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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베어스 2025 시즌 코칭스태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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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군 | ||
'''77
이승엽 [[틀:두산 베어스 감독| ★ ]] · 79
박정배 · 81
김지용 · 83
김동한89 고토 · 91 이영수 · 92 조성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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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군 | |||
70
조웅천 · 71
이도형 · 80
김진수 82 권명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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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류·재활군 | |||
72 조경택 · 90 가득염 | |||
트레이닝 파트 | |||
1군
천종민 · 조광희 · 유종수 2군 이덕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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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군 입대 선수 | 등록 선수 | |||
다른 KBO 리그 팀 명단 보기 |
이도형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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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
|
1995 | 2001 |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
2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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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역대 주장 (빙그레 시절 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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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000> 1986~1990 | 1991~1993 | 1994~1995 | 1996 | 1997~2000 |
유승안 ☆ ☆ |
이강돈 ☆ ☆ |
강정길 | 장종훈 |
강석천 ★ |
|
<rowcolor=#ffffff> 2001 | 2002 | 2003 | 2004 | 2005~2006 | |
장종훈 | 김종석 | 임수민 | 이영우 |
이도형 ☆ |
|
<rowcolor=#ffffff> 2007 | 2008~2010 | 2011~2012 | 2013 | 2014 | |
정민철 | 신경현 | 한상훈 | 김태균 | 고동진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8~2019 | |
김태균 | 정근우 | 이용규 → 송광민 |
최진행 송광민 (임시) |
이성열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이용규 최재훈 (임시) |
노수광 → 하주석 |
하주석 장민재 (임시) |
정우람 | 채은성 |
OB/
두산 베어스 등번호 25번
|
||||
김범수 (1991~1992) |
→ |
이도형 (1993~2001) |
→ |
권명철 (2003~2004) |
한화 이글스 등번호 12번 | ||||
강인권 (1995~2001) |
→ |
<colcolor=#fff> 이도형 (2002~2010) |
→ |
박노민 (2011) |
NC 다이노스 등번호 81번 | ||||
강인권 (2012~2014) |
→ |
이도형 (2015~2018) |
→ |
손민한 (2019~2022) |
두산 베어스 등번호 71번 | ||||
이강철 (2017~2018) |
→ |
이도형 (2019~) |
→ | 현역 |
|
|
<colbgcolor=#131230><colcolor=#fff> 두산 베어스 No.71 | |
이도형 李到炯 | Lee Do-hyung |
|
출생 | 1975년 5월 24일 ([age(1975-05-24)]세) |
서울특별시 강남구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서울학동초등학교 (졸업) 휘문중학교 (졸업) 휘문고등학교 (졸업) |
신체 | 182cm, 102kg |
포지션 | 포수, 1루수, 지명타자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93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 OB) |
소속팀 |
OB-
두산 베어스 (1993~2001) 한화 이글스 (2002~2010) |
지도자 |
고양 다이노스 배터리코치 (2015~2016) NC 다이노스 1군 타격코치 (2017~2018)[1] 고양 다이노스 타격코치 (2018)[2] NC 다이노스 1군 타격코치 (2018)[3] 두산 베어스 2군 타격코치 (2019)[4] 두산 베어스 1군 타격코치 (2019~2021)[5] 두산 베어스 2군 타격코치 (2021)[6] 두산 베어스 1군 타격코치 (2022)[7] 두산 베어스 2군 타격코치 (2022~)[8] |
경력 | KBO 육성위원 (2013~2014) |
병역 | 현역 (1997~1999) |
응원가 | 한화 시절: 맛동산 CM송[9]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OB-두산 베어스 시절 타격에서 잠재력을 가진 포수로 주목 받았고, 95시즌과 01시즌 두번의 우승을 함께 하기도 했던 프랜차이즈 선수였으며, 2000년대 중반 한화 이글스의 중흥기 시절 중심타자로 활약하며 프랜차이즈 못지 않은 사랑을 받은 타자다. 또한 불합리한 FA 제도에 후배 선수들을 위해 자신의 선수 생명을 걸고 저항한 의미있는 행동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코치로서의 평가는 좋지 못하다. 그 이유는 배터리코치 시절에는 김태군이 입대하기 전까지 백업 포수를 단 1명도 키워내지를 못 했을 뿐만 아니라 타격코치로서는 2017 시즌 투수진의 활약에 비해 부진한 타선을 양산하는 문제점을 보이더니 2018 시즌에는 결국 역대급 물타선을 만들고야 만 장본인이 되었고, 이는 두산으로 옮긴 뒤 더더욱 심해져, 팀 최다 병살타를 포함해 두산 타선의 집단부진을 야기하며, 지금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두산의 강타선을 망쳐놓은 장본인이라고 볼수있다.
