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9 12:21:09

양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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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월왕(越王)
연호 황태(皇泰, 618~619)
양(楊)
동(侗)
생몰 기간 604년 ~ 619년
재위 기간 618년 ~ 619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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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楊侗[1]
604년 ~ 619년

수나라의 비정통 황제로 수양제의 손자이자 원덕 태자 양소와 양제 유씨의 차남이다. 는 인근(仁謹)으로 당고조 이연에 의해 옹립된 이복 동생 양유와는 달리 당나라를 정통으로 보는 입장에서 정통 황제로 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는 작위였던 월왕(越王)이나 연호였던 황태(皇泰)를 써서 황태주(皇泰主)라고 한다.

그러나 양동도 정통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양유처럼 공황제(恭皇帝)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양제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신하 이연이 강제로 태상황으로 만들고 옹립된 황제 양유와 달리 양동은 양제 사후 즉위한 황제라는 점에서 착안한 것이다. 그러나 양동도 결과적으로는 신하 단달에 의해 옹립되었으므로 큰 차이는 없다.

2. 생애

607년 할아버지 양제에 의해 월왕으로 봉해졌으며 양제가 순행을 나설 때마다 동도 낙양을 지키고 있었다. 613년 양현감의 난이 일어나자 민부상서(民部尙書)[2] 번자개(樊子蓋)과 함께 낙양을 무사히 지켰다. 난이 평정되자 동군 유수와 고양 태수에 임명되었다. 617년 양제가 강도로 피난가면서 단달(段達)・원문도(元文都)・위진(韋津)・황보무일(皇甫無逸)과 함께 낙양을 지켰다. 낙양의 군량 창고인 낙창을 공격하던 이밀이 종종 공세를 펴 왕세충(王世充)을 보내 일진일퇴를 되풀이했다. 618년 양제가 우문화급에게 시해당하자 단달 등에게 옹립되어 즉위했다.

양동은 자신의 즉위에 공로가 있던 단달은 예부상서(礼部尚書)·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将軍), 왕세충은 이부상서(吏部尚書)·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将軍), 원문도는 내사령(内史令)・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将軍), 노초(盧楚)는 내사령(内史令), 황보무일은 병부상서(兵部尚書)・우무위대장군(武衛大将軍), 곽문의는 내사시랑(内史侍郎), 조장문은 황문시랑(黄門侍郎)에 임명했다.

이때 낙양의 사람들은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이 7명을 '칠귀(七貴)'라고 불렀다. 그러나 다수의 권력자들이 내부에 뭉쳐 있으면 으레 권력 다툼이 발생하듯이 이 칠귀는 결국 험악한 관계 속에 원문도, 노조, 곽문의, 조장문은 왕세충에게 살해되고 황보무일은 장안의 이연에게 귀순했다.

이후 왕세충이 이밀을 쳐부수고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자 619년 5월 양동은 왕세충을 노국공(潞国公)으로 봉했다. 하지만 그 다음달에 자신의 즉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자 왕세충에 따라 음독 자살을 명령받았다. 이때 양동은 다시 태어나더라도 황제의 집안에서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한다.라고 유언을 남기고 음독했으나, 죽지 않아서 결국에는 교살당했다. 왕세충은 정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개명(開明)이라고 했으나, 622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1] 侗(정성 동)자는 '동'으로 발음된다. [2] 《수서》에는 호부상서(戸部尚書)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民 자가 당태종의 이름과 겹치기 때문에 당나라 때 만들어진 수서에서 피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