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
1. 개요
웹소설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의 등장인물을 정리한 문서.2. 주인공 일가
경주 김씨계 가문인데, 샌프란시스코의 한자명칭인 구금산(舊金山)에서 일문을 이뤘다고 팬덤에서 '금산 김씨'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모두 오리지널 인물이다. 샌-프랑코(San-FranKo) 주식회사를 운영하며[1] 미래인인 김유진이 자신의 지식을 활용해 여러 분야에 진출하는 바람에 문어발식 재벌그룹의 형태다. 유진이 죽기 전 상속 문제도 있으니 유진의 후손들이 계속 경영하는 샌-프랑코 그룹과 유신의 후손이 경영하는 항공사 중심의 퍼시픽 그룹으로 개편했다. 유인의 후손들은 아시아 쪽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고. 이렇게 세 갈래로 찢어지긴 했지만 상호 협력 관계를 맺고 있어서 완전히 찢어진 것은 아니다. 유진 킴의 유훈에 따라 미국 내 소수민족들의 대표로 자리매김하였는지 세계 곳곳에 흩어져서 사는 가문 사람들이 유진 킴의 생일을 기념하는 유진 킴의 날에 모이는 행사를 소설 내에서는 속칭 쿠릴타이라고 할 정도. 그리고 정치가나 기업인 같은 거물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고 하니 세계에서 알아주는 명문 가문이 된 듯하다. 다만 어째서인지 유진 킴을 대상으로 한 음모론[2]을 역으로 이용해 관련상품을 적극적으로 팔아먹는 자낳괴 집안이 돼버렸다.-
김상준
김유진의 아버지. 1863년 ~ 1947년. 호는 죽헌(竹軒). 젊은 시절엔 동래(현재의 부산항 일대)에 갔다가 일본이 문호를 개방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보며 조선도 저렇게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한양으로 올라가서 눈으로 본 민씨 일가와 조정의 어처구니 없는 행태에 질려버리고, 개화파의 수장 김옥균과 만난 인연 때문에 해외도피 생활을 이어나가다가 김옥균의 연줄을 통해 미국으로 완전히 망명해버린다.
김상준의 가문은 경주 김씨의 분파 중 하나로[5] 예송논쟁의 여파로 중앙에서 지방으로 낙향한 양반가라고 언급되는데, 조선시대 동래의 토착 양반가는 무반이며 제대로 된 문벌이 아니었고 타 지역에서는 향리에 가까운 가문들이었기 때문에 독자들은 동래에 들를 정도로 가까운 동네면서 문벌이 형성되어 있던 김해 양반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6]
이런 과거 탓인지 조선 생활엔 학을 떼고 있으며 오랜 미국 생활로 단발에 양장으로 완벽하게 서구화된 모습을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유학자의 면모를 갖고 있다. 작중 행동과 주변 인물들의 말을 보면 김유진의 성격이나 행동은 단순히 그가 미래에서 온 회귀자여서가 아니라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안창호의 말에 의하면 츤데레스러운 성격으로, 대한인국민회가 월세조차 못낼 정도로 쪼들릴 때 항상 입으로는 조선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냐고 투덜대면서도 항상 쌈짓돈을 털어 도와줬다고 한다. 게다가 자식들의 담대함도 유전인 듯, 암살자에게 습격당했을 때에도 직접 지팡이 총으로 제압하는 모습이 나온다.
샌프란시스코 지진 당시 백인들이 조선인들에게 약탈을 벌이자 마적 두목 노릇을 한 적이 있다고 언급되는데, 독자들은 김상준의 70세 생일 파티에 뉴욕을 본거지로 한 금주법 시대 미국 마피아의 정점이었던 찰스 루치아노가 사업상 친하다며 직접 들른 것과[7] 금주법 시대 캘리포니아에서 중국계, 일본계를 비롯한 아시아계 커뮤니티를 김가의 산하에 넣고 흑백황 인종을 가리지 않고 영향력 아래에 포섭하는 과정에서 뒷세계 범죄조직들과의 유착이나 제압이 있었으리라 추정된다는 점 때문에 김상준이 캘리포니아 마피아 비슷한 일도 하던 걸로 보고 있다. 김상준의 팬덤 별명 중 하나가 대부, 갓파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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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영
김유진의 어머니. 한 성질하는 남편을 휘어잡는 강인한 여성. 김상준이 미국으로 건너갈 당시 배 안에서 처음 만난 생판 남이었지만 입국심사 당시 우연히 부부라고 거짓말한 것을 인연으로 정말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김유진의 독백으로 보면 교육받은 신여성인데 미국 와서 가정주부가 되어서, 남편이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남편을 휘어잡을 수 있는 것도 성격 덕도 있겠지만 남편인 상준이 져주는 부분이 없지 않은 듯.[스포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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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킴/김유진
본 작의 주인공이자 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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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마가렛 커티스 킴
김유진의 아내로 캔자스주 연방상원의원 찰스 커티스의 막내딸(3녀). 실제 역사에는 없는 작중 오리지널 인물이며[9] 만난 곳도 그렇고 이름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10] 유진과 동갑인 1893년생. 얌전해 보이는 외모지만 괄괄한 성격으로 유진을 그녀에게 완벽하게 잡혀 살게 만든 여장부이다.[11]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취미는 사냥으로, 윈체스터 소총을 사용한다. 자주 자식들 데리고 사냥 나가다 보니 조선시대 양반 출신인 김상준은 신여성인 아내에게 잡혀 삼에도 (며느리가 미국 명문가라 저지하지는 않았지만) 백정 같다면서 안 좋게 봤을 정도. 운전도 할 줄 알아서 밀크 아미 사건 때는 유진이 차고에 기념품 삼아 모셔둔 블랙 로터스[12]를 직접 운전해서 유진을 구출하러 달려 오기도 했다.
남편이 은근히 정계에 입문해서 유색 인종으로 꼭대기에 오르길 원하며, 여러 인권단체에도 활동하고 있다. 이 때문에 유진이 매카시즘 역풍을 처음 당겼을 당시 여러 시민단체와 보수 성향 여성단체를 설득해서 매카시즘에서 빠르게 이탈하게 만들기도 했다. 당대 상류층 남성들이 처자식에게 친절해도 바람 피우는 경우가 잦았던 반면, 유진은 평생 도로시만 바라보고 살아서 황색언론 기자들이 놀랄 정도였기 때문에 남편 하나는 잘 골랐다. 사교계에서 도로시가 이름 날린 건 아버지와 남편의 후광도 크지만 이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외모 괜찮고 돈 많고 전쟁영웅인 데다 여자에게 젠틀한 유진의 특성 때문에 1차대전 때부터 유진에게 여자 꼬이는 게 아니냐고 걱정하기도 했는데, 도로시와 앨리스가 견제를 잘 했는지 황색언론 기자조차 팔 게 없을 정도로 여자 문제를 차단하는데 성공했다.[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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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드와이트 킴/김현리
1916년 12월 11일생. 김유진과 도로시의 장남.[14] Caltech에 입학하고, 샌-프랑코의 비행기 개발 부서에서 P-51 머스탱 개발을 도왔다. 무려 유진과 다소 악연(?)이 있었던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의 삼녀 플로렌스 비벌리 킹[15]과 결혼한다. 어렸을 땐 아버지 판박이라고 할 정도로 장난기도 심하고 유명한 싸움꾼이었는데, 크면서 좀 허당스럽긴 해도 진지한 성격이 된다. 아버지에 대해선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다면서도, 부친의 희생과 노력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다.
가문을 잇기 위해서는 참전 경력이 불가피하다고 판단[16]하여 자진 입대하고, 최전선에 서기 위해서 장인의 도움으로 해군 항공대에 입대해 항모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하였고, 이후 정훈 분야에서도 열심히 일한다. 작중 과달카날 해전 이전에 이미 적기 5기 격추로 에이스에 등극해있었고, 과달카날 해전에서 확인된 것만 적기 추가 격추 1기, 그리고 로프톤 헨더슨 미 해병소령과 공동으로 일본 경항모 준요 격침의 전과를 올린다. 다만 운이 없는 편인지, 전과에 못지 않게 추락한 횟수 또한 많았다. (총 4회 추락)[17] 과달카날 전역에서는 조선계라는 특성을 이용해 조선인 출신 노무자 포로들을 관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거의 포로수용소장 비슷한 역할을 한다.
화려한 격추(당한) 경력과 그때마다 아버지가 아이스크림을 뿌린 것 때문에 별명이 다양하다. 처음에는 미스터 아이스크림이었다가, 나중에는 배럴 단위로 아이스크림을 배급한다며 미스터 배럴로 바뀌었고, 마지막에는 일본군이 점령한 외딴섬에 표류하여 몇달씩이나 고립되어 있다가 겨우 구출되고는 결국 비행을 금지당하면서 미스터 펭귄이나 에뮤로 바뀐다.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전역 후에는 동료 해군들과 훗날 현대에 들어서 전세계적 프랜차이즈로 성장하는 아이스크림 사업을 시작해서 크게 번창한다. 회사 마스코트는 미소 짓는 펭귄이라 한다. - {{{#!folding [스포일러]
유진 킴의 현손이자 헨리 킴의 증손. 헨리의 장남 '유진 킴 주니어'의 삼남의 외동아들이다. 대한민국 예비역 국군 대위로, 아버지가 미군에서 복무했다가 한국으로 넘어와서 말뚝을 박았기에 아들인 조윤도 한국인이 되었다. 어릴 때 헬기 추락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본인만 살아남았다. 무슨 우연인지 회귀 전과 마찬가지로 전역날에 레토나에 치일 뻔한 아이를 구하려다가 차에 치였다. 그리고 국군 수도병원 중환자실에서 3일 만에 의식을 차렸는데, 죽은 지 50년은 된 유진의 정신이 현손인 조윤의 몸에 그대로 정착했다.[18] 유진의 빙의 전 이름도 조윤이고 애 구하다 레토나에 치인 것까지 동일해서 유진은 자신이 겪은 70년이 일장춘몽인 줄 알았으나[19], 알고 보니 돌아오긴 돌아왔으되 자신이 바꾼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이걸 보고 유진, 아니 조윤은 히틀러가 남긴 마지막 편지에서 본 '당신의 헌신' 드립에 대해 오지게 제대로 보답받은 것 같다고 답하며 히틀러를 욕한다. 한미 양국에 걸친 명가의 직계 종손에 가까운 만큼 상당한 금수저로,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아 서울에 전생에선 꿈도 꿀 수 없던 넓은 집과 자가용 비행기와 자동차를 보유하고, 가진 현금과 주식까지 합치면 늙어 죽을 때까지 놀고 먹어도 될 지경이다. 권력 또한 무시무시해서 병실에 누워있을 때 포스타 견장을 단 조범석이 손수 과도로 깎아준 사과를 받아먹을 정도. 조윤 본인은 돈도 썩어 넘칠 만큼 많으니 전생에서 2차대전과 조선 독립과 신생 대한국의 기틀을 만드느라 개같이 구른 만큼 그냥 한량 생활을 하고 싶어 했지만 조실부모한 본인에 대한 집안의 과도한 관심으로 취직과 결혼 압력을 받는다. 오죽하면 그거 때문에 본인이 혹시라도 3회차를 하게 되었을 때를 대비해서 만들어놓은 비밀 금고를 털어서 도망가려고 하지만, 집안의 압력 때문에 결국 패튼 가문의 딸과 맞선을 보게 되면서 엔딩을 보게 된다. 그리고 맞선 보게 된 패튼 가문의 딸은 주인공 김유진의 아내 도로시의 환생임이 암시되었다. 첫 만남에서 헤어지려고 할 때 우산을 같이 쓰다가 담배를 물 때부터 기시감을 느끼더니 환생 전의 행동을 서로가 기억하고 있었다.
외전에 따르면 실제 주인공과 동일인물이었으나 주인공이 스스로 바꾼 미래에 따라 현재의 모습으로 인생이 바뀌게 된 것이라 한다. 가족들 사이에서는 말썽 꽤나 피운 망나니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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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킴
1921년 4월생. 김유진과 도로시의 장녀. 어머니에게는 주체적인 성격을, 아버지로부터는 두둑한 배짱과 매끄러운 혓바닥을 물려받았다. 같은 이유로 도박에도 강하다고. 오빠 헨리와 마찬가지로 가문을 잇기 위해서는 비록 여성이라도 참전경력이 필요하다 판단하고[20] 2차 대전 유럽전선에 적십자 봉사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유럽에 가며,[21][22] 이후 샌-프랑코 프랑스 지사를 맡아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다. 패튼과는 삼촌 조카 하는 사이라서 처칠의 망나니 아들이 성희롱해서 패튼이 두들겨패는 해프닝도 있었고(...)[23] 여자들 겁탈 운운하는 괴상한 연설을 때도 현장에 있어서 패튼이 당황하기도 했다. 전후 알베르트 괴링을 아버지 뜻에 따라 숨겨주기도 했다. 마음만 먹었으면 헐리우드에 갈 수 있을 정도의 미녀로 묘사되며, 부친이 전역하려 하는 장래성 있는 장교들을 잡아두기 위해 자주 소개 상대로 팔아먹었다(...)[24] 결국 미 육군에서 혜성과 같이 등장한 전쟁영웅 도경 킴과 결혼하였으며, 이후 법조계에 투신하여 변호사의 길을 걷는다. 작품 말미에서는 야근에 시달리며 샌프랑코 법무부서를 지휘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
제임스 킴
1926년생. 김유진과 도로시의 차남. 유진의 뺀질거리면서도 할 땐 하는 성격을 닮은 것으로 묘사된다. -
셜리 킴
1930년생. 김유진과 도로시의 차녀. 진보적인 성향의 모친과 언니와 달리 무난한 삶을 살기 원한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소속 야구선수와 결혼한다. 다만 주체적인 성격 자체는 다른 남매들과 비슷한 듯, 남편을 은근슬쩍 먼저 꼬셨다고 한다. 하지만 유진은 죽는 날까지 셜리의 남편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25] 남편 쪽이 인기가 좋아서 견제하느라 힘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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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킴/김유신
김유진의 동생이며 차남. 형이 군인으로서 직접 손대기 껄끄러운 각종 사업을 대신 떠맡은 것에서 시작해서, 금산 김씨 일가 3형제 중 가문의 '금력'을 상징하는 샌-프랑코 총수가 된다. 형이라는 새끼가 매번 내던지는 말 같지도 않은 아이디어에 시달리는 탓에 형과 만나면 좋은 소리가 오가는 대신 주먹이 오가고 총알밥을 먹일까 고민하는 훈훈한(...) 형제관계지만 그 아이디어를 어떻게든 성공적인 사업 아이템으로 바꾼 걸 보면 유신 킴이라는 인물 자체의 능력 또한 범상치 않은 수준이며, 마피아 수십명이 금고털러 오면 기관단총을 긁어대기도 하는등(당시 서부에서 왕왕 있던 일이다) 먹물은 아니다. 일에 관해서는 철두철미한 성격인지, 작중에서 종종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 '미국에 공산당이 들어설 경우 가장 먼저 매달릴 사람'으로 묘사된다. 슬하에 자녀는 다섯인데, 유신의 교육 방침이 굉장히 혹독했고 그 영향을 받은 성격이라고 한다. 때문에 조카인 유진의 자녀들조차 유신 삼촌과 그 가족들과는 일로 얽히는 것은 극구 피하려고 한다.[26] 전후 샌-프랑코의 군수 분야를 정리하고, 자신이 흥미를 갖는 분야를 떼어내 독자적인 그룹인 퍼시픽 그룹을 발족하는데 이는 독점법을 피하기 위함인 동시에 당연히 사후에 일어날 수 있는 승계 문제를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외전에 따르면 학교에서 쿼터백을 할 정도로 머리도 좋았지만,[27] 대학을 가려면 가족들 등골이 빠질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막내인 김유인이 대학을 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 본인은 돈을 버는 것을 선택했다고 한다. 나중에 자기 대신 사업체 운영할 능력이 되는 유일한이 샌프랑코에 합류하자 드디어 꿈에 그리던 대학에 가게 된다.
