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2 00:02:07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Alfred Russel Wallace

OM[1] FRS[2]
파일:Alfred-Russel-Wallace-c1895.jpg
출생 1823년 1월 8일
웨일스 몬머스셔 주 랜바독
사망 1913년 11월 7일 (향년 90세)
잉글랜드 도싯 주 브로드스턴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생물학자, 지리학자
서명
파일: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서명.svg
1. 개요2. 생애3. 업적4. 기타

[clearfix]

1. 개요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는 영국 생물학자이자, 지리학자, 탐험가로, 흔히 그의 학술적 동지였던 찰스 로버트 다윈과 함께 진화론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생물학의 패러다임을 크게 바꾼 사람으로 꼽힌다.

2. 생애

영국 웨일스 랜바독의 스코틀랜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스코틀랜드의 민족 영웅인 윌리엄 월리스의 후손으로, 월리스의 아버지는 꽤 부유했던 사람이나 아들이 태어났을 때는 주식 투자를 잘못하여 집안이 파산 직전에 몰린 상태였다. 그가 5살일 때 런던으로 이주해 살았고, 현지의 허트포드 초등학교를 다녔으나, 집안이 더더욱 기울면서 중도에 자퇴했다. 결국 월리스는 먼저 런던으로 상경하여 측량기사로 일하던 큰형의 조수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이 와중에 형의 소개로 런던 기계공 학교에 입학하여 기계공학을 배웠다. 이후에는 잉글랜드 웨일스 일대를 돌면서 측량기사로 일했는데, 이 경험이 뒷날의 탐험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던 중에 19세의 젊은 생물학자 헨리 베이츠를 만난 뒤에, 그와 함께 곤충 채집을 하면서 친분을 쌓으면서 본격적으로 생물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48년에는 두 사람이 함께 남아메리카 아마조니아를 탐험하면서, 현지의 언어와 풍습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많은 생물 표본을 수집했는데, 안타깝게도 돌아오는 길에 탑승한 배에 불이 나서 극히 일부의 기록물만 남기고 목숨만 건져서 돌아와야했다. 그럼에도 월리스는 좌절하지않고, 영국으로 귀국하자마자 아마조니아 탐험과 관련하여 여러 기행문과 생물학 논문을 작성해서 출판했으며, 이를 통해 여러 과학자들과 교류하는 와중에 훗날 그의 평생의 은인이 된 찰스 로버트 다윈을 만나게 된다.

1854년부터 1862년까지는 동남아시아로 탐험을 떠났고[3], 여기서 그의 필생의 업적인 자연선택설 생물지리학 이론에 대한 증거가 될 여러 표본들을 채집했다. 귀국한 월리스는 탐험에서 얻은 성과를 바탕으로 진화론에 대한 논문을 집필해서 다윈에게 보냈는데, 마침 동일한 내용으로 논문 집필을 마치고 발표를 앞두고 있던 그는 이 논문을 보고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게 아닌가하여 당황했으나, 우연의 일치로 동일한 연구결과를 내놨음을 깨닫고는 월리스에게 역으로 자신의 논문을 보여주고, 그 성과를 공동으로 발표하기로 했다.[4]

하지만, 진화론을 대중들에게 소개하는 교양 생물학 저서인 종의 기원의 출판과 더불어, 진화론 vs. 창조설 논쟁으로 인해 찰스 다윈이 세간의 집중을 받으면서 상대적으로 월리스가 묻혀지는 일이 잦자, 다윈은 월리스를 위해 그의 연구성과를 언론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활동을 벌였고, 그 결과로 1872년부터 1876년까지 월리스는 왕립학회 소속으로서 25편에 달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당시 월리스는 동남아시아 탐험으로 얻은 표본들을 판매하여 큰 부자가 되었으나, 이를 가지고 철도 사업과 광산업에 투자했다가 쪽박을 차서 파산한 상태였고, 때문에 부인이 알콜 중독에 시달리다가 사망하는 등, 생활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윈의 이런 활동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1881년에는 드디어 영국 정부로부터 월 200 파운드에 달하는 연금이 지급되기 시작하여, 풍족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1913년에 잉글랜드 도싯 주의 브로드스턴에서 사망했다.

3. 업적

월리스의 업적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 어떻게 생물이 생겨났는가를 현재까지도 가장 잘 설명하는 이론'인 진화생물학에 대한 연구다. 다만 다윈과는 다르게 사람의 마음만큼은 자연선택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여겼고, 더불어 새로운 이론이 등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1870년에 출판한 그의 저서 '자연선택 이론에 대한 기여'(Contributions to the Theory of Natural Selection)에 실어서 당대 자연주의 과학자들의 미움을 샀다.

