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및 고려의 호족과 군벌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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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90001f> 안동 권씨 시조 권행 / 김행 權幸 / (金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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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남 권영한 홈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는 권행 영정과 초서로 쓴 자작시)[1] | |
출생 | 866년(?) |
사망 | 953년(?) |
묘소 |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2] |
본관 | 신라 김씨[3] 경주 김씨라 표기한다.] → 안동 권씨[4] |
부모 |
아버지 김씨 어머니 성씨 불명 |
배우자 | 박씨(朴氏) |
자녀 | 장남 권인행[5] |
친인척 | 며느리 양천 허씨[6] |
향직 품계 |
삼중대광(三重大匡) 대상(大相) |
공신호 |
통합삼한보사벽상아부공신 (統合三韓保社壁上亞父功臣)[7][8][9] |
삼사 | 태사(太師) |
비고 | 고창군(古昌郡) 성주(城主) |
[clearfix]
1. 개요
통일 신라 시기와 고려 초기 때의 활동했던 인물이다. 경주 김씨 왕실의 일원으로써, 현재의 안동시가 되는 고창군의 성주(城主)였다. 몇 년뒤 고창전투에 참전해, 야전사령관으로써 공로로 인정받아 고려 태조 왕건에게 권씨 성을 사성받는 이른 바 사성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알지의 후손으로 본명은 김행(金幸)이었다.[10]2. 생애
927년( 경순왕 1년)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에 침입하여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주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당시 고창군[11]의 호족이자, 성주(姓主)였으며 별장에서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930년(경순왕 4) 고려 태조가 견훤과 고창에서 싸울 때, 태조를 도와 후백제군을 함께 물리쳐 승리하자, 태조가 이를 기뻐하고 "능히 기미에 밝고 권도에 통달하다"라 하고 권씨의 성과 '삼중대광 삼한벽상아부공신 태사'라는 벼슬에 제수, 고창군(현재의 안동시로써 전남 고창군과 무관함)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고 한다. 삼태사 중 수석은 고창성주 김선평이었지만 권행은 야전사령관으로서 전술적 지휘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던 것 같다.권행의 묘.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소재 | 안동 권태사 신도비.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소재 |
3. 시조 권행(權幸)의 출신, 권씨(權氏) 득성(得姓) 유래
권행은 본래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서 성명이 김행(金幸)이었다. 고려사(高麗史) 에는 성명이 권행(權行)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사관(史官)의 착오로 오기(誤記)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세전(世傳)의 기록이나 기타 모든 문적(文籍)에는 다 휘(諱)가 행(幸)으로 나오고 행(行)으로 나온 곳은 고려사 뿐이다. 혹시 태사공이 사성(賜姓)을 받아 성이 김씨에서 권씨로 되면서 휘도 행(幸)에서 행(行)으로 바뀐 것이나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으나 더 상서롭고 좋은 글자인 행(幸)을 버리고 행(行)을 취했을 이치가 없으니 환성(換姓)이 되면서 휘자(諱字)도 바뀌었을 가능성은 없다.태사공이 덕업(德業)을 쌓고 공훈을 세워 사성(賜姓)과 작위(爵位)를 받은 일은 사서(史書)나 각 집안의 문헌에 반복되어 나오는 것이 수없이 많으나 그 대표적인 것은 동사강목(東史綱目) 의 기록이다. 동사강목은 조선 영조(英祖) 때 안정복(安鼎福)이 아동의 교과용으로 지은 역사책으로 기자(箕子)에서부터 고려 말(高麗末)에 이르기까지의 사적을 송(宋)나라 주자(朱子 : 주희)의 통감강목(通鑑綱目) 을 참고하여 편술한 것이다. 거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경순왕(敬順王) 3년 기축(己丑 : 929)[후당(後唐) 천성(天成 : 明宗 연호) 4년 견훤(甄萱 : 후백제) 38년 12월에 견훤이 고려(高麗 : 신라)의 고창군(古昌郡 : 안동)을 포위하니 고려 임금 건(建 : 왕건)이 스스로 장수가 되어 와 구원하였다. 경순왕 4년 경인(庚寅 : 930)[후당 장흥(長興) 원년 견훤 39년]에 고려 임금 건이 견훤을 고창에서 대파(大破)하니 동방(東方)의 주군(州郡)이 모두 고려에 항복하였다.
