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7 13:26:59

이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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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성왕(異姓王)은 왕작이 황족이 아닌 신하에게 수여되었을 때, 그 작위 또는 책봉된 인물을 가리키는 말로, 다른 표현인 '서성왕(庶姓王)'으로 불리기도 했다.

전근대 한자문화권에서는 왕족을 일컬어 '동성(同姓)' 또는 '종성(宗姓)' 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이성(異姓)' 또는 '서성(庶姓)'은 이에 상대되는 표현으로 "왕족이 아닌 신하"라는 의미였다.

2. 설명

상나라를 쓰러뜨리고 중원의 패권을 차지한 주나라 천자를 자처하여 중원 전역의 통치권을 주장했다. 일찍부터 주나라에 복속되어 상주혁명에 동참한 다른 씨족 국가들은 기존의 '후(侯)' 칭호를 유지하였으나, 상주혁명에 동참하지 않은 지역들에 대해서는 새로운 '후(侯)'를 책봉하여 그 지역을 복속시키는 임무를 맡겼는데, 대체로 왕족들이 책봉되었고 이들을 제후로 통칭했다. 동성 제후국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춘추시대까지는 제후를 자처했던 나라들은 전국시대에 이르러 모두 천자의 전용 칭호로 통하던 '왕(王)'을 자칭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하여 왕이란 칭호의 위상은 천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제후도 사용할 수 있는 칭호처럼 여겨지기 시작했고, 전국시대를 끝내고 중원을 통일한 진시황은 천자의 새로운 칭호로 황제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하지만 황제를 칭한지 12년만에 진나라가 붕괴되면서 다시 왕을 자처하는 군벌들이 등장했고, 거록대전을 통해 중원의 새로운 패자로 부상한 항우는 자신의 주군을 의제(義帝)로 올리고 자신을 포함한 18인의 유력자를 제후왕으로 분봉했다. 황제에 예속되는 제후왕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초한전쟁을 통해 항우를 무너뜨리고 다시 중원의 패권을 차지한 한왕(漢王)은 제후왕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했다. 비록 왕은 황제의 제후 신분이 되기는 했으나, 제후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기존 6국 유력자들의 지지 속에서 성립된 독립 세력이었다. 초한전쟁이 끝난 직후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통해서 황제는 초왕 한신 등 기존 제후왕을 대부분 숙청하는데 성공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나라들까지 완전히 해체하여 통합할 수는 없었다. 결국 황제의 혈족들이 새로운 왕으로 책봉되었고, 이를 통해 종성인 유(劉)씨만이 왕으로 책봉될 수 있다는 원칙을 표방하게 된다.

오초7국의 난 이후로 제후왕의 봉국(封國)에는 황제가 임명한 관리들이 지방관처럼 파견되었으므로, 더 이상 독립세력이라고 하기는 어려워졌다. 하지만 한나라에서는 왕작을 폐지하지 않고 황족들을 예우하기 위한 관례로 유지했으며, 이후의 왕조들도 한나라의 사례에 따라 황족들을 왕작으로 책봉하는 원칙을 표방했다. 비록 '왕(王)'이란 칭호 자체는 제후도 사용할 수 있는 칭호처럼 여겨지기도 했으나, 춘추시대에 성립된 유교 경전부터 '왕'이 천자의 칭호로 광범위하게 쓰였던 만큼, 그 권위가 결코 낮다고 할 수는 없었다. 특히 전근대 한자문화권에서는 황실을 '왕가(王家)', 황제의 군대를 '왕사(王師)', 제위를 '왕위(王位)' 등으로도 썼으며, ' 왕조(王朝)'라는 어휘는 지금까지도 광범위하게 쓰인다.[1] 때문에 이성 신하들까지 왕으로 봉작하는 것에는 상당한 부담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건국 초기나 혼란기에는 황족만 왕으로 책봉된다는 원칙이 지켜질 수 없었고, 결국 왕으로 봉해질 수 없는 이성 신하가 왕작에 책봉되거나 아예 왕을 자칭하기도 했다. 이들을 일컬어 '이성왕'으로 통칭한다. 이성왕이 등장하는 상황이 이처럼 매우 이례적이었기 때문에, 이성왕은 비록 황제의 신하 신분이기는 했으나, 선양을 빙자한 제위 찬탈을 진행 중인 권신이거나, 실질적으로 황제의 조정과 경쟁 세력인 경우가 많았다. 이성왕 가운데 진정으로 황제의 충직한 신하라고 할 수 있는 경우는 생전에는 왕으로 책봉된 바가 없으나 죽은 뒤에나 특례로 추봉(追封)된 사례들이 대부분이고, 생전에 봉작된 사례는 이광필· 곽자의처럼 절도사의 할거로 혼란기에 빠진 당나라 한세충· 장준처럼 정강의 변으로 혼란기에 빠진 남송 때의 일부 이성왕만 해당된다.

3. 목록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이후 '제후' 신분인 왕작을 정리했다. 자칭 또는 비정통 왕조의 왕작은 기울임꼴로 표시했다.

인명의 표기를 우선했으며, 시호가 있는 경우에는 이름 앞에 이를 표기했다. 다만 동일한 작위를 여러 사람이 보유했던 경우에는 리스트를 해당 작위를 기준으로 묶어두었다.

실질적으로 부족제를 유지하여 이성왕 봉작이 당연시되었던 16국, 북조,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는 제외한다.

3.1. 한나라

3.1.1. 후초

  • 장한(章邯): 옹왕(雍王) 분봉(기원전 206년)
    기원전 205년에 한왕 유방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다.
  • 사마흔(司馬欣): 새왕(塞王) 분봉(기원전 206년)
    기원전 205년에 한왕 유방의 침공을 받아 항복했다.
  • 동예(董翳): 적왕(翟王) 분봉(기원전 206년)
    기원전 205년에 한왕 유방의 침공을 받아 항복했다.
  • 제왕(齊王)
    진나라 말에 제왕으로 옹립된 인물은 전담(田儋)이었으나, 장한의 공격을 받아 죽었다. 이에 제나라의 유력자들은 전담의 사촌동생인 전영을 배제하기 위해 전국시대 당시 마지막 왕의 아들인 전가를 옹립했고, 전영은 전담의 아들인 전시를 옹립했다. 항우는 거록대전에 참전했던 전도를 멋대로 제왕으로 분봉했고, 전시는 교동왕으로 분봉했으며, 전담 세력과는 독립되어 있던 전안을 제북왕으로 분봉하여, 이른바 3제(三齊)가 형성되었다. 전영은 이 조치에 반발하여 3제를 멸망시키고 통합하여 제왕을 자처했으나, 항우의 반격을 받아 멸망했다. 항우는 다시 전가를 제왕으로 세웠으나, 이번에는 전영의 동생인 전횡의 반격을 받아 전가는 항우에게 돌아갔고, 전횡은 전영의 아들인 전광을 옹립했다.
    • 전도(田都): 분봉(기원전 206년)
    • 전영(田榮): 자립(기원전 206년)
    • 전가(田假): 분봉(기원전 205년)
    • 전광(田廣): 옹립(기원전 205년)
      역이기의 설득으로 한왕 유방을 지지하게 되었으나, 한신의 배신을 받아 역이기를 죽이고 항우가 보낸 용저와 함께 한신과 대치했다. 하지만 유수 전투 중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 전횡(田橫): 승계(기원전 204년)
      전광의 전사 소식을 들은 전횡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한신의 침공으로 결국 기원전 203년에 팽월에게 투항했다.
    • 한신(韓信): 책봉(기원전 203년)
      괴철의 제안에 따라 전광과 전횡을 쫓아내고 주군인 한왕 유방에게 제나라의 가왕(假王)으로 임명해줄 것을 요청했다. 유방은 이러한 배신 행위에 격분했으나 일단은 한신을 정식 제왕으로 승인했다. 해하 전투 당시 유방은 항우를 죽인 자에게 항우의 영지를 봉해준다고 공언했는데, 실제로 기원전 202년에 항우가 멸망하자 그 전공을 인정하여 한신을 초왕으로 전봉(轉封)시켰다.[2]
  • 전시(田市): 교동왕(膠東王) 분봉(기원전 206년)
    전불(田巿)로도 알려져 있으나 잘못이다. 전가가 옹립된 것에 분노한 전영이 전가를 쫓아내고 제왕으로 옹립했던 인물이었으나, 전도를 제왕으로 내세운 항우가 전시를 멋대로 교동왕으로 분봉했다. 전시가 이를 받아들이자 전영은 전시를 제거하고 항우가 멋대로 세운 3제를 통합했다.
  • 전안(田安): 제북왕(濟北王) 분봉(기원전 206년)
    진나라 말부터 전담-전영 세력과는 별개로 독립된 세력이었다. 항우가 전영을 적대하면서 이를 견제하기 위해 전안을 제북왕으로 승인했으나, 전영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 대왕(代王)
    원래 진나라 말에 진승에게서 독립한 무신(武臣)이 조왕(趙王)을 자처했었으나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이에 무신의 우승상 장이와 대장군 진여는 옛 조나라의 왕족인 조헐을 조왕으로 추대했다. 거록대전 이후 항우를 따른 장이가 항우에 의해 항산왕으로 분봉되었고, 기존의 조왕 조헐은 변방으로 쫓겨나 대왕(代王)으로 전봉(轉封)되었으나, 조헐은 장이를 공격하여 영지를 되찾아 다시 조왕을 자칭했고, 이를 도운 진여를 대신 대왕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한왕 유방의 지지를 얻은 장이와 한신의 반격으로 그 해에 조헐과 진여 모두 멸망했고 장이가 조왕으로 복귀했다.
  • 장이(張耳): 항산왕(恆山王) 분봉(기원전 206년)
    역사 기록에는 한문제의 이름을 피휘하여 '상산왕(常山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恆'의 속자를 사용한 '恒山王'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 장도(臧荼): 연왕(燕王) 분봉(기원전 206년)
    조왕을 자처한 무신의 부하였던 한광이 연왕을 자처하며 독립했다. 거록대전 당시 한광은 부하인 장도를 파견하여 항우를 도왔으나, 항우는 도리어 장도를 연왕으로 분봉하고 한광을 요동왕으로 전봉(轉封)했다. 한광이 이를 거부하고 무종(無終)에서 버티자, 복귀한 장도는 한광을 멸망시켜 세력을 합병했다. 초한전쟁에는 중립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으나, 한신이 북상하자 이좌거의 조언을 받아들이면서 한왕 유방을 지지했고, 기원전 202년에 유방을 황제로 추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직후에 반기를 들어서 주살당했다.
  • 한왕(韓王)
    원래 진나라 말기에 한왕으로 추대되었던 인물은 한성(韓成)이었으나, 항우에게 밉보이면서 신변을 구속당하고 정창이 한왕으로 분봉되었다. 한성의 신하였던 장량이 한왕 유방을 도우며 농간을 부렸던 것을 깨달은 항우가 한성을 죽였고, 정창은 기원전 205년에 3진(三秦)이 평정된 직후 멸망했다. 유방은 한성의 조카인 한신을 한왕으로 세웠는데, 이러한 과정 때문에 항우가 한왕으로 분봉한 인물이 한성으로 잘못 알려지고 있다.
    • 정창(鄭昌): 분봉(기원전 206년)
    • 한신(韓信): 옹립(기원전 205년)
      같은 시기 유방의 장수로 활동한 한신과는 동명이인이다. 때문에 본성을 따라 희신(姬信)으로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팽성대전에서 대패하여 항우에게 포로로 잡혔고, 항우가 멸망한 뒤에 재분봉된다.
  • 신양(申陽): 하남왕(河南王) 분봉(기원전 206년)
    기원전 205년에 한왕 유방의 침공을 받아 항복했다.
  • 사마앙(司馬卬): 은왕(殷王) 분봉(기원전 206년)
    기원전 205년에 한왕 유방의 침공을 받아 항복했다.
  • 위표(魏豹): 서위왕(西魏王) 분봉(기원전 206년)
    한왕 유방이 3진(三秦)을 평정하자 한왕을 지지했으나, 팽성대전에서 대패한 뒤에 다시 항우를 지지했다. 결국 기원전 205년에 한신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 영포(英布): 구강왕(九江王) 분봉(기원전 206년)
    경포(黥布)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기원전 204년에 수하(隨何)에게 포섭되어 한왕 유방을 지지했으나, 항우의 공격을 받아 세력을 잃었다. 항우가 몰락하자 회남왕으로 재분봉된다.
  • 오예(吳芮): 형산왕(衡山王) 분봉(기원전 206년)
    기원전 204년에 영포가 항우의 침공을 받았을 때 함께 세력을 잃었다. 항우가 몰락하자 장사왕으로 재분봉된다.

