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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 베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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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舊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現 키움 히어로즈의 전신
[2] 現 KIA 타이거즈
[3] 現 LG 트윈스
[4] 現 두산 베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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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 베어스
OB Bears
창단 1982년 1월 15일
모기업 두산
연고지 변천 대전광역시 (1982~1984)
서울특별시 (1985~[두산])
홈구장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2] (1982~1984)
청주 야구장[3] (1982~1984)
동대문야구장 (1985, 1988)[4]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1985~[두산])
최종 우승 (2회)
1982년, 1995년
페넌트레이스 우승 (1회)
단일 리그 1995년
전, 후기 리그 1982년 전기, 1986년 후기

1. 개요2. 창단 및 연고지 결정 과정의 진실3. 유명 선수4. 시즌
4.1. 1982년 ~ 1983년4.2. 1984년 ~ 1988년4.3. 1989년 ~ 1994년4.4. 1995년 ~ 1998년
5. 유니폼6. 마스코트7. 부활?8. 기타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두산이 운영하는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야구단으로, 현재는 두산 베어스로 팀명이 개칭되었다.

1982년 1월 15일, 원년 6개 구단 가운데 가장 먼저 창단식을 가졌으며 한국프로야구 통산 첫 번째 우승 구단이기도 하다. 공식 구단명은 두산프로야구단 OB 베어스였다.[6]

참고로 많은 사람들이 모기업이 그대로인 원년 구단은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뿐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으나, 베어스도 모기업이 변하지 않은 원년 구단이다. 후술하는 빙그레 이글스- 한화 이글스의 사례처럼 구단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1982년 창단 당시부터 베어스 구단의 주인은 두산이고[7] 구단주도 박용곤- 박용오- 박용성- 박정원 범두산가 일원이 여전히 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프로야구에 현재까지 존속하는 모기업이 그대로인 원년 구단은 삼성, 롯데, 두산 총 3개 구단이다. 물론 연고지 이전과 구단명 변경을 하지 않은 원년 구단으로 엄격하게 기준을 적용하면 삼성과 롯데 둘뿐인 것이 맞다.

2. 창단 및 연고지 결정 과정의 진실

1981년, 전두환 정부가 프로야구 리그 출범을 기획하자 두산은 프로야구단 창단을 꿈꾸게 된다. 두산의 원래 목표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특별시를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단 창단이었다. 허나 1982년 원년 최초의 창단팀이자 원년 우승팀인 베어스이지만 여러 길을 돌고 돌아 1985년에 서울 연고에 복귀하여 서울에서 첫 홈경기를 치뤘다.[8]

사실 두산은 대대로 수도권에 연고를 둔 기업이었기에 서울 연고팀을 맡을 자격이 충분하고도 남았다. 두산의 창업주인 박승직은 서울 근교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출신이고, 집안의 선산은 광주군 광주읍에 있었다. 박승직의 장남 박두병과 손자 박용곤은 아예 서울에서 나고 자랐으며, 그룹의 역사도 서울 종로 배오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당국이 제시한 프로야구 참여 기업의 조건에[9] 딱 맞았다. 특히 프로야구 출범 당시 두산 회장이었던 박용곤은 미국 유학 시절 혼자 차를 몰고 야구 경기를 관람하고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을 구경할 정도로 상당한 야구광이었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구단이 지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야구단 구단주로는 그야말로 맞춤형 타입이었다. 이후 베어스가 창단되었을 때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잠실 야구장에 방문해 직관을 했다고.

그러나 두산보다 먼저 서울 연고 프로야구단 창단을 추진한 곳이 있었으니, 전국구 방송망을 갖춘 공영방송 MBC였다. 1981년 창사 20주년을 맞은 MBC는 KBO 창설 이전부터 자체적인 야구단 창단을 계획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당시 이진희 사장이 "MBC만 야구단을 창단할 것이 아니라 4개 구단이 참여하는 리그를 개최하라!"라는 지시를 내려 MBC TF팀에서 구상을 마친 다음 청와대에 초기 계획을 보고했다는 기록이 있다. MBC는 1981년 10월 경에 프로야구 구단 창단 계획을 마무리지었고, 마침 비슷한 시기에 야구 축구의 프로화를 추진하던 청와대 비서실과 접촉해서 프로야구 기획안을 올린다. 이 시점에서 MBC는 이미 서울 연고지를 확정지었다. 물론 MBC도 두산의 프로야구 참여 의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MBC를 1순위, 두산을 2순위로 기획안에 올렸다.
서울 연고팀 결정 과정은 파워의 MBC vs 정통성의 두산[12] 싸움이었으나 당시 모든 상황은 MBC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MBC 경영진이 전두환 정부에 잘 보이기 위해 수를 쓰고 있었고[13], 무엇보다 MBC의 주도로 프로야구가 창설되고 있었기 때문에 당국에서도 첫 번째 서울 팀의 프리미엄을 두산이 아닌 MBC에게 밀어주고 싶어했다. 결국 서울 연고권은 MBC가 단독으로 가져가는 방향으로 사실상 낙점됐다. 다만 두산의 프로야구 참여 의지가 워낙 강한 만큼 어떻게든 두산을 프로야구에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때 마침 인천·경기와 충청 지역 연고팀을 맡을 기업이 비어 있었다. 대전에서 창업한 동아건설은 최원석 당시 회장이 대한탁구협회 회장을 맡고 있어서 1988 서울 올림픽 유치에 올인하겠다면서 프로야구 참여를 완곡히 거절했다. 충청도 연고팀 모기업 2순위였던 한국화약은 천안북일고라는 든든한 팜을 갖고 있었지만 1981년 7월 김종희 회장이 지병을 앓다가 유언도 없이 급작스럽게 별세하는 바람에 프로야구에 참여할 상황이 아니었다. 전라도 연고팀 기업 자리도 삼양그룹과 금호가 거부하면서 비었으나 해태제과가 참여 의사를 밝히면서 해결됐다. 결국 청와대는 프로야구 참여 의지가 강했던 두산을 충청도로 보내는 계획을 확정했다.

