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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9년 4월 28일 |
포르투갈 왕국 베이라알타주 산타콤바당시 비미에이로 (現 포르투갈 비제우현 산타콤바당시 오보아-이-비메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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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0년 7월 27일 (향년 81세) |
포르투갈 리스본 | |
재임기간 | 제100대 총리 |
1932년 7월 5일 ~ 1968년 9월 25일 | |
서명 | |
학력 |
코임브라 대학교 (민법학 / 학사) 코임브라 대학교 (법학 / 박사) |
배우자 | 없음 (독신)[2]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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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제2공화국의 100대 총리이자 독재자.처음에는 가톨릭 신학대학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으나, 마음을 바꾸어 코임브라 대학교에서 법학을 배우고 1916년 코임브라 대학교의 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1926년 쿠데타로 집권한 안토니우 오스카르 드프라고주 카르모나(António Óscar de Fragoso Carmona) 장군이 재무장관으로 입각을 제안했으나 거절했다. 2년 뒤 카르모나 대통령이 제안한 모든 부서의 예산 지출에 대한 전권(全權) 부여를 조건으로 재무장관으로 입각해 엄청난 업적을 세우는데, 100년 이상 계속된 포르투갈의 적자 재정을 흑자로 반전시켰으며, 예산의 균형을 맞추고 포르투갈의 통화를 안정시켰다. 1932년 포르투갈 총리가 되었고, 국민연합을 조직하여 일당독재를 추진하였다. Estado Novo[3] 운동을 Deus, Pátria e Familia[4]이란 슬로건으로 진행했다.
2. 생애
2.1. 집권
경제학 교수라는 경력에서 볼 수 있듯이, 일반적인 독재자와는 달리 경제학자 출신으로 군사정권의 재무장관을 지낸 경제통이었다. 재임기간 동안 세계 대공황의 파도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의 경제를 되살리면서 명성을 얻었고, 1932년에 총리로 임명되었다. 점차 그의 권세는 드높아졌고, 193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군사정권의 실력자들조차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사실상 포르투갈을 완전히 장악한 절대권력의 독재자가 된 것이었다.그는 형식적으로나마 의회를 유지했으며 명목상 총리보다 서열이 높은 대통령직도 명목상 유지되었지만 실제로 대통령은 인기도 실권도 없는 살라자르의 꼭두각시였다. 대통령 직접 선거를 1958년까지 유지하여 국민투표로 당선된 대통령이 살라자르를 총리로 계속 지명하고 그가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자신의 심복이었던 델가도 장군이 195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자 1965년 대통령 선거부터 간선제로 바꾸어 버렸다. "애들이나 마찬가지인 포르투갈인들에게 그런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라며 대놓고 의회 정치를 비난한 적이 있는 만큼 결국 그가 의회정치와 대통령직을 유지시킨 이유는 어떤 신념이 있었다기보단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2.2. 정책
2.2.1. 우민 저개발 독재
자신의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통치를 했으며 3F 정책이라 불리는 우민화 정책을 펼쳤다.[5]게다가 경제학 교수라는 이력과 어울리지 않게 산업화와 근대화에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 포르투갈의 경제 발전을 가로막았다. 20세기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18세기 낭만적 목가주의자의 감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을 제조업 중심의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근대적 산업혁명의 광풍으로부터 벗어난 안전한 농촌 국가로 만드는 것을 추구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30여 년의 큰 풍파없는 장기 집권의 비결이었다.
20세기 초반 포르투갈 같은 남유럽 국가들의 산업화, 근대화의 초기 단계는 자본가에겐 국가, 교회, 군대 등 기존 사회의 권위 집단에서 벗어나 부를 축적할 기회를 주었고, 전통 사회가 해체되어 갑작스런 구조적 생계 불안정에 시달린 대중에게는 결국 도시로 몰려든 실업 예비군을 양산하게 했다.
이런 근대 자본주의적 성장이 건실하게 이루어지면 국민들이 정부에 경제적으로 의존할 이유가 없게 되고, 반대로 불균형한 분배와 과도한 양극화, 그리고 이에 따른 사회 갈등을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노조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성향의 급진 반체제 세력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혁명을 주장하게 된다.
