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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왕(雍王)
장한 章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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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colbgcolor=#FFFFFF,#191919>옹왕(雍王) | |
성 | 장(章) | |
휘 | 한(邯) | |
최종직위 | 상장군(上將軍) | |
사망지 | 폐구(廢丘)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205년 |
재위 기간 | 기원전 206년 ~ 기원전 20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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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秦)나라의 장군 및 정치인. 죄수 부대를 이끌고 출진, 진 제국 말기에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군들을 하나하나 분쇄한 명장이었으며, 항우만 없었더라면 반(反) 진 반란을 거의 종식시킬 뻔 했다. 진나라가 멸망한 뒤인 초한쟁패기 때는 초(楚)나라에 항복하여 18제후왕 중 옹왕으로 임명되었다. 《 초한지》에도 등장한다.한자를 다르게 읽어 '장감'[1], '장함'으로 불리기도 한다.
2. 생애
조고는 황제 호해에게 아첨하여 정사를 멀리하고 놀기만 하도록 만들었으며, 진승·오광의 난을 시작으로 옛 전국시대 6국의 후예들의 반란이 연달아 일어나도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황제에게 알리지 못하도록 했고 제대로 대응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장초의 대군이 함곡관에 들이닥쳐 진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자, 간신 조고라도 자신의 목이 달아나는 것은 두려웠기 때문에 장한을 불러들여[2] 반란군을 토벌하게 했다. 진나라가 망조가 들어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장한은 여산에서 부역을 하고 있던 죄수들[3]을 사면하고 무장시켜 군대를 꾸렸다.
비록 죄수들의 군대였지만 명장 장한의 통솔력이 뛰어났고, 애초에 오합지졸이었던 진승, 오광의 장초군은 연이은 승리로 군기가 해이해져 있었고 6국의 후예들이 나라를 다시 세우면서 인재와 병력도 빠져나갔기 때문에 쉽게 격파당하여 무너져버렸다. 이후 진군의 전열을 가다듬어 재기의 기반을 마련하고, 장한은 대대적인 반군 토벌에 나서게 되었다.
항우에게 패배하는 기원전 207년의 거록대전 이전까지 장한의 전공은 걸출한 것이었다. 호해의 칙서를 위조하는 대담한 수법으로 조나라의 무신을 와해시켰으며, 제나라의 전담을 죽였고, 위나라의 위구를 격파하는 등 반군을 격퇴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전영의 군대를 섬멸하기 위해 제나라를 공격하던 도중, 구원군으로 온 항량과 동아에서 격돌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대패를 당했다. 항량은 추격군을 꾸렸는데 그 지휘관이 유방&항우라는 개사기 조합이었기에 다시 전투를 치렀지만 또 지고 말았다. 하지만 장한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진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고, 패배에 놀란 진 조정으로부터 막대한 추가 병력을 지원받았다. 한편 항량은 이같은 승리를 과신하며 자기가 잘나서 이긴 줄 알고 천하에 자신의 적수는 없다는 오만함에 빠졌고, 항우와 유방이라는 최고 전력을 다른 곳으로 내돌려 전력을 분산시키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동아 전투 후 겨우 2달 후에 장한은 정도에 주둔하고 있었던 항량에게 기습을 가했고, 항량은 허무하게 사망하고 만다.
이후 조나라 공략에 나서 거록을 포위했는데, 이때 송의를 죽여 초나라의 군권을 장악한 항우의 맹공에 대패하게 된다. 장한은 극원에 주둔했고, 항우는 장하 남쪽에 주둔한 채 양측 모두 싸우지 않고 몇달 정도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장한이 뒤쪽으로 슬금슬금 퇴각하자 전황을 모르던 호해는 장한을 꾸짖었는데, 호해가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는 것이겠거니 하고 여겼던 장한은 사마흔을 보내서 제대로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왠지 조고가 바로 나타나서 알현시켜주지 않고 사흘간 시간을 끌자 사마흔은 누군가를 금품으로 포섭하여 내부 파악을 한 결과[4] 너무나도 커져버린 장한을 숙청하고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장한과 자신들을 모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사마흔은 즉시 부리나케 도망쳤다. 