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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colbgcolor=#fff,#1f2023>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산5-1번지 |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고분군 | |
수량/면적 | 541\,524.4㎡ |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
시대 | 백제시대 중기 | |
소유단체 | 공주시 등 | |
관리단체 | 공주시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colbgcolor=#000>
백제역사유적지구 Baekje Historic Areas Aires historiques de Baekj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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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국가·위치 |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충청남도 공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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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재유형 | 문화유산 | |
지정번호 | 1477 | |
등재연도 | 2015년 | |
등재기준 | (ⅱ)[1], (ⅲ)[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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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80>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의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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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군의 배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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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남 공주시 금성리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웅진기 백제의 왕과 왕족의 고분군. 1963년에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3]과거 명칭은 송산리 고분군이었으며 2021년 9월 17일 문화재청 고시 제2021-112호로 명칭이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으로 변경되었다.
2. 대표적인 고분
2.1. 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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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
22담로 |
무령왕 금귀걸이 |
무령왕 금제 관식 무령왕 금제 뒤꽂이 | 무령왕 발받침 | 무령왕릉 청동거울 일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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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 서동요 |
자세한 내용은 무령왕릉 문서 참고하십시오.
2.2. 적석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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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장소 | #s-2.2 | ||
관련 문서 | 한성백제 | 위례성 |
송산리 고분군이 있는 능선의 가장 위에 위치한 적석유구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줄어들어 네모난 모양을 하고 있어서 방단적석유구라고도 한다. 목관을 놓았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대신 붉은색 점토를 깔아놓았다. 내부에서는 백제 토기들이 수습되었다. 내부에서 목관과 같은 매장시설이 확인되지 않아서, 고구려 장수왕에게 살해당한 개로왕의 가묘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혹은 무덤이 아니라 제사 유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2018년에 들어서 이 적석유구에 대한 성격을 규명하기 위한 발굴조사가 시작되었고 계속 진행 중이다. 참고로 송산리 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의 첫번째 발굴이다.
2.3. 송산리 1호분
현재 1호분과 4호분 중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고분으로 1923년 조사 때는 4호분 또는 5호분으로 명명되었으나 일본인 아마추어 고고학자 가루베 지온이 재조사하면서 1933년 1호분으로 재명명했다. 조사 전에 이미 봉토가 거의 완전 유실되었고 도굴로 파괴되어 천장과 동벽의 일부가 심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출토된 부장품은 곡옥 1점, 대도 1점 외에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2.4. 송산리 2호분
현재 동쪽에서 2번째로 위치하고 있는 고분으로 1927년에 3호분으로만 명명되고 조사는 실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루베 지온이 1933년 조사하면서 2호분으로 재명명했다. 이미 도굴로 내부가 교란되어 있었고 1호분과 축조 방식이 비슷하다. 내부에는 강자갈을 깔았는데 도굴로 교란되었고 수습조사에서 일부 유물이 수습되었다. 출토된 부장품은 입구에 토기 5점이 있었으며 철제대 1점, 철제창 파편 1점, 철촉 3점, 관에 사용된 쇠못 다수가 수습되었으며 순금 귀걸이 1쌍과 구슬 2점이 수습되었다.2.5. 송산리 3호분
현재 서쪽에서 2번째로 위치하고 있는 고분으로 1927년 조사에서는 2호분으로 명명했지만 가루베 지온이 1933년 재조사하면서 3호분으로 재명명했다. 봉토는 유실되었고 조사 전에 이미 도굴 구멍이 있었다. 이 도굴 구멍은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라서 이 구멍을 통해 조사했다. 출토된 부장품은 금동제 꾸미개 1점, 금동제 허리띠 파편 2점, 금동제 허리띠금구 1점, 말띠드리개 1점, 화형장식구 1점, 쇠못 100여점, 쇠촉 8점이 수습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가루베 지온이 재조사했을 때는 소나무 관 파편 다수, 철제 대도 2점, 은제판 조각 1점이 더 수습되었다.2.6. 송산리 4호분
현재 가장 서쪽에 있는 무덤으로 1927년 조사에서는 1호분으로 명명되었다. 그러다가 1933년 가루베 지온의 재조사 때 4호분으로 재명명되었다. 조사 전에는 봉분의 흔적만 남아 있었지만 도굴에 의해 무덤임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부장품으로는 은제 허리띠 장식 2점, 은제 자루끝장식 1점, 순금 장식구 11점, 금동 장식품 잔편 1점, 철도금 장식구 잔편 약간, 은제 장식구 2점, 철창 파편 점, 철촉 43점, 금동 고리 1점, 장식못 124점, 철편 17점, 칠기 잔편 약간, 철제 고리 잔편 약간, 얇은 은박판 잔편 약간, 금동 장식구 잔편 약간, 금동 파편 약간이 1927년 조사에서 수습되었다. 이후 가루베 지온의 재조사 때 쇠못 7점, 금동의 각진 추형식 유물 1점, 나무관 파편 1점이 더 수습되었다.