프로야구 출범의 산파 역할을 했던 이용일 초대 KBO 사무총장은 경동중학교 후배로서 막역하게 지낸 박용곤 두산 회장에게 "박 회장. 미안하게 됐소. 서울은 MBC가 맡기로 했고 인천·경기는 현대가 맡기로 했네. 아쉽지만 두산은 충청도를 맡아주는 것이 어떻겠나"라고 말했다. 당연히 박용곤 회장은 펄쩍 뛰었다. 사업을 시작하고 오너 일가가 거주하고 있는 서울도 들어갈 수 없는데 그나마 있던 창업주의 고향이자 선산이 있는 경기도조차 들어갈 수 없으며 아예 아무런 연고가 없는 충청도로 다짜고짜 내려가라고 하니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사실 두산이 원년부터 서울이 아닌 경인 지역에 발을 들일 가능성도 있었다. 인천·경기 지역 연고팀 1순위로 거론됐던 현대가 1988 서울 올림픽 유치에 주력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서 거부했고[14] 2순위 한국화장품은 인천 대신 서울을 연고로 하며 실업야구단을 그대로 프로에서 뛰게 해달라고 했다가 퇴짜를 맞았는데 이에 아예 프로야구 참여를 거부했다. 경인 지역이 빈자리로 남아있자 충청 지역으로 낙점된 두산이 "우리 창업주께서 경기도 출신이신 만큼 두산이 인천으로 가겠소"라고 입장을 바꿨다. 만약 이게 현실화되었다면 현재 인천 연고지를 가지고 있는 SK 와이번스- SSG 랜더스인천 SK, 인천 SSG가 아닌 인천 OB, 인천 두산으로 부르고 있었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청와대가 나서서 "이미 두산은 충청도 담당으로 확정됐으니 가만히 있으시오. 두산이 인천으로 가면 충청도 팀을 담당할 기업을 또 찾아야 하는데 현재 상황에서는 마땅한 주인을 찾기가 어렵고 그러면 프로야구 출범 자체를 망칠 수 있으니 두산은 충청도에 남으시오"라며 두산의 앞길을 완전히 막았다. MBC에 막힌 것도 억울한데 청와대까지 나서서 두산의 수도권 진입을 완전히 막아버리니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두산이 청와대에 반기를 들자니 당시 권력자들의 힘이 너무나 강력했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당시 기업들의 상황은 어떻게든 정부 고위층의 말을 잘 들어야 하는 때였다. 그러지 않고 정부에 개기면 쥐도 새도 모르게 총수가 용산 서빙고의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서 콧구멍으로 설렁탕을 흡입하거나 기업이 아예 문을 닫는 상황이었다.[15]

하지만 정작 충청 팀을 맡아야 할 두산이 충청과 무관한 기업이라는 문제 때문에 두산 경영진은 전전긍긍했고, 팽팽한 접전 끝에 결국 삼성 측에서 "우선 OB가 충청도로 잠시 갔다가 3년 후에 서울로 오면 어떻겠냐?"라는 중재안을 내놓는다. 결국 두산은 5개 구단이 공증을 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걸고 어쩔 수 없이 이 중재안을 수용하며 3년 후 서울로 올라간다는 전제 하에 충청행을 선택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또 MBC가 반대했다. 이진희 MBC 사장은 "MBC는 프로야구 창설을 스스로 기획했다는 특수한 위치에 있고 이미 서울 연고권은 MBC가 단독으로 갖기로 정해져 있었는데 무슨 자격으로 1985년부터 서울을 둘로 나누냐"며 강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이러다가는 다 만들어진 야구판이 다 엎어지겠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부가 MBC에게 이 중재안을 받아들이도록 압박을 가했다. 당시 정부의 실세 중 한 명이던 이학봉 민정수석비서관이 서울 정동 MBC 사옥으로 쳐들어가 호통을 치며 이진희 사장에게 중재안을 받아들이라고 했고, 이진희 사장은 군말 없이 도장을 찍었다. 당시 MBC도 KBS가 대주주로 있던 공영방송이었기에 없어질 가능성은 적었으나 불과 1년 전 여러 개의 신문사와 방송사를 정부 입맛대로 강제 통폐합시킨 전례가 있기에 MBC는 감히 정부의 명령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프로야구 창설에 먹구름이 끼면 MBC 사장쯤은 손쉽게 실직자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프로야구단 창단은 진행하되 연고지는 원년부터 3년간 한시적으로 대전과 청주를 포함한 충청도 전체로 한 뒤 1985년부터 서울에 입성하는 조건을 달아 두산 프로야구단을 창단하게 된다. 그래도 배려인지는 몰라도 원년부터 신인 드래프트에서 서울 출신 선수를 배정받을 수 있게 했다. 사실상 최초의 드래프트라 할 수 있으며, OB가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는 통칭 2:1 드래프트라 불렀다. 왜냐면 MBC와 OB가 2:1의 비율로 선수를 지명을 했기 때문이다.

원년의 1라운드에서 MBC 청룡은 대광고 출신 김재박[16] 선린상고 출신 이해창 등 두 명을 뽑고 OB는 박철순 한 명을 지명했다. 또 라운드는 알 수 없지만 실업야구의 홈런왕 김우열도 이때 OB에 뽑혔다.[17] 보통 OB의 지명은 서울권에서 많이 뽑고 나머지는 전부 충청권 선수였는데 OB가 충청도로 내려가기 싫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선수 수급에 어려움이 있다는 명분이었으니[18] 납득이 간다.

1982년 원년 프로야구단이 탄생할 당시 다른 팀들은 일제히 구단명에 그룹명을 붙였으나 유독 두산은 그룹명이 아닌 자사 맥주 제품OB를 붙여 화제가 되었다. 두산그룹의 프로야구단 'OB BEARS'라는 이야기다. 사실 두산그룹은 OB맥주의 인지도가 워낙 높았기에 한때 그룹명을 OB그룹으로 명명했다가 1978년에 두산그룹으로 다시 변경했다. 20년 가까이 유지하던 OB라는 이름을 야구단에서 뗀 것은 다름이 아닌 두산그룹의 사업 구조 개편과 연관이 깊다. 두산그룹은 1998년부터 회사의 핵심 업종을 소비재 사업에서 중공업 사업으로 개편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OB맥주의 매각을 추진했으며 야구단의 간판에서도 OB라는 이름을 과감히 내렸다.[19]

참고로 이런 방식으로 프로야구단 이름을 지은 사례가 한 곳 더 있는데, 바로 빙그레 이글스다. 빙그레 이글스는 한국화약그룹이 1985년 창단한 팀으로 방위 산업체인 한국화약보다는 빙과류, 유제품, 과자제품 등을 주력으로 판매하는 소비재 계열사 빙그레의 인지도가 더 높았기에 빙그레를 구단명에 붙였다. 범한화가 내부 계열분리로 빙그레가 한화그룹에서 분리된 후 1994년 시즌부터 오늘날의 명칭인 한화 이글스로 개명했지만 빙그레 시절이나 한화 시절 모두 구단은 한화그룹의 소유이며 구단주도 여전히 김승연이다.

