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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
扶餘郡 Buyeo County |
}}} | |||
<colbgcolor=#303C9B><colcolor=#fff> 군청 소재지 | 부여읍 사비로 33 (동남리) | |||||
광역자치단체 | 충청남도 | |||||
하위 행정구역 | 1 읍 15 면 | |||||
면적 | 624.65㎢ | |||||
인구 | 59,727명[1] | |||||
인구밀도 | 95.61명/㎢[2] | |||||
군수 |
|
박정현 (재선) | ||||
군의회 |
|
7석[3] | ||||
|
4석[4] | |||||
도의원 |
|
1석[5] | ||||
|
1석[6] | |||||
국회의원 |
|
박수현 (
공주·부여·청양 / 재선)
|
||||
상징 | <colbgcolor=#303C9B><colcolor=white> 군화 | 연 | ||||
군목 | 은행나무 | |||||
군조 | 비둘기 | |||||
지역번호 | 041 | |||||
홈페이지 | ||||||
SNS | | | | | |
[clearfix]
1. 개요
|
|
부여군 홍보 영상 |
' 부여'라는 이름은 통일신라 때부터 이어온 지명이며, 백제 시대에는 사비, 소부리 등으로 불렸다.[7] 부여는 만주 지방에 있던 고대 국가라 상관없을 거 같지만,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부여 왕족이었고, 백제 왕들의 성씨도 부여씨였으며 백제 성왕이 국명을 남부여로 바꿨을 정도였다. 이 지역을 부여로 명명한 통일신라도 그 역사적 관련성을 인정한 것이다.
공주시[8]와 함께 백제문화제를 개회식과 폐막식을 번갈아가면서 진행하고 있으며, 2010년[9]에는 세계대백제전을 개최했다.
2. 상징
부여군의 CI |
『백제금동대향로』 상단부 "봉황"을 형상화하여 21세기를 향해 힘차게 비상하는 모습으로 진취적인 부여군민의 강렬한 의지를 상징하며 세계로 도약하는 부여를 표현 |
부여군의 군정 슬로건 |
박정현 시정 8기 부여군정 슬로건. |
부여군의 공동브랜드 |
부여군 공동브랜드 굿뜨래는 부여의 기름진 땅과 천혜의 깨끗한 자연 환경인 좋은(good/굿)뜰에서 생산된 최고의 제품을 뜻합니다. |
부여군의 마스코트 |
(좌측부터) 금황이 · 금용이 · 금동이 |
백제문화제 캐릭터 금동이와 향이 |
부여서동연꽃축제 캐릭터 서동왕자와 선화공주 |
3. 역사
3.1. 발전 초기
기원전에는 청동기 시대의 송국리 문화유형의 발원지였고, 그 이후 기원전 4~3세기 때 고조선이 연나라에게 밀려나갈 때 발생한 이주민들의 한반도 이주 러시 후에는 삼한 중 마한 고포국의 영역이었다.삼국시대인 그 이후 대강 4세기 즈음 백제 분서왕 혹은 비류왕 시기에 같은 마한의 백제국에 복속되었다. 이후 소부리(所夫里), 사비 등의 지명으로 불렸고, 공식적으로는 사비성이 된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개로왕이 죽고 한성백제가 몰락한 뒤 웅진백제시대인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쯤에 본격적으로 도시가 건설되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5세기 말인 동성왕 시기부터 왕이 자주 사비로 사냥을 나갔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부터 정치적 중요성이 수도 웅진성(현 충청남도 공주시) 다음으로 큰 도시가 아니었나 추측하거나 혹은 동성왕대부터 의도적으로 키우기 시작한 도시일 것이라 추측된다.[10]
백제 성왕이 국호를 ' 남부여'로 고치고 538년 웅진성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한 이래로 백제가 멸망하는 660년까지 6대 122년간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다. 결국 부여가 도시개발이 안 되는 결정적 이유가 되고 말았다.[11] 660년에 백제가 멸망해 궁성을 비롯한 많은 문물이 소실되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한 백제인이 금동대향로를 땅 속에 묻은 것이 신의 한 수라고 할 수 있다.
남북국시대에 들어서는 중심지는 사비군(泗沘郡)으로, 현 임천면 일대는 가림군(加林郡)으로 불린다. 사비군의 속현으로는 진악산현(珍惡山縣, 석성면)과 열기현(悅己縣,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이 있었고 가림군의 속현으로는 마산현(馬山縣,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과 대산현(大山縣, 홍산면)이 있었다.[12] 신라 경덕왕의 전국 지명 한화정책 때 사비군은 부여군(扶餘郡)으로, 가림군은 가림군(嘉林郡)[13]으로 개칭됐고 그 아래로 진악산현은 석산현(石山縣)으로, 열기현은 열성현(悅城縣)으로, 마산현은 그대로, 대산현은 한산현(翰山縣)이 된다.
3.2. 후삼국시대 이후
후삼국시대 때는 후백제의 영역이었고, 후백제가 일리천 전투의 패배로 망할 때 고려의 영역이 되었다.고려 시대 때 감무가 설치되었고 조선 시대 때는 부여현으로 재편되는 등 '부여'란 이름을 간직해왔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부군면 통폐합에 따라 석성군 일부, 홍산군, 임천군을 통합하여 현재의 부여군 영역이 되었다. 1960년 부여면이 부여읍으로 승격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9년에, 일본이 '내선일체' 프로파간다를 퍼뜨리는 일환으로 부여 부소산 일대(지금의 삼충사 위치)에 부여신궁을 건축하고자 공사를 시작하였다. 진구 황후를 비롯하여 백제와 관계 있는 일본의 옛 천황들의 신령 4위를 모시고자 하였다.
