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31 06:08:57

고령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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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5px -10px -15px"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315288>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79호
<colbgcolor=#315288> 고령 지산동 고분군
高靈 池山洞 古墳群
소재지 <colbgcolor=#fff,#1f2023>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 산8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고분군
수량/면적 830,181㎡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시대 가야시대
소유단체 고령군
관리단체 고령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유네스코 세계유산
<colbgcolor=#000> 가야고분군
Gaya Tumuli
Tumuli de Gaya
<colcolor=#fff> 국가·위치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경상북도 고령군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1666
등재연도 2023년
등재기준 (iii)[3] }}}
파일:external/photom.imaeil.com/1.38395405331E+1354001.jpg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전경

1. 개요2. 특징3. 역사4. 무덤의 내부 구조5. 순장6. 수난의 역사7. 주요 무덤들
7.1. 지산동 44호분7.2. 지산동 45호분7.3. 지산동 47호분7.4. 지산동 32호분7.5. 지산동 30호분7.6. 지산동 73~75호분
8. 고아리 벽화고분9. 같이 보기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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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왕릉로 55(지산리)에 위치한 대가야 시대에 축조된 무덤군을 의미하며, 폭넓게는 이후 신라, 고려, 조선 시대에 추가로 축조된 고분군까지 모두 포함하여 지산동 고분군이라고 불린다. 1963년에 사적 제79호로 지정되었고 고분은 총 704기가 확인되었다. 100년 전, 흑백사진에 담긴 《고령 지산동 고분군》 모습

행정구역 명칭이 '지산동(洞)'이 아닌 '지산리(里)'지만 '지산동 고분군'이라 불리는 것은 지정 당시 행정구역인 '고령군 고령면 지산동'을 따랐기 때문이다.[4]

가야시대의 유명한 금관 리움미술관 소장 금관( 국보 제138호) 이 출토된 곳이 바로 여기이다. 정확히는 도굴로 세상에 나오자 이병철 회장이 구매한 것. 그 때문에 당시에는 이 고분군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확실하지만 정확히 어느 고분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훗날 45호분에서 도굴되었음을 확인하였다.

2013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고, 2015년 3월에는 우선등재 추진대상으로 선정, 10월에는 공동추진 MOU가 체결되었다. 이후 2023년 9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워낙 수가 많다보니 2023년 말 기준 발굴된 무덤이 2%에 불과하다. # 세계유산 등재에도 불구하고 발굴 진척이 늦었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85년 만에 발굴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

2. 특징

한국사의 모든 고분군 중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로 순장을 했던 고분군이다. 무덤 주인공이 묻히는 주부곽 주변에 순장곽을 수십개씩 설치했는데, 이런 다곽 순장묘는 오직 고령 지산동에서만 존재하는 특징이다. 수십명을 순장했고, 이나 같은 동물까지 추가로 순장했다.[5]

고분군 가운데로 도로가 관통하며 그 부근에 ' 대가야박물관'이 있다. 고분군은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무덤을 백제나 신라처럼 산중턱 혹은 평평한 곳에 만들지 않고 산정상 능선 부근을 따라 축조했다. 높은 곳이 하늘과 맞닿은 신성한 장소라는 당시 가야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지산동 고분군이 자리잡은 능선 쪽은 나무가 없어서 시야가 탁 트였기 때문에 올라가면 고령군을 전부 내려다 볼 수 있다. 특히나 안개 낀 날도 사진이 잘 나온다. 고분군 사이에 안개가 낀 장면을 밑에서 보면 나름대로 좋은 구도가 나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도 너무 높지 않고 계단도 잘 갖추어 주민들에게는 좋은 등산로이자 공원이며 산책로다.

대가야박물관[6]은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할 뿐만 아니라 이 고분군의 경비 업무도 겸한다. 지산동 고분군은 인구가 바글바글한 곳이 아니라 고령군 내에서도 약간 외진 곳에 있어서 잘못하다가는 도굴꾼의 타겟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고분군 위에는 조명 시설이 일부 있고 가끔 순찰을 다닌다고 한다.

