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魏) 국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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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위왕(西魏王)
魏豹 위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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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서위왕(西魏王) | |
성 | 희(姬) | |
씨 | 위(魏) | |
자 | 표(豹) | |
고향 | 안읍(安邑) | |
사망지 | 형양(滎陽)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204년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207년, 기원전 208년 ~ 기원전 205년 3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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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초한쟁패기의 인물이자, 군벌 또는 제후왕 중 하나. 보통 《 사기》 등에선 위왕 표(魏王豹)로 기록되곤 한다.2. 생애
구 위(魏)나라 왕족 출신[1]이나, 진승(陳勝)의 봉기 이전까지는 자세한 행적을 알 수 없다. 진승 휘하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초의제나 항량 일가처럼 초야에 숨어지내고 있었을 수도 있다.어찌되었든 진승은 휘하의 장수인 주불을 보내 옛 위나라 땅을 평정하고 위왕에 앉히려 했으나, 주불은 희성 위씨 왕족 출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며 사양했다. 그리하여 위표의 형인 위구가 위왕으로 옹립되었고, 위표도 이때부터 역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위나라 부흥의 꿈도 잠시, 진승의 세력은 금세 와해되었고 진나라의 명장 장한의 무서운 토벌이 시작되었다. 관중 근방인데다가 아직 세력이 약한 위나라는 바로 토벌 대상에 오르게 되었다. 이에 초나라와 제나라에 원군을 청했지만, 임제에서 원군으로 온 제왕 전담이 전사하고 항타와 전파가 이끄는 초나라의 원군도 격파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위구는 군민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결했고, 위표는 도주했다.
이후 위표는 초나라에서 객장 비슷하게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사기》의 <위표팽월 열전>에 따르면, 거록대전 전후 위나라 땅의 20여 개 성을 수복해 장악했고 항우의 입관에 종군했다고 한다. 그러나 <진초지제월표>에 따르면 거록대전 이전에 이미 평양을 서울로 삼고, 위나라를 재건해 거록대전에 원군을 보내었다고 해 시점이 맞지 않는다. 어쨌든 항우와 함께 함곡관에 입성한 것은 분명하며, 진나라의 멸망 이후 서위왕(西魏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옛 위나라 전역을 받은 것은 아니었고, 구도 대량과 동쪽을[2] 서초패왕 항우에게 양도한 분봉이었다.
곧 세상은 다시 어수선해졌고, 유방이 한중에서 나와 관중을 탈환하며 동진했다. 사마흔과 동예가 항복하고 장한과 정창이 격파되는 상황에서, 위표는 친히 군마를 이끌고 유방에게 투항했다. 그리고 유방을 따라 종군하면서, 서초 땅으로 편입된 구 위나라 동부를 휘젓는 팽월을 유방의 지시로 자국의 상국으로 삼았으나, 팽월은 이후로도 위표의 지휘를 받지 않고 독자적인 군권을 받아 그 지역에서 계속 활동했다.
그런데 유방이 팽성대전에서 참패하자, 위표는 형양에 함께 있다가 부모의 병환을 핑계로 영지로 돌아가 서초에 붙어 한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정치적으로 보면 대패한 한나라의 역량이 못미더워서였겠지만, 이에는 좀 황당한 다른 이유가 있었다. 위표는 당시 유명한 관상쟁이였던 허부로부터 자신의 첩인 박희(薄姬)가 천자를 낳을 상이라는 말을 듣고, 자기 아들이 천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김칫국을 거하게 들이키고 유방과 항우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유방은 역이기를 보내 설득했지만, 이번에는 '유방 그 인간은 욕이 너무 심하고, 사람을 순 노예처럼 대해서 싫다.'고 거부하여 실패하고[3] 결국 한신이 파견되어 안읍 전투에서 위표를 격파했다. 위표의 영지는 하동군으로 재편되어 위표는 졸지에 영지까지 몰수당하게 되었다. 이때 박희는 한나라의 베 짜는 종이 되었다가, 나중에 유방의 후궁이 되어 한문제 유항을 낳았으니 결과적으로 예언 자체는 완벽히 들어맞은 셈이었다. 그러나 《사기》 <위표팽월 열전>이나 《 한서》의 <위표전담한신 열전>에는 점쟁이 어쩌고 하는 기록이 없다. 상식적으로도 난세에 몸을 일으켜서 일국의 왕까지 된 사람이 일개 관상가의 말 하나에 좌우될 정도로 귀가 얇았을 가능성은 높지 않고, 나름대로 정세 분석을 하고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언이 맞아떨어지는 것은 고대 사서의 흔한 클리셰로, 거의 후대의 창작이 많기 때문에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