2. 선수 경력
|
OB 베어스 선수시절 |
서울학동초 시절 야구특기생으로 포니 차 촬영을 한 후, 휘문중, 휘문고를 졸업하고 1993년 OB 베어스에 고졸 신인으로 계약하며 입단하였고, 2년차인 94시즌부터 타격에서 잠재력을 보이며 1군에 자리잡기 시작한다. 팀이 우승한 95시즌에 주전 선수로 쏠쏠한 활약을 하였고 이후를 기대하게 했으나 부상과 부진으로 활약을 이어가지 못하고 1998년 군입대를 하게 된다. 군에서 복귀한 00시즌부터 백업으로 활약하며 01시즌에 다시 한번 우승 반지를 끼게 된다.
이듬해인 2002년 1월 17일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되었고,[10] 2004 시즌이 끝나고 같이 OB-두산에 있던 김인식 감독이 한화에 부임함에 따라 다시 한솥밥을 먹게 됐다.[11]
데뷔 시절만 해도 공수 겸비의 유망한 포수로 괜찮은 활약을 보였다.[12] 그러나, 후에 OB에 최기문, 진갑용, 홍성흔 등 국가대표 출신들이 줄줄이 들어오는 바람에 포수 자리에서 밀렸으며, 1997년에는 시즌 중 현역으로 입대해야 했다. 그나마 지명타자 자리조차도 최훈재, 타이론 우즈, 강혁 등 줄줄이 강타자가 들어오는 바람이 밀렸다.
|
한화 이글스 현역 시절 |
그러한 바람에 1999년에 제대하여 복귀하고 나서도 기회를 많이 잡지 못해, 2001 시즌 두산 베어스의 한국시리즈 우승 후 강인권를 상대로 현금 트레이드되어 포수 자리가 부실했던 한화 이글스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이후 한화의 주전 포수를 맡으며 뜬금포도 한 방씩 쳐주는 등 괜찮은 모습을 보였으나, 2004년 어깨 부상으로 포수로서의 활약은 접고 그나마 가지고 있는 장타력으로 지명타자로 들어서게 돠었다. 그러한 상황에 힘입어 2005 시즌에는 20홈런도 돌파하고 2006 시즌에는 팀의 주장을 맡는 등 한화에서의 입지가 나름대로 탄탄해졌다.
2007 시즌에는 이도형을 포수로 돌림으로 신경현- 심광호-이도형 간의 경쟁을 통해 한화 포수의 질을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신경현의 약진 등으로 인해 유야무야되고, 이도형은 되려 부족한 타격훈련 탓에 그 해 1할대 타율을 찍는 등 그나마 장점이었던 타격부문에서조차 밀리고 말았다. 그 뒤 김인식 감독이 키우겠다던 정범모 등의 신인 포수, 그리고 지명타자 후보에도 김태완, 이영우 등이 있어 이도형의 입지는 점점 좁아질 것으로 보였지만 2009년에는 오히려 비중이 더 늘었다. 지명타자. 포수, 1루수 등 전천후로 출전하였다.