적어도 살라자르 같은 20세기 초반 유럽 대륙식 수구주의자, 가톨릭 교권주의자의 관점에서 과장 섞어 말하자면 잘 되면 국민들이 근본없는 자유주의 성향의 (국민이 아닌) 소비자들이 돼버리고, 잘못되면 소위 빨갱이가 되는게 산업화와 도시화였다. 그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대부분 국가들은 전쟁과 주변국의 위협 속에 새롭게 나타난 총력전이라는 전쟁 양상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과학 기술 발전과 경제 성장이란 과제를 수행해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산업화, 근대화는 필연적으로 극심한 불안정을 야기한다는걸 알면서도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 20세기 초중반의 포르투갈은 총력전의 경험, 상호불신, 무한 군비 경쟁이란 현실에 처했던 다른 유럽 국가들과 입지가 확연히 달랐다. 여전히 펄펄하며 탐욕스런 혈기가 왕성했던 현역 대영제국, 프랑스 식민제국, 신흥 일본 제국이나 미국과 패권경쟁할 열강으로서의 국력은 사라진 지 한참이었고,[6] 남아 있는 아프리카 대륙의 모잠비크와 앙골라, 기니비사우 같은 식민지들 또한 포르투갈이 통치한 지 적어도 400, 500년은 된 땅들이라 집적거릴 명분이 없었다.[7] 육로로 처들어올 만한 적은 스페인 밖에 없는데, 그 스페인은 당장 자국부터가 처참하게 실패한 식민지 개발시도와[8] 이념분쟁, 정치적 불안정으로 휘청거리다 내전이라는 결정타로 인해 옆동네인 포르투갈을 신경쓸 여를도 없이 고꾸라진 상태였다. 바다로는 전통적인 우방 영국이 지켜주며, 당시만 해도 아직 식민지인들이 감히 직접 무기를 잡고 제국주의 상전들을 몰아낼 거란 발상은 하지 않던 시절이다. 나치 독일이야 다른 나라들 상대하기도 바쁘고 설령 침공을 시도한다 해도 중간 지점의 스페인이 통과를 거부했을테니...
정적들에게조차 당대 최고의 교육 수준과 학식을 인정받은 살라자르 교수님은 보다 일찍 계급, 이념 대립을 경험했던 나머지 서유럽, 자국의 현실, 그리고 스페인 내전이란 파국으로 끝난 옆나라의 사례를 잘 알고 있었고, 포르투갈이 예외적으로 느긋할 수 있었던 국제 지정학적 여건에 힘입어 20세기 웬만한 나라는 결행은 커녕 발상도 못했던 산업화 포기, 농촌 목가 경제 위주의 사회적 안정을 택했다. 특히 당시나 지금이나 이베리아 반도는 비교적 늦고 지역적으로 불균등한 산업화를 겪으면서 대량의 국내 도시 이주민들이 발생했고, 이런 알렌테주, 알가르브, 카스티야, 안달루시아 같은 지방에서 리스본, 포르투, 바르셀로나 등 산업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노조와 라틴 문화권 특유의 도시 동네(bairro / barrio) 문화 중심으로 결집하면서 아예 직접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조직적인 국민국가 자체를 배격하는 아나키즘 성향으로 빠지기 쉬웠다.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른 인민 전선 정책 이후 적어도 1930년대 넘어서는 나름 필요에 따라선 기존의 소위 반동 부르주아 정당들과도 교섭하고 공존할 처세술에 적응한 각국 공산당들과 달리 바로 옆동네만 하더라도 정규 조직원 백만, 방계조직 백오십만 운운하며 정당 정치인들이 뭘 하던 총폭탄, 총파업, 프로파간다, 대안 사회 인프라 운영 등을 통해 CNT 계열 아나키스트 급진 좌파들이 성장하는 것을 똑똑히 지켜본 살라자르 입장에선 메리트는 딱히 없으면서 온갖 정치, 사회적 불안정 요소는 다 가지고 올 게 뻔했던 산업화와 이를 수반한 도시화를 추구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때마침 가톨릭 신자들이 공산주의 못지 않게 자본주의도 싫어하는 분위기라 이런 정책을 펴기 유리했다.[9] 이는 살라자르의 평가가 다른 독재자들과 매우 이질적인 이유이기도 한데, 앞으로의 잠재력을 끌어들인다는 명목으로 사회적 갈등의 소지를 크게 남긴 일반적 독재와 정반대로 당장의 안정을 대가로 미래의 잠재력을 말아먹었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나름대로 납득되는 선택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옆 나라에서 별로 좋아보이지도 않는 근대화의 어두운 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는데 거기에 찬성할리가 없었다.