3.1.2. 전한

  • 조왕(趙王)
    원래 항우에게 항산왕으로 분봉되었던 장이가 조헐 진여의 공격을 받아 쫓겨나자, 한왕(漢王)은 장이를 지지하여 한신을 보내 조헐과 진여를 멸망시켰다. 이후 장이를 조왕으로 세웠고, 장이가 죽은 뒤에는 아들 장오가 작위를 세습했다.
  • 영포(英布): 회남왕(淮南王) 복귀(기원전 203년)
    원래 항우에게 구강왕으로 분봉되었으나, 한왕(漢王)을 지지하면서 항우의 침공을 받아 영지를 잃었다. 항우가 물러난 뒤에 회남왕으로 복귀했고, 항우가 멸망한 뒤에는 한왕을 황제로 추대했다. 하지만 이후 모반 의심을 받다가 기원전 195년에 실제로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진압당해 멸망했다.
  • 장사왕(長沙王)
    원래 항우에게 형산왕으로 분봉되었으나, 항우의 침공을 받아 영지를 잃었다. 항우가 멸망한 뒤에 장사왕으로 재분봉되었다. 초한교체기의 다른 왕들과 달리 장사왕들은 책잡힐 일을 하지 않아 작위를 무난하게 이어갔고, 기원전 157년에 적통이 단절될 때까지 45년간 5대가 작위를 계승했다.
    • 문왕(文王) 오예(吳芮): 책봉(기원전 202년)
    • 성왕(成王) 오신(吳臣): 세습(기원전 202년)
    • 애왕(哀王) 오회(吳回): 세습(기원전 194년)
    • 공왕(共王) 오우(吳右): 세습(기원전 187년)
      '오약(吳若)'으로 오기(誤記)되기도 했다.
    • 정왕(靖王) 오저(吳著): 세습(기원전 178년)
      '오산(吳産)' 또는 '오차(吳差)'으로 오기되기도 했다.
  • 팽월(彭越): 양왕(梁王) 책봉(기원전 202년)
    한왕(漢王) 고릉 전투에서 팽월이 협공 약속을 어겨 고전하자, 팽월의 적극적인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양왕으로 책봉했다. 항우가 멸망한 뒤에는 한왕을 황제로 추대했으나, 진희의 반란 때에도 소집 요청에 불응하면서 결국 기원전 196년에 숙청당했다.
  • 한신(韓信): 초왕(楚王) 책봉(기원전 202년)
    고제가 수배한 종리말을 보호해주고 있다가 모반을 의심받아 숙청되어 기원전 201년에 회음후(淮陰侯)로 강봉되었다.
  • 한신(韓信): 한왕(韓王) 책봉(기원전 202년)
    위의 회음후 한신과는 동명이인. 항우가 멸망한 뒤에 다시 한왕으로 복귀했으나, 봉국은 한(韓)나라와는 다소 무관한 태원군(太原郡)이 되어 흉노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흉노를 무력으로 제압할 수는 없어서 빈번하게 사신을 보냈는데, 이를 빌미로 책망을 받자 숙청당할 것을 염려하여 기원전 201년에 흉노로 망명해버렸다.
  • 노관(盧綰): 연왕(燕王) 책봉(기원전 202년)
    고제의 측근으로 장도가 멸망하고 후임으로 책봉되었다. 진희의 난에 연루되어 소환당하자 반란을 일으켰고, 진압당하여 기원전 195년에 흉노로 망명했다. 흉노에서는 노왕(盧王)으로 불렸다고 한다.
  • 진희(秦豨): 대왕(代王) 자칭(기원전 197년)
    조국(趙國)의 상국으로 대국(代國)의 병력까지 통할하여 흉노와의 국경을 맡았으나, 반란을 일으켜 왕을 자칭했다. 기원전 196년에 진압되어 처형당했다.
  • 여왕(呂王)
    혜제가 죽은 뒤에 고황후 여치(呂雉)가 실권을 잡으면서 여씨 일족들이 왕으로 봉작되었다.
    • 선왕(宣王) 여○(呂○): 추봉
      여치의 부친으로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 도무왕(悼武王) 여택(呂澤): 추봉
      여치의 오빠이자 여숙왕 여태의 부친.
    • 숙왕(肅王) 여태(呂台): 책봉(기원전 187년)
    • 여가(呂嘉): 세습(기원전 187년)
      기원전 182년에 행실이 교만하다는 이유로 폐위되었으며, 여태의 동생인 여산에게 작위가 넘어갔다.
    • 여산(呂産): 책봉(기원전 182년) → 양왕(梁王) 전봉(기원전 181년)
      양왕으로 전봉(轉封)되었다. 여치가 죽은 뒤 상국을 겸했으나, 기원전 180년에 주발 진평에게 주살당했다.
    • 유태(劉太): 책봉(기원전 181년) → 제천왕(濟川王) 개봉
      혜제의 아들로 양왕으로 전봉된 여산 대신 여왕 작위를 이었으나, 곧 제천왕으로 개봉(改封)되었다. 기원전 180년에 여씨 일족이 몰락하면서 문제가 옹립되자, 혜제의 아들들도 모두 여씨 일족으로 몰려 주살당했는데, 이로 인해 기록에서는 '여태(呂太)'로 지칭된다.
  • 조왕(趙王)
    여도무왕 여택의 동생인 여석지와 그 아들인 여록에게 책봉된 작위로, 기원전 180년에 여씨 일족이 몰살당하면서 폐지되었다.
    • 소왕(昭王) 여석지(呂釋之): 추봉
    • 여록(呂祿): 책봉(기원전 187년)
  • 장언(張偃): 노왕(魯王) 책봉(기원전 187년)
    조왕(趙王)이었다가 선평후(宣平侯)로 강봉된 장오의 아들로, 장오는 여치의 사위였기에 여치가 정권을 잡자 다시 왕으로 복귀시킨 것이다. 기원전 180년에 여씨 일족이 몰락한 뒤에 남궁후(南宮侯)로 강봉되었다.
  • 회양왕(淮陽王)
    혜제의 아들 유강이 책봉되었으나, 죽은 뒤에 동생 유무가 작위를 이었다. 기원전 180년에 여씨 일족이 몰락하면서 문제가 옹립되자 모두 여씨 일족으로 몰렸고, 이로 인해 이성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 회왕(懷王) 유강(劉強): 책봉(기원전 187년)
    • 유무(劉武): 책봉(기원전 183년)
  • 항산왕(恆山王)
    혜제의 아들 유의가 책봉되었으나, 황제로 즉위하면서 유홍(劉弘)으로 개명하고 동생 유조가 작위를 이었다. 기원전 180년에 여씨 일족이 몰락하면서 문제가 옹립되자 모두 여씨 일족으로 몰렸고, 이로 인해 이성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 유의(劉義): 책봉(기원전 187년)
    • 유조(劉朝): 책봉(기원전 184년)
  • 여통(呂通): 연왕(燕王) 책봉(기원전 181년)
    여왕 여가의 동생. 기원전 180년에 여씨 일족이 몰살당하면서 폐지되었다.

3.1.3. 현한 · 후한

현한과 후한 초기에 책봉된 왕작 가운데 유(劉)씨 황족이더라도 실질적으로 현한 및 후한 정권과 대립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 37년에 광무제는 왕작을 일시 철폐하여 거록부군 계통의 종실만 공(公)으로 봉하면서 그 외는 후(侯)로 강봉했고, 41년에 공으로 낮췄던 황족들만 슬그머니 다시 왕으로 승격시켰다. 따라서 거록부군 계통의 종실이 아닌 경우 편의상 이성왕으로 분류한다.
  • 유수(劉秀): 소왕(蕭王) 책봉(24년)
    경시제에게 소왕으로 책봉되어 장안으로 소환되었으나, 이를 거부하고 자립의 길을 모색했다. 이듬해 6월 황제에 즉위했다.
  • 유지(劉祉): 정도왕(定陶王) 책봉(24년) → 성양왕(城陽王) 전봉(26년)
    경시제에게 정도왕으로 책봉되었으나, 광무제에게 투항한 뒤 성양왕으로 전봉(轉封)되었다. 35년에 적통이 없어 단절되었다.
  • 유사(劉賜): 완왕(宛王) 책봉(24년)
    경시제에게 책봉되었으나, 광무제에게 투항한 뒤 신후(愼侯)로 봉해졌다.
  • 유경(劉慶): 연왕(燕王) 책봉(24년)
    경시제에게 책봉되었으나, 적미군에게 피살당했다.
  • 유흡(劉歙): 원지왕(元氏王) 책봉(24년) → 사수왕(泗水王) 전봉(26년)
    경시제에게 원지왕으로 책봉되었으나, 광무제에게 투항한 뒤 사수왕으로 전봉(轉封)되었다. 34년에 적통이 없어 단절되었다.
  • 유가(劉嘉): 한중왕(漢中王) 책봉(24년)
    경시제에게 책봉되었으나, 공손술과 적미군에게 봉국을 빼앗기고 광무제에게 투항했다. 37년에 순양후(順陽侯)로 봉해졌다.
  • 유신(劉信): 여음왕(汝陰王) 책봉(24년)
    경시제에게 책봉되었으나, 광무제에게 투항한 뒤 여음후로 봉해졌다.
  • 왕광(王匡): 비양왕(比陽王) 책봉(24년)
    녹림군 신시병(新市兵)으로 경시제에게 책봉되었으나, 적미군에게 피살당했다.
  • 왕봉(王鳳): 의성왕(宜城王) 책봉(24년)
    녹림군 신시병으로 경시제에게 책봉되었으나, 적미군에게 피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 장앙(張卬): 회양왕(淮陽王) 책봉(24년)
    녹림군 하강병(下江兵) 또는 신시병으로 경시제에게 책봉되었으나, 적미군에 투항했다.
  • 왕상(王常): 등왕(鄧王) 책봉(24년)
    녹림군 하강병으로 경시제에게 책봉되었으나, 26년에 광무제에게 투항한 뒤 산상후(山桑侯)로 봉해졌다.
  • 요담(廖湛): 양왕(穰王) 책봉(24년)
    녹림군 평림병(平林兵)으로 경시제에게 책봉되었으나, 적미군에 투항했다.
  • 신도건(申屠建): 평지왕(平氏王) 책봉(24년)
    녹림군으로 경시제에게 책봉되었으나, 적미군에 투항했다.
  • 호은(胡殷): 수왕(隨王) 책봉(24년)
    녹림군으로 경시제에게 책봉되었으나, 적미군에 투항했다.
  • 이통(李通): 서평왕(西平王) 책봉(24년)
    녹림군으로 경시제에게 책봉되었으나, 26년에 광무제에게 투항한 뒤 고시후(固始侯)로 봉해졌다.
  • 이일(李軼): 무음왕(舞陰王) 책봉(24년)
    녹림군으로 경시제에게 책봉되었으나, 광무제의 이간계로 피살당했다.
  • 성단(成丹): 양읍왕(襄邑王) 책봉(24년)
    녹림군 하강병으로 경시제에게 책봉되었으나, 적미군에 투항했다.
  • 진목(陳牧): 음평왕(陰平王) 책봉(24년)
    녹림군 평림병으로 경시제에게 책봉되었으나, 적미군에 투항했다.
  • 종조(宗佻): 영음왕(潁陰王) 책봉(24년)
    송조(宋佻)로 표기한 기록도 있다. 녹림군으로 경시제에게 책봉되었으나, 적미군에게 피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 윤존(尹尊): 언왕(郾王) 책봉(24년)
    윤준(尹遵)으로 표기한 기록도 있다. 경시제에게 책봉되었으나, 26년에 광무제에게 투항했다.
  • 주유(朱鮪): 교동왕(膠東王) 책봉(24년)
    녹림군 신시병으로 경시제에게 책봉되었으나, 유씨 이외는 왕에 오를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했다. 이 일로 경시제에게 찍혔고(...), 결국 광무제에게 투항하게 된다.
  • 무순왕(武順王) 유현(劉玄): 장사왕(長沙王) 책봉(25년), 회양왕(淮陽王) 추봉
    녹림군의 지지를 받아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녹림군을 숙청하려 시도했고, 적미군이 장안으로 침공해오자 녹림군은 적미군과 협력해버렸다. 결국 적미군에 항복하여 장사왕으로 봉해졌다가 2개월 만에 암살당했다. 재위 중 연호가 경시(更始)였기에 경시제로 불리고 있다. 이후 광무제가 회양무순왕으로 추봉했는데, 경시제가 회양왕으로 책봉했던 장앙이 장안성을 공략해 경시제를 쫓아낸 주동자였음을 생각하면, 굉장히 기묘한 추증이다.고인능욕
  • 유영(劉永): 양왕(梁王) 책봉(24년)
    경시제에게 양왕으로 책봉되었으나, 경시제의 정권이 혼란에 빠지자 25년에 천자를 자칭했다. 27년에 광무제의 공격을 받던 중 부하에게 피살당했다. 세력은 아들인 유우(劉紆)가 이었으나, 29년에 멸망했다.
    • 유소공(劉少公): 노왕(魯王) 책봉(25년)
      유영의 동생으로 유영에게 책봉되었다. 이듬해 광무제의 공격을 받아 봉국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 장보(張步): 제왕(齊王) 책봉(27년)
      유영이 포섭을 위해 제왕으로 책봉하자 이를 받아들이고 유우를 옹립했으며, 서주와 청주 일대를 장악했다. 29년에 광무제에게 투항하여 안구후(安丘侯)로 봉해졌다.
    • 동헌(董憲): 해서왕(海西王) 책봉(27년)
      유영이 포섭을 위해 해서왕으로 책봉했다. 29년에 유우가 멸망한 뒤, 30년에 부하에게 피살당했다.
  • 유무(劉茂): 회양왕(淮陽王) 책봉(26년), 중산왕(中山王) 책봉(27년)
    녹림군 용릉병(舂陵兵)으로 26년에 유영이 포섭을 목적으로 회양왕으로 책봉했으나, 비슷한 시기에 같은 용릉병 출신인 광무제에게 귀순하여 중산왕으로 책봉되었다. 37년에 단보후(單父侯)로 강봉되었다.
  • 이헌(李憲): 회남왕(淮南王) 자칭(23년)
    여강군 일대에서 활동하던 군벌로, 회남왕을 자칭하다가 27년에 황제를 선포했다. 광무제의 침공을 받아 30년에 멸망했다.
  • 진풍(秦豐): 초려왕(楚黎王) 자칭(24년)
    남양군과 남군 일대에서 활동하던 군벌로, 광무제의 침공을 받아 29년에 멸망했다.
  • 공손술(公孫述): 촉왕(蜀王) 자칭(24년)
    파·촉 지방을 차지하고 촉왕을 자칭하다가 이듬해에 황제를 자칭하고 국호를 ' 성(成)'으로 선포했다. 36년에 광무제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다.
    • 전융(田戎): 주성왕(周成王) 자칭(23년 무렵), 익강왕(翼江王) 책봉(29년)
      남군 일대에서 활동하던 군벌이었으나, 29년에 공손술에게 귀순하여 익강왕으로 책봉되었다. 공손술과 함께 토벌되었다.
    • 연잠(延岑): 무안왕(武安王) 자칭(26년), 여녕왕(汝寧王) 책봉(29년)
      남양군 일대에서 활동하던 군벌이었으나, 29년에 공손술에게 귀순하여 여녕왕으로 책봉되었다. 공손술과 함께 토벌되었다.
    • 삭녕왕(朔寧王)
      농우 지방에서 활동하던 군벌로, 공손술이 책봉한 왕작이다. 광무제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다.
      • 외효(隗囂): 책봉(31년)
      • 외순(隗純): 세습(33년)
  • 노방(盧芳): 서평왕(西平王) 자칭(25년), 대왕(代王) 책봉(40년)
    원래 안정군 일대에서 활동하던 군벌로, 경시제가 몰락하자 삼수현 호족들의 추대를 받아 서평왕을 자칭했다. 이후 흉노와 외교를 구축했고, 흉노는 노방을 통해 한나라를 장악해보려는 구상을 하기도 했다. 이후 팽총이 광무제에게 반기를 들고 흉노를 끌어들이면서, 병주는 순식간에 흉노의 영토가 되었다. 40년에 후한을 침공하였으나, 세가 불리해지자 후한에 투항했다. 광무제는 노방의 영향력을 이용하면 병주를 수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여, 노방을 정식으로 대왕으로 책봉했으나 노방은 42년에 다시 후한에 적대했고, 결국 봉국에서 쫓겨나 흉노로 다시 투항했다.
  • 팽총(彭寵): 연왕(燕王) 자칭(27년)
    어양태수를 지내고 있다가 26년에 후한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흉노를 끌어들이고 연왕을 자칭하며 후한과 대치를 이어갔으나, 29년에 부하들의 배신으로 피살당했다.
  • 송건(宋建): 하수평한왕(河首平漢王) 자칭(184년)
    양주의 난이 일어나자 농서군 부한현 한 곳을 차지해 하수평한왕을 자칭했다. 214년에 한수를 토벌하러 온 하후연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 장순(張純): 안정왕(安定王) 자칭(187년)
    오환족을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켜 장거(張擧)를 천자로 옹립하고 안정왕을 자칭했다. 조정에서 유우를 유주목으로 파견해 오환족을 설득했고, 189년에 세력을 잃은 장거와 장순은 국경을 넘어 선비로 달아났다.
  • 유비(劉備): 한중왕(漢中王) 자칭(219년)
    한중 공방전에서 위왕 조조에게 승리한 유비가 자칭했다. 조비가 선양을 명분으로 즉위하자 헌제를 시해했다고 주장하여, 221년에 제위 계승을 선언했다. 다만 유비는 당시 황실의 직계는 아니어도 황실의 후예로 널리 인정받고 있었고, 유비보다 정통성이 더 높으면서 왕 직위를 받을만큼 명망과 세력이 있는 다른 황족이 없는데다 위에 언급된 조조의 위왕 즉위에 대한 반감이 컸기 때문에 자칭임에도 별다른 반대여론이 없었다.[3]

