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21:05:47

하후연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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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Xiahou_Yuan_Portrait.jpg
시호 민후(愍侯)
작위 박창정후(博昌亭侯)
최종직위 정서장군(征西將軍)
성씨 하후(夏侯)
(淵)
묘재(妙才)
족형 하후돈(夏侯惇)
친척 조조(曹操)
생몰기간 ?년 ~ 219년 1월
고향 예주(豫州) 패국(沛國) 초현(譙縣)[1]
사망지 정군산(定軍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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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조조) 별부사마(別部司馬) 겸 기도위(騎都尉)
진류태수(陳留太守) 겸 영천태수(穎川太守) 겸 기도위(騎都尉)
독군교위(督軍校尉) → 전군교위(典軍校尉) → 행령군(行領軍)
정서호군(征西護軍) → 호군장군(護軍將軍) → 행도호장군 (行都護將軍)
정서장군(征西將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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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2.2. 관도대전2.3. 창희 토벌2.4. 서화 토벌2.5. 뇌서 토벌2.6. 상요 토벌2.7. 관중 평정2.8. 장로 정벌2.9. 한중 공방전
3. 삼국지연의4. 가족 관계5. 평가
5.1. 부정적 평가5.2. 긍정적 평가
6. 기타7.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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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인물이자 조조 휘하의 장수. 하후돈의 족제, 조조의 동서이며 는 묘재(妙才)로 예주 패국 초현 사람.

조조의 친척 장수 4인방인 하후돈, 하후연, 조인, 조홍 중 조인과 더불어 군의 상장 노릇을 제대로 수행해주었다.

현대 북경어 발음으로는 ‘Xiahou Yuan‘이다. 조조군의 에이스이기 때문에 고전 영문판 삼국지를 해본 사람이라면 꽤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조조 문서에 서술되어 있듯이 물론 당시 중국어는 현대 중국어와 발음이 많이 다르니 이게 원음이라고는 할 수 없다.

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

조조가 고향집에 있을 때 일찍이 현의 관리에게 일을 저질렀는데 하후연이 중죄를 대신 떠맡으려고 했다. 그러자 조조가 방책을 내어 그를 구하여 죄를 면한 적이 있다.

연주, 예주에 대란이 일었을 때, 하후연은 기근 때문에 어린 아들[2]을 버렸으나 죽은 아우의 딸[3]은 살렸다.

조조가 거병하자 별부사마(別部司馬), 기도위(騎都尉)로 삼아 수행했고 진류 태수, 영천 태수로 승진했다.

2.2. 관도대전

원소와 관도에서 싸울 때는 독군교위(督軍校尉)의 직을 맡았다. 원소가 격파되자 연주, 예주, 서주의 군량을 감독했다. 당시 조조군의 식량이 적었는데 하후연이 식량을 조달하니 군은 다시 떨쳐 일어났다고 한다.

2.3. 창희 토벌

장료는 하후연과 함께 서주 동해군에서 창희를 포위했는데, 여러 달이 지나 군량이 소진되자 회군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장료가 하후연에게 말했다.
며칠 사이 매번 포위된 곳을 순시할 때마다 창희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들이 화살을 쏘는 일이 드물었소. 이는 필시 창희가 마음속으로 망설이는 게 있어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것이오. 내가 그와 얘기를 나눠볼까 하는데 어쩌면 그를 달랠 수도 있을 것이오.
이에 창희가 투항을 하였다.

건안 5년( 200년), 하후패의 사촌 여동생이자 하후연의 조카딸이 되는 하후씨가 13살일 때 장비와 결혼한다.

이후 다시 창희가 모반하자 조조는 우금을 보내 창희를 공격하게 했는데, 우금이 공략하지 못하자 다시 하후연을 보내 우금과 힘을 합치게 했다. 마침내 창희를 공격하여 10여 둔영을 항복시켰고 창희는 우금에게 나아가 투항했다.

<우금전>에 따르면 창희는 우금과 교분이 있었으므로 우금에게로 나아가 항복했다. 제장들은 모두 창희가 이미 항복했으므로 응당 조조에게로 호송해야 한다고 했다. 우금이 말했다.
포위당한 후에 항복한 자는 사면하지 않는다 했소. 비록 창희가 옛 벗이긴 하나 나 우금은 절개를 잃을 순 없소!
이에 우금이 직접 창희의 형을 집행했는데, 눈물을 흘리며 창희를 참수했다.

하후연이 돌아오자 조조가 하후연을 전군교위에 임명했다.

《위서》에 따르면 하후연은 장수가 되어 행군이 매우 빨라 항상 적이 예상치 못한 곳에 나타났으므로 군중에서 이를 두고 말했다.
전군교위 하후연은 사흘에 오백리, 엿새에 천리를 간다.

2.4. 서화 토벌

청주 제남국, 낙안국 황건적 서화, 사마구 등이 성을 공격하여 관원을 살해했다.

<여건전>에 따르면 제남군의 황건군 서화 등은 도처에서 관리를 죽이고, 성읍을 공격하여 점거했다. 여건은 병사를 이끌고 하후연과 연합하여 그들을 공격했는데, 앞뒤로 수십 차례 싸워 머리를 베거나 포로로 잡은 수가 수천 명이나 됐다.

하후연이 연주 태산군, 청주 제국, 청주 평원군의 군사들을 이끌고 공격하여 대파하고 서화를 참수하여 여러 현들을 평정했고 그들의 양곡을 거두어 군사들에게 공급했다.

2.5. 뇌서 토벌

건안 14년( 209년), 하후연을 행령군으로 임명했다. 조조가 손권을 정벌하고 돌아올 때 하후연으로 하여금 제장들을 지휘해 여강에서 반란을 일으킨 뇌서를 공격케 했다.

2.6. 상요 토벌

뇌서를 깨뜨리자 또 정서호군으로 서황을 지휘해 태원의 도적을 공격했는데, 20여 둔영을 함락시키고 도적의 우두머리 상요를 참수하고 그 성을 도륙했다.

2.7. 관중 평정

<무제기>에 따르면 건안 16년( 211년) 봄, 장로 한중을 점거하니 3월에 종요를 보내 장로를 토벌했다. 조조가 하후연 등에게 하동에서 나와 종요와 합류하게 했다. 이때 관중의 제장들은 종요가 습격하고자 하는 것으로 의심하니, 마침내 마초 한수, 양추, 이감, 성의 등과 함께 모반했다.

한수를 정벌하는데 수행하여 위남에서 싸웠으며 주령을 이끌고 유미, 견저를 평정했다. 조조와 안정에서 만나 양추를 항복시켰다.

건안 17년( 212년), 조조가 으로 돌아갈 때 하후연을 행 호군장군으로 삼아 주령, 노초 등을 지휘해 장안에 주둔케 했다. 남산의 도적 유웅명을 격파하고 그 무리들의 항복을 받았다. 한수, 마초의 잔당인 양흥 사례 좌빙익 호현에서 포위하여 무찌르고 양흥을 참수하고 박창정후에 봉해졌다.