또한 워낙 무덤이 많아서 그런지 파괴되거나 유실된 고분도 은근히 많이 보인다. 예를 들면 당연히 무덤이 있었을 자리에 무덤이 없거나[7] 야트막한 언덕 아니면 웅덩이 같은 흔적으로만 남아 있고 무덤의 권역을 표시하기 위해 쌓은 돌들이 노출되어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가야시대에 쌓은 돌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이야기. 결국 위의 사진의 평평한 지대가 원래는 모두 무덤 자리였다는 것이다. 평지가 된 건 유실된 봉분의 위치가 제대로 파악이 안 되어서 복원을 못한 듯하다.

3. 역사

기록이 없기 때문에 처음으로 축조된 시기는 알 수 없다. 일단은 대가야( 반파국) 1대왕인 이진아시왕 때부터 이 곳에 무덤을 만들었다고 추측할 뿐이다.

현재처럼 대규모로 무덤을 축조한 시기는 대가야가 고대국가로 성장한 5세기 초부터 6세기 중엽까지인 듯하다. 이 고분군이 유명한 이유는 문헌으로만 전하던 순장이라는 매장 풍습의 실체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에이 설마 이런 게 있었겠나' 하는 생각이었는데 파헤쳐보니 순장된 시신이 어마어마하게 나와 놀랐다고 한다.

규모가 크다 보니 대가야 멸망 이후에도 존재가 잊히지지 않았다. 조선시대 학자 남명 조식이 명종 15년(1560) 무렵 지산동 고분군을 보고 "산 위에 저게 뭐냐." 하며 놀랐다는 일화가 있다. 현대적 연구는 구한말 시절인 1906년에 일본인 세키노 타다시(関野 貞) 교수가 시작했다.

4. 무덤의 내부 구조

전체적으로는 거의 구덩식 돌덧널무덤인데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곳 지산동에는 확인된 건 모두 구덩식 돌덧널무덤이고 굴식 돌방무덤은 약간 떨어진 고아리에 벽화고분 형태로 1기만 존재한다.[8] 신라에 병합되기 전에는 부장품 토기도 가야토기였으나, 신라에 병합된 6세기 이후에는 신라토기들이 출토된다.

무덤의 내부 구조는 신라의 무덤과 백제의 무덤과는 확연히 형태가 다르다. 우선 왕이 묻힌 으뜸돌방(이하 주곽)이 한가운데에 있고, 왕이 저승에 가서 쓸 물건들을 매장한 딸림돌방(이하 부곽)이 1~2개 근처에 있으며 그 주위로 순장자들을 묻은 순장 덧널이 있는데, 많게는 20개 이상이 확인되기도 했다.

또한 왕이 안치된 주곽에도 순장자가 2명 있었는데 왕을 호위하던 최측근 무사나 신하인 듯하다. 부곽에는 장물들을 보관하는 장물지기를 한 명씩 순장했다고 한다.

주곽의 높이는 최대 크기 2 m, 길이는 9 m로 어마어마한 크기라, 그만큼 엄청 많은 유물을 부장했으리라 추정한다. 반면 순장 덧널은 길이가 1.6 m 남짓에 커봤자 2 m정도인데, 당시 사람들의 신체가 작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5. 순장

지금까지 밝혀지기로는 한국사에서 가장 많은 인원을 순장했다고 확인된 고분군이 바로 지산동 고분군이다. 고구려 신라에서도 순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고구려 적석총이라는 무덤 특징상 몇 명까지인지는 특정이 되지 않고, 신라 무덤은 많아야 2~3명 정도로 비교적 인도적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유독 흔히 가야권이라 부르는 삼국시대 경남 일대의 제 가야 각국의 고분군에서는 순장의 사례[9]가 많으며 그 인원도 많으면 3~5명가량이다. 그 중에서 지산동 고분군의 대형분들은 수십 명씩, 가장 큰 44호분에는 대략 40여 명 남짓 순장되었다고 추정한다.