3. 유명 선수

OB 베어스의 스타들
등번호 이름 등번호 이름
No.3 김우열(金宇烈) No.10 윤동균(尹東均)
No.8 김유동(金裕東) No.15 황태환(黃泰煥)
No.21 박철순(朴哲淳) No.22 김경문(金卿文)
No.1 박종훈(朴鍾勳) No.31 장호연(張浩淵)
No.25 조범현(曺凡鉉) No.35 윤석환(尹錫環)
No.33 김광림(金光林) No.17 김진욱(金鎭旭)
No.29 김형석(金炯錫) No.44 김상호(金湘昊)
No.11 계형철(桂瀅鐵) No.19 신경식(申慶植)
No.23 김태형(金泰亨) No.61 김상진(金尙珍)
No.9 박상열(朴相悦) No.24 최일언(崔一彦)
김민호, 김우열, 김유동, 박철순, 신경식, 윤동균, 박종훈, 윤석환, 김경원, 김상호, 이명수, 임형석, 김상진, 심정수 등이 이 팀에 속했었으며, 김경문 조범현도 이 팀의 포수로 활동했다. 포수가 넘쳤기 때문에 포수 왕국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이처럼 포수 왕국이다 보니 김영신이라는 포수가 경쟁에서 밀려나 실의에 빠져 자살하는 일도 있었다. 이후 그의 배번은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KBO 영구결번. 또한 포수가 많았던 탓에 OB 소속이었던 이도형, 진갑용, 최기문 두산에서 오래있지 못하고 떠나버리는 경우가 있었다.[20]

4. 시즌

4.1. 1982년 ~ 1983년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0706041101480101000001010200-002.jpg
1982년 한국시리즈, 감격의 V1

1981년 12월 초, 모기업인 두산은 팀 이름을 두산 OB 베어스로, 감독에는 재일 한국인 출신의 김영덕을 내정하고, 1981년 12월 29일, 사상 최초의 드래프트에서 두산은 박철순, 선우대영, 조범현, 박상열, 황태환, 계형철, 유지훤, 윤동균, 김우열 등을 지명했다. 그리고 1982년 1월 15일,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 야구단으로 창단했다.

당초 모기업이 서울 종로구에서 시작한 터라 충청도에 연고가 전혀 없었던 두산은 당초 현대그룹이 프로야구에 참여했을 때 맡기로 했던 인천/경기지역[21]이 현대의 참가 거부로 공석이 되자 그쪽으로 연고지를 변경해줄 것을 요구했는데, 이후 다시 서울로 변경하여 요구했으나 KBO 기획부터 참여했던 MBC가 이미 서울 연고를 선점했기에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나 서울 연고를 보장해주지 않으면 참여를 거부하겠다고 두산 측에서 강짜를 놓았고, 현대 등 다른 그룹들의 잇따른 불참으로 리그가 열리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인지라 MBC 측의 거센 반대를 전두환이 권력으로 찍어누르면서 결국 전 구단의 합의에 따라 3년만 충청권으로 갔다가 서울 동대문 야구장으로 이전이 아닌 복귀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합의 과정은 위의 구단 소개 문단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충청팜의 부실을 핑계 삼아 서울권 드래프티들의 33%를 배정받고[22], 동대문 야구장에서 삼미, 삼성, 롯데, 해태 등과 홈경기도 진행하였다. 그렇게 OB는 충청남도 대전에서 1985년 서울 동대문운동장으로 올라오게 된다. 그리고 1985년 서울로 연고지를 옮긴 이후 충청도 연고지를 이듬해 창단되는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 이글스)에게 넘겨주게 된다.

OB 베어스의 첫 경기는 MBC 청룡과의 경기로 박철순의 4피안타 2실점(1자책점) 완투승으로 승리했다. 이후 4월 중순부터 분위기가 반전되어 5월 2일 홈경기에서는 10승 5패로 단독 선두에 나섰다. 이후 9연승 등으로 시즌 4경기를 남겨두고 28승 8패로 전기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박철순이 시즌 24승을 거두면서 이후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 김유동이 한국시리즈 6차전 9회 만루홈런을 쳐내면서 초대 한국시리즈 MVP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1983년 시즌에는 박종훈, 한대화, 장호연, 정선두만을 신인[23]으로 확보했고, 박철순, 선우대영, 강철원 등의 주력 투수와 구천서 등의 야수진도 부상을 당하면서, 결국 전기리그 6위, 후기리그 5위를 기록 순위가 5위로 하락했다. 그해 10월 14일, 김영덕 감독이 팀 부진의 책임을 지고 유학을 핑계로 잠시 자리를 비우나 싶더니, 바로 삼성 감독으로 계약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에 OB도 당시 투수코치였던 김성근을 바로 감독으로 임명하면서, 두 사람은 앙숙이 된다. 이 앙숙지간은 1984년의 져주기 게임을 야기했다.

4.2. 1984년 ~ 1988년

1984년, 새 감독으로 투수 코치였던 김성근이 취임했고, 코치진도 보강되었다. 선수도 재일교포 최일언, 홍신차등을 비롯해 신인 윤석환, 김진욱, 김광림 등을 확보했다. 그리고 계형철이 14승, 박상열 12승, 장호연이 평균자책점 1위의 성적을 거두었고, 야수진에서도 부상 공백이 메워지며 9연승으로 치고 나갔다. 그러나 이후 6연패에 빠지며 삼성에게 전기리그를 내주었고, 후기리그에서도 초반에는 선두로 질주했지만, 8월 15일 부터 선두 자리를 내주었다. 마지막 두 경기에서 OB는 해태와, 롯데는 삼성과 맞붙었는데, 삼성은 롯데에게 일부러 패하면서 OB는 후기리그도 2위에 머물렀다[24] 공교롭게도 당시 삼성 감독은 김영덕. 물론 그 김영덕 감독의 져주기가 있었다지만 84년의 OB는 역대 가장 운이 없는 팀이었다. 전ㆍ후기 통합 승률 1위를 달성하고도 포스트시즌에 나서지 못했던 것이었다.

1985년, OB는 연고지를 대전에서 서울 동대문야구장으로 옮겼다. 이 해에는 연고이전 직후 임시 홈으로 삼았던 동대문에서 거의 대부분의 홈경기(37경기)를 치렀지만 특별 홈경기로 MBC의 홈구장인 잠실에서 9경기, 예전 홈구장이었던 대전에서 6경기를 치렀으며,[25] 특이하게 당시 롯데의 제2홈구장이었던 마산에서도 중립경기로 2경기를 치렀다.[26] 그리고 그해, 전기리그는 2위를 기록했으나 후기리그는 5위로 마무리했다.