빙의되기 전 역사에서는 미국인이 되기를 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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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메 후미코
김유신의 아내이자 류큐계 미국인. 유신은 처음에 그녀가 일본계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신이 '일본계'와 결혼하려고 한다는 말을 들은 유진은 기함했지만 그녀가 류큐계임을 알고 동생한테 그거도 구별 못하냐고 신나게 갈궈댔다. 유진이 한 번 보자마자 왜 동생이 그런 선택을 하겠다고 난리를 쳤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미녀다. 상당히 병약한 것으로 묘사된다. 정확히는 류큐계 안에서도 아마미 계열로 류큐 주류와는 거리가 있다. -
에드워드 니시메 킴
김유신과 니시메 후미코의 장남. 헨리 킴, 앨리스 킴과는 사촌 형제사이가 된다.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오키나와에 가서 사업성 검토를 하는 장면으로 등장한다. 김가의 핏줄이 어디 가지 않는지, 별다른 자원도 없는 오키나와를 보고 농업이나 산업을 일으키기보다 동북아의 갑부들을 대상으로 한 카지노를 개발하여 관광지를 구성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
킨 신이치(김신일)
김유신의 증손자이자 에드워드 니시메 킴의 손자. 퍼시픽 재팬 미디어라는 회사의 전무이사이며 조범석 장군의 절친이다. 조범석과 함께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에 걸렸다고 알려진 김조윤의 보호자 노릇을 하는데, 그 보호자 노릇이라는 것이 당분간 유산으로 꿀이나 빨면서 백수로 살고 싶은 김조윤에게 하루라도 빨리 직장을 구해주고 혼처를 구해주는 것. 그래서 외교부 혹은 자신의 회사에서 일하는 것, 그리고 동발 장학금 공부하는 것 중 한 가지를 선택하도록 했다. 그리고 혼처로 선을 잡아줬는데 그게 하필 패튼 가의 딸이라서 무수히 많은 드립의 향연이 펼쳐졌다. 이 선과 관련된 이야기가 검머머 최종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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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킴/김유인
김유진의 동생이며 삼남. 어린 시절부터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순수 샌님 성격이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유신도 공부를 나름 잘했음에도 유인에게 올인하느라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가 나중에 집안 사정 나아지고 나서야 대학 갔다. 학계에 투신해 미시간 대학교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당시 미시간 대학 교육학과는 그 유명한 존 듀이의 핵심 멀티기 때문에[28] 존 듀이의 제자일 가능성이 높다. 등장이 적어서 그렇지 교육학 박사라서 전간기 동양교육발전기금의 평시 관리를 유인이 했는데, 대공황기 많은 교수들이 유인 형들의 명성과 재력에 눈독 들여 유인에게 접근했다는 것으로 보아 동양교육발전기금으로 대거 유입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핵심 엘리트층이 미국 사회에서 빠르게 자리잡는데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
해방 후 형제 중 혼자 영구 귀국해서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 장관이 된다. 문교부 장관이지만 다름 아닌 김유진의 동생이기에 의원들은 물론 대통령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김씨 3형제 중 유일하게 조선인과 결혼했지만 사별한다. 슬하에 자녀는 둘. 야구를 미는 형과 달리 미식축구파로, 국민 스포츠로 미식축구를 밀려고 하나 실패했다. 삼형제 중 유일하게 탈모가 와서 대머리가 되었다.
외전에서는 형의 조언을 받아 대학입시에 수능을 도입한다. 그런데 첫 수능 문제 출제위원들이 식민지 출신으로서 아득바득 박사학위를 딴 천재들[29]이었고, 중간에는 '대한민국 최고의 지식인들만이 수능 출제위원이 되는 것'이라는 요상한 인식이 퍼져버려서 대통령까지 출제위원 하겠다고 끼어드는 등[30] 역사상 최악의 지옥불수능이 되어버렸다. 결국 첫 해부터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고, 수능 제도가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정착할 때쯤에는 그동안 받은 스트레스로 인해 결국 완전히 대머리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빙의되기 이전 역사에선 빨간물이 들었다. 실존 인물 중 공산당 활동을 한 김유인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정황상 동일인물은 아니고 그를 모티브로 했거나 우연의 일치인 듯하다. 어쨌든 두 형은 동생의 공산당 활동 전과를 감추기 위해 여기저기에 뇌물을 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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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삐
유진이 격무에 시달려서 집에도 못가고 술에 의지하며 살아 가자 에이브람스의 추천으로 키우게 된 강아지이다. 종은 비글[31]이며, 사람을 잘 따른다고 한다. 손주까지 보고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고 한다. 이후 유진이 뽀삐 Mk-2를 언급하였는데 아마도 뽀삐의 자식 내지는 손주로 추정된다. 산책을 하는 모습을 보면 유진 킴이 맥아리 없이 질질 끌려다녀서 유진 킴의 저평가에 일조한 모양. 덕분에 유진은 산책과 같이 뽀삐 돌보는 일을 에이브람스에게 짬때리는 경우가 많다.
에필로그에 이 녀석의 먼 후손이라는 강아지가 등장하는데 주인공 일가만 보면 애교를 부린다고 한다. 특히 유진의 환생체인 조윤에게는 특히 더해서 '장군님이 살아돌아온 것 같다'는 말까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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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빈
북아프리카 전선 때 사막에서 유진이 주워온 사막여우. 야생동물치고 사람과 친화력이 굉장히 좋아서 육포를 줬더니 쉽사리 꼬셔졌다. 당연하지만 이름은 당시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이 붙여진 에르빈 롬멜에서 따왔다.
사막여우답게 굉장히 귀여워서 그 정신 나간 전쟁광 패튼도 한창 화내던 도중에 유진이 에르빈을 내밀자 이놈 털이 참 부드러운게 내 고급스러운 취향에 딱 맞는다고 무릎에 앉혀놓고 쓰다듬어줄 정도.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볼 때마다 간식을 주었는지 저게 돼지인지 여우인지 모를 정도로 살이 뒤룩뒤룩 쪘다고 한다. 이후 프랑스 동물원에서 인기 동물로 호의호식하며 살다가 수명이 다 되어 죽고 난 이후에 박제되며 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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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동무
유진킴의 애완돌. 유진이 스탈린의 생일에 초대받을 당시 주워온 돌멩이다. 당연하겠지만 시대를 초월한 애완돌의 등장에 소련측 인물이나 유진 주변 인물들은 유진이 치매가 온 건지 진지하게 고민했다(...).[32] 유인우주선 개발과정에서 소련이 라이카를 보냈더니 미국에서는 동물학대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뒤, 이 이오시프 동무를 태워 보내며 소련을 얼타게 만들었다고 다시 언급되었다. 이로 인해 한동안 미국내에서 애완돌 열풍이 일어났었다고 하며, 열풍이 식었다는 얘기를 들은 흐류쇼프왈 "다행이군. 자본주의는 아직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였어."
3. 미국
3.1. 대통령
미국 대통령은 2차대전을 기점으로 세계 정세가 원 역사와 점점 차이점이 커지더니, 냉전기로 접어들면 대통령의 임기부터 시작해서 당사자까지 차이가 나게 되었다.[33] 그로 인해 닉슨 이후 대통령이 원 역사와 같은 인물로 이어졌는지 불확실하다. 본작의 21세기 에필로그에서는 21세기 당시 누가 미국 대통령인지 아예 묘사되지 않아 알 수 없다.본작에서는 유진 킴 사후 미국 정계가 공화당과 민주당을 가리지 않고 진보화를 밟았다고 묘사되며, 작중에서 민주당보다 공화당의 재진보화가 유진 킴을 통해 상세히 묘사되고 유진이 죽을 당시 공화당 당권을 쥔 닉슨이 본작에서는 반대로 공화당의 좌향좌를 이끈 데다 유진이 공화당원이 아님에도 공화당 역사에 남긴 족적이 커서[34] 공화당이 진보 정당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유진이 죽을 때까지 민주당에 딕시크랫 세가 제법 남아있던 걸 고려하면 재보수화는 민주당 가능성이 더 높다. 일단 유진 사망 당시에는 민주당도 진보 성향인 케네디 형제 치세를 겪긴 해서 민주당도 원 역사만큼 진보적이거나 원 역사보다 보수적이더라도 흔히 생각하는 보수 정당 수준은 아닐 수도 있다.
닉슨이 공화당 좌향좌 기조를 유지한다고 해도 수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다시 보수화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원 역사의 미국 사회도 갈수록 유색인종의 힘이 커지고 있는데 본작에서는 그 파워가 유진 킴의 영향으로 수십 년 앞당겨진 걸 고려하면 갈수록 늘어가는 엄청난 수의 흑인과 아시아인 표를 스스로 걷어차는 건 상식적으로 손해이므로 공화당의 입장에서 굳이 성향을 바꿀 이유가 적다.
만약 공화당이 21세기에도 흑인, 아시아인 표를 꽉 쥐고 있는 상태에서 민주당도 진보 정당이 된다면 케네디 형제의 영향으로 아일랜드계는 갖고 있을 것이고, 동유럽계도 노려볼 만하며, 원 역사의 아들 부시처럼 공화당이 선점 못한 유색인종인 히스패닉을 주 지지층으로 노릴 가능성이 높다.[35] 아시아계도 동북아-동남아계가 아닌 남아, 서남아 계열은 노려볼 만하며, 흑인 민권법 통과를 케네디 형제가 주도했기 때문에 흑인 표를 공화당과 반씩 나눠 먹을 수도 있는데, 이 경우 유진이 흑인 엘리트 및 중산층과 친했음을 고려하면 저소득층이 민주당, 엘리트층이 공화당일 것이다.
만일 원 역사처럼 카터-레이건-아버지 부시-클린턴-아들 부시-오바마-트럼프-바이든 라인이 맞다면 성향이나 당에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도 원 역사 그대로의 가정이고 본작에서 냉전기 이후에 원 역사와 당의 노선 차이가 크다는 걸 고려하면 아예 다른 사람이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일단 제럴드 포드는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고를 치지 않는다면 가망이 없으며 린든 B. 존슨 행정부가 본작에서 그냥 삭제된 걸 고려하면 삭제 가능성이 높고, 카터는 본작의 닉슨이 재임한다면 원 역사의 카터와 임기가 겹치기에 삭제당하거나 1981년 당시 카터가 57세로 그리 고령이 아님을 고려하면 4년 밀렸을 수도 있다. 만약 레이건이 대통령이 된다면 1911년생이라 1989년 이후는 무리이므로 카터가 4년 밀려 단임했다면 레이건은 현실적으로 단임밖에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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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대
우드로 윌슨(1913년 3월 4일~1920년 2월 재임)[36]
1차 대전 승전 이후 이승만과 연을 끊고 유진을 도쿄로 보내 미일관계를 다지려 하나, 대놓고 자기를 산제물 삼겠다는 것에 뚜껑이 열린 유진에게 원 역사에 있던 이디스 윌슨의 권한 스틸이 조기에 폭로당해 버린다. 미국 사상 초유의 비선실세 논란으로 미국 전역이 뒤집어졌고, 당시 법무 장관의 매카시즘 프리퀄도 비선실세에 동참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같이 날아갔다. 16살 어린 재혼녀에게 나라를 팔아먹은 노망난 노인네라고 욕을 엄청 먹었다고.