지금의 기준에서야 가혹하지만, 인권이라는 것이 없던 시절임을 고려해보면 순장된 사람들(이하 순장자)은 일종의 위세품과도 같은 개념으로 이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수한 토기, 화려한 부장품들의 존재는 계세사상(繼世思想)이라는, 즉 죽어서도 현세의 삶이 이어진다고 보는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순장 또한 그러한 계세사상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피장자의 위계에 따라서 그 수량이 정해졌다. 지산동 고분군 중에서도 왕묘 급의 지름 20 m 이상 대형분들은 순장자가 20명을 상회하거나 그 수준인 반면, 왕릉급 바로 아래의 무덤들에서는 3~5명 정도로 순장자 인원 수가 줄어듦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위계(位階)에 따라 순장자 수가 줄어드는 것은 일반적으로 무덤에서 확인되는 부장품의 화려함의 정도, 수량적 측면이 상위 위계의 인물일수록 많고, 위계가 낮아지면서 그 급이 낮아지는 맥락과 동일한, 즉 순장자=부장품의 개념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가야권의 역사는 문헌이 엉성한 관계로 상세하게 알 수 없기도 하거니와, 고대 문헌에서 일반 백성에 대한 기록은 잘 드러나지 않는 만큼, 순장자의 입장이 어떠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2018년 지산동 고분군 남쪽 권역의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동쪽 순장곽에서 발치에 화살촉이 꽂힌 상태로 순장자의 인골이 처음으로 출토되었다. 법의학적인 측면에서 다각적 검토가 필요하지만, 정황으로 미루어보면 순장 예정자를 살아는 있으되 저항은 하지 못하도록 발에 활을 쏘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많은 인원을 순장하였던 관계로 대가야 권역의 고분군, 다시 말해 대가야가 축조한 고분군의 대형분들은 인골이 확인되지 않더라도 피장자가 묻힌 주곽(主槨)을 주변으로 빙 둘러져 순장곽(旬葬槨)을 배치한 양상이 자주 발견된다. 이는 대가야 고분군, 특히 수장층이나 왕족급의 위계의 표상이기도 하기 때문에 가야권 영역을 규명하고 판별하는 여러 기준 중 하나로 기능한다.

신라 지증왕 3년(502)부터 순장을 금지했는데 562년 신라가 대가야를 멸망시키면서 구 가야 영토에서도 순장 금지법이 적용돼 순장이 한 번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대가야박물관 부지에서 신라 병합 이후의 신라식 묘제인 횡구식 석실, 횡혈식 석실분이 34기가 조사됐는데 순장 흔적은 단 하나도 없었다.

6. 수난의 역사

1910년부터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할 증거를 찾으려 가야시대 고분을 발굴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쳤다. 이후 금림왕릉으로도 전하는 구 39호분, 현재는 47호분으로 불리는 왕릉급 무덤을 마구잡이로 파헤쳐놓고 허름한 보고서조차도 남기지 않았다.[10][11] 이 때문에 우리 손으로 발굴하기 전까지는 무슨 유물이 출토되었는지, 고분 내부는 어떠한 구조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이후에도 외진 곳에 위치한 이 고분들은 도굴꾼들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어 어지간한 큰 무덤엔 도굴갱이 1~2개는 꼭 뚫려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뚫기 귀찮아서 수많은 도굴꾼들이 선대 도굴꾼이 뚫었던 도굴갱으로 계속 드나들며 무덤을 도굴했고, 결국엔 왕이 안치되었던 주곽(主槨)과 왕의 유품들과 저승에 가서 쓸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 역할을 하던 부곽(副槨)은 모두 도굴되었다. 70년대에 들어서 44호분45호분을 발굴했을 때에는 토기 조각과 화살통, 환두대도[12] 일부, 관장식 조각 일부만을 겨우 수습했을 만큼 도굴의 피해가 극심했다.

참고로 현재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가야 유물들 중 주곽에서 출토된 것은 별로 많지 않다. 도굴꾼들은 주곽 중심으로 도굴했고 부곽이나 순장덧널은 도굴하지 않았는데, 파는 데 드는 힘은 똑같은데 유물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장곽 쪽은 그나마 도굴되지 않았고,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유물들은 순장덧널, 즉 순장곽에서 출토된 것이 많다.[13]

그래도 1990년대 이후 대대적인 사적 관리와 체계적인 발굴이 시작되자, 도굴 피해를 입지 않은 유물을 비롯하여 여러 대형분과 중요 고분들이 학술적으로 발굴되었다. 일련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금동제 귀걸이나 금동관, 환두대도 등 여러 위세품들을 비교적 온전히 보전한 고분들이 발견되어 지산동 고분군의 위계적 위치를 조명하게 해주었다.