따라서 먹물 중 먹물인 교수님 살라자르는 먹물들이 많아지면 정권 유지가 힘들다면서 노골적인 우민화 정책을 실시했다. 옆나라 프랑코만 해도 지식인, 문화인사 가리지 않고 신나게 공식적, 비공식적 사형을 남발했지만 살라자르는 나라의 절반을 작살낸 내전을 통해 집권한 것도 아니고, 군인도 아니었을 뿐더러, 무엇보다 포르투갈의 핵심적인 전통적 동맹이자 비호 열강이면서도 자유주의 국가였던 영국의 눈치를 봐야 했다. 지식인들을 노골적으로 처형하면 이웃나라처럼 안좋은 국제적 주목만 끌걸 뻔히 알고, 비폭력적 수단을 선호했던 살라자르는 이런 골치아픈 반체제 지식인 계급의 성장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 한 것이다. 다만 초등교육은 보편화시켰는데 글을 쓰거나 기본적인 셈은 할 줄 알아야 제대로 일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동의 문해율은 1930년에 33%였던 것이 살라자르 통치 하에서는 1940년 56%, 1960년에는 97%를 달성했다.[10] 하지만 중등 교육이나 고등 교육에 대해서는 냉담했다.[11]
본국의 교육 사정이 이러하니 당연히 식민지에서의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어서 앙골라는 전체 인구의 98% 가량이 문맹이었고 모잠비크도 마찬가지로 문맹률이 90% 이상이었다. 또 내수 산업 개발보다는 해외 식민지 경영에 집중해 포르투갈의 산업 성장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비록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 유럽이 쑥대밭이 되어가는 와중에 중립을 지키면서 추축국과 연합국 모두에 군수 물자를 수출하면서 어느 정도의 경제 발전을 이루는 듯 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탈식민지화의 바람이 불어 많은 식민지 국가들이 식민 통치에서 벗어날 때, 포르투갈은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등은 영구한 포르투갈 영토라는 논리 하에 해외 식민지에 집착하여 오랫동안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을 벌였고, 이는 국가 재정과 경제 전체에 많은 악영향을 끼쳤다.[12] 결국 포르투갈은 살라자르가 물러난 1968년에야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을 넘겼을 뿐더러 그 포지션을 80년대 중반까지 맴돌았을 정도로[13] 서유럽의 최빈국이 되어버렸다.[14]
더딘 산업화로 인해 60년대에서 70년대 사이 많은 포르투갈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전후 호황을 누리고 있던 다른 유럽 국가들로 유출되었으며, 덕분에 포르투갈의 최대 수출품은 포르투갈인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대항해시대에 신이 포르투갈인들에게 요람으로 작은 포르투갈을 주고, 무덤으로 세계를 주었다는 말이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2.2.2. 반공, 반파시즘
살라자르 정권은 우파 반공 가톨릭 교권주의 독재체제였지만 살라자르 본인은 파시즘의 열광적 대중동원이나 대외적 팽창주의를 혐오하며 안빈낙도를 추구했다. 가톨릭 교회를 통한 사회 통제란 면에선 부분적으로 전체주의적인 면도 있었고, 스페인 내전때는 보수주의 이데올로기 동지였던 프랑코 진영으로 만명 규모의 고대 루시타니아의 반로마 지도자의 이름을 딴 비리아투스 군단 의용병을 파병하기도 했다. 프란시스쿠 홀랑 프레투가 이끌던 포르투갈 파시즘 운동과도 한동안 제휴했으나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깔끔하게 권력의 중심에서 내쳐버렸다.일종의 우민화 정책과도 유사하게 연결되는데 살라자르 본인은 국민들이 어떤 특정 이데올로기나 정치 운동의 영향을 받는것 자체를 원치 않았다. 따라서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 흔했던 거대한 대중동원과 정부-파시스트 정당 체제 일치는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15] 특히 나치의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대해서는 살라자르 개인이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공개적으로 혐오하는 입장이었고 포르투갈은 2차대전때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지켰지만 거의 백만에 가까운 유럽 유대인들이 포르투갈을 거쳐 미국 등으로 무사히 탈출할 수 있도록 적극 협력했다. 대전 중반에는 확실히 연합국 쪽으로 기울어진 행보를 보였다.
자본가들도, 공산주의자들도 전부 유대인이랍시고 거품물던 전간기 유럽의 파시스트들과 여전히 18세기적 전근대 사회로의 복귀를 추구하던 반동주의자들은 상당한 부분에서 시각을 공유했으며 보수혁명론의 근간이 되기도 했다. 이렇기 때문에 파시즘을 다루는 학술 서적 등에선 의례적으로 나치 독일, 파쇼 이탈리아의 사례 이후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과 함께 부록으로 살라자르 정권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 무솔리니 같은 파시스트들과는 달리 살라자르는 기존 식민지의 유지를 넘은 군국주의, 팽창주의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나름 뒤틀린 의미에서 과학기술이 상징하는 근대성을 긍정하며 개발주의를 추진하지도 않았으며, 가톨릭 정체성을 강조한 것 이상의 전체주의적 대중 동원을 오히려 혐오했고, 심지어 늘 따라다니는 프랑코와 비교해서도 정권의 폭력성이나 억압성이 확연하게 차이났다. 그래서 " 파시즘이 아닌 그냥 권위주의적 우파 군사독재자다." vs "정권의 차원에서는 학술적으로 파시즘이 맞다."라는 의견 대립이 팽팽한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의 평가와 달리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의 포르투갈 제2공화국은 확실히 파시즘은 아닌 "단순한 권위주의 우파 독재였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2.2.3. 외교 정책
독재 체제임에도 외교에서 상당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이븐 사우드와 함께 연합국 측에 호의적이었고 아소르스 제도 등의 군사기지를 영국과 미국에 제공하기도 했다. 2차 대전 이후에는 냉전기 미국, 영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해 나가면서 OECD, NATO, EFTA 등 국제기구 창설에도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바로 옆의 스페인이 내전의 기억을 통해 전후 유럽 외교가에서 동서방을 초월한 국제왕따로 추락하고, UN을 비롯한 각종 국제 기구도 '파시스트와 야합하는 서방'에 대한 동구권의 가열찬 비난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유럽 동맹국들을 겨우겨우 어르면서 참여시키는 등[16] 악명으로 인한 외교적 고립을 겪은 것과 대조적이다.2.3. 건강 악화와 실권, 사망
살라자르는 말년인 1968년 들어 국제정세의 급변과 건강 악화로 인해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평소 살라자르는 유럽에 다시 질서를 부여했다고 높이 평가해온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이 68혁명으로 실각하는 것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는데, 그는 온 세계가 폭도들의 난동으로 미쳐가고 있다고 평가했다.7월 들어서 살라자르는 좀 회복된 것처럼 보였으나 8월 3일 오전 9시에 신문을 보면서 이발을 하던 도중 의자가 부러지는 바람에 돌로 된 바닥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혔다. 이후 살라자르는 심각한 두통을 호소하였으며 각의에서도 맛이 간 상태였고 글씨도 잘 쓰지 못했다. 이후 뇌출혈이 발견되어 9월 7일에 뇌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잘된 것 같았고 살라자르는 집에서 요양을 하기로 했는데, 9월 16일에 심각한 뇌졸중이 발생하면서 살라자르는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미국 의료진이 소환되어 살라자르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진단하였고 내각은 신속하게 살라자르의 후임을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 우리는 천재의 지배를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만은 이제 다시 평범한 인간의 통치에 적응해야 합니다.