[13]
이도형의 놀라움은 가공할 만한 타석 대비 병살타로써, 일설에 따르면 어떤 상황에서든 병살타를 자유자재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질 정도. 그래서 이러한 그의 재능은 전형적인, 안 뚫리는 한화 야구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타 팀 팬들에게 더욱 사랑받고 있다. 한화 팬을 포함한 야구 팬들은 이러한 이도형에게 애증을 담고 있으며 야갤에선 특별히 그의 능력을 기려 '도형신', '병살의 마스터피스', '비밀번호 463'[14]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에 이르렀다. 사실 643이라고 해야 맞는데 우타자인 그는 전형적인 풀히터로 땅볼타구가 거의 3-유간에서 형성된다. 워낙 당겨치기 때문에 643 못지않게 543 병살도 많고, 2006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선 무사 만루에서 초구를 당겨쳐 523 병살로 팬들을 뒷목잡게 했다. 그리고 사실 643도 543도 아닌 463이 비밀번호가 된 건 비밀번호 486의 영향인지라…
이도형의 병살을 수치적으로 따져보면 통산 병살 수는 99개로 역대 60위권에도 못 들어간다. 하지만 100타석당 병살은 약 2.84개로 역대 10위권에 들어가기 때문에 높은 빈도의 병살을 기록한 건 사실이다. 한화 시절만 따질 경우 2,578타석에 76개로 100타석당 2.95개가 되니 한화에서 조금 더 많은 병살을 쳤다. 특히 2007년 100타석당 5.53개의 병살은 단일 시즌의 임팩트로는 상당한 수준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가 붙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한화시절에 팀의 부족한 장타력을 더해주는 등 나름 팀에 좋은 공헌을 해준 선수였고[15] 이도형보다 높은 빈도로 병살을 친 선수가 없는 것도 아니기에 그가 병살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것은 이도형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할 수도 있는 일이다.[16]
청주 경기에서의 활약이 좋아 '청주 본즈'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특히 청주에 있는 처가가 지방의 재력가인 탓에 한화 선수들이 청주로 오면 장모님이 자주 피자를 돌린다고 해서 '피자도형'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참고로 CJ 마구마구 2009 프로야구 4월 30일까지 청주구장에서 그의 성적은 11타수 9안타 2홈런 1볼넷 5타점 장타율 1.600 출루율 0.909 OPS 2.509.
그러나 2009년에는 뇌진탕에 시달리던 김태균의 공백 속에서 사실상 타선의 대들보로 활약해서 많은 이들이 놀라워했다. 타율 0.318 98안타 12홈런 56타점을 기록하며 커리어 유일의 3할 타율을 달성한 것. 2006년을 기점으로 명백한 하향세를 보이던 터라 그의 재기는 더욱 놀랍다. 팀 배터리진의 불안에 다시금 포수 마스크까지 쓰게 되었고, 양대 거포 김태균과 이범호가 2010년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김태완과 더불어 둘뿐인 검증된 장타자로 남은 그의 활용가치는 점점 솟아만 갔다. 이건 팀의 주력이 빠졌기 때문에 반사 이익을 챙긴 것 같지만, 타자로서의 이도형의 타격 스킬 자체가 발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17]
특히 결정적인 두 방의 끝내기 홈런을 작렬시키며 어려운 시즌을 보내던 한화 팬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7월 4일 KIA전에서 선발 류현진의 12탈삼진 역투에도 불구하고 패색이 짙던 경기에서 한기주를 상대로 장렬한 끝내기 역전 2점 홈런을 쳐 한화 이글스의 12연패에 종지부를 찍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그 뒤 7월 16일 사직 롯데전에서 카림 가르시아의 숄더 태클을 맞고 KO. 다음날 바로 2군으로 내려갔다가 복귀한다. 그의 뜬금포는 여전히 건재해서, 정민철의 은퇴식이 있었던 9월 12일 히어로즈전에서 9회말 끝내기 3점 홈런으로 9점차 지고 있던 경기를 뒤집으며[18] 정민철의 마지막 경기를 화려하게 장식해 주었다.
