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3 00:15:56

세바스티앙 주제 드 카르발류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2007년 포르투갈의 공영방송국(RTP)이 포르투갈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포르투갈인 100명'을 선정. 단, 중복 투표가 포함됨.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알바루 쿠냘 아리트리데스 드 수사 멘데스 아폰수 1세 루이스 드 카몽이스
6위 7위 8위 9위 10위
주앙 2세 인판트 동 엔히크 페르난두 페소아 세바스티앙 주제 드 카르발류 바스쿠 다 가마
11위~100위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살게이우 마이아 마리우 소아르스 파도바의 안토니오 아말리아 호드리게스 에우제비우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프란시스쿠 사 카르네이루 조르제 누누 핀투 다 코스타 누누 알바르스 페레이라 주앙 페레이라 드 알메이다 주제 무리뉴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아고스티뉴 다 시우바 에사 드 케이로스 에가스 모니스 디니스 1세 페르난두 노브레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주제 에르마누 사라이바 아니발 카바쿠 실바 움베르투 델가도 조제 아폰수 루이스 피구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마르셀루 카에타누 페드루 누네스 안토니우 비에이라 플로르벨라 이스팡카 페르디난드 마젤란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마리아 지 루르드 핀타실구 주앙 1세 소피아 드 멜로 브레이네르 안드레센 안토니아 페레이라 파더 아메리쿠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안토니우 다마지우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 마누엘 1세 주제 사라마구 아라곤의 이사벨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카타리나 에우페미아 카를루스 파레지스 주제 소크라트스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 루이 드 카발로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브리테스 지 알메이다 알베르투 주앙 자르딩 알마다 네그레이루스 바스쿠 곤살베스 알바루 시자 비에이라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벨미로 데 아제비로 수사 마르틴스 마리아 두 카르모 세아브라 안토니우 안드라지 카를루스 1세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마리자 비제우의 엘레노르 호자 모타 안토니우 테익세이라 레벨로 아폰수 3세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비토르 바이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오텔루 사라이바 드 카르발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허만 호세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마리아 2세 카를루스 로페스 아폰수 코스타 폰테스 페레이라 드 멜루 가구 코티뉴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히카르두 아라우주 페레이라 마누엘 소브리뉴 시몽이스 마누에우 마리아 바르보자 드 보카주 헬리오 페스타나 조르주 삼파이우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안토니우 샹팔리모 안토니우 로부 안투느스 질 비센트 마리아 헬레나 비에이라 다 실바 미겔 토르가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나탈리아 코레이아 에드가 카르도주 페르낭 멘데스 핀투 루시아 수녀 알프레도 다 실바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요한 21세 다미앙 드 고이스 주앙 4세 조아킹 아고스티뉴 아델라이드 카베치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알메이다 가헤트 안토니우 젠틸 마르틴스 안토니우 바리아슈에스 파울라 레고 마리아 조앙 피레스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파일:O_marques_de_pombal,_conde_de_Oeiras.jpg
Sebastião José de Carvalho e Melo
1699년 5월 13일 ~ 1782년 5월 8일

1. 개요2. 생애3. 사후

[clearfix]

1. 개요

포르투갈 왕국의 귀족, 외교관, 정치가.

소위 폼발 후작 혹은 오에이라스 백작(Marquês de Pombal e Conde de Oeiras).

주제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국무장관, 총리, 왕국군 총사령관을 겸임하며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한 인물로 리스본 대지진을 수습하고 다방면에 개혁을 단행하는 등 많은 업적을 세웠지만 그 과정에서 귀족과 성직자 계급에 대한 과세, 잔혹한 정적 숙청, 예수회 탄압을 단행해 기득권층의 증오를 산 끝에 주제 1세 사후 실각했으며, 포르투갈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고 강력한 재상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2. 생애

1699년 5월 13일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리스본에서 레이리아 지역에 재산을 소유한 시골 지주인 마누엘 드 카르발류 이 아티데와 테레사 루이사의 아들로 출생했다. 삼촌 파울루 드 카르발류는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성직자이자 코임브라 대학의 교수였다. 그는 젊었을 때 코임브라 대학에서 공부한 후 잠시 군대에 군대에 복무해 상병까지 진급했다가 학업으로 돌아갔다.