전(前) 외무장관, 마르셀루 카에타누
전(前) 외무장관, 마르셀루 카에타누
이에 따라 마르셀루 카에타누가 신임 총리로 선출되었다.
골골대던 살라자르는 11월 말에 스스로 다시 호흡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밥을 먹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오른팔이 마비되고 한 쪽 눈도 보이지 않았다. 1969년 1월에 이르러 살라자르의 용태가 호전되어 그는 프랑스어로 유창하게 다시 말할 수 있게 되었고 1969년 2월 5일에 다시 자신의 관저로 돌아갔다.
살라자르의 측근들은 살라자르가 실권했다는 진실을 알지 못하도록 노력하였고, 그 덕분에 살라자르는 자신이 이미 실각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자신이 요양하고 있다고만 여겼다. 그는 프랑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빨리 직무 복귀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으며,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권력을 쥐고 있다고 생각했다.
살라자르의 측근들이 살라자르에게 진실을 감추기 위해 들인 노력은 상당히 공들인 것이었다. 우선 정부 각료들은 살라자르가 더 이상 총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그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였다. 살라자르에게 배달되는 신문은 살라자르 1명만을 위해 가공된 특제 신문이었고, 살라자르가 의식을 회복한 뒤로는 측근들이 국내 지역 방문 등 총리로서의 대외활동을 빙자한 연극도 해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라자르가 조금만 제대로 알아보려 노력했다면 진실을 알 수 있었을텐데 이렇게 쉽게 속아넘어간 이유는 그가 사저에만 틀어박힌 채 기자회견도 안 하고 해외순방도 안 하는 등의 폐쇄적인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결혼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가족도 없었으니 진실을 알려줄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 정보통 몇 개만 통제해줘도 진실을 알기 어려웠다.[17]
그리고 살라자르가 회복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살라자르의 정신상태가 온전치 못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노인들 중에서 정정하다가 갑자기 부상을 입거나 병환을 앓고 나서 섬망 증세를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살라자르가 딱 그 경우였다. 일반적으로는 그냥 골골대던 살라자르가 측근들의 현실판 트루먼 쇼에 속았다 정도로 알려졌지만 살라자르를 옆에서 모신 측근들에 따르면, 뇌졸중 이후로 살라자르는 확실히 정신이 나가서 마치 리어 왕처럼 과거의 자신만 기억하며 행동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살라자르는 새 총리인 카에타누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더러 자신에게 감히 맞설 용기가 있는 인물이라고 칭찬하면서(?!) 그가 정말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다면 교편을 놓고 정부에서 일해야 한다고 훈수를 두는 등 현실과 동떨어진 말만 했다.[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측근들이 살라자르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은, 살아남은 그의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기억력을 보고 살라자르가 정상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어쩌면 살라자르가 정말로 회복해서 다시 정권에 복귀할지도 모른다고 여겼으며 정부 각료들도 차마 살라자르에게 그의 정치적 경력이 끝장났다고 감히 통보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를 40년간 시중들었던 가정부는 의식 회복 이후 그에게 건강이 나쁘다며 총리직을 사임할 것을 부탁했지만 자신 외에 포르투갈을 이끌 사람은 없다며 죽을 때까지 사임을 거부했다고 한다.[19] 출처.
카에타누가 살라자르의 측근들을 쫓아내면서 자신만의 정치를 실현해가던 중인 1970년 7월, 살라자르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다. 그의 신장에 감염이 발생했고 투석장치에 의존하면서 끈질기게 버텼으나 7월 27일 오전 9시 15분에 사망했다. 이미 그가 실각했음에도 포르투갈은 충격에 휩싸였고 정부 기관지들은 살라자르의 부고에 무려 11페이지를 할애하면서 '지난 40년간 곧 포르투갈이었던 분이 서거하시였다'라고 보도했다. 나토 회원국인만큼 브뤼셀의 NATO 사령부도 조기를 게양했으며 조문객도 많았다. 사후 그의 시신은 고향인 산타콤바당의 묘지에 묻힌다.