간신히 몸을 일으켜 백악관 밖에 나온 시점에서는 이미 여론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고, 결국 미국인들의 압박 속에서 하야했다. 당시 부통령인 토마스 마셜은 이 사실이 밝혀졌을 당시 자신을 제치고 비선실세가 일어났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아 윌슨을 손절하고 현상유지만 하면서 권한대행을 했으며 윌슨이 사임한 이후에도 대통령직을 물려받아 봐야 손해라고 판단했는지 하야 이후에도 남은 임기 내내 대통령 권한대행 자리에만 머물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윌슨이 추구하던 외교 정책을 비롯한 주요 정책이 죄다 올스톱해버리기도 했다고. 비선실세 문제로 몰락한지라 본작에서는 미국사 최악의 대통령 중 하나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유진이 자기 이름으로 한 짓은 아니고 이승만을 조종해 한 일이긴 하지만 고작 중위가 대통령 목을 따버린 격이라 팬덤에서는 프레지던트 슬레이어라는 별명을 붙였고, 작중에서는 후버와 같이 극히 일부만이 진실을 알고 있는 비밀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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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대
워런 G. 하딩(1921년 3월 4일~1925년 3월 재임)[37]
원 역사와 같이 잘생겼지만 무능한 대통령. 아니나 다를까 당선 이후에도 포커에 심취하고 백악관에서 파티를 여는 등, 여러모로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하딩 본인도 대통령을 맡기에는 너무 무능한 인간이란 것도 자각하고 있었고, '정치라는 괴물에 먹혀 친구를 다 잃었다'고 한탄할 만큼 임기 내내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었다.[38] 이후 원 역사와 달리 재선에 성공하지만 2개월 후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래도 업적이 없는 건 아닌데, 유진이 1차대전 참전용사의 실업자 문제 해결과 썩은 우유 유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39] 연방정부에서 우유 유통을 전담하는 U.S.Milk를 만들고 참전용사를 유통업자로 임명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였는데[40] 이게 나름 효과가 괜찮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민주당과 기존 유통업자들이 크게 반대했지만[41] 그동안 썩은 우유 문제에 시달리던 아줌마들이 오히려 샷건 들고 유통업자들을 털어버려서(...) 정착되었다. 이후 U.S.Milk는 후버 정부 당시 갈갈이 찢어 매각했는데 일부 주가 지분 일부를 사들여 주정부에서 유통했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 해고 문제가 겹쳐서 원 역사의 보너스 아미보다 규모가 큰 우유 원정대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연방정부 공기업 정책이었던지라 20세기 초반 공화당의 마지막 진보 정책으로 꼽히며, 원 역사에서는 알 카포네가 우유 유통 문제를 해결했다.(...) 금주법 시대 밀주보다 잘 나갔다나 뭐라나.
무능해서 문제였던 건 원 역사와 같았지만 해당 세계에선 공화당 원로인 커티스가 사위인 유진의 조언을 듣고 하딩의 킹메이커가 되어서 실세가 된 덕에 하딩의 오점 중 하나인 '오하이오 갱'이 대부분 차단되었고, 금주법 시대에 백악관에서 술 먹고 포커치던 막장 사생활도 유진의 우보크 덕에 최소한 범법 행위에서 벗어날 구멍이 생겼다. 그렇게 단점이 가려지다 보니 잘생긴 외모와 호감 가는 성격, 그리고 무난한 정책이 남아 원 역사보다 훨씬 사랑받게 되었다. 당선 당시부터 '지친 미국인들에게 휴식을 주기 위한' 쉬어가는 대통령으로 불렸고, 실제로 그렇게 했으며, 훗날에는 '선량한 대통령'이라는 이명으로 불린다. 생전 임기 막바지에 유진이 만든 카드 게임에 심취해서 사후에도 백악관 듀얼 귀신으로 남았다는 소문이 남았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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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대
캘빈 쿨리지(1925년 3월 중순~1929년 3월 4일)
윌슨의 비선실세 논란 당시 메사추세츠 주지사로 첫 등장했으며, 황색언론이 비선실세 운운하는 상황에서 이승만이 윌슨은 현재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라 폭로하자 공식적으로 윌슨에게 정말로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게 맞냐고 공세해 비선실세 문제가 사실임을 밝히는데 큰 역할을 했다.[43] 당시의 쿨리지는 메사추세츠 주지사로서 경찰 파업에 강경 대응했지만 1차대전 참전용사의 보너스 문제를 주에서 추가 지급하는 것으로 막 명성을 얻은 상태였다고 한다.
원 역사와 같이 과묵하며, 찰스 커티스의 말에 의하면 미국의 민주정에 대해 스토아 학파에 가까운 신념을 가진 인물. 원 역사와 달리 하딩이 재선까지 하고 얼마 뒤 사망하는 바람에 하딩이 남긴 임기만을 수행하고 차기 대선에 불출마해서 원 역사와 본작의 타임라인은 얼추 일치하게 되었다.
정치적 능력을 은연중에 드러낸 유진과 독대하여 군인신분으로서 정치 참여를 조심하라는 경고를 남긴다. 유진은 그 경고에 쫄아서[44] 이전보다 더 정치 관여에 학을 떼고 살게 되었으며, 그의 임기 동안은 숨만 쉬고 지낸다. 쿨리지의 경고는 쿨리지 사후에도 기억하고 있어서 유진이 정치적 행위를 할 때의 커트라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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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대
허버트 후버(1929년 3월 4일~1933년 3월 4일 재임)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대공황의 원흉이 되었다. 커티스가 공화당 경선에서 대통령이 되고자 총력을 기울였지만 앞날을 알고 있던 유진은 커티스에게 절연당하는 한이 있어도 대공황의 오명을 쓰게 하지 않기 위해[45] 포드 회장을 비롯한 강도 귀족들과 손잡고 뒷공작을 벌여 커티스를 낙선시켜 버렸다. 후버는 커티스 파벌과 화해한다는 제스처로 부통령직을 제안했지만 당시 부통령직은 토템 수준(...)이었기 때문에[46] 폭발한 커티스가 원 역사와 달리 부통령직을 거부했고, 그로 인해 커티스 파벌과 큰 갈등을 빚게 된다.
본작에서는 원 역사의 보너스 아미 사건보다 더 큰 우유 원정대 사건을 터뜨렸다. 1차대전 참전용사의 참전수당과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진이 하딩에게 청탁해서 참전용사를 연방정부 산하 우유유통기업 U.S.Milk를 만들어(한마디로 공기업이다) 취직시키는 것으로 해결했는데, 대공황이 일어나자 긴축에 들어간 연방정부가 U.S.Milk를 갈갈이 찢어 팔았고 이 과정에서 U.S.Milk의 지분을 인수한 민영 기업들이 직원들을 대거 해고하면서 직원들의 생계가 막혀버렸다. 미국 전역을 대상으로 한 공기업이었으니 당연히 직원이 많았고, 대공황이라는 사상 초유의 경제난이 일어난 직후에 퇴직금도 못 받고 쫓겨난다는 건 굶어죽으라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보너스 아미보다 규모가 더 클 수밖에 없던 것. 여기에는 정치적인 문제도 있었는데, 커티스의 지역구가 낙농업을 주로 하기 때문에 커티스 파벌을 꺾겠다는 판단도 있었다. 다만 U.S.Milk가 전부 민영화된 건 아니고 일부 주에서 지분 일부를 인수해 주립 공기업으로 이어졌다.[47][48]
우유 원정대를 원 역사처럼 빨갱이 취급하며 탱크로 밀어버리라고 지시하는 무슨 독재국가스러운(....) 명령을 내렸고, 군부에서는 이를 철썩같이 믿어 진짜로 탱크로 밀어버리려고 했는데 지나가던 유진이 시위대를 도와[49]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맥아더가 시위대의 진압 대신 후버 고발 및 전역을 택하면서 남은 임기는 백악관의 도장 찍는 기계 신세가 되었다. 지지율이 바닥을 찍어버린 탓에 그대로 탄핵될 수도 있었지만 민주당 입장에선 미국 헌법상 대통령 탄핵해 봐야 어차피 부통령이 승계하는 형식이라 별로 이득도 없는 데다 굳이 탄핵을 해줘서 공화당 표를 결집시킬 필요가 없었고, 공화당도 마찬가지로 당이 먹을 욕을 후버가 다 받아주는 게 나으니 대통령과 손절만 한 상태로 놔둔 터라 임기는 다 채우고 퇴임했다. 오명을 쓰고 몰락한 탓에 원 역사처럼 말년에 행정관료 재능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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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대
프랭클린 D. 루스벨트(1933년 3월 4일~1941년 6월 재임)[50][51]
유진 킴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대농장주. 이쪽도 괘나 부하를 부려먹는 타입인지 유진은 루스벨트를 대농장주라고 디스했다. 다크호스인 유진이 대선에 나오지 않을 것을 대가로 한반도 해방을 요청하자 그 지정학적 입지에 감탄하고 흔쾌히 승낙한다. 한반도 건국시조가 맨해튼에서 부동산업 해도 대성했을 것 같다나. 이후 유진과 미국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식민열강을 해체하고 소련과 지구를 양분하는 미래를 꿈꾼다. 본인 말에 따르면 원래 꿈은 8년에 걸쳐 뉴딜 연합을 계기로 민주당과 공화당의 성향을 역전시키는 것이었지만, 2차 대전이라는 것을 이용해 미국에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현시키는 것을 생의 마지막 목표로 하게 되었고 현 시점의 정치인들 중에서 자신 외에 이를 제대로 해낼 만한 사람이 없어서 무리해서 3선 4선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원 역사와 달리 알베르트 괴링과 독일에 잠입한 폰지 때문에 일찌감치 홀로코스트와 T-4가 폭로되어 미국 사회를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고, 독일 참전을 위해 유진이 히틀러에게 어그로를 끌자 분노한 나치 간부들이 김가 일족을 피습하고 김가 저택을 불태워 버리면서 이를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 독일에게 선전포고한다. 처음에는 유진이 자작극을 했다 생각해서 유진을 미친놈이라 욕했지만 정말 나치가 한 게 맞았고[52] 얼마 뒤 바르바로사 작전과 진주만 공격이 동시에 일어나자 일본이 독일의 사주를 받아 진주만을 공격했다 발표하고 2차대전에 뛰어들었다. 이 때문에 원 역사와 달리 독일을 족칠 명분은 분명히 있었고, 일본은 그냥 어쩌다 타이밍이 겹친 것뿐이었지만(...) 독일이 패망한 이후에도 일본의 온갖 막장 짓 때문에 족쳐버린 건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전시 지도자로 활약하면서 너무 무리를 한 탓인지 원 역사보다 빠르게 건강을 잃는 바람에 원 역사에서는 3선 임기를 마치고 4선까지 했던 것과 달리 여기서는 3선을 시작한 지 1년도 안 돼서 사망한다. 독자들은 고혈압으로 인한 뇌졸중을 의심하나 혈압을 내리기 위해 실혈(失血)치료를 한다던가 인위적인 염증을 발생시킨다던가 하는 치료 방식을 채택해서 역효과를 낸 듯하다. 당시 부통령인 월레스가 정치 경험이 너무 부족하다는 점을 우려한 루스벨트는 죽기 직전 군인이지만 자신의 이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유진에게 뒤를 맡기는 편지를 썼다.
이쪽도 유진이 만든 카드 게임에 푹 빠져있으며,[53] 대표적으로 자기를 모티브로 한 카드를 만들어 달라고 유진에게 유형, 무형의 압박을 넣는다던가...그래서 실제로 유진이 카드를 만들어 줬는데, 그 이름도 무려 Fraud Deceit Republican(사기 기만 공화당원)이라는 악의가 잔뜩 들어간 이름이었다.[54] 사후에는 백악관 귀신으로 남아 선배 귀신인 하딩과 함께 듀얼을 한다는 소문이 있다.[55] 루스벨트는 이 카드를 백악관에 방문한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자랑했는데, 이걸 본 마셜은 왜 이런 걸 식후땡처럼 말하는 거냐고 속 터지는 모습을 보였다. 현대에는 루스벨트를 모델로 한 완성되는 순간 듀얼을 끝내버리는 그레이트 휠체어 맨이라는 종결카드까지 만들어진 모양.
같은 웨스트포인트 출신으로 엮여있는 맥아더와 아이젠하워를 제외하면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유진 킴과 허물없는 사이. 게임 못한다고 도발하니 유진이 빡쳐서 밑장털기하는 걸 알아채고 그걸 상관에게 일러 내리갈굼을 실천하거나, 유진 킴에게 카드를 달라고 하자 불륜을 폭로하겠다고 받아치니 반신불수인 자신이 불륜인 걸 사람들이 믿겠냐면서 탈세로 털어버린다고 협박해서 끝내 카드를 털어내는 등 사적으로도 하딩 이상으로 친밀했으며, 공적으로도 유진 킴의 능력을 가장 잘 써먹어서 미국의 이익을 끌어내는 등 군인 유진 킴의 뒤를 받쳐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전시 대통령이었다. 유진 역시 자신이 납득하지 못한 FDR의 제안도 그의 혜안을 믿고 수행하는 등 FDR에게는 철저히 순종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FDR이 유진 킴이 필요에 의해 정치를 할 뿐 대통령과 같은 고위 정치관료직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56] 이 때문에 유진 킴은 FDR의 후계자로 불리기도 하는데 유진 킴 본인은 정치 관여에 대해서는 학을 떼는 반면 FDR과의 친분 자체는 절대로 부정하지 않았다.
정치적 권모술수에는 누구보다 능했지만[57] 미국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나치게 편법을 선호하는 기질 때문에 후임자인 월레스의 부담을 가중시키거나 뉴딜 연합의 해체 수준을 넘어 일시적으로 주권민주당 분당 사태까지 일으키는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했다.[58] 이 양반의 뉴딜 연합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미국의 극좌와 극우가 모두 루스벨트의 지지층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루스벨트의 목표였던 민주당과 공화당의 성향 역전은 유진이 공화당과 더 친했던 탓에[59] 유진이 죽을 때까지 두 당 모두 진보와 보수 세력이 정확히 반반으로 나뉘어 선거 때마다 양당 모두 고생했다.
독자들 사이에서는 3선 끝날 때까지 살아있을 거라 생각해 원 역사처럼 정치 감각이 제로나 다름없는 월리스를 부통령으로 앉힌 건 너무 안일했다고 평했다. 오죽하면 유진도 FDR에게 왜 월리스를 부통령으로 삼은 거냐고 한탄했을 정도. 독자들은 고혈압 환자가 대전쟁이라는 격무를 겪고 있는 상태라면 다른 파벌의 거물을 끌어들이기는 힘들어도[60] 월리스보다는 정치 감각이 있는 사람을 부통령으로 삼았어야 했다고 평했다.[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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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대
헨리 A. 월리스(1941년 6월~1945년 1월 20일 재임)[62][63]
FDR이 3선 후 세상을 떠나면서 대통령직을 승계받았다. 승계받은 대통령이라는 부족한 정통성에, 전임자에 비해서 정치력이 훨씬 떨어지는 데다가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며 타인에 대한 생각은 일절 없으면서 망상에 빠진 무능한 대통령. 공화당의 대권주자인 맥아더가 전시 거국내각의 전쟁부 장관으로 있는 데다가 본인은 군부, 각료 인사들은 물론이고 해외 정상들까지 모두 한 마음으로 미친 거냐고 취급할 정도로 계속 헛소리만 해대는지라 당연히 지도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열강을 해체하고 소련과 지구를 양분한다'는 루즈벨트의 꿈을 포기하지 못해서[64] 결국 정권 지지도를 상승시키기 위해 무리한 일본 상륙작전을 추진하다가 꼭지가 돌아간 유진에게 정면으로 들이받혀 그대로 레임덕에 빠지고[65], 민주당도 주권민주당으로 분당되면서 낙선하는 등 자업자득인 비운의 대통령이 되었다.[66] 낙선 후에는 오히려 자신의 눈을 가리던 아집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후련한 모습으로 고향에 내려간다. 그러나 오히려 낙향한 후 메스컴에 루스벨트의 정통 후계자, 유진이라는 정치판을 뒤흔드는 떡밥을 던지며 본의 아니게 유진과 아이젠하워, 맥아더의 봉창을 두들겨준다.
