기 18대와 제로 호위 전투기 6대를 출격시켜 미국 함대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상의 상황은 일본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2011)에 묘사되어 있다.
<rowcolor=white>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장면
파일:hiryu.jpg
<rowcolor=white> 1942년 6월 4일 99식 급강하폭격기대를 발함시키는 히류[120]
10시 57분 히류에서 급강하 폭격기 부대가 발진했다. 히류의 폭격기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은 고바야시 미치오 대위였다. 히류의 급강하 폭격기 부대는 정찰기가 보고했던 지점으로 날아가려고 했지만 마침 항모로 귀환하는 미국 폭격기 부대가 보이자 그들을 추적했다. 그들은 요크타운 소속의 비행대였고, 그 때문에 요크타운이 공격받게 된다.

한편 12시경 요크타운은 레이더 덕분에 90km 전방에서 접근하는 히류 소속 급강하폭격기들을 미리 발견하고 방어 준비에 나선다. 요크타운은 귀환하던 급강하 폭격기들의 착함을 중지하고 요크타운 상공으로 날아온 급강하 폭격기들은 모두 엔터프라이즈로 보내 버렸다. 그리고 함 내의 전투기들을 급히 이함시켜 대공 전투를 준비했다. 또 호넷과 엔터프라이즈에서 전투기 28대가 요크타운을 지원하기 위해 날아왔다.

레이더 덕분에 일본 폭격기들의 접근을 미리 파악한 미군은 일본 급강하 폭격기 부대를 저지하기 위해 와일드캣 전투기들을 미리 출격시켜 원거리로 마중 나가게 했다. 이들은 일본 급강하 폭격기 18기 중에 11기를 격추시켰다. 그러나 남은 7기가 전투기와 구축함 대공포로 이루어진 대공망을 뚫고 요크타운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 급강하폭격기 2기가 추가로 격추되었고, 공격대 지휘관인 고바야시 미치오 대위도 전사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남은 5대가 공격을 개시했고, 폭탄 3발이 요크타운에 명중했는데, 하필이면 한 발이 굴뚝을 타고 들어가 기관실에서 터지는 바람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플레처 제독은 이를 기점으로 부대 지휘권을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넘겼다.

하지만 요크타운은 이미 공격에 대비하여 연료관에 불연성 기체인 이산화탄소를 연료관이 터질정도로 빵빵하게 집어넣었고, 무장들은 안전한 곳으로 치우면서 최대한 신관을 제거했고, 일부는 신관을 뽑고 그대로 바닷속에 버리기도 했다. 특히 비싸고 위력이 강한 대형 폭탄을 바다에 버릴 정도로 미리 확실하게 대비했기 때문에 일본 항공모함과 같은 꼴을 겪지는 않았다. 미군 항공모함은 개방형 격납갑판을 채택했기에 철제 셔터만 걷으면 사방이 개방되고 인화성 증기가 격납갑판 내에 차더라도 바로 날려보낼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미군은 일본군에 비해 손상 관리 및 복구 능력이 굉장히 뛰어났다. 원래 미 해군은 전 함정 승조원들의 화재 대처 능력 및 함정 보수 능력 향상에 크게 투자하고 있었다(단, 항공기 승무원들은 예외). 사실상 전 승조원이 소방 요원이자 보수 요원인 셈으로, 소수의 보수 담당 인원에만 의지하던 당시 일본 해군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특히 요크타운은 미드웨이 해전 직전에 벌어진 산호해 해전에서 입은 피해 때문에 수백명의 기술자를 탑승시킨 채 출항하여 운항 중에 계속 수리를 하고 있던 차였다. 덕분에 요크타운은 일본군의 1차 공격을 받은지 30분도 안 되는 시간 내에 주요 기능을 상당부분 복구하고 2시간 남짓한 시간에 보일러의 재가동과 갑판의 복구를 마쳤다.

미군의 놀라울 정도의 복구 능력을 알지 못한 야마구치 제독은 요크타운이 큰 피해를 입어 무력화됐다고 판단하고, 새로 발견한 엔터프라이즈를 다음 공격 목표로 잡고 토모나가 대위에게 어뢰공격기 10대와 전투기 6대로 구성된 2차 공격대를 이끌고 출격할 것을 명했다. 원래는 12시 20분께 출격을 요구했지만, 당일 새벽부터 함재기 출격준비 및 귀환한 기체의 정비에 쉴틈없이 시달리던 항공 정비병들이 거의 그로기 상태였기 때문에, 토모나가 대위의 공격부대는 13시 30분에 히류에서 출격했다.

오후 2시 54시경 토모나가 대위의 일본군 2차 공격대가 요크타운 상공에 도착했을 때, 요크타운이 정상 작전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아까 공격하여 무력화시킨 요크타운이 아닌 다른 항공모함이라고 판단하고 공격에 들어갔다. 당시 토모나가 대위의 2차 공격대에는 뇌격기 편대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어뢰를 먼저 하나 발사하여 요크타운이 회피하도록 유도하고 회피 시 도달하는 지점에 또 다른 어뢰가 명중하도록 하는 고난도 공격 기술을 실행하였다.[121] 그 결과 요크타운은 2발의 어뢰에 얻어맞았으며, 이것이 치명상이 되어 결국 침몰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의 전투 보고에 따르면 토모나가 대위는 요크타운을 공격하던 중 대공포화에 맞자 그대로 요크타운의 함교 근처에 들이받고 전사했다고 하는데, 이는 '야마모토 이소로쿠'나 애니멘터리 결단처럼 일본에서 제작한 관련 작품에서 빠짐없이 언급되는 에피소드이다. 귀환이 불가능할 때 자발적으로 들이받는 행위는 미군에서도 가끔 일어난 행위라서[122] 카미카제와는 다르긴 하지만, 요크타운의 미드웨이 해전 피해 보고서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 Yorktown (CV-5) War Damage Report - March 9, 1943 (Midway) 정황상 단순 피격 후 요크타운 주위에 추락한 것을, 격전 도중 동료 조종사가 요크타운에 충돌하였다고 오인하여 보고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
파일:attachment/yorktown.jpg
<rowcolor=white> 제2 중대 나카지마 B5N 어뢰의 피격 당하는 요크타운
더 이상 요크타운이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함장 엘리엇 벅매스터 대령은 곧 퇴함 명령을 내렸다. 이전의 교전으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승조원들은 대단히 여유 있게 퇴함했다고 한다. 많은 승조원들이 퇴함 전 비행갑판에 손목시계 등 자신의 소지품 약간을 놓아두고 다시 돌아올 것을 기원하기도 했다. 벅매스터 대령은 가장 마지막에 남아서 퇴함하지 못한 승조원이 있는지 확인한 후 퇴함했고 곧 구조되었다.

6.4.5. 미군 기동부대의 재공격

요크타운이 어뢰에 피격된 그 시각, 요크타운에서 보낸 정찰 비행대가 히류를 발견하고 그 즉시 위치를 보고하였다. 이에 플레처 소장은 즉각 출격 명령을 내렸다. 오후 3시 50분경 엔터프라이즈에서 25대의 급강하 폭격기 부대가 발진했다. 여기에는 모함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에 복수를 다짐하는 요크타운 소속의 제3폭격비행대대 14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정보 전달의 착오로 뒤늦게 정보를 전달받은 호넷에서도 뒤이어 급강하 폭격기 16대가 발진했다.

한편 요크타운에 2번 공격한 것을 요크타운과 엔터프라이즈 2척에 공격한 것으로 착각했던 야마구치 다몬 제독은 전력이 거의 거덜났지만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야마구치 제독은 확실하게 기습 효과를 노릴 수 있는 석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용할 수 있는 항공기는 9대밖에 없었고 쉴새없는 전투로 지친 승조원들은 막 식사를 하고 있었으며, 그나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승조원들의 피로도 극심하여 미군 항공기를 제때 발견할 수 없었다.[123]

오후 5시경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의 혼성 급강하 폭격기 대대 20기가 마침내 히류를 중심으로 한 일본 함대 상공에 도달했다. 당시 히류는 전함 하루나, 키리시마와 중순양함 토네, 치쿠마, 그리고 경순양함 나가라 5척이 둘러싸고 있는 윤형진 형태로 방공망을 짜고 있었다. 미 급강하 폭격기들은 일본 함대를 우회하여 서남쪽 방향에서 태양을 등지며 육박해왔다.

히류를 폭격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은 엘 갤러허 대위의 제6정찰비행대대 7기와 아카기를 격침시켰던 베스트 대위의 제6폭격비행대대 4기[124], 그리고 요크타운 소속 드와이트 콘신 섬웨이 대위가 지휘하는 제3폭격비행대대 14기였다. 이들 혼성 폭격기편대를 지휘한 것은 갤러허 대위였다. 섬웨이 대위는 하루나를 폭격하러 가다가 히류를 향해 떨어뜨린 제6폭격비행대대의 폭탄 2발이 빗나가는 것을 목격하자[125], 목표를 히류로 바꾸어 급강하에 들어갔고 제3폭격비행대대의 맨 뒤의 2대를 제외한 12대의 돈틀리스가 히류를 향해 급강하했다. 제6폭격비행대대는 갑자기 끼어들어온 제3폭격비행대대를 먼저 보내고 이후 자신들도 급강하 폭격을 개시했다.[126]

히류에는 총 4발의 폭탄이 명중했는데, 4발 모두 함수부분에 밀집되어 떨어져 히류의 1/4을 완전히 날려버렸다. 특히 자카드 소위의 첫번째 명중탄은 1번 승강기에 직격하면서 승강기를 두쪽으로 박살내고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이후 셤웨이 대위가 2번째 명중탄을, 앞서 아카기를 작살 내었던 VB6 베스트 대위가 3번째 명중탄을 함수 부분 일장기 하단을, 마지막으로 VS6 소속 노르만 더스티 클레이스 중위(Lt.(j.g.) Norman dusty Kleiss)가 마지막 4번째 명중탄을 일장기 상단에 날렸다.

한편 뒤늦게 출격 명령을 전달받고 호넷에서 출격한 16대의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들이 5시 30분경 현장에 도착했으나 이미 히류는 생존 가능성이 제로였기에 히류 주변에 있는 전함 하루나와 순양함 미쿠마를 공격했다. 5시 42분경엔 미드웨이에서 출격한 B-17들이 하와이에서 증원된 B-17들과 함께 일본 함대를 공격했으나 이렇다 할 전과는 없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iryu_burning.jpg
<rowcolor=white> 1번 승강기와 함수측 비행갑판이 처참하게 박살나 잔해의 일부가 아일랜드에 걸쳐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함수가 처참하게 박살나기는 했으나 피격된 히류의 상황은 이날의 다른 일본 항모들과 달리 손상을 극복하고 전장을 이탈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아카기는 폭탄 단 한 발이 하필 갑판을 뚫고 들어가 격납고에서 터지면서 연쇄적인 유폭을 일으키는 바람에 손 쓸 도리가 없었고, 소류는 함수, 중앙, 함미에 각각 폭탄이 꽂혀서 박살이 났으며, 카가는 최소 다섯발의 폭탄에 명중당했고 이 과정에서 하필 함교가 파괴되어 지휘계통이 전멸한 탓에 함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들에 비하면 항공갑판이 비록 대파되긴 했지만 아직 자력항행이 가능한 히류의 피해는 복구 가능한 수준이었다. 피격지점 바로 아래층에 있던 다수의 제로센이 유폭하기는 했지만 항공유가 발화하거나 쌓여있던 폭탄이 유폭하지도 않았고 아일랜드도 멀쩡했다. 거기에 4발이 골고루 떨어지지 않고 함수에 집중되어 떨어졌기에 보다 빠른 뒷처리가 가능했으므로 적절한 데미지 컨트롤을 했다면 침몰을 막을 수 있었지도 몰랐다. 하지만 위 문단에서 언급된 하루나 폭격을 위해 날아가던 제3폭격비행대대의 남은 2대가 히류와 하루나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속력을 늦출 수 없었고, 추가공격을 피하기 위해 고속으로 항진하고 있었던 까닭에 결국 불길이 함 전체로 번지면서 무력화되었다.

화재가 함 전체로 완전히 번져 더 이상 복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야마구치 제독은 나머지 승조원들을 다 퇴함시키고 함장 가쿠 토메오 대좌와 함께 불타오르는 히류에서 운명을 같이 했다. 순식간에 격침된 카가나 소류, 뇌격처분된 아카기와는 달리 히류는 몇시간에 걸쳐 천천히 가라앉았다.[127] 석양을 배경으로 타오르는 히류의 상공에는 갈 곳을 잃은 제로센들이 처량하게 맴돌았고, 이후 한 대씩 차례차례 해상에 불시착했다. 히류는 329명의 전사자와 실종자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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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버려진 채 불타오르는 히류
이 즈음 나구모 제독은 자신이 2척 이상의 미국 항공모함과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퇴각을 검토하고 있었다. 정찰기의 보고와 격추당해 포로로 잡힌 미군 조종사 프랭크 오플라허티 소위와 후방기총수 브루노 가이도 항공기관중사를 심문한 결과였다.[128] 이후 나구모 제독은 미 해군의 재공격과 히류를 상실하는 난리통의 와중에서 전투 지속 여부를 두고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야마모토 제독에게 철수를 건의하게 된다.

갤러허 대위가 이끄는 혼성 폭격기 편대가 히류를 끝장내고 철수한 직후인 오후 5시 20분 호넷 소속의 돈틀리스 14기가 나타나 토네와 치쿠마에 폭격을 가하나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한다. 뒤이어 5시 42분에는 미드웨이에서 출격한 육군 소속의 찰스 스위니 대령의 B-17 6기가 폭격을 가했고 여기에 하와이 카우아이 섬의 바킹 샌즈 비행장에서 출격한 조지 블랭키 소령의 B-17 6기가 합세해 불타는 히류에 폭격을 가했으나 역시 별다른 피해는 주지 못했다. 오후 7시 헨더슨 소령이 전사하면서 지휘권을 계승한 노리스 소령이 카가가 표류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끝장내기 위해 돈틀리스 7기와 데바스데이터 4기를 이끌고 나타났으나 카가는 이미 자침 처분이 끝난 후였다. 한편 노리스 소령은 귀환 도중 기상악화로 행방불명 되고 만다. 이로써 미 함대와 일본 제1항공함대 사이의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6.5. 해전 막바지

스프루언스 제독은 수상함 사령관 시절의 경험으로 일본 해군이 야간작전을 시도할 것이라고 판단, 다시 항공모함 작전이 가능해지는 새벽까지 도망가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일본의 전함과 구축함, 순양함들의 수상함 전력은 미국보다 우월했고, 미군은 전함이 단 한 척도 없었다. 게다가 당시 야간에는 항공모함의 함재기들이 정상적으로 이착함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더해서 당시 미군의 작전 목표는 일본 항공모함을 잡는다는 것 단 한 가지 뿐이었으므로 이 목표가 달성된 이상 굳이 과욕을 부릴 이유는 없었다. 이에 스프루언스 제독은 히류를 공격하고 돌아온 모든 함재기들을 수용한 후 미국 함대를 밤새 죄다 동쪽으로 후퇴시켰다.

한편 이 무렵 타격을 입은 일본 항공모함들은 적에게 노획될까봐 하나둘씩 자침하기 시작하였는데, 소류와 카가가 가장 먼저 침몰했으며, 히류와 아카기는 나중에 야마모토 제독의 명령에 따라 구축함에서 어뢰를 발사하여 침몰시켰다. 소류와 히류의 함장들은 이함을 거부하고 배와 함께 가라앉기를 선택했다.[129]

제1항공함대의 참사를 전달받은 야마모토 제독은 북방함대에게 즉시 본대에 합류할 것을 지시하고, 곤도 중장으로 하여금 휘하의 침공부대 소속 전투함들과 살아남은 제1항공함대의 전투함들을 이끌고 미국 함대를 추격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야마모토 자신도 역시 본대를 이끌고 미국 함대의 추격에 나섰다. 더불어 대기중인 잠수함들은 야간에 미드웨이를 포격하고, 미국 항공모함들을 추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때 나구모 제독은 제1항공함대의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만다. 히류가 공격받은 것을 전후로 하여 전투 지속여부를 두고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철수를 건의한 것이 야마모토 제독의 화를 돋구는 바람에 나온 결과였다. 제1항공함대의 지휘권은 공략부대의 지휘관인 곤도 중장에게 넘어갔다.

정확히는 지휘권을 박탈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함(아카기)을 잃은 나구모 제독이 야마구치 제독에게 인계했다는 설도 있지만, 이 시점에서는 히류도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히류에 타고 있던 야마구치 제독은 자살할 생각으로 불타는 히류에서 하차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역시 정상적인 지휘를 할 수 없었다. 설령 히류의 사정이 양호해서 정상적인 지휘가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전투 서열에서 밀리는 야마구치 제독이 제1항공함대의 지휘권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분기탱천한 일본 함대가 추격을 시작했지만 이미 본대부터가 500km나 떨어져 있었고, 북방함대는 그보다 더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미국 함대가 동쪽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도망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자 야마모토 제독은 6월 5일 자정을 약간 넘긴 시간에 미국함대에 대한 추격을 중지하고, 미드웨이 공격을 중단한다고 선언하였다. 다만 북방함대에게는 패전을 가리기 위해 예정대로 키스카와 애투섬에 상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130] 오죽하면 이 사실을 알게 된 미국 해군부 장관 프랭크 녹스가 일본군을 현대전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디스해버렸을 정도다.

한편 야마모토 제독의 명령을 수신하지 못한 일본 잠수함 I-168이 미드웨이 근해에 부상하여 포격을 가하는 바람에 미드웨이 수비대는 물론이고 태평양 함대 사령부를 놀라게 했는데, 곧 작전이 중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딘가에 있을 손상된 요크타운을 찾아 격침하기 위해 배회하기 시작했다.

요크타운의 피격 소식을 전달받은 태평양 함대 사령부는 요크타운이 일본군에 나포되지 않도록 어뢰로 격침하라는 명령이 내렸는데 막상 현장에서 살펴본 결과 잘 하면 견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나왔다. 이에 오후부터 예인선을 이용하여 견인을 시작했고, 구축함 6척을 배치하여 견인중인 요크타운을 호위하도록 명령했다.

6월 5일 새벽 3시, 미 해군 잠수함 탬버가 급히 퇴각 중인 미드웨이 공격부대를 발견하였고 어뢰공격을 위해 접근하였으나, 하필 발각되어 황급히 잠항하였다. 문제는 제7전대 기함인 모가미급 중순양함 쿠마노가 휘하 중순양함들에게 좌현 45도로 변침하라고 명령했다가 좌현 90도로 변침했고 여기서 제대로 명령을 전달하지 못하는 바람에 7전대 소속 중순양함이 대혼란에 빠졌다는 것. 스즈야는 우현으로 변침해서 빠져나갔지만, 모가미는 쿠마노를 피하던 중순양함 미쿠마의 측면을 들이받아버렸다. 양쪽 모두 손상을 입고 속도가 떨어지는 바람에 본대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오전이 되자 미드웨이에서 날아온 급강하 폭격기들이 공격을 퍼부었고 미쿠마는 적재하고 있던 산소어뢰의 유폭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고 완전히 낙오되었다. 여기에 리처드 E. 플레밍 대위의 데바스데이터가 피격되자 그대로 미쿠마에 들이박았다.[131] 이후 플레밍 대위는 미 해병대 최초로 명예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호넷과 엔터프라이즈에서 이함한 공격대가 간신히 버티고 있던 미쿠마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여 격침시켰다. 한편 본의 아니게 같은 편을 공격했던 모가미는 남아 있던 산소어뢰를 바다에 몽땅 다 버려서 공격은 미쿠마보다 더 많이 받았으나 간신히 격침을 모면하고 탈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너무 심하게 손상돼버린 까닭에 일본으로 끌려가 수리를 받아야만 했다.

열심히 도망가던 스프루언스 제독은 날이 밝자 다시 반전하여 일본 함대를 추격하기 시작하였으나 표류자 구조를 위해 남아 있던 구축함 타니카제 한 척만 발견했으며, 그나마도 격침시키지는 못했다. 이로 인해 타니카제가 구조를 중단하고 퇴각해 남은 일본 해군 생존자는 이후 미 해군이 구조한다.

진주만의 태평양 함대 사령부는 항공모함 4척을 날려버렸다는 보고를 듣고도 계속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일단 일본 수상함대의 규모가 워낙 거대하다 보니 공격이 계속된다면 방어가 어렵다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6월 5일 하룻동안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일본 함대가 미드웨이 공격을 포기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제서야 안도하기 시작했다.

6월 6일 오전, 배회중이던 I-168이 예인 중이던 요크타운을 발견하였다. I-168은 4발의 어뢰를 발사하여 그 중 2발을 USS 요크타운에 명중시켰고, 1발은 빗나갔으며, 1발은 요크타운 옆에 붙어 소화 작업 등을 돕던 심즈급 구축함 USS 해먼 함에 명중시켰다. 해먼 함은 승조원 중 84명과 함께 4분만에 가라앉았으며, 요크타운 역시 다시 침몰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구축함들이 즉각 보복에 나섰지만 잠수함은 간신히 탈출해 도주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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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기울어진 요크타운과 이동중인 구축함 히먼
한편 요크타운은 침몰할 듯 말듯 버티면서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날이 어두워져서 위험하다는 이유로 예인을 전격 포기했으며, 결국 6월 7일 새벽 5시쯤에 침몰하고 말았다. 워낙 위험해서 승함을 포기했지만 오랜 시간 요크타운이 침몰하지 않고 버텼던 까닭에 현장에 있었던 퇴함 승조원들은 침몰하는 모습을 보며 그냥 배수펌프라도 설치해둘 걸 그랬다면서 후회하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마치 사냥에 만신창이가 된 거대한 코끼리의 죽음을 연상시켰다고 한다.
파일:미드웨이 해전 전개도.svg
<rowcolor=white> 미드웨이 해전 전개도

7. 정리

  • 일본군 피해
    • 항공모함 4척(아카기, 히류, 소류, 카가), 순양함 1척(미쿠마)격침
    • 항공기 322대 손실(격추가 아니고 항공모함이 격침당하면서 함께 수몰된 것이 대다수)
    • 3,500여 명(조종사 및 항공 승무원 100여 명 포함)
      • 아카기 267명 사망. 카가 811명 사망. 소류 711명 사망. 히류 392명 사망.
  • 미군 피해
    • 항공모함 1척(요크타운)[132], 구축함 1척(해먼)[133] 격침
    • 항공기 147대 손실
    • 해군 307명(조종사 및 항공 승무원 200여 명 포함) 전사
    • 미드웨이 기지 손상

8. 평가

태평양 전쟁에서 중대한 전환점이자 미국이 태평양 제해권을 지키는데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해전으로, 일본에게 기습당해 벌어진 양국의 전력차를 극복하고 자만한 일본의 공세를 저지함으로써 전시 생산체제가 구축되는데 필요한 시간을 벌었고 1년 후 미국은 압도적인 생산량과 질 좋은 무기들을 바탕으로 한 물량공세로 일본을 몰아 붙이게 된다. 일본은 전쟁 발발 직후, 다소 미흡했던 미국의 태평양 함대 전력 덕분에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벌인 남방작전 등 태평양 전역을 넘어 샌프란시스코까지 노리자는 계획을 짤 정도로 온갖 재미를 보던 행위에 본격적으로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미드웨이 해전과 이후 과달카날 전투 이후 일본군은 미군을 상대로 수적, 질적 우세에 서지 못하게 된다. 미드웨이 해전의 여파로 이후 이어진 과달카날 전역에서 일본군은 항공기, 조종사, 수송선박을 비롯한 인적, 물적 소모를 감당하지 못하고 패배하게 된다. 즉 쌓아둔 물량을 굴리던 일본, 진주만에서 털리며 자원과 공장은 많지만 물량은 없던 미국의 대결이라는 1막이 끝나고, 본격적인 생산력 대결에 들어간 2막이 시작된 것.