고려왕이 고창을 구원하러 와 예안진(禮安鎭 : 안동시 예안면)에 머물면서 여러 장수와 의논하기를, "싸워 이롭지 못하면 장차 어찌할 것인가?" 하니 대상(大相 : 고려초의 문무관 2품) 공훤(公萱)과 홍유(洪儒)가 말하기를, "불리하면 마땅히 사잇길을 좇아 가야지 죽령(竹嶺)으로 넘어가는 것은 불가하니 반드시 먼저 사잇길을 닦아야 합니다."하였다. 장군 유검필(庾黔弼)이 말하기를, "병(兵)이란 흉기(凶器)이고 전쟁은 위태로운 일이니 죽을 마음만이 있고 살 계책이 없은 연후에 가히 승패를 결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거늘 지금 적 앞에 임하여 싸우지는 않고 먼저 북으로 꺾일 것을 염려함은 어째서입니까? 만약 지금 고창을 급히 구하지 않는다면 3천여의 무리가 손을 맞잡아 읍하여 적을 맞아들일 터이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닙니까. 신(臣)은 진군하여 급히 칠 것을 원합니다." 하니 고려왕이 이를 좇았다. 병술일(丙戌日)에 고려왕의 군대가 고을의 북쪽 병산(甁山 : 안동시 臥龍面 西枝里)에 이르렀는데 훤(萱)의 군대는 석산(石山)에 있어 상거가 5백보가 되자 드디어 접전하였다. 저물 때까지 격전을 벌였는데 검필(黔弼)이 경병(輕兵)을 이끌고 저수봉(猪首峰)에서 분격해 치니 훤이 패해 달아나는지라 그 시랑(侍郞) 김악(金渥)을 사로잡고 백제군의 죽은 것이 8천여인이었다. 고려왕이 고창에 입성하여 검필에게 말하기를, "오늘의 승첩(勝捷)은 경(卿)의 공이다." 하였다. 견훤은 장수를 보내 순주(順州 : 풍산)를 쳐 침략하고 인호(人戶)를 약탈해 가지고 갔다. 고려왕이 곧 순주로 행차하여 성을 수복(修復)하고 주(州)를 격하하여 하지현(下枝縣)을 삼고 원봉(元奉 : 성주)을 잡았는데 백제에 항복했으나 전에 세운 공이 있으므로 용서하였다. 고창성주(古昌城主)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 : 고려 초기 문무관 1품)으로 삼고 김행(金幸)과 장길(張吉 : 장정필)을 대상(大相)으로 삼았으며 군을 승격하여 안동부(安東府)로 하였다. 이에 영안(永安 : 풍산) 하곡(河谷 : 안동시 임하면) 직명(直明 : 안동시 일직면) 송생(松生 : 청송) 등 30여 고을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고려는 이때 병력이 점점 강해지고 나라가 동쪽으로 넓혀져 바다에 연한 주군(州郡)과 부락이 모두 고려에 항복하니 명주(溟州 : 강릉)에서부터 흥례부(興禮府 : 울산)에 이르기까지 총1백10개 성이었다. 김행(金幸)이란 사람은 나라의 종성(宗姓 : 왕실 성씨)인데 견훤이 임금을 시해(弑害)하였다는 말을 듣고 무리와 모의하기를, "훤(萱 : 견훤)은 의리상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가 없으니 어찌 왕공(王公 : 왕건)에게 귀부(歸附)하여 우리의 수치를 설해(雪解)치 않으리오." 하고 드디어 고려에 항복하니 고려왕이 기뻐하며 이르기를, "행(幸)은 능히 기미(幾微)에 밝고 권도(權道)에 통달하였다." 하고 권(權)씨로 성을 하사하였다.
(이하 생략) [참고문헌]
4. 시조 권행(權幸)의 본명은 김행(金幸)이 아니라 흔행(昕行)이다?
고려의 역사 연구에 기초가 되는 사책인 고려사에선, 권행의 휘가 다행 행(幸)이 아닌 다닐 행(行)으로 표기 되어 있다. 또한 권행의 본명이 김행이었다는 기록은 없고, 오히려 타성인 흔씨의 흔행(昕幸)으로 나와있다.[13] 다른 기록에서도 단지, "삼태사 김선평, 권행, 장길의 덕에 고창군이 안동부로 승격 될 수 있었다."는 구절 밖에 없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시조 권행의 본성은 신라 왕실의 인물이 아닌, 고려의 토착 성씨였던 흔씨(昕氏)의 인물이라고 오해 할 수도 있다. 고려사는 정인지(鄭麟趾) 등이 1451년(조선 문종 원년)에 편찬한 역사서로 고려시대 연구를 위한 가장 기초가 되는 자료이다. 그러므로 조선 시대 때 편찬 된 역사서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토대로 몇몇 기록에 대해선 신뢰를 가질 수 없는 부분이 있고, 고려사에서도 권행의 휘를 다닐 행(行)으로 기록 해놓고, 다행 행(幸)으로 기록하는 등, 여기저기 오기가 된 점을 볼 수 있다. 안동 권씨 종보사 또한,그러나 이것은 사관(史官)의 착오로 오기(誤記)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세전(世傳)의 기록이나 기타 모든 문적(文籍)에는 다 휘(諱)가 행(幸)으로 나오고 행(行)으로 나온 곳은 고려사 뿐이다. 혹시 태사공이 사성(賜姓)을 받아 성이 김씨에서 권씨로 되면서 휘도 행(幸)에서 행(行)으로 바뀐 것이나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으나 더 상서롭고 좋은 글자인 행(幸)을 버리고 행(行)을 취했을 이치가 없으니 환성(換姓)이 되면서 휘자(諱字)도 바뀌었을 가능성은 없다. |
고려의 또 다른 역사서인 고려사절요도 김종서(金宗瑞) 등이 1452년(조선 문종 2년)에 편찬한 역사서이므로 신뢰의 문제와 더불어 기록 또한 부실할 수 밖에 없다.