유진과 트루먼의 대화에 따르면 월리스는 자기 전문 분야에는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가졌고 오히려 지능이 매우 뛰어나지만, 권모술수 경험이 부재한 상황에서 방구석 열강에서 천조국으로의 과도기라는 터무니없는 중책을 맡게 되어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승만이 알아본 바에 따르면 월리스는 자기 고향에서 농업 관련 일에 종사하다 루스벨트가 농업 문제로 정계에 입문시켰고 농업 관련 관료 일만 하다가 부통령에 선임되었기 때문에 대통령직을 승계받기 전까지 정치인하면 떠올리는 일은 하나도 안 했고 행정관료에 가까운 삶만 살았는데, 본인이 아는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도 권모술수의 정점에 달한 루스벨트이기 때문에 더더욱 대통령의 포지션을 오판했다고 한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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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1949년 1월 20일~1957년 1월 20일 재임)[69]
유진 킴의 웨스트포인트 동기. 첫 등장부터 '선배들에게 끌려간 유진이 언제 돌아올지' 동기들과 도박판을 벌여서 싹쓸이하는 비범한 면모를 보여준다[70], 가장 친한 패거리 4인방 중에서도 더 각별히 여기는 친구로 나오며, 유진의 장남 헨리의 미들 네임 '드와이트'도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93사단에서는 369연대장을 맡아서, 기만 작전을 펼치며 독일군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원 역사에서 그가 맡았던 유럽 방면 총사령관은 유진이 대신하고, 아이크는 아시아 방면 총사령관이 된다. 종전 이후 유진의 추천으로 별로 원치 않았던 육군참모총장이 되었지만, 유진이 자신을 차기 대통령감으로 언급한 걸 이용해서 신속하게 군무를 내려놓는다.
전역한 후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대통령직도 은근히 노리고 있었지만 유진이 더 인지도가 높아서 유진이 대통령이 되는 건가 생각하기도 했지만 유진이 매카시즘 짬처리와 절친 아이젠하워의 대통령 당선을 모두 노리고 아이젠하워 지지를 선언하면서 유진의 도움을 받게 된다. 유진이 맥아더를 설득해 맥아더가 재출마를 포기하고 아이젠하워를 밀어주기로 하면서 아슬아슬한 타이밍까지 기다렸다가 공화당에 입당하고,[71] 뛰어난 말솜씨로 공화당의 경선 상대와 민주당 상대를 모두 토론에서 격파하고 순소롭게 대통령이 되었다.
유진의 가장 오랜 친구 중 하나로서 유진에게 자주 뒤통수를 맞고 고통받는 김유진 전용 짬통 포지션인데, 유진은 자신이 역사에 끼어들면서 아이젠하워가 원래 세웠을 전공을 자신이 대신 세우는 것을 은근히 미안해하고 있어 그를 많이 챙겨주기도 한다.[72] 유진의 다른 모든 친구들은 유진 덕분에 원 역사보다 더 높은 전공을 세우고 진급도 빨랐는데 아이젠하워만은 유진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신세였기 때문.
유진은 아이젠하워를 대통령으로 만든 뒤 완전히 은퇴하려고 했지만 아이젠하워는 그간 유진에게 뒤통수를 맞아왔던 걸 복수를 하듯 자신을 대통령에 올리고 은퇴하려던 유진의 뒤통수를 쳐서 그를 강제로 국무장관에 임명한다. 본인 왈 통수를 후려 보니 진짜 재밌다고... 단순히 괴롭히려고 한 건 아니고, 유진의 성격상 국무부 장관을 맡기면 싫네 뭐네 해도 끝까지 일할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고, 실제로 그랬다. 연임까지 했기에 임기는 8년.
유진이 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벌어질 냉전의 구도를 미국에 매우 유리하게 짜두었던 데다, 과오에 가까웠던 베트남 전쟁 개입 등을 사전 차단했기 때문에 사실상 이후 민주당 정권들에 비해 호평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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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대
조지프 P. 케네디 주니어(1957년 1월 20일~1964년 재임)[73][74]
외전에서 등장한 존 F. 케네디의 형이자 케네디 가문의 장남. 작중 2차 대전이 일찍 끝나면서 아프로디테 계획이 존재하지 않았는지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생존해 있었다.
헨리 킴과는 같은 항공모함에서 해군항공대 조종사로 근무했기 때문에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당시 백인 사회에서 '하얀 흑인'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무시당하던 아일랜드계-가톨릭 출신이었던 케네디 가의 장남인 조지프와 아시아계-원주민 혼혈이지만 아버지가 아메리칸 드림으로 유명한 킴 가의 장남인 헨리는 나름 유사한 처지였기 때문에 친해지기 쉬웠을 것이다.[75] 적군 군함 1척을 격침해서 훈장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하며, 한반도 해방 작전 때도 해군항공대 조종사로 복무했다는 것으로 보아 원 역사보다 걸출한 군공을 세운 걸로 보인다.[76]
매카시즘 당시 케네디 家는 가톨릭이라 매카시즘에 동참했다는 언급이 나오는데[77] 이후 케네디 家가 잘나가는 모습을 보면 매카시즘 역풍에서 살아남았거나 8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미지 수습에 성공한 모양이다. 유진이 매카시즘 역풍을 시작했을 때 매카시즘의 지지세력 상당수를 유진의 주변인들이 돌려놓는 모습이 나오기 때문에 이때 전향에서 만회에 성공한 모양.
아이젠하워 이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서 12년 만의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원 역사의 JFK 이상으로 대단한 건데, 본작에서는 민주당의 딕시크랫이 루스벨트 사후 다시 당권 장악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아일랜드계-가톨릭 출신에 진보 성향이었던 조지프 케네디 주니어가 젊은 나이에 짧은 정치 경력으로 대선후보에 오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자세한 상황은 묘사되지 않으나, 딕시크랫이 당권을 쥐든 말든 유진 킴의 영향으로 미국 사회가 전반적으로 진보화가 빨라졌고[78] 진보 정책이 미국 정계의 전반적인 트렌드로 떠오르면서 이전부터 매력이 없던[79] 딕시크랫의 입지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차 위축되고, 진보 아젠다를 부르짖던 조지프 케네디 주니어가 12년 장기집권이 이어지던 공화당에게서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한 비장의 수로 대선후보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다만 딕시크랫의 힘이 여전히 강한 건 사실이라 임기 내내 딕시크랫에게 시달려야 했다고.
1915년생이므로 41세의 나이에 대통령이 되었는데, 원 역사의 JFK가 43세에 대통령이 되었음을 고려하면 원 역사의 동생보다 더 빨리 대통령이 되었다. 참고로 원 역사에서 가장 젊은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42세 11개월에 대통령이 되었음으로 본작에서는 조지프 케네디 주니어가 최연소 대통령이다. 심지어 시어도어는 부통령직을 승계받은 것이라 더 대단한 기록이다.
이집트를 이용해 소련의 지원을 받던 이스라엘을 끝내 저지하고 재선에 성공했지만 역으로 이집트의 영향력이 너무 커진 데다가 연이은 승전으로 미국인들에게 애국주의와 반공주의가 만연해진 탓에 2기 임기 와중 공산화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사지 중의 사지에 발을 들여놓아버렸다. 그와 별개로 당시 민주당 내에서 가장 진보파였던지라[80] 비 백인 민권법 개정안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였으며, 동생인 존 케네디 시절에 유진의 죽음까지 맞물려 결실을 맺었다고 한다.
퇴임을 고작 몇 개월 앞둔 1963년 11월 22일, 원 역사에서 자신의 동생이 당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 암살당한다. 하필 그의 임기 중에 작품의 주역이었던 전설적인 군인들이 여럿 사망해서 군인 킬러라는 오명을 얻었다.[81]
유진 킴과는 악연 아닌 악연이 있는데, 그가 당선되자마자 유진 킴이 1956년에 킴 플랜의 성과에 힘입어 노벨 평화상을 받아버린 것. 물론 노벨 평화상이라는 게 논란의 여지가 크다지만, 최소한 유럽 지역에서는 킴 플랜이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제스쳐가 되어버려 이제 막 선임된 대통령의 정책에 본의 아니게 압박을 넣어버린 셈이기 때문.
생전 민주당에서 가장 진보적인 성향이었다고 하며, 민권법 초안도 조지프 케네디 주니어 시절에 이루어졌고 JFK 집권기인 1971년 유진의 사망을 계기로 일어난 대규모 민권 운동을 명분 삼아 민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고 한다. 본작에서는 유진의 영향으로 민주당이 루즈벨트 치세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이 다시 좌향좌하고 민주당이 다시 우향후하는 경향을 보이자[82] 민주당의 노선을 다시 좌향좌시키는 것을 추구했다고 한다. 공화당에게 진보 아젠다 다 뺏기면 민주당이 말라죽는다 여겼다고. 이 때문에 출신 문제까지 합쳐져 생전 조지 월레스(George Corley Wallace Jr.)를 비롯한 딕시크랫과 매우 심한 갈등을 겪었다고 하며, 딕시크랫이 다시 민주당의 당권을 쥘 뻔했지만 조지프 케네디 주니어의 암살 미수로 인한 추모 분위기 때문에 딕시크랫이 당권을 상실하고 동생 JFK가 당권을 쥐며 루스벨트 사후 다시 보수화되던 민주당을 다시 진보화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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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대
해리 S. 트루먼(1964년~1964년 9월 28일 재임)[83][84]
딕시크랫이자 노련한 정치인으로 월레스를 몰아내려는 계획을 갖고 있어서 몇 번 김유진과 만남을 갖는다. 미래인인 유진이 대통령 한번 하시겠다고 하니까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이상 그럴 리 있겠냐며 일축하는 게 개그 포인트. 원 역사와는 달라진 정치적 환경에서 정치 인생도 좀 꼬이긴 했지만, 유진과는 좋은 관계를 지속한다. 유진은 지금까지 만나온 거물 정치인들은 전부 다 음험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분위기가 느껴지지만 이 사람은 우직하면서도 예리한 분위기라 고평가했다. 딕시 출신이지만 뉴딜 연합과도 사이가 괜찮다고 하며, 주권민주당 분당 사건 당시에도 민주당에 남아있어 트롤러 소리를 안 들었다. 매카시즘 역풍과 유진의 아이젠하워 지지 선언 직후 당시 분위기를 계산하고[85] 해당 선거에서 패배할 것을 깨닫는다.
외전에서는 상원의원을 오래 지내면서[86] 대권을 노리고 있었는데, 이때 트루먼은 자신이 경선에서 이기면 자신을 지지해달라 부탁하자 유진은 트루먼에게 자신의 은퇴를 수리한다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했지만[87] JPK에게 당내 경선에서 밀려서 대신 부통령이 됐다. 자세한 묘사는 없지만 경력 짧은 젊은이에 아일랜드계-가톨릭 출신이라는 약점이 있던 조지프 케네디 주니어에게 있어 고령의 중진 상원의원이자 딕시크랫 출신이면서 진보 성향인 트루먼을 선택한 것으로 보이며,[88] 전형적인 2차대전 이후 부통령직이 실세가 된 이후의 대통령+부통령 조합이기 때문에 원 역사처럼 토템 부통령이 아니라 나름대로 실권 있는 부통령이었을 것이다.[89]
그러나 조지프 케네디가 임기 말 암살당하자 임기 몇 달짜리 미국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그러나 이미 80세의 고령이었던 탓에 아프가니스탄 출병까지 벌어진 상황에서 대통령의 직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몇 달 안 가 케네디의 뒤를 따라 사망해버려[90] 미국은 혼란에 빠졌다.[91] 남은 임기가 2개월뿐이었기 때문에 공화당원이었던 하원의장은 고사, 상원의장도 2개월 만에 주요 사안을 해결하는 건 무리라 판단해 고사, 결국 국무부 장관이 윌슨 하야 당시 부통령의 전례에 따라 대통령직을 승계하지 않고 2개월 동안 권한대행만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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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대
존 F. 케네디(1965년 1월 20일~1973년 1월 20일 재임)[92][93]
역사의 변동으로 인해 형에게 밀려나나 했는데, 형이 임기 말 급작스럽게 암살당하면서 당시 일개 하원의원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정표로 대통령이 되었다.[94] 사실 원 역사의 존 케네디는 형인 조지프가 죽지 않았으면 기자나 작가가 되려고 했고, 오히려 동생 로버트가 정치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존보다는 로버트 쪽이 개연성이 더 높다. 아무래도 형이 대통령이 되자 아버지인 조지프 케네디 시니어가 존을 쪼아서 정계에 내보낸 모양이다.
원 역사에서는 43세에 대통령이 되었지만 본작에서는 47세에 대통령이 되었다. 본작의 형이 최연소 미국 대통령 기록을 갈아치운 것과 달리 본작의 JFK는 젊은 대통령이 맞지만 비슷한 나이대의 대통령도 있기는 하다.[95]
형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하며, 아프간전도 그 연장선의 일환으로 벌어졌다. 원 역사와 달리 암살당하지 않고 재선까지 성공한 듯하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젊고 잘생긴 대통령' 이미지는 형이 가져갔고, 원 역사에서는 쿠바 핵 위기를 미국의 위신을 세우면서도 평화롭게 해결한 업적이 있었으나 작품에서 3차 대전의 위기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와 유진 킴이 해결했으니 사실상 아프간 전쟁의 책임을 온전히 지는 실패한 대통령이 될 예정이다. 하지만 본인 초선에 아프간 전쟁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재선에 성공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정책을 완전히 말아먹지는 않은 모양이다. 세계 불경기와 전쟁 부작용으로 세계 각지에서 68 혁명 비슷한 대규모 시위의 시대가 열린 데다 1971년 유진 킴의 사망으로 말미암은 72혁명 때문에 임기 내내 혼란스럽긴 했지만.