이 송산리 4호분의 묘주에 관해서는 백제 동성왕과 결혼한 신라 이찬 비지의 딸일 수 있다는 가설이 제기된 적 있다. 이곳 출토 은제 허리띠 장식이 경주 금관총 출토 금제 허리띠 장식과 재질만 다를 뿐 디자인이 거의 똑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두 유물은 모두 경주의 한 장인이 제작한 것이고, 비지의 딸이 백제로 가면서 가지고 갔거나 이후에 신라에서 보낸 것 아니겠냐는 것이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32/0002375009?sid=103
2.7. 송산리 5호분
좌측이 5호분.
동쪽 구릉에서 약간 서쪽 지역, 즉 6호분과 무령왕릉 근처에 있다. 6호분은 서쪽에, 무령왕릉은 후방에 있어 삼각구도를 이루고 있다. 1932년 이 지역의 고분 관람을 위한 작은 도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을 가루베 지온이 조사했는데 이미 조사 이전에 도굴되었으며 가루베 지온은 이것을 5호분으로 명명했다. 가루베 지온은 5호분의 후방에 있던 무령왕릉을 사신 가운데 현무에 해당하는 인공 산으로 보고 건드리지 않았는데 이것은 6호분을 모조리 털어간 것을 볼 때 정말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전형적인 굴식돌방무덤이고 관대 2개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부부합장묘로 보이며 벽면은 돌로 쌓아 올렸고 천정을 큰 판석으로 마무리하여 서울 방이동 고분군의 형태인 궁륭형 석실과 비슷한 모양새를 띄고있었다. 천장 일부는 도굴로 일부 파괴되어 있었고 출토된 부장품은 순금제 말모양 장식구 1점, 순금제 나뭇잎모양 장신구 8점, 순금제 다이아몬드형 장식구 14점, 순금제 달개장식 1점, 순금제 꽃모양장식 1점, 산호옥 1점, 은못 35점, 금동장식못 50여점, 토기항아리 1점, 쇠못 10여점, 둥근고리 큰칼 파편 1점, 쇠촉 11점, 유리구슬 1점, 동제 장식구 파편 1점이 출토되었다.
비록 도굴되었지만 금제, 은제 장식품들과 나무널에 사용되었던 호화로운 장식용 못들이 다소 수습되어 위상을 간접적으로 알려주었다. 또 토기항아리에서는 은제 꽃장식 못 6점이 나와 흥미를 끌엇는데 이것은 도굴꾼이 가져 가려고 담았다가 가져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것은 아사히 신문 조각과 양초, 성냥, 호박으로 만든 담배 파이프가 발견되었는데 파이프를 물고 신문을 보면서 마을 사람들을 시켜 도굴을 하게 한 어느 일본인 도굴꾼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2.8. 송산리 6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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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장소 |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 공주 송산리 6호분 | ||
설화 | 서동요 |
자세한 내용은 공주 송산리 6호분 문서 참고
2.9. 송산리 7호분
1932년 송산리 고분군 도로공사 중에 발견되었으며 위치는 현재 1호분과 2호분 사이에서 남쪽 아래에 있었다. 현재는 위치가 사라졌으며 봉토는 유실되었고 내부도 도굴로 심하게 파괴되어 부장품은 거의 없었다. 다만 도굴꾼이 파낸 흙 속에서 극히 소량의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여기서 출토된 부장품은 소량의 구슬이 수습되었다. 또 내부에서는 구슬 1점, 은제 꽃모양장식 1점, 은제 구슬 7점, 작은 구슬류 1점, 금동 및 은제 판상장식 파편 1점이 수습되었다.2.10. 송산리 8호분
현재 1~4호분 중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했으며 4호분 바로 아래에 있었다. 이 무덤은 1933년 조사에서 4호분보다 매우 작아 4호분에 딸린 배총으로 여겨졌다. 출토된 부장품은 나무고나 파편 몇 점, 백제토기 5점, 은제 팔찌 2점, 산호옥 6점, 흑색 구슬 4점, 작은 구슬 1천여 점, 쇠못 몇 점이 수습되었다. 이 중에 구슬 1천여 점은 목걸이들로 보인다.2.11. 송산리 29호분
1933년 6호분 보수 공사 때 발견되었는데 무덤의 형식은 알려진 게 없다. 출토된 부장품도 거의 알려진 게 없는데 극소수의 구슬류가 출토되었다고만 전한다.하지만 최근 문화재청의 재조사 결과 왕릉급 고분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2021. 06. 28. 문화재청 보도자료
2.12. 파괴 고분