마초 양주 자사 위강 양주 한양군 기현에서 포위하자 하후연이 위강을 구원하려 했는데, 도착하기 전에 위강이 패했다. 기성에서 2백 여 리 떨어진 곳까지 마초가 와서 이에 맞서 싸웠는데 군이 불리했고 견저가 모반하자 하후연은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

건안 19년( 214년), 조앙(趙昂), 조구, 윤봉 등이 마초 토벌을 도모하자 강서가 노성에서 군을 일으켜 이에 호응했다. 조구 등이 마초를 속여 성을 나가 강서를 공격하게 한 뒤 마초의 처자를 모두 죽였다. 마초는 한중으로 달아났다가 다시 돌아와 기산을 포위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마초 한양에서 다시 강족, 호인에 의지해 해악을 일으키자 저왕 천만(양천만)이 모반하고 마초에 호응해 흥국에 주둔했다. 하후연을 시켜 이를 토벌하게 했다.

강서 등이 급히 구원을 요청했는데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기를 조조의 절도(節度)를 기다리자고 했다. 하후연이 말했다.
공(조조)께서는 에 계시니 왕복하는 데 4천 리 길이오. 회답에 따르려 하다가는 강서 등은 필시 패할 것이니 급히 공격해야 하오.
마침내 이를 실행해 장합에게 보병 기병 5천을 주어 선두에 서서 진창의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게 하고 하후연 자신은 군량을 감독하며 후미에 있었다. 장합이 위수 가에 도착하자 마초가 강족과 저족 수천 명을 이끌고 장합에 맞섰다. 싸우기도 전에 마초가 달아나니 장합은 진군하여 마초군의 무기를 거두었다. 하후연이 도착했을 때는 여러 현들이 이미 다 항복한 상태였다.
한수 옹주 한양군 현친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하후연이 공격하려 하자 달아났다. 하후연은 한수의 군량을 거두고 추격하여 한양군 약양현 약양성(略陽城)[4]에 이르렀고 한수와 20리 떨어져 있었다. 제장들이 한수를 공격하고자 했는데 어떤 이가 말하길 마땅히 흥국성의 저족을 공격해야 한다고 했다. 하후연이 말했다.
한수의 군사가 정예하고 흥국성이 견고하므로 공격하여 급히 함락시킬 수 없으니 장리의 여러 강족들을 공격하는 것이 더 나은 계책이오. 장리의 강족들 다수가 한수군에 있으므로 필시 돌아가 자신의 가족을 구원하려 할 것이오. 한수가 만약 강족을 포기하고 홀로 지키면 고립될 것이고, 장리를 구원하고자 하면 관병(官兵)과 들판에서 싸워야 하니 반드시 사로잡을 수 있소.
이에 하후연은 독장(督將)을 남겨 군수물자를 지키게 하고 경무장한 보병과 기병으로 장리에 이르러, 강족의 둔영을 공격해 불태우고 많은 수의 무리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한수의 군중에 있던 강족들은 각기 자신들의 종족의 부락으로 돌아가니 과연 한수는 장리를 구원하였고 하후연 군과 진영을 벌여 대치했다.
제장들이 한수의 병력이 많음을 보고 이를 꺼려 영채를 구축하고 참호를 만든 뒤 싸우려 하자 하후연이 말했다.
내가 천리를 이어 싸워왔는데 지금 다시 영채와 참호를 만들면 병졸들이 피로해지니 오래 견딜 수 없소. 적이 비록 그 숫자가 많으나 쉬운 상대일 뿐이오.
그리고는 북을 울리며 진격해 한수군을 대파하고 대장기를 빼앗아 약양으로 돌아왔다. 진군하여 흥국성을 포위하자 저족의 왕 천만은 마초에게로 달아나고 남은 무리들은 투항했다. 한수는 서평으로 달이났으며 하후연과 제장들은 흥국성을 도륙했다. 군을 돌려 옹주 안정군 고평현의 도각( 흉노)을 공격하니 모두 흩어져 달아났고 그들의 양곡과 우마를 거두었다. 이에 하후연에게 절(節)을 내렸다.

<무제기>에 따르면 당초 농서 송건이 하수 평한왕을 자칭하고 옹주 농서군 포한현에서 무리를 끌어모아 연호를 고치고 백관(百官)을 두어 30여 년이 흘렀다.

조조는 하후연을 보내 제장들을 지휘해 송건을 공격하게 했다. 하후연이 포한에 도착해 포위한 지 한 달 남짓 만에 이를 함락시키고 도륙하여 송건과 그가 두었던 승상 이하 관원들을 참수했다. 하후연은 별도로 장합 등을 보내 옹주 농서군 하관현을 평정하고 황하를 건너 소황으로 들어가자 하서의 강족들이 모두 항복하여 농우가 평정되었다.

조조가 조령을 내려 말했다.
송건이 처음 반역한 지 30여 년인데 하후연이 일거에 섬멸하였고 관서를 씩씩하게 걸으니 그가 향하는 곳에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었다. 중니( 공자)가 나도 너와 함께 안회에 미치지 못한다라 한 적이 있도다.

건안 21년( 216년), 식읍 3백 호를 더 늘려주어 이전과 아울러 8백 호가 되었다. 돌아와 무도 저족 강족 양주 무도군 하변현에서 공격하여 저족의 양곡 10여만 곡을 거두어들였다.

2.8. 장로 정벌

조조가 서쪽으로 장로를 정벌할 때 하후연 등은 양주의 제장들과 후왕(侯王) 이하 관원들을 이끌고 휴정에서 조조와 합류했다. 조조가 매번 강족과 호인( 흉노)들을 접견할 때마다 하후연으로 그들을 두렵게 했다.

<유방전> 주석 《손자별전》에 따르면 손자가 대답했다.
예전에 무황제께서 남정의 장로를 정벌할 때 친히 가셔서 하후연군을 구출할 때 하후연군이 무사히 빠져나온 것을 기뻐한 것입니다.

장로가 항복하고 한중이 평정되었을 때 하후연을 행 도호장군으로 삼아 장합, 서황 등을 지휘해 파군을 평정케 했다. 조조가 으로 돌아갈 때 하후연을 남겨 한중을 지키게 하고 하후연을 정서장군에 임명했다.

2.9. 한중 공방전

당초, 하후연이 비록 여러 차례 싸움에서 이겼으나 조조가 늘 경계하여 말했었다.
장수가 되어 마땅히 겁을 내고 나약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고 항상 용맹에만 의지해서는 안 되오. 장수는 본래 용맹을 근본으로 삼으나 이를 실행함에는 지모와 계책을 써야 하는 법이오. 오직 용맹만을 알고 그것에만 의지한다면 일개 필부에 대적할 수 있을 뿐이오.

건안 23년( 218년), 유비가 양평관(陽平關)에 주둔하자 하후연이 제장들을 이끌고 이에 맞섰는데 서로 지키면서 해를 넘겼다.

<장합전>에 따르면 유비가 주마곡에서 도시 주변을 불태웠다. 하후연이 불을 끄러 다른 길로 왔다 유비와 서로 만났다.

건안 24년( 219년) 정월, 유비가 밤에 녹각(鹿角)을 불사르며 포위하자 하후연이 장합에게 동쪽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경병을 이끌고 남쪽을 지켰다. 유비가 장합에 싸움을 걸었는데 장합군이 불리했다. 하후연은 지휘하던 병력의 절반을 나누어 장합을 돕게 했는데 유비의 습격을 받아 마침내 하후연이 싸우다 죽었다.