그가 죽은 뒤 4년 후인 1974년 일어난 카네이션 혁명으로 포르투갈은 민주화되고, 식민지였던 앙골라,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상투메 프린시페의 독립을 승인하는 등 그때까지 보유하고 있던 식민지에 대한 권리도 중국 정부가 반환을 미룬 마카오만 제외하고 모조리 포기한다. 참고로 카네이션 혁명은 좌파 성향의 젊은 장교들이 주축이 된 군부 주도하에 이루어졌는데 흔히 군부가 쿠데타로 독재 테크를 타는 나라들이 많은걸 고려하면 이것도 묘한 지점. 살라자르는 생전 열악한 경제상황 때문에 장교들에게 봉급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자 그 해법으로 젊은 장교들에게 부르주아 가문의 여성과 결혼하라고 권하기도 했으니 어찌보면 장교들의 불만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3. 평가
파시즘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독재자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고도 살아 남았다는 점에서 이웃나라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와 비슷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프랑코와 살라자르는 꽤 친했다고 한다.그러나 내전기와 내전 이후에도 자국민 수십만 명을 처형하고 탈출한 사람들을 체포 및 처형시켜 탈출을 법으로 금지하면서 연좌제를 시행하는 등 스페인 전역을 피로 물들인 프랑코와는 달리, 살라자르의 독재정은 권위주의적이고 고압적이긴 했지만 프랑코에 비해 온건했다. 실제로 반 살라자르 야권의 거두였던 포르투갈 공산당 3대 당수 알바루 쿠냘만 하더라도 콩밥은 오래 먹었지만 사형은 당하지 않았고,[20] 한때 손을 잡았지만 사이가 틀어진 프란시스쿠 홀랑 프레투 역시 국외 추방시키는 선에서 처리했다.[21] 그리고 자국민들이 탈출했을 땐 체포하지 않는 대신 국적 박탈을 하는 수준에서 끝내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해빙 무드를 타 비록 손발은 꽁꽁 묶어 두었지만 제대로 된 야당의 형성 또한 몇 년간 허가한 적이 있다. 물론 몇 년 뒤에 다시 금지했지만. 스페인은 실제로 피비린내나는 정치적 사형을 프랑코 정권 말엽까지 지속했지만, 포르투갈의 경우 대대적으로 처형하지는 않았다.
또 외교적으로 미국의 심기를 크게 거스르지 않고 스페인의 프랑코 같은 강력한 억압 통치를 한 것도 아니면서 30여년 장기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 살라자르 정권에서 수혜를 입었던 가톨릭 교회 측도 지지 세력 중 하나였다. 덕분인지 2007년 포르투갈 국영방송사 RTP가 시행한 위대한 포르투갈인 설문조사에선 인판트 동 엔히크,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바스쿠 다 가마 등 대항해시대를 연 세계사적 위인들이 포함된 20명의 최종 후보들 중 41%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22] 물론 이런 설문조사가 으레 그렇듯 현대 정치인이 포함되면 진영 논리가 작용되어 이전 위인들이 배제되는 경향도 있는 건 감안해야 된다손 치더라도 꽤나 충격적인 결과. 그리고 재미있는 건 이때 2등을 한 인물은 살라자르 정권기 반정부 인사 중 최대 거물이었던 포르투갈 공산당 당수 알바루 쿠냘이었다. 더 재미있는 건 라이벌 민간 방송사 SIC에서도 설문조사를 했는데, 내용은 최악의 포르투갈인. 여기서도 둘은 나란히 사이좋게(?) 1위 살라자르, 2위 쿠냘이 차지했다. 즉, 위대한 포르투갈인과 최악의 포르투갈인 모두 1등을 차지한 바 있는 웃픈 인물인 셈.
의외로 부정축재가 일상인 독재자들과 달리 검소하게 살았다. 사저만 해도 방 세 개 짜리에 불과했고 관리인, 가정부 둘만 두거나 직접 석탄을 나르고 땠다거나 하는 일화가 있다. 그러니까 일반 중산층 수준으로 살았던 셈이었다. 민주 국가에서도 지도자가 부유하게 사는 경우는 수두룩한데[23][24] 국정 전반을 쥐던 독재자인 그가 독재자로서 쉽게 빠지는 길인 부정부패와는 담을 쌓았던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이긴 하다.
경제 문제로 스페인 독재자 프랑코를 살라자르보다 상대적 고평가하는 일각의 의견도 있는데, 어차피 둘 다 도긴개긴이긴 하다만, 애초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국가적 역량 자체가 다른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아무리 엉망이던 시절이라 해도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고 2류 국가일지언정 나름 열강 취급받던 스페인과 달리[25]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가 끝나자마자 진짜 3류 국가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즉, 스페인은 원래 잠재력은 충분했는데 내전이나 프랑코의 집권 초중기 경제 삽질 등 내부적 문제로 삐거덕거리던 게 늦게 발휘된 것이고,[26] 오히려 장기적인 성장률은 1차 산업으로 살라자르 치하 포르투갈이 프랑코의 스페인보다는 그나마 나았다.