조고도 허겁지겁 사마흔을 추격했으나 잡을 수가 없었다. 돌아온 사마흔은 조고가 조정을 농단하고 있어서 호해를 차마 만날 수조차 없었다며, 공을 세워봤자 시기당할 것이며 패배한다면 책임을 지고 죽게 될 것이라는 말로 항복하길 권했다. 진나라에 회의를 느낀 장한은 진군 20만명을 이끌고 항우에게 투항하자 다행히도 장한의 항복은 받아주었다. 하지만 뒤끝이 끝내주던 항우는 장한과 사마흔, 동예만 살려두고 반란을 방지하는 빌미로 항복한 진나라 군대 20만 명은 신안에서 생매장해버렸다.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킨 뒤 범증의 진언에 따라 장한은 같이 항복한 진나라 장수인 사마흔과 동예와 함께 옛 진나라의 영토를 셋으로 쪼개 만들어진 삼진왕(三秦王)의 하나인 옹왕(雍王)으로 봉해졌다. 같은 진나라 사람이 다스리면 불만이 적을 것이라 생각해서다. 하지만 진나라 사람들은 장한을 학살자인 항우에게 붙은 앞잡이 정도로 여겨서 그는 원망을 받고 인심을 얻지 못했다. 물론 장한/사마흔/동예 3인방도 따지고 보면 항우에게 속은 피해자인 만큼 앞잡이 따위에 비교될 만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항우가 세 사람을 뺀 진나라 병사들 수십만 명을 생매장해 몰살시켰으니 적어도 당시 진나라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그들은 자신들만 살자고 20만을 팔아먹은 매국노였다. 조고가 셋을 항우에게 항복하거나 죽거나의 이지선다로 내몰았고 항우가 그렇게 포악한 줄도 몰랐으니 세 사람에게는 억울한 평가겠지만, 이미 그런 뒷사정 때문에 용서해줄 만한 선은 진작에 넘은 상태였으니 뭐 어쩌겠는가. 한신은 유방에게 진나라 사람들이 세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이 골수까지 차 있으며, 아무도 그들을 믿고 따르지 않는다고 단언을 했을 정도다. 거기에 장한을 따르던 부하들은 모두 신안에 묻혀있어서 군사를 재정비할 여력도 없었고, 진나라 땅까지 항우가 불태우고 때려부쉈기에 생산력과 경제력마저 처참했다.
민심, 군사, 경제 세 가지 모두 엉망이 된 상태에서, 분봉된 지 단 세 달 뒤에 유방의 한군이 진창로로 나와 삼진을 격파하기 시작했다. 장한은 몇 차례 맞서 싸웠지만 하필 상대가 다른 이도 아닌 한신이어서 번번이 참패하고 폐구에서 농성하는 처지가 되었으며, 유방 측은 당시엔 장한이 급하지 않았기에 포위만 해놓고 지나갔다. 이렇게 쓰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장한은 무려 팽성대전 이후 안읍 전투가 벌어지는 9개월 후까지 저항하고 있었으며, 전황의 변화로 후방의 우환을 끊어야 했던 한군이 번쾌의 아이디어대로 폐구를 수몰시켜서 형세가 위태로워지자 자살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자칫하면 항우와 협공할 가능성도 있었으니 한군 쪽도 급했을 듯. 사실 장한이 저항하는 동안 사마흔, 동예는 유방에게 항복해서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5]을 보면 장한도 이때 항복했다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부하장수에 불과했던 동예, 사마흔과는 달리 장한은 결국 죽은 진군의 총사령관이었던지라 신안대학살의 공범으로 인식되고 있었으므로 항복했어도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유방은 관중의 지지기반을 잃게 되었을 테니 죽여야만 하긴 했을 것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유방에게 합류해서 눈에 띄는 공적을 세웠다면 은퇴시키는 정도로 끝낼 수도 있는 일이고.
3. 평가
진나라를 최후까지 지탱한 대장군이자 진나라 최후의 명장이었으나, 시황제의 죽음 이후 주군 복이 지나치게 없었다. 이세황제(를 조종하는 조고)와 항우, 둘 모두 암군이자 폭군이었다.초나라에 투항하기 전까지, 최소한 신안대학살 이전까지는 당대에 빛나던 명장이었으며, 전공만 따지면 한신에게도 견줄 만한 수준이었다. 오합지졸에 가까운 죄수 군단을 이끌고 진승의 난을 진압하고, 재건된 제나라, 위나라, 한나라, 초나라, 조나라를 멸망 직전으로 몰아쳐 진나라 말기의 대대적인 반란을 거의 잠재울 뻔했던 인물이었으며 외부의 강적 항우와 내부의 적 조고만 없었다면 장한은 진나라의 치세를 다시 공고히 하거나 쉽사리 진제국이 무너지지 않도록 버틸 수 있게 만들수 있는 장수였다. 다만 유방이 함양까지 고작 세 달 거리를 남길 때까지 장한과 호해에게 보고를 누락시키고 장한을 회군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흑막 조고가 있었기 때문에 또 모르는 일이긴 하다. 장한이 바로 회군하지 않는다면 함양이 유방에게 넘어가는 부분은 똑같았을 수도.