태평어람》에 따르면 하후연이 적에게 녹각을 소각당했다. 녹각은 본영 15리 밖에 있었는데, 하후연은 4백의 병력을 거느리고 녹각으로 가서, 병사를 시켜 고치도록 하였다.

<법정전>에 따르면 법정이 말했다.
가히 공격할 만합니다.
유비 황충에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이를 공격하게 하여 하후연군을 대파했고 하후연 등은 참수당했다.

태평어람》에 따르면 적이 산상에서 바라보다가, 계곡을 따라 병사를 내보냈고, 하후연은 병사로 하여금 싸우도록 하였는데, 적이 결국 그 배후를 둘러싸서, 병사는 물러났으나 하후연은 오지 못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유비는 한중의 위군 총사령관인 하후연을 잡는 판을 짜놓았다고 볼 수 있는데, 유비는 1만 군사를 선별해 10개 기습부대로 나눈 후 야습으로 화공까지 곁들여 장합을 압박해 하후연이 장합을 도우러 나설 수밖에 없게 덫을 판다. 의도대로 하후연이 장합에게 자기 직속 절반을 보내 구원하자 정군산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법정이 지금이라면 하후연을 잡기에 둘도 없는 기회임을 눈치채고 알리자 유비는 하후연을 노리고 숨겨둔 히든카드인 황충으로 하여금 하후연을 직접 공격해 뒤흔든 후 녹각 수리하랴 방어하랴 정신이 없던 하후연이 당하고 말았다. 하후연 사후, 장합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비록 하후연이 도독이었으나 유비는 장합을 꺼린 반면 하후연은 경시했다. 이에 하후연이 죽자 유비가 말했다.
응당 우두머리를 잡아야지, 이 자를 잡아서 무엇을 하겠는가!

<곽회전>에 따르면 하후연이 살해된 후, 군대 안의 인심은 불안하였다. 곽회가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탕구장군 장합을 군주로 추천하자, 각 진영은 비로소 안정되었다.

위략》에 따르면 하후연이 죽었을 때 장비의 처( 하후씨)는 청하여 하후연을 매장했었다.

태평어람》 인용 《위무군책령》에 "하후연은 본디 용병에 능하지 못했기에, 군중에서는 백지장군(白地將軍)이라 불렀었는데,[5] 도독이 친히 나서서 싸우는 일만 해도 합당하지 않은 터인데, 하물며 녹각을 보수하는 일 따위를 친히 해야겠는가!"라고 조조가 한탄한 기록이 있다.

시호를 내려 민후(愍侯)라 했다. 시법에서 근심할 민(愍)은 나라가 어려움을 만났거나, 근심에 근심을 더한다는 의미이다. 이상하게 한국 위키에서는 민후가 악시 이며 하후연은 죽어서 조롱받았다는 설이 있는데 시호법 민은 안타까움이나 동정을 표하는 시호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쪽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민'을 악시로만 본다면 조조가 평생을 안타까워했던 요절한 첫째 아들인 조앙과 이전 또한 악시를 받은 셈이 된다. '민'은 애도의 의미지 악시가 아니라는 뜻.

《제왕기》에 따르면 조방은 조서를 내려 고인이 된 공신들을 조조의 제묘 앞 정원에서 제사지내도록 했다. 그중에는 하후연도 포함되어 있다.

3. 삼국지연의

몇몇 판본에서는 하후돈의 동생이라고 나오는데 정사에서 하후연은 그냥 하후돈의 집안 동생일 뿐, 친동생은 아니었다. 모종강본에서는 집안 동생이라고 나온다.

하후돈과 더불어 위나라의 더블 펀치로 묘사된다. 그에 따라서 여남 유비 공격에서는 유비를 아군으로 한 황건적의 잔당인 공도를 토벌하기도 하는 추가 장면이 생겼다. 하지만 하후돈에게 임팩트를 몰아줌에 따라 2인자 포스가 물씬나는 악역 중간보스 정도의 인상 밖에 없다.

동작대 완공을 축하하는 행사에서 조휴, 문빙, 조홍이 차례로 과녁에 화살을 모두 명중시켰다. 그러자 장합이 일명 파르티안 궁법이라고 불리는 번신배사를 구사해서 또 과녁에 명중시켰다. 네 발의 화살이 가지런히 홍심에 모여 있었는데 하후연이 나선다. 하후연도 번신배사를 구사하여 활을 쏘아 과녁에 꽂힌 4개의 화살 한가운데를 꿰뚫는 솜씨를 선보였다. 연의에서 하후연이 활쏘는 장면은 이것 뿐임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으로 인해 하후연은 2차 창작물에서 활에 능하다는 설정이 붙게 된다.[6] 덕분에 나중에 황충과는 궁대 궁 대결이 되었다. 참고로 정사에서 하후연의 궁술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오히려 하후연의 아들인 하후칭이 활을 잘 쏘는 이야기가 있다.

연의에서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조조 관로의 점괘를 듣는 장면이 있는데, 관로는 '삼팔종횡(三八縱橫) 황저우호(黃猪遇虎) 정군지남(定軍之南) 상절일고(傷切一股)'라는 정체불명의 시를 한 수 써 준다. 이는 그냥 해석하면 '3과 8이 종횡하면 누른 돼지(하후연)가 호랑이(황충)를 만나 정군산 남쪽에서 다리 하나가 부러진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3과 8을 곱하면 24, 즉 건안 24년이 되고 누른 돼지는 돼지해인 기해년, 호랑이는 범의 달인 정월을 의미하니 하후연이 죽는 시기까지 암시하고 있다. 다리 하나가 부러진다는 표현은 하후연은 기동전을 특기로 한 장수였기에 조조가 하후연을 잃어 기동전에 능한 심복을 잃는다는 걸 비유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흔한 신체 비유일 가능성이 크다. 나관중이 하후연을 기동전이나 조조의 발로서 비중있게 묘사한 바는 없으니 말이다.

또 연의에서 추가된 전공이 있다. 장로를 정벌할 때 하후연과 장합이 선봉으로 가던 중 양앙 양임의 기습에 패한다. 다시 안개 속에서 습격하여 양평관 점령에 공을 세우고 창기 양임을 벤다. 이때까지는 동작대 이벤트를 제외하면 하후돈에게 다소 묻혀있던 하후연이 갑자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듯한 묘사다. 마치 스토리상 곧 죽게 될 하후연에게 주는 보상처럼 보인다. 물론 여기서 하후연을 어느정도 띄워줘야 곧 전개될 한중공방전이 좀더 흥미진진해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비슷하게 장합도 전사하기 직전에 제갈량이 띄워주는 대목이 있다.

한중 공방전 와중에는 난폭하며 지모가 모자란 장수로 묘사된다[7]. 한중 공방전에서 조조가 '하후연은 성급하니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라는 누군가의 참소를 듣고 글을 써서 하후연에게 보내었다. 글에는 "경의 '기묘한 재주'를 보고자 하니, 신중하게 전투하라."는 대목이 있었는데, 저 기묘한 재주를 한자로 쓰면 묘재(妙才), 즉 하후연의 자다. 오히려 이 글이 기폭제가 되어 하후연이 더 날뛰었다. 다만 몇몇 판본에선 이 글을 보고 나름대로 느낀게 있었는지 계략을 짜서 황충의 부하 장수인 진식을 사로잡기도 한다.