다만 살라자르의 경제 정책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어서 워낙 1, 3차 산업에 치중하다 보니까 제조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물론 살라자르도 바보는 아니라 철강, 기계 제조업 분야에서 기업들을 육성하긴 했지만 효과는 미미했고 결국 당시 제조업은 경공업 위주로 발전했으며 상당수가 국영기업이었던 이 기업들이 1980년대에 민영화되면서 상당수 외국계 다국적 기업에 팔려나갔고, 오래 지나지 않아 글로벌 생산 차원에서 비중이 미미하고 경쟁력이 떨어지는 포르투갈 내 생산 시설을 폐쇄하면서 제조업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게 유로화 사태 당시 포르투갈에 치명타를 입혔고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 비해서도 회복이 지지부진한 결과를 낳았으니 틀린 주장은 아니다. 다만 2010년대 중반 이후로는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회복되기는 해서, 청년 실업률에서나 경제적인 수치에서나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그리스보다는 사정이 훨씬 낫기는 하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그리스의 청년 실업률이 30~50%대를 넘나들 때 포르투갈은 프랑스와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졌고 급기야 1980년대 이후 재정 적자가 가장 적을 정도라서 브라질이나 앙골라가 원자재 값 하락으로 다시 침체에 빠지자 빠져나갔던 인재들이 되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다만 포르투갈의 청년 실업률이 상대적으로 낮은 건 일자리 구하기가 힘든 국내보다는 같은 유럽연합 안에서 일자리가 있는 영국, 독일, 룩셈부르크 등지나, 말도 통하고 한참 고도성장 중인 과거 식민지 브라질, 앙골라, 모잠비크 등지의 해외로 나간 결과다 보니 실제 경제 상황과는 괴리가 있다. 고급인력이 부족한[27] 앙골라 같은 곳으로의 이주민은 불과 10여년 전 몇백 명 수준이었던 게 2010년대엔 만 단위를 넘고 있는 상황일 정도.
동시대의 다른 독재자들에 비해선 여러모로 온건했지만, 엄연히 독재자였던만큼 포르투갈 현지의 옹호자들처럼 일방적인 고평가도 곤란하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리스본행 야간열차》[28]나 페드로 코스타의《용암의 집》,《행진하는 청춘》,《호스 머니》를 보면 그 시절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데, 프랑코 수준으로 반대 세력을 당장 공개처형하지 않아도 인생 조지는 방법은 참 다양했다는 걸 알 수 있다.[29] 다만 옆동네 프랑코가 하도 피비린내 나게 굴어서 주목을 덜 받는 것뿐이다. 오늘날 포르투갈이 겪고 있는 개고생의 대부분은 이 사람이 뿌려놓은 씨앗에서 시작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소위 지도상으로만 서유럽이지 사회 인프라, 경제 발전은 동유럽 소리 듣는 이베리아 반도의 현재를 초래했다는 점에서는 프랑코와 별반 차이가 없다. 다만 굳이 좋게 평가한다면 프랑코 정권에 비하면 그나마 확실하게 폭력적인 탄압은 하지 않아서 장기적인 국론 분열의 정도는 덜했으며, 근현대 정치 역사상 몇 안 되는 군사 정권의 힘으로 집권해 오히려 그 국가의 강제력을 총괄하는 군인들을 팽하며 민간 독재를 형성했을 만큼 개인적인 정치적 수완은 뛰어났다는 점이다.
4. 기타
- 결벽증적인 검약을 실천했던 독재자로 알려져 있다. 재무장관으로서 능력을 인정받고 권력을 잡게 된 계기가 바로 혹독한 긴축재정으로 통화를 안정시키고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킨 것이었는데 그 영향인지 독재자가 된 이후에도 재정 지출 억제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 집권 초기에는 사저에서 출퇴근을 하였지만, 1937년 폭탄 암살 시도 이후 경호 강화를 위해 국회 인근의 저택을 징발하여 공식 관저로 삼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관저와 사저를 오가면서 생활했다.
- 굉장히 폐쇄적인 성향이 있어 집에 있는 것을 좋아했다. 반드시 나가서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사저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일처리도 사저에서 하는 것을 선호했으며 외국 순방이나 기자 회견 등 대중에 노출되는 행사를 극도로 꺼렸다. 그렇다보니 해외 식민지 유지에 집착했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 예기치 못하게 유명 인권 단체인 국제앰네스티의 창설에 기여하기도 했다. 1961년에 피터 베넨슨(Peter Benenson)(1921년 ~ 2005년)이라는 영국인 변호사가 살라자르 치하의 포르투갈에서 술자리에서 " 자유를 위한 건배"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청년 2명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분개하여 국제앰네스티를 창설했기 때문이다.
- 독재자치고는 장수한 편이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살라자르 정권을 지식인 독재라고 할 정도로 정권 수뇌부에 기술관료들을 배치하여 실무를 분담한 것을 들 수 있다. 일반적인 독재자들은 여러 권력과 권한이 본인이 쥐고 관리해야하다 국정 운영을 위한 격무를 감내해야 한다.[30] 살라자르는 이런 식으로 업무를 분담해 과로를 줄였다.