김태균과 이범호가 떠나간 2010 시즌에도 하루 2홈런으로 삼성 라이온즈를 격파하는 데 공을 세우는 등 중심 타선에서 나름대로 제 몫은 해 주었으나, 김태완의 부상으로 인해 자신의 포지션도 아닌 1루수로 나왔다가 수비 중 팔이 부러지는 바람에 2010 시즌 통째로 시즌 아웃.[19] 이도형과 김태완이 모두 빠진 상태에서 프런트의 미스로 송광민마저 군으로 끌려가 버린 한화 타선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진짜로 타 팀의 1.5군~2군급 타선이 되었고, 김태완이 복귀할 때까지 망했었다. 게다가 김태완조차도 장성호의 영입 이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남은 시즌을 말아먹고 아시안 게임 출전도 불발되어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면서, 현재까지도 한화의 2010 시즌은 한화 역사상 최악의 타선을 보유했던 시즌으로 여겨지고 있다.
2.1. FA 신청과 투쟁
2010 시즌 종료 후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FA를 신청했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보고 싶었고, 불공평한 FA 제도[20]에 맞서기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소속 팀 우선협상 기간 동안 계약하지 못했다.팬들은 FA 제도의 불합리함에는 주목하지 않고 오히려 2010 시즌에 한 것도 없으면서[21] 뭘 더 바라냐고 성화를 냈다. 사실 이도형의 나이[22]를 감안하면 그리 만족할 만한 팀이 없기 때문에 과연 좋은 계약을 맺을지도 문제고, 설령 조건이 어느정도 맞는다 한들 보상선수 문제로 인해 더더욱 조건을 맞추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도형 본인은 정 안 되면 은퇴라도 하겠다는 심사로 신청한 것으로 보인다.
2011 시즌 FA 자격자 계약 시한인 2011년 1월 15일 5시까지 계약이 되지 않았기에, 최종적으로 최영필과 함께 FA 미아가 되었다. 한화 구단은 한 번 만나서 계약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1월 14일 마지막으로 만나서 팀의 현장 직원을 제안했으나 이도형은 개인 사업[23]을 이유로 거부하였다. 앞으로 1년 간 KBO에서 뛸 수 없으며, 나이를 생각할 때 사실상 선수로서는 은퇴다. 이미 한화 구단에서는 마감 시간 전에 이도형과 최영필의 등번호를 다른 선수에게 넘긴 상황이었다.[24]
이로써 최영필과 이도형은 2006년의 노장진(전 롯데), 차명주(전 한화)에 이어 KBO에서 FA 미아 사례가 된 3번째, 4번째 선수가 되었다.[25]
그리고 KBO를 상대로 법정 싸움에 들어갔다. FA 계약의 보상규정 및 계약제한 기간 규정의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낸 것. 드디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 셈이다. 물론 승소 여부를 떠나 앞으로 현역 선수로서의 복귀는 불가능했다. 판결 결과에 따라 KBO의 커트 플러드[26]나 장 마르크 보스만으로 기록될 수도 있던 상황.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류근관 교수는 2012년 1월 24일 매일경제신문에 실린 칼럼에서 이도형 선수의 사례를 언급하며, 당시 프로야구의 FA 제도를 비판하였다.