황충과의 일기토에선 접전을 이루면서 황충을 물리게 하는 등 촉의 명장들과의 일기토를 했을 때 꿀리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앞서 장합 장비한테 내리 깨지고 온 것 때문에 장합의 충고를 무시하고 패기있게 기마병 몇기와 진군했지만 황충의 기습을 받아 죽었다. 그리고 조조는 하후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위를 잃었을 때만큼 슬퍼하면서 직접 넋을 달래기 위해 정군산으로 출전하게 된다.

"조조가 하후연에게 위임하였으나 하후연이 패망하였습니다"라는 출사표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조조는 하후연을 믿고 정군산에 주둔하게 하였으나 결국 법정의 계략에 당해 황충의 손에 참살당하였다.

4. 가족 관계


하후연의 자식, 인척들은 대를 이어 위의 중진으로 존재감을 내비쳤다. 그리고 이들이 우직하게 조씨에게 충성했던 하후연과 달리 저마다 다른 길을 택했다는 점도 흥미로운 요소. 일곱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귀재였다고 전해진다. 이들 중 18세에 요절한 삼남 하후칭과 한중 공방전에서 13세의 나이로 전사한 오남 하후영을 제외하고 장성한 아들은 5명. 맏이 하후형은 조조의 조카사위가 되었고, 차남 하후패는 대촉전선을 담당하다 고평릉 사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사마씨에게 위협을 느끼고 아버지와 동생을 죽인 촉한으로 망명한다. 하후위와 하후혜는 주목이나 태수까지 역임했고 막내 하후화는 사마씨에게 적극 협력해 서진의 공신이 되었다.

친인척으로 시선을 넓히면 하후연의 조카로 조비의 총애를 받아 조비 시기 군부 중심인사가 된 정남장군 하후상과 그의 아들로 조위의 마지막 충신이 되는 정서장군 하후현, 하후현의 여동생으로 남편 사마사의 역심을 눈치챘다가 남편에게 독살당한 경회황후 하후휘도 있다.

하후연의 아내는 조조의 처제였는데 조조의 전처 정부인의 여동생인지, 조조의 후처 무선황후 변씨의 여동생인지 불확실하다.

5. 평가

조조 휘하의 친족라인 장수들 가운데 하후연만큼 평가가 갈리는 인물도 드물다. 그를 비판하는 이들은 무공만 앞세운 백지장군이라는 평가를 내세운다. 반면 그를 옹호하는 이들은 하후연은 조인과 함께 충분히 조조 휘하 친족 장수 라인의 투톱을 차지할 만하다고 평한다. 당장 정사에서도 하후연이 전사하자 조조가 소리내어 울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본 문서도 이런 관점에서 긍정론과 부정론이 혼합되어 있고 간간히 수정전쟁이 발생하고 있다.

일단 양측의 의견을 종합해 결론을 내자면 분명히 역량은 뛰어났으며 경험도 충분한 장수였으나, 용맹에 의존하고 너무 솔선수범하여 선봉에 서는 일이 많았기에 전사당한 비운의 장수. 변방의 도적이나 지방군벌, 반란군을 제압하는 것에 많은 성과를 낸 용장이라는 점이다. 특히 강적 마초가 있는 관중 일대를 깔끔히 평정한 것은 지대한 공이라고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차남인 하후패도 아버지처럼 직접 전선에 나와서 싸우는 방식을 선호했다. 아버지가 직접 전선에 나섰다가 결국 화를 자초했다는 점을 보면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이런 식으로 장수 교육을 받았거나 부자가 선천적으로 이런 식의 싸움이 맞았던 모양이다.

5.1. 부정적 평가

관도대전 이전의 시기는 조조가 입지를 다지던 때로서, 대표 명장 오자양장의 라인업이 채 갖춰지기 전이며, 자연히 친족들이 활약할 기회도 더 많았다. 형양 전투에서 조조를 구한 조홍, 연주를 방어하고 여포와 싸운 하후돈, 숱한 초기 정벌전에서 활약한 조인의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하후연은 조조의 거병 시절부터 종군했으면서 의외로 관도대전까지 별다른 기록이 없다. 동시기에 조인은 조조군 초반의 거의 모든 적들과 싸우면서 전공을 쌓았고 하다못해 하후돈조차도 여포에 맞서 성을 지킨 기록이 있음을 감안하면 더욱 이상한 부분. 물론 하후연 역시 잡다한 일을 맡아 조조를 수행했겠지만, 이는 결국 하후연이 처음부터 특출난 군재를 뽐내던 인사는 아니었음을 뜻할지도 모른다.

조조군의 최대 사업인 하북 평정이 전개되던 때엔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 명장 대다수가 조조와 함께 남피, 업, 호관, 유성 등지에서 활약하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하후연은 이 정벌에 참전한 기록은 없고 잡다한 반란군 토벌에만 쓰이고 있었다. 조조군의 명장들이 하북 각지를 정복하던 시점에, 하후연은 후방에 남아 있었단 뜻이다. 원가에 비하면 군대의 규모나 지휘 계통 모두 처지는 군소 반란군 토벌에만 쓰인 것을 감안하면, 하후연은 애초부터 정복 전쟁을 수행한 명장이 아니라, 애시당초 후방에서 반란 진압과 보급을 전담한 장수임을 알 수 있다. 훗날의 행보로 보아, 조조의 기준에 하후연의 군재는 아직 정벌에 나설 수준은 아니고 하후연을 사령관의 재목으로 키우기 위해 이런저런 경험을 쌓게한 것으로 추측된다.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선 하후연은 충실히 조조의 명을 이행한 괜찮은 장수에 속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후연의 단점은 용맹에만 의존해도 충분했던 토벌 대장의 사고 방식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정사에 기록된 하후연의 계책은 그 모두가 용맹에 의존하는 방식이었다. 하후연의 이런 기질은 차후 그의 발목을 잡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마초를 공격할 때는 빨리 들이치면 이긴다였다. 이는 어떤 치밀한 전략에 대한 '사령관의 구상'이 아니라, 우리가 세니까 이래도 된다는 '장수의 용맹'에 가까웠다. 한수를 공격할 때도 하후연의 지모는 허를 찌르는 지모라기보단, 공성은 몰라도 야전은 우리가 이긴다는, 본인 군대의 용맹성을 신뢰한 결정에 가깝다. 그렇게 끌어내서 적이 대거 도착했을 때도 숫자만 많지 쉬운 상대다라며 적을 공격했고, 결국은 승리했다.