7. 주요 무덤들

7.1. 지산동 44호분

파일:경북대박물관(2009), p. 4, 원색사진 2. 지산동 44호분 전경.jpg
지산동 44호분 발굴조사 당시 전경. 바닥에 깔린 돌들이 여러 순장곽들의 뚜껑돌이다.

지금까지 정식 발굴 조사된 고령 대가야 고분 중에서는 45호분과 함께 가장 큰 고분이다. 주산 주 능선 정상부에 위치한 5개 고분이 더 큰데 이 쪽은 아직 정식 발굴된 적이 없다.[14]

1977년 경북대학교 박물관이 발굴 조사하였다. 대가야의 왕릉급 고분이며, 현존 국내 최대 순장이다. 고분의 크기는 동서 27 m 남북 25 m로 대형 봉분이며, 고분의 주인과 측근 호위무사가 안치된 대형 주곽에 부장품들을 보관한 부곽 2기가 있었고, 주변에 있는 순장곽만 32기가 넘는 데다 순장자는 37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가야의 무역루트를 추정하게 하는 야광조개국자[15]가 출토되었고, 등잔과 금동합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가야가 백제와 교류를 했다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그 외에도 전형적인 가야 유물인 곡옥목걸이, 철제 마구류, 철제갑옷, 대도 등 여러 유물들이 나왔다. 특히 순장곽은 금귀걸이, 팔찌가 출토된 것과 그냥 단순한 토기 4개가 출토된 것, 갑옷이 출토된 것도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 순장자들의 신분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를테면 금, 은 장신구가 출토되었다면 피장자는 왕의 시녀로 볼 수 있고, 단순히 토기만 출토었다면 일반 백성, 갑옷이 나왔다면 무사로 추정하는 식이다.

22개의 토기에는 음식물이 들어 있었는데, 무덤이 닫힌 뒤 바깥 공기와 차단돼 완전히 썩어 없어지지 않고 천수백년이 지난 발굴 당시까지 보존이 됐다. 그 중 15개가 어류였고 뼈 1개, 조개 2개, 알 수 없는 것이 4개였다. 남쪽 석실에서는 기장(식물)이 나왔다. 가야 사람들이 어패류를 즐겼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5개 어류 중 어종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3개인데, 오늘날에도 낙동강에 살고 있고 고령 재래시장에서도 팔리고 있는 어종인 누치였다. 고령이 내륙지방임에도 조개는 바다 조개였다.

7.2. 지산동 45호분

위 44호분과 함께 정식 발굴된 고분 중 가장 큰 고분이다.

1977년 계명대학교 박물관이 발굴 조사하였다. 44호분과 마찬가지로 왕릉급 대형 고분이며 이곳 역시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손꼽히는 대규모 순장묘이다. 2기의 석실 주변으로 순장곽만 11기, 즉 순장자도 최소 11명 이상으로 44호분과 함께 당시의 순장 풍습을 증명하였다. 지름 22~23.5m의 타원형 모양이며 44호분만큼이나 큰 무덤이다. 현재 높이는 2.85m 남짓이지만 원래는 4m 정도였다고 한다. 44호분과 약간 다른점을 꼽자면 주곽과 부곽이 남벽을 공유한 상태로 붙어있었다는 점이다. 출토 유물은 매우 다양한데 금동제 관형 장식, 금은제 귀걸이, 갑옷 조각, 구슬 목걸이, 재갈, 등자, 관을 고정시켰을 꺾쇠와 못도 출토되었다. 토기는 작은 것들이 주로 출토되었다.

7.3. 지산동 47호분

지산동 고분군 가운데 가장 큰 고분으로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첫 발굴되었다. 봉분의 직경은 49m로 어느 고분보다도 크다. 대가야 3ㆍ4대 왕이었던 금림왕의 무덤으로 전하나, 8ㆍ9대 이뇌왕의 무덤이라는 추측도 있다. 알려진 출토 유물로는 금동제 호록, 황어뼈, 금장환두대도, 이형금동제품, 철촉 등이 있고 유물 6,500여 점이 출토되었다.