3.2. 위나라 · 육조시대

  • 손권(孫權): 오왕(吳王) 책봉(221년)
    조비가 손권의 완전한 종속을 위해 책봉하였으나, 손권은 작위만 받고 종속은 거부했다. 결국 222년에 책봉을 취소하였으나, 손권은 오왕 칭호를 229년에 황제를 자칭할 때까지 계속 사용했다.
  • 공손연(公孫淵): 연왕(燕王) 자칭(237년)
    232년에 손권이 연왕 책봉을 제안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손권이 보낸 사신들을 위나라로 압송했다. 236년에 관구검의 침공을 격퇴한 뒤, 완전한 자립을 위해 연왕을 자칭했으나, 사마의에게 토벌되어 멸망했다.
  • 진류왕(陳留王)
    이왕삼각에 따른 구 위나라 황실의 봉작이다. 서진 당시의 진류왕은 조환 이외에는 알려지있지 않으며, 영가의 난 이후에 세워진 동진에서 다시 진류왕을 책봉했다. 이왕삼각의 예우는 유송 때가지 이어졌다.
    • 조환(曹奐): 책봉(265년)
    • 302년~326년 계보 불명
    • 조매(曹勱): 책봉(326년)
    • 조회(曹恢): 세습(363년)
    • 조영탄(曹靈誕): 세습(383년)
    • 조건사(曹虔嗣): 세습(408년)
    • 조건수(曹虔秀): 세습(420년)
    • 조선(曹銑): 세습(462년)
    • 조찬(曹粲): 세습(473년)
  • 사마덕종(司馬德宗): 평고왕(平固王) 책봉(404년)
    환현이 찬탈 이후 안제를 평고왕으로 책봉했으나, 환현이 멸망하면서 황제로 복위했다.
  • 유유(劉裕): 송왕(宋王) 책봉(419년)
    환현을 멸망시킨 장본인이었으나, 동진의 공제를 협박해 418년에 구석을 받아 송공(宋公)으로 봉작된 뒤 왕작으로 셀프승격했다. 이후 선양을 강요하여 황제로 즉위했다.
  • 여음왕(汝陰王)
    이왕삼각에 따른 구 유송 황실의 봉작이다. 유철 이후의 계보는 후경의 난으로 인해 불명확하며, 이왕삼각의 예우는 남진 때가지 이어졌다.
    • 유준(劉準): 책봉(479년)
    • 유윤(劉胤): 세습(479년)
    • 유단(劉端): 세습(515년)
    • 유철(劉哲): 세습(522년)
    • 546년~556년 계보 불명
    • 유예(劉叡): 세습(556년)
  • 후경(侯景): 하남왕(河南王) 책봉(547년) → 한왕(漢王) 개봉(551년)
    원래 낙양 일대를 차지한 동위의 군벌이었으며 권신인 고징과의 불화로 서위에 투항하고자 했으나 거부당하여, 양무제에게 귀순해 하남왕으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동위의 침공을 받아 봉국을 잃었고, 양무제가 후경을 동위로 보내 화친하려 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에 성공하여 간문제를 옹립했고, 그 뒤에 간문제를 폐위해 예장왕을 황제로 세웠다. 551년에 구석을 받아 한왕이 되었으며, 이내 선양을 강요하여 황제로 즉위했다. 하지만 이듬해에 진패선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 소동(蕭棟): 회음왕(淮陰王) 책봉(551년)
    후경의 협박으로 황제에 즉위한 뒤 선양하여 회음왕으로 봉해졌으나, 이듬해 후경이 멸망하면서 예장왕으로 복귀했다.
  • 파릉왕(巴陵王)
    남제의 후예로 양나라 때는 동성 황족으로 취급되었으나, 진나라가 건국되면서 이왕삼각의 특례로 왕작을 이어갔다. 소연 이후의 정확한 계보는 전해지지 않는다. 589년에 진나라가 멸망하면서 폐지되었다.
    • 소연(蕭沇): 세습(556년)
    • 이후 계보 불명
  • 강음왕(江陰王)
    이왕삼각에 따른 구 양나라 황실의 봉작이다. 589년에 진나라가 멸망하면서 폐지되었다.
    • 소방지(蕭方智): 책봉(557년)
    • 소계경(蕭季卿): 세습(558년)
    • 소이(蕭彝): 세습(571년)

