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01:34:18

경술국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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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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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배경 대한제국의 국권피탈과정
전개 운요호 사건 · 강화도 조약 · 청일전쟁 · 시모노세키 조약 · 을미사변 · 영일동맹 · 러일전쟁 · 한일의정서 · 가쓰라-태프트 밀약 · 포츠머스 조약 · 을사조약 · 정미 7조약 · 대한제국군 해산 · 기유각서 · 한일약정각서 · 경술국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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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한일병합 ( 일제강점기 · 한국통감부 · 조선총독부 · 무단 통치 · 친일반민족행위자 · 토지 조사 사업) · 일본어 잔재설 · 식민사관 · 식민지 근대화론 · 한일 무역 분쟁
관련 문서 식민지 · 강점기 · 병합
* 박영효 등이 고종의 퇴위에 협조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다 처벌된 사건은 이완용이 고종 퇴위를 반대하던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음 }}}}}}}}}

대한제국 국권 피탈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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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9월 20일 운요호 사건 일본의 근대적 군사 도발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조약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 체결
1882년 7월 23일 임오군란 군란을 제압한 청군 주둔
1882년 8월 30일 제물포 조약 군란을 이유로 일본공사관 경비 병력 주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일본의 지원을 받은 급진개화파의 정변, 청군에 의해 진압
1885년 1월 9일 한성조약 갑신정변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하는 일본의 함대 무력 시위. 이로 인한 조선과 일본의 협상
제물포 조약에 의거한 경비 병력 주둔 재확인
1885년 4월 18일 톈진 조약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일 양국의 논의
파병된 청일 양국 군대 철수 및 향후 조선 출병시 상호 통지
1894년 7월 23일 갑오사변 동학 농민 운동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파병 요청, 제물포 조약 톈진 조약을 빌미로 일본이 파병
전주 화약 후 조선의 양국 군대 철수 요청
이를 무시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갑오개혁 추진
1894년 7월 25일 청일전쟁 서해 아산만 풍도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기습하며 전쟁 발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반발한 동학의 2차 봉기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상실
1895년 4월 23일 삼국간섭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압력으로 일본이 요동반도 반환
친일내각의 붕괴와 친러파의 대두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일본이 명성황후 살해 후 친일내각을 재구성 하고 을미개혁 추진, 이에 항거한 을미의병의 발발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고종이 감금돼 있던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
친일 내각 몰락, 친러 내각이 구성되고 근대화 추진과 대한제국 구상
1896년 5월 14일 베베르-고무라 각서 일본제국이 한반도 세력권은 러시아 제국에 포함됨을 공인함.
러일 양국이 각국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을 동의함.
1896년 6월 9일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 일본제국과 러시아제국은 조선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차관을 도입하고자 한다면 합의하에 제공하고, 러시아와 일본에 한반도 내 전신선의 보호권이 있음을 명시. 양국은 한반도에서 소요사태 발생시 군대를 투입할 권한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함.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선포 경운궁으로 환궁했던 고종이 황제에 오르고 제국을 선포, 광무개혁 추진
1898년 4월 25일 니시-로젠 협정 러시아와 일본 간 협정.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대한제국의 군사적 지원 요청 시 상호협상 없이는 응하지 않을 것, 한일 양국 간 경제적 교류에 대해 러시아가 저해치 않을 것을 약속
1902년 1월 30일 1차 영일동맹 일본이 대한제국에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1904년 1월 21일 대한제국 중립선언 대한제국은 러·일간 전쟁 시 중립임을 세계 각국에 선언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일본군의 러시아군 기습 공격으로 전쟁 발발. 일본군의 인천, 부산, 마산, 원산 상륙과 서울 경운궁 점령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일본군의 대한제국 거점 주둔
1904년 5월 31일 대한시설강령 발표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이권 강화
1904년 8월 22일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차 한일협약)
외국인 고문을 두어 일본이 국정에 간섭(고문정치)
1905년 4월 1일 한일통신기관협정서 대한제국의 통신 주권 침해
1905년 4월 16일 대한제국군 감축 일본의 강요로 친위대 해산, 시위대 진위대 감축
1905년 7월 29일 가쓰라-태프트 밀약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종주권, 외교권을 대행할 것을 미국이 승인
1905년 8월 12일 2차 영일동맹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정치상⋅군사상⋅경제상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1905년 8월 13일 한국 연해 및 내하의 항행에 관한 약정서 대한제국의 연근해 주권 침해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할 것을 러시아가 승인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제2차 한일협약)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일본인 통감이 외교권 행사(통감정치), 한국의 보호국
을사의병 발발
1907년 7월 20일 고종 황제 퇴위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 황제가 이토 히로부미의 협박으로 강제 퇴위, 순종 황제 즉위
1907년 7월 24일 정미 7조약
(제3차 한일협약)
일본인 차관의 내정 간섭(차관정치)
부속각서에 대한제국군 해산 명시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 해산 시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8~9월 진위대 해산
남대문 전투, 정미의병 발발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 대한제국의 사법권⋅교도 행정권 박탈, 일본이 대행
한국의 속령
1909년 9월 1일 남한대토벌 10월 말까지 두달에 걸친 일제의 남한 내 모든 의병 소탕, 항일의병의 만주 이동
1909년 9월 4일 간도협약 조선과 대한제국의 간도영유권 시도 전면 수포화, 일본의 만주 철도부설권 확보
1910년 6월 24일 한일약정각서 대한제국의 경찰권 박탈, 일본이 대행
1910년 8월 29일
(체결일 8월 22일)
경술국치
( 한일병합조약)
대한제국 멸망, 한반도의 식민지화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 (a)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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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공식 명칭
<colbgcolor=#f6f6f6,#2d2f34> 한국어[1] 경술국치(庚戌國恥)
국권피탈(國權被奪)
일한병탄(日韓倂呑)
한일병합(韓日倂合)
한일합병(韓日合倂)
한일합방(韓日合邦)
영어 Japan–Korea Treaty of 1910
Japan–Korea Annexation Treaty
일본어 [ruby(日, ruby=にっ)][ruby(韓, ruby=かん)][ruby(併, ruby=へい)][ruby(合, ruby=ごう)], [ruby(韓, ruby=かん)][ruby(国, ruby=こく)][ruby(併, ruby=へい)][ruby(合, ruby=ごう)],
[ruby(朝, ruby=ちょう)][ruby(鮮, ruby=せん)][ruby(併, ruby=へい)][ruby(合, ruby=ごう)][2], [ruby(日, ruby=にっ)][ruby(韓, ruby=かん)][ruby(合, ruby=がっ)][ruby(邦, ruby=ぽう)]