이후 아르코스 백작의 조카인 테레사 드 멘돈차 이 알마다와 사랑에 빠졌다. 테레사의 가족들이 일개 시골 지주의 자식인 세바스티앙과 결혼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자, 그는 테레사와 짜고 그녀를 '납치'한 뒤 가족의 영지로 데려와서 결혼했다. 이에 멘돈차 가문이 분노하여 그를 잡아죽이려 들자, 그는 아내와 함께 폼발 인근의 영지로 은신했다. 그러다 멘돈차 가문과 화해하여 리스본에 돌아온 그는 삼촌으로부터 오일라스와 신트라를 물려받았고, 1733년 왕립 포르투갈 역사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임되었다.

1738년 10월 39세의 나이에 삼촌을 통해 총리 주앙 드 모타 추기경과 면담한 뒤 런던 대사로 선임되었다. 당시 잉글랜드 왕국은 스페인을 상대로 '젠킨스의 귀 전쟁'을 벌였다. 포르투갈은 어느 한 쪽을 지지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고 영국에게 포르투갈 해역을 사용할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잉글랜드 해군은 거리낌없이 포르투갈 해역을 항해하는 스페인 선박을 공격하고 포르투갈 내 물자를 차출하는 등 포르투갈의 중립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세바스티앙은 이에 대해 항의했지만 무시당했다.

1740년, 잉글랜드는 밀 수출 금지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 경제가 위협받자, 그는 밀 수출 금지령을 폐지해달라고 청원했지만 역시 무시당했다. 또한 세바스티앙은 식민지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인정하고 스페인 침입자를 추방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 역시 무시되었다. 세바스티앙은 잉글랜드의 이같은 무신경한 태도에 분개해 "저들은 자신이 세계 자산의 주인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상상한다"라고 비꼬았다.

세바스티앙은 잉글랜드의 의회주의에 대해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방식"이라며 부정적으로 바라봤고, 리슐리외와 같은 프랑스 정치가들을 모델로 삼았다. 다만 잉글랜드의 사업가 정신,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 동양에서의 끈기를 인정했다. 그는 포르투갈에서 지배적인 무역, 즉 와인을 위조하여 국가 제품의 명성을 파괴한다고 생각했으며, 포르투갈이 외국과의 무역에서 거의 이익을 얻지 못하니 포르투갈 식민지와의 무역을 추구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렇듯 세바스티앙은 런던에서 실패를 거듭했지만, 이때에 쌓은 경험과 비전은 훗날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세바스티앙이 런던에서 활동하던 1739년, 아내 테레사가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이후 1745년 오스트리아 빈 대사로 이전된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의 딸이며 포르투갈 국왕 주앙 5세의 아내인 마리아 안나의 호의를 샀고, 그 해 12월 18일에 마리아 안나의 중재에 따라 다운 백작 하인리히 라이하르트 로렌츠의 딸인 레오노르 에르네스티나와 재혼했다. 그는 레오노르와의 사이에서 테레사 비올란테, 엔히크 호세, 레오노르 주아나, 마리아 프란시스카, 마리아나 사비에르, 주제 프란시스쿠, 마리아 아말리야 등 7명의 자식을 낳았다. 그러나 정작 주앙 5세는 자신의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며 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1749년 본국에 소환시켰다.

1750년 7월 31일 주앙 5세가 사망한 뒤 왕위에 오른 주제 1세는 열병에 줄곧 시달리면서도 정무에 전념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국정을 신하들에게 떠맡기고 음악과 사냥을 즐기거나 사랑하는 딸들과 함께 피크닉을 떠나곤 했다. 특히 어머니의 총애를 받는 세바스티앙과 친분이 있었기에, 즉위 직후 외무부 장관으로 선임한 뒤 1755년에 총리로 승진시키고 통치권을 위임했다. 그는 이때부터 포르투갈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포르투갈 왕국은 페드루 2세 치세 말기에 브라질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시작된 골드 러시 덕분에 주앙 5세 시절에 막강한 부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브라질의 금광에 지나치게 의존해 국내 산업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고, 제조업 대부분을 영국에 의존해야 했다. 심지어 포르투갈의 수출 조차도 대부분 영국, 프랑스 등 외국 사업가들을 통해 이뤄질 정도로, 겉으로는 안정적으로 보이는 포르투갈 경제의 해외 의존도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러다 주제 1세 치세에 이르러 브라질의 금광이 고갈되면서 경제위기가 가시화되었다.