가처분이 수용되더라도 이도형 개인에게 혜택이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상대가 KBO라 어느 구단이 미움털 박힌 선수를 영입하려 들지 않을 것이며, 그동안 운동을 쉬었기 때문에 제 실력을 발휘하기도 힘들 것이지만, 이도형은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총대를 맨 것. 그리고 결국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져서 FA 협상에 대한 조항이 바뀌게 될 가능성이 생겼다는 기사가 나왔다. #
마침내 이도형의 정당한 요구는 결실을 맺게 되었으며 FA협상 실패시 1년간 자격정지 조건은 사라졌다. 큰 발전이라고까지 하기에는 조금 모자란 감이 있지만, 사실 준척급 FA 선수들에게 강요되었던 진짜 독소조항은 자격정지가 아니라 2015년에도 건재한 보상선수 규정이고,[27] 그동안 자격정지 철폐로 혜택을 입은 선수가 없다시피한 것만 봐도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도형도 이 부분을 가처분 신청에서 함께 다루었으나 최종 판결에서는 쏙 빠진 것이다. 갑질을 투쟁으로 이겨냈다는 느낌을 주면서도 실질적으로 해결된 건 없는, 찝찝한 상태로 판결이 마무리 된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다만 이도형의 투쟁으로 불합리한 FA규정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보상선수 규정 개선에 대해선 대부분이 동의하나 실제 제도개선 논의에서는 각 팀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물려 결국 매번 어물쩡 넘어가는게 문제였기 때문. 또한 이적이 쉽지 않은 준척급 선수들 입장에서는 FA 협상에서 1년을 쉬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낄 필요가 없어졌고, 구단 입장에서는 선수들을 옥죌 수 있는 수단 하나가 사라진 셈이니 이도형의 사례로 인해 어느 정도 선수들의 숨통이 틔워졌다.
그리고 많은 야구 팬들이 주목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이 과정에서 손민한 체제의 선수협이 제대로 한 일은 없다.
3. 은퇴 이후
2011년 초 계약이 불발된 이도형은 선수 복귀 생각은 거의 없다고 하여 사실상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대신 수도권에 사회인 야구 전용 야구장을 지어서 사회인 야구 팀들에게 대여해 주는 사업을 하고 있다. 2011년 난관을 겪었던 선수협 문제에 대해서도 소신있는 목소리를 내며 동료 선수들의 권익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 # 이듬해 선수협 사무총장 선거에서도 박충식에 이은 2위의 득표를 기록하는 등[28] 선수들 사이의 신망도 두터운 듯.
2012년 9월 olleh tv 한화 편파중계에 등장했다. 그렇게 모진 대우를 받았음에도 여전히 한화를 향한 애정은 식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깨알같은 어록.
2013년에는 한국야구위원회의 육성위원으로 위촉, 활동하였다. 팀이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7월부터 한화 공홈에서 준비한 편파중계의 해설위원으로 한화 팬들 앞에 다시 돌아왔다. 팬의 심정으로는 그저 고마울 따름.
2014년에는 일간스포츠에서 런칭한 스포츠 매체인 베이스볼긱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매체의 성격에 걸맞게 깊이있는 분석과 심도있는 인터뷰 등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2014년 4월부터 정규시즌 마감까지 6개월 가까이 아프리카TV에서 오승환이 속해있는 한신 타이거스 편파 중계 해설을 하기도 하였다.