1. 개요
1.1. 명칭
2. 상세3. 병탄 전후 일제의 움직임
3.1. 행정3.2. 구 조선 왕실3.3. 한일병합조약3.4. 관련 기록
4. 영향
4.1. 조선 멸망4.2. 순국자 발생4.3. 당대인의 반응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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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경술국치 - 한일합병조약 전권위임장.jpg
파일:창덕궁 흥복헌.jpg
한일합병조약 전권위임장 한일합병조약과 조선의 마지막 어전회의[3]를 진행한 창덕궁 흥복헌[4]
한일병합(), 또는 경술국치()[5] 1910년( 경술년) 8월 29일 월요일에 대한제국 일본 제국의 일부로 흡수되어 멸망한 사건을 말한다. 한민족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가 된 사건으로 손꼽힌다. [6]

이 조약으로 인하여 조선은 약 35년간 일제의 불법적인 강점을 받게 되었으며 일제가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에서 무조건 항복을 하고 패망한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다.

1.1. 명칭

당시의 조약 문서에 쓰여진 공식명칭은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이고, 줄여서 '한국병합조약' 또는 '한일병합조약'이다. 일본어 명칭은 이를 직역한 것이다. 이외의 명칭은 이 조약에 대한 여러 견해와 감정이 반영된 후대의 명칭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주로 '국권피탈', '일한병탄', '경술국치', '경술왜란', '한일합방', '한일합병', '한일병합'[7] 등으로 부른다. '경술국치'는 ' 경술년에 일어난 나라의 치욕/수치'라는 의미이며 '경술왜란'은 ' 삼포왜란', ' 임진왜란'처럼 '경술년에 왜(倭)인(= 일본인)들이 일으킨 난리'라는 뜻이다. 한국에서 이것을 '한일합방'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엄밀히 따지면 '합방'은 "동등한 자격으로 합친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20세기에는 많이 사용되었지만 21세기에 와서는 잘못된 것이라는 의견이 크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일합방'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에서는 한국병합(韓国併合) 또는 일한병합(日韓併合) 일한합방(日韓合邦), 조선병합(朝鮮併合)이라고도 한다. 원래 일제는 '병탄(併呑)'이란 말을 쓸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힘이 센 한쪽이 다른 쪽을 아울러 버린다는 의미가 조선인들의 반발을 사서 저항을 불러일으킬까 봐[8] '병합'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것이다.( 관련 내용 1, 관련 내용 2). 현재 국어사전에는 병합=합병 ≒ 합방이라고 되어 있다. 합병은 둘 이상의 단체, 조직, 국가를 합치는 것, 합방은 둘 이상의 국가를 합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주요 포털사이트인 네이버/다음의 한자사전에서도 '병탄(竝呑)'을 "「아울러 삼킨다」는 뜻으로, 남의 재물(財物)ㆍ영토(領土)ㆍ주권(主權) 등(等)을 강제(強制)로 한데 아울러서 제 것으로 삼음"으로 정의하며 강제적인 느낌을 지닌 단어로 정의하고 있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어느 한국어 화자의 어감에도 '병탄'은 강제적인 느낌이 있다. 각주로 서술되었듯이 한자 '탄(呑)'자가 '삼킨다'는 느낌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2. 상세

조약명은 한일병합조약이다. 역성혁명으로 고려왕조를 뒤집고 개국하여 500년 가까이 국체를 보전한 조선왕조의 멸망과 일제강점기의 공식적인 시작을 알리는 시점이다.

실제로는 1910년 8월 22일 (월)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일본 측에서 1주일 동안 발표를 안 하고 있다가 8월 29일 순종 황제의 조칙 형태로 발표했다. 그러나 8월 29일 발표된 조칙에는 칙명지보(勅命之寶)[9]라는 행정 결재에만 사용하던 옥새가 찍혀 있었을 뿐 조선의 국새[10]가 찍혀 있지 않았고 황제의 서명조차 없었다.[11] 이는 한일병합조약이 조선의 정식 조약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조약은 원천 무효'라는 주장의 강력한 근거다.

여기서 명심할 것은 황실의 전권위임을 받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고종의 친형 흥친왕 이재면이 직접 조약에 참여했다고 하는데 이완용과 흥친왕은 제대로 된 전권 위임을 받은 바 없기에 이 사항은 이 조약의 합법성의 증거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며 애초에 조선에는 이런 중요한 사항을 전권 위임하는 규정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설령 전권 위임을 받았어도 그런 전권 위임은 원천 무효이다.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주시하던 열강들, 특히 영국 미국이 이 병합조약을 지지하고 말고는 한일병합조약이 당대 현실에서 실제로 기능하고 말고의 문제지, 당대 국제법상에서 불법이 되는 요건과는 전혀 무관함 또한 명심할 사항이다. 이게 근거라고 생각하는 건 일각의 순전히 자의적인 납득 요건에 불과하지 상식적으로 논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니다.[12]
파일:일제 한일병합 선전엽서.jpg
한일병합 및 제국주의 선전 엽서
한일 병합 조약은 조선이 일본의 일부가 되었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한 사건일 뿐[13] 사실상 일본령으로 만들기 위한 실질적 작업들은 이미 끝나 있었다. 일제는 영일동맹,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의 외교적 작업을 진행하고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연이어 승리함에 따라 일제의 한반도 장악에 방해가 되는 국제 열강 세력들을 제거하면서 1904년 한일의정서를 시작으로, 1905년에 을사조약을 맺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1907년(광무 11)에는 정미 7조약으로 행정권과 입법권 박탈 및 군대 해산, 1909년에는 기유각서로 사법권을 박탈했고[14] 이듬해 6월에는 한일약정각서로 경찰권까지 박탈하였다. 경술국치 즈음의 조선은 명목상으로만 독립국이었고 주권을 박탈하는 서류상의 절차가 진행되지 않았을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던 상태였던 셈이다. 이에 일부 해외 학계에서는 일제강점기의 시작점을 아예 을사조약이 맺어진 1905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15][16]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후에는 조선의 국기인 태극기와 국가인 애국가도 금지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또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부 경기도 경성부로 격하되면서 경기도 관할 지역으로 편입되었고 일본의 일개 지방 도시로 격하되었다.
파일:nikkanheigou.jpg
경술국치 당일에 인쇄된 소책자 "國民唱歌 日韓倂合(국민창가 일한병합)".
병합 조약 체결을 기념하는 노래 2곡의 악보와 가사집이다.
벚꽃잎에 덮여 스러지는 듯한 태극기와 뻗쳐오르는 욱일기가 대조적이다. 기사[17]