5. 대중매체
- 캡콤의 바이오하자드 4에 등장하는 라몬 살라자르의 이름이 그의 이름에서 따왔을 것이라 추측된다. 독재자/사이코 영주 기믹이라는 것과 라틴 계열 언어를 사용한다는 게 공통점.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바이오하자드 4의 가나도들은 스페인어를 쓴다.
- 안토니오 타부키의《페레이라가 주장하다》는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 트로피코 4에서 안토니오 살라자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경제적 특성이 많고 배경도 자수성가에 권력을 얻게된 계기는 군사 쿠데타로 나온다. 자본주의 진영과 친하고 공산주의 진영과는 관계가 나쁘다.
- Hearts of Iron IV에서 포르투갈의 지도자로 나온다. 보수주의적 국민주의자라는 특성을 달고 있어, 주간 안정도 +0.50%, 기반시설 건설속도 +20%라는 엄청난 버프를 부여받았다.[31] 하지만 포르투갈은 국민정신이 싹다 디버프다. 안정도 버프도 국민정신이 불안정한 공화국 -0.50%를 방어하기 위한 것. 참고로 처음에 호이4 특유의 성의없는 만듦새를 반영하듯이 젊은 나이였던 살라자르의 초상화로 말년의 늙은 모습의 초상화를 썼다가 이후 패치되면서 젊은 시절의 사진으로 교체되었다.
-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독일의 압박에 굴복하여 군의 현대화를 대가로 아조레스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를 조차하여 대서양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그 뒤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프랑스, 스페인에서 그랬듯이 식민지에게 최대한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대신 독일에서 존더코만도까지 동원하며 저항세력들을 철저히 진압하여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에서 승리한다.
6.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포르투갈 가톨릭 중앙당[32] | ? ~ 1930 | - |
국민연합 | 1930 ~ 1970 | 사망 |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2]
다만 1935년, 수양딸을 6살 때 입양하여 키웠다.
[3]
새로운 국가
[4]
하느님,
조국 그리고
가족
[5]
축구(Futebol),
종교(Fatima,
가톨릭), 파두(Fado - 포르투갈의 전통적인 민속 음악).
[6]
19세기 후반
앙골라,
모잠비크에 있던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와
포르투갈령 서아프리카를 육로로 연결하려고 한 번 시도했으나
남아프리카 일대에 막대한 관심을 가졌던 전통적인
우방 영국의 견제로 실패한 이후
포르투갈 제국은 열강의 식민지 확장 경쟁에서 실질적으로 탈락했다.
[7]
또 포르투갈이 자체적인 국력은 쇠퇴했어도 유럽 내 각종 분쟁에서 유력한 우방국이 될 수 있는 나라이긴 했다.
[8]
스페인령 모로코는 사실 자체적으론
20년대 아누알 전투에서 장성급 사망자를 비롯해
아틀라스산맥 근처
베르베르 유목민들 상대로 5천 명 가량 손실하는 대패를 겪다가 이러다가는
프랑스령 모로코도 위험하겠다 우려한 프랑스가 직접개입하여
무능한 스페인군의 엉덩이를 질질 끌며 겨우
승리를 떠먹여주면서 설립되었다. 이 시절
스페인군이
북아프리카에서 겪은 수모와 민간 사회,
언론에게 받은 손가락질, 그리고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는 복수의식은 군의 우경화와 훗날
스페인 내전 발발에 큰 영향을 끼쳤다.
[9]
산업화에 따른 자본주의가 형성되면 빈부격차가 수반되는데, 전통적인 가톨릭 교리에서는 누구는 잘살고 누구는 못사는게 당연한 질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10]
출처 : Candeias, António; Simoes, Eduarda (1999). "Alfabetização e escola em Portugal no século XX: Censos Nacionais e estudos de caso". Análise Psicológica
[11]
다만
1960년대 들어서는 앙골라와 모잠비크에 대학교도 세워주는 등 어느 정도 완화시켰다.
[12]
그래도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는
포르투갈군이 백인지배 체제 유지를 노리던 인접국가인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로디지아의 지원을 받으며 전선에서 독립군 세력들을 몰아내는 등 승전에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남아공, 로디지아와 붙어있지 않았던 기니비사우에서는 남아공조차도 자국과 이해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포르투갈을 도와주지 않아 현지 독립군 세력들이 수도
비사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니비사우 영토들을 점령하며 전선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13]
심지어 1984년에는 세계 평균을 하회하기까지 했다! 명백한
중진국 함정에 접어든 셈. 그나마 포르투갈이 완전히 민주화된 1986년 이후 경제성장을 거치며 중진국 함정을 탈출, 1991년 세계 평균의 2배를 넘기며 선진국 수준에 다다르긴 했는데, 문제는 그 이후로도 포르투갈은 30년 넘게 '선진국의 최소'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4]
하다못해 서유럽의 후진국 취급받던
아일랜드도 이미 1960년 기준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의 1.5배였고 세계 평균의 2배를 넘긴 것도 1972년이었다. 덤으로 과거에 가난했던
스페인 역시 1962년에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을 넘기고 1973년 세계 평균의 2배를 넘기며 선진국 진입에 성공했다. 심지어 2010년대 초반부턴 90년대 중반부터 서로 엎지락뒤치락햤던 데다가 흔히 선진국 막차를 탔다는 한국에게도 1인당 GDP를 완전히 역전당한 뒤 지금까지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2024년 1인당 GDP가 25000달러에 가까워져 그리스보단 확실히 높고, 현재 선진국 진입 가능성이 가장 높은 폴란드가 공식적으로 선진국으로 인정받는다면 '선진국의 최소' 자리에서 탈출할 가능성은 높다.
