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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ruby(林, ruby=はやし)][ruby(權助, ruby=ごんすけ)] | Hayashi Gonsuk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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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1F2023><colcolor=#b0313f,#ce4e5c>출생 | 1860년 3월 23일 |
아이즈 번 와카마츠 (現 일본 후쿠시마현 아이즈와카마츠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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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9년 6월 27일 (향년 79세) |
국적 | 일본 제국 |
학력 | (구제) 도쿄대학[A] (정치학과) |
직업 | 외교관 |
[clearfix]
1. 개요
일본 제국의 외교관으로서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했다.2. 생애
에도 시대 말기 아이즈 번[3]에서 안세이(安政) 7년(1860) 음력 3월 2일(양력 3월 23일) 출생하였다. 그가 9살이던 메이지 원년(1868)에 도바 후시미 전투로 할아버지 야스사다(安定)[4]와 아버지 마타이치로(又一郎)를 잃었기 때문에 아이의 몸으로 하야시(林) 집안의 가독(家督)[5]을 상속받았다. 할아버지의 정식 이름은 '야스사다'지만 일반적으로는 '곤스케(権助)'라고 불렸는데 그는 할아버지의 통칭까지 물려받아 이후로 '하야시 곤스케'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어린 몸이지만 가독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계속 무진전쟁에 참가하여 아이즈의 영주와 함께 메이지 정부군에 맞서 싸웠다.전쟁이 끝난 뒤 하야시 가문은 멀리 도나미번(斗南藩)[6]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받아 고향을 떠났다. 그리하여 온 가족이 쌀 3홉을 배급받아 살기가 힘들어서 어머니는 지인을 믿고 다시 아이즈 번으로 돌아가 지인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생활했다. 이 때 할아버지의 친구인 육군 소좌 고다마 사네후미(児玉実文)가 옛 친구의 유족들이 이렇게 사는 사실을 알고 곤스케를 데려가 키워주었다. 고다마가 곤스케를 데리고 가고시마로 가던 중인 1877년 세이난 전쟁이 일어났는데 고다마가 군인인 덕에 곤스케 또한 전쟁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7]
곤스케는 1878년 오사카전문학교(現 긴키대학)에 들어갔다가 도쿄대학[A] 정치학과로 진학하여 1883년 졸업하였는데 도쿄대학 총장 와타나베 고키(渡辺洪基)가 추천하여 1887년 외무성에 들어가면서 그의 인생에 본격적으로 꽃이 피었다. 인천과 상하이의 영사, 영국과 청나라에 주재하는 수석서기관 등을 역임하고 1899년 외무부의 통상국장이 되었다. 1900년 한국 주재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받아 1906년까지 재임하였는데 이 무렵 가쓰라 다로(桂 太郎), 고무라 주타로(小村寿太郎)와 함께 '세 남자(三人男)'라고도 불렸다고 하는데 곤스케가 얼마나 비중 있는 외교관으로 부상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주한 특명전권공사로 재임하는 동안 곤스케는 제1차 한일협약과 을사조약 체결에 앞장섰으며 1907년 남작 작위를 받아 화족이 되었다.
이후 청나라, 이탈리아, ( 신해혁명 이후) 중국, 영국 대사를 맡으며 계속 외교관으로서 삶을 살았고 1927년 일본으로 귀국한 후 추밀원 의원을 지내다가 1939년 6월 27일 향년 79세에 숨을 거두었다.
3. 기타
- 우습게도 하야시 곤스케의 고향 아이즈 번과 이토 히로부미의 고향 조슈 번은 그때나 지금이나 서로 반목하는 사이였다. 더군다나 하야시 본인도 어릴 적에 보신 전쟁을 직접 경험해본 사람이다. 그러나 한국을 강점하겠다는 목표 앞에서 이 두 작자들은 지역감정도 잠시 잊고 하나가 되었다.
파괴되기 전의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
- 오늘날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 앞에서 남산인권숲 쪽으로 퇴계로26가길을 따라 들어가면 초입에 구 통감부 관저 터가 나온다. 1936년에는 관저의 경내에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을 세웠는데, 이듬해에 현 청와대 터에 총독관저를 완공하자 구 통감관저 터를 시정기념관으로 바꾸었다. 1945년 광복 후에는 통감관저 건물은 국립민족박물관, 국립박물관 남산분관, 국군연합참모본부 등으로 쓰이다 1960년 이후 철거되어 완전히 잊혔고, 하야시의 동상도 어느새 누군가가 파괴했다.[9]
-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이 2005년 8월 구 통감관저 터를 찾다가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을 받치던 좌대에 쓰인 판석 몇 점을 발견했는데, 여기에는 '남작하야시곤스케군상(男爵林權助君像)'이라는 명문이 있었다. 2010년에는 판석에 새긴 명문을 누군가가 훼손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2015년 8월 서울시는 을사늑약의 치욕을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판석을 모아 야외에 거꾸로 세워서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하였다. KBS 보도 좌대 위에 있던 동상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4. 대중매체에서
- 1979년 KBS 8.15 특집극《대한국인》에서는 배우 유종근이 연기했다.
- 1984년 MBC 드라마《조선총독부》에서는 배우 최병학이 연기했다.
- 1984년 KBS 대하드라마《 독립문》에서는 배우 최정훈이 연기했다.
- 1990년 KBS 8.15 특집드라마《왕조의 세월》에서는 배우 이신재가 연기했다.
- 2018년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배우 정인겸이 연기했다.
[1]
문헌에 따라 '하야시 곤노스케'로도 표기함.
[A]
당시 교명은 '도쿄대학'이었지만 신제대학이 아니라
구제대학일 때라 현재의 도쿄대학과 구별하기 위해 이 무렵 도쿄대학은 '(구제) 도쿄대학'으로 씀이 맞는다. 도쿄대학은 이후 '제국대학'으로 개칭되었다가
교토제국대학이 설립되어 제국대학 간 구별을 위해 도쿄제국대학으로 개칭되었고, 1947년 모든 제국대학에서 '제국'을 삭제하여 도쿄대학으로 환원되었으며 1949년 신제 도쿄대학으로 개편되었다. 교명 변경사가 복잡하기 때문에 단순히 1949년 신학제 개편 이전의 도쿄대학을 전부 도쿄제국대학으로 소급하는 경우도 있다.
[3]
오늘날
후쿠시마현의 서쪽 일대
[4]
2013년
NHK 드라마 〈
야에의 벚꽃〉에도 등장한다.
[5]
일본어로 가토쿠(かとく). 집 안에서 가장으로서 가지는 권한을 의미한다. 가독을 상속한다는 것은 그 집안의 가장 또는 가주가 되었다는 뜻이다. 현대
일본에서는 법적으로 가독이 폐지되었지만 아직 개념으로는 남아 있다.
[6]
오늘날
아오모리현
무츠시(むつ市) 일대
[7]
후일 고다마가 아직 어린 자식을 남기고 숨을 거두자 이번에는 곤스케가 고다마의 어린 자식을 데려다 양육함으로써 보은하였다고 한다.
[A]
[9]
누가 파괴했는지는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