그러나 건물을 완공되기 전에 일본이 패전하고 우리나라가 광복하자, 만들다 만 부여신궁 건물을 부여청년동맹원들이 파괴하였다. 조선총독부가 부여신궁을 세우는데 너무 시골이라 공사가 지지부진하자 아예 부여를 신도(神都)라 칭하며 대대적으로 도시화하려고 하였다.[14] 이 때문에 부여 내의 시가지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는데 그 영향이 지금도 남아있다.[15] 몇해 전 충남도청 이전에 든 비용이 당시 돈으로 16만 원이었는데, 부여신궁의 총 공사비는 24만 원이었다. 더군다나 히로히토 천황이 직접 공사 계획을 발표했다('충청남도 인터넷 신문' 인용). 참조 영상
당시 신궁에 모시려던 이가 임나일본부설에도 나오는 진구 황후 등이었던 점과 부여가 고대 일본과 관계가 깊은 옛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란 점 등을 드는 얘기가 있다. 부여신궁을 개발하면서 이 일대의 도로나 도시 정비 계획까지 잡혀있었으니 이때 개발이 진척되었더라면 금세 '부여시'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바 료타로의 '한나라(한국) 기행'에서, '일제가 망한 건 좋은데, 부여 일대 개발 때까지는 버텼어야 했다.'고 주장하는 한국인의 인터뷰가 소개된다.[16] 실제로 현재 부여군은 발전 상태에 비해서 읍내의 도로 정비가 잘 된 편이다. 그러나 만약 일제로 인해 부여가 개발되었다면 지금까지도 일본 극우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며 프로파간다로 써먹었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또한 서울의 풍납토성처럼 사비시기의 백제의 유적을 발굴하는 일에 있어 지금 이상의 애로사항이 꽃필 것은 확정이다.
1960년대~ 1970년대까지 금강 내륙수운이 원활히 돌아갈 때 인근의 강경과 더불어 상당한 발전을 구가하였다. 하지만 부여에는 꽤 오랫동안 철도는 물론이거니와 고속도로도 없었던 데다, 1960년대~ 1990년대에 이루어진 경제 개발 정책으로 인해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가 통하는 충청 내륙 지역들과 달리 부여군을 비롯한 충남 서부 지역들은 인구 유출을 겪게 되었으며, 1990년 금강하굿둑의 완공으로 금강 내륙수운이 완전히 정지됨에 따라 부여의 발전 역시 정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군의 인구도 계속하여 감소하는 추세다.
그래도 아직 부여읍이 인구 2만 선은 유지했고[17], 규암면도 인구 1만이 넘고 코아루나 휴엔하임 등이 지어질 정도[18]이므로, 군 치고는 그래도 아직 심각하게 몰락하지는 않았다.
==# 인구 #==
부여군 인구 추이 (1962년~현재) |
1962년 186,342명
|
1963년 191,871명
|
1964년(정점) 195,843명
|
1965년 195,733명
|
1966년 195,111명
|
1967년 192,209명
|
1968년 188,999명
|
1969년 185,749명
|
1970년 174,984명
|
1971년 174,576명
|
1972년 175,502명
|
1973년 178,944명
|
1974년 177,994명
|
1975년 174,132명
|
1976년 171,456명
|
1977년 167,558명
|
1978년 163,481명
|
1979년 159,916명
|
1980년 153,817명
|
1981년 153,483명
|
1982년 152,036명
|
1983년 145,903명
|
1984년 143,212명
|
1985년 134,614명
|
1986년 130,766명
|
1987년 128,240명
|
1988년 123,567명
|
1989년 120,782명
|
1990년 116,888명
|
1991년 117,095명
|
1992년 112,974명
|
1993년 109,767명
|
1994년 106,302명
|
1995년 103,605명
|
1996년 100,869명
|
1997년 98,290명
|
1998년 97,183명
|
1999년 95,213명
|
2000년 92,667명
|
2001년 90,587명
|
2002년 88,275명
|
2003년 85,682명
|
2004년 83,673명
|
2005년 81,430명
|
2006년 80,115명
|
2007년 78,488명
|
2008년 77,400명
|
2009년 76,295명
|
2010년 75,029명
|
2011년 74,004명
|
2012년 73,259명
|
2013년 72,547명
|
2014년 71,754명
|
2015년 71,143명
|
2016년 70,187명
|
2017년 69,086명
|
2018년 69,254명
|
2019년 67,979명
|
2020년 66,472명
|
2021년 63,774명
|
2022년 62,343명
|
2023년 61,046명
|
2024년 10월 59,727명
|
인구는 현재 행정구역이 아닌 해당 연도 행정구역 기준, 그래프 최대 값은 20만 명 |
읍면별 인구 통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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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읍 18,132명
|
규암면 11,500명
|
|
은산면 3,502명
|
|
세도면 2,902명
|
|
석성면 2,658명
|
|
임천면 2,628명
|
|
홍산면 2,592명
|
|
장암면 2,490명
|
|
구룡면 2,225명
|
|
외산면 2,203명
|
|
초촌면 1,957명
|
|
남면 1,706명
|
|
양화면 1,573명
|
|
내산면 1,466명
|
|
옥산면 1,344명
|
|
충화면 1,070명
|
|
2024년 8월 기준 행정안전부 주민등록인구통계, 그래프 최대 값은 2만 명 |
부여군의 인구는 광복 이후 전체적으로 증가해오다가 1964년 195,843명을 기록하며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이후 인구가 정체되다가 1970년 금감하여 18만 명 선이 깨졌고, 이후 1971년에서 1973년까지 잠깐 증가한 것을 빼고 일부 연도(1991년, 2018년)를 제외하면 계속해서 감소해왔다.[19] 이후 2007년 8만명 선이 무너지고 감소폭이 더뎌지긴 했으나 계속해서 감소해왔고, 2017년 7만명 선이 붕괴된 이후 7년여만에 2024년 8월 부여군 인구 6만명 선이 무너졌다.