미국의 승리 원인으로는 우선 여러 운도 있었지만 이기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유일하게 대전 내내 일본을 압도했던 정보력이 꼽힌다. 일본군의 공격 위치를 정확히 알고 미리 함정을 파 준비할 수 있었으니, 정보력이 가진 힘 덕분에 미국은 승리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운도 준비된 자에게 따른다는 말을 떠올려보면, 미국은 일본에 비해 훨씬 준비되어 있었고, 그 준비의 바탕에는 정보력 덕분에 일본군의 정확한 공세 위치와 시간을 읽어낼 수 있었던 점이 컸다.
[navertv(33507586)]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13부 - 전장의 묵시록中[134][135][136]
일본군의 패인은 일본군의 자만과 지나치게 세밀한 작전으로 정리할 수 있다. 암호가 해독되고 있는 정황이 충분한데도 전쟁이 끝날때까지 자신들의 암호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고, 미드웨이 해전 당시에는 미군의 정보력을 지나치게 무시한 나머지 자신들의 정보가 새어나간다는 사실을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또한 이 정도 대규모 작전은 이례적 사태나 실수 등 여러가지 변수에 대비해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하는데, MI 작전은 쓸데없이 세밀하고 지나치게 연계되어 있어서 한 부분이라도 어긋나면 연계된 모든 작전이 틀어지는 치명적 오류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미드웨이 해전 당시 나구모를 비롯한 일본군 현장 지휘관들은 꽉 짜여진 시간계획에 쫓기듯이 움직였고 예상치 못한 경우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으며, 결국 그때 그때 대응하기에 급급하다가 패배하고 말았다.

기타 일본군의 패인으로는 따라주지 않았던 운, 정찰의 중요성 무시, 너무 분산된 함대, 레이더의 부재, 암호해독으로 너무 많은 정보를 노출시킨 것 등이 꼽히고 있다.

8.1. 미국의 운

진인사대천명의 "사람이 할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말에서 저 '할 일'이라는 측면에서 미국은 대부분 일본보다 한 발씩 앞서 있었고, 운까지 따라주게 되어 결국 하늘은 미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사실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큰 전투, 특히 큰 해전의 특성상 쌍방 모두 어느 정도는 전략/전술적 레벨에서 삽을 푸고 있었으며[137], 미군이라고 해서 완벽한 플랜대로 전투를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저지른 실책이나 우연히 벌어진 사고들이 미군의 행운으로 이어지는 바람에 더 운이 따라주었던 미국이 승리를 가져갈 수 있었던 원인으로 작용했다.
  • 첫번째로 양측간 전력이 대본영과 미국 스스로 평가한 것처럼 차이가 나지 않았다. 전함 전력은 큰 차이가 났으나, 작전에는 참가하지 않았고 항공모함 전력은 정규항모 기준 4척 대 3척이었는데, 미드웨이 비행장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4척과 4척의 싸움이었다. 거기다 불침항모인 비행장이 어그로를 다 끌어 미국의 항모 3척은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까지 채 발견되지도 않았다. 미국은 상대를 과대평가하여 모든 함을 긁어모았고, 일본은 상대를 과소평가하여 있는 전력을 전부 투입하지 않았다. 일본이 적의 항모가 3척이라는 것을 알기만 했어도 이런식으로 대놓고 정면으로 기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사전에 교신 탈취를 통해 어디를 언제 어떻게 공격할지 다 알고 대비할 수 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불안요소가 있었다면 하와이나 본토 서부도 안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절대로 모든 함을 긁어모아 대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일본도 미리 정보가 샌 것을 알았으면 다른 곳을 양동한다던지, 미리 항모의 위치를 파악하려 든다던지 다른 방법을 취했을 것이다. 결국 조종사들의 정신력이나 함선의 지휘력보다는 정보력의 차이가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 양측 기동부대 간 치열한 정찰전이 이어지고 있었을 때, 사실 일본군도 거의 동시에 미 기동부대를 발견하였다. 발견한 것은 항공모함 소류에서 발진한 정찰기였는데,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일본군 측은 무전기가 작동하지 않았다.
  • 토네급 중순양함 치쿠마에서 보낸 5번 정찰기는 국지적인 악천후로 인해 제대로 된 관측을 할 수 없었는데, 하필 관측을 놓친 지점이 미 기동부대 근처였다. 사고를 친 시간이 하필이면 6시 30분, 미 항모전단이 공격대를 발진시키기 30분 전이었다. 일본군은 토네의 정찰기가 미 항모전단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치쿠마의 5번 정찰기가 사고를 쳤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으며, 문제의 5번 정찰기는 히류의 공격대를 요크타운에게 유도하는 등 나름대로 활약은 했지만 행방불명이 되고 만다.
  • 사출기의 고장으로 30분 늦게 출발해서 패인을 제공한 것으로 유명한 중순양함 토네의 정찰기의 경우, 오히려 예정된 시간과 루트대로 움직였으면 발견이 불가능했고 늦었기에 그나마 관측이 가능했다.
  • 맥클러스키 소령이 이끌던 급강하폭격기 편대가 일본 함대를 찾지 못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저 멀리 무지개가 보였다. 카게로급 구축함 아라시가 허공에 물을 뿜어서 생긴 무지개였고, 맥클러스키는 이 구축함을 따라가기로 결정한다. 정말 다행이도 아라시의 뒤를 따라간 미군은 일본 항모전단을 발견했고 이를 타격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항모로 복귀할 연료도 모자랄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 무엇보다도, 마치 철저한 스케줄이 짜여 있는 듯 정확한 타이밍(연료와 폭탄이 굴러다니고 제로센들은 뇌격기를 상대하려고 전부 저공에 있는)에 결정적인 타격을 날린 급강하 폭격기 부대의 도착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이 공격순서가 의도된 거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니미츠는 그것이 절대로 미리 계획된 게 아니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건 우리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만약 급강하폭격기들이 10분만 늦었다면 우리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지도 몰랐다. 함재기들이 일본함대의 상공에 도달한 순서는 절대로 미리 계획된 게 아니었다. 조종사들이 죽을 걸 알면서도 그런 명령을 내릴 지휘관은 없을 것이다. 뇌격기 조종사들의 희생은 결코 헛된 게 아니었고, 그때 하늘은 분명히 우리 편이었다.



  • (전술했듯) 아카기는 운이 좋았다면 카가와 소류가 당할 때 무사할 뻔 했다. 원래 엔터프라이즈의 급강하 폭격기들은 카가와 아카기를 1개 대대씩 나눠서 공격해야 했으나, 이런 대규모 대함 공격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탓에 카가에게만 공격이 몰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6폭격비행중대의 리차드 베스트 대위가 아카기에게 눈길을 돌렸고, 휘하 급강하폭격기 2대를 이끌고 아카기를 공격했다. 이 때 베스트 대위와 휘하 폭격기들은 아카기의 고물쪽이 아닌 좌현쪽에서 폭격을 시도했는데, 이 때문에 명중률이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베스트 대위의 일격이 하필이면 아카기의 취약지점에 정확하게 떨어졌고, 여기저기에 방치되었던 폭탄과 어뢰가 연쇄폭발했다. 불을 끄고 싶어도 베스트 대위의 일격이 하필이면 방화커튼과 소화장비를 박살낸 터라 손쓸 수가 없었다.
  • 소류와 히류의 운명 역시 달라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요크타운의 비행대들은 뇌격기와 급강하 폭격기 모두 비슷한 시각에 일본 함대 상공에 도달했었다. 그런데 뇌격기들은 그 당시 가까이 있던 히류를 향해 곧바로 공격했지만, 급강하 폭격기들은 히류를 제껴두고 좀 더 멀리 있던 소류를 공격하러 가버리면서 뇌격기들이 먼저 공격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당시 현장 지휘관의 착각과 미군의 교리 때문이었다. 요크타운의 급강하 폭격기대 지휘관이었던 레슬리 중령은 자신들의 뒤에 제3정찰비행대대 소속의 급강하 폭격기들이 추가로 더 따라오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실제로는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일본군의 예비대에 대응하기 위해 1개 비행대는 출격하지 않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 사실이 레슬리 중령에게 통보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미 해군 급강하 폭격기의 전술교리상 먼저 도착한 비행대는 멀리 있는 목표를 공격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레슬리 중령은 주저없이 히류를 '뒤따라오는 비행대'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소류로 향했던 것이다. 물론 대기하고 있었던 제3정찰비행대대 대장 윌리스 숏 대위는 무시해버렸다. 만일, 이들이 소류 대신 히류를 목표로 삼았다면 히류는 급강하 폭격기와 뇌격기의 협공에 걸려드는 셈이 되었으므로 집중공격을 받았던 카가와 마찬가지 꼴을 당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야마구치 제독의 운명이 일찍 결정났을지도 모르고, 여기서 더 나아가면 이 공격 이후 일본군의 반격도 불확실해졌을 것이다.
  • 집중 공격을 받은 카가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공격력이 분산되었던 아카기나 소류는 불과 1~3발의 명중탄이 '영 좋지 않은 곳'[138]에 맞으면서 어찌 손 쓸 틈도 없이 전투력을 잃고 침몰에 이르렀다.

전장에는 정말 '승리의 여신'이 존재하는 것인가 싶은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가 바로 미드웨이 해전이다.

미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를 기원하며 항모전단의 집결예정지에 Point Luck(행운의 지점)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대로 되었다. 히류에 있던 야마구치 제독은 미군이 히류에게 마지막 공습을 시작할 때, "하늘은 결국 우리 일본을 버리려 하는가"하며 탄식하기도 했다.

8.2. 일본군의 패인

그러나, 승리의 여신이 미국에 미소를 보낸 그 이면에는 태평양 전쟁 초전의 승기에 들뜬 일본군이 보여준 너무나 안일한 태도와 러일전쟁 이후 일본군에 자리잡은 공격 일변도의 사상이 있었다. 여기에 "대일본제국"을 운운하며 언제부터인가 스며든 자만심 역시 일본을 패전으로 이끄는 지름길이었다. 진주만 공습 때 보여준, 미국 전체를 속여넘길 정도로 철저한 보안의식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8.2.1. 잘못된 전훈 해석

일제 해군의 이른 승리가 군과 군장비 전체에 악영향을 미쳤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의 일본 해군의 모습을 형성한 가장 큰 사건은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의 승리로, (1) 해군이 전략을 좌지우지하는 결전의 장을 선택할 수 있다. (2) 결전에서 승리해야만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다. (3) 공격이 방어보다 우위에 있다. 는 1차 대전 시절 구닥다리 사상을 일본 해군에 주입시켰다.

러일 전쟁 당시 일본 해군은 한반도를 고립시키고 러시아 해군이 출격하는 걸 기다렸다가 결전으로 유도할 수 있었다. 반면 태평양 전선은 일제가 먼저 하와이에 진주만 공습을 함으로서 전역이 드넓은 태평양 전체로 확대된 상태였다. 확대된 전장에서 원하는 곳으로 전장을 국소화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양인데, 양으로 미국을 압도할 길이 없으니 질로 승부해야 된다고 믿게 되며, 이는 야마토 다마시로 극기하면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승리병으로 귀결된다. 또한,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해군을 일거에 소멸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면서 전쟁의 향배는 결전을 통해서만 결정된다고 믿게 되었다. 그 결과는 전역을 선택하는 능력도 갖추지 못한 채 굵은 한타의 기회만 노리다가 종전까지 밀려버린 태평양 전쟁이다. 마지막으로, 러일 전쟁에서 큰 이득을 본 속도, 기동, 공격력 몰빵이 거함거포주의로 이어지면서 방어력은 거친 해양을 겨우 견딜만한 부실한 수준으로 등한시하고 규격 외의 대포와 어뢰를 과다하게 싣는 데에만 치중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제로센처럼 뻥뻥 터지는 약체 함선으로 돌아오게 된다.[139]

8.2.2. 학습능력 부재

일제 해군은 태평양 전쟁 초반 6개월 동안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승리를 거둔 이유를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결전인 미드웨이에서 승리의 요인을 모두 버린 채 전장으로 향했다. 일본 해군이 앞서 거둔 승리는 모두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산호해 해전이나 1차 웨이크섬 공방전 등 박빙에서 약소한 우위를 유지한 전선에서는 여지없이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해군 수뇌부는 승전의 요인을 깨닫지 못하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5항전과 경항모까지 긁어오기는 커녕 다른 전선으로 보내버려서 일본군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이었던 수적 우위를 스스로 버렸다. 이는 대본영 해군부의 지시와 이를 용인한 야마모토 사령장관 모두의 책임이다.

전투에서 배우는 것이 느린 건 수뇌부의 전략뿐만 아니라 전술과 군장비도 마찬가지였다. 미드웨이 해전 2개월 전 치러진 산호해 해전에서 이미 항모의 공격수단인 전투기로 상공 전투초계를 시행해야 한다는 새 전투 교리가 나왔으나, 일제 군대의 경직된 조직 문화 덕택에 요코스카에서 전훈을 점검하기 전에는 새 전훈이 조직 구석구석까지 퍼지지 못했다. 이는 잘못된 전훈으로 비롯된 공격일변도의 해군 사상에 따라 공격기를 초계비행에 소모하고 싶지 않다는 속셈과 합쳐 미드웨이 패전의 결정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반면 미군은 강직된 규율 문화가 없었기에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새 전훈을 순식간에 수용하여 산호해 해전에서의 렉싱턴에서 얻은 경험으로 미드웨이 해전 당시 요크타운을 마지막까지 살려놓는데 큰 공헌을 했다. 일제는 미드웨이의 패전 이후에도 전훈의 확산이 느렸는데, 어뢰 한 방에 다이호를 터뜨리고 나서야 운류, 시나노같은 차세대 항모에서 개선된 손상 제어 시스템을 탑재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8.2.3. 승리병

전략 수립부터 안일함과 자만심의 극치였다. 야먀모토의 가장 큰 실책은 적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의도에 맞춰 적이 움직일 거라 구상한 것이다. 미군은 이미 패배했으므로 패배한 적을 유인하고 소탕하여 보다 큰 전적을 올리고자, 적의 매복 가능성을 배제하고 전력까지 분산시켜 버렸다.

야마모토는 진주만 기습 이후 6개월간의 전투로 인해 미군이 겁을 먹었다고 짐작했고, 이건 야마모토 뿐 아니라 당시 일본군 고위 장성들의 공통적인 성향이었다. 일본이 가지고 있던 제대로 된 적과 제대로 된 전쟁을 해본 적이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쉬이 자만심에 빠진 까닭이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의 1선급 군과 싸우기 전까지 일본군은 단 한번도 제대로 된 적과 싸운 적이 없었다. 러일 전쟁에선 큰 승리를 거둬 버렸고,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싸운 중국군은 사실상 일개 군벌군 정도에 지나지 않아서 진정한 중국군으로 평가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동남아시아의 식민지들을 관리하던 유럽 열강의 군대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현대로 치면 사실상 치안유지군 정도밖에 안 되는 군이다. 일본은 고작 이 정도 수준이었던 주변국들에게 승승장구하고 있던 터라 미군을 우습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야마토를 위시한 주력부대를 한참 떨어진 후방에 배치한 것은 '안 그래도 쫄아있는 미군'이 일본 해군 주력 부대를 미리 보고 쫄아서 움직이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에서 나온 포석이었다.

더 어이없는 것은 이 작전이 '미드웨이를 점령'하고 '미국 함대를 격멸'한 뒤 북으로는 알류샨 열도를 먹고 남으로는 호주까지 위협한다는 구상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야마모토의 당초 구상은 하와이 공략이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다 보니 전력이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야마모토를 비롯한 일본군의 생각과는 달리 쫄기는커녕 미군은 진주만에서의 피해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며, 오히려 '오기만 하면 박살을 내줄테다'라며 일본군에 대한 각종 정보를 낱낱이 수집하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적시적소에 끌어모으면서 잔뜩 벼르고 있었다. 진주만 공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당해 열세에 놓이긴 했지만 일단 회복한 후엔 전시체제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다. 더욱이 군수물자 같은 보급지원에 있어서 미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이 있었기에 일본 정도는[140] 한방에 훅하고 보낼 정도로 최강이었다. 과거부터 물자가 필요하면 전쟁터 한복판을 지나는 철길을 깔아서라도 어떻게든 이기려 했던 의지를 가진게 미국인들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하였는데 이 부분에서 이미 미드웨이 해전의 승패는 결정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국은 당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 유럽전선을 먼저 도와주겠다는 조약을 맺었고, 따라서 태평양전선의 전력은 대전 기간 동안 유럽전선보다 작았다고 한다. 통상 비율은 유럽 70%, 일본 30%.[141]

3척의 항공모함이 격침된 뒤 홀로 남은 히류가 공격에 나서지 않고 후퇴했다면 비록 전투에서는 졌을지라도 후일을 도모할 여지는 그만큼 더 늘어났을 것이었다. 실제로 나구모 주이치는 히류라도 보존하기 위해 야마구치 다몬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일본 측이 요크타운이 수리중이라고 오판한 상황에서 야마구치는 히류가 미군 항모 2척을 전부 대파시켰다고 착각한 상태였고 그 상태에서 히류로 반격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야마구치의 판단은 오판이었고, 그 결과 일본 해군은 히류마저 잃고 태평양 전쟁 초반 타격력의 핵심이었던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위세를 잃고 만다.

즈이카쿠의 부재도 악영향을 끼쳤다. 산호해 해전에서 함재기를 잃었어도 배는 무사했으므로 다른 데서 항공대를 끌어다가 채웠다면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한 번 배치한 병력은 배가 수리 중이라도 다른 배에 태우지 않는 일본 해군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신병 충원도 늦었다. 미국이 요크타운을 응급수리해서 새러토가의 함재기를 배치하고 렉싱턴에 있었던 수병을 요크타운에 태워 미드웨이에 출동시킨 것과는 완전 딴판이었으며, 이외에도 알류산 열도로 항공모함 류조 준요를 보낸 통에 구멍난 항공전력은 더 쪼개져 있었다.

사실 쇼카쿠와 즈이카쿠의 부재도 자업자득인 게, 산호해 해전 당시 포트 모르즈비 침공부대에 속해있던 제 6전대 소속 중순양함들이 내보낸 정찰기들이 미 항모전단을 발견했었다. 그러나 일본군 지휘관들은 쇼카쿠의 정찰기가 발견한 미 항모를 격침시키는 것을 우선시했고 결국 그 항모를 격침시켰는데, 그것은 유조선이었다. 진짜는 제6전대가 보고한 위치에 있었던 것. 덤으로 미군의 공격으로 경항모 쇼호가 침몰했다. 일본군은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재공격에 나섰지만 쇼카쿠의 정찰기가 또 실수하는 바람에 미 항모전단의 발견에 실패하고 귀환한다. 늦은 시각이라 폭탄을 버린 후 항모에 착함하는데, 그게 미군 항모였다! 결국 공격기회를 두 번이나 놓친 일본군은 안 해도 될 다음 날의 해전을 벌였고 쇼카쿠 대파, 함재기 다수 상실이라는 결말을 맞았다. 포트 모르즈비 점령도 실패하고 쇼호도 잃고 쇼카쿠와 즈이카쿠가 미드웨이 공격에 참가하지 못했으니 대실패였다. 이 실패가 끼친 여파가 하나 더 있는데, 미드웨이로 출전한 항모 4척이 갑판에 커다랗게 일장기를 그려넣은 게 쇼카쿠 탓이었다. 쇼카쿠 함재기들이 미군 항모를 쇼카쿠로 착각한 사건 때문에 피아식별 좀 하자는 취지로 그린 것인데, 미군도 일장기를 알아보고 그걸 목표로 폭격해왔다.

8.2.4. 공격 올인, 방어 등한시

일본 해군에 자리잡은 공격 일변도의 사상은 병력 운용의 융통성을 떨어트리고 결국 참화를 불러오는 요인이 되었다. 미국이 기존의 정찰기 이외에도 함재 폭격기, 지상 폭격기까지 모조리 동원하여 40기 가까운 정찰기를 보내는 동안 일본 해군은 10기 남짓한 정찰기를 보냈다. 일본 해군의 행동은 공격에 투입할 폭격기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꺼린 것으로, 정찰기로 투입할 수 있는 함재 폭격기를 조금이라도 더 투입했다면 정찰기 한 대쯤 무전기 고장을 일으켜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점은 일본 해군도 깨달았는지 이후 미드웨이에서의 교훈을 받아들여 정찰을 강화하게 되고 후일 벌어진 과달카날 전투 중 미 해군의 가용 항공모함을 1척으로 줄여버릴 정도로 미 해군을 몰아붙이게 된다. 하지만 그 한 척 남은 미 해군의 항공모함이 무서울 정도로 일본군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을 뿐 아니라[142] 그 후 미국의 물량이 터져나와 수세에 몰리자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레이더의 부재도 일본군의 패인으로 꼽힌다. 레이더가 없어 급강하 폭격대의 접근을 알지 못해 항공모함 3척이 격침되는 상황이 발생했고, 히류 역시 레이더가 없어 미군의 접근을 파악하지 못해 격침당한 반면, 요크타운은 당시 최신의 레이더가 있었기에 일본 항공대의 접근을 파악하여 빨리 대응할 수 있었다.[14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레이더 기술은 서구의 기존 레이더 조차 따라잡지 못해 인력으로 관측해야 했고, 결국 필리핀 해 해전에선 미 해군이 레이더로 일본군의 접근을 미리 파악하고 적시적소에 요격기를 보내며 인력 대공포에 비해 엄청나게 높은 명중률로 요격해 버렸다.