시조 권행의 본명이 김행(金幸)이었다는 기록은 고려시대 금석문을 통해서 볼 수 있는데,
고려시대 사람들은 비문(碑文), 묘지명(墓誌銘), 금속기명(金屬器銘), 불상명(佛像銘), 목간, 간기(刊記), 발원문 등 다양한 형태의 기록을 남겼다. 금속기나 돌 등에 새겨진 문자 자료를 금석문(金石文)이라 통칭하며, 각종 문서 등에 남은 자료를 문자자료로 칭한다. 이들은 당대인(當代人)이 직접 남긴 1차 사료이므로 그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시대 사료DB에서 짧게 인용.) |
권렴(權廉)의 묘지명: 중대광 현복군(重大匡 玄福君) 권공 묘지명 【병서】 권씨는 김행(金幸)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신라의 대성(大姓)이다. 〈김행이〉 복주(福州)[14]를 지킬 때, 태조께서는 이미 왕위를 바로 세우고 신라를 공격하시어 복주에 이르시니 김행이 능히 천명이 돌아가는 곳을 알아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태조께서 기뻐하시며 말씀하시길, “김행은 권도(權道)가 있다고 이를 수 있다.”라고 하셨다. 이에 성을 하사하여 권(權)이라 하였는데, 후세에 이름난 사람이 많았다.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시대 사료 DB 고려시대 금석문·문자자료에서 짧게 내용 발췌.) |
5. 대중매체
태조 왕건에서는 그가 활약한 고창 전투에 출연한다. 전투 이전 투항을 권유하러 찾아온 백제의 사자를 꾸짖으며 백제가 서라벌에서 저지른 만행을 절대 잊지 않아 결코 투항하지 않을 것임을 알린 후 그대로 전하라며 쫓아낸 뒤 왕건을 김선평, 장정필과 함께 반갑게 맞이해준다. 그리고 고창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난 후 왕건이 김행을 칭찬하며 기록에 언급된 것처럼 '기마술에 능하고 권도에 통달했다.'는 칭찬을 해준 후 권씨 성을 내려준다. 나레이션에서도 김행이 권행이 되어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되고, 벼슬과 고창군 식읍을 받았음을 언급한다.
[1]
진위 여부는 논란이 있으나 상당한 신빙성을 보장한다.
[2]
상당히 오래된 실묘(實墓)로, 그 세월이 무려 1100년이다.
[3]
삼국시대 당시엔
본관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왕실의 씨족을 표기할때 나라 •씨, 종성 •씨 등 다양하게 표기했다. 안동 권씨 종보사에선
[4]
고창 전투의 공로로 권씨 성을 하사받으면서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되었다.
[5]
안동권씨의 또 다른 공통시조
[6]
양천 허씨의 시조 허선문의 딸이다.
[7]
죽은 신하의 호칭을 읽는 순서는 ‘품계-공신호-삼사’ 순서이며, 품계나 삼사 등이 그 안에서도 여러 직책 겸직일 경우 더 높은 대우나 명예직급을 더 먼저 놓는다. 그러므로 “'''삼중대광 대상 통합삼한보사벽상아부공신 태사"'”라고 읽는 것이 옳다.
[8]
현재는 고려왕조실록 및 고려초기 역사서나 사료들이 모두 망실되어, 안동을 본향으로 하는 삼태사의 정확한 전체 시호를 알 수가 없다. 심지어 안동 태사묘나, 전국에 흩어져있는 관련 유적지의 비석들과, 삼태사 묘지석, 족보들, 관련 문헌들에도 시호가 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다만 안동 삼태사의 관련 유적지 숫자가 전국적으로 꽤 많기에, 각 유적지 비석에서 공통되는 부분을 취합하여 전체의 온전한 시호를 추론할 따름이다.
[9]
현재 태사묘 위패에 모셔진, 기존에 알려진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이라는 시호는 조선 광해군 때 태사묘를 중건하면서 삼태사의 정확한 전체 시호를 상고할 수 없어서, 그 때 당시 세 가문의 종손이 합의하에 추론한 시호이다. 요즘 세상에는 인터넷으로 전국의 삼태사 관련 유적지 비석들을 모두 볼 수 있으므로, 조선 광해군 때 추론하여 추합한 시호보다는 더 정확도가 올라갔다 하겠다.
[10]
고려사 태조세가에는 權行이라 적혀있다.
[11]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참고문헌]
안동권씨태사공실기(安東權氏太師公實記) p133
안동 권씨 시조 페이지
[13]
고려사
[14]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