7.4. 지산동 32호분

1978년 계명대학교 박물관이 33호분, 35호분과 함께 발굴하였으며, 대형 주곽과 순장곽 1기가 같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봉분의 규모는 대략 12.6~13.1m정도이다. 현재 봉분의 높이는 1.5m정도이지만 원래는 3m급 중형 봉분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무덤이 유명한 이유는 이곳에서 가야시대 무덤으로는 드물게 금동관이 출토되었고, 보기 드문 방배형 관이기 때문이다.[16] 참고로 이 금동관과 비슷한 것이 일본 니혼쯔야마(二本松山) 고분과 사쿠라오카 고분(桜ヶ丘)에서 출토된 바 있다.
파일:external/d35063c91e978f5f1141635ba687af74951e6ea6ff6affe50be414c9fdd7e480.jpg
파일:고령지산동32-35호분발굴현장 문화재청.jpg
32-35호분 발굴현장

7.5. 지산동 30호분

대가야 박물관 입구에 도착해서 왼쪽의 언덕길을 조금 걸어올라가다보면 바로 나오는 무덤이다. 1994~1995년에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17]이 대가야 박물관 부지를 선정하면서 부지에 위치한 이 무덤을 발굴조사하였다. 이 무덤 또한 순장묘[18]이고, 도굴되었음에도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유물의 추정년대도 특히 이른 편이고, 같은 능선에 목곽묘인 73, 75호분이 축조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비교적 일찍 축조되었다고 추정된다. 봉분의 규모는 동서 18m, 남북 15m 가량이며, 석실은 길이 6.45m, 너비 1.26m, 높이 3m 정도이다. 특이하게도 석실 덮개돌에 이전 청동기시대에 새겨놓은 암각화를 그대로 뜯어와 사용하였다.[19][20] 이 고분이 유명한 이유는 이곳에서도 금동관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크기는 매우 작아서 아기의 머리에나 맞을 정도이며, 아마도 주인인 왕자가 아기 때 사망하여 이 무덤에 묻혔으리라 추정한다. 실제로도 발굴 때 작은 덧널에서 유아로 보이는 유해와 함께 출토되었다. 현재 이 금동관은 대가야박물관에서 소장, 전시 중이다.
파일:external/goryeong.grandculture.net/GC029P2132_m.jpg

7.6. 지산동 73~75호분

대가야박물관 동쪽에 붙어 있는 능선에 있다. 2007~2008년에 발굴했다.

여기도 많은 순장곽이 조사되었다. 75호분에선 순장곽들과 같은 높이에서 비교적 넓은 공간이 확인됐는데, 비록 오랜 세월과 도굴로 흔적이 남진 않았지만 을 묻은 동물 순장을 했던 공간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사람과 대형 동물까지 같이 묻었다는 것이다.

8. 고아리 벽화고분

고령 고아리 벽화고분 참조.