이듬해 1986년 아마야구와의 갈등으로 인해 1988년까지 사용하는 조건으로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홈경기를 치르기 시작했다.[27] 그리고 그해 전기리그는 5위에 그쳤으나 후기리그 플레이오프 진출권이 달린 롯데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김형석의 동점 홈런(일명 '운명의 한 방')과 신경식의 끝내기 안타로 4-3으로 승리하며 청룡과의 끈질긴 경쟁 끝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게 2승 3패로 패하고 1987년 전기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되지만 예상외로 해태 킬러였던 최일언이 1차전부터 난타당하는 등 1승2패로 부진하며 해태에 "2승 3패"로 탈락한다.[28] 1988년 롯데와의 개막전에서 장호연은 무탈삼진 노히트 노런을 달성[29]한다. 이후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5위"를 기록한다. 시즌 후에 두산그룹은 우승을 못한 김성근 감독과 재계약을 하지 않으려 했고, 김성근 감독도 사임하여 신용균 코치, 최주억 코치, 박상열 투수가 태평양으로 이적[30]하게 된다. OB시절에는 종신감독까지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구단주와 사이가 돈독했다는 평도 있었으나, 결국은 단장 이하 프런트와 큰 갈등을 겪었고, 이 갈등은 이광환 2군감독과의 알력으로 이어져 결국 팀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직후 이광환 감독 부임으로 OB는 엄청난 침체를 겪게 되는데...

4.3. 1989년 ~ 1994년

1989년 이광환 감독이 취임. 그는 당시 한국야구의 대세였던 일본식의 관리야구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면서 선수들 개개인에 개성과 책임감을 믿고 맡기는 '자율 야구'의 기치를 들었다. 첫 시즌이었던 89년에는 개막 1승9패로 최악의 스타트를 보인 뒤 후반기 시작 후 상승세를 타며 -11에서 5할을 찍는 저력을 보였으나 다시 연패에 빠지며 태평양, 삼성과의 4위권 경쟁에서 낙오되며 최종순위 5위로 마쳤다. 이해 프로야구 역사상 첫 은퇴경기로 윤동균의 은퇴경기가 있었고 윤동균은 현역 마지막 타석에서 롯데의 김시진에게 2루타를 쳤다. 그러나 90년 시즌이 시작되면서 기존 투수력과 타선의 노쇠화가 한꺼번에 찾아보면서 팀 전력이 급격하게 붕괴. 5월부터 10연패와 11연패를 연달아 기록!하면서 그 해 6월 19일 시즌 중 교체 되었다. 제4대 감독으로는 재미교포 출신으로 타격 인스트럭터를 맡고 있던 이재우가 취임했다. 그는 1990년 감독 대행으로 기용되어 1991년 정식으로 감독에 취임했다. 하지만 91 시즌에도 시즌 도중 12연패에 빠지는 등 부진한 성적으로 그 해 9월 9일 시즌 중에 교체되었다.

제5대 감독은 최초의 프로 선수 출신 감독으로 윤동균이 내정되었고, 그는 비록 탈꼴찌엔 아쉽게 실패[31]했으나 감독 대행을 맡은 91시즌의 남은 경기를 5할의 승률을 기록하여 가능성을 보이며 정식감독 승격에 성공했다. 1992년, 본격적인 첫 시즌에 그는 야심차게 김민호, 장원진, 안경현 등의 신예들을 대거 발탁하고 김형석, 임형석, 강영수, 김상호로 이어지는 공격적인 타선을 완성하면서 그 해 5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렸다. 1993년에는 초반에는 5위에 머무르다가 9월부터 강력한 선발투수진과 특급 신인 마무리투수 김경원을 앞세우면서[32] 연승을 시작해 마지막 경기에서 LG에게 승리하며 3위로 6년 만에 팀을 포스트 시즌 진출로 이끈다. 그러나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오히려 4위 LG에게 1승 2패로 탈락한다.

1994년에는 우승후보라는 예상과 달리 초반부터 고전하면서 하위권을 맴돌았았다. 결국 시즌이 얼마 남지 않은 9월 4일, 전라북도 군산시 쌍방울 전에서 1-2로 패배하자 윤동균 감독은 " 몽둥이를 들겠다"고 했고 선수들은 이를 거부하자 윤동균 감독이 '맞기 싫은 선수들은 다 짐싸서 서울로 올라가라'라고 하였고 원클럽맨인 박철순 외 16명의 선수들은 이탈해 서울로 올라갔다. 선수들 중 최고 연장자인 박철순" 윤 감독과 같이 옷을 벗겠다"라고 사태를 무마시키려 했다. 결국 9월 14일, 윤동균 감독은 사태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났고,[33] 남은 시즌은 최주억 코치가 감독직을 대행했다. 이 사건이 바로 OB 베어스 항명파동으로 구단의 어두운 흑역사로 기록[34] 되어 있다.

4.4. 1995년 ~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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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한국시리즈, 기적의 V2

그러나 그 사건으로 권위적이고 불같은 급한 성격의 윤동균 감독 대신 인화를 중시하는 김인식 감독이 부임[35]을 하면서 그야말로 심기일전 돌입을 했다. 시즌 초반 전문가들의 예상은 잘 해야 5~6위권 전력이라는 평가였으나 예상을 깨고 프로야구 원년 우승 이후 13년만의 "통합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올렸다. 투수쪽에서는 에이스 김상진3경기 연속 완봉승을 포함해 17승을 올렸고, 이어 권명철이 15승, 그리고 신인 이용호, 진필중은 김경원의 빈자리를 메워주었다. 타선에서는 25홈런[36] 101타점으로 최초의 "잠실 홈런왕"을 차지한 김상호의 활약과 1번 타자이자 유격수인 연습생 출신 김민호의 화려한 주루플레이, 하위타선에 붙박이로 배치된 고졸 신인 소년장사 심정수의 21홈런, 그 외에도 14홈런을 친 공격형 신인포수 이도형이나 베테랑 김형석, 이명수 등이 강타선을 구축했다. 시즌 구도는 서울 라이벌인 LG와 OB의 선두 다툼으로 흘러갔는데, 5월까지는 OB의 독주구도였으나 강병규, 장호연 등이 부진으로 선발투수진에서 이탈하고 고질적인 좌완투수 부재[37]로 좌타자 중심인 LG와의 맞대결에서 연전연패. 결국 LG가 8월 중순에 6경기차로 간격을 벌리면서 앞서나갔다.

