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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자작[예우정지] | |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
<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주아메리카합중국 대한제국 전권공사 조민희 趙民熙 | Cho Min-hu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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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colbgcolor=#fff,#1f2023>조민희 (趙民熙) |
본관 | 양주 조씨 (楊州 趙氏) |
출생 | 1859년 11월 8일 (음력 10월 14일) |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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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1년 1월 2일 (향년 71세) |
직업 | 정치가, 관료 |
작위 | 조선귀족 자작[예우정지] |
주요 경력 |
궁내부 특진관 승녕부 총관 주프랑스국 전권공사 주아메리카합중국 전권공사 조선귀족 자작[예우정지] 이왕직 찬의 조선 귀족회 이사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가족 관계 |
아버지 : 조병익 아들 : 조중수[4] |
비고 |
경술국적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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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09년,
순종이 순행을 마치고 돌아와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친일 관료들과 기념촬영한 사진. 중앙에는 순종이 앉아있고 그 오른쪽에는 이재각, 민병석, 조중응, 김윤식, 이지용, 조민희, 고희성이 서 있으며 어진 뒤에는 이병무, 윤덕영이 서 있다. 순종황제의 왼쪽에는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임선준, 고영희, 송병준, 박제순이 서 있다. |
조선과 대한제국의 정치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한일병합조약에 찬성해 경술국적으로 불리는 매국노의 일원이다.
2. 생애
1859년 10월 14일 한성부(現 서울특별시)에서 아버지 조병익(趙秉翼)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숙에서 수학하고 1885년( 고종 22) 9월 증광 문과에 병과 10위로 급제한 뒤 그해 10월 승정원 가주서(假注書)를 시작으로 1886년 1월 승문원 부정자, 1887년 9월 양성현감에 이어 12월부터 1889년 10월까지 용인현령을 지냈다. 1890년 1월 성균관 대사성, 1891년 5월 봉산군수, 1894년 6월 승정원 동부승지, 1895년 5월 관세사장을 거친 뒤 8월 전주부 관찰사에 임명되어 1896년 1월 전주 재판소 판사를 겸직했다. 1897년 1월 비서원승으로 4월까지 장례원 장례와 태의원 소경을 겸직했으며 9월 평안남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10월에는 평안남도 재판소 판사를 겸직했다. 1899년 2월 평안북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평안북도 재판소 판사를 겸직했다. 1900년 10월 궁내부 특진관에 11월 법부 협판에 임명되었다. 1901년 1월 특명전권공사를 겸했고 3월에는 군부 협판에 이어 프랑스 주재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었다가 며칠 후 미국 주재 특명전권공사로 발령받아 1903년 12월까지 미국 공사로 재임했다. 1903년 12월 일본 주재 특명전권공사에 임명되었다.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처리를 맡았고 일본 황태자가 대한제국을 방문하러 오자 그를 환영하는 친일 대신들이 만든 신사회의 부장이 되었다. 1909년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로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자 조문을 했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10월 조선귀족령에 따라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같은 달 중순 왕세자 이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고종의 명으로 일본에 갔다가 조선총독부가 비용 전액을 후원해 천황에게 사은의 뜻을 표하기 위해 조직한 '조선귀족 일본 관광단'에 합류해 천장절 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정무총감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방문한 자리에서 관광단 일행을 대표해 일본 각지에서 환영을 받은데 대한 감사의 말을 전달했다. 1911년 1월 은사 공채 5만원을 받았고 2월 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 봉수식'에 의복을 갖추어 참석했다. 1912년 2월 권업주식회사를 발기했고 8월 '한국 병합 기념장'을 받았으며 12월 종4위에 서위되었다. 1913년 7월 조선무역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창립에 참여했다. 1915년 1월 조선총독부 주도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시정 사업을 선전하기 위한 '시정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 협찬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나서 5월에 특별 회원으로 기부했다.
1915년 11월 다이쇼 덴노 즉위 대례식에 조선귀족 자격으로 참석한 후 처 최씨와 함께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특히 <경성일보> 1915년 11월 29일자 사설을 보면 "우리들이 새로 복속된 백성이지만 화족이나 고등관에 비했을 때 조금의 차별도 없었으며 후한 접대를 받게 되어 천황 폐하의 일시동인하시는 후의에 대한 성은에 (나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라는 천황 즉위식 참석 감상문을 발표했다. 1917년 10월 일제의 협력과 지원하에 조직된 친일 불교 단체인 불교 옹호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1918년 4월 고등관 2등의 이태왕부 이왕직 찬시에 임명되어 1919년 11월까지 재임했다. 1919년 11월 조선총독의 자문 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에 정4위에 임명되어 1921년 4월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19년 1월 고종의 국장 빈전주감관리에 임명되었고 6월 조선농사개량주식회사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1년 4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관제가 개정되면서 칙임관 대우의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어 1924년 4월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3,0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25년 4월 사단법인 조선귀족회[5] 이사에서 퇴임했으며 1926년 5월 종3위로 승서되었다.
그러나 조민희는 말년에나마 매국의 대가를 제대로 치르게 된다. 일제가 준 은사금 덕분에 재산이 적지 않았으나 도박과 낭비로 탕진하고 1920년대에는 궁핍한 생활을 했다. 1923년 중순경부터 채권자들의 소송이 계속 이어지는 한편 파산 신청에 대한 재판에도 20여 차례나 소환에 불응해 조선귀족 최초로 구인장을 받았다. 1925년 10월경에 기록된 조선총독부 문서의 조선귀족 약력에는 도박 현행범으로 여러 번 검거되었지만 조선귀족이라는 것으로 관대한 처분을 내렸는데 멈추지 않고 더 심하게는 관아 역소 등에 출근해서도 사무실에서 도박장을 개설해 밤을 새기도 했다고 한다.[6] 1927년 12월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파산자로 선고받았고 1928년 2월 「조선귀족령」 제8조 1항에 따라 조선 귀족에 대한 예우가 정지되었다.
예우가 정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작위는 그대로 상속자에게 승계되었는데[7] 1931년 1월 2일 죽은 후에는 1930년 1월 재단법인 창복회[8]에서 지급한 교부금 170원을 받았다.
조만희의 사후 자작직은 장남 조중수(趙重壽, 1894~1940)가 1931년 2월 16일 조선귀족 자작직을 습작받았고, 1940년 조중수가 사망한 후에는 조중수의 차남 조용호(趙龍鎬, 1918~1950)가 작위를 습작했다. 해방 이후 조용호는 반민특위에서 조사를 받은 적이 있으며, 6.25 전쟁 중인 1950년 12월 20일 사망했다.
3. 기타
[예우정지]
1927년
12월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파산자로 선고되어 조선귀족령 제8조 1항에 따라
1928년
2월 29일부로 자작의 예우가 정지되었다.
[예우정지]
[예우정지]
[4]
일제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조민희의 사망 이후 조선귀족 자작 작위가 습작되었다.
[5]
1911년 4월 작위를 받은 조선귀족들이 천황의 성은에 감읍하고 사회의 모범이 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6]
이완용의 부인에게서 매월 50원의 보조를 받아 생활했는데 세간에는 1명도 동정하는 자가 없었다고 비난했다.
[7]
작위에 걸맞은 예우가 정지되었지 작위가 박탈당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8]
1929년 9월 도박과
아편 등으로 몰락해가는 조선귀족들의 파산을 구호하기 위해 조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