하후연의 가장 큰 전공인 관중 평정은 장합, 서황, 주령 등 당대 톱 클래스의 지장들과 함께 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측면도 크고 실제로 장합, 서황의 열전엔 하후연을 도와 실제 정벌을 벌인 정황이 역력하며, 실제로 마초와의 1차전에서 한 차례 패배한 하후연은 2차전에선 가장 강한 카드인 장합을 앞세우고 자신은 후방으로 빠져 장합의 보급을 맡은 뒤, 장합이 마초를 몰아내자 진군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관중 평정 당시의 마초군과 한수군이란 이미 212년 당시 위수 전투에서 10만에 달하는 주력이 다 털린 상태였다. 그들의 기세가 예전같지 못했고, 양부, 강서를 위시한 농우 지방의 관리들 또한 관중군벌을 버리고 위나라 쪽으로 돌아섰기에 그처럼 손쉬운 승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마초는 겨우 1만명 정도의 군세를 이끌고 당시 관중 사령관인 하후연을 한차례 몰아붙여 퇴각시키기까지 했다. 물론 이건 조조를 거의 죽일뻔했던 강적 마초를 상대로 한 전적이고 마침 반란까지 일어났기 때문이니 아예 옹호 못할 부분은 아니지만서도...

하후연이 맹장임에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선봉이나 후방 지원용 장수로서는 나무랄 데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하후연의 용맹 의존은 좋게 말하면 과감함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무모함이었다. 때문에 조조는 거듭된 승리에도 하후연의 용맹 의존을 경계했다. 그러나 문제는 사령관으로서의 자질을 위해 중요한 '용맹에만 의지하지 말라'는 조조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다. 군량 보급 매니아이자 닥돌도 마다하지 않는 솔선수범형 지휘관인 하후연은 이 말이 전혀 와닿지 않았던 듯 싶다. 그리고 사실 하후연은 조조 밑에서 30년 간 종군하면서 선수필승의 원칙을 시종일관 고수했고, 한중 공방전을 제외하면 이게 언제나 먹혀서 실제로 필승공식화 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까놓고 조조 역시 지나친 과단성으로 인해 위험에 처할 뻔한 일이 꽤 있어서 조조의 말은 설득력이 없었다.

어쨌건 지휘관이 최선두에서 전황을 파악해야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하인츠 구데리안의 견해도 있지만 그건 제대로 했을 때의 얘기일 뿐이다. 적이 기습했는데도 사령관이 장막 안에서 보고만 받는다면 그건 그거대로 욕먹을 일이지만, 문제는 하후연 같이 너무 솔선수범하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곤란하다는 점이다. 적에게 지휘부를 무방비로 노출하는 장수는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지휘관 실격이다. 하후연의 죽음은 용맹 과신이 낳은 예견된 참사였다. 총사령관 신분을 망각하고 적에게 뻔히 노출되는 상황을 초래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어쨌거나 한중공방전에서도 장합과 서황은 각각 광석과 마명각에서 유비군을 격퇴하며 하후연을 철통같이 지켜주었다. 이럼에도 상황은 여전이 유비군쪽으로 유리하게 흘러가는 마당이어서 마땅히 조심할 필요가 있었는데 결국 정군산 전투에서도 적의 눈 앞에서 총지휘관이 신변을 노출해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직접 진채를 보수한다는 기상천외한 만행을 저지르며 자신을 죽음으로 내 몰았다.

법정은 하후연과 장합을 모두 쉬운 상대들이라고 평한 바 있지만, 유비 제갈량 이하 모든 장수들은 언제나 장합을 두려워했고 하후연이 죽자 유비는 장합을 잡아야지 이런 건 잡아서 어디다 쓰냐고 평했다. 위군 내에서도 총대장이 참살되어 군심이 혼란한 순간에도 장합에 대한 믿음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전투 전에 아군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적장을 까내리는 건 흔한 일이나, 하후연에게 부족한 점은 이처럼 그가 상대한 적수들은 물론, 아군들조차도 그에 대해 보인 반응이 미미하다는 점이다. 하후연의 영향력이란 것도, 하후연 사후에 보여준 위군의 행보를 생각하면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고금을 통틀어 지휘부의 궤멸은 패배로 직결된다. 그러나 총대장이 전사한 상황에서도 곽회는 침착하게 장합을 대장으로 추천했고, 이에 장합이 군을 정비하자 전군이 안정을 되찾았음은 물론 한술 더 떠 직후에 이어진 유비의 공세를 막아내기까지 했다. 결국 장합이 이끄는 위군은 조조의 본대가 장안을 출발해 도착할 때까지 유비군에 맞서 한중 전선의 방어에 성공했는데, 이 모든 것이 하후연이 사령관일 때보다도 더욱 줄어든 병력과 사령관의 죽음으로 떨어진 병사들의 사기로 이뤄낸 결과였다. '사령관 하후연'의 존재감이 얼마나 미미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

'사령관 하후연'에 대한 혹평은 유비뿐만 아니라 이미 조조군 내에서도 만연한 관점이었다. 군중에서도 하후연을 가리켜 백지장군이라는 조롱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조조 본인부터가 하후연에게 용맹에만 의존하지 말라는 주의를 수 차례 주고 있었지만 하후연은 지키지 않고 죽었고 조조는 이 일로 어지간히 화가 안 풀렸는지 위무군책령에서 백지장군이라고 강하게 하후연의 실책을 디스했다.

물론 백지장군 운운은 적벽에서의 패배 후 그런 것처럼 조조가 습관처럼 하는 변명일 수 있고, 여러가지 이유에서 나온 조조의 오버일 수 있지만, 하후연의 패배와 당시 평을 감안하면, 그저 흘려 들을 말도 아니다. 군중에서도 하후연에 대한 모욕적인 별명이 공공연히 돌았고, 조조 본인부터가 하후연의 자질에 대한 경고를 지속했고, 종국엔 회한 섞인 통렬한 비판을 가해던 점 등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를 실질 이상으로 고평가하기는 어려워진다. 사서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하후연에 대한 거의 유일한 찬사가 바로 조조의 안회 드립인데, 해석하면 조조 자신도 하후연의 용병술엔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나 사실 하후연이 조조보다 뛰어난 인물이라 보긴 힘들고 그만큼 조조가 하후연의 전공을 가상하게 생각했다고 보는 게 옳다. 그마저도 얼마 안 가 예전처럼 백지장군으로 회귀됐으니 애초에 찬사 자체의 무게가 컸다고 보긴 힘들다.

조조가 하후연을 사령관으로 쓴 이유는 당시 조조의 군권 분배 경향에 기인하는데, 당시 위나라의 전선을 책임지는 대장은 모두 조씨 일족이었다. 하후돈이 거소호구에서 26군을 이끌었고, 조인은 번성에, 하후연은 한중에 주둔했다. 다른 장수는 그렇다쳐도, 하후돈은 굉장히 예외적인 인사인데, 이러한 친족 우대 정책은 훗날 조비에게로 그대로 계승되어 하후돈→ 조휴(회수), 하후연→ 조진(관중), 조인 → 하후상(형북)으로 교체되면서 조씨 일족의 군권을 더욱 굳혀나가게 된다. 조휴, 조진이 비록 유능하지만 장료, 장합에 비해 경력이건 실력이건 뒤쳐짐에도 사령관을 해먹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런 친족 우대 정책에 힘입은 바가 크며, 하후연에 대한 인사도 이와 다르지 않다.