그러나 김인식 감독의 발빠른 대처로 불펜에서는 이용호가 부진한 김경원을 대체하면서 뒷문을 잠그고 선발진에서는 진필중과 강길룡, 송재용 등으로 장호연과 강병규의 빈자리를 메꾸면서 9월부터 재반격을 시작. 이후 LG가 주춤하는 사이에 OB는 6연승, 4연승 등을 거두면서 상승세를 타더니 9월 10일에는 다시 선두를 탈환한다.[38] 그리고 마지막 27경기에서 OB는 20승 7패를 기록하면서 LG에 반 경기차로 정규 시즌에서 우승한다. 그리고 LG를 꺾고 올라온 롯데 자이언츠와의 1995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7차전까지 가는 대접전 끝에 롯데에게 4-3로 승리하며 사상 두번째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때 1년차 정수근[39] 진필중, 2년차 심정수. 이도형 등 재능있는 신인들을 발굴하기도 했다.

1996년에는 8위(최하위), 1997년에는 5위를 기록했는데,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전년도 "디펜딩 챔피언"이 "꼴찌"로 추락한 사례로 남게 되었다.[40][41] 1998년, 이 해에는 10년 이상 중심 타선을 지켜오던 베테랑 김상호, 김형석이 빠지자 8월 말까지 꼴지를 기록했으나 외국인 타자 타이론 우즈, 김동주, 심정수[42]의 활약에 힘입은 시즌 막판 연승으로 1경기차 4위에 오른다.[43] 그러나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잠실 라이벌 LG에 2연패로 탈락하게[44] 된다. 이는 "OB 베어스"라는 이름으로는 마지막 경기[45]가 되었다.

1999년 1월 5일, 구단 명칭과 법인명을 두산 베어스로 변경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후의 시즌은 두산 베어스 문서 참조.

5. 유니폼

파일:attachment/OB 베어스/OB베어스유니폼.jpg

1982년 프로 원년부터 구단명을 두산 베어스로 바꾸기 전인 1998년까지 무려 17년간 장수한 유니폼이다. 2014년 현재까지도 한국 프로스포츠에서 가장 오랫동안 채택됐던 디자인이기도 하다.

원년에 가슴 부분의 패치가 OB라고 크게 박은 유니폼이 별도로 있던 것만 빼고는 버튼형 셔츠에서 박스형 셔츠로 바꿀지언정 한번도 디자인을 바꾼 적이 없다. 색깔도 베어스 특유의 흰색-남색-빨간색을 써 곰의 이미지인 힘과 우직함을 잘 상징했다.

또 무엇보다 그냥 유니폼 디자인 자체가 이쁘다. 그래서 디자인 교체 없이 17년간 사용한 듯 하다. 1980년대 만들어진 유니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클래식함과 깔끔함을 자랑한다. 당대 OB 베어스 야구 잠바는 남학생들의 최애 아이템이자 최고의 인기 아이템이였다. 모자 디자인도 나름 유니크하면서도 예쁜지라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베어스 특유의 팀 컬러를 잘 반영하고, 요즘에도 결코 촌스럽지 않은 디자인이라 이후 2007년 부터는 매각된 OB맥주 CI를 제거한 것 빼고는 완전히 동일한 디자인의 올드 유니폼 데이로 정식 채택되어 입고 나온다. 이 디자인으로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 팬들도 많다.

이 유니폼 이후 두산 베어스로 팀명을 변경하고, 1999~2009년까지 약 10년간 남색과 노란색의 조합인 일명 반달 유니폼을 사용하였으며 2010년에 들어서 유니폼 디자인을 변경. 다시 OB 때의 컬러인 짙은 남색+빨간색+흰색 조합으로 돌아와 현재까지 사용중이다.

6. 마스코트

파일:OB 베어스 마스코트.jpg 파일:장난치는 OB 베어스 마스코트.jpg 파일:OB 베어스 마스코트와 윤동균.jpg

OB 베어스의 마스코트는 곰이었다.
파일:OB 베어스 마스코트와 어린이팬들.jpg
어린이 팬들과 함께 노는 OB 베어스 마스코트

참고로 어린이 팬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파일:attachment/OB 베어스/OB베어스엠블렘.jpg 파일:attachment/OB 베어스/OB베어스마스코트.jpg
엠블렘 마스코트 일러스트
파일:/pds/200904/02/58/e0036358_49d3937788dc7.jpg 파일:external/timetree.zumst.com/997784d1f2f64ea8867090c90b43cc72.jpg
OB 베어스 상품 OB 베어스 엠블렘과 상품

또한 엠블럼은 OB 베어스 마스코트로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상품도 인기가 많았다.

두산 베어스로 바뀐 이후에도 가끔씩 등장한다. 다만, 지금의 마스코트랑 생김새와는 딴판이라 약간 괴리감이 있다. 예를들면 카리스마가 있는 호랑이에서 그냥 동네 친한형 이미지가 되어버린 호랑이의 KIA 타이거즈나 귀여운데 뜬금없이 로봇으로 진화하신 LG 트윈스가 있다.

7. 부활?

2020년 들어 두산의 경영상황이 갈수록 암담해지면서 두산 베어스의 매각설이 수시로 흘러나오던 가운데, 오비맥주가 두산 베어스의 인수를 타진했다가 두산 측이 터무니없이 높은 호가[46]를 불러 접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예전 OB 베어스 마스코트를 '랄라베어'라는 이름으로 그룹 홍보에 써먹어 재미를 보던 가운데 이참에 차라리 두산 야구단 자체를 인수해서 마케팅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심산이었다고 한다. # 사실이라고 하면 예전에 두산이 팔아치운 OB맥주가 옛 모기업과 처지가 역전되어 그룹의 상징격인 야구단을 사겠다고 온 상황이니 두산 입장에서는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두산 측은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다. #

이후 시간이 흘러, 두산의 자금 상황이 많이 좋아지면서 사실상 해프닝으로 끝났다.