[15]
스코틀랜드의 정치학자 톰 갤러거에 따르면 당시 대륙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국가의 정치가
군사화되어갔던데 반해 살라자르는 권위주의적이긴 해도 문민통치를 선호했다. 또한 그의 목표는 대중동원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탈정치화(de-politicisation)였다.
[16]
그나마 NATO는 프랑코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스페인을 끼워주지도 않았다. 이후 프랑코가
1975년에 사망하고
민주화를 이룬
1982년에야 가입할 수 있었다.
[17]
아무리 살라자르가 포르투갈의 근대화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보여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포르투갈에서
라디오 방송이
1935년에 시작되었고 TV
방송이 시작되었을 때가
1956년이고 살라자르가 권력을 상실했을 무렵에는
TV가 부유층이나
중산층들을 대상으로 어느 정도 보급되었을 시점이었는데, 그는 라디오도 TV도 잘 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8]
교편을 운운한 이유는 카에타누 또한 예전에
교수였기 때문인데, 당시는 카에타누가 정치인으로 전향해서 살라자르 본인의 부하 장관이 된 지 벌써 20년도 넘은 시점이다(...).
[19]
이 부분은
2017년 12월 31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20]
포르투갈은
1867년부터 사형제도를 폐지한 상태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군법에 한해 사형을 부활시켰지만 일반 범죄에 대한 사형제 폐지는 그대로 유지했고 독재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완전 폐지는
1976년). 반면 비슷한 시기 스페인 공산당의 당수 돌로레스 이바루리는 프랑코를 피해서
소련에
망명해 있었다.
[21]
프레투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 파시즘 사상을 버렸고 귀국을 허락받아 포르투갈로 돌아왔으며
말년에
카네이션 혁명까지 보게 된다.
[22]
이를 두고
조작 논란이 일기도 했다. 독재자를 포르투갈 최고의 위인으로 선정한 꼴이니... 당연히 이로 인해 RTP 이미지도 나빠졌다.
[23]
애초에 국가의 최고지도자로써 품위를 유지해야 하니 딱히 이상한 모습은 아니다. 역대 지도자들 중 가장 검소했다고 알려진
이오시프 스탈린도 절대권력을 가진 독재자라 하기엔 지나치게 금욕적이었다는 거지 겉으로만 보면 별장, 주치의, 전용 운전수, 전용 요리사까지 두며 당대 소련인보다 훨씬 안락한 생활을 했다.
[24]
다만 이게 부유하게 산다고 꼭 부정부패와 연결된다는 소리는 아니다.
허버트 후버나
도널드 트럼프처럼 원래 부자였던 경우도 있기 때문.
[25]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조선업과
아스투리아스의 철광업,
바르셀로나의
금융업은 스페인이 3류 국가 소리 듣던
20세기 초반 시기조차도 유럽에선 알아 주었을 정도였다. 애초에
스페인 내전 이전에는
일본보다도 1인당 GDP가 높았다.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 중 가장 경제적으로 열악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스페인은 열강으로 자부할 수준은 됐던 셈이다.
[26]
당연하겠지만,
대한민국과는 잠재력이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27]
앙골라 같은 경우 식민지 시절부터 포르투갈 본토보다 나았던 적도 있었지만 독립 직후 오랜 내전과 쿠데타로 인해 각종 산업시설들과 현지인 엘리트들이 왕창 갈려나갔다. 물론 앙골라가 독립 직후 백인이라면 이유 불문하고 강제로 추방한 것도 크지만.
[28]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국의 명배우
제러미 아이언스가 출연했다.
[29]
일례로
마노엘 드올리베이라는 살라자르 때문에 그나마 움트려고 하던 경력이 단절될 뻔했다. 당시 포르투갈
뉴웨이브 감독들이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는 말 안해도...
[30]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독소전쟁 기간 동안 하루에 14시간을 근무했으며 결국 이게 독이 되어 종전 후 얼마 못 가 사망했다.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주중 주말 합쳐 평균 수면 시간이 5~6시간 정도에 불과했고,
김정일도 낮에는 수많은 업무로 바빴으며 밤에는 온갖 파티를 즐기면서도 관저로 돌아가면 바로 서류를 봐야 했을 정도로 격무에 시달렸다.
[31]
초반부 플레이에 가장 중요한게 정치력인데 안정도는 정치력 획득에 버프를 줄 뿐만 아니라 장비 생산량까지 증가시켜주는 수치라 정치력 15%+5%, 기본 안정도 +5%를 받은 지도자도 전설급으로 불리는 게임에서 사기급이라 봐도 무방할 버프다.
[32]
Centro Católico Portuguê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