===# 읍면별 인구[20] #===
부여읍 인구 추이 (1966년~현재) |
1960년 1월 1일 부여군 부여면 → 부여읍 승격 |
1966년 24,831명
|
1970년 25,627명
|
1973년 7월 1일 석성면 현북리 → 부여읍 편입 |
1975년 31,198명
|
1980년 31,263명
|
1985년 31,303명
|
1990년 30,872명
|
1995년 30,303명
|
2000년 29,199명
|
2005년 26,393명
|
2010년 24,603명
|
2015년 23,740명
|
2020년 20,330명
|
2024년 8월 18,132명
|
인구는 현재 행정구역이 아닌 해당 연도 행정구역 기준, 그래프 최대 값은 3.25만 명
|
규암면 인구 추이 (1966년~현재) |
1966년 22,200명
|
1970년 19,663명
|
1975년 19,063명
|
1980년 16,880명
|
1985년 14,733명
|
1990년 13,151명
|
1995년 11,591명
|
2000년 10,421명
|
2005년 11,139명
|
2010년 10,776명
|
2015년 10,387명
|
2020년 12,027명
|
2024년 8월 11,500명
|
인구는 현재 행정구역이 아닌 해당 연도 행정구역 기준, 그래프 최대 값은 2.25만 명
|
은산면 인구 추이 (1966년~현재) |
1966년 16,019명
|
1970년 14,111명
|
1975년 13,361명
|
1980년 11,357명
|
1985년 9,430명
|
1990년 7,519명
|
1995년 6,630명
|
2000년 5,767명
|
2005년 4,745명
|
2010년 4,488명
|
2015년 4,182명
|
2020년 3,780명
|
2024년 8월 3,502명
|
인구는 현재 행정구역이 아닌 해당 연도 행정구역 기준, 그래프 최대 값은 1.75만 명
|
외산면 인구 추이 (1966년~현재) |
1966년 8,200명
|
1970년 7,283명
|
1975년 7,658명
|
1980년 7,387명
|
1985년 6,532명
|
1990년 5,350명
|
1995년 4,548명
|
2000년 3,829명
|
2005년 3,217명
|
2010년 2,834명
|
2015년 2,654명
|
2020년 2,382명
|
2024년 8월 2,203명
|
인구는 현재 행정구역이 아닌 해당 연도 행정구역 기준, 그래프 최대 값은 8천 명
|
내산면 인구 추이 (1966년~현재) |
1966년 7,186명
|
1970년 6,279명
|
1975년 6,008명
|
1980년 4,960명
|
1985년 4,126명
|
1990년 3,288명
|
1995년 2,869명
|
2000년 2,456명
|
2005년 2,067명
|
2010년 1,860명
|
2015년 1,759명
|
2020년 1,555명
|
2024년 8월 1,466명
|
인구는 현재 행정구역이 아닌 해당 연도 행정구역 기준, 그래프 최대 값은 7천 명
|
구룡면 인구 추이 (1966년~현재) |
1966년 10,935명
|
1970년 8,834명
|
1975년 8,461명
|
1980년 7,181명
|
1985년 6,194명
|
1990년 5,149명
|
1995년 4,432명
|
2000년 3,850명
|
2005년 3,061명
|
2010년 2,735명
|
2015년 2,626명
|
2020년 2,378명
|
2024년 8월 2,225명
|
인구는 현재 행정구역이 아닌 해당 연도 행정구역 기준, 그래프 최대 값은 1만 명
|
홍산면 인구 추이 (1966년~현재) |
1966년 11,283명
|
1970년 9,844명
|
1975년 9,875명
|
1980년 8,590명
|
1985년 7,337명
|
1990년 6,309명
|
1995년 5,301명
|
2000년 4,651명
|
2005년 3,804명
|
2010년 3,501명
|
2015년 3,230명
|
2020년 2,901명
|
2024년 8월 2,592명
|
인구는 현재 행정구역이 아닌 해당 연도 행정구역 기준, 그래프 최대 값은 1.25만 명
|
옥산면 인구 추이 (1966년~현재) |
1966년 7,615명
|
1970년 6,422명
|
1975년 5,960명
|
1980년 4,949명
|
1985년 3,993명
|
1990년 3,113명
|
1995년 2,669명
|
2000년 2,152명
|
2005년 1,765명
|
2010년 1,639명
|
2015년 1,512명
|
2020년 1,427명
|
2024년 8월 1,344명
|
인구는 현재 행정구역이 아닌 해당 연도 행정구역 기준, 그래프 최대 값은 8천 명
|
남면 인구 추이 (1966년~현재) |
1966년 9,982명
|
1970년 8,966명
|
1975년 8,168명
|
1980년 6,660명
|
1985년 5,515명
|
1990년 4,612명
|
1995년 3,948명
|
2000년 3,157명
|
2005년 2,460명
|
2010년 2,207명
|
2015년 2,102명
|
2020년 1,853명
|
2024년 8월 1,706명
|