말년마저도 신안대학살에 누명을 쓰고 인망을 상실해 그 명암이 극명히 갈린 비운의 장수다. 장한은 신안대학살을 자신이 저지른 것도 아니고 그 이전에 조고의 눈 밖에 나버려서 항복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 원인이다. 항우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이라는 가정 하에선 장한은 고려조차 되지 않는 일이 빈번하는 등 사람들에게도 상당히 저평가받는 경향이 있는 인물.
4. 대중매체
초한쟁패기가 테마가 되는 작품에선 대체로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기 이전부터 원래 날리던 진의 명장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6] 아예 시황제을 다루는 소설에선 이미 장한이 시황제 천하 통일 패업시기부터 활약한 명장이라는 식으로 묘사되기도 한다.[7] 이야기 흐름 상 중간보스격에 해당되는 위치다.시바 료타로의 《 항우와 유방》에선 원래대로 소부의 관리로 묘사. 사명감에 반란 진압에 나서게 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지극히 성실하며, 전력을 분산시켰다 유리한 전장으로 적을 끌어들여 전력을 집중해 강타하는 전략을 장기로 한다. 그 무략에 항우마저도 내심 경의를 가지고 있을 정도. 하지만 신안대학살 이후 완전히 루저화되고 만다. 얼굴도 통통해지고 차분한 성품이 괜한 말에도 화를 내는 등 예전과 같은 명석함을 상실해 버린다. 특히 투항과 신안대학살로 진나라 백성들에게 항우 이상으로 원수로 간주되었다. 심지어 영지의 백성들까지 그를 등져 장한군의 정보를 한군에게 알려주기까지 한다. 결국 한신에 패해 자결. 1권 말미 작가의 평은 아래와 같다.
생전에 그는 입버릇처럼 "나보다 더 진 제국에 충성을 바친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전반생은 실로 그러했다. 그러나 후반생은 사람들에게 충성심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존재로 살았다.
그러나 장한이 항복을 고민하던 차에 결국 토사구팽 식으로 일생을 끝낸 백기와 몽염 이야기가 나왔으니 충성을 논하기에 앞서 진나라의 업보와도 같은 측면이 있다. 게다가 장한을 먼저 버린 것은 엄연히 진나라 조정이었고, 장한은 돌아갈 길이 없어서 항복했을 뿐이었다. 사실상 장한의 등을 떠밀어서 항우에게 보낸 셈임을 감안할 때, 과연 정당한 평가인지는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초한전기의 장한 |
드라마 초한전기에선 조위우가 연기한다. 한국 더빙판 성우는 김석환. 원래대로나 또는 시바 료타로의 작품처럼 소부이지만 그 전부터 진시황의 근위대에 종군하고 있었다. 여타 작품에서 노장 또는 젊어야 중년으로 나온 것에 비해 여기서는 지용을 겸비한 청년 장수다. 박랑사 암살 사건에서 활약하는 무용과 소부로 임하며 전국의 지리와 사정을 통찰하는 지략을 보여준다. 또한 부소의 딸인 신희 공주와 플래그를 세워 결혼에 이르는 등 작중에서 상당한 버프를 받는다. 하지만 대장으로 중용되기 위해 조고에게 접근하는 과정에서 그의 경계를 사고 공주와의 결혼도 장한에 대한 인질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기에 순탄치만은 않다. 게다가 노역장에서 기용한 경포가 배속된 부대를 거느리고 도주하는 등 대장군으로서의 카리스마도 좀 부족한 것 같다. 다만 이건 꼭 장한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경포가 쉽게 굴복시킬 수 없는 인물인 데다가 진나라에 희망이 없어 보여 그런 측면도 있고, 다른 진나라 군사 사이에서는 명망이 높다. 물론 그만큼 조고의 견제를 받는다.
지용을 겸비한 명장답게 불씨가 꺼져가던 진나라의 군대로 반란군을 연달아 물리치며 정도에서는 가장 큰 세력 중 하나였던 항량의 군대를 박살내고 수장이었던 항량도 죽인다. 그러나 조고의 견제를 받는지라 져도 죽고, 이겨도 나중에 토사구팽 당할 게 뻔한 상황에서 신희 공주는 조고의 심복 숭신과 몰래 손을 잡고 조고를 암살하려 한다. 숭신은 장한이 진나라 수도에 돌아와 축제에 참여하는 날 조고를 암살하려 하는데, 계획이 이미 들통난지라 숭신은 역으로 끔살당하고, 신희 공주는 장한을 지키기 위해 자살한다.