공격일변도의 사상은 거함거포주의로 야마토의 주포를 낳았지만 정작 함선은 깡통 그 자체였다. 소화설비는 구역별로 단 하나만 남기고 최소화되어 하나만 파손되어도 화재를 소화할 방법이 사라졌고, 공교롭게도 개전 즉시 불바다가 된 카가와 소류가 바로 그 경우에 해당했다. 항모 설계도 북태평양의 거친 기후를 견디기 위해 폭발의 위험이 있는 폐쇄형으로 설계했으나, 개방된 미 항모처럼 더 많은 함재기를 싣기 위해 2층 격납고로 설계하다보니 무게 중심이 올라서 장갑 갑판을 설치하지 못하게 된다. 그 결과는 영국 항모와 미국 항모의 나쁜 점만 갖춘 불쏘시개 항모 함대다. 경직된 조직문화로 손상 통제 훈련조차 시행하지 않고 있었으며, 오직 장교단만 적절한 손상 통제 명령을 내릴 수 있었으나 카가처럼 함교가 통째로 날아가 버리거나 소류처럼 빈약한 통신장비가 파괴되어 배의 각부위와 연락할 수 없어 손발이 잘린 장교단은 배를 구하기 위해 모든 사병이 발벗고 나서는 미국 해군에 비해 역량이 현격히 부족했다. 전훈의 확산도 느려 종전 직전에나 화재 진압 훈련이 도입되지만 그 때는 훈련도 제대로 못하고 전선에 곧장 투입되는 시기였다.

이상의 요인들을 살펴 결론 내려보면 미드웨이에서의 일본의 패전의 원인과 책임은 단순히 “모두 나구모 때문이야”라며,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고 퉁치는 일본 극우 밀덕들의 간단한 주장은 말이 안된다. 항공모함이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보고 4척이나 되는 항공모함을 미국과 중요한 결전을 시키도록 보내면서 겉만 요란한 작전을 세움으로 정작 전력을 뿔뿔이 분산하여 제일 중요한 항모들을 호위할 수상함들은 턱없이 부족하게 준 야마모토 이소로쿠에게 패전의 책임이 있다. 미군은 항모 작전시 상시 전함과 순양함 구축함들을 넉넉히 데리고 다니면서 함대 방공을 책임지게 했다. 반면에 미드웨이 해전 당시 수상함 전력이 미국에 비해 압도적임에도 일본은 겨우 공고급 순양전함 2척과 일부 순양함 구축함을 함대 호위랍시고 딸려 보냈다.[144] 이는 항모를 중요시한다면서 정작 작전의 선두에 세우며 항모를 몸빵으로 쓰는 인지부조화적인 행동이나 다름없었고 결국 일본 항모 4척은 용궁행이 되어버렸다.

결국 대전 당시 일제 해군은 자평하는 것처럼 근대화되고 선진적인 조직이 아니라 사실 대단히 편협한 세계관을 가진 조직이었다. 반면 2차 세계대전은 전세계를 배경으로 모든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과학적 역량을 총동원한 숨가쁘게 변하는 전장이었다. 일본 군부가 1941년 전쟁을 일으킨 건 자원의 한계 뿐만 아니라 이해력의 한계이기도 했다. 영국 육군 윌리엄 슬림 원수의 일본군 지휘부에 대한 평가는 미드웨이를 비롯해 계속해서 반복된 일본군의 패인을 요약한다.
일본군은 계획대로만 일이 풀리면 개미처럼 용감하고 대담했다. 그러나 계획이 틀어지면 혼란에 빠졌다. 일본군은 새로이 변화된 상황에 느리게 적응했고 언제나 원래 계획에만 매달렸다. 무작정 모든 것이 잘되리라고 믿는 지휘관에게 이는 특히 위험했다. 차질이나 지연은 일본군의 작전에서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군 지휘부의 근본 문제는 육체적 용기가 아닌 정신적 용기의 부족이었다. 일본군 지휘관들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 계획이 잘못되었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 일본군 지휘관들은 잘못을 시인하는 대신 작전 수행에 필요한 자원이 부족한 걸 잘 알면서도 수하에게 명령을 그대로 전달했다. 이 책임 전가는 반복적으로 재앙을 불러왔다. ...일본군은 의지 측면에서는 높은 점수를 얻겠지만 유연성 부족으로 인해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8.3. 해전 이후

8.3.1. 미국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도 약 1년 가까이 일본 해군의 세력이 우세를 점했다. 흔히 태평양 전쟁에서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라는 의의 때문인지 진주만 공습 이후에 분노를 해서 확충한 함대를 미드웨이 해전 당시부터 투입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군함을 많이 건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연히 생산시간이 필요하다. 미드웨이 해전에 참여한 미 해군 함정 중 새로 진수된 함선은 한척도 없었고 그저 진주만 공습을 피해 운 좋게 살아남은 군함들만이 있었을 뿐이다. 당시 미 해군은 사용가능한 항공모함이 3척밖에 없었고, 그중 요크타운은 응급수리만 된 걸 억지로 끌고 나와서 이동 중에도 기술자들이 승함해서 계속 수리했을 정도로 미 해군으로서도 전력을 쥐어짜내 동원한 전투였다.[145] 미군의 물량이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온 건 과달카날 전역의 막바지부터였고, 과달카날 전역에서 항공모함 와스프, 호넷을 상실하고 새러토가가 전열 이탈하여 가용 가능한 항공모함이 엔터프라이즈뿐이었던 시기도 있었다.[146]

따라서, 미드웨이 해전은 미군의 반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신호탄이라기보다는, 진주만 이후 이어지던 일본의 일방적 공세를 한번 크게 꺾어버림으로써 일본 해군을 주춤하게 만들고 전선을 어느 정도 안정화시킴과 동시에 과달카날 전역부터 시작되는 반격의 날을 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기회였다고 볼 수 있다. 미군은 가장 약했던 시기에 치러진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를 가져오며 위기를 넘길 수 있었고 태평양 해전의 우세를 가져올 발판을 마련했다.[147]

8.3.2. 일본

일본 해군에게 있어서는 주력 항공모함 4척과 수많은 함재기들을 잃어버리며 치명타를 입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미드웨이 이후로 항공전에서 일본군이 열세에 놓였다는 기존의 통설은 다소 오해가 있다. 당시 참전한 일본 해군 함재기들 대부분은 미드웨이 공격대나 함대 방공에 나선 기체를 빼면 미 함대와 직접 교전을 벌인 것도 아니었고 항공모함들이 순식간에 침몰한 것도 아니라 공격을 해보기도 전에 기습을 받아 화재나 유폭으로 인해 전투불능 상태에 빠진 뒤 어느 정도 여유를 두고서 가라앉아서 함선에서 대피할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덕분에 공격에 직접 휘말리지 않은 경우에 한해서 파일럿을 포함한 많은 항공기 승무원들은 안전하게 다른 배로 옮겨탈 수 있었다.[148] 일본군 측 파일럿의 손실은 아카기 7명, 카가 21명, 소류 10명, 히류 72명의 총 110명으로 이 전투에서 208명의 파일럿을 잃은 미군 측보다 오히려 적은 수다. 여기서 히류의 파일럿 손실이 큰 이유는 다른 군함들과는 달리 초기 피해가 없어 오히려 배가 가라앉는 순간까지 미국 해군 함대와와 전투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항공기 정비요원이라면 이야기가 약간 달라진다. 항공모함들이 최초로 타격을 입은 지점들이 하나같이 비행갑판과 그 바로 아래에 있는 격납고인데다 하필 공격당한 시점이 항공기 출격을 준비하던 때인지라 사방팔방에 연료를 만재한 항공기들과 무장들이 널려 있었으므로, 그때 그곳에 몰려 있던 정비요원들 대다수가 최초 타격 이후 화재와 유폭에 휘말려 수 분만에 전사해버렸다. 피해의 전파 속도가 느렸던 아카기를 제외한 나머지 세 척의 항공모함에서 저마다 백단위의 정비요원 손실을 기록하면서, 미드웨이 해전 당시 제1항공함대가 보유한 총 정비요원 1800여명 중 40%에 달하는 721명의 정비요원을 잃었다. 문제는 당시 일본 입장에서는 이들 정비요원들 역시 조종사들만큼이나 귀중한 인력이었다는 것이었다. 산업 기반이 취약했던 당시의 일본의 민간 부문에서 기계 정비에 종사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일본 해군의 항공기 정비요원들은 대부분 조종사 교육과정에서 탈락한 인원들이 주가 되어 집중적인 교육을 받고 투입된 인원들이어서 손실이 발생하면 이를 단기간내에 보충하기가 힘든 처지였다. 더군다나 당시에 투입된 정비요원들 역시 조종사들과 마찬가지로 중일전쟁때부터 수년간의 실전경험을 쌓은 베테랑들이었다는 것이 더 큰 문제. 한마디로 말해서 비행기만 주면 파일럿도 가능하고, 정비도 가능한 엘리트급 요원들이 이 전투에서 갈려나간 셈이다.[149]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 해군의 항공전 역량을 박살낸 건 과달카날 전투와 그 뒤에 이어진 2년간의 소모전이었으므로 상기한 인명피해는 그 자체로는 큰 의미가 없다 치더라도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는데 바로 작전에 참가한 제1, 제2항공전대가 사라진 것. 제1, 제2항공전대는 제1항공함대의 중핵으로 단순히 항공모함 몇 척, 항공기 몇 대 수준의 손실이 아니었다. 고속 정규항공모함, 항공기, 파일럿과 항공기 승무원, 정비요원, 함상 운용요원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하나의 조직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기 때문. 더군다나 제1, 제2항공전대는 일본 해군에 항공모함이 탄생한 이래 수년에 걸친 실전경험으로 단련되어 있었고, 그에 따른 숙련도와 전투 능력은 당시까지 다른 항공전대가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일본 해군의 전략은 외곽 방어망 곳곳에 배치된 지상비행장이 방어의 근거지가 되고 유사시 적을 방어선 가까이 끌어들이는 동안 항공기를 집결하여 격퇴하는 것이었다. 위의 전투 발발 전 일본군의 상황을 설명한 문단에서 나온 MO 작전과 FS 작전은 이러한 방어 구상을 공고히 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이러한 구상 아래 항공모함 기동부대는 태평양 상의 외곽 방어망을 설정하고 유지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기동예비대였다. 그리고, 이를 구성하는데에는 고속 정규 항공모함들로 구성된 항공전대가 최소한 3개가 필요했다. 동부 뉴기니에서 남태평양에 이르는 광대한 구역에서 벌어질 미군의 공격을 막으려면 재빨리 해당 구역으로 이동해서 한 번에 대량의 항공기를 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해군에게 있어서 제1, 제2항공전대는 이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핵심이었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도 일본의 항공모함 및 항공전력의 수적 우세는 여전했으나 질적인 부문에 있어서는 결코 우세를 장담할 수 없었다. 살아남은 항공모함들 다수는 규모가 작아서 항공기를 대량으로 한 번에 운용하기 어려운 경항공모함들이었고, 그나마 기동예비대로 쓸 수 있는 고속성능을 가진 항공모함은 류조, 쇼카쿠, 즈이카쿠뿐이었다. 규모가 큰 항모라면 준요가 있지만 속도가 느렸고, 류조의 경우 정규항공모함으로 취급받았지만 크기가 작았기에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함대 전체의 항공기 운용능력 저하로 이어졌고 그 반대 급부로 구축함 같은 호위세력이 더 필요해졌지만, 당시 일본 해군의 능력으로는 호위세력의 증강이 매우 버거웠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필리핀 해 해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운용이 이전보다 소극적으로 변한 건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항공모함과 그에 따르는 항공전대의 운용이 소극적으로 변하면서 일본 해군의 항공력은 지상 비행장에 과하게 의존하게 되었고, 이는 과달카날 전투를 필두로 한 이후의 전투에 있어서 일본군의 선택지를 크게 제한하는 변수가 되고 말았으며 미군은 이 약점을 놓치지 않았다.

일본은 미드웨이 패전으로 항모기동부대를 잃은 이후도 그전에 세운 대전략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MO 작전(동부 뉴기니 완전 장악)과 FS 작전(호주 동쪽 남태평양의 도서지역 장악)의 큰 골자를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략 수행에 필요한 핵심 전력인 항모기동부대가 절름발이가 되는 바람에 이후의 작전은 항모의 지원을 상당부분 내지는 아예 배제하는 것을 전제로 실행해야 했다. 동부 뉴기니에서는 지상군이 육로를 통한 포트모레즈비 직접 공격을 시도했고, 남태평양에서는 도서지역 장악의 교두보 마련을 위해 솔로몬 제도 남쪽 끝부분의 과달카날을 비행기지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능력을 벗어나 무리하게 밀어붙인 결과, 동부 뉴기니에서는 연합군의 반격(밀른만 전투, 코코다 트랙 전투, 부나-고나 전투)에 의해 도로 밀려나 버렸고, 과달카날에서는 미군 항공대에 고전하며 분산 격파 당하면서 자신들의 역량을 넘어간 소모전에 휘말려 버렸다. 특히, 과달카날에서의 소모전은 일본군의 전투 역량, 특히, 항공전 역량을 확실하게 깎아먹었고, 이로 인해 일본은 점점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만약 미드웨이 패전 이후 일본이 항공 열세임을 인정하고 대전략을 완전히 새롭게 짰다면 태평양 전쟁은 좀 더 치열하게 전개됐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은 미드웨이에서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패배의 영향을 분석하고 대응하는 것에도 실패했고 이것이 패망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진주만의 실패 이후 미국이 실패를 분석하고 현실적인 대응책을 짰던 것에 비하면 굉장히 상반된 대응이라 할 수 있다.

일본 해군이 태평양 전쟁 이전에 수립한 전략계획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입은 피해로 인해 박살났으며, 지금껏 일본이 쥐고 있던 전쟁의 주도권은 미국으로 넘어가버렸고, 일본은 태평양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돌아서서 공격에 대비해야 되는 입장이 되었다.
8.3.2.1. 일본의 인지부조화
空母エンタープライズ型1隻、ホーネット型1隻撃沈。米軍機120機。日本軍損害 空母1隻喪失、巡洋艦1隻大破、35機喪失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급 1척, 호넷급 1척 격침[150]. 미군기 120대. 일본군 피해 항공모함 1척 손실, 순양함 1척 대파, (비행기) 35대 손실)
1942년 6월 10일, 대본영발표

위와 같이 일본은 이 전투의 결과로 인해 계획했던 태평양 전쟁 전략이 상당히 꼬여버렸지만, 오히려 전략 자체를 수정하지 않은 채 부분적인 방법론만 바꾼 채 전쟁을 마저 수행하려 들었다. 그 배경에는 일본 해군, 그리고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전쟁 수뇌부가 사상 최초의 대패배를 직시하지 않고 어쩌다 실수로 당한 거라며 결과에 대해 눈을 돌린 것도 모자라 사실을 적극적으로 은폐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대본영 해군부는 미드웨이 해전의 참혹한 전과를 철저하게 은폐하였으며, 미드웨이에서 패배한 시점에서 이미 전략적 가치를 잃어버린 알류샨 열도 점령을 크게 선전했다. 그리고 간신히 살아남은 조종사와 승조원은 모조리 극비리에 연금시켜 버렸다. 진주만 공습의 1차 공격대장이었던 후지타 미츠오 중령도 이 때의 수감자 중 한 명이었다. 전후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이 때 "국가의 영웅이었던 우리가 한 순간에 죄인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며 자괴감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아카기 전투기 부대장 이타야 시게루 중좌나 폭격기 부대장 에구사 타카시게 중좌 등의 중견급 간부들과 부상자들은 외부와의 접촉도 금지되고 모두 연금되었으나, 이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고, 부상을 입지 않은 초급 장교들과 사병들은 연금도 모자라 아예 남방전선에 총알받이로 보내져 버렸다. 이것은 가서 조용하게 죽으라는 소리나 다를 바 없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일본 해군 고위층들의 의도대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실제로 작전을 입안하고 지휘했던 고위 지휘관들은 그 누구도 문책받지 않았다. 만약 태평양 함대가 이렇게 처절한 패배를 당했다면 니미츠 제독과 스프루언스 제독, 플레처 제독은 전부 워싱턴으로 소환되어 청문회는 기본이며 군사재판까지 받고 최악의 경우 군생활 및 군인으로서의 명예도 끝장났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어이없는 일이였다. 여기에는 당시 일본 해군 연합함대, 그리고 그 총 지휘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위상이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이었다. 진주만 공습을 결정하던 때나 미드웨이 해전을 결정하던 때나 야마모토 휘하의 연합 함대는 자신들보다 상위 조직인 대본영 해군 군령부와 사사건건 대립하고 항명이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관철시켰다. 그리고 전쟁 초기 승전의 영광은 오롯이 자신들만이 챙겨갔다. 이런 판에 패전을 이유로 야마모토를 비롯한 연합함대 지휘부를 건드릴 수 있는 존재는 당시 일본 내에서 없었다.

그 은폐 공작은 철저했다. 전시 내각총리 도조 히데키도 미드웨이 해전의 실상을 몰랐고, 몇 달 뒤 쇼와 덴노가 자신과 다른 수치로 알고 있는 것을 알고야 해군의 보고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챘을 정도였다. 일본의 최고위 외교관이자 윤봉길 의사의 물통 폭탄에 한쪽 다리를 잃은 시게미쓰 마모루도 미드웨이 패전 후 몇 달이 지나서야 입소문으로 패전의 소식을 듣고 큰 충격에 빠졌다. 덤으로 이런 은폐공작은 하루 이틀 일도 아니어서, 일본 군인들과 관료, 국민들 대부분이 자기 나라가 처참하게 망해가는 꼴을 조금씩이나마 알게 된 것은 1944년 6월, 필리핀 해 해전 사이판 전투의 패배 때부터였다.[151] 이때서야 도조 히데키 내각이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지만, 물론 전황을 호전시키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152]

이러한 은폐 공작의 부작용은 심각해서,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 육군의 병력 투입을 주저하게 만들어 과달카날이 미군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고, 더 나아가 이후 일본의 전쟁 수행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주력을 잃은 해군은 똥줄이 타 들어가는데 육군에서는 '해군은 미 해군 박살냈다면서 왜 저러는 건가?' 이런 식의 반응이 나와버리니 사사건건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일본군은 자국 언론에 미군 항공모함 3척 격침, 자국 항공모함 1척 격침이라는 완전히 거꾸로 된 발표를 했으며, 일본 언론은 "이로써 우리 제국의 방위 수역은 미합중국의 서해안까지 확장되었다."는 설레발을 치기도 했다.

은폐 공작과는 별개로 일본군, 특히 일본 해군이 미군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바뀌질 않았다. 놀랍게도 전쟁 후반기에 이르기까지 일본 해군 내에서 미드웨이 해전은 어쩌다가 실수한 거라는 인식이 여전히 팽배해 있었다. 이는 단순히 적을 얕잡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치부를 숨기기에 급급하고 정신승리만 하던 걸로도 모자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 전과를 과대포장하고 이를 또 검증없이 믿거나, 혹은 실상을 알고도 묵인하면서 마치 집단 최면에 빠진 것처럼 자신들을 속이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본의 인지부조화와 정신승리는 이후 태평양 전쟁의 전개 과정에서 심심찮게 드러난다. 대표적인 사례가 과달카날 전투 대만 항공전 결과에 대한 일본군의 반응이다.[153]

8.3.3. 여담

일본도 미드웨이의 전훈을 연구 끝에 이런저런 대비책과 항모피격시 대응 방법 장갑항모 도입 등 여러 대비를 했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최신형 장갑항공모함 다이호였지만 첫 출진이 필리핀 해 해전, 즉 '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 개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잠수함이 쏜 어뢰 한 발 맞고 대미지 컨트롤 미숙으로 인해 폭침당하는 참사를 겪게 되며, 그 뒤에 나온 시나노의 경우는 원래 야마토급 전함 3번함으로 만들던 걸 항공모함으로 급하게 개조한 거라 미완성 상태에서 개장 완료작업을 하러 가던 중에 역시 잠수함 단 한 척이 쏜 어뢰 단 네 발 맞고 용궁행 편도 티켓을 끊고 가버렸다. 참고로 시나노는 일본군에서도 여러모로 흑역사인데, 단 한 척의 잠수함이 격침시킨 군함 중에 이것보다 더 큰 배는 근 80년이 다 넘어가는 지금도 없다.

열세의 함대로 승리했고 전쟁의 전환점이 된 전투이기에 미국인들에게 미드웨이 해전은 굉장히 자랑스러운 전투로 회자된다. 우리가 명량 해전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두 해전은 전후 경과도 비슷한데, 칠천량 해전/ 진주만 공습에서 궤멸당한 함대가 잔존 부대를 긁어모아 압도적인 전력차의 상대를 각개격파(명량 : 지형을 이용해/미드웨이 : 일본군의 지나친 병력 분산 배치)하여 대승을 거둔 뒤 후퇴하여 전력을 보존함은 물론 적의 전략 의도를 좌절시켜 전쟁의 승기를 잡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두 전설적인 지휘관의 이름은 함선명으로 영원히 남았다.

9. 이야깃거리

9.1. 요크타운

항공모함 요크타운의 분전은 미군 승리의 비결 중 하나로 꼽는다. 원래 산호해 해전에 참여했던 요크타운은 일본의 경항공모함 쇼호를 격침했지만, 자신도 수리에 90일이나 그 이상 걸릴 거라고 보고될 정도의 피해를 보았다. 일본군 측에선 요크타운이 산호해 해전에서 격침되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된 것처럼 미군은 가뜩이나 부족한 전력에서 요크타운이 이렇게 열외로 하면 더더욱 곤란한 상황이었다.

이미 진주만 공습으로 전함을 상실한 태평양 함대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전력인 항공모함마저 잃는다면 미 해군은 일본의 연합함대에 대적할 수 없었기에 어떻게 해서라도 항모 전력을 유지해야만 했다. 요크타운이 진주만에 도착하기 전 가장 수리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엘리베이터나 기관 쪽은 문제가 없다는 사실과 응급수리라면 2주 이내에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니미츠 제독으로선 해전이 목전에 다가온 상황에선 2주나 90일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니미츠 제독은 진주만에 도착하여 드라이 독에 입거한 요크타운의 상태를 직접 살펴보았고 제독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이 함선을 3일 안에 복귀시켜야 한다."