4. 지도자 경력
자세한 내용은 이도형/지도자 경력 문서 참고하십시오.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사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93 | OB- 두산 | 1군 기록 없음 | ||||||||||||
1994 | 60 | 112 | .268 | 30 | 3 | 1 | 4 | 18 | 10 | 1 | 9 | .420 | .317 | |
1995 | 95 | 283 | .290 | 82 | 12 | 0 | 14 | 48 | 38 | 1 | 20 | .481 | .333 | |
1996 | 6 | 18 | .222 | 4 | 1 | 0 | 0 | 1 | 1 | 0 | 0 | .278 | .222 | |
1997 | 81 | 208 | .212 | 44 | 9 | 1 | 5 | 34 | 17 | 1 | 16 | .337 | .263 | |
1998 | 군복무(현역) | |||||||||||||
1999 | ||||||||||||||
2000 | 69 | 125 | .264 | 33 | 6 | 1 | 2 | 19 | 9 | 0 | 10 | .376 | .314 | |
2001 | 40 | 86 | .256 | 22 | 7 | 1 | 2 | 13 | 6 | 0 | 7 | .430 | .312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사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2002 | 한화 | 123 | 365 | .241 | 88 | 15 | 0 | 16 | 55 | 36 | 2 | 22 | .414 | .282 |
2003 | 125 | 365 | .266 | 97 | 19 | 0 | 16 | 58 | 40 | 0 | 41 | .449 | .337 | |
2004 | 66 | 125 | .261 | 43 | 8 | 0 | 6 | 27 | 10 | 0 | 14 | .418 | .315 | |
2005 | 113 | 391 | .258 | 101 | 18 | 1 | 22 | 72 | 43 | 0 | 39 | .478 | .325 | |
2006 | 119 | 426 | .256 | 109 | 22 | 0 |
19 (5위) |
63 | 46 | 0 | 32 | .441 | .306 | |
2007 | 79 | 177 | .186 | 33 | 4 | 0 | 6 | 26 | 18 | 0 | 21 | .311 | .271 | |
2008 | 54 | 67 | .224 | 15 | 1 | 0 | 2 | 16 | 2 | 0 | 3 | .328 | .254 | |
2009 | 98 | 280 | .318 | 89 | 15 | 1 | 12 | 56 | 33 | 0 | 39 | .507 | .400 | |
2010 | 27 | 86 | .291 | 25 | 2 | 0 | 4 | 13 | 8 | 0 | 9 | .454 | .354 | |
KBO 리그 통산 (15시즌) |
1155 | 3154 | .258 | 815 | 142 | 6 | 130 | 519 | 317 | 5 | 282 | .431 | .317 |
6. 여담
- 병살로 유명한 이미지와는 달리, 그의 실제 통산 병살타 수는 99개밖에 되지 않는다. 다른 두산 출신 선수인 안경현, 홍성흔, 김동주 등에 비해 숫자 자체는 현저히 적다. 하지만 상술한 3명은 팀의 확고부동한 주전으로 출장이 이도형보다 훨씬 많았고 타격 전반에서 훌륭한 성적을 쌓은 반면, 이쪽은 커리어 전체나 출장 횟수에 대비해서 기상천외한 병살타가 많았기에 병살왕 이미지가 붙은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에 대해서 본인 타순이 주로 5번이나 6번에 섰으며 그 앞에는 김태완, 김태균 같은 주력이 떨어지는 타자들이 있었기에 병살타를 치기 쉬운 조건에 있을 때가 많아서였다는 주장도 있다.
- 아들 이성현도 야구선수로, 잠신중학교를 거쳐 서울고등학교 야구부에 속해 있다가 전학을 해 2023년 현재 신일고등학교 야구부 3학년이다. 원래 우완 투수이나 전학 후에는 타자로 나오고 있다. 2024년 신인드래프트에도 참가했으나 드래프트에서는 지명을 받지 못했으며 대학 진학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 처가가 청주의 재력가이다. 그래서 청주구장 홈경기 때에 선수단에 피자를 종종 돌렸는데 이 때문에 처가가 피잣집을 한다는 루머가 있었다.
- 야구게임에선 유독 저평가당하는 선수 중 하나. 특히 포수 수비가 최악이라 거의 대부분의 야구 게임에서는 지명타자로만 굴려진다. 프로야구매니저 같은 온라인 게임은 물론이고 컴투스 프로야구 같은 모바일 야구 게임에서도 마찬가지. 분명 어깨 부상은 2004년에 당했는데 어째서인지 2003년 이전의 카드들도 단체로 수비스탯들이 안좋다.
- 이사만루2015 KBO에서는 03 이도형이 밸붕급의 스탯을 자랑한다.