8. 기타

2016년에 OB맥주가 프리미엄 맥주를 출시하며 내놓은 광고들[47]
  • 응원곡인 승리의 OB[49] LG 트윈스의 나가자! LG와 마찬가지로 유명하며, 마스코트인 곰돌이의 경우 삼성 라이온즈의 마스코트인 사자와 마찬가지로 유명하다. 참고로 당시 OB맥주의 맥주 체인점인 OB 베어와 마스코트를 공유했고 마스코트 사용권은 두산이 OB맥주를 매각하면서 완전히 OB맥주에 넘겼다고 한다. 그래서 OB맥주가 OB 라거를 재출시할때 OB 베어스의 마스코트를 쓸 수 있었다고 한다. # 한 술 더 떠 OB맥주에서 이모티콘이나 콜라보 티셔츠 등 뉴트로 마케팅에 써먹고 있다.
  • 1998년 두산이 OB맥주를 벨기에의 주류 기업인 인터브루[50]에 지분을 50.9%를 매각하여 공동소유가 되었고, 이후 주류 업체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모기업인 두산그룹의 이름을 따서 1999년 두산 베어스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후에 45%의 지분을 넘겨 현재는 5%만 가지고 있다.)[51]
  • 불암콩콩코믹스의 작가인 최의민이 좋아하는 팀이라 작가의 오너캐가 OB모자를 쓰고 나온다.
  • 유재석은 두산 베어스 팬인데, 특히 그 중에서도 OB 베어스 원년팬이라고 한다.
  • 1985년 서울특별시로 연고지를 옮긴 후 서울 연고 정착과 야구 저변 확대, 꿈나무 육성 등을 위해 1986년부터 서울지역 초등학교 및 리틀야구 대회를 창설해 현재까지 개최하고 있다. 참고로 이 대회의 초대 우승팀이 서울학동초등학교였는데 이 팀의 주축 선수 중의 한 명이 바로 서장훈이다. 서장훈은 OB 베어스 원년 시절부터 열렬한 두산 베어스의 팬이며 박철순의 열렬한 팬으로도 알려져 있다.
  • OB 베어스 드래프트 픽 출신으로는 1997년 김원섭, 1999년 김성배, 정재훈 등이 현역으로 뛰고 있다. 다만 이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팀의 명칭이 두산 베어스로 바뀐 이후에 베어스 선수로 입단했다. 2018년 기준으로 모두 은퇴했다.
  • 1990년대에는 해태 타이거즈를 무려 2번이나 가을야구 문턱에서 좌절을 시킨 전력이 있다. 바로 1995년과 1998년인데 1995년에는 OB가 해태와의 추석 연휴 4연전을 싹쓸이 하며 선두로 올라섰고 기세를 몰아 시즌 막판에 LG를 2위로 끌어내리며 반 게임차로 1위를 차지한 반면 해태는 4연전 피스윕 기점으로 휘청거리며 3위 롯데와 4.5게임차로 벌어지며 4위를 하고도 규정상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를 했다.[52] 1998년에는 시즌 마지막 경기인 2연전을 남겨두고 4위 해태가 5위 OB에 1게임차로 앞선 상황에 1무만 거두어도 해태가 포스트시즌에 갈 수 있었지만 되려 2경기를 모두 내줘 역으로 5위로 내려 앉았고 OB가 마지막 경기에서 극적으로 포스트시즌에 합류한다.
  • 처음 충청도 연고 시절에는 3년 후 서울로 올라가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충청도 지역민들은 OB에 별다른 마음을 주지 않았고, 홈팀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OB가 원년에 연전연승을 기록하면서 성적이 잘 나오고 우승까지 하자 결국 마음을 주게 되었다. 하지만 OB가 서울로 이전한 후 빙그레가 창단되자 대부분은 빙그레로 갈아타게 되었는데, 소수는 OB를 계속 응원하여 80년대 말까지는 충청도에도 OB팬이 제법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OB암흑기가 도래했고 때맞추어 빙그레 이글스가 강팀으로 자리잡으며 결국 충청도의 OB팬들은 대부분 빙그레로 흡수되며 그 명맥이 점점 끊어져 갔다. 아직까지 충청도 출신으로 두산을 응원하는 장년 노년팬들은 원년 베어스팬 중에서도 충성도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 1990년대까지만 해도 잠실 야구장을 함께 쓰는 LG 트윈스보다 인기도가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었다. 특히 1990년대에는 신바람 야구를 표방하던 LG가 최고의 인기 팀이었고 OB는 마이너 팀이었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건 어디까지나 1990년대의 이야기다. 1980년대 당시 OB의 인기도는 LG 전신인 MBC의 인기도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특히 리그 초창기 코어 팬의 한 축인 어린이 팬덤 중에는 유재석, 정준하, 싸이, 황정민 등 OB를 응원하던 어린이 팬들이 곳곳에 많았는데 대부분 슈퍼스타 박철순의 존재와 귀엽고 예쁜 유니폼과 곰돌이 마스코트의 영향으로 OB를 응원하는 팬들이었다. 다만 1990년에 LG가 서울 최초의 우승팀 타이틀을 가져가고 1994년에 압도적인 전력으로 또 한 번 통합우승에 성공하는 사이에 OB의 암흑기(소위 꼴비)가 겹치면서 LG보다 상대적으로 팬이 적어보였을 뿐이다. KBO 리그 역사상 OB-두산 팬덤이 마이너로 취급된 시기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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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1999년 부터는 두산 베어스로 팀명 개칭 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2] 현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 [3] 제2구장 [4] 아마추어 야구계의 반발로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으로 옮겨갔다. [두산] [6] 이런 방식으로 공식 구단명을 명명했던 팀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을 함께 쓰는 LG 트윈스인데, 창단 당시 공식 구단명이 '럭키금성 프로야구단 LG 트윈스'였다. 그러나 그룹명을 럭키금성에서 LG로 바꾼 후 구단명에서도 럭키금성을 완전히 제거하여 LG 트윈스라고만 쓰고 부른다. [7] 그렇다고 당시에 두산의 계열사였던 OB맥주 밑에 있지도 않았고 계속 두산의 계열사로 있었다. 이후 1999년 법인을 두산 베어스로 개칭하여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8] 이 목표에 이르기까지 3년이라는 기간이 걸렸고 이를 가지고 세입자라고 조롱하는 일부 지붕 아래 옆방 팬덤 중 소수 악질 팬들이 있는데, 럭키금성그룹의 MBC 청룡의 인수 조건은 잠실 야구장 이외의 경기장을 사용하는 조건이었고 LG 트윈스가 이 조항에 따라 뚝섬 부지 이전 시도 전에 서울이 아닌 분당 부지로 이전을 시도할 만큼 잠실 야구장 사용에 대한 정당성이 상당히 훼손된 상황이기 때문에 베어스가 세입자라는 일부 LG 팬덤의 표현은 역사 왜곡에 가까운 발언이다. [9] 당시 관계당국은 프로야구 참여 대상 기업의 조건으로 재무 상태가 탄탄한 기업, 기업의 창업지가 구단 연고지에 해당하는 기업 또는 기업 총수가 구단 연고지 출신일 경우로 한정했다. 