이 명령이 떨어지자 요크타운에 1,400명 정도의 기술진이 달라붙어 정말로 사흘 만에 전투가 가능한 수준까지 만드는 기적을 연출했다. 손상 부위를 강판을 이용해 급히 용접하느라 환기를 시킬 수 없었는데, 그 결과 실내온도가 50도 정도까지 올라가 작업원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응급수리를 마치고 함재기가 착함할 수 있을 정도로 수리하는 데 성공했지만, 워낙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미드웨이 해전 내내 기술자들이 함선 내에서 계속 수리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다 폭탄 3발을 맞고 엄청난 불기둥이 솟으며 격침되는 듯했으나 그걸 또 1시간 만에 수리했다. 그때까지도 일본은 미국이 항공모함 2척만을 가지고 온 줄 알고 있어서, 요크타운을 두 번 보고 미국의 항공모함을 전부 침몰시킨 줄 알았다고 한다. 위에서 인용된 1942년 6월 10일자 대본영발표문 역시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야마구치 제독이 한 척 남은 항공모함 히류를 퇴각 시켜 전력을 보전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요크타운은 미드웨이 해전 전체의 양상을 바꾼 것이다. 결국 침몰하기는 했으나 요크타운은 엔터프라이즈와 더불어 미 해군의 전설이 되었다.

요크타운을 포함해서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은 방뢰능력이 없다시피 한 레인저와 다르게 어느 정도 어뢰 대응 능력을 갖추었지만, 워싱턴 군축 조약의 배수량 제한 내에서 만들어진 설계다 보니 기준이 TNT 180kg으로 TNT 320kg에 대응하는 전함보다 낮았으며 그 이상 탄두 중량을 지닌 어뢰에 취약하다. 하지만 요크타운과 호넷 모두 대응 능력 이상의 어뢰에 피격당해 항해 능력을 상실했지만, 순식간에 침몰한 경우는 없었다. 최후에 I-168의 뇌격으로 대미지 컨트롤과 인양을 포기하고 침몰하기 시작한 요크타운이 가라앉는 데도 오래 걸렸으며 이건 동생인 호넷도 마찬가지였다. 엔터프라이즈는 개장을 통해 벌지를 추가 어뢰에 대한 방호력을 보완했으며 피격당한 적은 없었다.[154]

9.2. 후치다 미츠오

본 해전에서 항모 아카기의 항공대장으로 참전한 후치다 미츠오(당시 계급 : 중좌)는 참전 직전 받았던 맹장 수술 후유증에다 아카기에서 탈출하던 도중 입은 부상[155]이 겹치는 바람에, 더이상 비행 임무에 나서지 못하고 지상근무에 종사하다가 패전을 맞았다. 미군 포로 생활을 하면서 개신교로 개종하여 선교사로 여생을 보냈으며, 훗날 1972년에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일제의 식민통치를 사과하는 연설을 하였다. 1966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1976년에 당뇨병으로 사망한다.

이대로 끝났다면 굳이 별도의 항목을 할애할 이유가 없었겠지만 훗날 후치다 미츠오는 미드웨이 해전사의 연구에 오랫 동안 영향을 끼친 존재가 되었다.

진주만 공격과 미드웨이 해전에 중견급 간부로 참전했고, 전쟁 후반기에는 주요 부대들의 참모를 지낸 후치다 대좌(종전시 계급)의 경력은 전후 미군의 이목을 끌었고, 심문과정에서 보여준 후치다의 품성과 언변은 미군 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면서 전후 처리과정에서 관련 자료 정리 작업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은 훗날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전문가들과 쉽게 접촉하여 인맥을 쌓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자연스레 태평양 전사 연구분야에서 후치다의 영향력도 높아지게 되었다.

이후, 전쟁의 상흔이 조금씩 아물어가던 1951년에 후치다는 그 유명한 "ミッドウェー"(영문명 "Midway: The Battle That Doomed Japan, the Japanese Navy's Story", 1953년에 미국에 출간됨.)를 출간하였고 이 책은 일본과 미국 양쪽 모두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일본에서는 '그 당시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이겼을텐데...'라는 식의 자기만족을 선사했고, 미국에서는 당시 참전한 미군들을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시의 적군이 해전에 참전했던 자국 장병들을 모든 불리한 조건들을 뒤집어 버리고 완승을 가져오는 기적을 일으킨 영웅으로 묘사하고 추켜세웠으니 인기가 없을리가 없다[156]. 거기에다 위에서 언급된 배경이 더해지자 후치다의 저서는 순식간에 미드웨이 해전사의 바이블이 되면서 많은 연구가들이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고, 미드웨이 해전사에 있어서 후치다의 권위도 공고해졌다. 본 문서에서 언급된 승리병이라는 단어도 후치다 미츠오가 처음 사용한 것이었다.[157]

그러나 본 문서의 곳곳을 잘 살펴봤다면 유달리 과거의 통설이었다는 식으로 기술된 내용이 많이 보일 것이다. 그 내용들의 출처는 다름 아닌 그의 저서였다. 본문에서 그 내용들이 부정된 것을 보면 짐작하겠지만, 그 저서의 내용은 곳곳에 오류투성이였다. 알류샨 공격이 양동작전이라든가, 당시 일본 해군의 함대간 교신문제, 정찰과 관련된 내용들, 함재기의 무장전환 및 피격 당시와 피격 직후의 상황과 같은 함대의 전반적인 상황, 나구모 제독의 추태와 야마구치 제독의 활약, 미드웨이에서 일본 해군 항공대의 괴멸적 피해 등등 수많은 부분들이 후치다의 착각이나 오해, 심지어는 창작과 과장으로 채워진 내용들이었다. 사실 이건 당연하다면 당연한게 미드웨이 해전 당시 후치다 자신은 전체 함대의 말단 조직이랄 수 있는 비행대의 일원이었지 함대 전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함재기 및 함선 운용과 같은 타 병과와 관련된 내용에 대한 깊이있는 지식도 없었다.[158] 저서를 출간할 당시에 참전자들을 두루 만나면서 오류를 수정하였더라면 모르겠으나 그런 정황은 없다.

따라서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 해군의 구체적인 항공모함, 함재기 운용실상이 미드웨이 해전사의 연구에 반영되면서 후치다의 저서는 그 권위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일본내에서는 이미 1970년대에 해상자위대의 공식전사(전사총서戰史叢書라는 이름의 총서로 출간됨. 미드웨이 해전은 제43권)가 발간되면서 그 권위를 잃었고, 미국에서는 1990년대 중반부터 후치다의 저서에 나온 내용들을 본격적으로 뒤엎기 시작했고, 2000년대 들어서 그 권위가 완전히 사그러들었다.[159]

결과적으로 후치다는 당시 일제 해군의 상층부에 만연한 남탓하기, 책임 돌리기,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역사를 날조하는 행위를 훌륭히 재현했으며, 서양 사학계는 후치다가 퍼준 영어 사료를 신봉하여 60여년 간 잘못된 신화를 쌓아올리고 있었다. 정작 일본에선 옛적에 논파된 후치다의 주장을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몇 십 년이나 찾아보지 않은 건 학자로서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후치다의 저서는 비유하자면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처럼 더이상 사료로서의 가치는 없는 셈이다.

아래는 후치다의 주장에 대한 논박을 정리한 내용이다.
  • 6월 4일 오전의 결정적인 5분간 당시 미군이 급강하 폭격을 시작하는 순간 일본 항모는 총반격을 위해 몇분 내 출격 가능한 대기 태세였다. - 전적으로 거짓말이며 최소한 30분 이상이 필요했다.
  • 알류샨 작전은 미 함대를 진주만에서 유인하려는 고도의 술책이었다. - 다른 목적이었다. 미드웨이와 동시에 실시된 알류샨 작전은 양동 작전이 아닌 빈집털이 용이었다.
  • 야마모토가 나구모에게 결정적인 정보를 보내지 않아 나구모는 미드웨이의 위협을 몰랐다. - 교신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교신할 필요도 없었다. 알 수 없는 것은 나구모가 이미 충분히 주어진 정보에도 합리적인 행동을 하지 않은 이유다.
  • 만약 6월 4일 오전 일본이 이단 색적을 시행했다면 제시간에 급강하 폭격기 부대를 찾아내어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아마도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은 해당 교리가 없었으며 정찰은 안중에도 없었다. 후치다는 없는 걸 있는 걸로 날조했다.
  • 나구모의 승전을 위한 노력은 도네 4호기의 발함 지연으로 실패했다. - 사실이 아니다. 이미 나구모는 예상보다 일찍 미 함대를 발견했다. 패전으로 이어진 진정한 정찰 실패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 나구모가 폭탄 교체 지시를 내리지 않았더라면 공격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 사실이 아니다. 미군이 계속 공격해왔기 때문에 계속된 발함과 착함 와중에 공격대를 비행갑판에 올릴 기회는 없었다.
  • VT-8 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으며 급강하 폭격 기회를 만들었다. - 사실이 아니다. 승패를 결정지은 급강하 폭격이 일어나기 1시간 전에 이미 전멸했다. 따라서 일본 직위기들이 원래 방향과 고도로 복귀할 기회는 충분했다. VT-8이 공헌한 것은 VT-6처럼 공격대 발진의 방해였다.
  • 일본 해군 항공대는 미드웨이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 사실이 아니다. 1/4 이하만 손실했고 일본 해군 항공대의 정예가 궤멸된 건 솔로몬 제도에서의 장기 소모전이다.

9.3. 일본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했다면?

역사학자 시어도어 쿡 주니어 교수는 대체역사 에세이집인 ' 만약에'에서 '일본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했었다면'을 주제로 아래와 같이 가정하였는데, 그 내용이란 게 피지, 사모아, 뉴기니 하와이를 비롯하여 남태평양 일대를 장악하고 호주와 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며 인도와 실론을 위협했을 거라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동시에 태평양 전쟁이 교착화되어 유럽 전쟁도 보다 더 지속되었을 것이라고. 그러나 당시 일본군을 생각하면 하와이는 고사하고 위에서 말했듯이 미드웨이섬 하나 점령하는 것도 성공했을지 의심스럽고, 툴라기를 점령했던 5월의 시점에 FS작전의 목표이던 피지에는 벌써 1개사단(미 육군 제37보병사단)이 배치되어 있었고 역시 목표지점이던 사모아에도 7해병연대를 포함해서 15,000명에 달하는 병력이 있었으며 뉴헤브리디스의 에파테에 5,800명, 그리고 역시 목표지점이자 미군의 사령부이자 중요항구이던 뉴칼레도니아의 누메아에는 아메리칼 사단을 주축으로 하는 22,000명이 배치되어 있고 호주 본토에도 미군 2개 사단(32, 41보병사단)이 있기에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서 1개 사단 정도는 충분히 동원할 수 있고 거기에 6월 14일에 뉴질랜드에 도착한 1해병사단까지 방어에 돌릴수 있으므로[160] 사실상 보급선 차단이라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미드웨이를 미군이 승리 했다는 결과론만 놓고 보는 경향 때문에 그렇지, 당시의 미군은 여기서 패배하면 뒤가 없는 상황에 항모격차를 줄이기 위해 산호해해전에서 타격을 입은 요크타운을 3일만에 긴급수리와 함선으로써 기능을 할 정도의 핵심적인 수리를 마친 뒤 투입시키고 미드웨이에 활주로 건설해 전투기를 배치하고 요새화를 하는 등 사활을 건 전투였기 때문,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의 작전목표는 미 해군에 대한 물리적 격멸이 아니라 미드웨이 섬에 대한 공격이었고, 상술했듯이 진주만 기습으로 하와이를 어마어마하게 요새화한 미군은 미드웨이에게도 충분한 요새화를 끝마쳐 두었다. 물론 하와이에 비하면 못하지만 미드웨이도 충분히 강한 요새고, 패배해 해상전력을 전부 잃지 않은 이상 일본군이 끌고 간 4척의 항공모함과 전함, 1만을 좀 넘는 상륙전력으로 감당할 수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의 항모기동부대가 완전히 궤멸했다면 미 해군 역시 앞으로의 전투에서 고전을 강요받았을 것이다. 우선 태평양 지역 연합군 반격의 첫 발인 과달카날 전역이 벌어지지 않거나 연기되어 과달카날에서 소진을 강요받았던 일본군의 수상함 전력들, 항공 전력들이 그만큼 더 남아있었을 것이며, 1항전을 위시한 일본군 항모기동부대의 건재 때문에 미 태평양 함대는 본토에서 건조 중인 에식스급 항공모함, 인디펜던스급 경항공모함들이 사라토가, 와스프와 함께 궤멸당한 항모기동부대를 본 전투력까지 재건할 때까지는 과달카날 전투와 같은 적극적인 반격이 힘들어져 전쟁이 1~2년 길어질 가능성이 높다. 대서양에서 날뛰던 독일 크릭스마리네 유보트들에 대항하기도 빡빡했던 미 해군에겐 일본군 잠수함의 통상 파괴도 위협적인 요소다. 일본군 잠수함들이 하와이와 미드웨이를 말려죽일 수준까지 되었는가? 는 의문부호가 붙지만 미 해군 입장에서 마이너스 요소가 되었음은 되었지 플러스 요소가 되지는 않는다.

또한, 일본군에도 점령지를 확대할 기회가 됨은 물론이다. 미드웨이 해전을 연구하여 책까지 출간한 조너선 파셜과 앤서니 털리는 미드웨이에서 일본군이 승리할 경우 일본군은 뉴헤브리디스 제도, 피지, 사모아는 물론 심지어 호주 북부까지 진격할 수 있었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물론 조너선 파셜과 앤서니 털리는 미드웨이에서의 일본군의 승리가 전쟁의 승리를 가져다 줄 수는 없다는 것이라는 것을 함께 지적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미국의 수많은 전쟁 병기를 생산하는 산업 시설들은 일본군이 절대 타격할 수 없는 지점에 있었고, 미드웨이 해전이 미 태평양 함대 항모기동부대의 궤멸로 끝났다고 해서 본토에서 건조 중이던 에식스급 항공모함, 인디펜던스급 경항공모함, 아이오와급 전함, 플레처급 구축함 등의 수많은 신예 함선들과 F6F 헬캣, F4U 콜세어와 같은 신예 전투기들의 생산, 새로운 미군 사단들의 배치가 중단되는 것도 아니며, 1944년의 사례에서 입증하였듯 미군은 중부 태평양에서 직접 공격하여 일본군 방어선을 뚫고 일본 본토까지 진격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 항모기동부대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더라도, 미군은 이 패배를 만회할 능력과, 입지 역시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군은 실론 점령에 4개 사단 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중국을 주 전장으로 삼는 일본 육군은 실론 점령에 사단급 병력을 내놓을 의사가 전혀 없었다. 무타구치 렌야 임팔 작전을 성공시키고 찬드라 보스를 활용하는 시점까지 갔다면 실론을 생각했겠지만 당시에는 이중 그 어느 것도 상상조차 한 사람이 없다. 연합함대 또한 전쟁연습을 해보았지만 결과가 너무 실망스러워서 실론 점령을 포기하였다.

결론적으로 일본 제국이 설령 미드웨이에서 승리한다고 가정해도 당시 제반 여건을 고려할 때 일본이 얻을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으며 되려 보급선을 늘리는 자충수를 두는 행위에 불과했을 것이라는 평이 우세하다.

물론 같은 승리여도 전투 결과가 어디까지 벌어졌는가에 따라서 미국에게 지대한 타격을 줄 수는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미군이 정보탐지로 공격목표가 미드웨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알아냈음에도 삽질 및 혼선으로 미드웨이에 별다른 방비를 안했거나, 모든 상황이 실제 역사와 동일했음에도 운에 운을 거듭해서 만약 미국의 손실이 일본군 정도로 처참했더라면 태평양 전쟁의 양상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다.

특히, 일본군이 이 해전과 필리핀 해 해전 등으로 각각 숙련 항공정비병과 숙련 파일럿들을 대거 잃어버림에 따라 항공전력이 급감한 것을 떠올려보면, 인적 자원은 잃지 말아야 할 중대한 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미드웨이 해전에 참여한 미국 태평양 전력 또한 서론에서 언급한 니미츠 제독의 생각대로 잃지 말아야 할 정예였고, 만약 이들을 잃었다면 미군도 생각 이상으로 곤경에 처할 수 있었다. 물적 자원과 달리 인적 자원은 쉽게 복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실제 일본군이 입었던 손실에 준하는 피해를 미군이 입었다면, 태평양 전쟁은 훨씬 더 지리멸렬한 소모전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소모전이 계속 이어진다면 자원이 풍부한 미국이 결국 이겼을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만하지만, 문제는 전쟁은 이런 식으로 지속할 수 없다는 것. 결국 자국의 민심과 정치적인 영향으로 소모전이 지속되면 양국은 적당히 합의점을 보고 전쟁을 끝내려 할 것이기에 일본은 패망이나 제국의 해체까지는 막았을 수도 있다. 재미있게도 이후 미국은 이런 일을 실제로 겪게 되는데 그것이 베트남 전쟁.[161][162]

9.4. 미드웨이, 그리고 하와이 상륙전이 벌어졌다면?

미드웨이는 철저히 준비되고 있었던 만큼 별다른 소득이 없었을 확률이 높다. 애초에 일본군의 작전이 제대로 성공하기 위해선 공격목표가 미드웨이라는 것을 들키지 말았어야 했었다. 들켜버린 이상 작전 당시 어떠한 상황이 전개되었든, 일본군은 미드웨이에 발을 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게 정론이다.

미군 수뇌부는 해전 3개월 전부터 심혈을 기울여 그 작은 미드웨이섬을 요새화시킨 상태였고, 그 결과 해전 당시의 방어 태세는 약 4000여 명의 병력이 견고한 콘크리트 벙커와 참호에 의지한 채 각종 지뢰, 철조망, 기관총, 박격포, 야포, 해안포, 그리고 여러 대의 전차까지 완전 중무장한 상태로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화력이 부실하기 짝이 없는 대발동정에서 내려 가슴 깊이의 바닷물을 무려 180~400m나 헤치고 해안까지 걸어가야 했던 일본군의 머리 위에 쏟아지도록 준비되어 있었으니 상륙 병력은 아마도 그대로 다 물고기 밥이 되었을 것이다. 일본군 함대에서 지원폭격/포격을 한다 해도 별 도움이 안 되었을 것이 자명한데, 그 때에는 일본군은 물론 심지어 미군조차 요새화된 환초 상륙전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을 때이기 때문이다. 미군도 피를 대가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서야 이에 대한 노하우[163][164]를 정립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하면, 당시의 미드웨이보다도 방어력이 약간 떨어졌던 곳이 다름아닌 타라와였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군의 지원능력과는 비교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빵빵한 지원함, 상륙장비, 무기, 병력( 해병대 1개 사단), 지원포격, 폭격을 어마어마하게 때려 박았음에도 불구하고, 요새화된 일본군 방어병력 2,000여 명[165]을 상대로 미군은 질 뻔 했다. 타라와 전투는 상륙전이 얼마나 어려운 작전인지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전투이기도 하다.[166] 하물며 장비도, 훈련도, 지원도 당시의 미군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빈약했던 3,000여 명 남짓한 일본군 육전대 병력이 미드웨이에 상륙전을 걸었다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철저하게 궤멸당했을 것이 확실하다.

물론 보급을 장기 차단하고 지속적으로 타격을 가하며 계속 상륙을 시도하면 어쨌든 결국 점령할 수는 있었겠지만 코딱지만한 미드웨이섬 하나에 그렇게 오래 전력을 투자하며 지체한다면 전체적으로는 훨씬 큰 손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일본(을 비롯한 영국, 소련 등 거의 모든 국가들)의 한계이기도 했다. 필요한 섬은 확실하게 자원을 효율적으로 때려 박아 빼앗아 버리고 그렇지 않은 섬은 무시하고 지나쳐 버리는 짓거리를, 그것도 그 넓은 태평양 전체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수십 수백 번을 할 수 있는 나라는 예나 지금이나 오로지 미국뿐이다.

그렇다면 미드웨이가 아니라 하와이를 공격했다면 어땠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1945년의 미군'이 '1942년의 하와이'에 총력을 기울여 상륙전을 시도한다고 해도 한 번에 성공을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고도로 요새화된 섬이 바로 하와이였다.[167] #참고자료 상륙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하와이보다는 차라리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하는 게 더 현실성이 있을 것이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니, 일본이 하와이를 점령할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없다.[168] 미드웨이 전투 시점에서 하와이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병력은 10만명이 넘었지만, 이미 미군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와이를 고수한다고 결정한 상태였다. 필요하기만 하다면, 그렇게 해서 하와이를 지킬 수 있기만 하다면 미군은 진주만과 그 외곽의 방어시설을 대대적으로 증설하는 것은 물론 주둔병력을 20만이건 30만이건, 그 이상까지도 증원할 각오가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참조자료

9.5. 그 밖의 이야깃거리들

미드웨이 해전이 시작되기 전에 니미츠 제독은 정보참모 에드윈 레이튼(Edwin T. Layton) 대령[169]에게 그동안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일본 함대의 구체적인 행동예측을 요구했다. 하지만 레이튼 대령은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예측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 니미츠 제독은 좀더 확실한 예측을 제출하라고 거듭 요구했고 결국 레이튼 대령은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이 "미드웨이 현지시각으로 6월 4일 오전 6시에 북서쪽인 방위 325도, 175마일 거리에서 발견될 것"이라 답변했다. 레이턴 대령도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예측을 한 모양이었는데 실제 일본 함대는 6월 4일 오전 5시 55분, 방위 320도, 거리 180마일에서 발견됐다. 겨우 "5분, 5도, 5마일" 차이가 났다.[170] 레이튼 대령은 이후 계속 정보 분야에서 근무하며 소장까지 진급해 제독에 이르렀다. 1959년 퇴역한 뒤엔 노스롭 사의 극동 지역 지사가 있는 일본 도쿄에서 근무했으며 1984년 사망했다. 사망 후인 1985년 자서전인 '나는 그곳에 있었다: 진주만과 미드웨이(And I Was There: Pearl Harbor and Midway)'가 출판되었다.

미드웨이 제도의 지상시설들은 본 전투가 끝나고 나서도 복구되지 않았다. 애초에 일본군의 추가적인 동진을 저지할 목적으로만 활용되었을 뿐, 이후 미군이 공세에 나선 뒤에도 쓰이지 않았고 결국 이스턴 섬은 지금도 △모양을 이루는 활주로 3개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상태다. 다만 2015년 기준으로 이스턴 섬에 접안이 가능하도록 항만 시설이 남아있다. 그리고 본섬에는 남쪽 항공기 활주로와 동쪽 항만이 유지보수되고 있는데 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구 활주로를 방치하는 것을 보면, 이스턴 섬의 활주로 크기와 거주성이 문제가 되어 버려진 모양이다.