9. 같이 보기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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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권 국가 자체의 논란이 있는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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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적 513호 나주 반남 고분군으로 2011년 7월 28일 재지정 [2] 사적 514호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으로 2011년 7월 28일 재지정 [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4] 경상북도에서는 1988년까지 읍면의 하위 행정구역 단위로 '동'을 쓰는 곳이 많았다. [5] 과도기적 형태인 단곽순장도 고령 지산동의 일부 고분이나 고령 근처 지방인 합천 옥전 고분군, 함양 백천리 고분군 정도 범위에서만 조사되는데 어차피 전부 대가야의 영향권이다. 그 외엔 금관가야 신라든 순장을 한창 하던 시절에도 부곽 하나에 5명 이하로 순장해서 대가야와 비교가 안 되게 작게 했다. 결국 대가야가 한창 대규모 순장을 하던 시절 신라는 지증왕 때 대조적으로 순장을 완전 금지한다. [6] 대가야 박물관은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할 뿐만 아니라 무덤 축조과정도 자세히 보이기 때문에 들러보기를 추천한다. 그 옆에는 지산동 44호분을 발굴 당시 그대로 재현해 놓은 모형전시관이 있는데, 지산동 고분군의 역사도 자세히 보여주기 때문에 입장료가 아깝지 않다. 입장료는 청소년과 어린이는 1,500원, 어른은 2,000원. 월요일은 휴무이다. 고분군은 입장료가 없고 휴무일 없이 개방되며, 고분군 안에 잘 정비된 길로만 다녀야 한다. 특별한 고분 앞에는 설명문이 있기 때문에 참고하면 좋다. [7] 기준이 애매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가보면 능선과 경사면 경계에도 무덤이 있다. 즉 완벽한 봉분이 아닌 기울어진 형태의 봉분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잘 보면 정작 위 능선의 평평한 땅에 무덤이 없다. 그런 불안한 자리에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쓸 만한 땅이 꽉 차서 그랬다는 건데 자리가 있는 데도 일부러 불안한 자리에 만들었을 리는 없지 않은가. [8] 한반도 남부(대한민국)에 위치한 벽화고분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인데, 그 중에서도 가야에서는 이곳 한 기뿐이다. 발굴 당시엔 모두 도굴된 상태였고 벽화도 매우 심하게 훼손되어 간신히 연꽃 무늬 하나만 확인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아치형 구조라 무령왕릉과 형태가 유사하고, 벽화가 있다는 점에서 백제묘제와 유사성이 있다.(신라에 굴식돌방무덤이 도입된 시기는 이보다 훨씬 이후라고 추정한다.) 그 때문에 백제와 가야의 교류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호암미술관 소장금관이 이 고분에서 나왔다는 말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9] 함안 아라가야(안라국)의 말이산 고분군에서도 적게는 1~2인, 많게는 4~6인가량 순장된 수장급 무덤이 확인되었고, 김해 금관가야(금관국) 대성동 고분군에서도 순장의 흔적이 확인된다. [10] 임나일본부의 증거 따위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연히 거짓말이니까. [11] 지금도 도쿄국립박물관에 가야토기들이 있다. 일본은 이 토기들이 스에키 토기라고 거짓말을 하거나 도굴한 적 없다고 잡아떼지만, 제작 방식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건너간 토기들이 확실하고 도굴범들은 일본인임은 빼도 박도 못한다. [12] 환두대도는 왕족급의 인물들 옆에 신분 과시용으로 매장하던 것이며, 이것이 발굴된 고분은 고분의 주인이 최소 왕족 또는 왕임을 의미한다. 삼국시대의 무덤에서 공통된 사항이므로 환두대도 발굴이 중요하다. [13] 도굴꾼들도 바보가 아니라서 무덤을 파헤칠 때 중요한 유물이 부장되었을 만한 큰 석실 위주로 탐색을 하는데, 긴 막대기를 무덤에 꽂아 톡톡 두들기며 소리를 내어 크게 울리는 쪽만 파서 가져간다. 박물관에 전시된 토기들 중에서 막대기에 찔린 것처럼 구멍이 뚫린 토기들이 종종 있는데, 도굴꾼들의 막대기에 뚫렸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비단 지산동 고분군에만 해당하진 않으며, 도굴된 고분이라면 공통적인 특징이다. [14] 그리고 가장 크고 정상에서 눈에 잘 띄는 위치라, 이미 당한 도굴 피해도 더 클 가능성이 높다. [15] 야광조개국자의 재료로 쓰인 조개 종류는 오키나와 근처에 서식하고 있으며 이는 가야가 오키나와와 직접 무역을 했거나 아니면 백제로부터 이 물건을 들여왔을 것으로 추측하게 해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16] 특히나 금동관에 새겨진 무늬는 황금 비율이라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7] 현 영남문화재연구원 [18] 순장곽은 5개 정도가 나왔다. [19] 역설적으로 이 덕분에 바깥에 있었다면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암각화가 보존될 수 있었다. [20] 이런 현상이 삼국시대 유적에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같은 가야 고분군인 말이산 고분군에도 아예 '암각화 고분'이라는 무덤이 있다. 뚜껑돌이 지산동 30호분처럼 암각화를 잘라서 사용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