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4 12:29:08

토머스 스탬포드 래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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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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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머스 스탬포드 빙글리 래플스 경(Sir Thomas Stamford Bingley Raffles, FRS). 생몰연대는 1781년 7월 6일~ 1826년 7월 5일이다.

자메이카 출신[1] 영국 정치인으로 19세기 당시 이미 몰락한지 오래되어 깡촌으로 전락한지 오래된 싱가포르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2. 생애

영국 식민지 중 하나인 자메이카, 정확히는 자메이카에서 출발한 배인 앤(Ann)호 선상에서 태어났다.

이후 영국으로 귀국해 고국에 정착한 어린 시절에는 집안이 좋지는 않았으나 학비를 받을 수는 있었다.

14세에 영국 동인도 회사에 취직하였고 1805년 말레이시아의 영국 식민지 중 하나인 해협식민지의 대도시 페낭에 파견되었다. 페낭에서 성실한 태도를 보인 덕에 파견된 직후 부장관에서 바로 부총독으로 승진했고, 5년 전 남편을 인도에서 사별한 미망인인 올리비아 마리암 팡쿠르(Olivia Mariamne Fancourt)라는 여성과 결혼했다. 그리고 평생의 지기 토마스 오토 트레버스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나폴레옹 휘하의 프랑스& 네덜란드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 동남아시아 식민지 수호에 나서며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의 영국군의 승리에 일조했고 이후 주변 토착민들의 저항 움직임을 분쇄하고 네덜란드령 동인도 부총독[2]으로 임명되었다.

1814년 영국-네덜란드 협정으로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영국은 말레이시아로 정리하면서 이 섬을 떠나게 될 무렵 아내가 사망했다.

마침 본국에서 금융 사기범의 누명을 쓴 사실을 알고 영국으로 돌아가는 중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폐되어 폐인이 된 나폴레옹을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런던에 도착해 멍에를 씻어낼 무렵에 자바 섬 이야기를 저술해 출판하고 1817년엔 기사 작위를 받았다.

두번째 아내 소피아 헐과 결혼한 뒤 인도네시아 븡쿨루[3]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다시 동남아시아로 떠났다. 의욕이 없던 전 총독의 뒤를 이었으나, 네덜란드의 견제로 거점을 잃고 인도로 도망치기도 했다.

어렵사리 임지로 돌아와 네덜란드를 피할 방법을 찾아다니던 1819년 1월 29일 마침내 그를 역사적 인물로 만든 섬에 상륙했다. 싱아푸라(Singapura) 현재 싱가포르라 불리는 이 섬은 당시 조호르 술탄국 밑에 있었지만 왕국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고 지역 유지 파쿠하르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 섬은 네덜란드와 무관함을 확인한 래플스는 파쿠하르와 협정을 맺고 섬을 손에 넣었다. 이후 조호르의 왕세자 샤아 이 사람 아니다가 조호르의 술탄으로 즉위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면서 그에게도 싱가포르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여전히 븡쿨루의 총독으로 근무하면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의 아친에서 무역 협정을 맺기도 하는 한편 청나라 쿨리들을 대거 받아들이며 싱가포르의 도시화에 주력했다. 1823년에는 도박과 노예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은 싱가포르 법률을 제정했다. 무엇보다 청나라 출신 쿨리들과 원주민 말레이인의 화합을 맨 먼저 주장했던 사람이었다.[4]

네덜란드의 압박 속에서 본국 국회의 지원을 받아가며 노력하던 중 말라리아 콜레라, 장티푸스 등 전염병이 번지며 아이들이 줄줄이 죽어나가자 의욕을 상실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이땐 아직까지 싱가포르가 낙후했던 시절이었으며 많은 사람이 말라리아와 콜레라에 걸려 죽던 시절이었다. 싱가포르 자치령 총리 리콴유가 팔을 걷어 붙이며 파리, 모기, 바퀴벌레 등 해충을 없애는 데 주력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귀국한 뒤에는 아픈 와중에도 국회 개혁안을 만들었으나 당시 런던으로 찾아온 파쿠하르와 싱가포르 문제로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래플즈가 사실상 싱가포르를 자기 식민지처럼 만들어서 이에 대해 불만을 품은 것이었다.

막대한 자산을 가지고 영국 동물학회와 런던 동물원을 설립했으며 런던 북부의 저택으로 이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그가 싱가포르에 머문 기간은 8개월 남짓이지만, 도시로 성장하는 데 기초를 놓은 인물이기 때문에 싱가포르의 개척자로 알려졌고 현재도 리콴유와 나란히 싱가포르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싱가포르 내의상륙지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3. 기타

싱가포르의 위인인 만큼 싱가포르 내에는 그의 이름으로부터 유래한 명칭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싱가포르의 역사적인 호텔로 알려진 래플스 호텔과 한때 아시아 최고층 마천루였던 원 래플즈 플레이스가 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큰 꽃인 라플레시아의 종명도 이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1] 정확히는 거기서 막 출발한 배, 앤(Ann) 호 선상에서 출생했다. [2]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영국이 점령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탐보라 화산 폭발에 관한 몇 안되는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3] 영국령 벤쿨런(British Bencoolen)으로 싱가포르 MRT 다운타운선 벤쿨런 역에 이름이 흔적으로 남았다. [4] 그의 꿈은 한참 나중에 1965년 싱가포르 독립 후 리콴유의 사회/인종 통합책으로 빛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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