두산 역시 당시 소비재 기업인 OB맥주 등 네임드로 내세울 만한 계열사도 많이 갖고 있어서 재무 구조에도 별 문제가 없었다. 대구에서 사업을 시작 삼성 대구의 라이온즈 야구단을 맡고 울산광역시 출신 신격호 롯데 부산의 자이언츠 야구단을 맡은 것도 이 때문이다. [10] 광주가 전라남도에서 분리돼 직할시로 승격된 것은 프로야구 출범 이후인 1986년이다. [11] 대전이 충청남도에서 분리돼 직할시로 승격된 것은 프로야구 출범 이후인 1989년이다. [12] MBC 역시 서울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긴 했다. 당장 MBC의 첫 사명이 '서울민간방송'이었다. [13] 이진희 사장은 MBC 사장 취임 일성으로 전두환의 수호자를 자청했을 정도로 전두환에게 잘 보이고자 노력했다. 당시 MBC는 이진희 사장의 지시 때문에 땡전뉴스를 비롯한 전두환 정부 편향적 프로그램의 제작에 경쟁적으로 나섰으며, 이진희 사장은 MBC 프로야구단의 창단을 주도하는 등 친정부 행보를 이어갔다. 그 영향 때문인지 프로야구 출범 직후 정부 대변인 역할을 하던 문화공보부 장관으로 전두환 정부에 입각하게 된다. [14]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대한체육회 회장 겸 서울 올림픽 유치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현대그룹의 실세 CEO였던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 대한수영연맹 회장을 맡고 있었다. [15] 실제로 부산의 거대 목재기업이었던 동명목재그룹이 1980년 신군부의 강탈에 의해 별안간 사라졌고, 프로야구 출범 후 3년이 지난 1985년 2월에는 국제그룹이 전두환 정부에 정치 자금을 제대로 헌납하지 않고 민주정의당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지역 유세 지원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유로 강제 해체됐다. 그야말로 정부의 말을 듣지 않는 기업은 단칼에 날려버리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두산이 서울 연고권을 주지 않는다고 당국에 개겼다가는 그룹 자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도 있었다. [16] 대구광역시 출신인 김재박은 원래 경북고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경북고 측이 김재박을 별볼일 없이 바라보는 바람에 갈 곳이 없어졌다. 결국 야구부를 새로 만든 서울 대광고에 자리가 생겼고 그 학교를 나왔기에 삼성이 아닌 MBC의 지명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김재박이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것은 영남대 재학 시절부터다. [17] 충청북도 영동군이 고향이지만 서울의 선린상업고등학교(現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출신이라서 서울 연고 드래프트 대상이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김우열은 1986년 새로운 충청도 연고팀 빙그레 이글스로 이적해서 실제로 서울 팀 선수로서 뛴 기간은 1년에 불과하다. [18]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충청도는 야구의 불모지였다. 천안북일고의 우승을 필두로 청주 세광고, 대전고, 공주고 등이 서서히 득세하기 시작했으나 프로야구 출범기에는 충청 출신 선수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메이저 리거는 충청도 츨신인디 [19] 결국 두산은 2003년 OB맥주를 외국 자본에 최종 매각했다. [20] 최기문은 홍성흔의 입단 전 차명주를 상대 롯데로 트레이드 되었다. [21] 두산 그룹의 박승직 창업주가 경기도 광주 출신이라고 연고로 붙일 수 있기에 그렇다. 또한 두산그룹의 창업지가 서울이었기 때문. 관련 자료 [22] 82년 신인 드래프트에서부터 서울팜에 지명권을 행사하였다. [23] 박종훈은 최초 신인왕을 수상 [24] 다만 불과 이틀사이에 OB도 해태와 함께 김일권의 도루왕 타이틀과 맞바꾸는 조건으로 승부조작을 한 바 있다. [25] 8월 18~20일에 청보를 상대로 치른 3연전이 OB가 홈팀 자격으로 치른 대전구장의 마지막 경기였다. [26] 그 중의 1경기(9월 26일)의 상대가 공교롭게도 홈팀인 롯데였다. 물론 특별 홈경기인 관계로 롯데가 선공을 했다. [27] 아마야구의 반발이 계속되며 동대문야구장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고 1989년 이후에도 계속 잠실야구장에서 홈구장을 치렀다. [28] 1차전 충격패에도 불구하고 3차전까지 2승1패로 앞서있었고 4차전 9회말2아웃까지 3:2로 앞서있어 1987년 한국시리즈가 눈앞에 있었지만 2사 3루에서 유지훤의 실책성 수비로 동점이 되었고 연장 10회에서 최일언의 끝내기폭투로 통한의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전설의 타이거즈 김준환 김일권이 출연하여 1987시즌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김일권은 1987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지 못해 눈물을 흘리며 팀의 우승을 지켜봐야했고 김준환은 집안 사정때문에 1987년 한 해 최악의 정규시즌 성적을 기록[53]했으나 1987년 한국시리즈에서 맹활약하며 시리즈 MVP를 탔다고 말했다. [29] 사실 이날 개막전 투수는 김진욱 투수인데 개막전 훈련연습 이랍시고 팀 선배 김광림이 타격한 그 자리에 하필 김진욱이 서있다가 빠른 타구를 보지못해 중요부위를 맞고 다치고 만다. 그날 뜬금없이 보고 있던 장호연이 부랴부랴 등판하러 나온것이다. 이렇게 장호연은 대기록을 세우며 야빠들이 알고있던 "개막전의 사나이" 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김진욱도 결국엔 큰 부상없이 이때 다친것을 빼면 시즌 내내 1군에 있었다. [30] 소위 말하는 김성근 감독 초대 사단들 이였다. [31] 2군에 있던 쌍방울 레이더스가 그해 1군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던 시기이다. 그리고 이전까지는 7개구단으로 운영을 하여 리그 진행에 조금 차질이 있었으나 8개구단이 형성되면서 자연스레 경기 진행이 원활하게 돌아가던 시기이도 하다. [32] 그러나 공격력은 별로 강하지 않았다. 팀 타율은 2위였지만 홈런 수에서 LG에 뒤졌다. 