급기야 1755년 11월 1일 리스본 대지진이 발발하여 3만에서 10만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건물 1만 채 이상이 파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국왕 본인은 대지진 당시 가족과 함께 피크닉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화를 피했고, 세바스티앙에게 사태를 수습할 전권을 맡겼다. 세바스티앙은 우선 대지진을 틈타 날뛰는 도둑과 강간범, 살인자 등 범죄자들을 모조리 체포한 뒤 즉결 재판에 넘겨 처벌했고, 치안의 확보를 위해 지방에 주둔해 있던 군 병력들을 도시로 불러들였다. 여기에 리스본 대주교와 면담하여 일체의 장례미사를 생략하고 시신을 신속히 수습하는 것에 동의를 얻어냈다. 이 덕분에 전염병이 창궐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이후 생존자들을 불러모아 식량 배급소를 열고 군인들이 직접 대동한 자리에서 식량을 공평하게 배분했다. 또한 도시 재건 사업을 잠시 보류한 뒤, 1758년 7월 12일에 도시 계획법을 공포하고 이에 따라 재건하도록 했다. 건축이 5년 이상 지연될 경우에는 부동산 구입을 희망하는 타인에게 권리가 넘어갔으며, 대부분의 집들은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들에 의해 지어졌다. 이때 지어진 집들은 4층 이상 지을 수 없었고, "가이올라"[1]라는 신 건축 공법을 도입해야 했다. 또한 모든 건물은 그 기초 밑에 목재 더미를 묻어두어 건물이 흔들리는 지반 위에서도 유연하게 탄력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또한 거리에 잔해가 쌓이더라도 안전할 공간을 확보하도록, 거리는 이전보다 훨씬 넓은 모양으로 설계되었다. 시내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7개의 대로가 18m 폭으로 깔렸으며 동서 방향으로는 12m의 폭으로 유지되었다.

그는 이렇듯 지진 수습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한편, 포르투갈의 경제 부흥을 위한 여러 개혁을 실시했다. 우선 두에로 강 유역의 와인을 관리하는 두에로 와인 회사를 설립해, 해당 지역의 와인 품질을 보장하게 했다. 여기에 "알가르브 왕립 수산 종합 회사(Companhia Geral das Reais Pescarias do Reino do Algarve)"를 설립해 포르투갈 남부의 어업을 감독하게 했으며, 국내 제조업을 육성하기 위해 세금 혜택을 부여하고 국내로 들어오는 외국 상품에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수출을 최대한 늘리는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주제 1세의 치세 동안 수백 개의 소규모 제조업체가 세워졌고 사양길을 걷던 제조산업은 활력을 되찾았다.

또한 왕립 은행을 설치해 국가가 금융산업에 지속적으로 개입할 발판을 마련했고, 높은 귀족에서 가장 가난한 노동 계급에 이르기까지 포르투갈 사회의 모든 계층에 엄격한 법률을 부과했으며, 면세 혜택을 받던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가차없이 거둬들여 지진의 여파로 바닥을 드러낸 국고를 채웠다. 많은 귀족과 성직자들은 이에 반발했지만, 세바스티앙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정책을 가차없이 밀어붙였다.

한편 포트루갈과 포르투갈령 인도 내에서 흑인 노예의 수입을 금지했는데, 이는 인도주의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노동력이 절실히 필요한 브라질에 흑인 노예를 보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브라질에 흑인 노예 무역을 관장하는 회사를 설립해 흑인 노예들이 브라질에 정착하여 노동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감독하게 했다. 그 결과 1757년에서 1777년 사이에 총 25,365명의 흑인 노예가 서아프리카 항구에서 브라질의 파라와 마라냥 항구로 끌려왔다.