너무 혹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당대부터 하후연은 피아 양측에게 그저그런 장수로 인식되었고, 후대 왕조에서도 역대 명장을 기리는 무성왕 묘에 분봉되지 못했으며, 똑같이 무성왕 묘에 분봉되진 못했지만 장합, 서황 등이 광명장전이나 십칠사백장전 같은 저술에선 명장으로 언급되는 것과 달리, 하후연은 여기서도 뽑히지 못했다. 물론 이런 사찬서의 선발이 명장의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후대에서도 딱히 재평가 받진 못했다는 의미다.

여러모로 군재가 뛰어난 장수들은 적, 아를 가지지 않고 위협적인 장수라던지 하는 말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당장 하후연과 입장이 비슷한 조인의 경우만 해도, 장수로서의 군재나 위용에 대해선 조조의 입이 아니라 진교나 부현 같은 타인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반면 하후연에겐 그런 부분은 전혀 없다. 결국 변방의 군벌들이나 반란군을 상대할 만한 용장이었으나 유비 같은 강자와 붙을 만한 사령관 재목은 아니었던 것.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위나라에서 사령관 신분으로 전사한 장수는 오직 하후연 뿐이다.

5.2.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우선 관도대전 이전에도 오자양장 우금 악진, 서황은 이미 조조군에 있었으며 조조를 수행하여 여러 전쟁에서 공을 세운 바 있다. 동 시기에 조조의 친족 장수들은 맡은 역할이 다른 무장들과 상이한 부분이 있다. 하후돈은 동군 태수이자 복양의 수비를 맡고 있었고, 하후연은 진류와 영천 태수였으며 조인은 광양 태수를 맡고 있었다. 이는 군재의 문제를 따지기 이전에 조조는 자신의 영지의 태수 자리를 친족들에게 맡기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친족 무장 4명 중 조홍만이 태수를 맡지 않고 있었다. 이중 조인의 경우는 조조가 용략을 높이 평가하여 태수로서 군에 두지 않고 기병을 지휘하게 하였기 때문에 하후연보다 조인의 군재가 뛰어났음은 알 수 있지만 그것이 하후연이 군재를 뽐내지 못했다는 평가로 이어질 수는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태수로써의 역할은 직접 공격전에 나서는 무장의 역할 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없으며 이를 잡다한 일을 맡아 수행한 것으로 이야기할 수도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동 시기 하후돈의 전투 관련 기록이 더 많은 것도 이해할 수 있는데 장막 여포가 기습한 곳이 다름 아닌 복양이었기 때문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관도대전 시기의 하후연이 후방 안정과 보급을 주로 담당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선 후방 안정과 보급이 중요하지 않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된 생각. 특히 보급의 경우 하후연이 보급을 보내 군이 분발할수 있었다는 기록이 남았을 정도로 잘 되었는데, 상당한 공으로 볼 수 있다. 참고로 관도대전 당시 원소군 내부에서 장수로서 가장 급이 높았던 순우경이 했던 일이 군량고 호위이며, 제갈량의 북벌 때 보급을 전담했던 것은 2인자인 이엄이었다. 그만큼 고대의 전쟁에서 보급은 중요한 문제였다. 물론 하후연이 관도대전의 보급의 총책임자는 아니었으나, 관도대전 이후 연주, 예주, 서주 3개주에서 군량을 징수해서 전방에 보급했을 정도로 큰 영역을 담당했고, 이를 아주 원활하게 해냈다는 것이 별도로 기록되어 있었을 정도. 적어도 상당 수준의 통솔력과 업무능력은 갖춘 인사였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후연을 단순히 용맹에만 의존한 무부로 보는것도 지양해야 할 사고 방식이다. 하후연은 내정관으로서도 일했다.

반란군 토벌을 다른 명장들은 (반란군이 질이 낮아)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역시 사실이 아니다. 주로 후방 수비와 보급을 맡았던 하후연이 처음 공격전에 활약한 것이 다름 아닌 창희의 반란인데, 원래 창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장수는 우금이다. 우금은 이미 여포, 장수, 원소와의 싸움에서 전공이 많았는데 이러한 우금이 투입되었다는 것 자체가 반란군 토벌을 별 것 아닌 수준으로 폄하할 수 없는 부분이다. 더욱이 이 전투에서 우금이 이기지 못하자 추가로 투입된 것이 하후연이었다. 그 다음 공격전은 여강의 뇌서와 이어서 상요를 토벌한 것이었는데, 정사의 기록에서는 하후연이 제장들을 거느리고 공격을 했다고 나오며 그 제장 중에는 오자양장의 일인인 서황이 포함된다. 따라서 원소와 비교하면 당연히 이러한 반란군들이 처지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하여 우수한 장수들을 투입하지 않고 그저 그런 장수들로 토벌을 한 것은 아니다. 거기에 당시 조조군은 풍부한 장수 인력층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인재들을 지속적으로 지원해주고 보급해주어 승리를 거두거나 조조 휘하에서 조조의 통솔을 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하후연이 장합과 서황을 지원받았다고 해서 하후연의 군재 자체가 폄하받을 일이 아닌 것이다.

또 하후연의 전사 당시 상황을 옹호할 수 없는것은 아니다. 한중 공방전에는 군주 유비, 참모 황권 + 법정, 장수 황충 + 조운 + 장비, 군수 담당 제갈량, 후방 책임 이엄 등 촉의 초호화 공격진이 투입됐으니, 하후연으로선 변명의 여지가 있을만도 하다. 또한 장합 역시 한중 공방전 당시 장비에게 대패를 당하는 등 전반적으로 촉군의 기세가 매우 강성했다. 당시 상황은 녹각 하나가 불타서 고치러 간 것이 아니라 유비군이 돌아다니면서 사방팔방 공격하며 여러군데서 녹각을 불사르며 날뛰고 있던 상황이었고 하후연 뿐만 아니라 장합도 동원돼서 여러 군데서 치고 들어오는 유비군을 방어하며 녹각 수리와 방어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적군을 상대하려면 실시간으로 정보를 취합하고 합당한 명령을 내려야 한다. 멀찍이 떨어진 안전한 곳에 있다면 위험부담은 적었겠지만 효율은 나쁘고 가까이 있다면 위험부담은 올라가지만 효율이 좋다. 먼 훗날 1차대전기에도 프랑스나 독일의 장군들은 전선지휘를 위해 일선에 섰다가 무수히 죽어나갔다. 위험한 걸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알면서도 나가야 하는 게 전쟁이다.