3.3. 당나라

수나라 말기 및 무주를 포함한다.
  • 유룡아(劉龍兒): 유왕(劉王) 자칭(614년)
    수나라 말기에 반란을 일으킨 호인(胡人)으로 천자·유왕을 자칭했으나, 이후 관군에 토벌되었다.
    • 유계진(劉季眞): 태자왕(太子王) 자칭 → 팽성군왕(彭城郡王) 책봉(620년)
      유룡아의 아들로 유륙아가 토벌당한 뒤에는 유무주(劉武周)를 의지했는데, 이후 돌궐과 동맹을 맺고 돌리가한(突利可汗)·태자왕을 자칭했다. 620년에 당나라에 투항하여 이(李)씨 성을 사성받고 팽성군왕으로 책봉되었다.
    • 유륙아(劉六兒): 영안왕(永安王) 책봉(614년)척정왕(拓定王) 자칭
      유왕을 자칭한 유륙아에게 영안왕으로 책봉되었다가 이후 유계진이 돌리가한을 자칭하면서 척정왕을 자칭했다.
  • 이자통(李子通): 초왕(楚王) 자칭(615년)
    초왕을 자칭하다가 619년에 황제로 셀프승격하여 국호를 '오(吳)'로 선포했다. 621년에 멸망했다.
  • 주찬(朱粲): 가루라왕(迦樓羅王) 자칭(615년)
    가루라왕을 자칭하다가 618년에 황제로 셀프승격하여 국호를 '초(楚)'로 선포했다. 이후 세력이 와해되자 619년에 당나라에 포섭되어 초왕(楚王)으로 책봉되었는데, 곧 당나라를 배반하여 왕세충에게 귀순했다.
  • 조사걸(操師乞): 원흥왕(元興王) 자칭(616년)
  • 두건덕(竇建德): 장락왕(長樂王) 자칭(617년)
    장락왕을 자칭하다가 618년에 황제로 셀프승격하여 국호를 '하(夏)'로 선포했다. 621년에 멸망했다.
  • 소선(蕭銑): 양왕(梁王) 자칭(617년)
    후량의 황제 소찰의 증손자로 후량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칭왕했다. 621년에 멸망했다.
    • 안평왕(安平王): 양왕 소선이 조부와 부친을 추존한 왕작이다.
      • 충렬왕(忠烈王) 소암(蕭巖)
      • 문헌왕(文憲王) 소선(蕭璿)
  • 설거(薛擧): 서진패왕(西秦覇王) 자칭(617년)
    서진패왕을 자칭하다가 이후 황제로 셀프승격했다. 618년에 멸망했다.
  • 송금강(宋金剛): 송왕(宋王) 책봉(617년)
    황제를 자칭한 유무주가 책봉한 왕작이다.
  • 이연(李淵): 당왕(唐王) 책봉(617년)
    북주 시절부터 당국공(唐國公)을 맡고 있다가 수양제의 폭정에 반기를 들어 장안을 함락하고 공제를 옹립했다. 이때 구석을 받아 당왕으로 봉작되었으며, 이듬해 공제를 협박해 선양을 받아 황제로 즉위했다. 참고로 수나라에서는 이왕삼각의 예우를 왕작으로 하지 않았는데, 당나라 또한 그 관례에 따라서 공제는 휴국공(酅國公)이 되었다.
  • 이궤(李軌): 하서대량왕(河西大涼王) 자칭(617년)
    하서 5군에서 활동한 군벌로 617년 하서대량왕을 자칭했다. 이듬해에 고조가 정식으로 '양왕(涼王)'으로 책봉했으나, 이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을 대량(大涼) 황제로 칭하는 표문을 보내 분노를 일으켰고, 결국 619년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 고개도(高開道): 연왕(燕王) 자칭(618년), 북평군왕(北平郡王) 책봉(620년)
    연왕을 자칭하다가 620년에 당나라에 투항하여 이(李)씨 성을 사성받고 북평군왕으로 책봉되었는데, 이듬해에 당나라를 배반하여 다시 연왕을 자칭했다. 624년에 멸망했다.
  • 두복위(杜伏威): 초왕(楚王) 책봉(618년), 오왕(吳王) 책봉(619년)
    618년 수나라 황제 계승을 자처한 양동(楊侗)이 초왕으로 책봉했지만, 이듬해 당나라에 투항하여 이(李)씨 성을 사성받고 오왕으로 책봉되었다.
  • 나예(羅藝): 연군왕(燕郡王) 책봉(619년)
    619년에 이(李)씨 성을 사성받고 연군왕으로 책봉되었다.
  • 심법흥(沈法興): 양왕(梁王) 자칭(619년)
    수나라 황제 계승을 자처한 양동에게 천문군공(天門郡公)으로 책봉되었는데, 양동이 왕세충에게 피살당하자 이에 반발하여 양왕을 자칭했다. 620년에 멸망했다.
  • 호대은(胡大恩): 정양군왕(定襄郡王) 책봉(621년)
    두건덕의 행대상서령(行臺尙書令)을 지내다가 당나라에 투항했다. 621년에 이(李)씨 성을 사성받고 정양군왕으로 책봉되었다.
  •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 무민왕(武愍王) 가서한(哥舒翰): 서평군왕(西平郡王) 책봉(753년)
  • 오승자(烏承玼): 창화군왕(昌化郡王) 책봉(758년)
    사사명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여 투항하면서 책봉되었다.
  • 혼석지(渾釋之): 영삭군왕(寧朔郡王) 책봉(미상)
  • 이보국(李輔國): 박륙군왕(博陸郡王) 책봉(762년)
  • 학정옥(郝廷玉): 안변군왕(安邊郡王) 책봉(763년)
  • 백효덕(白孝德): 창화군왕(昌化郡王) 책봉(765년)
  • 진리정(陳利貞): 정융군왕(靜戎郡王) 책봉(765년)
  • 이국신(李國臣): 임천군왕(臨川郡王) 책봉(765년)
  • 이사업(李嗣業): 무위군왕(武威郡王) 추봉(765년)
  •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신운경(辛雲京): 금성군왕(金城郡王) 책봉(765년 무렵)
  • 백원광(白元光): 남양군왕(南陽郡王) 책봉(765년 무렵)
  • 신경고(辛京杲): 진창군왕(晉昌郡王) 책봉(762년 이후)
  • 후중장(侯仲莊): 상곡군왕(上谷郡王) 책봉(765년 이후)
  • 남단덕(南單德): 요양군왕(饒陽郡王) 책봉(미상)
  • 성덕절도사(成德節度使) 이보신(李寶臣): 청강군왕(淸江郡王) 책봉(766년 이전)
  • 소의군절도사(昭義軍節度使) 설숭(薛嵩): 고평군왕(高平郡王) 책봉(766년) → 평양군왕(平陽郡王)
    고평군왕에 먼저 책봉되었으나 곧 평양군왕으로 개봉(改封)되었다.
  • 노룡군절도사(盧龍軍節度使) 주차(朱泚): 회녕군왕(懷寧郡王) 책봉(772년)
  • 전승사(田承嗣): 안문군왕(雁門郡王) 책봉(773년)
  • 충무왕(忠武王) 이성(李晟): 합천군왕(合川郡王) 책봉(773년) → 서평군왕(西平郡王) 전봉(786년)
  • 정무왕(貞武王) 장효충(張孝忠): 부양군왕(符陽郡王) 책봉(775년) → 상곡군왕(上谷郡王) 추증
  • 장포린(張抱麟): 무당군왕(武當郡王) 책봉(미상)
  • 이보신(李寶臣): 농서군왕(隴西郡王) 책봉(777년)
  • 충무군절도사(忠武軍節度使) 곡환(曲環): 진창군왕(晉昌郡王) 책봉(779년)
  • 맹섭(孟涉): 무도군왕(武都郡王) 책봉(780년 이전)
  • 혼감(渾瑊): 누번군왕(樓煩郡王) 책봉(미상) → 함녕군왕(咸寧郡王) 전봉(784년)
  • 유해빈(劉海賓): 동평군왕(東平郡王) 책봉(780년)
  • 유광국(劉光國): 오원군왕(五原郡王) 책봉(780년)
  • 유희섬(劉希暹): 교하군왕(交河郡王) 책봉(미상) → 치천군왕(淄川郡王)
    원래 교하군왕에 책봉되었으나, 죽은 시점에는 치천군왕이었다. 책봉 및 전봉(轉封) 시점은 미상.
  • 이유(李洧): 조양군왕(潮陽郡王) 책봉(781년)
  • 이희열(李希烈): 남평군왕(南平郡王) 책봉(781년)건흥왕(建興王) 자칭(782년)
    782년에 덕종이 삭번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치청절도사로 임명했으나, 이희열은 토벌대상인 이납과 동맹을 맺고 건흥왕을 자칭했다. 이후 784년에는 황제를 참칭하고 국호를 '초(楚)'로 선포했는데, 786년에 진압되어 멸망했다.
  • 치청절도사(淄靑節度使) 이납(李納): 제왕(齊王) 자칭(782년) → 농서군왕(隴西郡王) 책봉
    덕종이 삭번정책을 시행하자 제왕을 자칭하며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이후 정식으로 이정기 세력 세습을 승인받으면서 농서군왕에 책봉되었다.
  • 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 전열(田悅): 위왕(魏王) 자칭(782년) → 제양군왕(濟陽郡王) 책봉
    이납이 제왕을 자칭하자 이에 동조하여 위왕을 자칭했다. 이후 정식으로 제양군왕에 책봉되었다.
  • 유계절도사(幽薊節度使) 주도(朱滔): 기왕(冀王) 자칭(782년) → 통의군왕(通義郡王) 책봉
    이납이 제왕을 자칭하자 이에 동조하여 기왕을 자칭했다. 이후 정식으로 제양군왕에 책봉되었다.
  • 성덕절도사(成德節度使) 왕무준(王武俊): 조왕(趙王) 자칭(782년) → 낭야군왕(琅琊郡王) 책봉
    이납이 제왕을 자칭하자 이에 동조하여 조왕을 자칭했다. 이후 정식으로 낭야군왕에 책봉되었다.
  • 이신(伊愼): 남충군왕(南充郡王) 책봉(782년)
  • 하양절도사(河陽節度使) 이봉(李芃): 개양군왕(開陽郡王) 책봉(782년)
  • 강일지(康日知): 유림군왕(楡林郡王) 책봉(782년) → 회계군왕(會稽郡王) 전봉(784년)
  • 두희전(杜希全): 여요군왕(餘姚郡王) 책봉(783년)
  • 이유간(李惟簡): 무안군왕(武安郡王) 책봉(783년)
  • 왕영(王榮): 무위군왕(武威郡王) 책봉(783년)
  • 고고(高固): 발해군왕(渤海郡王) 책봉(783년)
  • 배분(裴玢): 충의군왕(忠義郡王) 책봉(783년)
  • 가은림(賈隱林): 무위군왕(武威郡王) 책봉(783년)
  • 이원량(李元諒): 무강군왕(武康郡王) 책봉(783년)
  • 이원순(李元淳): 기련군왕(祁連郡王) 책봉(783년)
  • 주충량(朱忠亮): 동양군왕(東陽郡王) 책봉(783년)
  • 봉호 미상
    • 양회빈(楊懷賓): 추봉
    • 양조성(楊朝晟): 책봉(783년)
  • 상가고(尙可孤): 풍익군왕(馮翊郡王) 책봉(784년)
  • 이징(李澄): 무위군왕(武威郡王) 책봉(784년)
  • 백량기(柏良器): 평원군왕(平原郡王) 책봉(784년)
  • 왕건휴(王虔休): 동창군왕(同昌郡王) 책봉(784년)
  •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마수(馬燧): 북평군왕(北平郡王) 책봉(784년)
  • 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 안문군왕(雁門郡王)
    • 전서(田緒): 상산군왕(常山郡王) 책봉(785년) → 안문군왕
    • 전계안(田季安): 세습(796년)
  • 성덕절도사(成德節度使) 왕사진(王士眞): 청하군왕(淸河郡王) 책봉(785년)
  • 부린(符璘): 의양군왕(義陽郡王) 책봉(785년)
  • 노룡절도사(盧龍節度使) 유제(劉濟): 팽성군왕(彭城郡王) 책봉(미상)
  • 장무소(張茂昭): 연덕군왕(延德郡王) 책봉(791년)
  • 서천절도사(西川節度使) 위고(韋皋): 남강군왕(南康郡王) 책봉(801년)
  • 노응(路應): 양양군왕(襄陽郡王) 책봉(805년)
  • 신채절도사(申蔡節度使) 오소성(吳少誠): 복양군왕(濮陽郡王) 책봉(805년)
  • 왕사청(王士淸): 북해군왕(北海郡王) 책봉(806년)
  • 고하우(高霞寓): 감의군왕(感義郡王) 책봉(806년)
  • 장자량(張子良): 남양군왕(南陽郡王) 책봉(807년)
  • 고숭문(高崇文): 남평군왕(南平郡王) 책봉(808년)
  • 진초(陳楚): 보녕군왕(普寧郡王) 책봉(810년)
  • 조화(曹華): 진류군왕(陳留郡王) 책봉(817년)
  • 학자(郝玼): 보정군왕(保定郡王) 책봉(818년)
  • 영무군절도사(靈武軍節度使) 이광진(李光進): 무위군왕(武威郡王) 책봉(813년)
  • 의성군절도사(義成軍節度使) 유오(劉悟): 팽성군왕(彭城郡王) 책봉(819년)
  • 이재의(李載義): 무위군왕(武威郡王) 책봉(826년)
  • 주여(周璵): 난릉군왕(蘭陵郡王) 책봉(827년)
  • 장중무(張仲武): 난릉군왕(蘭陵郡王) 책봉(841년)
  • 성덕절도사(成德節度使) 상산군왕(常山郡王)
    • 충목왕(忠穆王) 왕경숭(王景崇): 책봉(878년)
    • 왕용(王鎔): 세습(883년)
  • 진해군절도사(鎭海軍節度使) 주보(周寶): 여남군왕(汝南郡王) 책봉(881년)
  • 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 한간(韓簡): 위군왕(魏郡王) 책봉(882년) → 창려군왕(昌黎郡王)
    위군왕에 먼저 책봉되었으나 곧 창려군왕으로 개봉(改封)되었다.
  • 서천절도사(西川節度使) 진경선(陳敬瑄): 영천군왕(潁川郡王) 책봉(883년)
  • 무녕군절도사(武寧軍節度使) 시부(時溥): 거록군왕(鉅鹿郡王) 책봉(884년)
  • 안문절도사(雁門節度使) 이극용(李克用): 농서군왕(隴西郡王) 책봉(884년) → 진왕(晉王) 승작(896년)
    황소 토벌의 공적을 인정받아 농서군왕으로 책봉되었다가, 이후 진왕으로 승작했다.
  • 호국군절도사(護國軍節度使) 낭야군왕(琅琊郡王)
    • 왕중영(王重榮): 책봉(885년)
    • 왕중영(王重盈): 책봉(891년)
  • 위승군절도사(威勝軍節度使) 동창(董昌): 농서군왕(隴西郡王) 책봉(886년)
  • 정난절도사(靜難節度使) 왕행유(王行瑜): 북평군왕(北平郡王) 책봉(미상)
  • 주전충(朱全忠): 패군왕(沛郡王) 책봉(886년) → 오흥군왕(吳興郡王) → 동평군왕(東平郡王) 전봉(889년) 양왕(梁王) 승작(903년)
    초명은 주온(朱溫)으로, 877년에 황소의 난에 가담했으나, 882년에 당 조정에 투항하면서 '전충'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886년에 패군왕으로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에 오흥군왕으로 개봉(改封)되었고, 이후 동평군왕으로 전봉(轉封)되었다. 901년에 환관들에게 폐위된 소종을 다시 복위시키면서 조정을 장악했는데, 이 당시의 공으로 양왕으로 승작했다. 이후 선양을 획책하여 904년에는 소종을 시해하면서 애제를 옹립했고, 907년에 애제를 협박해 선양을 받아 황제로 즉위했다.
  • 봉상절도사(鳳翔節度使) 이무정(李茂貞): 농서군왕(隴西郡王) 책봉(890년) → 기왕(岐王) 승작(901년)
    소종을 복위시킨 주전충의 안배로 기왕으로 승작했다.
  • 진해절도사(鎭海節度使) 전류(錢鏐): 팽성군왕(彭城郡王) 책봉(895년) → 월왕(越王) 승작(901년) → 오왕(吳王) 전봉(904년)
    소종을 복위시킨 주전충의 안배로 월왕으로 승작했고, 이후 오왕으로 개봉(改封)되었다.
  •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 양행밀(楊行密): 홍농군왕(弘農郡王) 책봉(895년) → 오왕(吳王) 승작(901년)
      소종을 복위시킨 주전충의 안배로 오왕으로 승작했다.
    • 양악(楊渥): 책봉(905년)
      양행밀의 세력을 승계하였으나 다시 홍농군왕으로 책봉되자, 이후 오왕 전류를 무시하고 오왕(吳王)을 자칭했다.
  • 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 장사군왕(長沙郡王)
    • 나홍신(羅弘信): 임청군왕(臨淸郡王) 책봉(898년) → 장사군왕 → 북평군왕(北平郡王) 추증
      임청군왕에 먼저에 책봉되었으나 곧 장사군왕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죽은 뒤에 북평군왕으로 추증되었다.
    • 나소위(羅紹威): 장사군왕 세습(898년) → 업왕(鄴王) 승작(904년)
  • 영평절도사(永平節度使) 왕건(王建): 낭야군왕(琅琊郡王) 책봉(900년) → 서평군왕(西平郡王) 전봉(901년) → 촉왕(蜀王) 승작(903년)
    소종을 복위시킨 주전충의 안배로 서평군왕으로 전봉(轉封)되었고, 903년에 촉왕으로 승작했다. 주전충이 황제로 즉위하자 이에 반발하여 황제를 자칭했다.
  • 무정군절도사(武貞軍節度使) 뇌만(雷滿): 풍익군왕(馮翊郡王) 책봉(900년)
  • 위무군절도사(威武軍節度使) 왕심지(王審知): 낭야군왕(琅琊郡王) 책봉(904년)
    주전충이 황제로 즉위하자 이를 승인했으며, 909년에 민왕(閩王)으로 승작했다.
  • 의무군절도사(義武軍節度使) 왕처직(王處直): 태원군왕(太原郡王) 책봉(904년)
    주전충이 황제로 즉위하자 이를 승인했으며, 909년에 북평왕(北平王)으로 승작했다. 921년에 양자 왕욱(王郁)에게 찬탈당했다.
  • 경원절도사(涇原節度使) 풍하청(馮河淸): 안정군왕(安定郡王) 책봉(783년)
  • 무창군절도사(武昌軍節度使) 두홍(杜洪): 서평군왕(西平郡王) 책봉(904년)
  • 사도덕(史道德): 회택군왕(懷澤郡王) 책봉(미상)
    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 사헌성의 조부.
  • 사주락(史周洛): 북해군왕(北海郡王) 책봉(미상)
    위박절도사 사헌성의 부친.
  • 왕항(王伉): 낭야군왕(瑯琊郡王) 책봉(미상)
  • 이포(李包): 화정군왕(和政郡王) 책봉(미상)
  • 왕광보(王光輔): 보안군왕(普安郡王) 책봉(미상)
  • 이광요(李光耀): 낙안군왕(樂安郡王) 책봉(미상)