루즈벨트 시절부터 역대 대통령이 모두 추구하던 소수인종 인권 개선에 큰 관심을 가져 민권법 개정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였으며,[96] 유진의 사망 당시 논란을 이용해[97] 민권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해서 업적이 없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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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대
리처드 닉슨(임기 불명)[98][99][100]
킴 가문의 장학금으로 공부했으며, 캘리포니아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것으로 잠깐 등장했다.[101] 이후 연방 하원의원이 되었고, 기민한 정치적 감각으로 유진과 아이젠하워에게 접근해서 킹메이커가 되었다. 원 역사에서는 남부전략을 주도하며 공화당의 보수화를 이끌었으나 여기서는 앞으로 더 진보적으로 나가는 정당이 표를 더 잘 받을 것이라는 의견을 펼친다.[102] 처음에는 유진에게 배팅했지만 유진이 정치적으로 자기 예상보다 훨씬 노련한 것에 경악하고, 유진의 아이젠하워 배팅 계획에 적극 찬동해서 아이젠하워에게 유진을 내각에 기용하는 게 더 승산이 높다고 설득해서 유진이 국무부 장관으로 임명되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래도 유진과의 사이는 꽤 괜찮은 편이며, 유진은 닉슨의 승부사 기질을 초면에 알아보고 젊은 시절의 윌슨 썰까지 풀어주어 닉슨을 잠깐 멘붕시키기도 했다.
패튼이 특유의 막말로[103] 캘리포니아 주 연방상원의원 직에서 당 공천도 못 받고 쫓겨나자 소방수로 투입되었다.[104] 또 닉슨이 피터지는 당내 경쟁을 예측하고 차기 대선 경선 참가를 선언…했으나 JPK가 암살당하며 추모 분위기가 조성된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JFK가 후보 지명을 받고 이후 본선에서도 당선이 확실해지자 공화당의 패전투수로 투입되지만 결국 낙선하고, 유진에게 아프간 침공 실패 썰을 듣고 유진이 소수민족 지원 적선해달라 부탁하자 흔쾌히 적선해주며 기뻐했다.
본작에서는 유진의 영향으로 공화당의 좌향좌를 이끌고 있다고 언급되므로 제법 진보 노선을 탔던 것으로 보인다. 원 역사에서도 국내 정책에서 일부 진보적인 면이 있었으나, 본작에서는 유진의 영향으로 당을 대놓고 좌향좌로 밀었다고 한다. 본작의 민주당도 케네디 형제 집권기를 거치며 '공화당에게 진보 아젠다를 다 뺏기면 말라죽는다'고 좌향좌를 밟았다고 언급되므로 본작의 미 정계가 양당을 가리지 않고 원 역사보다 전체적으로 진보화가 많이 진행된 모양이다. 딕시크랫이 유진 킴 사망 직전에 벌인 암살미수 때문에 딕시크랫에 대한 미국 사회의 전반적인 이미지가 나빠져서 정계에서 힘을 잃어간다는 언급이 있으므로 보수파가 원 역사보다 더 약해진 것이 특이한 것은 아니다.
유진이 사망하는 시점까지 대통령이 되지는 못하지만[105] 작가의 외전에 따르면 일단 대통령이 되긴 한 모양. 정황상 아프간에 무모하게 참전한 JFK의 후임으로 당선된 듯하다.[106] 대통령이었던 당시 소련과 외교 노선에 차이가 있던 신소련과 정상회담을 했다고 언급된 걸 보아 유진의 2세계 분열 외교 기조를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원 역사와 같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났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검머머 세계관의 닉슨은 킴 가문에서 학비를 지원받은 덕분에 대학에 갈 수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검머머 세계관의 닉슨은 원 역사와 달리 '부유층 출신에 아이비리그를 졸업한 북동부 엘리트들'에 대한 이유 없는 증오감과 그에서 파생된 피해망상이 없는 상식인일 것이고, 이미 이긴 선거에 부정선거 끼얹어서 말아먹는 병신짓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107]
3.2. 군인
3.2.1.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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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C. 마셜
유진이 장교교육 30일 코스를 짤 때, 유진이 제식과 체력단련을 담당하는 동안 작전 등 지식 부분을 담당하며 등장한다. 같이 지내는 동안 일기로 유진에 대한 평가를 남겼는데, 처음에는 의외로 침착하고 이성적인 유능한 장교로만 평가했지만 날이 갈수록 유진의 광기에 주목하며 '유능한 미친놈'으로 정의내린다. '평소에는 뺀질거리지만 데드라인을 던져주면 미쳐 날뛰면서 어떻게든 해결한다'는 유진 대처법을 처음으로 만들고 전수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와 별개로 유진을 친구로 여기며 아끼고 있다.
참모와 병참 쪽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육군참모총장까지 진급하는데, 군수, 무기 개발, 징병 및 훈련, 인사, 향후 전쟁 계획 등 말 그대로 모든 분야에 관여하면서 부하 참모들을 갈아버린다.[108] 유진 왈, 마셜의 노예 농장. 원 역사에서도 그랬지만 본인은 지휘관으로 나가고 싶어했는데, 본인이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겠지만 유진의 후임으로 중국 방면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어 국공내전 뒷수습까지 맡고 물러난다. 전역 후에는 더 이상 사람 죽는 일에 관여하기 싫다며, 진짜 농장을 꾸리며 채소를 키운다. 원 역사에서는 오른쪽 신장을 절제하는 등 건강이 나쁜데도 제독들의 반란을 뒷수습하는 등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훨씬 나은 말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원역사보다 4년 더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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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S. 패튼
작중 행적은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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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알로이시우스 드럼
작중 행적은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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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조지프 퍼싱
제1차 세계대전 전역에서 총사령관. 아무래도 퍼싱 본인이 흑인 아동의 교사나 제 10기병대 산하의 흑인부대를 지휘하는 등 유색인종과 인접한 삶을 산 것이 영향이 있는 듯, 상당히 인종적으로 깨어있는 모습이 보인다. 덕분인지 일개 아시아계 장교에 불과함에도 그에게 326전차대대, 93사단을 맡기는 파격적인 인선으로 유진이 경험과 명성을 쌓을 수 있게 해주었다. 손녀뻘 여성들을 주로 사귀어서 웃긴 에피소드들을 만들기도 했다.[109] 1차 대전 이후에는 기갑전 교리를 따라가지 못해 보병 중심의 꼰대가 돼버리지만, 이래저래 유진을 열심히 챙겨줬기에 유진도 퍼싱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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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 브래들리
유진 킴의 웨스트포인트 동기이자 가장 친한 패거리 4인방 중 하나. 원 역사처럼 온화한 인품이며, 휘하의 패튼과 하지를 통제하느라 고통받았다. 유진의 생각보다 공부를 못해서 웨스트포인트 1학년에 점수가 아슬아슬했고, 졸업후 구리광산에서 복무하다가 93사단에서는 참모장을 맡는다. 이후 군사 커리어를 착실히 쌓고 2차 대전에서 유진 휘하에서 활약했으며, 전후 독일 군정사령관, 육군참모총장, 합동참모의장을 거친다. 최종 계급은 역사와 동일한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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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밴 플리트
유진 킴의 웨스트포인트 동기. 가장 친한 패거리 4인방. 93사단에서는 371연대장을 맡아서 독일군 예비대에 계속 달라붙어서 무력화시키는 공을 세웠다. 원 역사처럼 뇌에까지 근육이 들어찬 미식축구 덕후이자 화력덕후 성향으로, 지휘관으로는 전술적으로도 뛰어나고 말단 병사들과 교감을 나눌 줄도 아는 우수한 인물이지만 참모로서는 패튼에 비견될 정도로 처참한 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실전과 이론이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듯 생도 시절에는 나름 상위권 성적을 노리고 있었다. 유진에게 픽업되어서 활약한 덕분에 원역사처럼 마셜이 비슷한 이름의 알콜중독자 장교랑 헷갈리지 않아서 제대로 승진하게 되었지만, 한국 전쟁에서의 전공과 그리스 내전 파견이 없어서 다소 손해를 봤다. 그러나 계급에서는 원 역사에서 2차 대전 말기에 야전군사령관에게도 대장 계급장을 수여했으니, 대장까지 진급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전후에는 더 이상 데스크 워크를 하면 미칠 것 같다며 높은 자리를 모두 거절하고 웨스트포인트 교장으로 취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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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리드 하지
원 역사대로 사범대를 다니던 교사 지망생이었다가 제1차 세계대전 유럽 전역에 종군하며 등장한다. 유진이 93사단 장교진을 구성하기 위해서 갓 프랑스에 온 장교들을 데려갈 때 제일 먼저 지목받고 지원해서 사단장 전속부관으로 뽑혔고, 사단장이 옆에서 장전해주는 기관총을 쏴댄 것부터 시작하여 온갖 기괴한 경험을 쌓아가며 이후로도 충실한 부하 사관이 된다. 유진과 동갑이기도 해서 사석에서는 말을 놓고 막말까지 할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패튼 못지 않은 성격의 맹장으로, 원 역사와 달리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 패튼과 함께 베를린 점령의 주역이 된다.[110] 한국 군정사령관이 되지 않아서 더 득을 봤고, 최종적으로 NATO 총사령관에 취임하면서 더 출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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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베니온
유진이 신입생이던 시절의 웨스트포인트 여단장생도(총학생회장)으로, 그의 기수에서 인종차별적 다툼이 일어나자 유진을 불러서 이에 대한 대책을 주문한다. 불려왔을 때 담배를 주자 유진이 감격하면서 이런 훌륭한 분이 왜 역사에 이름을 알리지 못했는지 궁금해하는데, 원 역사에선 육사를 수석 졸업하고 공병으로 임관해 근무 중 일찍이 군문을 떠나 전국전등협회(NELA)[111] 임원으로 취직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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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튼 에이브람스
유진의 부관으로 전속되는 것으로 처음 등장하였다. 부관 부임 첫날에는 아미앵의 영웅을 모시게 되어 영광스럽게 생각했지만 전입하자마자 본 게 유진과 패튼의 수준 낮은 키배 현장이었기에 유진에 대한 존경심에 금이 갔고,[112] 이후 유진을 모시면서 별의 별 꼴을 다 보게 되어 존경심이 많이 희석되었다. 집에도 못 가고 궁상맞게 술병을 끼고 사는 유진을 보다 못해 애완동물로 비글을 안겨줄 정도. 뽀삐라고 이름 붙여진 이 비글은 유진이 업무보는 동안에는 에이브람스가 돌보는 걸로 짬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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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프레덴달
마셜과 맥네어의 추천으로 북아프리카 파병 시 2군단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원 역사처럼 처참한 지휘능력으로 참패를 당한다. 마셜과 맥네어의 분석으로는 꼴아박을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113] 한참 나이어린 유색인종 유진이 사령관으로 명령한다는 상황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보고했다.[114] 이후 전쟁부 구석으로 좌천당해 펜대만 굴리며 산다. 마셜 라인이라 그런가 행정 능력은 괜찮아서, 이후 야전에는 못 나갔지만 승진은 정상적으로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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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 웨드마이어
원 역사에서도 입증된 유능한 장군으로 작중에서는 드럼의 참모장으로 초반부터 중국에 가게 됐다. 드럼도 그를 높게 평가했는지 국공내전 때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그의 부재를 아쉬워했지만 고생했는데 또 데리고 올 수 없었다고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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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알몬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36사단장. 롬멜의 낚시에 낚여서 참패를 당한다. 그리고나서 사단을 버리고 사령부로 와서 변명을 해대다가 해임당하고 밴플리트에게 자리를 넘겨 준다. 이후 맥아더 밑에 있다가 전후 다시 중국에 파견된 드럼의 참모로 부임한다. 국공내전 막바지에 왜 리지웨이가 총사령관이 되었냐며 웨스트포인트 계파의 음모라고 항의하는 대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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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경 킴/김도경
본작 오리지널 인물. 샌프란시스코 한인 가정에서 태어나 대학을 다녔지만, 소수민족 차별에 대한 사회운동을 하다 문제가 되자 중퇴 후 병사로 입대한다. 아프리카 전선에서 전차 운전병으로 복무를 시작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장교로 현지임관하여 프랑스 해방전, 아미앵 전역, 라이프치히 전투 등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특히 특히 발터 모델을 격파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현지 임관 후 승승장구하며 전시 중령까지 진급하는 데 2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은 전장의 괴물. 주인공 유진 킴도 전공을 보고 "뭐지 이 괴물은"이라고 할 정도로 엄청난 능력을 가졌다. 순수한 군사적 역량만 놓고 보면 미래에서 온 회귀자인 유진 킴보다도 더 뛰어나지 않을까라는 추측도 있다. # 이름이 부르기 어렵다 보니 별명이 여러 개인데, 첫 복무 때부터 잽스, 도쿄 킴이라고 불리다가 임관한 뒤로는 입에 매일 달고 다니는 씨발에서 따와 씨발 킴이라 불린다.
유럽전선 종결 후 조선계임을 알아본 유진 킴에 의해 픽업되어[115] 전시 대령으로 진급, 한반도 상륙작전에도 참여했다. 따뜻한 캘리포니아 출신이다 보니 조선 출신이었던 부모님께 '캘리포니아보다 '좀' 춥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한반도의 말도 안 되는 추위에 경악해서 "이건 '좀'이 아니잖아!"라고 울부짖었다.(...) 태평양 전쟁을 하다 한반도로 건너온 병력은 직전까지 따뜻한 동남아시아에 있다가 건너왔기 때문에 적응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116][117][118] 유진이 제때 진격을 정지시키지 않았으면 원 역사의 장진호 전투를 본작에서 찍을 뻔했다는 소리. 개마고원 밑에서 대기하던 미군은 이 끔찍한 추위 때문에 전투고 뭐고 개마고원으로 도망친 일본군을 수색할 바에는 일본군이 모두 동사하길 바랐을 정도였다.[119]
이후 93사단 사단장으로 보임되어 1차 국공내전 평화유지군으로 중국에도 파견, 패튼 휘하에서 기갑으로 종군하며 만주의 북중국(중공) 병력을 갈아버린다. 이후 앨리스 킴과 결혼하며 유진의 사위가 되고, 동유럽 위기 때는 전시 계급 떼이고 중령이 되어 기갑대대를 이끌고 체코에 투입된다. 조선계에다 성도 주인공과 같은 김씨고, 사위 관계이며, 전공이 뛰어난 것도 있다 보니 세간에서는 '킴의 이름을 잇는 자', '아미앵의 영웅 2호기' 정도로 불린다.