2.1. 경술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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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병탄 전후 일제의 움직임

3.1. 행정

일제는 1909년 7월의 각의에서 조선 병합을 방침으로 잡은 이후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우선 건강상으로 골골거리던 통감 소네 아라스케를 대체해서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임명했으며 부통감직을 신설하여 야마가타 이사부로[18]를 임명했다.

이들이 제일 먼저 준비한 것은 조선을 통치할 엘리트 관료들의 모집이었다. 한일합방조약으로 조선의 주권을 완전히 손아귀에 얻은 일제는 즉각 조선의 관청과 한국통감부 조직들을 개편하여 10월 1일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직들을 흡수, 통합, 폐지시켰고 1,434명의 직원들을 해고했다.

조선인 고등관들을 모조리 해고했으며 각 도 관찰사들도 6명만 남기고 모두 해고했다. 당연히 빈 자리는 일본인들이 차지했다. 이 중엔 전 대만 총독인 고다마 겐타로 밑에서 대만 통치에 관여했던 인물들이 많이 포함되었다. 이들의 실무 경력도 경력이었지만 고다마가 데라우치와 동향 사람이라 같은 파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후일 사이온지 긴모치에 의해 무능하다는 이유로 내쫓긴[19] 인물들로 인맥, 지연, 학연으로 등용시킨 무능한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 중 상당수가 고등문관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이후 야마모토 내각은 조선의 개발을 위해 감찰관으로 내무성 지방국장 코바시 이치타를 파견했는데 그는 "일본인 도장관들이 지극히 무능하고 상당수가 대장성 출신이라 이들 밑에선 조선이 개발되지 않을 것"이라고 혹평했다. 겨우 남은 조선인 장관들도 실질적으론 허수아비라서 밑의 내무부장, 재무부장이 모든 일을 담당했고 이에 괜히 조선인 장관들의 기분만 상할 판이니 조선인 도장관을 전폐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3.2. 구 조선 왕실

대한제국 황실은 황실의 지위를 박탈당하고[20] 황제도 이왕(李王)이라는 봉호로 강등되었다. 일제에 적극 협력한 기존 지배층들은 조선 귀족령의 선포로 일본의 지배층에 포섭되었다. 일제는 자신들의 체제 선전과 조선인들의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종 순종을 이용했다. 특히 재위 시절 나라를 강탈당한 순종은 조선의 역대 군주 중에서 가장 많은 순행, 행행을 행해야 했다.[21]

물론 일제는 암묵적으로 고종과 순종을 이전처럼 일국의 군주로서는 대접해 주었다. 일제는 경성부에 주재하는 외교관들에게 고종과 순종을 알현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1911년 정초와 고종의 탄신일에는 학생들이 덕수궁 대한문 앞에 모여 '황제 폐하 만세'를 외쳤는데 원칙적으로 안 되는 일이었지만 조선총독부는 이를 눈감아주었다. 또 구 황실에 막대한 세비도 지급되어 1911년만 해도 150만 엔의 생활비가 지급되었고 고종과 순종에게 당구, 담배, 영화 등의 취미생활을 제공하는가 하면 영친왕의 일본 생활에 대한 영상을 찍어 보여주기도 했다. 영친왕도 일본에서 일본 귀족 예우를 받으며 살았다. 1919년에는 구 황실 지급 세비를 180만 엔으로 증액시켰다.

합병 전후 고종과 의친왕은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고종은 정신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초기 독립운동의 지주 역할을 하고 있었다. 1895년의 을미의병, 1905년의 을사의병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최익현·이인영·민종식·신돌석·정환직·허위 등은 대부분 고종의 밀지를 받거나 재정적 후원을 받으며 의병 활동을 벌였다. 이는 국권 상실 이후의 독립운동으로도 이어져, 1920년대까지 국내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치고 직간접적으로 황제와 맥이 닿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국왕에의 충성과 국가에의 충성이 뚜렷이 구분되지 않던 옛 사상체계에서 ‘근왕’, 즉 임금을 도와 난리를 평정한다는 이념이 큰 대의명분이 되었던 까닭도 있고, 일본의 지배가 철저한 국내나 떠돌이 신세인 해외에서 고종의 막대한 비자금이 투쟁의 자금원으로 절실하게 쓰인 이유도 있었다.

고종은 황제직속 비밀정보기관인 제국익문사를 창설하고 이를 이용해 독립운동을 지휘하였다. 제국익문사는 친일파 감시, 안중근 구명 시도, 독립군에게 자금 전달, 정세 보고등을 하였다. 고종은 1919년 파리회의에 의친왕을 특사로 보내려 하지만 일제의 독살로 실패하였다. 고종은 합병 전부터 후까지 여러번 망명을 시도하였다. 1915년 7월 26일 성낙형 등은 내관 염덕인(廉德仁·또는 염덕신)을 통해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에게 중·독·영·러가 연합해 일본을 공격할 것이 대세라는 등의 보고서를 올리게 했다. 이 보고서를 보고 만족한 고종은 성낙형에게 ‘한중의방조약안’을 가지고 직접 알현하라면서 승낙의 징표로 과거 정조가 사용했던 ‘온여기옥(溫如其玉)’이란 인영(印影·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러나 고종 면담 직전 성낙형을 비롯해 김사준(金思濬)·김사홍(金思洪)·김승현(金勝鉉) 등 다수의 관련자가 검거됨으로써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이 보안법 위반 사건이다. 이때 고종의 아들이였던 의친왕도 적극 협력했었다.