세바스티앙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뒤쳐진 제도 전반의 개혁을 꾀했다. 육군과 해군을 개편하고, 코임브라 대학 시스템을 영국 대학과 맞추게 했으며, 저명한 외국 교수를 고용하고, 현대 과학 장비를 갖추게 했다. 그리고 "새 기독교인(Cristão-Novo)"[2]으로 간주된 자들에 대한 제도적 차별을 종식시키고 앞으로 "새 기독교인"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자들을 광장에서 채찍질하고 앙골라로 추방하게 했다. 여기에 프랑스 민법 체계를 포르투갈에 도입하고 왕권신수설을 대대적으로 홍보해 국왕의 권위를 드높이면서, 자연히 국왕의 총애를 받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주제 1세는 국가를 알아서 이끌어가는 세바스티앙을 무척 총애했고, 지진 2년 후인 1757년에 국가 평의회 의장 겸 군 사령관을 겸임하게 했다. 세바스티앙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은 주제 1세가 살아있는 한 세바스티앙을 어찌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주제 1세를 암살하기로 작정했다. 1758년 9월 3일, 주제 1세는 타보라 후작부인이자 자신의 정부인 테레사 레오노르와 함께 저녁을 먹고 마차를 타고 돌아가던 중 괴한 3명의 습격으로 팔에 총탄을 맞았다. 하지만 호위병들의 결사적인 경호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져 아주다에 돌아왔다. 세바스티앙은 즉시 조사를 신속하게 실시한 뒤 타보라 가문 구성원들이 이 사건의 배후에 있다고 몰아세웠다.

이로 인해 12월 한 달 동안 천 명 이상이 수감되었는데, 그 중엔 여자와 어린이들도 있었지만 전부 사형 판결을 받았다. 보다못한 마리아나 빅토리아 왕비와 왕위 계승자인 마리아 공주가 개입해 그들 대부분을 사면시켰지만, 아베이루 공작 주제 드 마스카렌하스 다 실바 이 렌카스트레, 타보라 후작 프란시스쿠 드 아시스, 테레사 레오노르 등 타보라 가문 일가 및 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이들 수십 명이 산 채로 불태워졌고, 그들의 유골은 타구스 강에 던져졌다. 이후 타보라와 아베이루 가문의 문장은 폐기되었고, 타보라라는 이름은 언급조차 금지되었다.

귀족들이 잔혹한 사건 처리에 경악하여 자신에게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자, 세바스티앙은 예수회를 다음 타겟으로 정했다. 우선 예수회 소속 신부이며 타보라 가문의 고해신부였던 말라그라다가 반역 음모를 신고하지 않은 점을 빌미로 삼아 재판에 회부한 뒤 이단 혐의로 화형에 처했다. 그리고 주제 1세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진지 1년 후인 1759년 9월 3일, 그는 예수회가 포르투갈 내부에서 자치 세력으로 활동하며 왕실을 모해하려 했다며 예수회를 금지하고 예수회 수도자들을 대도시와 식민지에서 추방하고 그들의 자산을 몰수했으며, 예수회가 세웠던 에보라대학을 허물었다. 여기에 형제인 파울루 안토니우 드 카르발류 멘돈차를 종교재판소 대심문관으로 선임해 종교 인사들을 통제하게 했으며, 1768년 "헤알 메사 켄소리아(Real Mesa Censoria)"를 설립해 정치적 성격을 지닌 책과 출판물을 검열하고 왕권신수설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작품을 소각시키고 작가를 박해하게 했다.

주제 1세는 일찍이 포르투갈 왕위 계승녀로 지명된 장녀 마리아를 스페인 왕자 루이스 안토니오(1727 ~ 1785),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와 결혼시키려 했지만, 두 사람 모두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서 실패했다. 이후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기미가 감돌면서 어느 한 국가의 왕자와 결혼시켰다가는 그 나라를 적대하는 국가들로부터 잠재적 적국으로 인식될 것을 우려해 결혼을 미루었다. 그러던 1760년, 마리아는 당시로선 늦은 나이인 26세에 결혼했는데, 신랑은 뜻밖에도 주제 1세의 동생인 페드루 왕자였다.