무시무시한 전공과 어울리지 않게 기본적인 성격은 유순하고 조용조용한 편이다. 앨리스 킴과 결혼한 것도 이런 성격 덕이라는 암시가 있다.[120][121] 본인은 군대에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항상 전역하고 싶어 하는데, 능력이 너무 뛰어난 나머지 강제로 말뚝이 박힌 케이스다. 오히려 이런 전역하고 싶어 하는 마인드 때문에 군 내에서는 다소 경원시당하는 감이 있다. 계속 말뚝을 박을 낌새를 풍겼다면 고속 진급이 확정된 인재인 만큼 상당한 인맥을 구축할 수 있겠지만, 맨날 전역하고 싶다고 징징대니 동료 입장에서는 좋게 볼 수가 없는 것.[122]
이 가상인물의 이름은 작가가 대역갤 내 창작대회에 명명권을 부상으로 걸어서 지어졌다. 정작 이후 김도경이 처음 등장할 때는 그런 대회가 있었다는 걸 수상받은 본인 빼고 전부 잊어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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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원 역사의 한국계 전쟁영웅으로서 유진 킴의 주시를 받았다. 공산주의자인 누나를 구명하기 위해 군문에 투신해서 93사단 소대장이 된다. 유진이 조선까지 데려갔으나, 대령을 단 이후 유진이 없는 사이에 신속하게 전역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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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제12군단장
마켓 가든 작전 몽고메리가 모델에게 제대로 낚이면서 모델의 공세를 제일 먼저 상대하는 불행한 운명을 겪게 되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집단군급 공세라는 것을 인지하고 자신들을 사지로 내몬 영국군을 위해 죽어야 한다며 위치 사수를 명하는, 정확한 판단력과 용기를 보여주었지만 부대가 소멸되었으니 전사했거나 항복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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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스틸웰
김유진이 웨스트포인트에 있을 때 교관이었고, 엑스트라 수준으로 등장한다. 유진의 말로는 중원 같은 데 저런 깐깐한 사람을 던져놨으니 뭐가 될 리가 없었다고 했지만, 김도경이 "사령관과의 인연 덕분에 DC행 면한 퇴물"이라고 평가한 것을 보면 그냥 군인으로서도 좋은 평가는 못 받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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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리 맥네어
포병과 행정의 스페셜리스트로 김유진과도 좋은 관계를 맺지만, 완고한 성격이며 병과 밥그릇을 챙길 때는 패튼과 유진도 얄짤없이 제압할 정도로 무자비하다. 원 역사와 달리 전쟁 중 데스크 워크만 했기에 살아서 종전을 맞이했고, 아이젠하워가 정계 진출을 위해서 군직에서 물러나면서 정년까지 1년간 육군참모총장으로 부임했다. 유진보다 정신적으로 우위에 있는지라 일하라고 마구마구 갈궈댄다. 원 역사에 비하면 호상이었지만 고작 6년밖에 더 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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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클리포드 하지드 리
2차 대전 연합군의 병참 사령관. 마셜도 인정한 후방 근무의 스페셜리스트. 유진이 복귀 후 연합군의 기강을 잡기 위해서 그를 털어버리는 것으로 처음 등장했다. 작중에서는 유진이 없는 동안 병참사령부를 멋대로 옮기거나 부상병들 사열시켜서 병사들의 원성을 산 것이 빌미로, 앞으로 똑바로 안하면 산제물로 만들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아고 이후에는 유진에게 철저히 복종한다. 패튼의 동기로, 원래는 만만찮은 성격이라 패튼도 함부로 못 대할 정도였는데 유진에게 털린 이후로는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패튼에게도 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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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너 R. 채피 2세
애주가에 불같은 성격. 기병 출신으로 기갑에 푹 빠졌고, 그 때문에 레븐워스에 부임하는 김유진을 기다리려고 일부러 전출을 연기한다. 보병이 전차를 이동식 토치카로 쓰려는 것에 극렬히 반발하며 유진이 보병으로 부임하자 거의 싸움이라도 걸 기세로 대했다. 이후 상황이 적당히 무마되자 빠르게 전출. 유진이 국회에서 무쌍을 찍으며 기계화 실험 사단을 만드는 데 성공하자 그리로 가며, 이후 신설된 기갑군이 기갑실로 재편되자 유진의 후임 기갑감으로 임명된다. 패튼과 마찬가지로 미군 최고의 미친개 중 하나로 원로들 사이에서 회자되며 등장이 적어서 그렇지 패튼처럼 유진이 목줄 쥐고 있었다고 한다.[123] 유진도 이러니저러니 해도 채피와 나름 친한 편이었다고. 원역사와 같이 41년에 뇌종양으로 사망하는데, 유진은 그의 묘소를 찾아 술을 뿌리며 애도한다. 그리고 원역사의 M48 패튼은 M48 채피 전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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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코벨
원역사에서나 작중에서나 유진의 기수 수석으로, 당시의 관례에 따라 공병 장교가 되었다. 이후 유진이 93사단을 편성해야 할 때 그를 사단직할 공병대장으로 데려온다. 코벨은 가기 싫어했지만, 공병부대가 필요했던 유진이 공병부대 선배와 짜고 사기 포커를 쳐서(...) 강제로 끌고 갔다. 선배가 가기 싫어서 코벨을 팔아넘겼다고. 전후에야 이 사실을 알고 유진에게 노발대발했지만 덕분에 1차대전 때 93사단 공병부대로 활약해서 명성을 얻기는 했다고 한다. 원역사의 인물은 버마 전선에서 활약해서 소장까지 진급했었다.
3.2.2.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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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킹
이른바 '미해군에서 가장 입이 더러운 남자'. 원역사에서 딸이 "미국과 해군 이외의 모든 것을 증오하셨어요."라고 한 면모를 잘 그려냈다. 김유진과 일본을 상대로 한 가상 계획을 논의하는 것으로 처음 등장했다. 그러나 유진의 아들 헨리와 킹의 딸 플로렌스가 눈이 맞아서 사돈 관계가 된다. 그러나 원역사에서도 유명한 그의 인성과, 해군을 대표한다는 입장 때문에 사돈이나 사위라고 전혀 봐주는 게 없고[124] 기싸움을 많이 벌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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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리히
원역사처럼 전쟁 중에 합참의장을 맡고 있었는데, 김유진이 대원수가 되면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그도 대원수로 계급장을 받았다. 은퇴하고 후임인 유진에게 인계하면서 이 자리는 군인을 괴롭혀서 퇴역시키려고 만든 것 같다며 정치권에 학을 뗀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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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터 니미츠
킹의 후임 해군참모총장으로, 원역사처럼 온화한 인품의 명장. 그러나 전후 웨스트포인트의 전설적인 군인 출신 맥아더 대통령, 그 후배이자 합참의장인 대원수 김유진, 그의 동기 육군참모총장 아이젠하워, 1년 선배인 공군참모총장 칼 스패츠까지 지도부가 육군판이 되면서 해군 수장으로서 극도로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유진도 그걸 알고 그와 관계를 개선하는 데 공을 들였는데, 해병대사령관을 합참에 들여서 균형을 보완하고 결정적으로 킹을 씹으면서 친해졌다.
3.2.3. 육군 항공대 → 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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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아놀드
육군 항공대를 대표하여 출연하며 원 역사의 행적과 거의 다른 것 없이 공군의 기틀을 닦는다.그리고 유진이 머스탱을 깜빡한 탓에 맥나니와 함께 유진의 멱살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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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미첼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공군 우월론자로 정치권을 설득하지도 못하고, 군부와도 척을 진지라 임시 준장에서 대령 계급의 항공장교로 좌천되었고, 결국 군법회의에 회부되어서 유죄가 나온 후 퇴역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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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T 맥나니
유진 킴의 웨스트포인트 동기. 초반 유진 킴을 인종차별하다 교정당한 뒤로[125] 유진의 결혼식에 참가할 정도의 악우가 된다. 유진은 전쟁 중에 육항대에서 그놈을 파견해서 그냥 썼다고 하지만 실책을 저질렀다는 묘사는 없고 공군참모총장까지 노렸다는 것을 보면 군인으로서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종차별주의는 끝까지 낫지 않아서 정치적인 이유로 공군참모총장이 되지 못했다.[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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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스트레이트마이어
유진 킴의 웨스트포인트 동기이며 육군항공대에 뼈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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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스파츠
김유진의 1년 선배로 헨리 아놀드 이후 최초의 공군참모총장이 됐다. 유진이 합참의장이 되고서야 처음 등장했지만 절친한 사이었는지 첫 회동 때 아이젠하워와 함께 아부를 떠는 개그를 연출하고, 둘이서 담배 타임을 가질 땐 유진이 말을 편하게 해달라고 하자 바로 말을 놓고 아이젠하워 전공과 머리카락 다 뺏어먹은 놈이라고 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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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티스 르메이
유럽 전선에서 소령 때 김유진과 처음 만나며, 유진은 그에게 중령 계급장을 달아준다. 이후 공군의 미래에 대해서 얘기를 잠깐 나눈 후, 독일을 석기시대로 되돌리라는 말에 마누라 이후로 프로포즈하고 싶은 적은 처음이라며 유진을 질겁하게 만든다. 이후 일본 전략폭격에서도 활약한다. 석기시대 매니아라 불릴 정도로 여기서도 악명을 떨쳤다고 하며, 유진은 패튼과 다른 방향의 광전사라 평할 정도.
3.3. 무기
전차유진은 미래인으로서 MBT를 추구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가능한 한 잡스러운 전차들을 빼려고 했기 때문에 2차대전 당시 묘사되는 전차 종류가 적다. 전간기 당시에는 기술 문제로 경전차, 중(中)전차, 중(重)전차의 동시 사용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언급하기는 했지만 막상 전간기에는 미군 군축이 심해서 다포탑 전차 같은 삽질을 유진이 컷하는 등의 온갖 시행착오가 있었기 때문에 만들기는 어려웠고, 결국 유진이 사재까지 동원하며 개발을 밀어붙인 덕분에 중(中)전차 개발이 매우 빨라져 1940년 1세대 MBT급 성능의 M26 퍼싱을 개발하는데 성공하고 이후 퍼싱 전차를 그냥 많이 만들었습니다로 응수해 밀어붙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보면 경전차와 중(重)전차는 아예 안 만들었거나 별 존재감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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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917 경전차
전차의 개념을 알고 있던 회귀자 유진 킴의 고안해 미국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전차로, 프랑스 르노 FT의 라이센스였던 원 역사와 달리 오리지널 미국 기술이다. 그와 별개로 동시기 1차대전으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독자적으로 전차를 개발하고 있었고 본작의 1차대전 프랑스 전차가 경전차라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수렴진화한 물건으로 보인다. 완성 시기는 영국과 프랑스보다 빨랐기 때문에 본작에서는 전차 종주국의 자리를 미국이 차지했고, 자체적인 전통이 부족한 미국이 원조라고 자부심을 갖게 만든 물건이 되었다. 이 때문에 처칠은 전차 원조는 영국이라고 유진에게 시비 걸었다가 분노한 유진이 갈리폴리 전투를 거론해 죽빵을 날리게 만드는 사건도 벌어졌다.[128]
첫 실전은 패튼이 유진을 데리고 시험 삼아 사용하자며 판초 비야 원정 때 판초 비야 간부 중 한 명과 그 직속 부하들을 털어버릴 때 2대 들고 갔는데, 기관총도 없던 도적들이라 당연히 쳐발렸고 전차포에 맞은 도적 간부는 머리만 남기고 산산조각났다. 이후 패튼은 유진의 허락 하에 전차 본네트에 도적 시체들을 달고 간부의 수급을 장대에 매달아 위풍당당하게 귀환하는 기행을 벌여 퍼싱 장군은 진짜 도적놈들은 자기 부대에 있었다고 푸념했고, 유진은 졸지에 헤드헌터라는 별명을 얻었다.
대전기 당시 미국의 강력한 공업력의 특성상 수천 대나 개발하여 유럽 전선에 쏟아부었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자국산 전차에 M1917 전차 천수백 대를 독일군 참호선에다 대거 투입하여 악명 높은 독일의 참호선을 산산조각내는데 성공했다. 당시 독일 제국은 순무의 겨울을 찍을 정도로 돈이 없어서 전차를 만드는 걸 포기하고 각종 대전차 전술을 고안해서 맞섰는데 효과는 상당했지만 근본적인 물량 문제로 인해 끝내 밀려났다고 묘사된다. 여기에 악이 받쳐서인지 본작에서는 나치 독일의 전차 개발 속도가 원 역사보다 더 빨랐다.
전간기에는 여러 나라에 팔아먹었으며, 중국과 일본에도 대거 팔았는데 일본의 경우에는 조선 경성에다 조선미쓰비씨-포오드 트랙터라는 이름의 공장을 세워 M1917을 1930년대 말까지 대규모로 라이센스 생산했다. 수천 대는 뽑았다고. 이후 1942년 경성 탈환 작전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공작원들이 공장에서 M1917을 훔쳐 경성 주둔 경찰들을 제압하는 것으로 잠깐 등장한다.[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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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3 리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땜빵용으로 개발해 2차대전 초반 유럽 연합군에다 넘긴 전차다. 북아프리카 전역 초반까지도 75mm 주포는 나름 쓸만했지만 독일군 4호 전차의 개발이 빨라 오래 가지 않아 도태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중국 전선에서는 이만하면 충분히 강력해서 유진은 정부의 허락 하에 킴가의 사비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다 M3 리 전차를 보냈으며,[130] 리가 1개 연대 분량은 있었고 1개 연대는 탱켓을 포함한 잡스러운 연대였지만 당시 중국 전선 기준으로는 충분한 화력이라 휴 드럼이 장제스와 말을 맞춰 사천성에서 비장의 수로 숨겨두었다가[131] 일본군이 검각을 넘어서 충칭을 공격한다는(...) 작전을 시행해 일본군이 대거 사천성으로 유입되자 투입되어 일본군을 탈탈 털었는데, 검각을 넘었으니 당연히 제대로 된 전차나 장갑차는 없었고 대전차무기는 유진의 공작으로 개발되지 않아 일본군 보병들을 일방적으로 털어버렸다고 한다.[132] 2차대전 당시 전차 연대의 규모상 백수십~2백여 대는 되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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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4 셔먼
전간기에 유진이 개발을 주도한 전차 중 하나로, 본작에서는 유진으로 인해 미국의 전차 개발 속도가 빨랐고 전간기 군축 당시에도 2차대전을 예견한 유진이 가문의 사비를 써가면서 개발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발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셔먼이 데뷔했던 북아프리카 전역 당시 독일군은 4호 전차를 사용하고 있었고 본작의 셔먼은 중후기형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비슷한 성능끼리 영혼의 맞다이를 한창 펼쳤을 것으로 보인다.