허나 재미있게도 유방은 위표의 첩인 박희를 빼앗아 자신의 후궁에 넣은 후에도 전남편인 위표를 죽이지 않고 계속 막하에 부하로 두었다. 심지어 기원전 204년 유방은 기신의 희생으로 도주할 때 형양의 수비를 종공, 주가, 한왕 신 그리고 위표에게 맡겼다. 형양 수비군은 유방의 도주를 위해 시간을 벌어야 했는데 충의로운 자를 남겨도 모자를 판에 위표를 둔 것은 기묘한 일이었다.[4] 심지어 위표가 죽은 이후에도 유방은 팽월에게 왕위를 주기 전까지는 형식적으로는 그를 위표의 상국으로 배속시켜 놓고 있었으니, 유방은 그를 서위왕에서 폐한 대신 팽월이 휘젓고 있는 동부 위나라 지역, 즉 훗날 양나라의 제후왕으로 대우한 것이다. 그가 끝까지 항우와 싸워 살아남았다면 팽월을 대신해 양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주가와 종공은
"나라를 배신한 적이 있는 왕과 함께 성을 지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라는 결론을 내리고 위표를 죽였다. 그렇지만 유방보다 훨씬 과격한 항우의 성격상 자신을 배신한 놈을 살려둘 리가 없으니 종공과 주가가 아니었더라도 어차피 항우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3. 대중매체에서
대체로 대중매체에서 위표는 가벌의식에 찌들어 허세에 찬 비열한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당시 초, 한을 오가며 줄타기한 인물이 위표만은 아니었다.원래 항우의 부하였던 진평이나 자신을 제대로 대우안해주는 항우 곁을 떠났다가 유방도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는 듯하자 떠나려한 한신은 말할 것도 없고,무려 3번이나 세력을 바꿔탄 은왕 사마앙이나 마찬가지로 원래 항우의 부하였던 하남왕 신양, 구강왕 영포 등 세력을 갈아탄 경우는 제법 많이 있었다. 게다가 위표는 팽성대전 후 여타 제후처럼 바로 손바닥 뒤집듯 서초로 붙은 것이 아니고, 유방이 전열을 재정비한 후 영포를 회유할 때까지도 같이 있었다. 상당히 나중에 초나라로 귀순한 것이다.그럼에도 초한쟁패기의 대표적인 배신의 아이콘으로 비하된다. 아마도 부모팔이까지 하면서 배신한 것과,[5] 그의 첩이었던 박희가 유방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황제가 되는 바람에 안 좋은 쪽으로 유명세를 얻은 것이 원인인 것 같다. 거기다가 안읍 전투에서 한신에게 말 그대로 한 번의 싸움에 개박살이 나고 투항했을 정도로 좋지 않은 모양새를 보였던 것도 한 몫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인지 대중매체에서도 최후까지 서초군에 내통하려다가 또는 종공과 주가에게 서초군으로의 투항을 권유하다가 죽는 것으로 그려진다. 심지어 《 문정후 초한지》 등의 매체에서는 팽성대전때 자신을 따르는 세력이 크게 늘어나자 교만해진 유방에게 간언한 한신이 면직되고, 가벌로 대원수가 되어 한나라군을 말아먹은 대패의 주원인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팽성대전때 한신도 참전한 것을 볼 때 행적 이상으로 까이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한 건 위표의 형 위구는 장한에 의해 궁지에 몰리자 군민을 살려주는 것을 조건으로 스스로 분신자살한 당대 군벌들 중 인성으로는 가장 훌륭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중국 드라마 < 초한전기>에서는 좀 소심하고 부족한 사람으로 나오며, 그를 만나고 온 소하의 평가에 의하면 색을 탐하기만 하니 큰 일을 하기 글렀다고 한다. 오히려 아내인 박희가 훨씬 더 담대하고 뛰어난 여장부로 나온다. 박희는 판단도 대체로 정확한 편이며, 영포를 봤을 때도 항우를 배신할 걸 예측하기도 했다. 그런 아내에게 위표는 모든 판단을 맡기다시피 했다. 이후 유방에게 항복한 뒤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한 끝에 노비가 되어서 주발에게 농락까지 당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버리고, 아내인 박희를 유방에게 바치고 나서야 다시 위왕의 자리에 올랐다. 형양이 항우에게 포위당할 때 탈출 계획을 짜던 유방이 형양성 수성 책임자로 고려를 하긴 했지만 애초부터 유방은 위표가 성을 사수할거란 생각은 하지 않은 듯 하다.[6] 하지만 진평의 추천으로 주가를 수성 책임자로 임명한다. 위표는 유방이 탈출한 이후 유방을 배신하고 항우에게 항복하려고 유방의 정보를 밀사를 통해 알려주려 하지만 이미 눈치챈 주가에게 살해당한다. 텅 빈 막사에서 혼자 바람빠지는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진 결말조차 허망한 인물.