게다가 하후연같이 조조군 초창기 거병 시절부터 함께 했던 장수는 당연히 솔선수범 하며 바쁘게 뛰어다녀야 했을거고 이렇게 쌓인 경험과 습관을 나중에 부대 규모가 커진 뒤에도 버리기는 쉽지 않았을것이다. 당시 지휘관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전장에서 목숨걸고 앞으로 나서야만 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경솔한 행동이 아니라 합리적인 판단인 경우도 있었다. 하후연이 녹각 보수한다고 나섰던 것도 매우 혼전인 상황이라 총사령관으로 전황을 파악하고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였다. 하후연에게는 불행하게도 촉군이 그점을 정확히 노리고 있었기에 마지막 전투가 되어버렸지만. 거기에 하필 유비가 장합에 싸움을 걸었는데 장합군이 불리한 상황에서 하후연이 지휘하던 병력의 절반을 나누어 장합을 돕게 한 직후 하후연이 기습을 당한 것이다. 하후연의 패배는 단순히 하후연만 아니라 당시 위군 전체가 얼마나 수세의 입장에 몰려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고, 실제로 정사에 기록된 정군산 전투의 전황을 보면 당시 위군은 성동격서의 계략에 알면서도 당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일단 화공으로 적의 주의를 흐트려 놓은 후 정예 단병으로 기습한 것 자체가 법정의 뛰어난 계략으로도 볼 수 있으며, 무엇보다 이 야습으로 인해 장합이 하후연의 본영에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밀리기 시작한 시점에서 이미 위군은 외통수에 몰리고 반대로 유비군에게는 적이 어떻게 나와 주든 그만인 상황이 주어진 것이다. 하후연이 장합에게 구원군을 보내면 실제 역사대로 하후연을 잡을 수 있는 것이고, 보내지 않아서 하후연 기습에 실패해도 그냥 고전하고 있는 장합을 계속 몰아쳐서 패퇴시키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8] 때문에 이 상황에서 하후연이 유비의 계략을 간파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겠으나, 어쨌든 하후연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결국 장합에게 구원군을 보낸 뒤 자신을 노린 기습을 어떻게든 자력으로 막아내는 수 밖에 없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결과가 좋지 않았으나, 적어도 하후연이 한중공방전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를 골라 고군분투했다는 점은 인정받아야 한다. 한중공방전 문서나 그와 대적했던 마초, 한수 문서를 보면 사령관으로서 하후연이 단순한 용맹만이 아니라 장수로서 예민한 전략, 전술적 감각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장합이 사령관이 되자 안정되었다는 부분도, 장합의 능력이 우수했다는 근거는 될 수 있어도 하후연의 존재감이 미미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당장 장합전의 기록을 보더라도 하후연의 전사로 인해 조조군의 사기가 크게 흔들렸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하후연의 사망이라는 것이 분명히 조조군에 영향을 줬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곽회가 장합을 언급하며 군을 수습한 것은, 유비의 언급과 더불어 그만큼 장합의 존재감이 컸다는 것이지 하후연의 존재감이 없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또 유비 역시 하후연을 잡아다가 어디다 쓰겠느냐면서 투덜거렸지만 정작 황충은 이 공으로 사방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참고로 하후연은 황건적이나 지방군벌 수괴가 아니라 유비가 주력군을 이끌고 무려 1년간 대치한 조조군의 사령관인 만큼 그냥 넘어갈 전공이 아니다.[9] 유비가 저렇게 말한것은 아직 한중에서 위군의 세력이 남아 있으니 분발해서 당시 한중에 있는 위군에서 하후연 다음가는 위치이자 위군에서 가장 위협적인 장수인 장합을 잡아야 한다는 독려의 의미로 쓰였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다. 간단하게 생각해서, 정군산에서 하후연이 살아남고 장합이 전사한 상황을 가정했을 때 유비가 과연 '더 무서운 장합을 잡았으니까 하후연 놓친 거는 괜찮다'고 말했을까? 당연히 '부장 따위 죽여서 어디다 쓰겠냐, 총사령관이 아직 멀쩡히 살아 있다'는 식으로 얘기했을 것이다.

조조가 백지장군으로 부르며 하후연의 군재에 대해 비판했단 것도 정도 이상으로 비판한 경향이 있다. 정사 기록에 따르면 강족이나 호인을 접견할 때마다 조조는 하후연을 대동하여 그들을 두렵게 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당장 서북 방면에서 용맹에 의존한 용병술이었다고는 해도 큰 공을 많이 세운 만큼 서북이나 서북의 이민족들에게 충분히 위협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총사령관으로써의 군재는 아닐지 몰라도, 위협적인 장수가 아니었다거나 장수로서의 위용을 알 수 있는 부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의 사례로서는 충분하다. 또한 우금이나 악진과 같은 경우도 인물에 대한 칭찬은 조조 본인이 남긴 것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데, 그렇다고 위협적인 장수가 아니었다고 할 수 없다. 이미 여러 전공이 있었던 우금, 악진과 마찬가지로 서북에서 충분히 공을 세운 하후연을 단순히 타인의 평이 적다 하여 위협적인 장수가 아니었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되는 평가라 하겠다.[10]

사실 이 난리가 날 때까지 조조 본인은 후방에서 한중을 구원하는데 미적거리고 있었고 유비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전력을 투입한데 반해 하후연은 파군에서 장합이 장비에게 궤멸적인 패배를 당해 이미 병력이 부족해진 상황이었음에도, 조조는 218년 9월 이런 사태를 파악하고[11] 한중으로 유비를 공격하기 위해 친정을 결의한 후 반년을 장안에서 하후연이 싸우는걸 관망만하며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따라서 분명히 한중전 패배는 하후연에게도 책임은 있는게 사실이지만 이렇게 악조건 속에서 분투한 하후연을 상대로 조조가 하후연이 무조건 잘못했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 역시 어느 정도는 가려서 들을 필요가 있는것도 사실이다. 물론 조조가 당연히 친인척인 하후연을 아끼기야 했겠지만 그러나 오히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조조는 자기의 실책 일정부분을 오랜기간 같이 다녔던 숙장 하후연에게 떠 넘기고 '걔는 원래 그랬는데 내 말을 듣지 않아 이렇게 된 것이다' 라며 자기 책임을 면피하려 했다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12][13]] 그 하후연을 한중 지역 사령관에 임명한게 조조이고, 더군다나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평소에 하후연이 너무 용맹에만 의지한다고 조조가 충고했다는데, 하후연의 단점이 사실이라고 하면 조조는 이런 단점을 알고서도 임명한 셈이다. 하후연이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조가 "나는 예전부터 현덕이 이 같은 일을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니 필시 남의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알았다." 정신승리를 했다는 기록을 보면 조조에게 하후연의 전사는 보통 충격이 아니었던게 분명하고 핑계를 대거나 정신승리를 할 재료가 필요했을 것이다. 용병에 능하지 못하다거나 백지장군이라는 좀 너무한 평은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또 무성왕표나 십칠사백장전과 광명장전 평가도 그렇다. 여기에 나오는 삼국지 시대 인물이 30명도 안되고 무성왕묘엔 중국 4천년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들만 들어가서 훌륭한 공적을 쌓았지만 여기에 못 들어간 장수들도 수두룩하기 때문에 재평가의 기준이 너무 높다. 무성왕묘에 분봉된 인물들만이 명장이라는 논리라고 하면, 삼국시대 인물 중에서는 오로지 제갈량, 관우, 장비, 장료, 주유, 육손, 양호, 왕준, 육항, 두예, 여몽, 황보숭 정도만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절대적인 기준이 아님은 물론이고 이 기준을 적용하면 흔히 삼국시대의 명장으로 이야기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제외되며 위에서 칭송한 장합도 여기에는 들지 못한다. 광명장전의 경우도 장합, 서황이 들어가는 것은 맞지만 삼국시대 인물은 후한말 이민족 토벌에 공을 세운 단경을 포함시켜도 19명만이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십칠사백장전에도 역시 19명만이 등재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대단히 불공정한 주장이다. 참고로 이론의 여지 없이 위의 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조인 또한 위에 언급된 무성왕묘 분봉, 광명장전, 십칠사백장전 모두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이후에도 이전에도 사령관으로서 죽은 건 하후연 뿐이라지만, 당장 조조 자신도 여러 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죽을 뻔한 일이 많았고,[14] 하후돈은 연주 방면의 후방 방어를 맡았다가 여포에게 포로로 잡혔으며, 조조의 정예 7군을 사령관으로서 이끌었던 우금 방덕도 관우에게 사로잡히거나 죽임을 당하였고, 장합 사마의의 명령을 받고 목문도 전투에서 촉의 복병들이 쏜 화살 세례를 받고 전사했다. 이런 사항을 빼놓고 하후연만 그랬다고 하는 것은 사실에 대한 호도에 가깝다.

