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및 고려의 호족과 군벌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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閏雄 / 車閏雄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후삼국시대 강주[1]의 지방세력가이자 호족. 강주장군(康州將軍)으로 기록된 점을 볼 때, 현 경상남도 진주시 일대를 점거하고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2. 생애
삼국사기, 고려사에 따르면 920년 2월[2] 고려에 아들 일강(一康)을 보내 투항의사를 밝혔다. 왕건은 아들 일강을 아찬에 임명했으며, 행훈의 누이동생과 일강을 결혼시켰다. 또한 낭중 춘양을 강주로 보내 그를 위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윤웅이 고려에 투항의사를 밝힌지 8개월 뒤인 920년 10월, 견훤이 대야성을 함락시키면서 강주에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는데 이와 연관있는지는 불분명하다.
3. 기타
진주 소씨 측 기록인 동근보에는 차윤웅(車閏雄)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며, 소격달의 아버지인 소송을 왕봉규와 함께 살해한 후 소격달[3], 최유문 등 친소격달 호족들과 맞서 싸우다가 결국 거창성에 고립되었고 끝내 소격달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사기, 고려사와 교차되는 면이 없다.[4]
[1]
현
경상남도에 설치되었던 신라 9주 중 하나이다.
[2]
고려사에서는 920년 1월로 기록하고 있다.
[3]
진주 소씨의 시조격 인물. 후에 궁지에 몰리자 고려
왕건에게 귀부 의사를 밝히는 동시에 지원군을 요청했고 이후 고려군과 내응하여 왕봉규를 죽이고 중앙 정계로 진출하게 된다. 후삼국 말미의
운주성 전투에 출전해 공을 세우기도 했다.
[4]
그런데 나무위키
왕봉규 문서에서는 정사 삼국사기 및 고려사와 교차 검증이 된다고 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