고종의 해외 망명이 다시 추진된 해는 1918년이었다. 그리고 이 망명은 고종의 생전 마지막 망명시도가 되었다. 이번에는 우당 이회영이 중심 인물이었다. 이회영의 장남 규학의 아내 조계진(趙季珍)이 고종의 생질(외조카)로서 고종과 사돈인 데다 이상설 헤이그 특사사건을 기획했던 경험을 갖고 있어 고종 망명 계획에 나서게 했다.

이회영과 민영달은 육로 대신 수로를 이용하기로 하고 상해 북경을 저울질하다가 우선 북경에 행궁(行宮)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민영달이 행궁 구입 자금으로 5만원(圓)을 내놓자 이회영은 1918년 말께 이득년(李得年)·홍증식(洪增植)에게 건네 북경의 동생 이시영에게 전달하게 했다. 계획은 순조로웠다. 이제 고종이 덕수궁을 나서 일본의 감시를 피해 신하들과 합류하면 됐지만 이때 고종이 1919년 1월, 갑자기 급서하면서 실패한다. 고종의 사인이 독살이었음을 윤치호 일기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진창(韓鎭昌)[22]씨는 광무태황제가 틀림없이 독살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완벽하게 건강하던 광무태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 안에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사망했다.
2. 하루 이틀 사이에 광무태황제의 팔다리가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바지를 벗기기 위해 통 넓은 한복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3. 민영달(閔泳達)과 몇몇 사람들이 약용 솜으로 광무태황제의 입안을 닦아낼 때 황제의 이가 모두 빠져있고, 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4. 목에서부터 복부까지 30센티미터 가량 검은 줄이 길게 나 있었다.
5.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직후 궁녀 2명이 의문사 했다.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 등과 함께 염(殮)을 한 민영달 씨가 한진창 씨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고 한다.
윤치호 일기 (1920년 10월 13일자) #

일제가 편찬한 《 순종실록 부록》에 덕수궁 이태왕(李太王· 고종)의 와병 기록이 나오는 것은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날인 1919년 1월 20일이다. 그러나 병명도 기록하지 않은 채 그날 병이 깊어 동경(東京)에 있는 황태자에게 전보로 알렸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우당 이회영 실기는 ‘(고종이) 밤중에 식혜를 드신 후 반 시각이 지나 갑자기 복통이 일어나 괴로워하시다가 반 시간 만에 붕어(崩御)하셨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망명시도는 아예 헛되지는 않아서 훗날 연해주는 항일의병들의 주 거점이되었으며 많은 의병 단체들이 연해주에서 활동하게 되는 계기가 되게된다.

1917년 함흥부 순행은 눈여겨볼 만한데 이때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황제의 깃발들이 휘날리기도 해서 일부 일본인을 놀라게 했다. 순행하는 순종도 황제 복식을 갖추었다. 게다가 함흥 주민들도 순종의 함흥 방문이 조선 왕조 임금으로서는 태조 이성계 사후 처음이었기 때문에 거의 환영 일색이었다. 그러나 순종이 일본 군함을 타고 도쿄를 방문했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여러모로 충격을 주었다. 고종과 적대했던 일부 황족들은 대일 항전에 동참하지 않고 일제가 제공한 지위와 특혜에 안주하거나 몇몇은 적극적으로 일제에 부역하기도 했다.

그와 별개로 500년간 조선 왕조의 백성으로 살아 온 이상 고종 생전에는 엄연히 복벽이 우세했다. 문제는 순종. 제대로 왕 노릇 해 본 적도 없고 독차사건 후유증으로 건강이 심하게 쇠약해져 독립해도 정상적인 직무 수행이 불가능한 그가 고종을 대신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사람은 없었고 당시 한민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고종의 사망을 계기로 벌어진 3.1 운동부터 공화정을 지향하게 되었다. 민족대표 33인에 유림 인사가 없는 것을 두고 황실에 실망해서 복벽을 주장하는 유림인사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유림도 당연히 끌어들이려 했다. 간재 전우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는 외국 끌어다 외국 물리치는 게 대체 무슨 의미냐며 불참했고 기꺼이 참여하려고 했던 김창숙, 김정호는 모친의 와병으로 기한을 맞추지 못해 민족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을 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강령에 구 황실을 우대한다는 조건이 있긴 하지만 이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대하는 것이다.

한편 근왕의식이 강했던 유생들 사이에서도 고종의 사망 이후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해 20세기판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상복 반대파의 대표는 조긍섭으로 고종 무복설(無服說)을 주장하였는데 명나라가 망하자 자결한  숭정제를 들며 망국의 책임이 있는 군주라면 마땅히 자결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일제로부터 '이태왕'이라는 작위까지 받았으니 고종을 위해 상복을 입는 건 일제의 신하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으로 조긍섭은 최병심 등의 상복 찬성파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았고 제자에게도 절연당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다가 결국 '고종은 일제로부터 독살당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한 발 물러서서 상복을 입었다.

대한민국 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본인의 정통성이 훼손될 것을 염려해 구 황족 입국을 철저하게 막았다. 이승만은 과거 고종 폐위 음모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한 적이 있었기에 황실에 원한이 있었다. 애시당초 이승만 본인이 민주주의 국가를 위한 첫걸음으로서 '제국'을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도 있었다. 이승만이 권력욕이 상당했고 실제로 독재를 저질렀으며 스스로를 '과인'이라고 부르는 등 본인을 왕으로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대한민국이 '민주공화정'이어야 한다는 의식은 확고했다.

이승만은 1953년 구황실재산법을 제정하여 모든 황실 재산을 강탈했다. 이 법은 대한민국헌법 제2장 제23조 3항이 정하는 <국유화로 인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제2장 제11조 1항이 정하는 <법 앞의 평등권>과 제2장 제10조가 정하는 <행복기본권>이 침해됐으며, 제2장 제14조가 정하는 <거주이전의 자유>와 제2장 제34조 1항 2항이 정하는 <인간다운 생활의 권리>를 강탈하고 대한민국민법 제1002조가 정하는 <상속의 기본방식>도 존중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불법적으로 강탈한 황실 재산을 비리에 대부분 사용했고 군사정권 시절에는 그나마 남아있던 궁역과 왕릉 권역들도 대부분 매각돼서 현재 복원에 굉장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결국 구 황족은 한반도에 상륙하지 못했으며 이로서 구심점이 만들어지지 않아 황실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영친왕을 비롯한 해외 구 황족의 귀국은 장면 내각에서 추진되다 군사정변으로 실패하고 박정희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고 나서 황족을 귀국시켰다.