한편 알류샨 열도의 아쿠타 섬에서는 더치 하버 공습에 참가한 류조 소속 항공대 코가 타다요시 상등병조[171]가 탑승한 제로센 1기가 사소한 고장으로 불시착, 코가 상조가 사망하며 전복되었는데, 제1항공함대가 대패하고 황급히 철수하는 바람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잊어버렸다. 전투가 끝난 후 주변을 정찰하던 미 해군 비행정이 불시착한 일본 기체를 발견, 이를 토대로 미군이 조사대를 파견했는데, 이들은 보고대로 거의 온전한 상태의 제로센을 수습했다. 제로센의 정보에 목말라있던 미국은 기체 밖에 튀어나와 썩어가고 있던 코가 상조의 시신을 장례식을 치러준 후 즉시 이 기체를 후송하여 '아쿠탄 제로'로 명명해 본토로 이송했다. 미국은 기체의 고장난 부분을 수리한 다음 열심히 연구해 제로센의 장단점을 파악했으며, 이는 1942년 가을 이후 급증하는 제로센 손실로 이어졌다.[172] 또한 해당 시점에서 이미 시제기 초도비행이 이루어진 그루먼사의 제로센 킬러 F6F 헬캣의 개선과 양산이 크게 앞당겨지기도 했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 다른 섬을 공략할 여유를 가진 미군은 다음 섬 지상공략에 쓰일 M4 셔먼 300대와 그에 맞는 전차 승무원 등 운용병력들을 순양함, 구축함에 분승해서 8월 중순 진주만을 출발하여 9월 14일날 수에즈 운하에 도착, 사막형 위장도색을 마치고 아프리카의 영국8군에 지원됐다.

스프루언스 제독이 6월 5일 날이 밝기 전까지 계속 도망간 것을 문제삼아, 태평양 함대 사령부에서는 공격적인 성향의 윌리엄 홀시 제독이 지휘하여 깔끔하게 전멸시켜 버렸어야 된다는 투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훗날 일본 측의 자료를 열람해보니 스프루언스 제독의 판단이 지극히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야마모토 제독은 항공모함들을 모두 잃은 이상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막판 뒤집기를 시도, 남은 수상함대를 싹싹 긁어모아 야간 함포전을 벌일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일본의 수상함대 전력은 전함 11척[173], 중순양함 13척, 경순양함 9척, 구축함 65척, 잠수함 22척
  • 미국의 수상함대 전력은 항공모함 2척[174], 전함 0척[175], 중순양함 9척, 경순양함 4척, 구축함 32척, 잠수함 19척

이런 전력차로 맞붙었다가는 말 그대로 대참사가 벌어졌을 것이다. 특히 함포전에서 전함은 여전히 최강의 존재였기 때문에, 괜히 고집부리다 기껏 다 이겨놓은 해전을 단 한 번의 야간전으로 한순간에 말아먹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때는 미 함대에 전함도 없고, 레이테 만 해전에서 빛을 발한 야간 사격통제장치도 설치되기 전이라 그 상태로 야간전 했으면 함포전에서 절대 못이긴다. 미 함대가 계속해서 동쪽으로 빠지는 것을 알게 된 야마모토 제독은 모든 것이 끝났음을 받아들이고 날이 밝기 전에 전면 퇴각을 결정하게 된다. 날이 밝으면 미군의 항공모함과 미드웨이섬의 항공전력에게 일방적으로 공격당할 것이었고, 실제로 후미의 함대 일부는 그렇게 두들겨 맞아서 7전대의 중순양함 모가미가 중파 당하고 중순양함 미쿠마는 아예 격침당했다.

미드웨이 해전의 클라이맥스 중 클라이맥스였던 급강하 폭격기 대대의 공습과 일본 항모의 침몰 장면의 사진은 아쉽게도 전혀 남아 있지 않다.[176] 양쪽 모두 정신이 없어서 그런 걸 찍을 겨를이 없었을 테니 당연하지만 그래도 무척 아쉬운 일. 다만 그 클라이맥스의 한 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목격한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항공모함 호넷에서 출격했던 제8뇌격기대대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조지 게이 소위는 해전의 클라이맥스를 모두 지켜보고, 해전 후 30시간 가까이 바다 한복판에서 버티다가 극적으로 카탈리나 비행정에 의해 구조되어 중순양함 빈센스로 옮겨져 겨우 구조되었다. 해전이 끝나고 나서 그는 니미츠제독과 만나는 영광을 얻기도 하고 미드웨이 이후에 VT-11에 재배속돼 과달카날전역에서 계속해서 싸우다 1943년부터는 교관으로 복무하며 무사히 종전을 맞았다. 전후에는 해군십자장, 퍼플 하트 훈장 등의 수훈을 얻고, 이후 민항사로 30년간 근무하다가 은퇴하여 자신이 겪은 미드웨이해전의 회고록을 출판하였다. 1992년에는 항공모함 미드웨이의 퇴역식에 특별 초대 받았고, 1994년 10월 21일에는 조지아주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항년 77세로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서 전우들이 잠들어있는 미드웨이 근해에 뿌려졌다고 한다.

그러나, 해전이 벌어진 지 반세기가 넘어가면서부터 이 부분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조지 게이 소위가 격추당한 지점과 이후 일본 함대가 격멸당할 때까지의 이동 상황 등 당시 상황과 조건들을 다 따져볼 때 조지 게이 소위는 일본 항공모함들의 최후를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선전거리가 필요했던 미군에게 조지 게이의 참전 및 생환 과정은 더 없이 좋은 소재였으므로, 크게 따지지 않고 그냥 넘어갔었을 가능성도 있다.

맥클러스키 소령은 이날의 공적으로 해군십자훈장을 수여받는다.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프리깃함인 USS 맥클러스키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한편, 당시 맥클러스키의 비행대에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브루노 피터 가이도 항공기관상병(Aviation Machinists 3rd Class)[177]도 있었다. 그는 지난 2월에 있던 마샬 제도 기습전에서 대담한 기지를 발휘해 치명상을 입고서 엔터프라이즈를 노리고 달려드는 일본 폭격기의 자살공격을 막아냈다. 그는 이탈갑판에 있던 돈틀리스의 후방기총을 잡았고, 그걸로 자폭돌격하는[178] 폭격기를 격추시켰다. 이 때 엔터프라이즈의 갑판 위에는 각종 함재용 폭탄이 널려있었는데, 그의 기지가 아니었다면 엔터프라이즈가 끔찍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함교에서 이 장면을 본 홀시 제독은 그를 불러서 "이름이 뭔가? (브루노 가이도입니다!) 계급과 직책은? (항공기관상병입니다!) 좋아, 가이도. 이제부터 항공기관하사(Aviation Machinists 1st Class)야!"라며 그를 2계급 특진시켰다.

불행히도 이 영웅은 격추되어 그의 조종사인 프랭크 오플래허티 소위와 함께 일본 해군에게 포로로 붙잡혔으며 일본 구축함인 마키구모에서 심문을 받았다. 참패에 격분한 일본군은 이 둘을 2주동안 고문한 뒤, 밧줄로 묶어서 다리에 무거운 걸 매달아 배 밖으로 던졌다[179]. 이후 마키구모는 1943년 2월, PT 보트의 공격을 피하려다 기뢰에 접촉하여 큰 피해를 입었고, 유구모가 마키구모의 생존자들을 구조한 뒤 뇌격처분함으로써 함생을 끝마쳤다.

미군 급강하 폭격기들의 길잡이 노릇을 충실히 한 구축함 아라시의 '실적'과 관련하여, 아라시의 생존자로 구성된 아라시 전우회는 '항공모함 아카기의 호위임무를 맡고 있었고 옆에서 한 치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의 기록에선 최소한 두 개 부대의 증언이 일치하는데다가, 미국의 말을 긍정하여 본인들이 패전의 직접적 원인을 가져왔다고 인정할 가능성은 낮으므로 증언의 신빙성은 낮다.

한편 아라시에서도 전쟁범죄가 일어났는데, 격추당해서 표류하고 있던 미해군 제3뇌격비행대대 소속 웨줄리 프랭크 오스무스(Wesley Frank Osmus) 소위를 포로로 잡아서 심문한 뒤 6월 5일 오후에 갑판으로 끌어내 소방용 도끼 처형하려 했으며, 오스무스 소위는 충격으로 배에서 떨어졌으나 난간을 붙잡고 가까스로 매달린 걸 다시 한번 밀어내 바다에 생으로 수장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종전 후 미국은 당시 아라시의 함장인 와타나베 유스마사(渡辺保正) 중좌를 전범 재판에 피고인으로 올리기 위해 찾다가 전사한 것을 확인한 후에야 중지했다. 그리고, 아라시의 생존자들은 포로 살해의 책임자로 와타나베 함장과 마츠우라 츠토무(松浦勉) 포술장을 지목했다. #1 #2 #3

아라시는 그 후로도 전장을 달리다가 1943년 8월 7일 솔로몬 군도에서 아마기리, 하기카제, 시구레와 함께 작전 도중 미군에게 격침되었다.

(참조: 가게로급 구축함 아라시)

암호 해독의 주역인 로슈포르 중령은, 니미츠 제독이 해군 공로 훈장을 수훈하며 우대해주려 했으나, 특유의 비사교적인 성격 등으로 인해 다른 해군의 높은 분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여 결국 암호 해독 부서에서 전출되어 본토에서 도크를 관리하는 한직 등을 전전했다. 1947년에 전역한 뒤 6.25 전쟁 때 예비역 소집되어 3년간 복무하기도 했다. 최종 계급은 대령이었다.

USS 요크타운을 격침시킨 I-168은 귀환 후 함장 기나시 소좌가 중좌로 진급하는 등 후한 대우를 받았다. 이후 독일까지 인도양을 통과하는 왕복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승조원들은 독일 정부로부터 철십자 훈장도 받았으나, 이후 승조원 총원과 함께 격침된다.

이 해전에서 공을 세운 양 진영 두 척의 잠수함(SS-168, I-168)의 함번이 168로 일치하는 우연도 있다.

엔터프라이즈 비행대를 이끌고 일본 함대의 공격을 이끈 웨이드 맥클러스키 소령은 이 해전의 공로로 해군십자훈장을 받았다.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호위함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맥클러스키는 이후 계속 해군에 복무했으며 한국전쟁 때도 제7함대의 참모장교로 참전했다. 1956년 퇴역 당시 계급은 준장이었으며 이 미드웨이 해전 때의 공로를 인정받아서 1계급 특진해 최종 계급은 소장이다. 1976년 사망했다.

아카기와 히류의 숨통을 끊어 놓은 리처드 베스트 대위는 이 해전을 마지막으로 항공기를 조종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사용하던 호흡장치엔 수산화나트륨(가성소다)을 이용해서 이산화 탄소를 제거하는 장치가 있었는데, 이게 오작동하는 바람에 수산화나트륨이 호흡장치로 들어가 폐를 망가뜨려 버렸고, 이 때문에 잠복한 결핵까지 발병해서 수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해야 했다. 다행히 목숨을 건져서 이후 그라운딩(지상 근무)를 수행하며 계속 복무하다가 1944년 전역하였다. 최종 계급은 소령이었다. 이후에는 더글러스 사(이후 맥도널 사와 합병해서 맥도넬 더글라스가 되는 회사)에서 일하다가 은퇴해 비교적 평온한 노후를 보냈고 2001년에 향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진주만 공습 당시 "Air raid on Pearl Harbor, This is not drill."("진주만이 공습당하고 있음. 이것은 훈련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전문을 보낸 로건 C. 램지(Logan C. Ramsey) 소령은 이 때 미드웨이섬 주둔부대의 작전 장교로 전투에 참전했다. 또한 유명 영화 감독인 존 포드는 당시 미 해군 야전촬영단 장교 신분으로 미드웨이섬에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다가 교전을 목격하기도 했다. 폭격의 파편에 맞아서 부상을 입기도 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2019년 10월, 2주 간격으로 카가 아카기의 온전한 잔해를 하와이 파파하노모쿠아키아 해양공원 해저에서 발견했다. 3D 소나를 통해서 발견했으며 심해잠수정을 투입하여 육안으로 정체를 확인했다. BBC뉴스 조금 더 자세한 뉴스 1998년 로버트 발라드[180]에 의해 발견된 요크타운의 잔해에 이어서 미드웨이 해전 침몰함선의 두/세번째 발견이 되었다.

10. 미디어

10.1. 영화, 애니메이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idway_movie_poster.jpg

1976년에 유니버설 영화사에서 미국 독립기념 200주년으로 영화 ' 미드웨이'를 제작했다. 감독은 잭 스마이트. 이 영화 이전에 에어포트 속편인 에어포트 1975를 감독했으며 이 영화도 흥행에 성공했으나 1977년에 로저 젤라즈니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아포칼립스 영화 '지옥의 사막'(Damnation Alley,1977)[181]을 감독하여 처절하게 망했고 그 뒤 3편 영화를 더 감독했으나 다 망해 감독에서 은퇴했다.

전편격인 도라!도라!도라!가 흥행실패를 한 원인을 분석하여 여기선 유명 배우들을 고용했다.[182] 그러다보니 제작비가 제법 늘어서 정작 전투라든지 다른 요소에서 제작비를 팍 줄였다.[183] 그래도 드라마적인 이야기를 넣어서 도라!도라! 도라! 절반이 안되는 제작비 1100만 달러로 북미 4322만 달러라는 꽤 흥행은 성공했지만 영화 고증수준은 상당히 엉망에다가[184], 다른 영화들의 장면을 짜집기했다.[185] 이를테면 전시 선전영화인 동경 상공 30초[186], 일본에서 제작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전기 영화 태평양의 폭풍[187], 그리고 전작인 도라!도라!도라!이다.[188] 더군다나 전투 장면중 대부분을 1944년 당시 선전 필름을 사용했다. 별 관련없지만 음악은 존 윌리엄스. 한국에서도 1977년 7월 15일 개봉하여 서울 관객 23만으로 당시에는 꽤 흥행에 성공했는데 80년대 나온 비디오판은 상당부분 삭제를 했다. 중간에 나오는 산호해 해전부분이나 찰턴 헤스턴의 베드신 등을 편집했다.

영상 그리고 NGC 다큐멘터리.

캡콤의 슈팅 게임 1942는 미드웨이 해전을 넘어서 태평양 전쟁 전체를 스토리 라인으로 가지며, 그 중 첫 4개의 스테이지는 미드웨이 해전 시나리오이다. 후속작 1943 1943 改에는 아예 '미드웨이 해전'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다만, 게임이다 보니 고증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가서 함재기가 아닌 P-38 라이트닝이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꼴을 볼 수 있다. 일본 제작사에서 만든 게임이면서 연합군 입장에서 일본군을 때려잡는 내용이라 일본의 리뷰어들도 이걸 나중에 깨닫고 어리둥절해했다. 다만, 직접적으로 일본군이라 묘사하지 않고 가상의 적으로 묘사한다.

1988~89년 미국 미니시리즈 12부작 전쟁과 추억(War and Remembrance)에서 재현한 미드웨이 부분은 상당히 명장면으로 평가된다.[189] 본작은 미 해군 헨리 대령[190] 일가를 중심으로 2차 대전에 휘말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헨리 대령의 둘째 아들이 미드웨이 해전에 급강하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전사한다.[191] CG가 없는 시절에 아날로그만으로 만든 작품 중에 상당한 수준이고 실시간대로 작전 상황을 재현해내었고 급강하 폭격기 조준경 사용 장면 등을 충실히 따르는 등 나름 고증에도 힘썼다. 원작에 나오는 뇌격기의 자살적 돌격부분을 재현한 것이 포인트. 하이라이트 장면. 4분 30초부터 엔터프라이즈 폭격기대의 공습 장면이 나온다.

일본에서 제작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모습을 담은 동명의 영화에서 이 전투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영상

마찬가지로 일본 영화인 '영원의 제로'에서도 이 전투를 묘사하고 있다.전투 전체를 묘사한 것은 아니고 아카기 피격 장면 정도가 나온다. 주인공의 입을 통해 패전 원인('항모가 노출되었으면 지체하지 말고 출격부터 해야 한다', '처음부터 어뢰로 무장하고 기다렸어야지! 지금 공격당하면 끝장이야.')이 일부 나온다.

1960년 일본에서 제작한 영화 '태평양의 폭풍'(太平洋の嵐)에서 진주만 공습부터 이 미드웨이 해전까지 태평양 전쟁 초반부를 다루고 있다. 마츠바야시 슈우에(松林宗恵) 감독이 제작을 맡았으며, 미후네 토시로가 야마구치 다몬 역을 맡았다.

타츠노코 프로덕션 제작의 애니멘터리 결단에서는 2화부터 나오고, 거기다가 전후편으로 되어있어서 2회에 걸쳐 일본군이 처절하게 깨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참고로 1화는 바로 진주만 공습. 그러니까 미군을 폭격으로 처발라버린 다음 화부터 일본군이 무참하게 깨지는 걸 보여주는 거다!!

KBS에서 방송한 세계대전 특집에선 루즈벨트가 해전 결과보고를 받는 모습에 개그씬을 넣었다. #항공모함 4척이 격파됐답니다 #해당 장면은 28분 40초

마이크 필립스 감독의 영화 돈틀리스가 2019년 9월 6일 개봉 했다. 제목처럼 이 전투에 참여했던 SBD 돈틀리스 조종사들에게 촛점을 맞춘 영화로 미드웨이 해전에서 필리핀 해 해전까지 다루고 있다.[192]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 《 미드웨이》가 있다. 미국에서 2019년 11월 8일 개봉되었으며 국내에서는 2019년 12월 31일 개봉했다. 여기서는 진주만 공습부터 산호해 해전, 자바 해전, 미드웨이 해전까지 이어지는 전체적인 전개가 주요 줄거리다. 니미츠 제독 역의 우디 해럴슨과 30초 남짓 나오는 히로히토 역의 배우 둘이 실존 인물과 정말 닮았다.

10.2. 서적

미드웨이 해전은 서구 및 일본에서는 가장 많은 관련도서가 출간된 제2차세계대전의 전투 중 하나다. 하지만 이 전투를 본격적으로 다룬 국문도서는 그다지 많지 않다. 우선 1950 ~ 70년대에 출간된 제2차세계대전사 및 태평양전쟁사 책(일부는 전집 중 1권으로)에 미드웨이 해전이 소개되었다.[193] 다음으로 1975년에 번역출간된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태평양전쟁" 제3권에서 미드웨이 해전이 상당한 분량으로 서술되었다.[194] 2000년대에 출간된 존 키건이나 엔서니 비버가 쓴 제2차세계대전사 번역본의 태평양전쟁 부분에서도 미드웨이 해전이 간략하게 소개되었다. 2001년에는 권주혁이 과달카날 전투에 대한 자신의 저서 '헨더슨 비행장'[195]에서 미드웨이 해전을 상술했다. 2008년에 들어서는 오스프리 시리즈의 "Midway: 1942"가 "미드웨이 1942: 세계사의 균형추를 움직인 사상최대의 해전[196]"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되었다. 그리고 2019년에 이 해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조너선 파셜, 앤서니 털리 저 "Shattered Sword"가 "미드웨이 해전 - 태평양전쟁을 결정지은 전투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되었다.[197] 2019년 연말에는 VT-8 소속 뇌격기 조종사로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했던 프레더릭 미어스의 수기가 "미드웨이- 어느 조종사가 겪은 태평양 함대항공전[198]' 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되었다. 2023년에는 엔터프라이즈의 VS-6 소속으로 카가, 히류, 미쿠마에 명중탄을 기록한 노먼 '더스티' 클리스의 회고록 "Never Call Me a Hero" 가 "미드웨이 해전과 나"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의 미드웨이 부분에서는 미드웨이라고 메인 캐릭터들이 모두 미국 드라마 일본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나왔다. 미드 CSI : NY, House M.D., 로스트, 스타트렉, 프리즌 브레이크, 히어로즈, 일드 노다메 칸타빌레, 신세기 에반게리온, HERO 등등. 심지어 야마모토 제독은 '가랏! 나구모! 미드웨이를 일드웨이로 만들어버려라!'고 하기도 한다.

한국 전쟁을 소재로 한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 도곡리의 다리에서 항공모함 전대 사령관인 제독의 아들들이 각각 진주만 공습과 미드웨이 해전 때 사망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 충격으로 아내는 정신 이상으로 아기 옷 뜨개질만 하고 며느리는 집을 나갔다. 그런 이유로 주인공인 라인베커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가공전기 만화 몽환의 전함 야마토에서는 일본 해군은 강하다면서 절대 질 리 없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현대에서 타임슬립한 주인공 쿠르스가 야마토의 수병 카이바[199]에게 미드웨이 해전의 결말을 이야기해줬고 쿠르스는 곧바로 야마모토 이소로쿠에게 이야기 하지만 야마모토는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는다. 그래도 대비는 해서 요크타운을 먼저 공격해 대파시킨다. 하지만 역사대로 아카기, 카가, 소류가 5분만에 격침되고 만다. 히류는 야마구치 다몬이 역사와 달리 카이바의 설득에 살아남는 길을 택해 격침되지 않는다. 이후 야마토를 앞세워 미드웨이섬을 점령하지만 그날 밤 미군의 미첼 폭격기들의 반격을 받아 철수하고 만다. 그렇게 역사가 뒤틀려 현대의 일본은 홋카이도의 일부가 소련에게 점령되고 만다. 이 만화는 제목도 그렇고 내용도 전형적인 극우물처럼 보이지만 결국 주인공이 일본군을 이기려고 하는 행동들이 오히려 21세기의 일본에 악영향을 줘서 홋카이도가 21세기까지 건재한 소련의 영토로 넘어가버렸고, 일본 제국 체제가 무너지지 않아 북한에 맞먹는 꼬락서니로 전락했다가 1999년 핵이 도쿄에 떨어지면서 UN이 대리통치하고 만다. 주인공 쿠르스와 미드웨이 해전 때 생존한 야마구치 다몬이 마지막 발악으로 에놀라 게이를 격추시켜 히로시마에 핵 투하를 저지하지만 쿠르스를 과거로 보낸 장본인 요그 소토스의 개입으로 결국 역사는 사실상 바뀌지 않으며, 오히려 역사를 바꾸려고 들면 현대의 일본이 국가막장 테크를 밟아가는 극우를 까는 만화다.