또한 월리스 본인은 생물지리학이라는 생물학 분야의 창시자로도 유명한데, 그가 동남아시아를 탐험하던 중에 인도네시아 자와 섬 순다 열도 사이, 그리고 보르네오 섬 술라웨시 섬 사이의 바다를 기준으로 그 이서 지역과 이동 지역 간에 생태계가 확연히 차이가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서식하는 생물의 종에 따라서 세계의 각 지역을 구분하는 법을 확립했다. 때문에, 이 업적을 기려서, 월리스가 발견한 지리적 경계선을 월리스 선이라고 부른다.

우주생물학의 확립에도 큰 기여를 한 바 있다. 비록, 우주생물학의 실질적인 창시자는 미국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지만, 월리스가 화성 표면의 기후에 대해 계산한 결과는 외계 생물이 존재하기 위한 필수조건들인 골디락스 존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당시에 이탈리아의 천문학자인 조반니 스키아파렐리가 화성의 표면에 나있는 길쭉한 협곡인 마리네리스 계곡을 보고는 이를 액체 상태의 이 흐르는 수로(canali)라고 주장했는데, 이걸 프랑스 천문학계에서 운하라고 번역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여기에 미국 천문학자이자 외교관 퍼시벌 로웰이 이 결과를 바탕으로 표면 곳곳에 많은 운하들이 그려진 화성본을 제작하는 등으로 연속적으로 삽질이 이어지자, 월리스가 독자적으로 화성 표면의 기온을 계산하여 화성의 기후 모델을 논문으로 써서 로웰과 스키아파렐리의 주장에 반박했다[5][6]. 월리스의 주장은 당대에는 관측의 난점으로 인해 논란만 일으키고 보류되었지만, 이후에 NASA에서 화성 탐사선인 매리너 4호 매리너 협곡을 촬영하여 표면에 액체가 없음이 확인되었고, 후속 계획인 바이킹 1호 탐사선이 화성 표면에 착륙하여 기후에 대한 정보를 보내면서, 그의 주장이 옳았음이 밝혀졌다.

4. 기타

뉴기니 원주민들이 사고야자에서 녹말을 채취하는 과정을 최초로 묘사했다. 이때 원주민들로부터 얻어온 사고야자떡을 식물원에 몇 개 보냈는데,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생물학자로서의 월리스는 동료인 찰스 로버트 다윈에 필적하는 희대의 천재 학자였지만, 아버지처럼 천성적으로 귀가 얇아서 살아생전에 여러번 잘못된 투자를 하고 파산을 반복한 흑역사가 있었다. 늘그막에는 심령술에 낚여서, 이를 과학적으로 입증하겠다고 삽질한 바도 있었다.

분명히 월리스도 진화생물학의 탄생에 크나큰 기여를 했고, 그의 업적을 찰스 다윈이 살아생전 내내 열심히 홍보해주었건만[7], 어째 대중들 사이에서는 다윈에 비해 언급되는 일이 별로 없다. 심지어는 창조설자들이 되도 않는 가짜 증거를 들이밀면서 진화론을 깔 때도, 다윈만 까고 동일한 업적을 세운 월리스는 아오안 취급하는 일이 잦다. 정확하게는 생명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면, 월리스의 존재는 아예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1] 오더 오브 메리트 훈장 수여자 [2] 왕립학회 회원 [3] 이때 월리스의 탐험을 지원해준 사람이 바로 동남아시아 역사상 최초의 백인 군주였던 사라왁 국왕 제임스 브룩이었다. 그는 단순히 지원만 해준 게 아니라, 자신의 영국 해군 장교 신분을 이용해서 월리스의 탐험에 동행했다. [4] 이때, 찰스 로버트 다윈이 월리스의 논문을 표절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으나, 다윈과 월리스의 생애를 연구한 전문가들은 이를 사실무근으로 여긴다. 실제로도 다윈이 누군가의 성과를 도용한 정황은 없었고 둘은 죽을 때까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5] 참고로 이 당시 월리스의 나이는 82세(!)였다. [6] 상술한 칼 세이건의 저서인 코스모스에 의하면, 당대의 천문학자들이 금성을 두고도 똑같은 삽질을 벌인 얘기가 나온다. 금성 표면을 관측하고 그 스펙트럼을 분석했을 때 이산화 탄소 수치가 매우 높다는 결과가 나오자, 학자들이 금성 표면이 탄산수 바다로 뒤덮여있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그런데, 소련의 금성 탐사선인 베네라 7호가 표면에 착륙하여 관측을 한 결과, 탄산수는 커녕 황산으로 된 비가 내리고 극심한 온난화가 일어나서 표면 온도가 섭씨 465도에 달하고 90기압이 넘는 불덩어리 행성이라는 게 밝혀지자, 학자들이 데꿀멍하기도 했다(...). 심지어, 칼 세이건 본인도 처음에는 그렇게 오해를 해서, 금성 테라포밍하기에 가장 좋은 행성으로 지목한 논문을 발표한 흑역사가 있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7] 덕분에 월리스가 위에 언급된 반복된 투자 실패와 파산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크나큰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