현재 1~4호분 동편 맨 끝에 위치한 고분으로 1927년에 조사되었다. 이미 도굴로 천장이 붕괴되어 내부는 흙으로 가득했고 봉토도 사라져 고분의 존재를 알 수 없었다. 이 고분은 1호분과 2호분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출토된 부장품은 토기 2점, 연옥 269점, 유리구슬 27점, 금동제 띠고리 1점, 금동 방울 1점, 나뭇잎모양 장식 1점, 손칼 1점, 금동제 장식구 파편 1점이 수습되었다.3. 그 외
송산리 고분군을 포함한 공주 일대를 허가없이 임의로 조사[4]하였던 가루베 지온은 아마추어 고고학자로서 공주고등보통학교[5]의 역사교사였다. 송산리 고분군 역시 가루베 지온이 조사하였는데 그는 1969년에 공주고보의 제자였던 이성철에게 국제우편으로 흑백사진 28장을 보냈다.무슨 심산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28장 중에는 그가 도굴한 6호분의 현장 사진과 실측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성철은 문화재청에서 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이를 기증했는데 이상한 것은 1번부터 26번까지 매겨 놓은 사진 중에 10번 사진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마 추정컨대 가장 중요한 무덤 내부의 유물 사진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11번 사진에는 희미하게나마 유물로 보이는 물체가 보이고 관대 아래를 찍었다고 적혀 있기도 하다. 더구나 도굴된 다른 무덤에서는 극히 소량의 부장품이라도 수습된 것으로 보아 6호분에서 잔편 하나 나오지 않은 것은 그가 도굴하고 증거가 안 남도록 깨끗이 치웠다는 게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가루베 지온은 1901년생으로 일본 야마가타현에서 태어나 1925년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했고,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후 공주로 가서 공주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 노릇을 하며 공주와 부여 지역의 백제 유적과 고분을 상술한 것처럼 조선총독부의 허가 없이 임의로 조사를 하고 도굴까지 일삼았다. 그리고는 1970년에 죽을 때까지 한국에서 가져온 문화재가 없다고 주장했다. 1959년,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해 문화재 반환위원들이 일본으로 직접 찾아갔으나, 여전히 없다고 거짓말을 했으며 1970년에 명지대학교에 강연왔을 때도 마찬가지로 일관했다. 가루베 지온은 이 유물들을 연구해서 《가루베 지온의 백제연구》라는 책을 저술했고 결국 그는 1970년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유족들도 끝까지 가져온 게 없다고 주장했고 2006년에서야 유족들이 백제 기와 4점을 돌려주는 데에 그쳤다.
참고로 원래는 봉분이 지금만큼 높지 않았었다. 의도적으로 도굴을 막기 위해 능선의 일부로 보이도록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정비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처럼 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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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
[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3]
처음 지정될 당시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문화유산에 번호를 매기는 것이 유산의 중요도로 오인될 수 있음을 고려해 따로 번호를 매기지 않고 있다.
[4]
당시의 일본인 관학자들도 발굴조사를 완전히 임의대로는 할 수 없었고 관련 부서에 서류를 제출한 뒤 최종적으로 총독부의 허가까지 받아야 발굴을 진행할 수 있었다. 당시에도 가루베 지온의 행위는 불법이었다. 1916년
조선총독부가 '고적 및 유물 보존 규칙'을 공포함과 동시에 고적조사위원회를 출범시켜 이들이 하는 공식적인 조사 이외에 시행되는 발굴은 전부 불법이라고 공포했기 때문. 조선총독부는 이 부분을 문제삼아 가루베 지온의 활동에 제동을 걸었다.
[5]
현
공주고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