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토르 바이아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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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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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앙 핀투 (1989~1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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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르 바이아 (1996~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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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두 쿠투 (2002~2004) |
비토르 바이아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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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르 바이아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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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tebol Clube do Port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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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0a3><colcolor=#ffffff> 이름 |
비토르 바이아 Vítor Baí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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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비토르 마누엘 마르틴스 바이아 Vítor Manuel Martins Baí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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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9년 10월 15일 ([age(1969-10-15)]세) | |
포르투갈 제2공화국 빌라노바드가이아 | ||
국적 |
[[포르투갈|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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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85cm | |
직업 | 축구 선수 ( 골키퍼 / 은퇴) | |
소속 | <colcolor=#ffffff> 선수 |
FC 포르투 (1988~1996) FC 바르셀로나 (1996~1998) FC 포르투 (1999~2007) |
국가대표 | 80경기 ( 포르투갈 / 1990~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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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의 전 축구 선수.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골키퍼.주앙 핀투, 페르난두 고메스와 함께 포르투 역대 최고의 선수이자 포르투갈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로 불린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지역의 유소년 클럽에 있다가 1983년 거함 FC 포르투의 유스팀으로 적을 옮겼고 1988년에는 1군으로 콜업되어 서서히 입지를 넒혔다. 1988-89 시즌 제 베투, 요제프 무이나르치크와의 경쟁에서 15경기 출장을 잡아낸 바이아는 시즌이 끝나고 무이나르치크의 은퇴와 동시에 완벽한 주전 골키퍼로 올라섰다.1996년 FC 바르셀로나로 떠날 때까지 바이아는 주전자리를 사수했고 모든 대회를 합쳐 315경기에 출전했는데 리그 우승 5회, 슈퍼컵 우승 4회, 리그컵 우승 2회를 차지했으며 매시즌 0점대 실점률을 기록했다. 1996-97 시즌을 앞두고 바이아는 안도니 수비사레타의 은퇴 이후 확실한 대체자를 구하지 못한 FC 바르셀로나에 입단한다. 첫 시즌 바이아는 주전자리를 확보하며 UEFA 컵 위너스컵, 코파 델 레이 우승에 기여했으나 무릎 부상이 발생했고, 설상가상으로 감독이 자신을 영입한 바비 롭슨에서 루이 판할로 교체되며 뤼트 헤스프를 영입하자 백업 멤버로 전락했다.
결국 1999년 바이아는 친정팀인 FC 포르투로의 복귀를 선택했고 후반기를 보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 시절 입은 부상이 재발했고 시즌을 통째로 날리는 등 2001-02 시즌 후반기가 거의 다 돼서야 그라운드에 복귀할 수 있었다. 2002년 포르투에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 영입되었는데, 주제 무리뉴가 바로 그였다. 무리뉴의 선임으로 포르투는 유럽을 휩쓰는 강팀이 되었고, 베테랑 바이아는 후방을 든든히 지켰다.
2002-03 시즌 포르투는 UEFA 컵에서 셀틱 FC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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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이어에 키스하는 바이아 |
2.2. 국가대표 경력
1990년 미국을 상대로 국가대표팀에 데뷔했으며 주요 대회로는 UEFA 유로 1996, UEFA 유로 2000, 2002 한일 월드컵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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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는 바이아 |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수 차례 선방쇼를 보여주었으나 결국 박지성에게 결승골을 허용한다.[1]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난 뒤에도 바이아의 독주는 계속될듯 싶었으나, 감독이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로 교체되자 예상치 못한 전개로 국가대표팀 골키퍼 주전자리가 흘러가게 된다. 특히 유로 2004를 목전에 두고 2003/04 시즌 유럽 최우수 골키퍼상, 2004 IFFHS 선정 세계 최고 골키퍼 및 포르투갈 리그 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골키퍼였던 바이아를 두고 히카르두를 콜업한 스콜라리를 두고 당시에도 기용에 의문을 표하는 목소리가 많았고, 이후 바이아는 다시 콜업되지 못하며 자연스레 국가대표 커리어가 끝나게 된다.