인구는 현재 행정구역이 아닌 해당 연도 행정구역 기준, 그래프 최대 값은 1만 명
|
충화면 인구 추이 (1966년~현재) |
1966년 7,344명
|
1970년 6,127명
|
1975년 5,726명
|
1980년 4,609명
|
1985년 3,915명
|
1990년 2,768명
|
1995년 2,295명
|
2000년 1,862명
|
2005년 1,547명
|
2010년 1,381명
|
2015년 1,241명
|
2020년 1,138명
|
2024년 8월 1,070명
|
인구는 현재 행정구역이 아닌 해당 연도 행정구역 기준, 그래프 최대 값은 7천 명
|
양화면 인구 추이 (1966년~현재) |
1966년 10,084명
|
1970년 9,169명
|
1975년 8,553명
|
1980년 6,792명
|
1985년 5,571명
|
1990년 4,458명
|
1995년 3,636명
|
2000년 2,973명
|
2005년 2,390명
|
2010년 2,111명
|
2015년 1,913명
|
2020년 1,688명
|
2024년 8월 1,573명
|
인구는 현재 행정구역이 아닌 해당 연도 행정구역 기준, 그래프 최대 값은 1만 명
|
임천면 인구 추이 (1966년~현재) |
1966년 14,115명
|
1970년 12,527명
|
1975년 11,814명
|
1980년 10,011명
|
1985년 8,198명
|
1990년 7,389명
|
1995년 5,569명
|
2000년 4,670명
|
2005년 3,876명
|
2010년 3,433명
|
2015년 3,195명
|
2020년 2,899명
|
2024년 8월 2,628명
|
인구는 현재 행정구역이 아닌 해당 연도 행정구역 기준, 그래프 최대 값은 1.5만 명
|
장암면 인구 추이 (1966년~현재) |
1966년 13,210명
|
1970년 11,678명
|
1973년 7월 1일 장암면 사산리 → 세도면 편입 |
1975년 10,477명
|
1980년 8,479명
|
1985년 7,315명
|
1990년 5,847명
|
1995년 4,929명
|
2000년 4,214명
|
2005년 3,576명
|
2010년 3,192명
|
2015년 3,046명
|
2020년 2,763명
|
2024년 8월 2,490명
|
인구는 현재 행정구역이 아닌 해당 연도 행정구역 기준, 그래프 최대 값은 1.25만 명
|
세도면 인구 추이 (1966년~현재) |
1966년 13,176명
|
1970년 11,671명
|
1973년 7월 1일 장암면 사산리 → 세도면 편입 |
1975년 11,821명
|
1980년 9,876명
|
1985년 8,304명
|
1990년 7,034명
|
1995년 6,214명
|
2000년 5,390명
|
2005년 4,504명
|
2010년 4,015명
|
2015년 3,701명
|
2020년 3,174명
|
2024년 8월 2,902명
|
인구는 현재 행정구역이 아닌 해당 연도 행정구역 기준, 그래프 최대 값은 1.25만 명
|
석성면 인구 추이 (1966년~현재) |
1966년 9,686명
|
1970년 8,817명
|
1973년 7월 1일 석성면 현북리 → 부여읍 편입 |
1975년 8,149명
|
1980년 7,753명
|
1985년 6,158명
|
1990년 5,223명
|
1995년 4,741명
|
2000년 4,503명
|
2005년 3,907명
|
2010년 3,550명
|
2015년 3,368명
|
2020년 2,923명
|
2024년 8월 2,658명
|
인구는 현재 행정구역이 아닌 해당 연도 행정구역 기준, 그래프 최대 값은 1만 명
|
초촌면 인구 추이 (1966년~현재) |
1966년 9,106명
|
1970년 8,042명
|
1975년 7,896명
|
1980년 7,022명
|
1985년 6,012명
|
1990년 4,826명
|
1995년 3,841명
|
2000년 3,576명
|
2005년 2,979명
|
2010년 2,704명
|
2015년 2,487명
|
2020년 2,136명
|
2024년 8월 1,957명
|
인구는 현재 행정구역이 아닌 해당 연도 행정구역 기준, 그래프 최대 값은 9천 명
|
4. 교통
자세한 내용은 부여군/교통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부여군 농어촌버스 문서 참고하십시오.
||<tablebordercolor=#008000><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91919>
부여군의 교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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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상권
2000년대 초에 들어서야 롯데리아가 들어올 만큼 열악한 곳이었으나 최근 들어서 다양한 프렌차이즈들이 많이 입점해있다.카페가 지역 규모에 비해 정말 많이 입점해있다.[21] 전통도시답게 한옥 스타일로 지어졌거나 한옥을 콘셉트으로 하는 커피숍도 많이 있다.