10.3. 게임

  • 1943 미드웨이 해전
  • 콜 오브 듀티: 뱅가드 - 등장인물 중 하나인 웨이드 잭슨이 미해군 소속 조종사였으며 미드웨이 해전에 참전한 에피소드가 게임에 묘사되어 있다. 콜 오브 듀티 시리즈답게 해당 스테이지는 대부분 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로센과의 도그파이트나 항공모함 급강하 폭격 등, 영화 '미드웨이'의 오마주로 가득하다.[200]
  • 웹 게임 함대 콜렉션에서는 2014년 여름에 대형 이벤트로 나왔다. 이전까지의 이벤트와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이벤트이며, 난이도 면에서도 여러 가지 의미로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위에 적힌 고증 그대로 이벤트가 진행되는 바람에불지옥급의 난이도가 되어버려 아예 항목이 길어져 따로 분리되었다. 함대 컬렉션/이벤트/2014 여름 항목 참고. 또한 TVA에서도 미드웨이 해전을 모티브로 한 전투가 나온다. 지역명이 AF라는 것부터 MI작전, MO작전등 미드웨이 해전때 쓰던 암호문, 작전명을 그대로 쓰고 있다. 그러나 게임과 원작과는 다르게 정작 싸우지도 않고 최후방에서 대기나 타던 야마토급 전함이나 공고가 직접 포를 쏘고 아직 진수도 안된 다이호가 나오는 등 현실과는 큰 차이가 있는 편이다.
  • 스마트폰 게임 전함소녀에서 2015년 12월 10일부터 24일까지[201] 이벤트 해역으로 등장. 적들은 당연히 참전했던 일본 함선들이며 요크타운 엔터프라이즈를 얻을 수 있다. 덤으로 아라시도 얻을 수 있는데 3, 4번 해역을 돌파하는 데에는 아라시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 벽람항로는 아예 메인 스토리 초반부가 진주만 공습부터 미드웨이 해전까지를 표현했다.