셔먼의 개발이 빨랐던 덕분에 랜드리스로 명성을 날렸으며, 원 역사의 T-34만큼은 아니지만 이쪽도 엄청나게 찍어내서 소련에도 엄청 뿌렸는데 당시 소련군은 미군 전차를 매우 선호해서 아예 샌-프랑코에 산업스파이를 침투시켜 자국 전차 개발에 참고했다고 한다. 그와 별개로 티거 개발 도중에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셔먼 잔해를 보고 히틀러가 난리 친 것으로 보아 본작의 티거와 판터의 엔진 구조가 원 역사와 달리 파워팩과 비슷할 수도 있다. 엔진은 몰라도 티거 1에 경사장갑을 달았던 것으로 보아 원 역사와 다소 차이는 있던 건 확실하다.
정황상 유진의 의사에 따라 각종 파생형들을 제쳐놓고 형식을 단일화시킨 걸로 보이며, 유진이 미래인의 특권을 활용해 잡다한 걸 쳐내고 MBT까지 최대한 효율적으로 도달하려 했기 때문에 원 역사의 T20-T23-T26 루트로 개발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대체로 T20이나 T23에 가까웠을 것으로 본다. 유진은 기체 성능을 일일이 외우는 밀덕까지는 아니라서 중요한 사항만 집어주고 세세한 건 현장 기술자들에게 맡겼기 때문에 정확한 제원과 형식은 불명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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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0 잭슨
원 역사의 M36 GMC. 원 역사의 가장 성공한 대전차 자주포를 본 따 유진이 개발을 지시했으며 이름도 같은 잭슨이다. 유진은 M26 퍼싱 중전차의 개발이 늦어질 것을 염두에 두어 M3 리 전차와 같이 MBT로 가기위한 땜빵용으로 M36 GMC처럼 90mm로 업건해서 개발했다. 원 역사의 M36 GMC는 개발이 늦어 등장 시기가 2차대전 끝물에서나 등장했지만 M10 잭슨은 그 미군의 흉악한 90mm 대전차포를 장착한채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부터 투입되어 티거가 나오든 티거 할애비가 나오든 잭슨으로 때려잡을 수 있다고 유진이 독백한다.유진 : 운용병들만 그저 죽어날 뿐이라 문제지원 역사에서는 소련을 견제하는 창끝 중 하나였으나 검머머 세계관에선 랜드리스 품목에 추가되어 소련군이 가장 선호하는 미군 무기가 된 것이 아이러니. 천왕성 작전에서 6호 전차 티거까지 잭슨의 90mm로 날려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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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26 퍼싱
원 역사의 2차대전 말기에 완성된 것과 달리 전간기부터 유진이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중전차로 1940년에 완성되어[133] 소련에 랜드리스로 보냈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천왕성 작전에서 데뷔하는 위용을 선보였다. 당시 독일군은 6호 전차 티거는 완성되었지만 5호 전차 판터는 개발 도중이라 없던 상태라서 퍼싱이 튀어나오자 독일군이 속절없이 발렸다고 묘사된다. 1941년 서부전선에서 5호 전차나 티거 2개 개발된 이후에도 파워 인플레에 밀리기는커녕 신뢰도나 중전차의 까다로운 정비 문제가 있었지만 여전히 독일 전차를 다 깨부술 수 있었다고 한다. 퍼싱의 개발이 얼마나 빨랐는지 실감할 수 있는 부분.
셔먼 때부터 파워팩을 비롯해 엔진 문제가 원 역사보다 훨씬 덜하다고 언급되는 걸 보면 실제 성능은 원 역사의 M46 패튼~ M47 패튼의 성능에 더 가까웠을 것으로 보이며, 유진이 전간기부터 로비를 해가면서 수송함을 사비로 개발하면서 중량 문제를 덜려고 했다는 언급이 있기 때문에 체중도 41t에서 더 벌크업했을 수도 있다.(M47 패튼은 47t에 가까웠다) 1세대 MBT와 비슷한 성능인 걸 보면 알겠지만 MBT를 일찍부터 추구하던 유진의 사상이 담긴 물건답게 MBT에 가까운 물건이며 실제 포지션도 그랬다. 이런 밸런스 때문에 주코프는 랜드리스된 퍼싱 전차를 좋게 생각했다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부터 소련군이 미군 전차를 원 역사보다 훨씬 많이 랜드리스했다는 언급이 있기 때문에 T-34에 가까운 물량전을 보여줬을 수도 있다.[134]
독일군이 못 족치는 건 아니라서 발터 모델은 퍼싱 수백 대가 성가시다고 고기분쇄기를 가동해서 시원하게 갈아버리긴 했는데, 이놈 간다고 기동전을 격렬하게 벌여서 물자를 엄청나게 날렸다고 묘사되는 걸 보면 퍼싱 잡는 게 쉬운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당대 미국의 장기인 물량전 때문에 미군은 퍼싱이 많이 날아가든 말든 그보다 더 많은 퍼싱을 보급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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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니 전차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유진의 주도로 여러 종류가 개발되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당시 병사들은 유진이 돈 헤처먹으려고 쌩쇼한다 생각했지만, 막상 써보니 쓸만해서 킴의 뒷돈에서 가호로 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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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48 채피
2차대전 이후에 개발되었으며, 원 역사와 달리 패튼이 오래 살아서 요절한 채피가 패튼의 이름을 대신했다. 원 역사의 M46~M47 포지션이 퍼싱에게 넘어갔기 때문에 원 역사의 M48 패튼과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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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전차
21세기 당시에 유진의 이름에서 모티브를 따온 전차가 있다고 언급된다. 성능은 불명.
항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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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1 머스탱
샌프랑코 사가 개발한 항공기로, 개발 과정에서 멀스로이스 멀린 엔진을 훔치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여차저차한 끝에 1939년에 완성되었다. 유진조차 자기가 완성시킨 게 머스탱인 줄은 몰랐다고. 랜드리스가 막 시작되었을 때 완성된지라 미군에도 납품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영국 쪽에서 미군이 사정상 주기 어렵다고 하자 한 번들렀다가 B/C형의 엄청난 항속거리에 반해 그대로 수백 대를 질렀고, 유진은 아놀드와 맥나니에게 멱살 잡히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머스탱의 긴 항속거리가 보장되면서 2차대전 초반부터 연합군에게 엄청난 이점을 안겨주었다. 덕분에 영국 본토 항공전이 일어나지 않은 대신 영국이 독일 본토 항공전을 일찍부터 시도할 수 있었고, 유럽 전선은 물론 드넓은 태평양에서 싸워야 하는 태평양 전역에서도 선호되었다고 한다. 거의 전략무기에 가까운 취급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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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4F 와일드캣
과달카날 해전에서 돈틀리스, 데바스테이터와 함께 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와 싸웠는데 하필 상대가 중일전쟁을 겪었던 베테랑 일본군이라서 상대가 지포라이터라는 별명의 제로센임에도 밀렸지만 시선을 제대로 끄는데 성공하면서 그 틈에 돈틀리스 급강하폭격기 부대가 아카기, 카가, 소류를 격침시키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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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D 돈틀리스
과달카날 해전에서 와일드캣, 데바스테이터와 함께 투입되어 데바스테이터, 와일드캣이 일본군 기체의 시선을 끄는 틈을 노려 급강하폭격해 아카기, 카가, 소류를 격침시키는데 성공했다. 그와 별개로 육군항공대, 해군항공대, 해병대가 모두 핸더슨 비행장에 모여 전함 무츠 및 경항모 2척과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는데 핸더슨 비행장에 있던 돈틀리스 비행사인 로프턴 헨더슨(Lofton Russell Henderson) 소령이 헨리 킴의 머스탱과 함께 경항모 준요를 격침시켰다. 당시 헨더슨은 치명상을 입은 데다 기체 손상도 커서 자폭했다고.
헨리가 해군항공대에 처음 들어왔을 당시 땅개 애비가 육항에만 머스탱처럼 좋은 걸 뽑아줬다, 땅개 아빠에게 급폭도 좋은 걸로 뽑아달라고 해라고 투덜거린 걸 보면 당시 급폭 부대는 돈틀리스의 성능에 다소 불만이 있었던 모양. 엄밀히는 본작의 머스탱이 유독 시대를 앞서나간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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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D 데바스테이터
과달카날 해전에서 와일드캣, 돈틀리스와 함께 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를 공격했지만 이미 구식 성능이라(...) 발렸다고 묘사된다. 그래도 시선 유도는 성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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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6F 헬캣
1942년 대만해협 전투에서 미군 신형기로 투입되어 칠면조 사냥을 대만에서 찍었다. 본작에서는 과달카날 전역에서 패배하자마자 일본군이 동남아를 포기하고 중국 전선에만 집중해서 필리핀 해 해전, 레이테 만 해전이 없는 대신 대만해협에서 둘을 합친 피해가 동시에 나왔다고 한다.[135] 이후 미군이 군산에 상륙한 뒤 일본군이 카미카제를 감행했기 때문에 이들을 막는데 투입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나, 이건 제대로 된 전투가 아니었기 때문에 2차대전 당시 실질적인 전투는 대만해협 전투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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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4U 콜세어
1942년 대만해협 전투에서 미군 신형기로 투입되어 칠면조 사냥을 대만에서 찍었다. 본작에서는 과달카날 전역에서 패배하자마자 일본군이 동남아를 포기하고 중국 전선에만 집중해서 필리핀 해 해전, 레이테 만 해전이 없는 대신 대만해협에서 둘을 합친 피해가 동시에 나왔다고 한다.[136] 이후 미군이 군산에 상륙한 뒤 일본군이 카미카제를 감행했기 때문에 이들을 막는데 투입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나, 이건 제대로 된 전투가 아니었기 때문에 2차대전 당시 실질적인 전투는 대만해협 전투가 유일하다.
항공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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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싱턴급 항공모함
새러토가
본작에서는 미드웨이 해전이 생략되고 바로 과달카날 전역에 돌입하는데, 과달카날 해전에서 요크타운, 엔터프라이즈, 호넷과 함께 투입되었다가 요크타운, 호넷이 격침당하는 와중에 엔터프라이즈와 함께 살아남았다. 정황상 원 역사처럼 끝까지 살아남았다가 핵실험 엔딩을 맞이하거나 평범하게 스크랩 엔딩을 맞이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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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크타운급 항공모함
요크타운
본작에서는 미드웨이 해전이 생략되고 바로 과달카날 전역에 들어가 과달카날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 호넷, 새러토가와 함께 투입되었다가 호넷과 동시에 격침당했다. 원 역사 수준의 데미지 컨트롤은 보여주지 못하고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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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크타운급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과달카날 해전에서 요크타운, 호넷이 격침당할 때 살아남았다고 언급된다. 이후 원 역사처럼 끝가지 살아남았으며 해군 최고의 자부심이었다는 언급으로 보아 원 역사처럼 '승리의 E'로 이름 날린 것으로 보인다. 조선 상륙에도 참가했다고.
전후 엔터프라이즈가 돈 문제로 스크랩당하게 되자 유진이 샀는데, 해군은 처음에는 고마워했지만 장난감으로 개조(?)했고 행사에서 패튼이 마이크를 들고 해군을 모욕하는 대사를 해서 해군이 차라리 스크랩해버리는 게 낫다며 노발대발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유진은 한국이나 일본에 우호의 표시로 넘기겠다 말했고 이에 양국이 세일즈를 한 끝에 한국에 박물관으로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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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크타운급 항공모함
호넷
과달카날 해전에서 요크타운, 엔터프라이즈, 새러토가와 함께 투입되었다가 요크타운과 동시에 격침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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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스프급 항공모함 와스프
과달카날 해전 당시 데려오고 싶었는데 타이밍이 안 맞아서 참전하지 못했다고 언급된다. 당시 일본군은 정규함모 4척에 경항모 2척이라 과달카날 해전 당시 4 vs 6으로 싸워야 했지만, 다행히 경항모 2척은 핸더슨 비행장 부수러 간다고 항공전대에서 이탈한 상태라서 실질적으로 4 vs 4 전투가 성립되어 큰 부담이 안 되었고 경항모 2척은 과달카날 섬에서 미군이 조선인 노무자들의 도움까지 받아 가며 필사적으로 수리한 덕분에 핸더슨 비행장에 있던 육군항공대와 해군항공대, 해병대 항공기들이 격침시켜서 수습되었다.