영화관은 전통시장 쪽에 위치하고 있다. 버스터미널과 전통시장 인근에 위치한 금성시네마는 접근성이 좋은 편이다. 지하주차장이 있으며, 2관까지 있고 1층은 은행이었이다.[22] 술집 같은 경우는 딱히 밀집지역 같은 게 없다. 대부분이 동네 술집이다. 술자리 게임 같은 거 하기도 힘들고, 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음식점 같은 경우는 의외로 괜찮은 편이다. 처음부터 관광도시여서인지 관광객을 타깃으로 한 몇몇 유명한 음식점들이 포진해 있다. 부소산이나 구드래공원 주변에 밀집되어 있는 관광지 식당은 말 그대로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이다 보니 부실한 식사를 하게 될 확률이 높다.
2013년 9월 8일 규암면에 롯데아울렛 부여점이 새로 생겼다.[23] 롯데아울렛을 유치하기 위해 부지 땅값을 무료로 해줬다는 카더라가 있다. 꽤 많은 브랜드가 입점하였다. 이제 유명 브랜드를 사러 타지로 나가지 않게 된 일반 시민들은 환영했고, 부여읍 내에서 장사를 하던 사람들은 반대 운동도 벌였었지만 오픈 10년째인 현재도 매우 성업 중이다.[24]
5.1. 금융
부여군에 위치한 금융기관 [괄호] | |||
제1금융권 [괄호] | |||
국가기관 | |||
부여우체국 (16) | |||
특수은행 | |||
농협은행(중앙회) (2) | |||
시중은행 | |||
하나은행 (1) | |||
제2금융권(상호금융) [괄호] | |||
농업협동조합 | |||
부여농협 (4) | 동부여농협 (3) | 서부여농협 (3) | 장암농협 (1) |
세도농협 (3) | 남부여농협 (2) | 구룡농협 (3) | 대전충남우유농협 (1) |
부여축산농협 (2) | 백제금산인삼농협 (1) | ||
새마을금고 | |||
부여새마을금고 (4) | 금강새마을금고 (1) | ||
신용협동조합 | |||
부여신용협동조합 (1) | 참우리신용협동조합(2) | 새마을홍산신용협동조합(1) | |
산림조합 | |||
부여군산림조합 (1) |
부여군 유일한 국민은행 부여지점이 2022년 7월 폐점하게 된다. #
6. 관광
자세한 내용은 부여군/관광 문서 참고하십시오.6.1. 특산물
대부분 농작물이다. 이들 가운데, 부여8미라는 것이 있다.- 수박 - 함안의 브랜드에 밀리지만, 부여에서 생산량이 상당하다. 꽤나 오래전에 수박축제라는 행사가 존재했다.
- 멜론 - 부여생산량이 전국 생산량의 30% 정도라 카더라. 과거 설빙에서 멜론빙수가 흥했을 때는 지역에 따라 가게 구석에 부여멜론 박스가 쌓여 있었을 정도.
- 방울토마토 - 세도면이 유명하다
- 오이
- 양송이버섯 - 전국 생산량의 45%를 차지할 정도라고 한다.
- 밤 - 전국생산량의 12%를 차지한다고 한다. 하지만 윗동네 공주에 묻혔다. 밭이 넓은 건 이쪽.
- 딸기 - 옆동네 논산에 묻혀서 그렇지 재배는 한다.
- 표고버섯 - 전국 생산량의 13%를 차지한다고 한다.
모두 굿뜨래 브랜드마크를 달고 팔리며, 굿뜨래는 국내 농촌 브랜드화의 성공 사례로 자주 언급될 만큼 성과가 좋은 편이다.
7. 생활문화
부여군을 본관으로 한 성씨는 임천 조씨, 부여 서씨, 홍산 순씨 등이 있다.7.1.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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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4곳, 중학교 11곳, 고등학교 인문계2곳 실업계 2곳 마이스터 1곳, 대학교 1곳이있다. 초등학교는 부여초, 백제초, 규암초를 제외하고는 1학년 1학급이다.[28] 고등학교는 부여고와 부여여고를 제외하고 남녀공학이다. 마이스터고등학교인 한국식품마이스터고등학교가 있다.
대학교는 4년제 국립특수대학인 한국전통문화대학교가 있다.
7.2. 음식
전북특별자치도와 가까운 탓에 전라도와 충청도가 혼합해 있는 듯한 음식들이 대부분. 대표적으로는 구드래 돌쌈밥이라는 곳이 있는데 구드래에 위치하고 20년이 넘게 성업 중이다. 돌솥밥에 여러가지 쌈들이 같이 나오는데 반찬이 많지만 대부분 구색 갖추기 수준.읍내 전통시장에 시골통닭 같은 경우, 과거부터 치킨이 아닌 통닭과 삼계탕을 팔던 곳이었는데, 백종원의 3대 천왕에 나온 이후로 부여를 방문하게 되면 오게 되는 맛집으로 유명해졌다.
