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및 고려의 호족과 군벌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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池萱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후삼국시대의 인물로, 후백제의 왕 견훤의 사위로 기록된 인물. 무주와 광주 지씨의 시조다.2. 생애
나주 공방전 시기 궁예의 명령으로 나주를 점거한 왕건[1]이 무주[2]까지 공격하자, 당시 무주(武州)의 성주(城主)였던 지훤은 무주를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고 한다.후일 935년 견신검의 쿠데타 당시 견훤의 삼남인 견용검이 무주도독(武州都督)을 지냈는데 지훤이 이 시기까지 무주성 성주를 지냈는지는 불분명하다. 또한 기록이 적어서 무주 출신의 호족인지, 견훤이 무진주에서 거병한 이후 임명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3. 박영규와의 관계
견훤의 사위였다고 하는데 지훤 외에도 후백제 공주와 혼인한 호족으로는 순천의 박영규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만 등장하기 때문에 활동 구역이 전라남도 지방 안쪽으로 비슷하고 똑같이 견훤의 사위로 훨씬 나중에 등장하는 박영규와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 등장연대를 고려해봤을때 이는 너무 이르다는 평가도 있지만 왕건이 견훤을 상보, 그 사위인 박영규 부부를 형과 형수로 부른 것을 보면 아내인 애복 역시 왕건과 비슷한 870-880년대생일 수 있다.삼국유사에 인용된 이제가기(李磾家記)에 의하면 견훤에게는 8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이 있었다고 하며, 그러면 그 한 명 있는 딸이 바로 박영규의 부인인 국대부인(國大夫人) 견애복(甄哀福)이 된다. 따라서 지훤이 국대부인 견애복의 남편이 맞다면 지훤이 일찍 사망해 박영규는 재혼 상대였거나 아니면 지훤과 박영규과 아예 동일인물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제가기는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확실한 사료가 아니다. 다른 사료에서는 이제가기와는 달리 견훤은 아내를 많이 얻어 아들 십여 명이나 있었다고 하니 그냥 딸도 여러 명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는 애복이 실제로는 나이가 많았다고 가정하고, 모종의 이유로 견훤이 무주에서 승주로 권력기반을 옮겼을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애복의 귀부 시점은 935년, 국대부인의 귀부 시점은 936년이다. 사위가 둘인 것이 맞을 듯.
또한 사위(婿)를 매서(妹婿)의 축약표기로 보고 견훤의 여동생인 대주도금의 남편으로 해석한 경우도 있다. 아무튼 견훤도 왕건처럼 자신의 딸을 지역 호족과 혼인시켜서 유대를 강화하려 했던 걸로 추정된다.
4. 기타
견금강, 관흔, 상귀, 상애, 박영규 등과 함께 기록상 견훤 이외의 후백제 장수 중 고려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인물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왕건과 싸워 이겨본 것은 견훤과 지훤뿐이다.5. 대중매체에서
5.1. 드라마 태조 왕건
[3]
배우 박철호가 연기했다. 드라마 중반부에서 견훤이 신라를 치기 위해 대야성으로 출정한 사이에 나주에서 김언이 무진주를 향해 공격을 가해오자 무진주성을 방어하는데에 집중한다. 능창같은 여러 호전적인 장수들이 공성전에서 방어전하던 도중에 경거망동하여 성문을 열고 무리하게 전면전을 가하는 것과 달리 지훤은 성을 지키는 것에만 집중하고 김언이 이끄는 태봉군의 화살 공격에도 적절하게 응사하고 방어하여 김언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에 공을 세우는 모습도 나온다. 애술, 능창, 김총같이 호전적인 장수들이 가득한 후백제 장성들 중에서도 상당히 온건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견훤과 믿을 수 있는 군신이자 사위로 묘사된 박영규와 달리 이쪽은 그냥 견훤의 장수 중 한 사람으로 나오며, 당연히 박영규와도 별개의 인물. 대주도금의 남편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나오는 것과 달리 극중에서는 엮이지 않는다. 정말 견훤의 사위 중 한 명이면 결코 낮은 입지가 아님에도 이런 점이 반영되지 않은 안타까운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