특급 신인이던 김경원은 엄청난 혹사 끝에 1위 선동열 다음으로 방어율 2위를 기록을 달성한 것이다. 애석하게도 93년~97년까지는 투고타저 시즌이므로 프런트들이나 코칭 스탭 또는 OB팬들은 위에 상기대로 당시 홈런 또는 장타의 의존을 임형석이나 김상호에만 의존을 너무 많이 했었다. [33] 박철순, 김상호, 김형석, 장호연, 강영수 등의 다섯 고참 선수들은 계약을 해지하기로 하였으나, 강영수만이 방출후 태평양 돌핀스로 입단하게 되면서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다. 강영수는 비록 OB가 우승하던 그 해 태평양에서 20홈런 넘게 치면서 부활하나 싶더니 이듬해 현대로 팀명이 바뀌면서 갑작스러운 성적부진으로 이적 2년 만에 저니맨으로 전략하며 쌍방울 레이더스로 건너가 프로생활의 종지부를 찍는다. OB가 방출한 이유도 애초에 강영수는 베어스의 선수가 아니라 삼성에서 건너온 선수였다 라는 후문도 있었다. [34] 그리고 다음해 시즌이 끝나고 지방에 있던 모 구단 하와이 스프링캠프에 가서 비슷한 일을 겪는다. [35] 김인식 감독은 쌍방울 레이더스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임기 내내 하위권에만 머무르고 있었고 구단도 결국 한계가 왔는지 재계약을 하지 않았었다. 이후, 스포츠 신문 논객 또는 아마 or 프로 구단 인스트럭터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재능 기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급한 항명 파동과 연관이 있다면 동국대 시절의 제자 한대화가 있다. OB에서 데뷔했으나 성적이 신통치 않아서 해태로 트레이드될 뻔했는데 그걸 듣고 충격을 먹은 건지 갑자기 산으로 가서 생활을 한 것 그걸 들은 김 감독은 한대화의 설명을 잘 들어주었고 하필 팀에 있을 때 감독이 선수가 아픈 곳이 있는데 잠시만 쉬다가 다시 하겠다는 걸 들어주질 않아서 감독은 꾀병이나 피우지 말고 잘해라는 소리에 야구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고. 그리고 프로로 돌아온 한대화는 해태 왕조의 핵심 멤버가 되었다. 그리고 한대화의 트레이드 상대는 코감독의 심기를 건드린 양승호였다. 거기다가 한대화는 원래 가고 싶었던 팀은 빙그레 이글스였다고 한다. 이유는 사실 OB의 연고지가 대전광역시였다. 즉, 한대화는 대전 출신이었다는점. 김인식 감독은 쌍방울 부임전에는 해태에 코치를 하면서 제자 한대화와 무수한 공을 세웠다. 야구를 오래보셨던 팬들이라면 김인식 감독은 아마추어 야구단에서만 감독을 했었지, 정작 프로에 와서는 "투수코치"와 "수석코치"를 하고 뒤늦게 "감독"을 했다. [36] 투고타저 시즌이라 매우 적게 느껴질 수 있다. 90년대 최저 홈런갯수 홈런왕이다. 김상호보다도 적은 수의 홈런왕은 프로야구 초창기인 원년의 홈런왕 김봉연이 가지고 있다. 1986년 "21개" [37] 1995년 OB의 74승 가운데 좌완투수가 올린 승리는 하나도 없었다. [38] LG 이광환 감독이 3일휴식 4인선발 로테이션을 돌린 것이 LG가 주춤한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잘 던지던 이상훈은 다음해에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더이상의 선발투수 로는 활약하기 힘들다에 판단하여 마무리투수로 전향하여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39]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1995년 한국시리즈에서 대주자, 대수비 등으로 기용됐고 3차전에서 10회초 1타점 결승 2루타를 쳤다. 박명환야구TV에서 밝힌 바로 우승 보너스 고과를 A, B, C, D로 나눠서 매기는데 본인은 A등급을 받아 2,000만원을 받았고 동기들이 삐삐 차고 다닐 시기에 250만원짜리 휴대전화를 샀다고 한다. 사실 거기에 정수근은 3차전 결승타를 쳤던 장본인이었다. 그 무섭다던 부산아재들의 홈경기장에서 말이다. 그리고 두산에서 FA가 되어 진짜로 상대팀으로 이적했다. 이적한 이유는 두산팬들보다 롯데팬들의 함성이 더 많아서(....) [40] 결과적으로 삼성에게 죽 쒀서 개 준 꼴이 되었지만 이게 진갑용을 지명하기 위해 일부러 꼴찌를 했다는 설도 있다. 그 당시에는 진갑용이 홍성흔에게 밀려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단, 진갑용을 4억에 팔아넘겼으니 계약금을 환수한 거나 다름없었다. 진갑용의 계약금과 3억8천 + 그 당시 97년 입단 연봉 2000만원이었다. 덤으로 우완투수 이상훈을 받아와 어느 정도 써먹었다. [41] 한편 농구에서는 15-16시즌 정규리그 우승팀인 전주 KCC 이지스가 다음 시즌인 16-17시즌에 정규리그 꼴지로 추락하여 사례를 하나 추가했다. [42] 일명 우동수 트리오. 이후 두산 베어스로 바뀌고도 몇 년 동안 중심타자로 맹활약한다. [43] 단 한 번이라도 지면 끝인 시즌 막판 8경기를 전부 이긴다. 심지어 9월 29일 버스 전복사고가 있었는데도 저걸 다 이긴 것이다! 심지어 1무만 해도 자력 패배였다. 정수근과 박명환이 이 이야기를 하는데 사람들이 OB 선수들 죽었다고 난리났다했나 뭐래나.... [44] 1차전은 연장전에서 아쉽게 알까기로 끝내기 패배였다면 2차전은 그야말로 마운드가 떡실신되어 대패하고 말았다. [45] 아직도 원년 구단이지만, 이름 때문에 OB와 두산이 다른 팀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46] 몸값을 황당하리 만큼 올려 사실상 거절의 의미로 한 것. 현대전자가 2001년 당시 현대자동차그룹 현대 유니콘스 인수 제안에 900억을 부르며 NFS를 시전했던 것과 같다. [47] 여담으로, 출연한 사람은 당시 두산으로 바뀌기 전의 야구단인 OB 베어스의 마지막 감독 김인식이다. [48] 주사위 던지기에 져 1993년 드래프트 1차 지명의 이상훈을 못 뽑았다. [49] 강변가요제 출신 가수 권성연( 영심이 피구왕 통키 주제가도 불렀다.)이 불렀으며, 1999년 두산 베어스로 팀명이 바뀐 뒤에는 우리 두산 멋진 두산으로 바뀌어 사용되고 있다. [50] 2004년 브라질 기업 암베브와 합병해서 인베브로 바뀌었다. [51] 두산그룹은 주류, 식품 등 소비재 위주 기업이었으나 IMF 직전이었던 1990년대 중반부터 소비재 업체들을 매각하고 대신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등을 인수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현재는 두산중공업, 두산인프라코어를 중심으로 한 중공업이 주력인 기업으로 바뀌었다. [52] 잔여경기 일정에서 김성한의 은퇴식이 있던 경기도 OB와의 대결이었는데 그 경기도 OB가 이겼다.


[53] 진짜로 김준환의 커리어로우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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