3.4. 오대십국시대

  • 진왕(晉王)
    • 이극용(李克用): 승작(896년)
      당나라 말기 안문절도사(雁門節度使)로 농서군왕(隴西郡王)에 책봉되었다가 황소를 토벌한 공으로 진왕으로 승작했다.
    • 이존욱(李存勖): 세습(908년)
      923년에 황제로 즉위하여 국호를 ' 당(唐)'으로 선포했다. 같은 해에 후량을 멸망시켰다.
  • 오왕(吳王): 905년~920년
    남오 문서 참조. 920년에 황제를 자칭했으나 937년에 멸망했다.
    • 동해군왕(東海郡王)
      • 충무왕(忠武王) 서온(徐溫): 동해군왕 책봉(919년) → 제왕(齊王) 추증
        남오의 권신으로 선양을 획책하며 왕작을 받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양자 서지고(徐知誥)가 제왕으로 책봉되면서 함께 추증되었다.
      • 강왕(康王) 서지순(徐知詢): 동해군왕 책봉(931년)
        서온의 친아들로 섭정 지위 승계를 노렸으나 서지고가 섭정 지위 승계를 확정지으면서 실각했다. 이후 동해군왕으로 책봉되었다.
    • 서지고(徐知誥): 제왕(齊王) 책봉(935년)
      남오의 권신으로 황제 양부를 협박해 구석을 받아 제왕으로 봉작되었으며, 937년에 선양을 통해 황제가 되었다. 이후 939년에 당나라의 후예를 자칭하며 국호를 ' 당(唐)'으로 변경하고 성 또한 이(李)로 변경했다. 이로 인해 기존에 왕작에 책봉된 의붓형제들이 졸지에 이성왕이 되어 개봉(改封)되었다.
      • 서지증(徐知證): 위왕(魏王) 개봉(939년)
        937년에 제왕 서지고가 황제를 자칭하면서 강왕(江王)으로 책봉되었다가 위왕으로 개봉되었다.
      • 회왕(懷王) 서지악(徐知諤): 양왕(梁王) 개봉(939년)
        937년에 제왕 서지고가 황제를 자칭하면서 요왕(饒王)으로 책봉되었다가 양왕으로 개봉되었다.
  • 오월왕(吳越王): 904년~978년
    오월 문서 참조.
  • 왕용(王鎔): 조왕(趙王) 승작(907년) → 북평왕(北平王)
    주전충이 성덕절도사(成德節度使)·상산군왕(常山郡王)이었던 왕용을 승작시켰다. 묘지명에는 북평왕으로 지칭되어 있어, 어느 시점부터 평왕 작위로 승격된 것으로 보인다.
  • 초왕(楚王): 907년~951년
    마초 문서 참조.
  • 충경왕(忠敬王) 풍행습(馮行襲): 장락군왕(長樂郡王) 책봉(907년)
  • 민왕(閩王): 909년~933년
    민나라 문서 참조. 933년에 황제를 자칭했으나 945년에 멸망했다.
    • 공의왕(恭懿王) 왕연정(王延政): 파양왕(鄱陽王) 책봉(945년) → 광산왕(光山王) 전봉(951년) → 복왕(福王) 추증
      남당이 민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마지막 군주 왕연정에게 왕작을 책봉했고, 죽은 뒤에 '공의'라는 시호를 받았다.
  • 남평왕(南平王): 909년~917년
    남한 문서 참조. 911년부터 남해왕(南海王)으로 개봉(改封)되었다. 917년에 황제를 자칭했으나 971년에 멸망했다.
  • 한손(韓遜): 영천군왕(潁川郡王) 책봉(909년)
    당나라 말기의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로 주전충의 즉위를 승인했다. 이후 기왕 이무정을 막은 공로로 영천군왕으로 책봉되었다.
  • 북평왕(北平王): 904년~921년
    당나라 말기의 의무군절도사(義武軍節度使)·태원군왕(太原郡王)으로, 909년에 북평왕으로 승작했다. 921년에 왕처직의 양자 왕욱(王郁)이 찬탈하여 위왕을 자칭했으나, 929년에 후량의 침공을 받고 멸망했다.
    • 왕처직(王處直)
    • 왕욱(王郁): 위왕(魏王) 자칭(921년)
  • 진왕(秦王)
    924년에 기왕 이무정이 후당에 칭신하면서 진왕으로 책봉되었다. 946년에 단절되었다.
  • 남평왕(南平王): 925년~963년
    남평 문서 참조. 형남절도사(荊南節度使) 고계흥은 925년부터 남평왕으로 책봉되었으나, 927년에 후당의 침공을 받자 남오로 귀순하여 '진왕(秦王)'으로 책봉되었다. 929년에 고계흥이 죽은 뒤 세력을 계승한 고종회가 다시 후당에 칭신하면서 남평왕으로 책봉되었으며, 고계흥은 '초왕(楚王)'으로 추봉되었다.
  • 촉왕(蜀王): 933년~934년
    후촉 문서 참조. 934년에 황제를 자칭했으나 965년에 멸망했다.
  • 유종효(留從效): 진강왕(晉江王) 책봉(950년 이후)
    민나라의 군벌이었으나, 이후 남당에 칭신하여 950년에 악국공(鄂國公)으로 책봉되었다. 진강왕으로 승작된 시점은 불분명하다.