3.3. 한일병합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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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관련 기록

" 대한제국 황제 폐하와 더불어 이 사태를 보고 대한제국을 들어서 우리 일본 제국에 병합하여 이로써 시세의 요구에 응함이 부득이한 것이 있음을 생각하여 이에 영구히 한국을 제국에 병합케 한다. 한국 황제 폐하 및 그 황실 각원(各員)은 병합 후라도 상당한 예우를 받을 것이며,[23] 민중은 직접 짐의 위무 아래에서 그 강복(康福)을 증진할 것이며, 산업 및 무역은 평온한 통치 아래에서 현저한 발달을 보이기에 이를 것이니, 동양의 평화가 이에 의하여 더욱 그 기초를 공고하게 함이 짐이 믿어 의심치 아니하는 바이다."
일본 메이지 덴노의 조서, 1910년 8월 29일.
황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짐(朕)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업을 이어받아 임어(臨御)한 이후 오늘에 이르도록 정령을 유신(維新)하는 것에 관하여 누차 도모하고 갖추어 시험하여 힘씀이 이르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 원래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되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시일 간에 만회할 시책을 행할 가망이 없으니 한밤중에 우려함에 선후책(善後策)이 망연하다. 이를 맡아서 지리(支離)함이 더욱 심해지면 끝내는 저절로 수습할 수 없는 데 이를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맡겨서 완전하게 할 방법과 혁신할 공효(功效)를 얻게 함만 못하다. 그러므로 짐이 이에 결연히 내성(內省)하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이에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국세(國勢)와 시의(時宜)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리라.

짐의 오늘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라 참으로 그대들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순종실록 4권, 순종 3년 8월 29일 양력 2번째기사, 순종실록 본편의 마지막 기사[24]
융희 4년 8월 29일 월요 맑음 / 음력 경술년 7월 25일 병인일
경 조동희(趙同熙) 진(進)
기주관 김천수(金天洙) 진 이용구(李龍九) 진
전제관 김유성(金裕成)도서과(圖書課) 진 윤희구(尹喜求) 진
주사 조병억(趙秉億) 진 조성흡(趙性翕) 진 정낙붕(鄭樂鵬) 진 장석준(張錫駿) 진
임금이 창덕궁에 있었다.
칙유(勅諭). 황제는 이르노라. 짐(朕)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왕업(王業)을 이어 받들어 임어(臨御)한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신 정령(維新政令)에 관하여 속히 도모하고 여러모로 시험하여 힘써온 것이 일찍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으되 줄곧 쌓여진 나약함이 고질을 이루고 피폐(疲弊)가 극도(極度)에 이르러 단시일 사이에 만회(挽回)할 조처를 바랄 수 없으니, 밤중에 우려(憂慮)가 되어 뒷갈망을 잘할 계책이 망연(茫然)한지라. 이대로 버려두어 더욱 지리하게 되면 결국에는 수습을 하지 못하는 데에 이르게 될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위탁하여 완전할 방법과 혁신(革新)의 공효(功效)를 이루게 하는 것만 못하겠다. 짐이 이에 구연(瞿然)히 안으로 반성하고, 확연(確然)히 스스로 판단하여 이에 한국의 통치권(統治權)을 종전부터 친근하고 신임(信任)하던 이웃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께 양여(讓與)하여 밖으로 동양(東洋)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도 민생(民生)을 보전케 하노니, 오직 그대 대소 신민(大小臣民)들은 나라의 형편과 시기의 적절함을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동요하지 말고, 각각 그 생업에 편안히 하며 일본 제국(日本帝國)의 문명 신정(文明新政)에 복종하여 모두 행복을 받도록 하라. 짐의 오늘 이 거조는 그대들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대들을 구활(救活)하자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 신민(臣民) 등은 짐의 이 뜻을 잘 체득하라.
내각서기관장(內閣書記官長) 훈1등 한창수(韓昌洙)에게 특별히 태극장을 하사하였고, 장례원 악사장(掌禮院樂師長) 훈6등 백우용(白禹鏞)은 특별히 훈5등에 승서(陞敍)하여 팔괘장을 하사하였으며, 재무관(財務官) 훈5등 조재영(趙在榮)은 특별히 훈4등에 승서하여 팔괘장을 하사하였다.
승정원일기 마지막 날 기사 #, 이 기사를 작성한 후 승정원은 바로 한국통감부에 의해 전격 폐지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달 뒤에 세워진다.
"일명(一命)을 겨우 보존한 짐(朕)은 병합 인준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하여 조칙(詔勅)하노니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强隣, 일본)이 역신의 무리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제멋대로 선포한 것이요 다 나의 한 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제(脅制)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히 말을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니 고금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으리오.

나 구차히 살며 죽지 못한 지가 지금에 17년이라. 종사의 죄인이 되고 2000만 생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는지라. 유인(幽因)에 곤(困)하여 말할 자유가 없이 금일에까지 이르렀으니, 지금 병이 심중하매 일언(一言)을 하지 않고 죽으면 짐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나 지금 경(卿)에게 위탁하노니 경은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내가 최애최경(最愛最敬)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효연(曉然)히 알게 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讓國)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라. 여러분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冥冥)한 가운데 여러분을 도우리라."
순종 황제가 남긴 유언. 궁내부 대신 조정구가 전하여 신한민보에 실렸다.

4. 영향

4.1. 조선 멸망

경술년(1910년) 8월 22일에 일본의 조선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조선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사이에 조인된 이 조약이 1주일이 경과된 이날 공표됨에 따라 황제의 조칙이 발표되어 8월 29일 조선은 일본에 완전히 병합되어 일본의 일부가 되었고 국어는 일본어가 되었으며 조선의 백성들은 일본의 2등 국민이자 일본인의 노예로 전락하였다. 그렇게 1392년 고려를 무너트리고 태조 이성계가 세운 조선은 5백여 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조선의 마지막 충신이었던 학부대신 이용직은 "이 같은 망국안에는 목이 달아나도 찬성할 수 없다"고 반대하면서 뛰쳐나갔다.[25] 반면 이때 일제에 협조한 매국노 경술국적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미 마지막 통감이자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계획서를 가지고 입국했는데 이토 히로부미 생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경술국치로 인하여 일본에 병합된 것이 사실이지만 이 조약 하나만으로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것은 아니다. 이전의 주변국들 간의 전쟁[26], 여러 차례의 조약과 이권 침탈로 인해 이미 사실상 일제의 종속국이 된 상태에서 경술국치는 이전의 조약들과는 달리 서류상 명의 이전의 성격이 강하다.