6. 기타

  • 현재 하후연의 무덤은 허창시 건안구 하장촌에 있는 기업 시노펙 내부에 있다. 중국의 국영 기업인데다 사유지에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일반인은 사실상 관람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15] 한국의 유튜버 '기행장군 양양이'가 수소문 끝에 무덤의 위치를 알아냈지만 상기한 특성 때문에 방문을 사실상 포기를 했을 때 기적적으로 사전에 신청한 허창시 문화재국이 방문 신청을 허가하여 무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데 성공했다. 영상

7.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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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후이성 보저우시 [2] 하술된 일곱 아들들과는 또다른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3] 장비의 아내 하후씨일 가능성도 있다. [4] 후일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촉군과 위군이 맞붙은 가정성이다. [5] 당시에 씨앗을 뿌려도 열매를 맺기는커녕 풀 한 포기조차 도무지 자라질 않는 땅을 백지白地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 선진에 서서 무용이나 뽐내면 족한 선봉장과는 달리, 높은 지위의 지휘관, 사령관의 직무를 맡게 되어 그에 합당한 지휘관으로서의 임무가 내려지는 동시에 여러 위기와 사태를 맞는 것은 결국 지휘관, 사령관의 자질이 배양되고 발현되어야 할 씨앗이 뿌려진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인데 하후연은 지휘관으로서의 면모가 성장하거나 대두하는 등 열매를 맺지 못하고 녹지綠地를 이루지 못한 맨땅白地, 척박한 땅 그대로의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 이를 비유하여 백지장군이라 한 것이다. [6] 이후 서황이 과녁 너머에 있는 나뭇가지를 맞춰 하후연을 관광시켰는데 어째 서황의 궁술에 대한 2차 창작은 거의 없다. 아무래도 서황은 대부를 들고다니는 모습이 더 인상적인 탓인 듯하다. [7] 그 이전에는 딱히 그렇게 보일만한 묘사는 별로 없다. 정사에도 지모가 모자란 장수라고 표현해도 난폭한 성격까진 아니다. [8] 하후연이 장합의 위기를 보고받자 곧바로 자기 병력의 절반을 원군으로 파견한 것에서 알 수 있다시피, 당시 장합 쪽을 공격했던 촉군의 전력은 단순히 장합의 구원요청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준을 넘어서 하후연의 원군이 없었다면 장합을 충분히 격퇴할 수 있었을 정예들이었다. 만약 하후연이 성동격서 계략에 걸리지 않을 경우, 장합을 격파하여 우위를 점하는 플랜B가 있었음을 어렵잖게 짐작 가능하다. 다만 하후연 대신 장합을 전사시키는 것이 가능했을지는 의문. 하지만 하후연의 병력 절반이라는 기록을 신뢰할 경우 그 정도 규모의 구원군이 가야했고 또 그만큼의 구원군이 빠진 상태에서 싸운 하후연은 패사했을 정도로 상황이 급박했고 난전에서 화살은 상대가 지장인 장합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피해가는게 아닌지라 장합이라도 위태로웠을 것이다. 수년 후 실제로 장합의 사인은 매복에 걸린 결과이긴 했지만 당시 병력의 질이 한중 공방전 당시 패퇴당하는 수순의 위군보다 못하다고 하기 무리인 위군을 이끌고서도 멀리서 쏘는 촉군의 화살을 당시 기준 고령일 때 허벅지에 맞아서였다. [9] 애시당초 군재가 없었다면 전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유비 상대로 이렇게 버티지도 못한다. 조조의 상장들 가운데 단독으로 유비를 감당해서 승리를 거둔 경험이 있는 장수는 조조 친족라인 최고 장수인 조인 정도뿐이다. 그리고 조인이 격파한 것도 유비가 온전히 지휘하는 직속 병력이라고 하기는 힘든, 원소에게서 받아 새로 지휘하게 된 병력을 격파한 것이다. [10] 오히려 사방에서 만인지적이라고 칭송받은 촉의 관우와 장비, 손권이나 유비가 걱정하고 꺼렸던 위의 장료와 장합, 조조더러 '저놈이 죽지 않는다면 내가 묻힐 땅이 없겠구나'로 말하게 했고 유비에겐 '마초를 얻었으니 익주는 이제 내 손에 들어왔다'라고 기뻐하게 만든 마초처럼 타 세력에도 명성이 널리 알려진것이 특이한 경우다. [11] 사실 이미 탕거전투까지 치면 216~217년 사이에는 조조도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고 봐야하니 년도수로 따지면 훨씬 더 전에 알았다. [12] 비슷한 예로 유비가 형주에서 손권의 뒷치기와 미방의 배신으로 형주를 잃고 관우가 전사했을때 관우, 미방의 형 미축을 책망했는가? 오히려 유비는 배신자 미방의 형인 미축이 자신의 몸을 묶고 죄를 청했을때 오랜 공신인 미축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며 위로하고 존숭하여 대우하길 처음과 같이했다. 그리고 30여년간 같이 다니던 숙장 관우의 죽음에 울분을 금하지 못하여 이릉대전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의 냉정한 처신에는 조조가 더 나았을 수도 있지만 인간적인 도리로서 따지면 조조는 평생 자신을 따른 숙장이자 친족이 그를 위해 분투하다 죽었음에도 냉혹하게 그의 죽음을 비하하고 깎아내린것도 사실이다. [13] 그리고 유비가 오와 싸운 건 단순한 감정적 행동이라고만 볼 수 없다. 기세가 솟던 촉이 갑작스럽게 관우와 형주를 잃고 그 기세가 꺾이며 동요가 일자 이런 기색을 가라앉혀야 했고, 공적으로도 형주 탈환 및 오나라의 노골적인 도발을 그냥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이릉대전 결과만 보고 유비가 감정적인 면을 앞세워 부른 화근이라고 무작정 여길 수 없는 일이다. [14] 우선 동탁을 혼자 추격했다 매복하여 기다리던 서영에게 전멸당해 본인은 조홍의 목숨을 건 호위로 겨우 도망쳤으며, 완성에서는 장수의 숙모 추씨를 함부로 취하고 이를 원망하는 장수를 오히려 죽이려들었다 먼저 선빵을 날린 장수 때문에 아들과 조카, 호위장수를 잃고 도망쳤다. 적벽대전에서는 대패하여 필사적으로 화용도에서 길을 만들어 퇴각했고, 관중 군벌들과의 전투 때는 마초의 급습을 받아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15] 보안상의 이유로 지도에도 안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