3.5. 송나라

  • 충선왕(忠宣王) 부언경(符彦卿): 회양왕(淮陽王) 책봉(950년) → 위왕(衛王) → 위왕(魏王)
    후한 은제가 친정을 실시하고자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에 반발한 곽위가 거병했는데, 이에 은제는 곽위의 일가족을 몰살하고 곽위를 진압하려 했다. 이 때 부언경은 곽위 진압을 거부했고, 곽위가 황제에 즉위하여 후주를 세우자 그 보답으로 회양왕에 책봉되었다. 953년에 위왕(衛王), 이듬해에 위왕(魏王)으로 승진했다. 960년에 송나라가 건국된 뒤에도 작위는 그대로 이어졌으며, 죽은 뒤에는 사위인 조광의가 즉위하여 국구가 되기도 했다.
  • 공황제(恭皇帝) 시종훈(柴宗訓): 정왕(鄭王) 책봉(960년)
    후주의 마지막 황제로 선양 후에 정왕으로 예우받다가 973년에 죽은 뒤 황제의 예로 장례가 치러졌다. 후사를 남기지 못했기에 정왕 작위는 단절되었으나, 1059년부터 구 후주 황실의 방계 후손을 숭의공(崇義公)으로 봉작했다.
  • 충의왕(忠懿王) 전홍숙(錢弘俶): 회해왕(淮海王) 책봉(978년) → 한남왕(漢南王) → 남양왕(南陽王) → 허왕(許王) → 등왕(鄧王) → 진왕(秦王) 추봉
    • 전유준(錢惟濬): 빈안희왕(邠安僖王) 추봉
    • 전유치(錢惟治): 팽성군왕(彭城郡王) 추봉
    • 전경진(錢景臻): 덕양군왕(德陽郡王) 추봉
    • 전면(錢愐): 함녕군왕(咸寧郡王) 추봉
  • 충순왕(忠順王) 진홍진(陳洪進): 남강군왕(南康郡王) 또는 동해군왕(東海郡王) 추봉
    《단명집(端明集)》에는 남강군왕, 《낙전집(樂全集)》에는 동해군왕으로 나온다.
  • 주행봉(周行逢): 여남군왕(汝南郡王) 추봉
  • 동전(董氈): 무위군왕(武威郡王)
    • 조회덕(趙懷德): 안화군왕(安化郡王)
    • 조회은(趙懷恩): 농우군왕(隴右郡王)
  • 선의왕(宣懿王) 위인포(魏仁浦): 진왕(晉王) 또는 진왕(秦王) 추봉
    《송회요집고(宋會要輯稿)》에는 진왕(晉王) → 제왕(齊王), 《낙전집(樂全集)》에는 진왕(秦王)으로 나온다.
  • 충헌왕(忠獻王) 조보(趙普): 진정군왕(定眞郡王) 추봉 → 한왕(韓王)
  • 이계훈(李繼勛): 농서군왕(隴西郡王) 추봉
  • 모용연쇠(慕容延釗): 하남군왕(河南郡王) 추봉
  • 무열왕(武烈王) 석수신(石守信): 무위군왕(武威郡王) 추봉 → 진왕(陳王) 또는 진왕(秦王) 추증
  • 원정왕(元靖王) 왕경(王景): 태원군왕(太原郡王) 책봉(960년) → 기왕(岐王) 추증
  • 문정왕(文正王) 정거중(鄭居中): 화원군왕(華原郡王) 추봉
  • 충회왕(忠懷王) 채확(蔡確): 청원군왕(淸源郡王) 추봉
  • 정헌왕(正獻王) 하집중(何執中): 청원군왕(淸源郡王) 추봉
  • 충장왕(忠壯王) 왕품(王稟): 안화군왕(安化郡王) 추봉
  • 충렬왕(忠烈王) 장준(張俊): 청하군왕(淸河郡王) 책봉(1142년) → 순왕(循王) 추증 → 노왕(魯王)
  • 충무왕(忠武王) 한세충(韓世忠): 함안군왕(咸安郡王) 책봉(1143년) → 통의군왕(通義郡王) 추증 → 기왕(蘄王)
    원래 시호는 무목(武穆).
  • 무안왕(武安王) 오개(吳玠): 부왕(涪王) 추봉
  • 무공왕(武恭王) 양존중(楊存中): 동안군왕(同安郡王) 책봉(1161년) → 기춘군왕(蘄春郡王) 추증 → 화왕(和王)
  • 무순왕(武順王) 오린(吳璘): 신안군왕(新安郡王) 책봉(1162년) → 신왕(信王) 추증
  • 유한왕(謬狠王) 진회(秦檜): 건강군왕(建康郡王) 책봉(1155년) → 신왕(申王) 추증 → 추탈 → 복권
    원래 시호는 충헌(忠獻). 왕작 추탈과 함께 유추(謬醜)로 변경되었다가 복권되면서 다시 충헌이 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유한으로 변경되었다.
  • 회계군왕(會稽郡王)
  • 이단(李璮): 제군왕(齊郡王) 책봉(1262년)
    원나라의 강회대도독(江淮大都督)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남송이 그를 포섭하기 위해 책봉했다. 같은 해에 진압되어 멸망했다.
  • 선조 정후 소헌태후 외척
    • 공혜왕(恭惠王) 두심진(杜審進): 경조군왕(京兆郡王) 추봉
  • 진종 계후 장헌황후 외척: 팽성군왕(彭城郡王) → 정왕(鄭王) → 위왕(魏王)
    • 유유악(劉維岳): 추봉
    • 유연경(劉延慶): 추봉
    • 무의왕(武懿王) 유통(劉通): 추봉
    • 유미(劉美)
  • 진종 서후 장의황후 외척
    • 이인덕(李仁德): 경조군왕(京兆郡王) 추봉 → 한동군왕(漢東郡王)
    • 공희왕(恭僖王) 이용화(李用和): 농서군왕(隴西郡王) 추봉 → 안정군왕(安定郡王) → 양양군왕(襄陽郡王)
  • 인종 정후 자성황후 외척
    • 조운(曹芸): 등왕(鄧王) 추봉 → 진왕(陳王) → 오왕(吳王) → 제왕(齊王) → 하왕(夏王) → 위왕(魏王)
    • 무혜왕(武惠王) 조빈(曹彬): 제양군왕(濟陽郡王) 추봉 → 기왕(冀王) → 노왕(魯王) → 당왕(唐王) → 상왕(商王) → 한왕(漢王) → 하왕(夏王) → 주왕(周王)
    • 안희왕(安僖王) 조기(曹玘): 동해군왕(東海郡王) 책봉 → 한왕(韓王) 추증 → 월왕(越王) → 위왕(魏王) → 연왕(燕王) → 오왕(吳王) → 진왕(秦王)
    • 조일(曹佾): 제양군왕(濟陽郡王) 책봉 → 기왕(沂王) 추증
  • 인종 서후 온성황후 외척
    • 경사왕(景思王) 장요봉(張堯封): 청하군왕(淸河郡王) 추봉
  • 인종 후궁 소숙귀비 외척
    • 주정(周鼎): 은평군왕(恩平郡王) 추봉
  • 영종 정후 선인황후 외척
    • 무열왕(武烈王) 고경(高瓊): 대녕군왕(大寧郡王) 추봉 → 숭왕(崇王) → 위왕(衛王) → 노왕(魯王) → 기왕(冀王) → 한왕(漢王) → 위왕(魏王) → 오왕(吳王) → 한왕(韓王)
    • 목무왕(穆武王) 고계훈(高繼勛): 강왕(康王) 추봉 → 허왕(許王) → 월왕(越王) → 예왕(豫王) → 초왕(楚王) → 연왕(兗王) → 진왕(秦王)
    • 고준보(高遵甫): 무공군왕(武功郡王) 추봉 → 위왕(衛王) → 노왕(魯王) → 연왕(兗王) → 당왕(唐王) → 주왕(周王) → 진왕(陳王) → 초왕(楚王)
    • 고사림(高士林): 보안군왕(普安郡王) 추봉
    • 회희왕(懷僖王) 고공기(高公紀): 신흥군왕(新興郡王) 추봉
    • 고공회(高公繪): 함녕군왕(咸寧郡王) 추봉
    • 고사손(高士遜): 무안군왕(武安郡王) 추봉
  • 신종 정후 흠성황후 외척
    • 상이손(向貽孫): 강왕(康王) 추봉
    • 상재(向載): 덕왕(德王) 추봉
    • 상우(向瑀): 서왕(徐王) 추봉
    • 문간왕(文簡王) 상민중(向敏中): 문안군왕(文安郡王) 추봉 → 연왕(燕王) → 신왕(申王) → 정왕(定王) → 진왕(秦王) → 위왕(魏王) → 한왕(韓王) → 연왕(燕王) → 초왕(楚王)
    • 초왕(楚王) 상전량(向傳亮): 영왕(榮王) 추봉 → 위왕(衛王) → 연왕(燕王) → 노왕(魯王) → 당왕(唐王) → 형왕(荊王) → 초왕(楚王)
    • 강의왕(康懿王) 상경(向經): 하간군왕(河間郡王) 추봉 → 익왕(益王) → 주왕(周王) → 진왕(秦王) → 기왕(冀王) → 진왕(陳王) → 오왕(吳王) → 월왕(越王) → 노왕(魯王) → 위왕(魏王)
    • 영종왕(榮縱王) 상종회(向宗回): 영양군왕(永陽郡王) 책봉 → 영해군왕(寧海郡王) → 안강군왕(安康郡王) → 한동군왕(漢東郡王)
    • 상종량(向宗良): 영가군왕(永嘉郡王) 책봉
  • 철종 정후 소자황후 외척
    • 맹원(孟元): 위왕(魏王) 추봉
    • 맹수(孟隨): 진왕(秦王) 추봉 → 위왕(魏王)
    • 맹재(孟在): 기왕(岐王) 추봉 → 한왕(韓王)
    • 맹언필(孟彦弼): 함녕군왕(咸寧郡王) 추봉 → 예장군왕(豫章郡王) → 오흥군왕(吳興郡王)
    • 충헌왕(忠獻王) 맹충후(孟忠厚): 신안군왕(信安郡王) 책봉
  • 휘종 정후 현숙황후 외척
    • 희정왕(僖靖王) 정신(鄭紳): 낙평군왕(樂平郡王) 책봉
  • 휘종 계후 현인황후 외척
    • 위순신(韋舜臣): 혜왕(惠王) 추봉 → 광왕(廣王) → 서왕(徐王) → 한왕(韓王) → 기왕(冀王) → 오왕(吳王) → 초왕(楚王)
    • 위자화(韋子華): 신평군왕(新平郡王) 추봉 → 안강군왕(安康郡王) → 덕왕(德王) → 복왕(福王) → 양왕(揚王) → 초왕(楚王) → 주왕(周王) → 노왕(魯王) → 형왕(荊王)
    • 위안례(韋安禮): 보안군왕(普安郡王) 추봉 → 간왕(簡王) → 예왕(豫王) → 노왕(魯王) → 연왕(兗王) → 위왕(魏王) → 진왕(陳王) → 월왕(越王) → 옹왕(雍王) → 위왕(魏王) → 한왕(韓王)
    • 위연(韋淵): 평락군왕(平樂郡王) 책봉
  • 고종 정후 헌절황후 외척
    • 형회민(邢懷敏): 기왕(祁王) 추봉
    • 형윤적(邢允迪): 공왕(恭王) 추봉
    • 형종현(邢宗賢): 공왕(恭王) 추봉
    • 형환(邢煥): 안왕(安王) 추봉
  • 고종 계후 헌성황후 외척
    • 오문계(吳文誡): 공왕(恭王) 추봉 → 경왕(慶王) → 오왕(吳王) → 진왕(秦王)
    • 오종형(吳從亨): 화왕(和王) 추봉 → 화왕(華王) → 오왕(吳王) → 진왕(秦王)
    • 선정왕(宣靖王) 오근(吳近): 영왕(榮王) 추봉 → 대왕(代王) → 오왕(吳王) → 진왕(秦王)
    • 장간왕(莊簡王) 오익(吳益): 대녕군왕(大寧郡王) 책봉 → 순왕(順王) 추증 → 위왕(衛王) → 오왕(吳王) → 진왕(秦王)
    • 오개(吳蓋): 신흥군왕(新興郡王) 책봉 → 영왕(永王) 추증 → 정왕(鄭王) → 형왕(荊王) → 위왕(魏王)
  • 효종 계후 성숙황후 외척
    • 사충정(謝忠正): 영왕(永王) 추봉 → 정왕(鄭王) → 진왕(秦王) → 한왕(漢王) → 당왕(唐王)
    • 사경조(謝慶祖): 화왕(和王) 추봉 → 수왕(隨王) → 제왕(齊王) → 주왕(周王) → 연왕(燕王)
    • 사녕(謝寧): 혜왕(惠王) 추봉 → 위왕(衛王) → 오왕(吳王) → 진왕(陳王) → 기왕(冀王)
  • 효종 서후 성목황후 외척
    • 곽함(郭瑊): 영왕(榮王) 추봉
    • 곽사우(郭師禹): 영녕군왕(永寧郡王) 책봉 → 광릉군왕(廣陵郡王)
  • 광종 정후 자의황후 외척
    • 이태(李泰): 영왕(永王) 추봉 → 위왕(衛王)
    • 이능(李能): 신왕(信王) 추봉 → 정왕(鄭王)
    • 충의왕(忠毅王) 이도(李道): 화왕(和王) 추봉 → 복왕(福王) → 초왕(楚王)
  • 영종 정후 공숙황후 외척
    • 원목왕(元穆王) 한초주(韓肖胄): 진왕(陳王) 추봉 → 제왕(齊王)
    • 기왕(冀王) 한협(韓協): 추봉
    • 한탁주(韓侂冑): 평원군왕(平原郡王) 책봉 → 추탈
  • 영종 정후 공성황후 외척
    • 양순원(楊舜元): 기왕(祁王) 추봉 → 위왕(魏王) → 등왕(鄧王) → 한왕(漢王)
    • 양전(楊全): 영왕(永王) 추봉 → 정왕(鄭王) → 위왕(魏王) → 한왕(漢王)
    • 양점(楊漸): 안왕(安王) 추봉 → 경왕(慶王) → 진왕(秦王) → 한왕(漢王)
    • 혜절왕(惠節王) 양차산(楊次山): 영양군왕(永陽郡王) 책봉 → 회계군왕(會稽郡王) → 기왕(冀王) 추증
    • 충헌왕(忠憲王) 왕양석(王楊石): 영녕군왕(永寧郡王) 책봉 → 위군왕(魏郡王)
    • 민숙왕(敏肅王) 왕양곡(王楊谷): 영녕군왕(永寧郡王) 책봉 → 오군왕(吳郡王)
  • 이종 정후 수화태후 외척
    • 사경지(謝景之): 노왕(魯王) 추봉
    • 혜정왕(惠正王) 사심보(謝深甫): 신왕(信王) 추봉 → 위왕(衛王) → 노왕(魯王)
    • 공간왕(恭簡王) 사거백(謝渠伯): 위왕(衛王) 추봉
    • 장헌왕(莊憲王) 사혁창(謝奕昌): 임해군왕(臨海郡王) 책봉 → 위왕(魏王)

3.6. 명나라

  • 명옥진(明玉珍): 농촉왕(隴蜀王) 자칭(1360년)
    서수휘가 세운 천완(天完)에서 활동하던 군벌이었으나, 진우량이 정변을 일으켜 세력의 주도권을 잡고 이내 서수휘를 죽여서 황제로 즉위하자, 이에 반발하여 농촉왕을 자처하며 독립했다. 1362년에 황제를 자칭하여 하(夏)를 국호로 내세웠으나, 아들 명승(明昇)이 계승한 뒤인 1371년에 명나라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다.
  • 장사성(張士誠): 성왕(誠王) 자칭(1353년), 오왕(吳王) 자칭(1363년)
    원나라 말기인 1353년에 반란을 일으켜 성왕을 자칭했으나, 1357년에 원에 투항하여 태위가 되었다. 1363년에 원나라 조정에 왕작 책봉을 요구했으나 반응이 없자 오왕을 자칭하며 독립했으나, 주원장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 홍무제의 4대 국구 추증 봉작(이름 미상)
    • 대왕(大王): 의조의 환황후(桓皇后) 후(侯)씨의 부친
    • 고왕(高王): 희조의 유황후(裕皇后) 왕(王)씨의 부친
    • 양왕(揚王): 인조의 순황후 진(陳)씨의 부친
    • 서왕(徐王): 홍무제의 효자고황후 마(馬)씨의 생부
  • 진우인(陳友仁): 강산왕(康山王) 추봉(1363년)
  • 충무왕(忠武王) 상우춘(常遇春): 개평왕(開平王) 추봉
    생전 작위는 악국공(鄂國公)으로 1369년에 추봉되었다. 선조 3대와 함께 추봉되었으나, 가계를 알 수 없다.
  • 무녕왕(武寧王) 서달(徐達): 중산왕(中山王) 추봉
    생전 작위는 위국공(魏國公)으로 1385년에 추봉되었다. 선조 3대와 함께 추봉되었으나, 가계를 알 수 없다.
  • 무순왕(武順王) 등유(鄧愈): 영하왕(寧河王) 추봉
    생전 작위는 위국공(衛國公)으로 1378년에 추봉되었다.
  • 공헌왕(恭獻王) 이정(李貞): 농서왕(隴西王) 추봉
    생전 작위는 조국공(曹國公)으로 1379년에 추봉되었다.
  • 무정왕(武靖王) 이문충(李文忠): 기양왕(岐陽王) 추봉
    농서공헌왕 이정의 아들. 생전 작위는 조국공(曹國公)으로 1384년에 추봉되었다.
  • 검녕왕(黔寧王)
    • 단목고(端木高)
    • 목증(沐曾)
    • 목초(沐超)
    • 소정왕(昭靖王) 목영(沐英)
      생전 작위는 서평후(西平侯)으로 1392년에 추봉되었다.[4]
  • 양무왕(襄武王) 탕화(湯和): 동구왕(東甌王) 추봉
    생전 작위는 신국공(信國公)으로 1395년에 추봉되었다.
  • 동평왕(東平王)
    • 주량(朱亮)
    • 무열왕(武烈王) 주능(朱能)
      생전 작위는 성국공(成國公)으로 1406년에 추봉되었다. 선조 3대와 함께 추봉되었으나, 부친 주량 이전의 가계를 알 수 없다.
  • 금충(金忠): 충용왕(忠勇王) 책봉(1423년)
    몽골 왕자 출신으로 명나라에서 유일하게 생전에 봉작된 이성왕이며, 원래 이름은 에센토곤(也先土干)이었다. 작위는 세습되지 않았다.
  • 충무왕(忠武王) 장옥(張玉): 하간왕(河間王) 추봉
    생전 작위는 영국공(榮國公)으로 1425년에 추봉되었다. 선조 3대와 함께 추봉되었으나, 가계를 알 수 없다.
  • 충경왕(忠敬王) 목성(沐晟): 정원왕(定遠王) 추봉
    검녕소정왕 목영의 손자. 생전 작위는 검국공(黔國公)으로 1439년에 추봉되었다.
  • 충렬왕(忠烈王) 장보(張輔): 정흥왕(定興王) 추봉
    하간충무왕 장옥의 아들. 생전 작위는 영국공(榮國公)으로 1449년에 추봉되었다.
  • 무민왕(武愍王) 주용(朱勇): 평음왕(平陰王) 추봉
    동평무열왕 주능의 아들. 생전 작위는 성국공(成國公)으로 추봉되었다.
  • 무의왕(武毅王) 주영(朱永): 선평왕(宣平王) 추봉
    생전 작위는 보국공(保國公)으로 1496년에 추봉되었다.
  • 공정왕(恭靖王) 장무(張懋): 영양왕(寧陽王) 추봉
    정흥충렬왕 장보의 아들. 생전 작위는 영국공(榮國公)으로 1515년에 추봉되었다.
  • 공정왕(恭靖王) 주희충(朱希忠): 정양왕(定襄王) 추봉
    평음무민왕 주용의 아들. 생전 작위는 성국공(成國公)으로 1583년에 추봉되었다.