포르투갈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브라간사 왕조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결혼을 단행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복잡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 타국의 왕자와 결혼하기 어려워진 시점에서 공주의 결혼 상대는 포르투갈 국내의 귀족이 유력했다. 그러나 귀족들을 모조리 찍어누르고 독재 정치를 펼치던 세바스티앙은 장차 여왕이 될 마리아가 귀족 집안의 자제와 결혼한다면 자신의 입지가 급격히 위태로워질 것이라 여겼고, 정치에 별 관심 없이 빈둥거리며 지내던 페드루 왕자라면 위험하지 않을 거라 여기고 마리아와 짝지어주기로 했다. 삼촌과 조카의 결혼은 친족간의 결혼이 흔했던 유럽 왕실에서도 매우 비정상적인 일이었고 교회법에도 어긋났지만, 어느 누구도 독재 권력을 펼치는 세바스티앙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1758년 프로이센 왕국- 영국 연합과 프랑스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 러시아 제국 동맹국이 맞붙은 7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 포르투갈은 영국과 오랜 동맹 관계를 맺었지만 리스본 대지진의 참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중립을 선포했다. 1759년 8월 18일, 영국 제독 에드워드 보스카웬이 포르투갈 남쪽의 라구스 해안에서 프랑스 해군을 요격하면서 라구스 해전이 벌어지자, 세바스티앙은 영국에 사절을 보내 자국의 바다에서 전투를 벌인 것에 항의해 사과를 받아낸 뒤 라구스 항구로 피신한 프랑스 병사들을 보살핀 후 본국으로 보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는 프랑스 선원들에게 주어진 모든 지원에 대해 주제 1세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간의 분쟁이 포르투갈에까지 미치면서, 포르투갈은 중립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한 번은 파로의 영국 영사가 영국 호위함에게 파로 항구에 진입하여 프랑스 전함이 하역하는 것을 막으라고 지시했다가 포르투갈 해군에게 저지되었다. 또 한 번은 비아나두카스텔루에서 활동하던 영국 사업가들이 스스로 무장한 채 보트에 올라타 프랑스 해적에게 포획된 영국 상선을 탈환했다. 여기에 프랑스 측에서 지지부진한 전세를 뒤집기 위해 스페인에게 자국과 연합하여 영국을 대적하라고 압력을 행사했고, 스페인은 같은 부르봉 가문 끼리 힘을 합치기로 하고 1762년 영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1762년 4월 1일 두 부르봉 국가들은 포르투갈에게 다음과 같은 최후 통첩을 보냈다.
1. 영국-포르투갈 동맹을 파기하고 프랑스 및 스페인과 새로운 동맹을 맺는다.
2. 영국 선박을 항구에 들이지 말고 영국과의 모든 무역을 중단한다.
3. 영국에 선전포고한다.
4. 스페인군의 포르투갈 항구 점령을 수락한다.
5. 위의 사항을 준수한다면 영국의 압제로부터 보호해주겠지만, 끝내 듣지 않는다면 부득이 침공하겠다.

당시 포르투갈군은 세바스티앙의 군제 개혁에도 불구하고 리스본 대지진의 참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부분의 포르투갈 요새가 손상되었고, 브라질의 금광 채굴량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육군과 해군을 유지하기 어려워서 군대 규모를 대폭 축소해야 했다. 병사들은 1761년 11월까지 1년 반 동안 급여를 받지 못하다가 1762년 3월 말이 되어서야 6개월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생명줄이 영국과의 무역 및 군사적 보호에 달려 있었기에, 세바스티앙은 최후 통첩을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스페인군이 포르투갈 북쪽 국경 지대에 집결하기 시작하자, 포르투갈은 1762년 4월 18일 스페인과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고 영국에 재정 및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1762년 4월 30일 사리아 후작 니콜라스 드 카르바할이 이끄는 스페인군 22,000명이 트라스오스몬테스 지방을 통해 포르투갈에 쳐들어왔다. 그들은 <포르투갈에 들어온 이유>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반포했는데, 그 내용은 "영국의 무거운 족쇄", "바다의 폭군"으로부터 포르투갈 국민을 해방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트라스오스몬테스 지방의 유일하게 요새화된 요새인 미란다는 그해 5월 6일 포위된 뒤 갑작스런 화약 폭발로 인해 400명이 사망하고 성벽에 2개의 돌파구가 생겨버리자 5월 9일에 항복했으며, 그 외의 다른 도시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점령되었다.

그러나 스페인 정부는 치명적인 실책을 저질렀다. 그들은 단순한 힘의 과시만으로도 포르투갈이 굴복하도록 유도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식량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진격했다. 스페인군은 처음에는 현지인들과 잘 지내려 노력했지만, 포르투갈이 항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사이 식량이 금새 바닥나자 주민들로부터 식량을 징발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트라스오스몬테스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봉기하여 민병대를 결성해 산악 지형을 이용하여 스페인군을 상대로 게릴라 전술을 구사했다.

