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삼한벽상공신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개국공신 | |||
1등 | ||||
홍유 | 배현경 | 신숭겸 | 복지겸 | |
2등 | ||||
견권 | 능식 | 권신 | 염상 | |
김락 | 연주 | 마난 | ||
3등 | ||||
2천여 명(사서에 전하지 않음) | ||||
삼한공신 | ||||
유금필 ·
박술희 ·
최지몽 ·
왕식렴 ·
박양유 ·
김견술 ·
서필 이상 배향공신 강공훤 · 강궁진 · 권행 · 금용식 · 김극렴 · 김선평 · 김유렴 · 김인윤 · 김일긍 · 나총례 · 류차달 · 박지윤 · 소격달 · 왕경 · 염형명 · 원극유 · 윤신달 · 이금서 · 이능일 · 장정필 · 최정헌 · 허선명 그 외 다수 |
}}}}}}}}} |
후삼국 및 고려의 호족과 군벌세력 |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
|
|
<colcolor=#fff><colbgcolor=#191970> 평주 대호족 박지윤 |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향년 불명) |
향직 품계 | 삼중대광(三重大匡) |
본관 | 평산 박씨(平山 朴氏) |
이름 | 지윤(遲胤, 智胤) |
아버지 | 박직윤(朴直胤) |
자녀 |
2남 1녀 장남 - 박수문 차남 - 박수경 딸 - 성무부인(聖茂夫人)[1] |
[clearfix]
1. 개요
신라 말기의 호족이자 고려 초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성을 생략해 지윤(智胤)이라고도 한다.2. 생애
평주의 지배자였던 찰산후(察山侯)[2] 박적오(朴赤烏, 朴積古)의 손자이며, 대모달읍장(大毛達邑長)[3] 박직윤(朴直胤)의 아들이다. 아버지 박직윤이 평산에 13개 성을 설치하고, 궁예에게 귀부(歸附)한 뒤로 패서 지역(浿西 地域)[4]의 유력 호족으로 성장했다. 평산은 장보고의 청해진을 제외하면 통일신라 최대의 군진이었던 패강진의 치소가 위치했던 곳으로 박직윤 가문이 패강진의 군사력과 행정 기반을 흡수해 평산의 호족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왕건의 조부인 작제건 때부터 왕건의 가문과 관계를 맺었으며, 왕건의 후삼국 통일에 협력하여 삼중대광에 올랐다. 자식으로는 박수문, 박수경 형제와 딸이 하나 있었다. 딸은 왕건에게 시집을 보내 태조의 후궁인 성무부인(聖茂夫人)이 되고, 아들들은 고려의 충신으로 통일에 공을 세워 고려 왕실과의 유대를 굳혔다.
3. 성씨
사서 및 묘지명에 따르면 박지윤은 할아버지 찰산후 때부터 이미 박(朴)씨 성을 사용했고, 성씨가 내려와 현재의 평산 박씨와 평주 박씨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박지윤의 거점지인 평주가 고구려의 옛 땅이었고, 아버지 박직윤이 대모달을 자칭한 것을 보면 박지윤은 고구려계로 추정된다. 그러나 고구려 관직을 자칭한 것치고는 성씨가 전형적인 신라계 성씨인 박씨인 점이 모순인데, 박씨는 예나 지금이나 본래 중국에는 없는 성씨로[5] 모든 본관이 박혁거세의 후손인 순수한 신라계 성씨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박지윤의 후손인 박경산의 묘지명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자신들을 계림(鷄林)의 땅에서 난 혁거세의 후손임을 명시하였다.이에 몇 가지 가정을 해 보면 원래 신라계 가문이지만 옛 고구려 지역의 세력가로서 현지인의 신망을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구려 관직을 자칭했을 수도 있다. 궁예나 견훤도 원신라[6] 출신임에도 왕이 되기 위해 자신의 세력지인 옛 고구려나 백제의 이름을 빌린 이유와 같다. 또는 옛 고구려 땅이라고 해서 모두가 고구려계 백성인 것은 아니고, 782년 신라가 남쪽 백성들을 패서로 이주시킨 사민 정책이 있었기 때문에 패서로 이주시킨 신라계 백성이 옛 고구려 지역에 연고를 두면서 문화적, 혈통적으로 고구려에 동화된 것일 수도 있다.
고구려계는 맞는데 단지 명문가 성씨인 박씨를 사칭했다는 추측도 있다. 이 시기 호족들은 성씨를 칭하기 시작하는 시기였고, 성씨가 없던 고구려계가 박씨를 자칭했다는 것이다. 당시 통일신라의 고구려계와 백제계 유민들에게는 기존의 고구려▪︎백제 성씨를 사용하는 것보다 신라의 것을 차용하는 것이 통치에 필요한 위상과 권위를 손쉽게 등에 업을 수 있었고 시류에 쉽게 편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7]
다만 엄연히 고구려인인데도 박씨 성을 쓰는 사람들이 여럿 발견되고, 고구려인 박씨 후손으로 살다가 발해가 건국된 후로는 그대로 발해인 박씨로 살게 된 경우가 밝혀진 이상[8], 박지윤이 정말로 고구려인 박씨의 후손이었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는 없게 되었다.[9]
현재 대한민국에는 평산 박씨와 평주 박씨가 존재하는데, 평산과 평주는 같은 곳인데다 한쪽은 자신의 아버지 박직윤, 한쪽은 자신의 아들 박수경을 시조로 하고 있어서 같은 집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4. 대중매체
[1]
태조의 제25비
[2]
평주 박씨인 6대손
박경산의 묘지명에는 찰산(죽산)의
제후로 봉해졌다고 한다.
[3]
'대모달'은
고구려에서 위장군('~~위'라는 이름을 가진 군단 조직의 지휘관)을 가리키던 칭호였다.
[4]
지금의
황해도
[5]
한민족의 후손인
조선족들 중에는 박씨가 있으며,
병자호란 때 끌려간 사람의 후손이라는 식으로 특별한 사연이 있는 소수는 존재하지만 일반
한족 중에는 박씨가 없다.
[6]
지금의
경상도 지역
[7]
실제로 신라가 멸망한 뒤에도 패서 일대의 고구려계 주민들 가운데 신라계 성씨를 사성받은 경우(
해주 정씨,
동주 김씨,
우봉 최씨 등)가 존재한다. 무엇보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신라 왕실과의 혼인에 상당히 적극적이였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 신라계 중앙 귀족 계층의 위상은 삼한에서 가장 우월했다고 볼 수 있다.
[8]
노태돈 교수의 고구려 발해사 저서 참조
[9]
고구려가 신라를 50년 동안 속국 및 동생 나라로 둔 5세기 첫 시기 및, 신라에게서 본격적으로 전쟁 포로들을 데려오기 시작한 5세기 중후반 ~ 6세기 중반 시기에 유입된 박씨들로 추정된다.
[10]
2020년 2월 24일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