3.6.1. 남명

  • 무장왕(武壯王) 풍승(馮勝): 영릉왕(寧陵王) 추봉
    생전 작위는 송국공(宋國公)으로 1644년에 추봉되었다.
  • 무정왕(武靖王) 부우덕(傅友德): 여강왕(麗江王) 추봉
    생전 작위는 영국공(潁國公)으로 1644년에 추봉되었다.
  • 구복(丘福): 서성왕(舒城王) 추봉
    생전 작위는 기국공(淇國公)으로 사후 추탈되어었으나, 1644년에 복권되고 추봉되었다.
  • 주순신(朱純臣): 서성왕(舒城王) 추봉
    생전 작위는 성국공(成國公)으로 1644년에 추봉되었다.
  • 황득공(黃得功): 비수왕(淝水王) 추봉 → 화양왕(和陽王)
    생전 작위는 정국공(靖國公)으로 1645년에 추봉되었다.
  • 문렬왕(文烈王) 하등교(何騰蛟): 중상왕(中湘王) 추봉
    생전 작위는 정흥후(定興侯)로 1649년에 추봉되었다.
  • 장무왕(壯武王) 김성환(金聲桓): 예장왕(豫章王) 추봉 → 유림왕(楡林王) → 악왕(鄂王)
    생전 작위는 예국공(豫國公)으로 1649년에 추봉되었다.
  • 충무왕(忠武王) 이성동(李成棟): 영하왕(寧夏王) 추봉
    생전 작위는 혜국공(惠國公)으로 1649년에 추봉되었다. 시호가 '충렬(忠烈)'이라는 기록도 있다.
  • 문충왕(文忠王) 구식사(瞿式耜): 시안왕(始安王) 추봉
    생전 작위는 월국공(粵國公)으로 1651년에 추봉되었다.
  • 손가망(孫可望): 평동왕(平東王) 책봉(1646년), 진왕(秦王) 자칭(1646년 → 1651년 승인)
    장헌충의 양자가 되어 평동왕으로 책봉되었다. 장헌충의 양위를 받아 황제에 올랐으나, 청나라의 침공을 받아 남명으로 투항했다. 이후 진왕 작위를 요구했으나 영력제 정권에서는 '경국공(景國公)'과 '평요왕(平遼王)' 중 무엇을 책봉할 것인지 토론하다가 그냥 빈칸(...)으로 둔 책봉 교서를 보냈다. 이를 근거로 진왕을 자칭하다가, 1651년에 영력제 정권에 합류하면서 정식으로 승인받았다. 1657년에 청나라로 망명하여 '의왕(義王)'으로 책봉되었다.
  • 애능기(艾能奇): 정북왕(定北王) 책봉(1646년), 연안왕(延安王) 추봉
    장헌충의 양자가 되어 정북왕으로 책봉되었으나, 남명으로 투항한 뒤 신후(信侯)를 거쳐 신국공(信國公)이 되었고, 죽은 뒤에 연안왕으로 추봉되었다.
  • 이정국(李定國): 안서왕(安西王) 책봉(1646년), 서녕왕(西寧王) 책봉(1652년) → 진왕(晉王) 승작(1565년)
    장헌충의 양자가 되어 안서왕으로 책봉되었다. 남명으로 투항한 뒤 '강후(康侯)'와 '강국공(康國公)'을 거쳐, 1652년에 서녕왕으로 승작했으며, 1656년에 진왕이 되었다.
  • 유문수(劉文秀): 무남왕(撫南王) 책봉(1646년), 남강왕(南康王) 책봉(1652년) → 촉왕(蜀王) 승작(1656년)
    장헌충의 양자가 되어 무남왕으로 책봉되었다. 남명으로 투항한 뒤 '제국공(濟國公)'을 거쳐, 1652년에 남강왕으로 승작했으며, 1656년에 촉왕이 되었다.
  • 피웅(皮熊): 검양왕(黔陽王) 책봉(1650년)
    귀주에서 장헌충의 잔당인 손가망 세력과 대립하던 군벌로 손가망 세력이 영력제 정권에 합류하는 것을 방해했다. 손가망 세력의 합류를 결심한 영력제가 설득을 위해 왕으로 봉작했으나, 1657년에 오삼계의 침공을 받고 도주하여 승려가 되었다.
  • 연평왕(延平王)
    • 조무왕(潮武王) 정성공(鄭成功): 책봉(1655년)
      1657년에 영력제가 '조왕(潮王)'으로 승작을 제안했으나 이를 사양했다.
    • 조문왕(潮文王) 정경(鄭經): 세습(1662년)
    • 정극상(鄭克塽): 세습(1681년)
      1683년 청나라에 항복하여 해징공(海澄公)으로 책봉되었다.
  • 백문선(白文選): 공창왕(鞏昌王) 책봉(1657년)
    장헌충의 잔당으로 청나라로 투항한 손가망을 막은 공적을 인정받아 공창왕에 책봉되었다. 오삼계의 침공을 받아 청나라에 항복했다.
  • 풍쌍례(馮雙禮): 경양왕(慶陽王) 책봉(1657년)
    장헌충의 잔당으로 청나라로 투항한 손가망을 막은 공적을 인정받아 경양왕에 책봉되었다. 오삼계의 침공을 받아 포로로 붙잡혔다.
  • 마진충(馬進忠): 가정왕(嘉定王) 책봉(1658년) → 한양왕(漢陽王)
    농민반란군 출신의 군벌로 영력제가 손가망을 막기 위해 가정왕으로 먼저 책봉했다가, 실제로 전공을 세우자 한양왕으로 개봉(改封)했다. 오삼계의 침공을 받았을 때 병사했고, 아들 마자덕(馬自德)은 그대로 청나라로 투항했다.
  • 정홍규(鄭鴻逵): 진정왕(眞定王) 책봉(1658년)
    연평조무왕 정성공의 숙부로 금문도에서 청과 대치하다가 1657년에 죽었다. 이 사실을 몰랐던 영력제가 이듬해에 진정왕으로 봉했다.

3.7. 청나라

3.7.1. 공신 추봉

종실 왕작은 제외한다. 모두 도로이 기윤왕(多羅郡王)으로 추봉되었다.
  • 경강왕(敬康王) 슈무루 양구리: 도로이 무훈기윤왕(多羅武勳郡王) 추봉(1637년)
  • 충용왕(忠勇王) 황방도(黃芳度): 도로이 기윤왕 추봉(1675년)
    생전 작위는 해징공(海澄公)으로 삼번의 난 진압 중 전사하여 추봉되었다. 정확한 봉호는 미상.

3.7.2. 한족 외번

  • 평남왕(平南王): 양람기 소속, 광동성 일대
    • 경왕(敬王) 상가희(尙可喜): 지순왕(智順王) 책봉(1636년) → 평남왕 개봉(1649년) 호쇼이 친왕 승작(1675년)
      1673년에 세자 상지신과의 불화로 은퇴를 선언하면서 차남 상지효(尙之孝)에게 습작을 청했으나, 강희제는 철번 시도로 답했고 상지효는 작위를 사양했다. 이후 정식으로 호쇼이 친왕으로 봉작되어 상지효가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상지신이 반란을 일으켜 구금되었다.
    • 상지신(尙之信): 보덕친왕(輔德親王) 책봉(1676년), 호쇼이 친왕 책봉(1677년)
      상가희의 세력을 탈취했을 무렵에는 이미 오삼계와 경정충의 협공을 당해 세력이 위축된 상황이였다. 결국 오삼계에 투항한 뒤에 보덕공(輔德公)을 거쳐 친왕으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오삼계에게 가담하지 않고 세력을 회복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듬해 청나라에 투항하여 일단은 평남왕 작위 세습을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오삼계가 죽고 삼번의 난이 진압 국면에 이르자, 1680년에 강희제는 상지신에게 반란 혐의와 무관한 일족까지 연좌되지 않는 조건으로 자결을 명령하고 평남왕을 철번했다.
  • 정남왕(靖南王): 정황기 소속, 복건성 일대
    • 경중명(耿仲明): 회순왕(懷順王) 책봉(1636년) → 정남왕 개봉(1649년)
    • 충민왕(忠敏王) 경계무(耿繼茂): 세습(1651년)
    • 경정충(耿精忠): 세습(1671년)
      대만의 동녕국과 연계하여 오삼계에 호응했으나, 이내 동녕왕 정경과 불화에 빠지면서 청나라와 동녕국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결국 1676년에 청나라가 복건성에 진입하자 청나라에 항복했다. 청 조정에서는 일단 정경충의 작위를 유지해주면서 동녕국 및 상지신을 공격하는 데 동원했으나, 삼번의 난이 진압 국면에 이르고 동녕국 또한 대만으로 철수하자, 1680년에 경정충의 모든 지위를 박탈해 북경으로 압송하고 평남왕을 철번했다. 이후 1682년에 능지형에 처해졌다.
  • 정남왕(定南王): 정홍기 소속, 광서성 일대
    • 장무왕(武壯王) 공유덕(孔有德): 공순왕(恭順王) 책봉(1636년) → 정남왕 개봉(1649년)
      남명 정권 군벌인 진왕(秦王) 손가망의 공격으로 1652년 8월에 멸망했다. 손가망은 공유덕을 공격하는 동안 이정국이 전공을 세우자 영력제에게 왕작 책봉을 건의했고, 이에 따라 이정국은 공유덕이 멸망하기 전인 7월에 서녕왕(西寧王)으로 책봉되었다.
  • 평서왕(平西王): 소속기 미상, 운남성 일대
    • 오삼계(吳三桂): 평서왕 책봉(1644년) → 호쇼이 친왕 승작(1662년)주왕(周王) 자칭(1673년)
      강희제가 의왕을 폐작한 뒤에 평남왕 철번까지 시도하자, 이에 반발하여 정남왕 경정충을 끌어들여 삼번의 난을 일으켰다.
  • 의왕(義王): 정백기 소속
    손가망은 원래 서(西)나라의 황제를 자칭했던 장헌충의 양위를 받아 1646년에 황제에 올랐으나, 14일만에 제위를 포기하고 남명으로 투항했다. 남명에서는 손가망 세력의 합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암살까지 시도했었으나 그나마 청나라와 맞설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군벌을 포기하기는 어려웠고, 1651년에 정식으로 진왕(秦王)에 책봉되면서 영력제 정권에 합류했다. 이후 사형이었던 이정국이 전공을 세우며 영향력이 확대되자 그를 견제했기에, 이정국은 영력제의 조정에 합류했다. 결국 1657년에 영력제 정권과의 관계가 완전히 파탄나면서 청나라에 투항했다. 청나라에서는 곧바로 의왕으로 책봉했으나, 손가망의 세력은 대부분 이정국에게 투항한 뒤였기에 예우상의 봉작에 불과했다. 의왕 작위는 손가망의 양자들에게 세습되었는데, 1672년에 손징순이 죽어서 손가망의 친아들인 손징호(孫徵灝)가 습작을 청했으나, 강희제는 이를 거부하고 모의공(慕義公)으로 낮춰 책봉했다.
    • 각순왕(恪順王) 손가망(孫可望): 책봉(1657년)
    • 손징기(孫徵淇): 세습(1660년)
    • 순민왕(順愍王) 손징순(孫徵淳): 세습(1661년)
  • 손연령(孫延齡): 안원왕(安遠王) 자칭(1674년)
    정홍기 소속으로 공유덕의 부장이었던 손룡(孫龍)의 아들이다. 삼번의 난에 가담하면서 오삼계는 임강왕(臨江王) 책봉을 제안했으나, 손연령은 안원대장군을 자칭하다가 곧 안원왕으로 셀프승격했다. 상지신이 세력을 회복하고 다시 청나라에 투항하자 세력이 위축되었기에 손연령 또한 1677년에 청나라에 투항하려 시도했으나, 오삼계에게 발각되면서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3.7.3. 몽골 및 회족 외번