여기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4,000명 이상의 병사들이 질병으로 사망했다. 스페인군은 이를 보복하고자 각 마을을 돌며 학살과 파괴를 자행했지만 주민들이 더욱 거세게 저항하는 역효과만 야기했다. 결국 스페인군은 1762년 6월 차베스 시를 제외한 모든 점령지에서 철수했다. 이후 스페인군이 몇 차례 더 침공했지만, 세바스티앙이 재정비한 포르투갈군과 포르투갈에 파견된 영국군 연합군이 빌헬름 프리드리히 에른스트의 지휘하에 이들을 물리쳤다. 1763년 2월 10일, 프랑스-스페인 연합과 영국-포르투갈 동맹의 전쟁을 종식하는 파리 협약이 체결되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전쟁 중에 상대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고 전쟁 포로를 교환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스페인-포르투갈간의 전쟁은 마무리되었다.

1770년, 세바스티앙은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폼발 후작에 선임되었다. 이후에도 절대권력을 휘둘렀지만, 1777년 2월 24일 주제 1세가 사망하고 마리아 1세- 페드루 3세 부부가 옹립되자 한 순간에 허물어졌다. 평소 세바스티앙의 독재를 혐오하던 국왕 부부는 그를 해임했고, 그에게 탄압받던 800명 이상의 정치범들을 석방했다. 또한 세바스티앙이 자신으로부터 20마일 이상 가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추가로 내리면서, 자신이 그의 영지 근처를 여행할 경우 세바스티앙은 집을 떠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여기에 그가 후원한 코임브라 대학의 많은 교수와 학생들이 백과사전파, 방법론적 자연주의, 이신론 이단에 빠졌다는 비난을 받고 종교재판소에 회부된 뒤 추방형에 처해졌다. 세바스티앙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이들은 그를 아예 죽여버리고 재산을 몰수하려 했지만, 마리아는 세바스티앙이 비록 악행을 저질렀지만 리스본 대지진을 제대로 수습하고 스페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공적을 고려해 이 이상의 처벌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또한 폼발 후작이 세운 정책이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전반적인 정책 기조를 그대로 이어갔다.

1781년 5월 23일, 포르투갈 법원은 1758년 주제 1세 암살 미수 사건의 배후로 기소되어 심각한 박해를 받았던 타보라 가문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유족들에게 재산을 돌려줬으며, 왕실 모해 단체로 규탄받고 금지된 예수회 역시 복권되었다. 폼발 후작은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된 뒤 1781년 8월 16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마리아 1세는 "폼발 후작은 처벌받아 마땅하지만 건강 상태를 고려하여 자신의 소유지에서 여생을 보내게 해주겠다"라며 사면을 선고했다. 폼발 후작은 자신의 소유지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다 1782년 5월 8일에 사망했다. 사후 폼발 마을의 산토 안토니오 수녀원에 안장되었다.

3. 사후

1807년 ~ 1814년 프랑스-포르투갈 전쟁 당시, 앙드레 마세나 원수 휘하의 프랑스군 병사들이 폼발 마을을 약탈할 때 그의 무덤을 파헤쳐서 의상 및 검을 약탈하고 뼈를 산산조각냈다. 이후 후손들이 유해를 수습했고, 1856년 또는 1857년에 외손자이자 포르투갈 육군 원수 겸 정치인으로서 포르투갈 내전을 시작으로 군사, 정치 방면에서 활약한 주앙 카를루스 드 살단하 올리베이라 이 다운이 유해를 리스본으로 옮겨서 그가 세례를 받았던 메르케스의 암자에 보관했다. 1923년에 유해가 리스본의 "기억의 교회(Igreja da Memória)"로 옮겨져서 현재까지 보관되고 있다.

1934년 5월 13일 위생부 장관 두아르트 파치쿠에 의해 리스본의 광장 중 하나인 세바스티앙 광장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또한 리스본의 지하철역 중 하나에 '폼발 후작'이란 명칭이 붙기도 했다.


[1] 포르투갈어로 "새장"을 뜻한다. 건물벽에 완충재의 목적으로 목제 프레임을 X자형으로 댄 뒤에 그 사이를 벽돌과 석재, 회반죽으로 채우는 형태였다. [2] 개종 유대인 및 무어인을 가리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