[1] 소속은 정찰비행대 VS-8(제8정찰비행대) [2] 태평양 함대 사령관 [3] 제17기동부대 사령관, 현장 총지휘관 [4] 제16기동부대 사령관 [5] 제7항공군 사령관 [6] 연합함대 사령장관 [7] 제1기동부대 사령관 [8] 제2항공전대 사령관 [9] 이 해전으로 인해 일본은 공격적인 작전을 멈추었다. 미국의 반격이 시작된 분기점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아직 이 시점에서는 미국의 공세가 시작되었다고 하기는 어려우며 이후 반격을 위한 시간을 벌어줬다는 것에 더 의의를 둬야 한다. 미국의 본격적인 반격은 과달카날 전투부터로 보는 게 명확하다. 미국 해군은 여전히 진주만 공습의 피해로부터 회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10] 해병대, 해군 육상 부대 및 육군항공대로 구성 [11]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요크타운, 엔터프라이즈, 호넷 [12] 미드웨이섬에서도 다량의 항공기가 출격했고 일본 항모 전단에 직접적인 타격은 주지 못했지만 결국 일본 항모 4척을 가라앉히는데 크게 일조해서 해외 역사 매니아들 사이에선 미드웨이섬이 불침항모이고 사실 미국 역시 4척의 항모를 가지고 작전했다고 농담삼아 말하기도 한다. 마치 과달카날 전역에서 꾸준히 항공기를 날리며 불침항모 역할을 한 헨더슨 비행장처럼 말이다. [13] 콜로라도급 전함 메릴랜드 (해안경비대 백업함대) [14] 펜사콜라, 빈센스, 뉴올리언스, 미니애폴리스, 노샘프턴, 아스토리아, 포틀랜드 [15] 아카기, 히류, 소류, 카가 [16] 공고급 순양전함 하루나, 키리시마 [17] 히류의 공격을 받고 예인되던 요크타운은 미처 후퇴명령을 받지 못한 해대 6형 잠수함 I-68의 어뢰에 침몰했다. [18] 심즈급 구축함 DD-412 허먼 [19] 카가 아카기 엔터프라이즈의 단독전과, 소류 요크타운의 단독전과. 히류는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의 혼성 비행단에 의해 격침 [20] 모가미급 중순양함 미쿠마 [21] 사실상 전멸. [22] 후술될 양측의 전력 상황을 보자면 일본은 전함이 있었던 반면, 미 태평양 함대의 주력이 항공모함이었다.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당시까지 주력으로 활동하던 전함을 잃은 미국이 궁여지책으로 항공모함으로 전함을 대신하는 전략을 세웠고 이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아울러 진주만 공습의 성공으로 자만하고 있던 일본이 미국을 너무 과소평가 한 탓 역시 크다. [23] 요크타운. [24] 카가, 히류, 소류, 아카기. [25] 이들의 손실은 결과적으로 일본에 치명타가 되어 돌아왔는데 이후 전개된 태평양 전쟁의 승기를 미국쪽으로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항공모함의 손실로 태평양 상공을 장악하지 못하면서 미 해군 전투기들과 공격기들이 일본 함선을 공격하기가 수월해진 반면, 일본은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 제로센을 배치하여 응수하는 것으로 대응했으나 여러가지로 불리한 점이 많았던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26] 대공포를 발사하는 미군 함선들 및 피격되어 불타오르는 일본 해군 함선들의 항공 촬영 영상이 담겼다. [27] 혹여나 모를 사태에 대비해 어느 정도의 대비는 해놓았지만 진주만 공습에서 그나마 모아 놨던 전력을 전부 잃었다. 진주만에 가라앉은 함선을 건져 올려서 수리한 후 재투입한 것 역시 미드웨이 이후의 일이다. [28] 영국 본토 항공전은 1940년 여름에 벌어졌고 그 와중에 북아프리카 전역과 지중해 전역이 열렸다. ABDA 함대는 이보다 1년 이상 지난 1941년 말에야 결성되었지만 영국 입장에서는 본토 사정이 더 급했다. 일단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뜻밖의 피해를 입었고,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에서 싸우던 도중 독일이 개입하여 에르빈 롬멜의 활약으로 북아프리카 전역이 불리하게 흘러가는 바람에 지중해까지 위험해지면서 병력을 차출할 여유가 없었다. 이미 윈스턴 처칠은 해군을 축차투입하다 말레이 해전에서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다. [29] 일본군도 중일전쟁에 많은 병력이 소모되고 있었지만 대부분 육군의 피해였고 해군의 소모는 극소수였다. [30] 대다수는 탈출하지 않고 동인도 제도에 잔류해서 고스란히 포로가 되었고 행운이 있었던 아주 소수만이 연합군 영역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인도네시아가 동-서로 영역이 넓어서 각자 가까운 연합군에 의탁한 영향이 있었다. 네덜란드 해군의 잠수함부대는 인도로 대피하여 영국의 지원하에 종전까지 활약했고 상선들은 전쟁 내내 연합군의 물자 수송에 일조했다고 전해진다. 후일 전쟁 후반에 오보에 작전과 같이 인도네시아 지역에 대한 연합군의 침공이 있었지만, 그것도 수행 주체가 미군과 호주군이었지 네덜란드 군 주도가 아니었다. [31] 잔존 세력이 단위부대로서의 기능은 남아있었으나 독자적인 작전 능력과 지휘권을 가졌음에도 본토의 협력을 기대할 수없었다. [32] 다만 수리 과정에서 추가 개장을 한 탓도 있다. [33] 사실 이 부분이 진주만 공습의 가장 최고의 전과이기도 했다. 일본의 원래 목적은 미국에 선제 공격을 가하여 주눅들게 하고 회담장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미디어 매체에서 나오듯 일부 미군은 매우 분노하며 복수를 외치는 병사도 있었으나 대다수는 일본의 갑작스런 공습으로 인한 패전의 충격과 거의 모든 미 해군 전함 전력이 상실되어 너무 절망적인 전력차로 사기가 상당부분 떨어져 있었다. [34] 니미츠 제독의 판단은 매우 정확하여 자신들의 명예 회복과 진주만 공습의 복수심에 불타고 있던 이들이 의욕적으로 복무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35] 해군 휘하의 일개 조직에 불과한 연합함대가 왜 따로 거론되는지는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문서를 참고. 문서를 읽어 보면 이게 다른 나라들과 한창 전쟁 중인 나라의 군대가 맞나 싶을 것이다. 실제로 일본군은 패전 중인데도 전선을 더 늘려갔는데 이것이 원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36] 차후 일본군이 항공모함한테 호되게 뚜드러 맞고 전세가 역전된 걸 보면 야마모토의 판단은 절대 틀리지 않았다. [37] 하지만 MO작전은 산호해 해전에서 일본군이 미 항모 렉싱턴을 격침하고 요크타운에 수리가 90일이나 그 이상 걸릴 피해를 주는 성과를 거뒀지만, 정작 주목표였던 포트모르즈비 앞에서 철수하면서 허공으로 날아갔다. [38] 과거에는 알류샨 열도 공격이 일종의 양동 작전으로 기획된 것처럼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모두가 하나하나의 목적을 가진 작전이었다. [39] 현대에서는 공중급유기가 있으니 위험하더라도 가능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공중급유도 없었으며, 설혹 폭격이 가능한 대형기는 대부분 육상 활주로 이착륙이 가장 안전한 방식이었는데, 문제는 그 머나먼 도쿄 공습을 하려면 왕복이 가능한 섬을 단기간에 점령해야 가능했다는 거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후에 전략 폭격기의 시초라고 불렸던 B-29의 항속거리가 6,000km였는데, 이는 현재의 보잉 737 같은 단거리 여객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 국제선으로 운용되는 장거리 전용 여객기들의 항속거리가 12,000km 이상을 넘고 있는 실정에서 본다면 분명 불리함이 있다(가장 잘 판매되고 있는 기종 중 하나인 보잉 787-9의 항속거리가 14,140km다.). 일본 역시 이걸 알고 있어서 둘리틀 특공대 이후에도 여전히 미국이 일본 본토를 타격 못할 거라고 생각해 방공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B-29를 가진 미국이 사이판을 점령하자 그때부터는 일본도 본토 폭격이 된다는 걸 인식했다. [40] 일본은 자신들을 '불침항모', 즉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이라 부르며 자랑했었는데, 둘리틀 특공대 이전까지는 그 어떤 외국 군대가 일본 본토를 공격한 예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머니까...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이 있긴 했지만, 규슈의 한정된 지역에서 일어난 국지전에 가까왔는데다 근본적으로 도쿄 자체는 안전했다. 그렇기 때문에 둘리틀 특공대의 폭격 성공은 그동안 일본이 철석같이 믿던 '일본 본토는 안전하다'란 신화를 깨버린 상징적인 사건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일본의 ‘불침항모’신화는 여지없이 허구로 드러나버렸다. [41] 특히 천황을 사실상 살아있는 신이라 말하며 적군이 오면 천황이 바람으로 날려버린다 등 광적인 충성을 보이는 민중들에게 있어 이러한 기습적 공습은 민중들은 물론 체면이 중요한 일본군 장성이라면 맨땅에 머리 박고 있어야 되는 수준의 수치다. 거기다 야사에서는 둘리틀 특공대의 도쿄 공습이 끝나자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이때 일본의 국왕이 무사했던 건 우리가 봐줘서 그런 거다."라고 선전했을 정도였다니 일본의 대국민적 사기가 바닥을 쳤을 것은 자명했을 것이다. [42] 사실 둘리틀 특공대 이후에도 이 기본 개념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둘리틀 특공대의 도쿄 공습은 일종의 퍼포먼스에 가까웠으며, 전쟁 당시 기술로 막대한 폭장량을 지닌 폭격기를 항공모함에서 직접 띄우는 것은 여전히 위험했다. 실제로 미국이 제해권을 거의 장악한 이후에도 일본 본토 공습이 많이 시도되진 않았다. 본격적으로 초토화 공습이 시작된 것은 45년 3월 도쿄 대공습까지 성공해 일본 본토 공격의 해법을 비로소 찾은 뒤 오키나와까지 점령하여 육상 활주로를 확보하고 난 이후다. 이때부턴 B-29뿐 아니라 B-17,B-24까지 동원할 수 있어서 말 그대로 매일같이 폭탄을 퍼부을 수 있는 수준이 됐다. [43] 당장 자신들을 '무적황군'이라 부르며 허세를 실컷 떨고 있었는데 이런 사건이 일어났으니 타이틀마저도 무색해진데다 이런 지경으로 몰아넣은 1차적인 원흉이 일본 해군이었으니 육군 측에서 약점을 잡아 물어뜯지 않는 게 오히려 비정상적일 정도였다. [44] 그리고 이걸 뚫기 위해 12시간씩 번갈아 일할 정도로 업무 강도는 무진장 셌다. [45] 철자가 Rochefort인데, 프랑스어는 단어 마지막 자음을 발음하지 않는다. 미드웨이(2019년 영화) 및 위키백과의 미드웨이 해전 문서에는 '로슈포르'로 되어 있으며, 반면 2019년 제작된 다큐 <10대 사건으로 보는 제2차 세계대전>의 한글자막에서는 그냥 영어식으로 '로슈포트'로 음역한 사례도 있다. 코드브레이커에서는 로체포트라고 되어 있다. 원칙적으로는, 영어로 읽는 경우에도 어원을 존중하여 끝 자음을 생략하기 때문에 로슈포르라고 읽는 게 맞으며 영어 원어민들도 그렇게 읽는다. [46] 이 사례는 무선국 통신보안교육책자에도 나올만큼 유명하다. 미드웨이를 점령해 교두보로 삼을 생각이었던 일본군은 여기에 제대로 낚여서, 상륙함에 엄청나게 많은 식수와 해수 담수화 장치를 가져왔다고 한다. [47] 다만 하와이는 일본군의 빈약한 상륙능력으로는 손댈 엄두조차 안 날 정도로 요새화된 상황이었다. 일본군이 억지로 하와이에 상륙했다가는 이오지마나 오키나와는 애들 장난으로 보일 정도의 참사가 났을 것이다. 실례로 이오지마의 경우, 당시 미군 피해 상황을 보고받았던 루즈벨트 대통령이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처참했던 전투였다. [48] 제독은 격려차 보낸 것이었지만, 적지 않은 매체와 전문 서적에서는 죽기 전의 특진처럼 묘사되곤 한다. 하지만 장렬하게 죽으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전사 가능성이 크다보니 만일을 대비한 특진이었으며 질 것이라 여겼다면 막대한 지원을 보낼 리가 없으므로 그렇게 볼 이유는 없다. [49] 이 무렵은 아직 TBF 어벤저가 맞다. 이후 F4F 와일드캣의 뒤를 잇는 R-2800 엔진을 단 F6F 헬캣 개량형이 나오기 전까지 그루먼에서 생산했기 때문. [50] 홀시가 흔히 밀덕들 사이에서 머리는 나쁘고 괄괄하기만 한 제독으로 생각되지만(스프루언스 제독과 더불어 미해군 최고의 브레인이자 유일한 최종보스인 킹 제독의 평가 때문에 더욱 그렇다) 홀시가 개전초부터 대전 말까지 계속 일선의 항모부대를 원만히 지휘했던 것에서 입증하듯이 타국의 제독들과 비교했을 때 자기 할 몫은 충분히 하는 제독이었다. 홀시가 레이테 만에서 낚인 것 때문에 홀시가 머리가 나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도 하지만 레이테 만에서의 홀시의 행보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1:1로 공존하므로 홀시가 머리가 나쁘다는 예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기상예보를 무시해 태풍 코브라를 대비하지 않아 함대에 피해를 준 일이 홀시 인생 최대의 흑역사. 이 피해 때문에 홀시는 사문회에 출석해야 했다. [51] 이 때문에 태평양 전쟁 말기 영국군이 참전하려 하자 어니스트 킹 제독이 '다 된 밥상에 숟가락이나 얹으려고 한다'며 싫어했다고 한다. 물론 그것만 문제였던건 아니고 영국 함대의 보급역량이 의심스러웠던 이유도 있다.(이것 때문에 영국군과 공동 작전을 할 경우에는 영국군에서 보급 문제를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확답을 받고서야 공동 작전을 승인해준 것도 있다.) 그리고 니미츠와 스프루언스 제독은 영국 함대의 증원을 환영하는 분위기였기에 무작정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52] 예를 들어 야마구치 다몬은 작전의 반년 연기를 주장했고, 나구모 주이치 역시 당시 수리와 함재기 보급 등으로 전력에서 이탈해 있던 쇼카쿠 즈이카쿠가 복귀한 이후에 실행해야 한다고 만류하던 상황이었다. 군령부 역시 미드웨이를 먹어도 별다른 이득이 없다고 생각하며 FS작전을 입안하고 이를 지지하고 있었다. [53] 군대는 전투에 이겨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리한 상황에서 반격을 위해 병력을 수습하고 가장 적은 피해로 퇴각하는 것도 중요한 일중 하나다. 더군다나 전장은 수없이 많은 변수와 마찰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런 상황에선 언제든지 쓸 수 있는 우발계획을 짜내야 좋은 지휘관이다. [54] 물론 이때의 모의전이 단순히 지휘관들의 지휘능력을 함양시키기 위한 훈련상황이었다면 본인들이 지휘해야 할 함대가 한순간에 개박살 나버린 것이니 훈련의 지속적인 진행을 위한 처분으로써 어느 정도 참작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 워게임은 실전을 앞두고 전투중 발생할 수 있는 상황들을 예측하고 적절한 대비책을 수립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모의전의 목적을 완벽히 혼동한 것이라고밖에 볼수 없다. [55] 이 암호도 나중에 해독된다. 일본군은 후에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암살당할 때까지도 자신들의 암호가 해독당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일부 지휘관들은 감지하고 있었으나, 지휘부의 "그냥 걔네들 모른다고 하자..."는 한마디에 계속 암호를 사용했다. 미군이 야마모토를 격추하는 것을 망설인 이유도 일본군이 암호가 해독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또 암호를 바꿀까봐서였다고 한다. [56] 이는 러일전쟁 당시 쓰시마 해전 이후로 자리잡은 일본 해군의 구시대적인 전통에서 기인한다. 쓰시마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미카사에 탑승해서 해전을 일선 지휘한 이후 일본 해군에서는 이를 본받아서 최고 지휘관 및 수뇌부가 기함에 직접 탑승해서 지휘하는 게 전통이 되었다. [57] 어쨌든 전함을 상대할 수단이란 폭탄과 어뢰, 그리고 같은 전함 뿐이다. 그중에서 폭탄과 어뢰를 수평선 너머에서 배달 가능한 항공기가 가장 유효한 수단이고, 지금은 그 항공기가 폭탄과 어뢰를 더 멀리서 던져줄 수 있기에 전함이 더 이상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것이다. [58] 실제로 진주만 공습 당시 그 때 맞춰서 들어올 예정이던 항공모함 한 척이 열대폭풍 때문에 예정을 늦춰서 들어와서는 그 참상을 직접 본 항공모함이 소속된 부대의 전대장“이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일본어는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될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그 뿐 아니라,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 특히 미 해군의 장병들은 대다수가 자원입대자였다. 즉, 국가에서 소집해서 입대하기 전에, 비겁하게 기습을 가한 일본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찔러서 자원으로 입대한 경우가 더 많았다. 정치인, 운동선수, 영화배우들조차 아니, 심지어 군 입대 대상자도 아닌 미성년자가 나이를 속여서까지 군에 자원으로 입대한 경우에, 현대 한국에서도 즉시 전시근로역 판정을 받아야 할 호르몬 장애를 앓고 있는 장애인도 불합격 판정을 받자 아버지 빽을 써서 자원입대해서 활약한 사례도 있었다. [59] 이 교리는 익숙한 환경에서 같이 호흡을 맞춘 동료들과 싸울 수 있게 한다는 장점도 있으나 융통성있는 전술구사를 방해한 측면이 더 크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히류가 반격할 때 다른 항모 소속의 공격기들을 착함시켜 성공적으로 공격을 수행했던 것을 보아도 함재 항공대와 항공모함을 분리불가한 한 세트로 보았던 교리가 얼마나 병맛나는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 문제가 제도상으로 해결되는 것이 44년 3월, 신설된 제도에 따라 실제 조직이 개편되는 것은 이미 일본 해군 항모기동부대 전력이 괴멸된 44년 7월. 더욱 어이없는 것은 육군에서 일명 '공지분리제도'를 도입해 항공대와 기지를 분리시킨 것이 1937년이었다. 단 이후 과달카날 전역 산타크루즈 해전 이후, 손실을 입지 않은 즈이카쿠 준요를 함재기 부족으로 놀려 한때 작전가능한 미 해군 항모가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도 과달카날의 제공권을 빼앗기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것은 이 경직된 체제의 문제보다는 육성능력 부족과 맞물려 항모 이착함과 해상 항법을 익힌 숙련 파일럿이 다 소모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확하다. 실제로 이후 일본해군 역시 항모기동부대 전력이 마비되어 44년 6월 필리핀 해 해전 전까지 항공모함 기동부대는 제대로 된 활동 자체가 불가능했다. 설령 제도 문제가 없었다 하더라도 과달카날 전역 직후에는 온 일본을 뒤져도 항모 이착함이 가능한 파일럿이 없다시피했으므로 즈이카쿠와 준요의 함재기 전력을 보충할 수는 없었다. 덤으로 43년중 벌어진 이호작전과 로호작전으로 그나마 재건 중이던 항모 항공대까지 기지항공대로 투입해 소모전으로 소진시키는 바람에 숙련도는 필리핀 해 해전까지도 회복되지 못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일본군의 파일럿 양성 방식 자체였다. 이게 정말 심각한게, 전후까지 살아남은 대표적인 일본군 해군 에이스 파일럿인 사카이 사부로도 일본군의 파일럿 양성 방식을 까고 있을 정도다. [60] 아래에서 서술한 니미츠 제독의 발언에서처럼 미 해군은 항공모함 한 척도 놀려둘 여유가 없을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요크타운의 항공대는 산호해 해전에서의 일로 인해 요크타운 본래의 제 5 항공대가 아닌 렉싱턴급 항공모함 2번함인 CV-3 USS 새러토가의 제 3 항공대를 임시로 배치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요크타운은 미드웨이 해전 도중, 일본군 함재기 편대를 레이더로 감지하고는, 항공대를 근처에 있던 CV-6 엔터프라이즈로 보내 버린다. 일본군과 대조되는 미군의 급박함과 현실감각을 잘 보여 주는 면모라고 할 수 있다. [61] 사실 이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상대였던 프랭크 플레처 제독과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도 항공 출신 장성이 아니었다. 해군 항공대는 이때까지만 해도 역사가 짧았으므로 미 해군에서도 항공 출신 제독들이 주류가 되는 것은 태평양 전쟁 중기 이후였다. 기동부대 사령관이 꼭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령관 곁에는 항공 참모 등 전문가들이 붙어있으므로 사령관은 단지 그들의 조언에 기반하여 전략ㆍ전술적으로 바른 판단을 내리면 된다. 실제로 나구모도 진주만 공습은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해내지 않았는가. 문제는 나구모가 속한 파벌이 야마모토와는 달랐다는 것. 한 예시로 2011년작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보면 나구모가 자기 파벌인 군령부 총장 나가노 오사미로부터 야마모토와는 다른 명령을 받아서 수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62] 물론 나구모 주이치 제독은 조함에 관해서도 전문가이긴 하다. 진주만 공습에서도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기동함대 대장을 맡았는데, 공습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배는 반드시 살려서 돌아오라고 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미드웨이에서도 그 거대한 아카기의 키를 붙잡고 아카기를 향해 오는 어뢰를 몽땅 다 피했을 정도니 조함에 대해서는 확실히 실력이 있었다. [63] 오자와 지사부로는 나구모 주이치 이후 함대의 사령관을 맡아 필리핀 해 해전에 참전한다. 오자와 지사부로는 필리핀 해 해전에서 패장이 되었지만 이미 그때는 미 일 양 해군 함재기와 항공모함이 양적, 질적으로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던 터라 뻔한 결과였다. 그러나 필리핀해 해전에서 오자와가 미군의 의도를 정확하게 판단했던 것, 정찰전에서 미군을 먼저 발견한 것, 의도상으로는 훌륭했던 함대의 전술배치를 보았을 때, 일본 해군이 우세였던 미드웨이에서 오자와가 1 기동부대를 지휘했더라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을 것이다. [64] 야마구치는 미 항모발견보고 즉시 공격을 건의했고 나중에 히류 한척으로 계속 작전을 속행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야마구치의 주장대로 공격대를 발함시킬 경우(08:30에 아카기에 발신) 함재기 유폭을 피할 수는 있었을지는 모르나 손상을 입고 연료가 거의 떨어진 미드웨이 공격대가 08:37에 착함 시점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야미구치의 진언대로 바로 공격대를 발진시켰더라면 귀환기들 상당수가 바다로 추락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경사갑판을 도입하지 않은 2차대전기의 항모는 이착함 작업을 동시에 할 수가 없음), 또한 야마구치는 비록 요크타운을 중파(나중에 잠수함이 격침했지만) 시킨 전과는 올렸지만 그 대신 무리하게 히류를 적 함대에 근접시켜 살아남을 수도 있었던 귀중한 항모를 잃게 만든 책임이 크다. [65] 야마구치 다몬은 그때 소장이었다. [66] 이런 헝클어지는 걸 싫어할 정도의 섬세한 작전 계획들이 나중에 최대의 패착이 된다. 작전 계획을 짜게 되면 그 계획의 규모가 클수록 변수의 작용에 의한 계획의 수정 및 변경을 감안한 유연한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그런 것 고려 없이 무턱대고 작전계획대로만 움직이며 그대로 되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플랜 A와 플랜 B가 있으면 플랜 B를 상정조차 하지 않고 플랜 A만 입안해서 작전을 한 것. [67] 미드웨이 해전에서 연합함대는 정규항모 4척을 투입한 반면 미 해군의 정규항모는 3척뿐이었다. 추가로 연합함대는 경항모 4척이 더 있었다. [68] 제16임무부대 기함 [69] 제17임무부대 기함. 피격 이후 중순양함 아스토리아로 이동. [70] 함대별로 서로 떨어져 있어서 나구모 제독의 제1항공함대 외에는 전선 투입이 제대로 되지않았다. 이 중에 호쇼 등의 일부 노후된 함선은 실질적으로 전력에 도움이 안되기에 뒤에 빠져 있었고, 다수의 전함, 경항공모함을 포함한 섬 공략 부대는 뒤에 따라오고 있었기에 대응이 늦어져 제대로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71] 이때까지도 야마토를 비밀 병기로 숨기고 싶어 했던 일본 군부 때문에 대부분의 함선이 제대로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덧붙이자면 야마토의 존재는 이미 일본 내에서도 공공연한 비밀 정도로 퍼져 있어, 스파이 등에 의해 연합국도 거대한 전함의 존재 정도는 알고 있던 때라 딱히 숨기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다. [72] 작전 당시 기함으로 쓰였다. [73] 적은 숫자의 함재기와 노후를 이유로 후방으로 밀려났다. 단지 제1, 2항공전대가 송두리째 전멸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중에 호쇼의 함재기 파일럿이 공중에서 찍은 사진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전투에는 참여한듯 하다. 혹은 전투 후에 상황 파악을 위해 급히 파견됐거나. [74] 나츠시오가 이미 명을 달리해 전대를 쪼개서, 하야시오가 수상기 모함 부대를 호위 임무를 맡았다. 그래서 다른 구축대와는 달리 2척으로 구성되었다.(나중에 카게로가 배속되어 4척으로 돌아오기는 한다) [75] 레이테 만 해전의 그 유명한 구리다 턴의 그 구리다 맞다. [76] 일본군은 일단 류조도 정규 항공모함으로 분류했다(...) 준요도 개조 항공모함이지만 크기가 정규 항공모함급이라 종종 정규 항공모함으로 분류되었다. [77] 콰잘린 환초에서 대기 [78] 콰잘린 환초에서 대기 [79] 개전 후 미 해군 소령으로 특별임관해 정훈 분야에 종사, 미드웨이 해전 당시 우연히 현장에서 다큐를 찍고 있었는데, 일본 해군의 폭격으로 가벼운 부상을 입었다. 2019년 작 미드웨이에서 부상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80] 이 사람은 이미 앞선 진주만 공습에서 공격총대장 역을 맡기도 했었다. [81] 유럽전선 미군 폭격기 부대 최악의 날로 기록되는 슈바인푸르트 공습 당시의 피해율이 20%를 넘어섰었고, 이후 미군 폭격기 부대는 한동안 정상적인 작전에 나서기 어려웠던 바가 있다. [82] 현대에도 다수의 미사일 등을 옮길 지게차를 이용하나 미사일을 하나씩 바꿔야 하기때문에 시간이 걸린다. 더욱이 2차대전 당시에는 지게차와 같은 수단이 없었기에 사람 여럿이 붙어 폭탄을 수레 비슷한 것에 옮겼다. [83] 당연히 일본군 정비병들은 기껏 절반이상 바꿔놨더니 다시 원위치시키라는 지시에 불평불만이 많았다. 실제로 미드웨이를 다루는 대부분의 미디어에서 나구모의 이런 지시에 장난하냐는 원성 장면이 많다. [84] 원래 VT-8은 어벤저로 기종 변경을 실시했으나 기종 변경을 끝내고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모함인 호넷이 출격한 뒤였다. 1기의 기체도 아쉬웠던 니미츠 제독은 이들 중 일부를 미드웨이로 보냈고, 이렇게 미드웨이로 간 어벤저들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최초로 실전을 치르게 된다. [85] 해리 페리어는 17살이어서 입대가 불가능했지만 서류를 조작해 입대했다. [86] 과달카날 전투의 메인 무대였던 헨더슨 비행장이 바로 이 사람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87] 영화 미드웨이에서도 이 장면이 등장하는데 나구모 주이치의 부관 겐다 미노루가 "특공이었던 걸까요?"라고 묻자 나구모가 "미국 놈들은 그럴 정도로 용기있는 놈들이 아니다."라고 일축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만 영화상에서는 실제와는 달리 나구모가 탄 아카기를 향해 시도한 것으로 묘사하였다. [88] 웃긴 건 이때 미군 폭격기들이 찍은 폭격 장면들이 꽤나 그럴싸했던지 미드웨이 해전 이후 미 육군은 이 사진을 근거로 "미드웨이에서 일본군 때려잡은 건 우리 폭격기들이다."라고 철석같이 믿고 떠들어댔다는 거다. 단순 직선 운동도 아니고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움직이는 이동 목표를 무유도 폭탄의 수평폭격으로 잡는 것은 기술력이 발달한 21세기에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 당시 폭격기 만능론에 과하게 심취한 상태였던 미 육군 항공대는 당대 최신장비였던 노든 폭격조준기에 대한 과신이 상당했다. 하여튼 전쟁 중에 아군과의 괜한 불화를 원치 않았던 미 해군은 그냥 웃어넘겼지만, 전쟁이 끝난 뒤 진상이 알려지면서 미 육군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89] 일본 해군의 교리상 뇌격기들만 어뢰를 장비한 채 대기했다. 급강하폭격기는 갑판에서 무장하도록 되어 있었다. [90] 뇌격의 경우 제대로 맞기만 한다면 함의 선체 구조 자체를 직접 파괴할 수 있는 반면, 급강하 폭격은 상부 구조물에 집중되는 공격 방식의 특성상 선체 자체에 영향을 주기 어렵다. 문제는 이 당시 미군의 어뢰가 잠수함용 어뢰는 물론이요, 항공어뢰도 신뢰도가 꽝이었다는 거다. 어뢰 스캔들 참고. [91] 장비는 급강하 폭격기를 사용했으나 주 임무는 정찰이었으므로 이런 대규모 공격에는 예비대로 대기하거나 급강하 폭격대대보다 상대적으로 경무장을 하고 항모 비행전대장을 수행했다. [92] 세계 최초의 핵추진 잠수함 SSN-571 노틸러스가 아니라 대전기 미 해군의 재래식 순양잠수함 나왈급 잠수함의 2번함이다. [93] 대표적으로 링 중령은 자신이 사관실에 들어왔을 때 일어나지 않은 조종사들을 육지로 내쫓았다. 미드웨이 해전을 앞두고 호놀룰루에서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의 비행 부대원들은 매일 저녁 외출하여 생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나날을 즐겼지만, 호넷 비행 부대원들은 링 중령의 지시로 경계 태세를 유지해야 했다. [94] 스탠호프 링의 집안 자체가 미 해군의 명문가이다. 부친은 미 해군 제독을 지낸 제임스 앤드류 링이며, 스탠호프의 아들 스튜어트 링 역시 미 해군 소장을 지냈다. 링 본인은 중장으로 예편한 뒤 1963년 사망 시까지 미드웨이 해전에 대한 공식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는데, 1999년 링의 딸이 미드웨이 해전에 대해 링이 작성한 22페이지 분량의 에세이를 발견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참조. 스탠호프 링의 회고에 따르면 호넷의 비행대가 엉뚱한 곳으로 간 것도 부족해서 돌아올 때도 엉망이었던 것은 당시 무전 기술의 신뢰성 부족과 작전상 무전 침묵에 따른 소통 부재 탓이 컸단다. 무전 침묵으로 인해 호넷은 최신 적정 보고를 접하지 못했고, 링 자신도 그 내용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했던 것. 복귀하던 중에도 호밍 비컨의 혼선 탓에 잡혀야 하는 호넷의 신호는 잡히지 않고 쌩뚱맞게 엔터프라이즈의 것만 자꾸 잡히는 등 총체적 난국이었다. 이 당시 항공기들은 모함으로 복귀할 때 호밍 비컨의 신호에 따라서 복귀하는 것이 절차였다. 스탠호프 링은 이 당시 자신의 실책을 인정했다. 그는 6월 6일의 공격대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해군 수훈십자장을 받게 된다. [95] 그의 증조부모 중에 네이티브 아메리칸인 샤이엔족이 있었다. 월드론 소령은 자신이 인디언의 직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96] 급강하 폭격대보다 상대적으로 경무장을 하고 있어서 항속거리가 길었다. [97] 이 승진은 미드웨이 해전 이전에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미처 대령은 미드웨이 해전 당시 함선 내에서 이미 제독이라 불리고 있었다. [98] VT-6, VT-8 [99] 이미 후계기가 준비되어 있을 정도로 노후된데다, 같은 시기 일본군 함재 뇌격기와 비교해도 그 성능상 열세는 명백하다. [100] 吉田俊雄 『指揮官と参謀』光人社NF文庫、2007年(平成19年)。