7.3. 의료기관
부여 경찰서옆에 부여 유일한 지역응급의료기관인 건양대학교부여병원(74병상)이 있긴 한데, 종합병원은 아니고 일반 병원급이다. 응급실을 24시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요양원도 뒤편에 위치해 있다.[29]7.4. 기타
지역 특성상 바로 남쪽에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와 붙어 있어서 그런지 익산 쪽에서 유입되어 오던 사람들이 있다. 먼 과거 부여와 익산이 백제 중후기의 핵심 지역인 데다, 가까운 과거 경제 발전기에는 충남에서 가장 발전한 동네였던 강경과 맞붙어 있어서 전북에서 사람들이 많이 유입되어있다. 실제로도 충청도 사투리에 약간의 전북 사투리가 섞여서, 구분하기 어려운 사투리를 쓰는 경우가 자주 보인다. 그러나 전라도 특유의 사투리인 '거시기'의 사용은 드물고 '시방'을 자주 쓴다. 이는 논산 및 서천 등지도 똑같다. (논산시 반절 정도는 원래 전라북도에 속해있다가 충청남도로 부속되었다.)1967년에는 농민 올림픽이라는 행사가 이 곳에서 열린 적이 있었다. 올림픽이라는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그냥 충남 지역의 16개 면에서 온 농민들이 선수로 참가해 심플하게 하루 만에 끝낸 행사였다. 농촌의 번영을 위한 취지로 열렸으며 종목으로는 손수레 빨리 끌기, 쟁기질 빨리 하기, 감자 빨리 까기, 경운기 빨리 몰기 등 농촌 생활을 스포츠화한 종목들이 있었다. 우승 상품으로는 비료가 주어졌으며 대회가 폐막된 후에는 참가상격으로 술과 음식을 나눠주며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농민 올림픽은 1회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대한뉴스 중 농민 올림픽
축구팀은 부여 FC가 K3리그 2016 시즌부터 2018 시즌 참가했었다.
8. 정치
자세한 내용은 부여군/정치 문서 참고하십시오.9. 하위 행정구역
자세한 내용은 부여군/행정 문서 참고하십시오.10. 여담
한창 행정구역 통합 시도가 잦았을 때 부여군에서 공주시에 '백제시'로 통합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무산된 적이 있다. 여러모로 공주 입장에선 손해인 데다가, 부여에서 공주시는 의외로 멀다.KBS 2TV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의 주요 촬영지 중 한 곳이 부여였다. 그 중에서도 백제문화단지.
2023년에 공개된 쿠팡플레이 오리지널 드라마 " 소년시대"는 1989년의 부여군을 배경으로 하고있다.[30]
일부 몰지각한 지역 주민들이[31] 마을 통행료를 요구하며 장의차를 막는 기행을 보인 사건이 있었다. # 이 지역 뿐만 아니라 부여군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골함도 못묻게 막고 돈을 요구하는 일이 있어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다. # 한편 이 J리의 당시 이장은 2014년부터 2015년까지 태양광발전소 부지 진입 도로를 틀어막고 최대 1억의 뒷돈을 요구하여, 해당 업자가 결국 사업을 접은 일이 뒤늦게 밝혀졌다. 기사 2017년 10월 J리의 이장이 물러나고 새 이장이 선출되었는데, 새 이장은 전 이장단이 불법으로 받은 통행료 내역을 공개하라며 대자보를 붙인 귀농 부부를 J리에서 제명한 뒤 마을회관 등의 출입금지 조치를 하는 이른바 작은 사회의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기사 장의차 통행료 요구 사건 문서로.
2000년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이 적용되기 전에는 영문 표기를 PUYO로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영문으로 이름이 같은 뿌요뿌요를 만든 컴파일의 사장 니이타니 마사미츠가 이를 보고 한국 방문 때 부여를 직접 들른 적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복성 중 하나인 남궁씨의 최대 집성촌이 있다. 부여군 부여읍 석목리 위치.
바람의나라: 연 광고에서 고구려 군대와 부여 군대가 서로를 놀리는 플롯의 광고를 냈는데, 부여의 군대가 '부여군'으로 표현되면서 이 부여군을 연상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고 '부여군청 반응이 궁금하다' '저도 부여 사람인데 군수님이 이거 봤으면 좋겠다' 이런 댓글들이 나왔다. 심지어 자기가 부여에서 태어났는데 기분 나쁘다며 신고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1995년 간첩이 침투하여 군경과 교전을 벌인 적이 있다.
과거 내비게이션이 대중화되기 전 종이 지도책이 성행했을 때 국내 시들의 시가지 지역을 확대한 지도를 모아둔 코너가 있었는데, 몇몇 지도의 해당 코너에 군 지역임에도 유일하게 부여읍내가 수록된 경우가 있었다. 관광 도시로 전국적으로 유명하다는 점을 반영한 듯하다.
11. 출신 인물
- 강성모: 독립운동가
- 강신육
- 구인회 전 천국복음전도회 회장
- 김기남(1964년 4월)
- 김기서
- 김덕주
- 김무환
- 김부회
- 김성기
- 김성진: 일제강점기~ 미군정기의 유명한 외과의사, 정치인
- 김연수
- 김영미(교수)
- 김윤경(1949)
- 김익진
- 김종락: 前 대한야구협회장, 국회의원. 김종필의 셋째 형.
- 김종익: 김종필의 큰형.