4.2. 순국자 발생

당시 일제는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한 후 1907년 정미 7조약을 통해 입법권과 인사권, 행정권을 장악하고 1909년 기유각서로 사법권까지 장악해 이미 중앙통치권력을 무력화한 상태였으며, 이후 같은 해 보안법을 통해 각종 집회와 모임을 제재하여 조선인들의 회합을 차단하고 신문지법을 통해 통감부의 방향에 반하는 언론을 원천 차단했다.

이 때문에 한일병합조약 당일에는 이미 일련의 피탈 과정에 따른 만연한 무력감과 국내 저항세력 부재로 인해[27] 1905년 을사조약 당시보다 저항이 적었으며, 상대적으로 조용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 이는 이미 을사조약, 군대 해산, 고종 퇴위 등으로 인해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28]

그러나 위 같은 측면에도 불구하고 자결/순국자는 경술국치 당시에 가장 많았다.[29] 대표적으로 이위종의 아버지인 이범진은 주러시아공사로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된 후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아 조선의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다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자결하였다. 금산 군수로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의 아버지이기도 한 홍범식도 목을 매 자결하였으며[30] 『매천야록』의 저자 매천 황현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위 관료를 역임한 장태수, 이재윤, 송도순, 정동식, 김석진, 이만도 등도 이때 순국하였으며, 1912년까지 약 51명이 순절한 것으로 추정된다.[31] 이들 중 일부는 일찍이 행적이 증명되어 1960년대에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바 있다.

4.3. 당대인의 반응

30일. 대전역에 이르니 어제 29일의 양국(讓國)조칙이 벽에 붙었다. 나는 이걸 보고 서울을 갈까 말까 하였다. 왜놈에게 나라를 빼앗긴 줄은 이미 알았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망극망극(罔極罔極)하다.[32]
31일. 대동여관에서는 학생이 자문(自刎)[33]하였고, 금산 군수 홍관식[34]이 자살하였다고 들린다.
이병기, <구일기초(舊日記抄)>
일선(日鮮)이 합병하야 총독정치가 시작된 지 어언간 삼십년이 되었다. 내가 고읍역 대합실에 병합조서의 등사본을 봉독한 것은 운무(雲霧) 자옥한 팔월 이십구일 아침이었다. 그때에 겨오 십구세인 소년 교사인 나는 통곡하였다.
이광수, <조선문학의 참회>[35], 매일신보 1940년 10월 1일

5. 여담

  • 일본에서도 안중근 의거가 워낙 유명한 만큼 이토 히로부미가 합병 반대파였으며 안중근의 의거 때문에 조선이 합병을 자초하였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급격한 합병에 부정적이었을 뿐 합병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으며 일본 내각은 이토 히로부미가 죽기 3개월 전인 1909년 7월에 이미 조선의 합병을 의결한 상태였다. 자세한 내용은 이토 히로부미 문서로. 즉, 온건파는 온건하게 조선을 합병하자는 쪽이었지 합병하지 말자고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며 어차피 합병은 됐을 거라는 뜻이다.
  • 아이러니하게도 이 당일에는 백범 김구의 생일이기도 하였는데, 1925년 나석주 의사가 자신의 옷을 저당으로 잡아 김구의 생일상을 차려주자 안 그래도 안 좋은 날이고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회갑연도 못 챙겨줬다는 죄책감 때문에 이후에는 생일잔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 2009년 9월에는 당시 대통령이던 이명박이 2010년 "경술국치 100주년 기념으로 일왕을 국내에 초대하고 싶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기념이라는 단어를 쓴 것에 대해 논란이 일었는데 사실 기념 자체는 무언가를 축하하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게 아닌 뜻깊은 일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는 중립적인 단어이다. 쉽게 말하자면 '기억'의 강화 버전 혹은 영어 'commemorate/observe'에 대응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당장 전쟁기념관이나 6.25 전쟁 OO주년 기념식 같은 명칭만 봐도 알 수 있고 가톨릭 교회의 미사에서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한다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사전 설명이 그렇다는 것이지 현대 한국인들은 '기념'을 영어의 'celebrate'에 준하는[36] 긍정적인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쓰는 경우가 압도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이 문제가 될 만한 단어 선택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 한일병합 소식은 이웃국가인 청나라에도 상당한 충격을 안겨다 주었는데, 당시 청나라 주일공사인 왕대섭(汪大燮)은 일제의 조선 병합이 중국 만주 지역의 정세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면서 그에 대한 대비책 마련을 촉구하는 상주문을 제출하였다. 청나라 외무부에서도 만주 지역의 안전 문제, 특히 만주 거주 조선인 문제를 걱정하면서 길림순무(吉林巡撫) 진소상(陳昭常)에게 타전하여 장춘(長春)· 혼춘(渾春)· 연길(延吉) 각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조선 병합 반대 움직임에 각별히 경계 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하였고 심지어 연길 거주 조선인들의 병합 반대 행동을 엄중 단속해 줄 것에 관한 주청일본공사 이주인 히코키치(伊集院彦吉)의 요청마저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38] 무엇보다 당시 청나라 황실은 자신들 역시 조선처럼 되지 말란 법이 없다는 진지한 걱정을 하였는데, 이미 당시 청나라도 다 쓰러져 가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선통제의 황태후이자 그의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효정경황후는 “ 삼한은 정말로 망하였다. 우리나라가 스스로 돌볼 겨를도 없으니 결코 상관할 수는 없지만 외국 사람들이 우리의 변경 지역을 날로 노리고 있으니 반드시 조정의 신하들과 더불어 대비책을 잘 마련하여 추호의 손실도 없도록 해야 한다.”[39]고 말하며 앞날을 우려했다. 경술국치 직전 일본을 방문하고 있었던 재순(載洵. 감국섭정왕 재풍의 동생)은 청 정부의 최고 권력기관인 군기처(軍機處)로 타전하여 한일합병 관련 소식을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지금 알아본 데 의하면 일본인(日人)이 장차 우리에게 크게 불리한 대거동(大擧動)이 있을 것인즉 위급존망(危急存亡)이 간발(間髮)에 걸려 있다. 아국(我國)이 만약 서정(庶政)을 더 이상 개혁하지 않고 시급히 대비하지 않는다면 (조선의) 전철(覆轍)을 밟게 될 것으로 걱정되니 눈앞으로 다가온 화 때문에 두렵고 절박하기가 그지없다. 재순(載洵)은 (조선 병합에 대한)견문(見聞)이 누구보다도 더 확실하기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비밀리에 진언(陳言)하니 대신 상주(上奏)해 주기 바란다.”