- 앞서 서술된 것처럼 청주야구장에서의 성적이 뛰어난 편인데 어릴 때부터 청주야구장과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은퇴 후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면 휘문중학교 1학년 때 성인 규격 야구장에서 첫 홈런을 쳤다고 하는데 그 홈런을 친 구장이 청주였다고 한다. 게다가 처가도 청주에 있고, 그래서 청주에서 경기를 할 때마다 장모님이 선수단에게 피자를 돌리면서 피자라는 별명도 있다.
7. 관련 문서
[1]
~4월 30일
[2]
5월 1일~6월 3일
[3]
6월 4일~
[4]
~5월 27일
[5]
2019년 5월 28일~2021년 8월 21일
[6]
8월 22일~
[7]
~7월 4일
[8]
7월 5일~
[9]
이~도형 홈런! 이~도형 홈런! 이~도형 홈런! 이~도형 홈런! 홈!런! 이!도!형! (X2)
[10]
이 때, 트레이드 대상은
강인권 + 현금 5억원.
[11]
두산시절 김인식 감독이 현금 2배를 받아오면 트레이드 하겠다며 거부의사를 밝혔으나, 한화가 수용하면서 트레이드가 되었다.
[12]
특히 1995년이 이도형이 주목을 받았던 시기다. 1995년에 14홈런을 기록했는데 그 중 12개가 홈 구장, 즉
잠실 야구장에서 친 홈런으로 당시 한 시즌
잠실 야구장 최다 홈런을 기록했다.
[13]
보면 알겠지만
우익수 앞 병살타를 쳐낸 장면이다.
[14]
2루수-유격수-1루수를 가리키는 숫자
[15]
이도형의 한화시절 통산 WAR는 12.08로 2018 시즌 종료 시점에서 역대 한화 야수 중 17위에 해당한다.
[16]
참고로 이 부문에서 100병살 이상을 기록한 선수 중 가장 높은 병살빈도를 기록한 건 100타석 당 3.75개의
윤석민이다.
[17]
극단적 당겨치기 타법에서 벗어나 밀어치기를 구사하기 시작하며 스프레이 히터가 되었다.
[18]
역대 2위의 대역전승. 역대 1위는 당연히
508 대첩.
[19]
팔이 부러진 경기는 2010년 5월 1일 경기로, 당시 부딪힌 선수는 삼성의
조동찬이다. 정확히는 왼쪽 상완골 골절이며, 철심을 박고 1년 반이 지나서야 철심을 제거할 만큼 큰 부상이었다.
[20]
18인 외 보상선수 문제로 대형 선수가 아니면 이적이 쉽지 않다.
[21]
사실 최영필에 비하면 이도형이 그나마 더 나았다. 최영필은 09년 10점대, 10년 7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면서 누가 봐도 재기가 어려운 수준이었다.
[22]
11시즌 기준으로 37살이다.
[23]
후술하는 사회인 야구장 사업
[24]
단, 후에
최영필은 이듬해 보상권리 포기로 SK 이적에 성공하였다.
[25]
재밌는 점으로 해당 선수들은 모두
한화 이글스에서 선수 생활을 한 적이 있다.
[26]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10여년간 뛰다가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원치않는 트레이드를 당했는데, 이에 맞서 MLB에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FA제도 도입의 단초가 된 선수다. 자세한 내용은
FA 제도와
마빈 밀러 문서 참조.
[27]
보호선수 숫자 등 세세한 변화는 있었다.
[28]
139표, 당선자 박충식은 183표
[29]
2009 시즌 전까지 4개를 기록했다가, 그 해 끝내기 홈런을 2개나 쳐 '난세의 영웅' 인증을 하면서 기록을 갱신하였다. 참고로 공동 2위는
김태균,
마해영,
심정수,
이승엽(4명 모두 5개 기록)이다. 이 4명의 인물 모두 은퇴. 공동 6위는 4개를 기록한
송지만,
박경완,
이종범,
장종훈,
이호성,
모창민이다.
[30]
그 뒤를 잇는
강종필은 한 시즌에 무려 세 개의 끝내기 홈런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