《 고우영 초한지》에서는 한술 더 떠서 외형과 성격 모두 《고우영 삼국지》의 동탁 수준으로 나온다. 최후도 서인으로 내쫒긴 뒤 종공과 주가에게 항복을 권유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효수당하는 신세이다. 그리고 서인으로 내쫒길 때 본부인과 첩을 유방에게 빼앗긴다. 특이하게 처음엔 이름이 제대로 나오다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이름이 유표로 바뀐다. 아마 손글씨로 텍스트를 넣던 고우영 화백이 어느 순간 실수한 게 계속 굳어진 듯 하다.
《전략삼국지》를 그린 요코하마 미츠테루가 그린 《항우와 유방》에서 유방측 사신의 현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항복하면서 등장하고, 이후 팽성대전에서 항명으로 좌천당한 한신 대신 고결한 귀족 혈통에 집착한 유방에 의해 총사령관이 된다. 그러나 허울만 좋은 군사적 재능 때문에 항우의 3만 정예군에게 59만 명이 박살당한 죄로 사형 대신 근신 처분을 받지만, 자신을 하대한다는 불만을 들은 항우의 공작으로 보낸 점쟁이가 불길한 상이라 하면 항우 편에 안붙을거라 판단해 위표의 아내에게 전한 천자를 낳을 상과 얼마 지나지 않아 위표에게 모든 나라가 고개를 숙일거라는 말을 찰싹 믿고 천하삼분지계를 하겠다며 배반을 선언, 유방측 사자인 역이기가 오자 땅의 크기를 더 넓혀주고 작위를 주면 배반하겠다는 기회주의자적인 면모를 보이다가 한신 휘하의 토벌군에게 개박살이 나며 투항한다. 이후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항우가 공격해올 때 수비를 맡던 한나라의 장수들에게 싸워봤자 개죽음이라며 항복을 유도하려다가 분개한 한나라의 장수에게 처형당하면서 퇴장당한다.
이상의 픽션이 많이 들어간 창작물들과 달리 《사기》의 기록에 충실하면서 나름 공정하게 위표를 묘사해주는 작품은 사실상 《이문열 초한지》 하나 뿐이다. 그렇다고 실제 행적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라 여기에서도 형인 위구보다 못하다고 까이는 것은 물론, 유방이 형양성에서 빠져나가자마자 항복 권유고 뭐고 주가와 종공에게 끔살당한다.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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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나라의 전담처럼 방계 왕족이나 혹은 성씨가 같음을 착안해 왕족을 사칭한 경우도 있었지만, 위표의 형 위구(魏咎)는 위나라 때 영릉군(寧陵君)으로 봉해진 바 있으므로, 이들 형제는 왕족이 분명하다.
[2]
삼진 중
조나라와
한나라는 땅이 한 덩어리였지만, 위나라는 한나라의 영토를 경계로 동•서가 커다란
월경지로 나뉘어 있었다.
희진이 아직 한 나라였던 시절 벌어진 세력다툼에서 다른 가문, 특히 범씨와 지씨의 세력권을 조씨 및 한씨와 나누는 과정에서 가장 서쪽에 치우쳐 있었던 위씨가 거의 원래 영토에 준하는 크기의 커다란 월경지를 얻게 된 것이다. 월경지를 없애고 회랑을 만들기 위해 한나라와 영토 교환 협상을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 성사되지는 못했다. 이 점이 전화위복이 되기도 했는데, 서쪽의
영진이 급성장해 서쪽 본토가 밀리던 도중 한나라를 방패삼아
대량으로 천도할 수 있었다. 그 대량을 포함한 동쪽이 항우에게 제공된 것이다.
[3]
위표의 형인 위구 때문에 위표의 대접이 특히 나빴을지도 모른다. 위구가
옹치에게 바람을 넣어서 유방을 뒤통수치도록 만든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유방이 옹치한테 뒤끝이 얼마나 오래갔는지를 생각하면.(...)
[4]
사실 유방은 이전에도 자기 기반이나 마찬가지인 풍읍을 자신과 사이가 안 좋은 옹치에게 맡겼다가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5]
이 때문에 종종 위표의 모친도 같이 매도된다. 그 어미에 그 아들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대표적인 것이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항우와 유방》이다.
[6]
세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뒀는데, 하나는 성을 포기할 경우로 항우가 위표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며 두 번째는 전사를 할 경우로 이땐 왕의 예로 장례를 치러주겠다고 했고, 마지막으로 불가능하지만 만약 승전할 경우 맹장을 얻은 것이니 나쁠게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