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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무루 양구리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여진 통일2.3. 명나라와의 싸움2.4. 조선 공격
3. 사후

1. 개요

Šumuru Yangguri/舒穆禄 揚古利
(1572 ~ 1637)

청나라 초기의 군인. 태조 천명제 누르하치의 사위이자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의 매부로 병자호란 당시 광교산 전투에서 조총 사격에 당해 전사했다. 청군 전사자 중 가장 지위가 높은 인물이었다.

2. 생애

2.1. 초기

훈춘에 대대로 거주했고, 아버지가 누르하치에게 귀부해 대우를 받았으며, 대궐에 들어가 누르하치를 알현했다. 아버지가 부족 사람들에게 살해당하자 1585년에 부족 사람을 직접 살해하고 가족들과 함께 누르하치에게 귀순했다. 누르하치의 신임을 받아 그의 딸과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고, 팔기군의 정황기에 소속되었다.

2.2. 여진 통일

누르하치의 명령으로 압록강을 지켰고, 해서여진의 부족인 휘발부(호이파부)를 정벌할 때, 함부로 진군하지 못하자 양구리가 험난한 물을 건너 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1593년에 주사리부, 눌은부, 1598년에 안저랍고를 공격해 공을 세웠으며, 1599년에는 해서여진의 합달부(하다부)를 정벌하면서 나라 멍거불루를 사로잡았다. 1607년 정월에 비유성의 무리들을 옮기면서 퉁갸 후르한과 함께 300명을 이끌고 보호했다가 울아에서 10,000명을 이끌고 여러 길에서 나누어 매복하자 양구리가 창을 쥐고 돌격해 7명을 죽여 물러나도록 했다. 부족의 수장인 여러 패륵들의 군사와 하천에서 대치하다가 이들을 격파했으며, 5월에는 바야라 등을 따라서 악집부를 침공해 혁석흑 공격의 선봉이 되었다.

미아고리촌 사람이 군사가 온 것을 알고 도망가 산을 등지자 산 꼭대기에 근거해서 공격해 적들을 죽이고 자녀들을 사로잡아 귀환했으며, 9월에는 휘발부(호이파부)를 정벌해 성을 정벌했다. 1610년에는 아바타이 등을 따라서 악집부를 공격해 목륜을 약탈하고, 오아호마촌을 함락시켜 많은 포로를 잡았다.

1612년 9월에 해서여진의 오랍부(우라부)를 공격하면서 금주성을 함락시켰으며, 1613년 정월에는 오랍부를 다시 공격했다가 부잔타이의 군대가 강력해 누르하치가 퇴각하려고 하자 양구리가 불가하다면서 성을 공격해 마침내 점령했다.

2.3. 명나라와의 싸움

1619년 3월의 사르후 전투때 누르하치가 상처를 입은 자는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양구리는 상처를 싸매고 나가서 아파타이와 함께 마림의 명군을 격파했다. 7월에는 철령을 공격하면서 몽골의 패륵인 자이사이를 격파했으며, 1621년 3월에는 누르하치를 따라 심양과 요양을 함락해 누르하치가 좌익병을 통솔하도록 하면서 1등총병관에 임명하고 전쟁터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1625년에는 요주를 수비하다가 모문룡이 군사 300명을 보내 공격하고 식량을 약탈하자 추격해 모두 죽이고 3등공에 올랐으며, 1629년 9월에 동아산 등의 도망자를 체포해 아이고에 이르러 모문룡 소속의 부대와 조우하자 공격해 죽여 천총 세 명과 종자 16인을 사로잡아 귀환했다.

10월에는 명나라를 공격해서 북경 가까이에 이르러 북경성 북쪽에서 만계를 격파했으며, 포병이 명군의 매복으로 위험에 빠지자 군사 10여 인을 인솔해 포위망에 들어가 탈출시켰다. 회군해서 아파타이를 따라 통주를 약탈하고 배 1,000여 척을 불태웠으며, 계주를 공격하면서 명군이 구원하자 홍타이지가 좌익을 감독해 서쪽을 공격하고, 다이샨이 우익을 감독해 동쪽을 공격했는데, 우익의 양홍기가 조금 물러나자 양구리가 정황기를 인솔해 적을 도주시켰다. 홍타이지가 양홍기에게서 돈을 거둬 속죄하게 하면서 양구리에게 포상을 내렸으며, 양구리는 이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1632년 동몽골의 찰합이부(차하르부)를 정벌하면서 아파타이와 함께 본거지를 공격하도록 명령받았는데, 명나라에서 공격하고 금주 전투에서 명군의 기세가 상승하자 양구리가 공격해서 격파했으며, 개선한 후에는 명나라의 변경으로 들어가 대동과 선부를 공격하고, 아파타이와 함께 영구와 왕가장 등을 무너뜨렸다.

1633년 홍타이지가 여러 장수에게 군사에 관한 일을 자문하자 군사에 대해 등한시하지 않도록 하면서 명나라 정벌에 대한 책략을 제시했으며, 1634년 1월에 양구리의 전공을 기록하면서 초품공에 올랐다. 1636년 5월에는 아지거 및 아파타이와 함께 명나라를 공격해 12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58번을 싸워 승리했으며, 총병 소비창과 100,000여 명의 포로를 사로잡고, 변경으로 나가 삼둔영과 산해관의 명나라 구원군을 격파했다.

1636년 9월에 회군했을 때, 홍타이지가 연회를 베풀면서 아지거 및 아파타이와 함께 위로받았으며, 11월에는 명나라를 정벌한 장수들의 법률 위반에 대해 논의하면서 아지거가 친히 변경을 나가지 않고 후군이 된 것을 양구리가 간하지 않았다는 것에 문책받아 벌금형을 받았다.

2.4. 조선 공격

1637년 정월에는 병자호란에 종군해 광교산 전투에 참전했는데, 조선의 지원군이 남한산성을 향해 구원하러오자 아이신기오로 도도와 함께 기회를 보아 반격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이때 양구리는 눈이 오고 하늘이 흐려 조선군의 군영을 보지 못했지만, 병사를 풀어 진격해 깨뜨렸다.

그다음엔 산 아래에 진을 친 조선군 패잔병들을 추격해 산 정상에 있는 적 군영에 이르렀는데, 도도가 뿔피리를 불어 병력을 모으게 하면서 산에 올라 전투를 감독한 양구리를 소환했지만 근왕병 김준룡이 이끄는 조선군의 조총 집중 사격을 받을 때 양구리는 납탄에 꿰뚫려 중상을 입고는 전사했다.[1]

그가 죽자 다음날에 도도가 조선군을 공격해 시신을 되찾아 수습했으며, 홍타이지가 진심으로 슬퍼하면서 그의 시신을 청나라 본국으로 송환시켜 선제인 누르하치의 곁에 묻었다.

3. 사후

훗날 태묘 공신으로 배향되었으며, 손자인 아이싱아는 버마 침공전에 종군하여 남명의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의 생포때 공을 세웠다.
[1] 청나라측의 기록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으나, 조선측에서는 전투중 사살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광교산 전투 양상 또한 청나라 입장에서 상당한 혈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