    출처-『淸宣統朝外交史料』 卷16, 18쪽.

    이러한 황실의 우려는 바로 다음해인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면서 현실이 되었다.
  • 참고로 경술국치의 연도를 아는 한국인의 비율이 낮은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갤럽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약 14%가 알고 있었으며 특히 70대 이상 아는 사람의 비율이 5%로 극히 낮았다. 갤럽 조사
  •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조례로 경술국치일에 조기를 달도록 규정했다.
  • 마이클 잭슨이 전성기였던 1980년대에는 8월 29일을 경술국치가 아닌 마이클 잭슨 생일로 인식하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 1995년 8월 일본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한일합병은 합법적이었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이는 일본 정부의 종래 입장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고 그동안 일본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침략전쟁 인정과 과거 사죄에 앞장서 온 무라야마 총리의 발언이라는 점에서 더욱 충격을 줬다.[40][41] 이런 발언에 대해 당시 외교통상부는 소극적으로 대응해 국민들의 거센 질타를 받았다.[42] 당시 무라야마의 이 발언으로 인해 뉴욕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양국간 정상회담마저 무산되었고 한일관계는 최악으로 경색되었다.[43][44][45] 무라야마 총리는 일본 정부가 과거의 역사에 대해 깊은 반성과 사죄의 뜻을 밝혔지만 이는 정치적, 도의적인 것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일본 총리가 공식석상에서 한일합방을 합법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지적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줄곧 한일합방조약은 합법이라고 주장해 왔으며 일본의 수많은 정치인들도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1995년 6월에는 와타나베 전 외무장관이 지방에서의 강연을 통해 한일합방이 강제로 체결된 것이 아니며 합법이라고 주장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무라야마 총리는 단편적으로 들으면 오해를 사겠지만 의사록을 잘 읽어보면 자신의 생각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며 발언을 철회하지 않았다.[46] 무라야마 총리는 17일에도 한일합병조약은 형식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해 이 조약이 합법적으로 체결됐음을 거듭 강조했다. 무라야마 총리는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답변을 통해 이 같이 말하고 합방조약의 형식과 정치적도의적 견해는 별개라고 밝혔다. 무라야마 총리는 정치적 도의적 실태론으로 판단하면 한일합방조약이 대등하고 평등하게 체결된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면서 자신의 발언이 파문을 일으킨데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라야마 총리는 식민지 지배가 현실적으로 있었던 만큼 사실을 직시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무라야마 총리는 그러나 지난 5일 한일합방조약과 관련한 자신의 망언을 취소하지는 않았다.[47] 그러나 11월 19일 김영삼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자신의 발언에 대한 잘못을 시인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48][49][50]