ISBN 978-4-7698-2023-9 p.119 [101] "링 중령이 일본 함대의 위치와 함종을 자세히 보고했지만, 호넷의 모든 비행대가 같이 움직이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 어디에도 중계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으나,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볼 때 이 부분은 미처 대령의 보고서에서 조작된 부분으로 보인다. [102] TBD중 1기는 집중사격을 받아 후방기총 사수가 중상을 입고 기총까지 고장나자 권총을 뽑아 발악했을 정도였다. [103] 이 인원 중 존 C. 버틀러급 호위구축함의 유래가 된 존 C. 버틀러도 있었다. [104] 이즈음 태치 소령의 와일드캣 편대는 수세에 몰려 한창 악전고투를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태치 소령의 편대를 공격하던 제로센들이 갑자기 추격을 중단하고 급상승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후일 제독이 된 지미 태치는 이 때의 상황을 회고하며, '한창 전투를 벌이던 와중에 제로센들 뒤편에서 뭔가 햇빛에 번뜩이는 것을 발견하고 올려다보니, 제로센들 머리 위 한참 높은 고도로부터 마치 '은빛 폭포수' 같은 것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105] 사실상 침몰이나 다름없긴 하나 침몰 수순은 전투 끝난 후에 자침 식으로 이뤄졌으므로. 다만 두 번째로 당한 아카기의 최후는 폭탄 한 발에 내부에서 유폭이 일어나서 피해가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진 것이기 때문에 침몰이 맞다. 비슷한 사례로 필리핀 해 해전 당시 어뢰 한 발 맞고 충격에 의해 항공유 공급 배관이 깨진 상태로 기화해서 함 내부로 퍼진 항공유 가스에 튄 기관의 스파크 하나로 인해 폭침당한 다이호가 있다. [106] 계급만 보면 엔터프라이즈의 맥클러스키보다 상관이지만, 애초에 이 사람은 원래 요크타운 항공대 소속이 아니라, 새러토가의 비행대대 소속이었다. [107] 조너선 파셜, 앤서니 털리 저 '미드웨이 해전: 태평양 전쟁을 결정지은 전투의 진실'에서는 제로센들이 저공에 있던 것 보다도 미 급강하폭격기들이 들이닥치던 그 순간에 해당 방향의 공역에 있지 못했던 것을 제로센의 요격 실패 원인으로 꼽고 있다. [108] 미드웨이 해전: 태평양 전쟁을 결정지은 전투의 진실 - 조너선 파셜, 앤서니 털리 저 P344 [109] 더욱 대단한건 갤러허 대위는 거의 직각에 가까운 상태 즉 교범적 강하 각도보다 더 급격하게 강하하여 카가를 작살낸 것이다. [110] 함교 전면에 명중탄을 맞았고, 추가로 함교 천장에 명중탄을 맞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500파운드급 항공 폭탄이 머리 위에서 터지나 눈 앞에서 터지나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111] 해당 링크 아래쪽에 노인 셋과 중년 한 명이 찍은 사진이 있는데 왼쪽 첫 번째가 '더스티 클리스' 본인으로 카가와 히류에게 명중탄을 낸 인물이고 왼쪽 두 번째는 진주만-미드웨이에도 참전한 마지막 제로센 파일럿인 '하라다 카나메'. 맨 오른쪽 인물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유일하게 살아돌아온 어벤저의 무전수 '해리 페리어'다. 그야말로 미드웨이 레전드 총집합. 사진에서 유일한 중년인물은 나무위키의 이 항목에서 자주 인용된 "Shattered Sword(국문번역본 제목: 미드웨이 해전)"의 저자 조너선 파셜이다. [112] 상공을 선회하면서 전황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지휘관들의 보고서가 더 정확한 것으로 판단된다. 급강하 도중에는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거나 착각할 수도 있다. [113] 다만 이 1000파운드 폭탄의 폭발 위력이 대단해 함교의 안테나 한 개를 박살냈고, 아카기의 함교는 폭발로 인해 튄 바닷물을 뒤집어쓰며 시야가 차단되었다. [114] 통칭 '베스트 샷'이라고 불린다. 참고로 베스트 대위는 미 해군 최정예라는 엔터프라이즈 소속 급강하폭격기 대대원 중에서도 자타가 공인하는 베테랑이었다. [115] 유폭 방지 물펌프는 비상시 탄약고를 침수시켜 탄약의 유폭을 막는 설비이다. 이 공격으로 인해 유폭을 막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 [116] 이 공격으로 웨버 중위와 베스트 대위는 해군 십자 훈장을 수여받게 되지만, 웨버는 이 날 전투에서 뒤이어 히류를 공격하다가 제로센에 격추당해 전사했다. 베스트 대위는 산소 호흡기 문제로 폐손상에 뒤이어 결핵이 발병해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다행히 이후 완치되었으며 천수를 누리다 2001년에 사망했다. [117] 원래 후지타는 나구모의 참모가 아니었기에 나구모의 구명정에 탈 수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다른 장교들이 별다른 반대는 하지 않았다. [118] 실제로 고속, 긴 사정거리를 지닌 산소어뢰를 이용한 구축함의 뇌격은 일본 해군의 장기이기도 했고, 나구모는 일본 해군 최고의 수뢰전 전문가였다. [119] 다만 1항공함대 전투상보에는 이 기록이 없으며 전투상보에는 10시 58분에 2항전 기함 히류가 8전대 사령관 아베 제독이 임시로 지휘하며 탑승했던 기함 토네에 "지금 전 기(全機) 발진, 적 공모를 격멸할 것임." 이라고 발신한 기록이 있다. [120] 이 사진은 조너선 파셜, 앤서리 털리의 Shattered Sword를 통해 서구사회에 처음으로 소개된 것이다. 6월 4일 10시 57분 출격한 고바야시의 급강하 폭격기 공격대를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초에는 6월 1일~3일 사이에 촬영된게 아니냐는 반론도 있었으나, 당시 일본 제1 항공함대의 작전 개요를 보면 히류는 6월 1일~3일 사이에 저렇게 대규모의 항공기를 일제 발함시킨 적이 없었으며, 오로지 6월 4일 미드웨이 해전 당일에 아카기, 카가, 소류가 피탄당한 이후에 반격을 위해 99식 함상폭격기를 발함시킨 것 밖에 없다. 따라서 저 사진은 6월 4일 미드웨이 해전의 바로 그 순간을 촬영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121] 이것은 말은 쉬워 보일지 몰라도, 무전기 기술이 개판 5분전인 일본의 뇌격기로 하기에는, 상당한 베테랑 파일럿이 필요했다. 서로간의 소통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대공화망을 뚫고 이런 고난도의 기술을 보여줬다는 소리. 대전 초기 일본의 파일럿들이 얼마나 정예였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단, 지속적인 전투로 조종사를 손실한 일본은 산타크루즈 해전을 마지막으로 베테랑 파일럿들을 모두 소모해버리고 만다. [122] 대표적인 인물이 본문에도 언급한 로프턴 헨더슨 소령이다. [123] 오죽하면 히류의 함장 가쿠 토메오 대좌는 승조원들에게 각성제를 먹이려 했을 정도였으나, 야마구치 제독이 이를 반대하고 식사 겸 휴식을 주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식사하다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124] 앞선 아카기, 카가 격침 이후 제6정찰비행대대와 제6 폭격비행대대의 대원들의 상당수는 복귀도중 제로센의 추격과 연료 부족으로 불시착하는 불상사를 겪었다. 맥클러스키 소령도 복귀과정 중에 부상을 입어 히류 폭격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125] 이 폭탄은 제6정찰비행대대의 갈라허 대위와 스톤 소위가 떨어뜨린 폭탄이었다. 이후 같은 소속의 자카드 소위가 히류에 제1명중탄을 내게 된다. [126] 다만 이렇게 또다시 뒤엉킨 폭격 강하로 인해 각각의 급강하 폭격기들은 일본군 제로센들의 요격에 취약해졌고 그 결과 앞서 아카기 공습에 참가했던 프레드릭 T 위버가 격추되는 등 적지 않은 손실을 야기했다. [127] 히류도 거의 가라앉은 상태에서 구축함 마키구모의 뇌격 처분을 받았다. 다만 명령체계가 어떻게 꼬였는지, 히류에는 사실은 야마구치 외에도 기관장 등 다수의 생존자들이 아직 있는 상태였고, 이를 확인한 나구모 제독은 이들을 전부다 구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명령이 전달이 제대로 안 된 것인지 마키구모는 구조는커녕 그냥 어뢰만 쏘고 가버렸고, 생존자 구조 임무를 받은 구축함 타니카제가 뒤늦게나마 도착했지만 엄청난 수의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수색은 고사하고 목숨만 간신히 건진 채 돌아가야 했다. 침몰하는 히류에서 탈출한 생존자들은 겨우 찾아낸 9m짜리 구명보트에서 2주일이나 표류하다 미 해군에게 구조되었다. 참고로 이 폭격으로 타니카제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가장 많은 미군기의 공습을 받은 수상함이 되었다. [128] 여기서도 아라시가 등장한다. 상세는 후술. [129] 미국이 야마구치 제독을 높게 평가해 "다몬이 죽었으니 야마모토의 후임이 될 인물은 없다."고 야마모토 암살작전을 진행시켰다는 얘기가 있는데, 니미츠 평전 등 어떤 미국 측 기록을 뒤져봐도 다몬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애초에 이 이야기 자체가 일본의 논픽션 작가가 쓴 책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미국 해군 장교가 "나가토가 있으니 일본은 침공 못한다."고 말했다는 신빙성 없는 일화처럼 그냥 헛소문이다. 니미츠 회고록을 보면 니미츠는 야마모토를 죽이면 더 유능한 사람이 그 자리를 대신할 가능성에 대해서 우려하는 내용이 있을 정도이다. 물론 야마모토가 무능하다고 여겼다기 보다는 암호해독이 들킬 위험을 감수하고 야마모토를 제거했는데 더 유능한 사람이 와버리고 암호해독까지 들키면 일본군에게 좋은 일을 해주는 거니 그 가능성에 대해서 염려한 것에 가깝다. 그러자 "제독님을 잃으면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되어 있다. 야마모토도 일본 해군 총책임자이니 대체 불가한 인재일 것이라는 말을 돌려서 한 말이다. [130] 이때 상륙한 일본 해군 육전대는 1년간 그곳에서 아무짓도 못하고 무위도식하다가 애투섬에서는 상륙한 미군과 격전 끝에 2천여명이 전멸하고, 키스카섬의 5천명은 미군 상륙 직전에 기무라 마사토미 제독의 구출함대에 구출된다. [131] 그러나 이 자살공격은 일본측 기록엔 남아 있지 않다. 침몰 전에 미군기에 의해 찍힌 사진에도 항공기 충돌 흔적은 없었기 때문에 전투중의 혼란의 와중에 미군들이 착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132] 해전 중에 대파상태에서 응급수리중 뒤늦게 전장에 도착한 일본 잠수함에 의해 격침당했으므로 굳이 따지자면 뒷북. 그러나 응급수리 상황 자체가 전투에서의 피해로 인해 벌어진 일이고 결국 전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침몰당했기 때문에 위키피디아에는 해당 전투에서의 손실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사보섬 해전 직후 격침당한 일본 중순양함 카코도 요크타운과 비슷하게 전투 직후 미 잠수함의 뇌격에 당해 침몰당했지만 이쪽은 전투가 종료되어 전장에서 이탈한 후에 당했으므로 위키피디아에는 해당 전투의 손실로 기록되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요크타운이 침몰당하기 이전에 함장이 승조원들을 전원 탈출시키고 확인까지 끝낸 후 자신도 탈출해서 승조원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전사자 수가 상당히 적은 것이다. [133] 응급수리중이던 요크타운 호위 중 같이 격침됐다. [134] 2019년 6월 22일 방송 [135] 일본 NHK 방송이므로 일본 해군의 시점에서 30:15 부터 진주만 공격과 그 성공에 빠져 참패를 당한 미드웨이 해전에 대해 간략히 다루고 있다, 겐다 미노루 항공참모와 그 당시 항모 승조원들의 일부 증언도 나온다 [136] 역사를 움직인 운명의 순간과 전장의 삶과 죽음의 모습에서 펼쳐진 극한의 이야기를 20세기 영상 매체 발명 후 기록된 영상들을 수집하여 대표적인 일부 전투를 통해서 바라본 다큐멘터리 [137] 미군의 실책으로는 대표적으로 스프루언스 제독의 삽질을 꼽을 수 있다. 단, 엔터프라이즈 항공대를 대열부터 맞춘 후 일본군에 접근시킨 그의 행동은 그 상황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의 지휘하에 있던 엔터프라이즈 항공대는 항공모함간의 전투를 해본 적이 없었으며, 이미 산호해 해전으로 인해 경험을 한 바 있던 플레처 제독 휘하의 요크타운 항공대는 날아가면서 대열을 맞추라고 지시를 이미 내린 상황이었다. [138] 하필 맞은 곳이 방화격벽인데다 미군 항공모함을 잡으려고 어뢰에 연료까지 만재한 채 출격을 준비 중이던 함재기 근처라서 화재 확산을 막을 수 없었다. [139] 특히나 당시 제식으로 쓰이던 산소어뢰는 충격에 굉장히 민감했던 터라 미군의 항모전단에서 날아온 공습에 의해 기관포만 맞아도 뻥뻥 터져나갔다. [140] 전간기에 미국이 작성한 컬러 전쟁 계획에서 가장 세심하게 기획되고 실현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전쟁은 바로 영국, 즉 당대 육해공 최강국 대영제국과의 전쟁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같은 체급이나 비슷한 체급이 아닐 뿐더러 미국 스스로도 장차 있을 전쟁에서 일본을 같은 체급으로 여긴적이 없다. 다만 미국도 1차대전 이후 일본이 지나치게 커졌다 싶자 틈틈이 견제를 넣어줬다. 이는 일본의 중국 정복 야욕을 막는 것에 집중되었고, 그것이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141] 단, 시작부터 70%를 유럽에 보낸 것은 아니고, 미드웨이 해전 전까지는 당장 발등에 불부터 꺼야 했기에 일본으로 투입된 전력도 만만치 않았다. 흔히 알고 있는 70:30은 미드웨이 승리 이후 일본의 공세를 꺾고 미국이 생산력을 끌어올리며 본격적으로 물량전을 시작하게 된 과달카날 전역 이후의 이야기. [142] 농담 같아 보이지만, 진짜다. 이 항공모함이 살아남음으로 인해 일본군은 과달카날과 그 이후의 작전이 몽땅 어긋났다. [143] 이에 대해 과대 평가라는 의견도 있다. 이 당시 미군이 보유한 레이더의 성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데다 이를 운용하는 미군 병력들의 숙련도도 낮았기에, 일본군은 미 함대가 어렴풋이나마 보이는 지점에서 본격적인 저항에 부딪혔으며 고도와 위치 선점 등의 문제로 인해 미군 함재기들이 일본군 함재기들을 놓쳐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전투기에 의한 함대 방공이 당당히 함대 방공의 한 축이 된 건 차세대 레이더 사격 통제 시스템이 탑재된 필리핀 해 해전부터라는 평이다. 참고로 이보다 몇 달 앞서 영국에 설치된 동일한 레이더 설비는 독일의 폭격기를 완전히 끝장내버렸다. [144] 게다가 가뜩이나 항모를 호위하는 수상함 숫자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일본 해군의 고질병인 빈약한 방공능력 때문에 4척의 항공모함이 벌떼처럼 오직 항모만 노리고 달려드는 미 함재기의 먹잇감이 될 운명은 예정된 셈이었다. [145] 만약 니미츠가 요크타운을 3일 만에 도크에서 끌어내지 않고 수리하도록 두었다면, 야마모토가 즈이카쿠를 합류시켰거나 알류산열도 방면군에서 항모를 한 척 빼 왔다면 전투는 일본의 승리로 끝났을 지도 모른다. [146] 실제로 정규 항공모함 중 다른 나라에서는 생각조차 못했던 24척(!)이라는 무지막지한 생산량을 자랑했던 에식스급 항공모함만 해도 엔터프라이즈가 'Enterprise vs. Japan' 문구까지 써가며 혼자서 버티고 있던 과달카날 전역 중반 이후에나 정식으로 투입되기 시작했다. [147] 비슷하게 스탈린그라드 전투 역시 독소전쟁의 전환점이라고 불리지만 1943년 3월까지 이어진 르제프 전역과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독일군이 소련군을 방어하며 여전히 독일의 동부전선 전력은 강성했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에서의 독일 제 6군의 패배로 독일군은 1942년 청책작전 발동과 함께 쥐고 있던 독소전쟁의 가장 중요했던 남부전선 공세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해군 기동함대의 공세력을 상실케한 미드웨이 해전과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각각 공세이전 일본군과 독일군의 힘을 꺾어두고 쿠르스크 전투와 과달카날전역에서 전세를 뒤집은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148] 당시나 지금이나 항공모함에 승선한 함재기 조종사와 승무원들의 경우 모함에 화재 발생시 무조건 화재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대피하도록 되어 있다. 그만큼 귀중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149]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일본군의 무기체계 문서에 들어가서 읽다 보면 해군만이 아니라 육군에서도 이런 병크들이 구석구석 나온다. [150] 요크타운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어느 정도로 일본군을 속여먹었는지 보여주는 증거. 항공모함을 한 척 밖에 못 잡았으면서 두 척을 잡았다고 착각하게 만든 것이다. [151] 이유는 간단하다. 사이판이라는 기착지를 얻은 미군의 폭격기 B-29 본토에 폭격을 때리기 시작했기 때문. [152] 그러나 도조 히데키 자신은 총리대신 자리만 고이소 구니아키에게 넘겨준 게 전부일 뿐 영향력은 계속 행사하고 있었다. [153] 특히 1944년 말, 필리핀 탈환전을 앞두고 벌어진 대만 항공전에서 일본이 보여준 행태는 윌리엄 홀시 제독의 명 드립과 함께 잘 알려져 있다. [154] 한 번 어뢰 8발을 맞을 '뻔' 했다. 그런데 그걸 다 피했다. [155] 두 다리가 모두 부러졌다. [156] 사실 이런 시각은 군사 지식이 거의 없는 일반인들이 몇 안되는 단편적인 지식을 가지고 판단하면 대부분 나오는 반응이다. [157] 지금까지 한국에 소개된 미드웨이 해전 관련문헌들 역시 후치다를 인용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후치다는 이 해전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할 것이다. 후치다의 책(영문본)은 해군사관학교에서 2005년에 번역되었지만 일반시장에 판매되지는 않았다. [158] 이건 어느 시대, 어느나라 군인들이나 마찬가지다. 당장 자신의 임무에 필요한 정보를 체득하기에도 빠듯한데, 남의 일에 대한 것을 일일이 알아야 할 여유도 이유도 없다. [159]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는 J. Lundstrom 을 비롯한 전문가들의 연구로 후치다의 신뢰성에 의심이 제기되기 시작했지만 후치다의 권위가 추락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J. Parshall, A. Tully 공저 "Shattered Sword"의 출간이다(2005년). 저자들의 말에 따르면 후치다의 저서와 자신들의 연구결과가 불일치하는데 대한 의문이 집필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미드웨이 해전 : 태평양전쟁을 결정지은 전투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2019년에 출간되었다. [160] 태평양 전쟁 개전 이후, 전쟁 초기에 미군 수뇌부는 오스트레일리아를 영국 본토처럼 연합군 반격의 핵심 대기지로 인식해서 미국 ~ 호주간의 해상 수송로 및 병참선의 방어 및 유지를 최우선 순위로 설정하여 가용가능한 부대들을 경로 상에 포진한 주요 섬 지역에 수비대로 배치시켰다. [161] 물론 태평양 전쟁과 베트남 전쟁은 전쟁 개시의 명분 측면에서 급이 다르기에 적절하지 않을 수 있으나,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계속해서 국민들이 죽어나가고 돈만 펑펑 샌다면 전쟁을 지속할 이유와 의지가 점점 사라지게 된다는 면은 생각해볼만 하다. [162] 다만, 미드웨이 해전의 패전으로 인하여 미국이 일본과 타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평화를 유지하는 기만 후에 비겁한 기습을 당했다고 여겼고 이후에 불어닥친 애국주의와 복수심은 정, 재계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또한 물주였던 미국의 뒤통수를 거하게 후려친 일본에게 미국이 전쟁 내내 전혀 협상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던 것 등으로 일본의 협상 시도를 미국이 받아들일 여지가 없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사실 이와 같은 총력전의 양상은 미-일뿐만 아니라 2차 대전 내내 전 세계에서 보이는데 독일은 총통이 죽고 연합국에 항복하기 전까지는 베를린 전역이 전쟁터가 되어 동물원의 동물들을 도축할 지경까지도 버텼고, 일본은 나무뿌리 기름을 비행기에 넣고 전 국민의 무장화를 시도하는 등 핵을 두 방 맞기 전까지는 협상 테이블에 나올 생각도 없었다. 심지어 본토가 완전히 유린당한 프랑스, 네덜란드, 폴란드 등도 동맹국으로 정부만 몸을 빼내거나 식민지에 망명정부를 만들어 저항했다. 전쟁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 매우 다른 시절임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163] 일례를 들면, 고폭탄으로 포격/폭격하는 것은 강화콘크리트 진지를 무력화시키지 못한다. 중순양상 이상급 함포의 철갑탄이나 전투기의 로켓탄으로 직격시켜야 하며, 심지어 그것조차 확실하게 제압하려면 탄약이 내려 꽂히는 각도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 밖에 다양한 상륙부대/상륙정의 발진 순서와 진형, 1차 보급품 양륙의 순서 등 세세히 따지고 들어가면 수도 없이 많은 노하우를 필요로 하는 것이 상륙전이다. [164] 그리고 세바스토폴 공방전, 과달카날 전투에서 공고의 포격, 타라와 전투에서 처럼. 방어측 보병이 작정하고 호를 파고 버티면, 전함이나 구스타프가 아무리 포를 쏴도 박멸할 수가 없다. [165] 게다가 언제고 미군에 붙을 가능성이 있던 조선인노동자 1천명까지 있었다! [166] 고대로부터의 전쟁사를 따져봐도 그렇지만 상륙전이나 공성전, 요새전 같은 전투의 경우 방어측이 훨씬 유리하다. [167] 어느 정도인지를 다시 보여주는 말이 있는데, 2000년의 미군이 1945년의 하와이를 상대로 24시간 내에 함락을 장담하지 못한다. 미사일, 제트전투기, 컴퓨터 등 기술력 격차가 60년이 나는데도 그걸로 하와이의 돌아버릴 지경의 방어시설을 24시간 안에는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168]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군은 7개월간 하와이를 강화할 시간이 주어졌다. 그 결과 1942년 4월 기준으로 미군은 62,700명의 육군, 8,900명의 육군항공군, 2만명의 해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예비군과 해안경비대를 합치면 총 병력은 약 10만명이다. 여기에 수백대의 전차와 275대의 항공기(이후 350대까지 증원)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벙커, 기뢰, 야포, 콘크리트 요새 등 방어시설이 엄청나게 설치되어 있었다. 당시 일본 해군은 모든 역량을 총동원했을 때 최대 6만의 병력을 상륙시킬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보급은 하와이에서 6,500km 떨어진 일본 본토에서 가져와야 하는데, 6만으로 10만이 방어하는 완전 요새화된 섬에 상륙전을 벌인다? 어찌될지는 아무리 바보라도 알 수 있는 노릇이다. 이것도 미국 해군이 전멸해서 일본군이 상륙을 방해받지 않고 시도할 수 는 있다는 상상에서의 이야기다. [169] 니미츠가 진주만 공습 때 근무하던 이들 중 유임시킨 장교들 가운데, 종전까지 태평양 함대사령부 밖으로 전출되지 않은 유일한 장교였다. 그가 진주만 공습 시 가장 큰 책임을 떠안고 징계를 먹을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이었음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고, 그는 다행히 니미츠의 기대를 계속 충족시켜줬다. [170] 이것과 관련된 농담이 2019년 영화에서도 나온다. [171] 조종사인데 왜 상사지? 할 수도 있는 부분인데 일본 해군은 장교에 대한 순혈 의식이 너무 크다보니 조종사 같이 작전에 주도적이게 의견을 개진해야할 인력들조차 장교 계급을 받지 못하고 싸웠다. 이들은 수직적인 조직내에서 까라면 까 식으로 갈려 나갔다. 반면에 적성국인 미국과 영국은 조종사가 모두 장교 계급으로 항공 작전에 관한 의견 개진이나 작전을 세우는 데에 훨씬 자유롭고 주도적이었다. [172] 넷우익들은 이것만 아니었으면 일제가 이겼을거라고 정신승리를 시전했지만 현실은 아쿠탄 제로 이전부터 상대 손실비가 아닌 절대 손실비로 따져서 보면 일본군 해군기들의 손실이 미군측 해군기의 손실보다 더 컸다는 거다. 또한 이 미드웨이 해전 이후부터 미군의 전술교리에 타치 위브라는, 통신을 이용한 새로운 전술이 들어가며 덤으로 봄앤줌까지 더해졌다. 넷우익의 우격다짐과는 달리 냉정하게 말하면 시한부 환자나 마찬가지이던 일제의 명을 좀 더 앞당긴 것에 불과하다. 애초에 일본군 해군기들과 미 해군 항공대에서 운용한 기체들은 맷집부터가 다르다. 당장 당시 미 해군의 함재기 F4F 와일드캣과 일본군 해군 항공대의 A6M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173] 야마토급 전함 야마토, 나가토급 전함 나가토/무츠, 이세급 전함 이세/휴가, 후소급 전함 후소/야마시로, 공고급 순양전함 공고/히에이/하루나/키리시마 [174] 그나마도 이 2척 중 요크타운은 당시 빈사상태라서 제대로 된 전력이라고 할 수 없었다. 호넷이 있긴 하지만, 항모만 멀쩡했지 스탠호프 링이 이끌던 항공대가 시작부터 대장기의 트롤링으로 인해 해전중에 거의 전멸해버려서 작전에 재투입되는건 불가능한 깡통상태였다. 즉 두 항모의 해전 후 잔존 전력은 사실상 1대로 반쪽이 난 상태였던 것. [175]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대다수가 침몰하거나 수리, 개장중이었다. [176] 전과촬영을 맡았던 매클러스키 비행단장의 요기가 대장의 명령에 따라 일본 항공모함으로 급강하하는 바람에 사진촬영을 하지 못했다. 이 비행기 조종사는 그 와중에도 사진촬영을 시도했으나 찍힌 것은 하늘과 바다 뿐이었다. 이 외에 VB-6 소속 윌버 에디슨 로버츠 소위의 SBD(6-B-6)의 후방사수 윌리엄 버 스테인먼 하사가 소지했던 카메라로 목표가 된 일본 항모들의 사진을 찍었으나 이 사진들은 나중에 TF-17항공참모 머 아놀드 중령에 압수당했다고 한다. 로버츠의 증언에 따르면 스테인먼의 필름이 현상되었을 때 몇 장에는 불타는 항공모함 3척의 이미지가 있었다고 한다. 이 사진들의 행방은 현재 불명이며 발굴될 경우 미드웨이 해전의 가장 극적인 순간을 담은 사진으로서 엄청난 가치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현장을 찍은 사진이 없는 상황에서 당시 언론에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 항공모함 격침 장면이라고 나온 것들은 당시 상황을 재현한 디오라마였다. [177] 당시 미 해군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항공기 승무원인 사병들을 이 직별에서 뽑았다. [178] 따지자면 이건 카미카제라고 할 수 없다. 처음부터 자폭으로 죽기 위해 멀쩡한 항공기를 갖다 박는 것이 아니라, 항공기가 격추되는 상황에서 파일럿이 어차피 죽을 것이니 적과 함께 죽겠다는 식으로 자의를 가지고 적에게 돌진한 경우는 카미카제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군의 핸더슨 소령도 이를 시도했고, 진주만 기습 당시 이를 시도한 일본군 조종사는 미국에서 시신을 수습해 나름 정중하게 장례까지 치러 주었다. 자신의 항공기가 불에 타서 추락하는 중에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적에게 돌진하는 것은 절대 쉬운 판단이 아니다. [179] <히스토리 채널, 배틀 360(Battle 360 Degree), 미드웨이의 반격> [180] 타이타닉, 비스마르크를 발견해낸 미 해군 중령 출신의 해저탐험가이다. [181] A특공대에서 한니발로 나온 조지 퍼파드, 잔 마이클 빈센트, 폴 윈필드, 아역배우 시절 재키 얼 헤일리 주연이다. 한국에선 미개봉하고 1994년 1월 9일 KBS2 일요특선에 이 제목으로 오전 11시 더빙 방영. 원작자 젤라즈니가 분노할 정도로 영화 평가도 안 좋았다. [182] 니미츠 제독은 헨리 폰다, 핼시 제독은 로버트 미첨, 야마모토 제독은 미후네 토시로, 그밖에 글렌 포드, 제임스 코번같은 여러 유명배우들도 나오며 기타 일본측 인물들은 나름 이름있는 동양계 미국배우가 네이티브 영어를 구사한다. 베스트 키드에서 미야기 스승을 맡은 노리유키 팻 모리타도 나왔다. 한편, 미후네 토시로는 더빙처리. [183] 항공모함 전대가 실제 항공모함 1척으로 때운다. [184] 예를 들어 1초 분량이지만 일본의 공습 중 미군의 대공사격 장면에서 아이오와급 전함의 16인치 주포 포격(...)이 나온다. 게다가 대공방어용으로 고각으로 쓰지도 않고 사격훈련이나 함대함 포격전을 연상시키는 저각으로 쏜다. 애초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은 전함 전력을 아예 내보내지도 않았었다. [185] 영화 짜집기도 짜집기지만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애인을 기다리는 일본계 미국인 처자의 모습은? [186] 초반부에 나오는 자료화면으로 묘사된 동경 공습 부분이 바로 그 영화이다. [187] 고지라 시리즈의 아버지인 쓰부라야가 전투장면을 담당했다. [188] 잘 보면 미드웨이에 난데없이 미 전함 아리조나가 정박해있고 미드웨이 출격을 아침에 한다. [189] 전편이 7부작 드라마인 전쟁의 폭풍(The wind of war,1983)이며, 한국에서는 KBS1에서 전편은 1984년 10월 31일부터 밤 10시 10분, 9시 45분 시간을 여럿 바꾸며 수,목요일 밤에 11월 22일까지 방영했고, 후편은 1989년 8월 10일,11일부터 매주 금,토요일 밤 10시 5분에 했다가 7부~8부는 8월 26일 토요일과 다음 날 일요일 밤 9시 35분에 8부까지만 방영하고 나머지는 속 전쟁과 추억이란 제목으로 1990년 8월 18일부터 22일 밤 10시 45분으로 방영했다가 1990년 11월 14일부터 12월 19일까지 매주 수,목요일에 12부를 모두 붙여 KBS2에서 밤 11시에 재방영했다. [190] 상기한 1976년작 미드웨이에서 윌리엄 홀시 제독 역을 연기한 ' 로버트 미첨'이 연기했다. 극 중에서는 후반부에 소장으로 진급. 더빙 방영판에선 성우 이봉준이 내레이션과 같이 연기했다. [191] 참고로 이 둘째 아들의 며느리로 샤론 스톤이 나온다. [192] 영화 예고편에서 필리핀 해 해전 당시 마크 미처 소장이 미귀환한 파일럿들을 구조하기위해 함선의 모든 조명을 키도록 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193] 이 시절에는 저작권을 무시한 해적판 번역도 많았지만 제2차세계대전 관련도서 출판은 꽤 활발했다. [194] 이 책은 일본 극우의 관점으로 집필되었으며 해전의 구체적 양상의 묘사에서도 지금은 사장된 후치다의 견해가 상당히 반영되었다는 점에 유의 [195] 번역서가 아닌 국문도서 [196] 다만 '운명의 5분' 같은 현대에는 사장된 통념이 내용에 그대로 반영되었으며 1차사료가 아닌 영미권 출간 2차사료만 참고해 저술되었음에 유의해야 한다. [197] 서구권에서 통설이 된 후치다 미츠오의 설명을 사료검증과 상황재구를 통해 정면으로 반박했으며 특히 5분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미군 폭격대가 일본군을 습격하기 전, 일본군 공격대의 발진이 가능했으리라는 주장인 이른바 '운명의 5분'이 허구였음을 증명한 것으로 잘 알려졌다. [198] 제목과 달리 미드웨이 해전 관련내용은 일부다. 이 책의 원제는 'Carrier Combat(항공모함 전투)'이며 미드웨이는 역서의 제목이다. 주인공은 VT-8 소속으로 해전당시 항공모함 호넷에 있었으나 출격하지는 않았다. 일부 블로그에서 이 책이 영화 '미드웨이(2019)'의 원작인 것처럼 소개되었으나 잘못이다. [199] 카이바만이 쿠르스를 볼 수 있다. 다만 카이바는 쿠르스를 유령으로 생각한다. [200] *하지만 잭슨은 실존인물인 버논을 모티브하였다 [201] 글로벌서버는 2020년 1월 21일 오후 3시부터 2월 4일 오후 3시까지. 이후 글로벌서버가 2021년 8월 31일 섭종하면서 글로벌서버 마지막 이벤트가 되었다. [202] 다만 미국은 너무 거대했기에 망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