- 김종필: 제11·31대 국무총리
- 김준호: 전 우정사업본부장
- 김증한
- 김지용
- 김진환
- 김철수(1906)
- 김택수(1944)
- 김헌동: 서울주택도시공사 사장
- 나승일
- 남궁영
- 남궁현
- 노승호
- 류철희
- 민병태
- 박덕수: 인천광역시 행정부시장
- 박병구
- 박상우(1971)
- 박선희
- 박영순: 제21대 국회의원[32]
- 박용순(1957)
- 박성순(1949)
- 박시후
- 박정현(1964년 6월): 現 부여군수
- 박종근(1957)
- 박진규(1966): 산업통상자원부 차관
- 박한기
- 상병헌
- 서정식(1964)
- 성동규
- 송복섭
- 신동수(기업인)
- 신동엽
- 신재경
- 신현환
- 심상기: 서울미디어그룹( 서울문화사) 창업주
- 왈로: 디핀칼즈 레코즈 소속 래퍼
- 유덕준
- 유병기
- 유병돈
- 유상근
- 유재성
- 유진영
- 유지나: 트로트 가수
- 유찬종
- 윤석전: 연세중앙교회 담임목사
- 윤성한
- 윤용근(1969)
- 윤택영(1964)
- 윤희석: 배우
- 윤성훈: 메가스터디 소속 사회탐구 강사
- 이석기
- 이승미
- 이영애
- 이오숙
- 이용우: 前 부여군수
- 이웅범
- 이원범
- 이원복(1948)
- 이원종
- 이재경
- 이종순
- 이주수
- 이진삼
- 이한구(1870년 10월)
- 이호철
- 임두빈
- 임병직
- 임옥상
- 임정모
- 임창빈
- 임철호
- 임현택
- 임화빈
- 장성용
- 정국교
- 정두홍
- 정상철: 前 충남대학교 총장, 정치인
- 정한모
- 조길연
- 조남수
- 조대현
- 조수연
- 조의연
- 삼부토건 가문
- 조종국
- 조치연
- 지용호
- 최갑석
- 최고병
- 태민영: 배우. 본명 태명언
- 한광석
- 함영주
- 허익범
- 홍표근
- 황우석
- 최치환(1959): 작곡가
- 윤여산(1976): 서울전문학교 전 교수, 제이원레저에듀 대표.
[1]
2024년 10월 기준
행정안전부
주민등록인구통계
[2]
2024년 10월 기준.
[3]
부여군 가선거구 (부여읍, 규암면): 서정호, 박순화
부여군 나선거구 (은산면, 외산면, 내산면, 구룡면, 홍산면, 옥산면, 남면, 충화면): 김영춘, 장성용
부여군 다선거구 (양화면, 임천면, 장암면, 세도면, 석성면, 초촌면): 조덕연, 조재범
부여군 비례대표: 장소미 [4] 부여군 가선거구 (부여읍, 규암면): 노승호, 민병희
부여군 나선거구 (은산면, 외산면, 내산면, 구룡면, 홍산면, 옥산면, 남면, 충화면): 김기일
부여군 비례대표: 윤선예 [5] 부여군 제2선거구 (은산면, 외산면, 내산면, 구룡면, 홍산면, 옥산면, 남면, 충화면, 양화면, 임천면, 장암면, 세도면, 석성면, 초촌면): 조길연 (3선) [6] 부여군 제1선거구 (부여읍, 규암면): 김기서 (재선) [7] 수도를 의미하는 순우리말인 서울의 어원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서울의 보다 직접적인 어원은 신라의 수도 서라벌이긴 하지만, 소부리도 동계어였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8] 백제 때의 웅진 [9] 이용우 군수 재임시절이었다. [10] 이러한 점은 고구려 마지막 수도인 평양성과 매우 흡사하다. 평양 역시 313년 미천왕의 한사군 정복 이후 고구려령으로 편입되었고 장수왕 시기 이전부터 제2의 수도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 고국원왕이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한 장소도 평양이고 광개토대왕대에 이미 평양 지역에 9개의 사찰을 지었다는 기사나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평양에서 출발했다는 기사로 미루어 볼 때 평양 역시 427년 장수왕의 천도 이전부터 완성되어있던 도시라고 볼 수 있겠다. [11] 이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시도 마찬가지이다. [12] 남북국시대의 행정구역은 보통 삼국시대의 행정구역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 부여 지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던 걸로 보인다. [13] 한자만 다르다. [14] 일제강점기 동안 부여군의 이름은 한국의 다른 시군과 마찬가지로 한자 그대로 음독하였고 후요(扶餘, フヨ)군이라 발음했었다. 다만 남을 여(餘)는 원래 일본의 통용규범한자표에 포함되지 않는 글자라서 형성자 余의 음을 차용한 것. [15] 부여읍 초입 로터리부터 군청 앞까지의 도로가 당시 일제가 닦은 신작로다. [16] 물론 친일파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만큼 당시 부여가 개발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나온 대화다. [17] 2021년 3월에 딱 3명 차이로 2만 선이 붕괴했다. [18] 사실 부여읍이 옛 백제의 수도이기 때문에 대규모 아파트를 짓기 엄청 부담스럽다. 