'외번(外藩)'의 경우 조공책봉관계에 따라 예부(禮部)가 외교를 관장하는 '외국'이 아닌, 이번원(理藩院)에서 관장하는 대상만 서술한다. 외번에서 사용되는 직위 가운데 '자사그(扎薩克)'는 기장(旗長)을 의미한다. 타이지(台吉) 이하는 생략한다.
몽골어 발음
한자 표기
만주어 발음
호쇼이 ○ 친왕
(○ 친왕)
和碩○親王
(○親王)
호쇼이 ○친왕
(○친왕)
도로이 ○ 기윤왕
(○ 기윤왕)
多羅○郡王
(○郡王)
도로이 ○기윤왕
(○기윤왕)
도로이 베이레
(베이레)
多羅貝勒
(貝勒)
도로이 버이러
(버이러)
코슈니 베이스
(베이스)
固山貝子
(貝子)
구사이 버이서
(버이서)
히시기흐 사히흐 울삿 투시예 공
(투시예 공)
奉恩鎭國公
(鎭國公)
커시 버 투와캬라 구룬 버 다리러 궁
(구룬 버 다리러 궁)
히시기흐 사히흐 울삿 투살락치 공
(투살락치 공)
奉恩輔國公
(輔國公)
커시 버 투와캬라 구룬 더 아이시라라 궁
(구룬 더 아이시라라 궁)
(호히) 타이지 台吉 타이지
  • 자사그 호쇼이 차하르(察哈爾) 친왕
    • 에제이 콩고르(額哲孔果爾): 책봉(1636년)
      링단 칸의 지농(濟農)[5]으로 1635년에 후금에 항복했다. 이때 숭덕제는 에제이가 원나라 시절 부터 내려오던 옥새를 헌상하는 쇼를 기획하여, 이를 근거로 자신이 몽골 대칸을 승계했음을 주장하며 이듬해부터 황제를 자칭했고, 국호 또한 '청(淸)'으로 변경했다. 에제이의 지농 칭호는 그대로 승인되었고, 숭덕제의 2녀인 고륜온장공주(固倫溫莊公主)와 결혼하여 '고륜액부(固倫額駙)' 신분을 얻기도 했다.
    • 아부나이(阿布奈): 승계(1641년)
      에제이의 동생으로 에제이가 죽자 지농 칭호 및 친왕 작위를 승계하고, 형수였던 고륜온장공주와 결혼했다. 하지만 아부나이는 청 황실에 반항적인 태도를 보여왔고, 순치제의 장례식에도 불참했다. 이후로도 조회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이어지자, 강희제는 아부나이의 작위를 박탈해 성경(盛京)에 유폐하고 장남인 보르니에게 작위을 잇도록 했다.
    • 보르니(布爾尼): 승계(1669년)
      오삼계가 삼번의 난을 일으키며 승승장구하자, 이에 호응하고자 1675년에 동생인 롭상(羅布藏)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면서 몽골 족장들에게 동참을 호소했다. 하지만 청나라에 복속한 몽골 외번들을 포함하여 당시까지는 아직 청나라에 복속되지 않았던 외 할하의 족장들까지 이를 외면했고, 보르니 형제는 한 달만에 진압당했다. 보르니와 그 일가족은 모두 처형당했고, 성경에 유폐되어 있던 아부나이 또한 교살되었으며, 차하르는 철번되어 팔기군에 직할 편제된다.
  • 내몽골 저리무(哲里木) 아이막(盟) 코르친(科爾沁)
    • 우익중기(右翼中旗)
      • 자사그 호쇼이 투시예드(土謝圖) 친왕
      • 도로이 베이레
    • 좌익중기(左翼中旗)
      • 자사그 호쇼이 다르한(達爾罕) 친왕
      • 호쇼이 조리그투(卓哩克圖) 친왕
      • 도로이 기윤왕
      • 도로이 베이레
      • 코슈니 베이스
      • 히시기흐 사히흐 울삿 투살락치 공 5인
    • 좌익후기(左翼後旗)
      • 자사그 호르친 보두올러거타이(博多勒噶台) 친왕
      • 도로이 베이레
      • 히시기흐 사히흐 울삿 투살락치 공 3인
    • 좌익전기(左翼前旗)
      • 자사그 도로이 빈투(冰圖) 기윤왕
    • 우익전기(右翼前旗)
      • 자사그 도로이 자사그투(扎薩克圖) 기윤왕
    • 우익후기(右翼後旗)
      • 자사그 히시기흐 사히흐 울삿 투시예 공
    • 도로이 코르친 기윤왕
      속칭인 '은드르왕(溫都爾王)'으로도 불렸다.
  • 내몽골 조수투(卓索圖) 아이막(盟) 카라친(喀喇沁)
    • 우익기(右翼旗) 자사그 도로이 두린(杜棱) 기윤왕
  • 내몽골 주우드(昭烏達) 아이막(盟)
    • 아호한(敖漢)
      • 좌익기(左翼旗) 자사그 도로이 기윤왕
      • 우익기(右翼旗) 자사그 도로이 기윤왕
    • 바린(巴林) 우익기(右翼旗) 자사그 도로이 기윤왕
    • 옹뉴드(翁牛特) 좌익기(左翼旗) 자사그 도로이 두린(杜棱) 기윤왕
    • 나이만 기(奈曼旗) 자사그 도로이 다르한(達爾罕) 기윤왕
  • 내몽골 시린골(錫林郭勒) 아이막(盟)
    • 우젬친(烏珠穆沁) 우익기(右翼旗) 자사그 호쇼이 세첸(車臣) 친왕
    • 아바가(阿巴噶)
      • 좌익기(左翼旗) 자사그 도로이 조리그투(卓哩克圖) 기윤왕
      • 우익기(右翼旗) 자사그 도로이 기윤왕
    • 세네딘(蘇尼特)
      • 좌익기(左翼旗) 자사그 도로이 기윤왕
      • 우익기(右翼旗) 자사그 도로이 두린(杜棱) 기윤왕
  • 내몽골 울란차브(烏蘭察布) 아이막(盟)
    • 호지트(浩濟特)
      • 좌익기(左翼旗) 자사그 도로이 어르더니(額爾德尼) 기윤왕
      • 우익기(右翼旗) 자사그 도로이 기윤왕
    • 할하(喀爾喀) 우익기(右翼旗) 자사그 호쇼이 다르한(達爾罕) 친왕
    • 사자왕기(四子王旗) 자사그 도로이 다르한(達爾汗) 조리그투(卓哩克圖) 기윤왕
  • 내몽골 이흐주(伊克昭) 아이막(盟)
    • 오르도스(鄂爾多斯) 좌익중기(左翼中旗) 자사그 도로이 기윤왕
  • 외몽골 할하 투시예드(土謝圖) 칸부(汗部)
    • 투시예드 칸(土謝圖汗)
    • 우익좌기(右翼左旗) 자사그 호쇼이 친왕
    • 좌익중기(左翼中旗) 자사그 도로이 기윤왕
    • 중우기(中右旗) 자사그 도로이 기윤왕
  • 외몽골 할하 사인노얀(賽音諾顏)
    • 사인노얀기 자사그 호쇼이 친왕
      원래는 우익중기(右翼中旗)였다. 정식 작위는 호쇼이 친왕이었으나, 속칭으로는 '사인노얀 칸'으로 불렸다.
    • 중좌익말기(中左翼末旗) 자사그 호쇼이 친왕
    • 중우기(中右旗) 자사그 도로이 기윤왕
    • 우익우후기(右翼右後旗) 자사그 도로이 기윤왕
  • 외몽골 할하 세첸(車臣) 칸부
    • 세첸칸(車臣汗)
    • 좌익중기(左翼中旗) 자사그 호쇼이 친왕
    • 중우기(中右旗) 자사그 도로이 기윤왕
  • 외몽골 할하 자사그투(扎薩克圖) 칸부
    • 자사그투 칸(扎薩克圖汗)
    • 중좌익좌기(中左翼左旗) 자사그 도로이 베이레
      정식 작위는 도로이 베이레(버이러)였으나, 의전상으로는 기윤왕(군왕) 급으로 대우받았다.
  • 외몽골 홉드(科布多)
    • 토르구트(杜爾伯特)
      • 토르구트 칸(杜爾伯特汗)
      • 전기(前旗) 자사그 호쇼이 친왕
      • 중기(中旗) 자사그 도로이 기윤왕
    • 신(新) 토르구트(土爾扈特) 우기(右旗) 자사그 도로이 빌리그투(弼哩克圖) 기윤왕
  • 투서(套西) 2기
    • 알샤 에루트 기(阿拉善厄魯特旗) 자사그 호쇼이 친왕
    • 에젠 토르구트 기(額濟納土爾扈特旗) 자사그 도로이 기윤왕
  • 청해 호쇼트(和碩特)
    • 전두기(前頭旗) 자사그 도로이 기윤왕
    • 서전기(西前旗) 자사그 도로이 기윤왕
    • 전좌익두기(前左翼頭旗) 자사그 도로이 기윤왕
  • 신강 구(舊) 토르구트(土爾扈特)
    • 조리그투 칸(卓哩克圖汗)
    • 북로(北路) 구 토르구트 자사그 호쇼이 부얀투(布延圖) 친왕
    • 동로(東路) 구 토르구트 우기(右旗) 자사그 도로이 비시러투(畢錫勒圖) 기윤왕
  • 준가르 초로스(綽羅斯)
    준가르 원정 중에 준가르의 군주에 해당되는 '홍 타이지(渾台吉)'인 다와치를 생포하여 북경으로 압송했다. 이후 호쇼이 친왕으로 책봉하여 예우했으나, 작위의 세습은 불허하여 한 단계씩 낮추는 습봉(襲封)이 이뤄졌으며, 코슈니 베이스 이후로는 세습망체가 적용되었다.
    • 다와치(達瓦齊): 초로스 호쇼이 친왕 책봉(1755년)
    • 로부자(羅布扎): 초로스 도로이 기윤왕 책봉(1759년)
    • 푸타시(富塔喜): 초로스 도로이 베이레 습봉(1774년)
    • 푸르나(富爾納): 초로스 코슈니 베이스 습봉(1791년)
    • 겡인수(賡音蘇): 초로스 코슈니 베이스 세습(1797년)
    • 이켄거(伊鏗格): 초로스 코슈니 베이스 세습(1838년)
    • 탕구세(唐古色): 초로스 코슈니 베이스 세습(1879년)
  • 회부(回部)
    • 하미(哈密) 회부 자사그 호쇼이 친왕
    • 투르판(吐魯番) 회부 자사그 도로이 기윤왕
    • 아크수(阿克蘇) 회부 도로이 기윤왕
      정식 작위는 도로이 기윤왕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버이러 등급으로 취급되었다.
    • 쿠처(庫車) 회부 도로이 기윤왕
    • 바이(拜城) 회부 구룬 더 아이시라라 궁
    • 호탄(和闐) 회부 구룬 더 아이시라라 궁
    • 우스(烏什) 회부 구사이 버이서
      정식 작위는 구사이 버이서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구룬 더 아이시라라 궁 등급으로 취급되었다.
    • 알타이(阿爾泰) 카자흐(哈薩克)
      • 도로이 기윤왕
      • 구사이 버이서
      • 구룬 버 다리러 궁
      • 구룬 더 아이시라라 궁
    • 일리(伊犁) 카자흐(哈薩克) 헤이자 부락(黑宰部落) 구룬 더 아이시라라 궁
  • 티베트 도로이 기윤왕
    • 캉첸네 소남 갈포(ཁང་ཆེན་ནས་བསོད་ནམས་རྒྱལ་པོ, 康濟鼐): 책봉(1721년)
    • 포라네 소남 토프가이(ཕོ་ལྷ་ནས་བསོད་ནམས་སྟོབས་རྒྱས, 頗羅鼐): 책봉(1727년)
    • 규르메드 남걀(གྱུར་མེད་རྣམ་རྒྱལ, 珠爾默特那木札勒): 세습(1747년)
      티베트에 주둔 중인 청나라 주둔군의 규모를 줄이고 준가르와 친선 관계를 회복하는 반청 정책을 시도하였으나, 1750년에 해당 계획이 청나라 주둔군 장수들에게 유출되면서 살해당했다. 이후로 청나라 황실이 직접 달라이 라마와 관계를 맺어 티베트를 간접 통치하게 된다.


[1] '황(皇)'과 '왕(王)' 글자의 권위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근대 이후였다. 일례로 '황위(皇位)'라는 단어가 쓰인 용례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제위(帝位)'라는 어휘가 압도적으로 많이 쓰였으며, '제위'의 동의어로 '왕위'가 사용된 용례도 훨씬 많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일본의 실권자가 왕을 자칭하지 않고 관백이나 대장군 등을 자칭하는 원인을 천황이라는 존재가 따로 있기 때문으로 적은 기사도 있어, '皇'과 '王'은 사실상 같은 격의 글자로 봤음을 알 수 있다. [2] 흔히 한신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하고 있으나, 당시에 한신은 제나라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점을 감안하면 좌천이라기 보다는 실질적으로도 영전이었다. 한신이 떠난 뒤에도 제나라에 남아있던 조참은 전씨의 잔여 세력을 진압했다. [3] 오히려 한중왕 유비의 부하 관우가 위왕 조조의 부하인 조인을 공격했을 당시 위나라의 영토 각지에서 관우 세력에 호응하는 반란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한나라의 예법에 따르면 둘 중에서는 유씨이긴 한 유비가 더 정통성이 있었고, 유비는 친헌제파였는데다 조조는 헌제가 직접 주도해 조조를 암살하려고 했을 당시 헌제의 아이를 임신한 귀인을 처형할 정도로 황실의 권위를 짓밟았기 때문이다. 황실이 사실상 유명무실해졌기에 (과정은 어쨌든) 직접 황실로부터 작위를 받은 왕보다 자칭왕이 정통성이 높았던 혼란스러웠던 시기. [4] 손자 목성(沐晟)때 부터 검국공(黔國公)으로 승격된다. [5] 몽골 대칸의 태자에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