[1]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일본 제국의 압박으로 인해 이루어진 성격을 고려하여 강제성을 강조하는 표현이 많이 쓰이기도 한다. 이에 관한 내용은 본문 2문단과 5문단에서 자세히 후술한다. [2] 모든 [ruby(併, ruby=へい)][ruby(合, ruby=ごう)](병합)은 [ruby(合, ruby=がっ)][ruby(併, ruby=ぺい)](합병)으로 바꿔 쓸 수 있다. [3] 오늘날 국무회의에 해당된다. [4] 1910년 당시의 흥복헌은 이후 창덕궁에서의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경복궁에서 이건하였다. [5] '경술년에 나라가 겪은 치욕'이라는 뜻이다. [6]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한 사건이나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한 사건도 경술국치에 버금가는 한민족 역사상 흑역사라고 하는 경우라 할 순 있으나 나라 자체가 멸망당해 일본 제국에 병합되었고 완전한 식민지가 되어버린 경술국치와는 달리 고려와 조선 둘 다 국가 자체는 멸망하지 않아 원나라와 청나라에 병합되지 않고 존속되었으며 조선은 청나라의 조공국이 된 데 그쳤으며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이 되긴 했으나 속국 중에서도 높은 부마국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경술국치와는 비교가 안된다. [7] 순서대로 '國權 被奪(국권 피탈)', 日韓 倂呑(일한 병탄), 庚戌國恥(경술국치), 庚戌倭亂(경술왜란), '韓日 合邦(한일 합방)', '韓日 倂合(한일 병합)'으로 표기한다. [8] 한자 탄(呑)자가 삼킨다는 뜻이라서 약육강식의 형국이 너무 잘 드러났다. [9] 1907년 7월 고종의 강제 퇴위 당시 일제가 뺏어간 것이라고 한다. [10] 국가 간의 조약에는 국새를 사용해야 한다. [11] 위 이미지에 적힌 순종의 휘인 척(坧)은 한국통감부 직원이 쓴 것이다. 순종 즉위 이후 결재방식이 전통적인 착압(着押) 방식에서 일본에서 사용하던 친서(親署) 방식으로 바뀌게 되어 황제의 휘를 쓰게 되었는데 통감부 직원들이 순종의 필체를 흉내내서 결재하는 일이 이미 많이 있었다. 저 조칙을 포함해서 여섯 사람 정도가 쓴 필체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 [12] 물론 당시 열강들의 암묵적 동의 아래 진행되었고 이후에도 실제 효력을 발휘했으며 해당 조약의 합법성을 전제로 체결되어 지금까지도 기능을 발휘하는 중요한 조약들이 있기 때문에 학술적으로 불법부당이라고 한들 이 조약의 실제적 원천무효를 주장할 순 없다. 이와 같은 사항은 동북아역사재단에서도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학술적으로 해당 조약의 불법성을 밝혀내 당대 일제가 상당히 무리한 수준으로 조선의 국권을 유린했음을 입증할 순 있으며 이마저도 극구 막으려는 일제의 의도가 어디 있는지 모를 사람은 어디에도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13] 물론 이 조약 전후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14] 이때 조선은 사실상 속령 수준으로 전락했다. [15] 해외에서는 보통 보호국을 주권국으로 취급하지 않는데, 통가, 브루나이 등도 영국의 보호령에서 벗어난 것을 ' 독립'했다고 간주할 정도로 보호령은 사실상의 식민지로 취급받고 있다. , 푸에르토리코 같은 속령들은 아예 국가 명단에서 제외될 정도로 제대로 된 국가로 취급받지 못한다. [16] 영어 위키피디아 Korea under Japanese rule 문서에서도 일제강점기의 범위를 1905년~1945년으로 잡았으며, Korean Empire 문서에서도 조선이 주권 국가였던 것은 1905년까지라고 보고 그 이후는 일본의 보호령이라고 보고 있다. [17] 기사의 "풍신 태각"은 " 풍신 태합(豊臣 太閤)"의 오자. [18]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양자이다. [19] 사이온지는 다이아 수저급의 귀족이자 프랑스 유학파 출신의 엘리트 정치인으로서 문민통제를 강조하고 군부의 득세와 전쟁을 극도로 경계하던 인물이었다. 그가 사망하고 마지막 브레이크까지 사라지자 군부는 이듬해에 기어코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20] 칭호도 다시 대한제국 이전 조선 시대처럼 폐하 전하, 황태자 왕세자 식으로 제후의 격으로 격하되었다. [21] 1917년의 함흥 순행만 해도 병환으로 몸져 누워 있던 순종을 억지로 끌어내리다시피 행해졌다. [22] 윤치호의 외삼촌. 전라북도, 경상북도 관찰사를 지낸 후 1927~1934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23] 조선과 일본을 각기 동등한 자격으로 1:1로 통합하겠다던 기존 일제의 명분을 걷어차 버린 대목이다. 실제로 이에 낚인 사회인들도 당시엔 상당했다. 그렇지만 일본은 최소한 이왕가(李王家)를 대접해 주겠다는 약속 자체는 어기지 않았고 따라서 조선 왕실은 확실히 상당한 대우를 받았는데 일본 귀족인 화족보다는 1단계 위로, 일본 황실보다는 반단계 ~ 1단계 아래로 쳐 줬다. [24] 이후 순종이 붕어하기까지의 기록은 순종실록 부록으로 이어진다. [25] 이 때문에 맹꽁이 서당에서는 이용직이 나가기 전 "나는 일당처럼 길거리에서 칼에 찔리고 싶지는 않다" 이완용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장면이 있다. [26] 러일전쟁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일제의 영향력이 커졌다. [27] 그나마 지방 각지에서 저항하던 의병도 1909년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약화된 상태였다. 다만 채응언 의진 등 경술국치 이후에도 활동한 의병들은 엄연히 존재하며, 1910~1917년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건수만 115건에 달한다(김항기, 「일제강점초기(1910~1915) 총독부재판소의 의병판결과 그 성격」, 『사림』 72, 2020, 52쪽). 또한 1910년대에 활동 및 순국한 의병들 중 51명은 실제로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어 있다. [28] 대조적으로 을사조약 체결 시에는 온 나라가 뒤집혔고 백성들이 "나라가 망했다"고 공포에 떨며 울부짖었다는 유생들의 기록이 있다. [29] 서정화, 「유교 담론의 자장과 순국의 관계성 ─한말·일제강점기의 자결순국을 중심으로─」, 『국어문학』 75, 2020, 71쪽. [30] 아이러니하게도 홍명희의 할아버지이자 홍범식의 아버지 홍승목은 친일파로서 조선총독부에서 주는 작위를 받았다. [31] 이지은, 『경술국치기 전북지역 자정순국자에 대한 검토』, 전북대학교 일반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6, 21쪽. [32] 망극(罔極)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에서처럼 임금이나 어버이의 은혜가 한이 없다는 뜻이고, 둘째는 한이 없는 슬픔, 보통 임금이나 어버이의 상사(喪事)에 쓰는 말인데 여기서는 후자의 뜻으로 보인다. 이후 내용은 여기서는 생략하였는데, 결국 서울에 가기로 한다. [33]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음 [34] 홍범식의 오류이다. [35] 친일 논평으로, 경술국치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36] 여담으로 영어권에서도 해당 단어는 원칙상 '기념'의 뜻으로 쓰일 수 있으나 축제 분위기에 더 자주 쓰인다는 어감으로 인해 무거운 상황에서는 기피된다. [37] 다만 링크에 적힌 원문은 '합방이 되자 일인들은 재빨리 경복궁 근정전에 그들의 국기를 내걸고 주인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근정전 위를 날고 있는 것은 일군(日軍) 비행기 삼중호 (三重號)다.'라고 되어 있어 경술국치 이후 줄곧 근정전에 일장기가 걸려 있었다는 뜻이지 이것이 1910년에 찍힌 사진이라고 단정짓지는 않았다. [38] 출처: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병합에 관한 청 정부의 인식과 대응, 취안허슈(權赫秀) 중국 요녕대학 역사문화학원 교수 [39] 출처: 대공보(『大公報』), 宣統二年八月十八日(1910. 9. 21) [40] 日총리,"한일합방 법적으로 유효"발언 파문 연합뉴스 1995.10.11 [41] 무라야마 총리,'한일합방 조약 합법적으로 체결됐다'망언 mbc 1995.10.11 [42] 정부,무라야마 총리의 망언에 대해 늑장 대응 mbc 1995.10.11 [43] 김영삼 대통령과 무라야마 총리의 뉴욕 정상회담 취소 mbc 1995.10.17 [44] 일본 무라야마 총리의 망언으로 한일관계 냉각 1995.10.18 mbc [45] 일본 총리 망언에 대한 강경대응 촉구 [46] 일본 무라야마 총리 망언 kbs 1995 [47] 무라야마 일본 총리 "합병 합법" 되풀이 kbs 1995 [48] 발언'잘못 시인 1995.11.13 한겨레 [49] "日(일)은 과거역사 바로봐야"金(김)대통령 "韓國民(한국민)고통에 깊이사과 1995.11.19 매일경제 [50] 韓(한)-日(일) 정상회담「과거사妄言(망언) 갈등」일단 봉합 1995.11.19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