3. 은퇴 이후
은퇴 이후에는 FC 포르투의 앰버서더로 활동하고 있다.이스타디우 두 드라강에서 개최된 맨체스터 시티 vs 첼시의 2021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경기에서 빅이어를 들고 등장했다.
4. 플레이 스타일
180대 초중반이라는 포지션상 불리한 여건의 신장이었음에도 놀라운 반사신경과 빠른 판단을 지닌 선수였다. 특히 페널티킥 선방에 일가견이 있어 유로 2000 8강 튀르키예전, 02-03 UEFA컵 4강 라치오전 등 중요한 경기에서 결정적인 선방들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기복이 꽤 있었으며 커리어에서 벤치에 앉아있던 시간도 꽤 길었다.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은 조제 무리뉴가 이끌던 시절 포르투에서의 활약인데, 이때는 기복 없는 퍼포먼스를 보이며 뛰어난 안정감을 통해 유럽 최고의 키퍼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또한 리더십과 인성 또한 훌륭해 소속팀과 대표팀에서도 여러차례 주장으로 활약했다. 특히 바이아의 뛰어난 인품과 화술은 코치진과 동료들이 그의 실력만큼이나 신뢰하는 것이었는데 바이아가 현역시절부터 갈고 닦은 깔끔하고 스마트한 이미지는 현역 시절 뿐만이 아니라 은퇴 이후에도 바이아가 훗날 FC 포르투 엠버서더로 활동하게 해주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FC 포르투 (1988~1996, 1999~2007)
- 프리메이라 리가: 1989-90, 1991-92, 1992-93, 1994-95, 1995-96, 1998-99, 2002-03, 2003-04, 2005-06, 2006-07
- 타사 드 포르투갈: 1990-91, 1993-94, 1999-2000, 2002-03, 2005-06
- 수페르타사: 1990, 1991, 1993, 1994, 2003, 2004, 2006
- UEFA 챔피언스 리그: 2003-04
- UEFA컵: 2002-03
- 인터컨티넨탈컵: 2004
- FC 바르셀로나 (1996~1998)
- 라리가: 1997-98
- 코파 델 레이: 1996-97, 1997-98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96
- UEFA 컵위너스컵: 1996-97
5.2. 개인 수상
- UEFA 올해의 골키퍼: 2003-04
- 베스트 유러피언 골키퍼: 2004
- 포르투갈 올해의 축구 선수: 1989, 1991
- 포르투갈 골든볼: 1992
- ESM 올해의 팀: 1994-95
- IFFHS 올타임 포르투갈 드림팀: 2022
6. 여담
- 무려 35번의 주요 타이틀을 거머쥔 엄청난 우승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프리메이라 리가 10회, 라리가 1회, 코파 델 레이 2회,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회, UEFA 컵위너스컵 1회, 포르투갈 FA컵 5회, 수페르코파 포르투갈 10회, UEFA 슈퍼컵 1회, 인터컨티넨탈컵 2회와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1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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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일 월드컵 기간 당시 대표팀 동료들[2]과 함께
한국의 어느 마성의 남자와 술을 마셨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이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홍석천 문서 참고.
웃긴 것은, 그날 술 마신 바이아가 나머지보다 잘했다는 것이 함정
- 이스타디우 두 드라강에 그의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다.
- FIFA 16에 전설의 선수로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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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피파 온라인 3 신규 월드 레전드 선수로도 추가되었다. 2017년 1월 현재
피파 온라인 3의 월드 레전드 선수들 중 가장 낮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
- 2020년 12월 피파 온라인 4 신규 아이콘 선수로 추가되었지만, 골키퍼에 대한 투자는 후순위인 게임상의 급여 시스템과 치명적인 신장상의 약점으로 불명예스러웠던 전작의 입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