부인을 잃었지만 반란을 진압해야하는지라 장한은 얼마 후 다시 군대로 돌아갔으며, 이후 거록대전에서 패전한 뒤, 조정에 원군을 요청하러 사마흔을 보내는데, 오히려 조고가 사마흔을 암살하려 하자, 결국 꿈도 희망도 없다 여기고 항우에게 투항한다. 투항 이후 옹왕이 되어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 되지만 정작 진나라 병사들은 차별대우에 시달리고 있었고 종국엔 장한이 자신만 살겠다고 항우에게 투항하는 바람에 자신들의 처지가 이꼴이 된거라면서 그를 대놓고 비난하며 반란을 일으키고 병사들은 모조리 생매장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며 장한 역시 진나라 20만 병사들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며 이 때문인지 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유방과 한신을 별 볼일 없는 떨거지라 생각해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다가 잔도를 보수하는 척하면서 진창을 지나온 한신군에 의해 대패하고 자신도 전사한다. 죽고 나서도 종종 진나라의 명장으로 언급된다.
문정후 초한지에서도 명장으로 묘사되며, 한군에게 패할 때도 끝까지 싸우다가 여마통[8]이 몸을 피하라고 하자 "이 이상 굴욕적인 목숨을 살려 어디로 또 가겠느냐. 다만 주군다운 주군 아래서 싸우다 죽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라고 말하고 검으로 몸을 꿰뚫어 죽는다. 한신도 "애초에 진나라가 먼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면 결코 항우에게 항복할 위인이 아니었던 만큼, 장한은 끝까지 우리에게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아까운 인물이긴 하지만 죽이는 수밖에 없다!" 라면서 공격을 감행한다.
이후 팽성대전이 유방의 대패로 끝난 후 항우에 의해 언급되는데, 유방에게 투항한 사마흔과 동예가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유방을 배신하여 팽성과 유방의 일가족을 다 끌고서 또다시 항우에게 항복하지만 항우는 애초부터 그들을 살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던지라 장한은 비록 삼진을 지키지 못하고 패배했으나 네놈들처럼 구차하게 살기보다는 충절을 지켜 죽음을 맞았다, 네놈들은 내가 살려준다 해도 또다시 배신할 소인배들이라고 일갈하며 그들을 처형하라는 명을 내려 둘 다 처형된다.
와이파이 초한지에서는 문관직에 종사하고 있던 노장으로 묘사된다. 성우는 석승훈[9] 행적은 초한지 원전과 일치한다. 출연시기는 진승·오광의 난, 거록대전 ~ 삼진 평정.
[1]
대표적으로 조선에서 많이 읽혔던 소미통감절요에서는 음이 흥겨울 감(酣)과 같다고 주석을 달아놨다.
[2]
장한은 본래 무관 출신은 아니었고, 삼공의 바로 아래인 9경에 속하며 재정을 관리하는 소부(少府)였다. 허나 고대에는 문관이 무관직을 겸했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행정업무를 보더라도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군을 이끌고 나갈 수가 있었다.
[3]
이 여산에서 부역을 하던 죄수들은 세금을 못냈다거나, 노역에 늦었거나, 아니면 기타 잡다한 이유로 각지에서 끌어모은 죄수들로 그나마도 절도범 이상의 중범죄자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초나라 패현 사수의 정장이었던 유방도 자기 동네의 죄수들을 여산으로 호송하던 도중 튀어서 세력을 만들었다. 즉 장한의 초기 병력은 멸망한 구 6국 백성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 중간에 전역을 시켜줄 상황이 아니니 항우가 후일 신안대학살을 벌일 때 진나라 출신뿐만 아니라 6국 출신들도 대거 끔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4]
판본에 따라서는 장한 일행이 토사구팽 당하기 직전인걸 보다못한 깨어있는 누군가가 진실을 알려주자 그대로 도망치는 것으로 나온다.
[5]
물론 팽성대전에서 유방이 참패한 뒤 다시 항우 밑으로 돌아가서 싸우다 형양에서 패하고 자살하지만 유방 역시 당장 삼진 평정 시점에서 굳이 죽이겠다고 시간을 지체했다간 관중을 완전히 세력권에 두기 전에 항우군과 싸워야 하는 상황도 있을 수 있어 당시에는 그들을 죽일 수 없었다.
[6]
고우영의 《
고우영 초한지》,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항우와 유방》 등.
[7]
진나라의 통일왕조로서의 기간은 약 15년 정도인데, 통일전쟁 시절의 공신들 중 초한쟁패기까지 살아남아서 행적이 있는 사람이 문관의 면모가 강한 승상
이사와 초한쟁패기에서의 행적은 만리장성 관리감독하다 조고의 계략에 의해 죽은 게 전부인
몽염 정도뿐이다. 두 시대에 모두 제대로 등장해 활약하는 인물이 이렇게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런 창작물에서는 두 시대를 꿰뚫는 명장으로 각색할 만한 유일한 인물인 장한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8]
여마동의 오기.
[9]
같은 작품의
장량과 성우가 같다. 장한은 중후한 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