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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171호 | |
<colbgcolor=#315288><colcolor=#fff>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서울 高宗 御極 四十年 稱慶紀念碑 Monument for the 40th Anniversary of King Gojong’s Enthronement, Seou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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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42-3 |
분류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역사사건 |
면적 | 580㎡ |
건축시기 | 1903년 9월 2일 |
지정일 | 1969년 7월 18일 |
소유 | 문화재청 등 |
관리 | 종로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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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b22222> 3.1운동 당시 기념비전 앞에 모인 군중들 | 현재의 모습[1] |
1. 개요
기념비전(紀念碑殿)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42-3에 있는 비각으로, 비각 안에는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보존되어 있다. 정식 명칭은 고종 어극 40년 칭경 기념비전(高宗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殿)이며, 통상 기념비전이라 불린다. 세종대로사거리에서 광화문 방면으로 바라보는 우측에 있고,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4번 출구로 나가면 나온다. 1969년 7월 18일에 사적 제171호로 지정되었다.
2. 상세
비각 안에 보존되고 있는 기념비는 고종의 즉위 40주년과 그의 나이 51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 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비석의 앞면에는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이 직접 '대한제국 대황제 보령 망육순 어극사십년 칭경기념송(大韓帝國大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頌)[2]'라는 명문을 썼다. 비문의 내용은 윤용선이 짓고 글씨는 민병석이 썼다고 한다. '紀念碑殿(기념비전)'이라고 적혀 있는 편액도 순종이 직접 쓴 것인데, 현판 우측에 보면 황태자나 왕세자가 직접 썼음을 뜻하는 '睿筆(예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광무 6년 임인년( 1902년) 9월에 썼다고 되어 있다.
기로소는 정2품 이상의 문관 중 70세 이상 된 사람을 우대하는 제도로, 고려 때의 기영회를 계승한 관제이다. 조선 태조가 60세 되던 해에 친히 기영회에 들어갔는데, 이후 왕들이 오래 살지 못 해 기로소에 들어가는 이가 없자, 숙종과 영조 등이 60세를 바라보는 나이라 하여 미리 앞당겨 들어간 것을 본받아 고종은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51세에 기로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원래 고종이 즉위한 지 40년이 되는 해이자 51세가 되어 기로소에 입소한 해는 1902년이었지만, 나라 형편이 어려워 한 해 늦은 1903년 9월 2일에 세우게 되었다.
그냥 평범한 비각으로 보이겠지만 사실 고종이 추진한 광무개혁의 일환이다. 고종은 한성개조사업을 추진하여 한성을 근대도시로 만들었는데 미국의 워싱턴 d.c를 참고하여 공원을 설치하였다. 이때 조성된 공원 중 한 곳이 고종황제어극40주년기념비전이다. 본래 지금처럼 협소하지 않고 넓은 권역을 가져서 공원으로 이용되었다. 고종황제가 조성한 공원 중 남아있는 곳은 탑골공원이다.[3]
비를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정자(停子)형 건물로 건물 기단 둘레에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이 건물의 남쪽에 설치한 문은 돌기둥을 세우고 철문을 달았는데, 문의 가운데 칸에는 무지개 모양의 돌을 얹어 ‘만세문’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일제강점기 때 한 일본인이 떼어 가서 자기 집 대문과 담장으로 사용하던 것을 1954년경에 보수할 때 되찾아 복원하였다. 1967년경에 광화문지하보도 건설과 종로 확장 공사로 인하여, 원래의 위치에서 북동쪽으로 약간 이전하였다. 1979년에 전면적으로 다시 고쳐 옛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과거에는 그냥 비각이라고 불렀고, 광화문역 출구 표지판에도 비각이라고 표기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기념비전으로 정정하여 표기하여 두었다.
사람들이 광화문 일대를 지나면서도 유심히 보지 않고 그냥 지나치기 때문에 존재감은 별로 없는 편이다.
3. 외부 링크
4. 사적 제171호
고종(재위 1863∼1907)이 왕이 된지 40주년과 그의 나이 51세에 기로소에 들어 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비를 보호하는 비전(碑殿)안에 있다. 또한 이 비석에는 고종이 처음으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기로소(耆老所)는 정2품 이상의 문관 중 70세 이상 된 사람을 우대하는 제도로, 고려 때의 기영회를 계승한 관제이다. 조선 태조가 60세 되던 해에 친히 기영회에 들어갔는데, 이후 왕들이 오래살지 못해 기로소에 들어가는 이가 없자, 숙종과 영조 등이 60세를 바라보는 나이라 하여 미리 앞당겨 들어간 것을 본받아 고종은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51세에 들어가게 되었다.
비석은 귀부, 비몸, 이수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몸 앞면에는 황태자인 순종의 글씨가 있으며, 비문은 윤용선이 짓고 민병석이 썼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정자(停子)형 건물로 건물 기단 둘레에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이 건물의 남쪽에 설치한 문은 돌기둥을 세우고 철문을 달았는데, 문의 가운데칸에는 무지개 모양의 돌을 얹어 ‘만세문’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 문은 일제시대 일본인이 떼어 가서 대문으로 사용하던 것을 광복 이후 찾아와 복원한 것이다.
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전은 20세기초 전통적인 건축양식의 틀이 해체되기 직전에 세워진 건물로 당시 이러한 유형의 건물 중 대단히 아름다운 건물이며, 이 시기에 세워진 덕수궁의 다른 여러 건물과 함께 중요한 연구자료가 된다.
기로소(耆老所)는 정2품 이상의 문관 중 70세 이상 된 사람을 우대하는 제도로, 고려 때의 기영회를 계승한 관제이다. 조선 태조가 60세 되던 해에 친히 기영회에 들어갔는데, 이후 왕들이 오래살지 못해 기로소에 들어가는 이가 없자, 숙종과 영조 등이 60세를 바라보는 나이라 하여 미리 앞당겨 들어간 것을 본받아 고종은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51세에 들어가게 되었다.
비석은 귀부, 비몸, 이수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몸 앞면에는 황태자인 순종의 글씨가 있으며, 비문은 윤용선이 짓고 민병석이 썼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정자(停子)형 건물로 건물 기단 둘레에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이 건물의 남쪽에 설치한 문은 돌기둥을 세우고 철문을 달았는데, 문의 가운데칸에는 무지개 모양의 돌을 얹어 ‘만세문’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 문은 일제시대 일본인이 떼어 가서 대문으로 사용하던 것을 광복 이후 찾아와 복원한 것이다.
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전은 20세기초 전통적인 건축양식의 틀이 해체되기 직전에 세워진 건물로 당시 이러한 유형의 건물 중 대단히 아름다운 건물이며, 이 시기에 세워진 덕수궁의 다른 여러 건물과 함께 중요한 연구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