곳곳이 국가지정문화재+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 허가받는데도 시일이 걸리고, 공사하다가 문화재가 발굴될 수 있으므로... [19] 1968년 19만명, 1970년 18만명, 1977년 17만명, 1979년 16만명, 1983년 15만명, 1985년 14만명, 1987년 13만명, 1990년 12만명, 1993년 11만명, 1997년 10만명, 2002년 9만명 선이 붕괴되었다. [20] 위의 부여군 전체 인구와 달리 부여군 통계연보 및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상 조사를 인용하였기에 부여군 전체 인구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으므로 주의 바람. [21] 특히 궁남지 일대에 정말 많이 있다. [22] 은행이 2022년에 철수한 이후 실내풋살장 간판을 달고는 있지만 운영은 안 하고 있다 [23] 그와 동시에 롯데리조트와 롯데스카이힐CC도 같이 생겼다. [24] 아울렛에 대부분 옷을 사러 가기에 그나마 지역상권에 문제가 많이가지는 않는다고 한다. [괄호] 안의 숫자는 지점수를 뜻함. [괄호] 안의 숫자는 지점수를 뜻함. [괄호] 안의 숫자는 지점수를 뜻함. [28] 이 세 학교를 제외하곤 학생수가 많이 적다. [29] 이 요양원은 건양대에서 운영하고 있다. [30] 단 촬영은 부여군에서 하지않았고 경기도 양평군이나 강원도 춘천시에서 진행되었다. [31] 옥산면 J리라고 알려졌는데 옥산면에 J로 시작하는 장소는 중양리 말고는 없다. [32] 지역구: 대전광역시 대덕구
부여군 나선거구 (은산면, 외산면, 내산면, 구룡면, 홍산면, 옥산면, 남면, 충화면): 김영춘, 장성용
부여군 다선거구 (양화면, 임천면, 장암면, 세도면, 석성면, 초촌면): 조덕연, 조재범
부여군 비례대표: 장소미 [4] 부여군 가선거구 (부여읍, 규암면): 노승호, 민병희
부여군 나선거구 (은산면, 외산면, 내산면, 구룡면, 홍산면, 옥산면, 남면, 충화면): 김기일
부여군 비례대표: 윤선예 [5] 부여군 제2선거구 (은산면, 외산면, 내산면, 구룡면, 홍산면, 옥산면, 남면, 충화면, 양화면, 임천면, 장암면, 세도면, 석성면, 초촌면): 조길연 (3선) [6] 부여군 제1선거구 (부여읍, 규암면): 김기서 (재선) [7] 수도를 의미하는 순우리말인 서울의 어원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서울의 보다 직접적인 어원은 신라의 수도 서라벌이긴 하지만, 소부리도 동계어였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8] 백제 때의 웅진 [9] 이용우 군수 재임시절이었다. [10] 이러한 점은 고구려 마지막 수도인 평양성과 매우 흡사하다. 평양 역시 313년 미천왕의 한사군 정복 이후 고구려령으로 편입되었고 장수왕 시기 이전부터 제2의 수도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 고국원왕이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한 장소도 평양이고 광개토대왕대에 이미 평양 지역에 9개의 사찰을 지었다는 기사나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평양에서 출발했다는 기사로 미루어 볼 때 평양 역시 427년 장수왕의 천도 이전부터 완성되어있던 도시라고 볼 수 있겠다. [11] 이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시도 마찬가지이다. [12] 남북국시대의 행정구역은 보통 삼국시대의 행정구역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 부여 지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던 걸로 보인다. [13] 한자만 다르다. [14] 일제강점기 동안 부여군의 이름은 한국의 다른 시군과 마찬가지로 한자 그대로 음독하였고 후요(扶餘, フヨ)군이라 발음했었다. 다만 남을 여(餘)는 원래 일본의 통용규범한자표에 포함되지 않는 글자라서 형성자 余의 음을 차용한 것. [15] 부여읍 초입 로터리부터 군청 앞까지의 도로가 당시 일제가 닦은 신작로다. [16] 물론 친일파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만큼 당시 부여가 개발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나온 대화다. [17] 2021년 3월에 딱 3명 차이로 2만 선이 붕괴했다. [18] 사실 부여읍이 옛 백제의 수도이기 때문에 대규모 아파트를 짓기 엄청 부담스럽다. 곳곳이 국가지정문화재+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 허가받는데도 시일이 걸리고, 공사하다가 문화재가 발굴될 수 있으므로... [19] 1968년 19만명, 1970년 18만명, 1977년 17만명, 1979년 16만명, 1983년 15만명, 1985년 14만명, 1987년 13만명, 1990년 12만명, 1993년 11만명, 1997년 10만명, 2002년 9만명 선이 붕괴되었다. [20] 위의 부여군 전체 인구와 달리 부여군 통계연보 및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상 조사를 인용하였기에 부여군 전체 인구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으므로 주의 바람. [21] 특히 궁남지 일대에 정말 많이 있다. [22] 은행이 2022년에 철수한 이후 실내풋살장 간판을 달고는 있지만 운영은 안 하고 있다 [23] 그와 동시에 롯데리조트와 롯데스카이힐CC도 같이 생겼다. [24] 아울렛에 대부분 옷을 사러 가기에 그나마 지역상권에 문제가 많이가지는 않는다고 한다. [괄호] 안의 숫자는 지점수를 뜻함. [괄호] 안의 숫자는 지점수를 뜻함. [괄호] 안의 숫자는 지점수를 뜻함. [28] 이 세 학교를 제외하곤 학생수가 많이 적다. [29] 이 요양원은 건양대에서 운영하고 있다. [30] 단 촬영은 부여군에서 하지않았고 경기도 양평군이나 강원도 춘천시에서 진행되었다. [31] 옥산면 J리라고 알려졌는데 옥산면에 J로 시작하는 장소는 중양리 말고는 없다. [32] 지역구: 대전광역시 대덕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