3.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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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D. 록펠러
직접 등장은 없고 언급만 몇 번 된다. 유진이 처음 회귀했을 때는 장사를 하려고 했지만, 뒷배가 없던 당시 조선계 이민자의 특성상 록펠러처럼 무시무시한 자본가들에게 쓸려나갈 거라 생각해서 본인이 군문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전간기에 페니실린 대량생산을 위한 투자를 하는 회사 중 하나로 킴가 외에 록펠러가 언급된다.[137]
본작에도 반독점법이 언급된 걸 보면 인생은 원 역사와 별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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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퍼트넘 플린트
유진이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할 수 있게 추천서를 써준 공화당 소속의 캘리포니아 주 연방상원의원. 유진의 나이에 맞지 않는 해박한 식견과 처신에 감탄하며, "귀하가 웨스트포인트에 간다면 어떤 일이 있을 것 같냐"는 질문을 던지는데, 유진은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인, 웨스트포인트 입학 프로파간다로, 마스코트로 팔아먹을 수 있다"고 답했다. 이후 그의 장구한 미국 찬양과 기독교 신앙고백을 들은 후 자격을 인정하고, 지원자가 많아서 시험을 통해 추천서를 내주었다. 그리고 이때의 문답은 제대로 실천되었다. 실제 인물은 1905년~1911년 동안 단임만 했는데, 작중 유진이 입학한 시기는 1911년 6월이므로 그의 임기 끝물에 인터뷰를 한 셈이다. 1929년에 사망했으니 유진이 1차 대전의 영웅으로 전세계에 명성을 떨치는 것까지 봤을 것이며 작중 세계관에서는 그의 최대 업적이 됐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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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커티스
캔자스 주 상원의원이자 주인공 유진 킴의 장인어른. 정계에서 유진을 든든하게 지원해 준다. 대체로 원 역사와 비슷한 생애를 보냈지만 후버의 부통령이 되기를 거절한다. 그 결과 정치 보복을 당하고, 우유 원정대 사건이 마무리된 후에는 죽어라 정치인 안한다는 유진을 포기하고 맥아더를 자신의 후계자로 캔자스 상원의원 자리를 물려주고 그를 훌륭한 정치인으로 키운뒤 정계를 은퇴한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돈인 김상준 옹의 고희연[138] 뒤에 사망한다. 슬하에 2남 2녀로 나오는데, 장남인 찰스 커티스 주니어와 막내인 도로시 마가렛 커티스가 오리지널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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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포드
전설의 실업가. 유진이 작성한 아마겟돈 레포트를 입수하고 유진의 능력, 특히 통찰력을 바로 알아보며, '부지런한 사업가'답게 유진의 웨스트포인트 졸업식에 바로 나타나 유진의 후원자가 되기를 자처한다. 이 과정에서 유진의 장인 찰스 커티스 의원과의 불꽃튀는 혓바닥 대결도 펼쳐진다. 이후로도 유진을 지속적으로 후원하며, 유진도 그에 보답하여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하면서 포드사가 성장하는 데 일조한다. 그야말로 상부상조의 관계. 유진이 만든 카드게임에 빠져서[139][140] 팩을 까며 '황금 카드는 대체 어느 악마가 만든 발상이냐 이 내가 모든 카드를 황금으로 채울 수가 없다니!' 하고 분개하는 장면도 있다. 여담으로 유진의 장남 헨리 킴의 헨리는 헨리 포드가 후원자이자 사실상 대부로서 직접 요구한 이름이다(...) 노년에는 특유의 고집과 반유대주의 성향 때문에 2차 대전 발발 이후 골머리를 앓게 하며, 노망이 들어서 결국 회사를 말아먹을 상황에 처하자 아들인 에젤 포드에 의해 회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
에젤 포드
핸리 포드의 아들. 유진이 다른 회사의 차를 탄다고 타박하던 과정에서 처음 만났는데, 마침 유진과 같은 1893년생이라 헨리 포드의 소개로 가끔씩 서로 엿을 먹이는 친구가 되었다. 위암으로 잠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사이 노망이 난 아버지가 회사를 말아먹게 생기자 시한부인 상태로 잠시 복귀하여 아버지를 끌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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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듀보이스
당대 흑인 사회의 거두. 유진이 1차대전 당시 93사단을 최강의 흑인 부대로 편성하기 위해 커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커티스가 그를 위해 듀보이스의 도움을 받았다. 듀보이스도 1차대전으로 흑인들의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협조했다고 언급되는데, 93사단에 흑인 엘리트를 3만이나 모집할 수 있던 건 듀보이스의 도움도 꽤 있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금산 김가와 친하게 지냈는지 김상준의 70살 생일 잔치에도 참석했다. 김가가 93사단 참전용사의 상당수를 미국 서부와 캘리포니아로 데려왔고,[141] 1차대전 일을 계기로 미국 서부의 흑인들과 친하게 지냈다는 묘사가 나오기 때문에 특이한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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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미첼 팔머
1919년, 매카시즘의 프리퀄인 '제1차 적색 공포'를 주도한 법무장관. 원 역사에서는 1920년까지 절정에 달했다 점차 사그라들었지만, 본작에서는 1919년 유진이 에디스 윌슨의 비선실세를 폭로된 뒤 정적들이 팔머에게 쓰러진 대통령은 결제할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닌데 어떻게 대통령 결제를 운운하고 적색 공포를 주도한 거냐며 너도 비선으로 시민 권리를 탈법적으로 제약했다고 공격당해 쫓겨났고, 제1차 적색 공포는 빠르게 종결되었다.[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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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드거 후버
우드로 윌슨이 쓰러진 후 실세로 부상해서 빨갱이 사냥을 하던 알렉산더 팔머에게 발탁되어서 출세했으나, 김유진의 폭로로 일자리를 잃고 추리 끝에 그가 윌슨을 날려버렸다는 것을 유추한다. 이후 그를 떠봐서 자신의 추론이 맞았다는 것을 알고 박장대소하지만 미래인인 유진은 그가 동성애자라는 약점을 알기 때문에 바로 역습을 당해서 약점을 잡힌다. 이후 원 역사대로 짤린 직장으로 복귀하는데 성공하고 FBI 국장이 되며, 유진과는 피차 약점을 잡고 있는 사이라 서로 전문 영역을 존중하는 불가근 불가원의 사이가 되었다.
서로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둘의 업무상 상성은 좋은 편이라[143] 백인 공작원들만 많았던 당시 FBI 입장에서 유색인종 정보망은 주로 유진을 통해 많이 얻었다고 하며, 루즈벨트 대통령이 독일을 상대로 2차대전 선전포고를 할 방법을 고안하라고 하자 유진이 히틀러를 도발해 히틀러가 유진에게 암살 시도를 하도록 만들다는 작전을 고안했고 아예 자작극까지 둘이서 논의하고 있었지만 진짜로 나치 간부가 유진의 가족들을 공격하고 집을 불태우면서 유야무야되었다. 둘 다 인생 감옥에서 쫑날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잘 마무리되었다고. 또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 대신 유진이 대공황기 장악하는데 성공한 일본계 미국인 집단에서 일본 스파이 가능성이 높은 인물들을 둘이서 골라내 '처리'하는 것도 둘이 주도했다.[144]
매카시즘 당시에는 매카시즘에 협조했다 유진의 위협 때문에 유진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에 물러났고, 여기서도 원 역사처럼 FBI랑 CIA의 사이가 나쁘다고 언급된다. CIA는 FBI에 대한 경쟁의식 때문에 전신 중 하나인 OSS 시절 협력했던 아이젠하워의 1948년 대선 때 협조했다.[145][146] 유진의 말년에는 미국 흑인 민권 운동에 참여했다 유진이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암살 시도를 당하자 암살미수범의 신원을 알아내 망상에 찌든 심한 정신병자였음을 밝히며 유진에게 민권 운동을 그만두라고 조언하나 유진은 뜻을 굽히지 않았지만 결국 며칠 뒤 사망해서 뒷처리하느라 고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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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밀러
오리지널 인물. 유진 킴의 1차 세계대전 전역의 휘하 병사. 당시 흑인의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해 본토에서는 엘리트 흑인들이 많이들 자원입대했는데 그 역시 변호사 출신 엘리트이며 어떻게든 살아남아 본토로 돌아간다. 변호사를 일개 졸병으로 참전한 거니 현대 입장에서는 경악스러운 부분. 프랑스에서 만난 백인 간호사 에밀리 에반스와 결혼했지만 남부의 고향에 돌아갔다가 군대도 안 간 레드넥들에게 살해당할 뻔했고, 이럴 줄 알고 유진 킴이 보낸 아이크와 패튼에게 구출되어 캘리포니아로 이주, 김씨 가문의 집안일과 기업을 돌보는 집사 변호사로 근무한다. 유진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신뢰도가 매우 높다. 밀러 주니어가 킴가의 주식 일부를 가지고 있고 이후 후손들이 킴가와 사돈관계도 맺는 등 킴가의 가로(家老)나 다름없는 밀러 가문의 시조. -
존 밀러 주니어
존 밀러와 에밀리 밀러의 아들로 2차 세계대전 전역에 나섰지만 아미앵에서 93사단이 전멸하는 과정에서 다리 하나를 잃었다. 전후 아이스크림 사업을 시작하는 헨리가 불알친구인 그를 픽업, 헨리의 사업에 동참한다. 나름 성공한 아이스크림 가게를 샌프랑코에 합병시켜서 장남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용도로 사용된다는 이야기를 듣자 속으로 적색혁명을 일으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자신에게도 한몫 간단 말에 그대로 자본주의가 옳았다며 돌변하는 게 꽤나 코믹하다.
참고로 에필로그에서 '에릭 스미스 밀러'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친가가 대대로 93사단에서 복무해온 밀러 가문이고 외가가 킴 가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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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폰지
폰지 사기의 어원이 된 그 인물. 독일 경제를 교란시키고 나치 상류층과 연줄을 만들 목적으로 김유진과 후버의 기획 하에 감금해서 새로운 사업모델을 개발하게 해서 들려주고 카밀로 콘티라는 가짜 신분까지 만들어줘서 독일로 보낸다. 독일에서 나치 최고위층을 등쳐먹고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는 와중에, 홀로코스트 수용소 현장을 촬영한 증거를 확보,[147] 알베르트 괴링의 도움을 받아 괴링의 밀수선을 타고 스페인으로 도망쳐 스페인 미국 대사관에 정보를 넘기는데 성공하나 정작 폰지는 행방불명되었다. 이 끔찍한 증거[148]는 미국에서 참전 여론을 불붙이는 데 기여했다.
이후 유럽에서 어떻게 도망가는데 성공했는지 몰라도, 연합군과 추축군 양쪽 모두의 추격을 피한 뒤[149] 아두이노 로렌초로 다시 한번 신분을 세탁하고 살아남았다. 전후 나치 인사들의 재산과 신분을 세탁해서 아르헨티나로 밀입국시켜주는 사업을 운영하는데, 사실 나중에 이스라엘에 그 명단을 팔아넘겨 다시 한번 돈을 챙기겠다는 구상으로 그들의 신상정보를 모아두고 있었다. 이게 진정한 연금술 아니냐는 폰지의 드립이 압권이다.
이후 이스라엘의 모사드와 협력하여 프란츠 슈미트를 비롯해 남미로 도주시켜준한 나치 잔당들을 잡아들이면서 현대에는 전설적인 나치 사냥꾼으로 알려진 듯하다. 다만 아두이노 로렌초와 찰스 폰지가 동일인물이라는 것은 증거는 없는 야사로만 남은 듯.[150]
2차대전 때 추국국과 연합국 모두의 눈을 피해 신분 세탁을 수 차례나 성공한 희대의 사기꾼이지만, 말년에는 다른 사기가 아닌 굳이 나치 잔당을 족치는 사기로 여생을 보낸 것으로 보아 오스카 쉰들러처럼 그 나름대로는 갱생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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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낸스 가너
170화 김상준의 70세 생일 잔치에 손님으로 참석했다. 유진 킴이 칠순 잔치를 크게 벌이겠답시고 백악관에다 초대장을 줬는데, 당시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막 집권한 상태로 뉴딜 정책이 시작되고 금주법 폐지를 준비하는 와중이라 바빠서 안 올 줄 알았더니 토템이랍시고 루즈벨트가 대신 보내버렸다. 이걸 본 유진은 본작의 커티스가 후버 부통령직 거절해서 다행이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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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루치아노(Charles Luciano)
170화 김상준의 70세 생일 잔치에 손님으로 참석해 김상준에게 자기는 유통업을 운영하고 있는데 자기 사업에 언제나 큰 도움을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이를 본 유진이 유신에게 왜 마피아 두목 불렀냐 물었고 유신도 나도 깡패가 올 줄 몰랐다고 황당해했다. 찰스 루치아노는 금주법 시대 마피아 업계에서 가장 큰 권력을 누린 마피아인데,[151] 부통령까지 참석할 정도로 세간의 눈에 띄는 연회에 참석하겠답시고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찾아온 걸 보면 김가와 사업적으로 꽤 친한 걸로 보인다. 유통업으로 친하다고 루치아노가 말한 것과 금주법 시대 뉴욕에도 우보크 지점이 있다는 언급을 보면 우보크에 자회사 밀주를 납품하거나 우보크 뉴욕 지점 위탁 건으로 친해졌던 걸로 보인다.[152][153]
사실 독자들 사이에서 김상준이 샌프란시스코 지진 당시 마적 두목이었다는 언급과, 당대 캘리포니아에서 김가가 세력을 다지는 과정에서 캘리포니아 뒷세계 사람들과 치열한 다툼을 벌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김가 사람들이 뒷세계와 관련된 암시가 많다는 점 때문에[154][155] 김가가 미국 서부의 마피아 두목 비슷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많다. 김가가 마피아 비슷한 게 맞다면 당대 마피아계에 있어 김가는 앞세계와 뒷세계 모두 정점에 달한 마피아계의 언터처블이나 다름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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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카포네
직접 등장하지는 않고 원 역사처럼 탈세로 체포되었다고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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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너 웰즈
국무부 차관. 원 역사처럼 민족자결주의를 지지하는 국무부 차관으로, FDR의 측근이자 그가 뜻대로 통제할 수 없는 코델 헐 대신 국무부를 장악하기 위해서 세운 인사. 유진의 아마겟돈 레포트를 보고 그 식견에 감탄했으며, 사상도 잘 맞아서 유진과 여러 번 회동한다. 그러나 원 역사에서처럼 흑인 짐꾼에게 성매매를 제안했던 것이 발각되어서 정치 생명이 끊어졌다. 이후 가끔 언론에 등장했는데, 유진이 매카시즘을 진압하기 위해 대선 출마 페이크를 칠 당시 유진은 루즈벨트의 후계자 자격이 있다며 바람을 부는 걸 도와주기도 했고 국무부 장관이 된 후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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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델 헐
루즈벨트 대통령 시대 국무장관이지만 루즈벨트와 사이가 나빠 실권을 차관인 웰즈에게 빼앗겨 웰즈와 강하게 견제하는 사이다. 그와 별개로 유진의 외교적 식견을 높게 보기 때문에 2차대전 당시부터 유진과의 사이는 꽤 괜찮았고, 유진도 헐에게 나름 우호적으로 대했다. 하지만 루즈벨트가 1940년 5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초반에 급사할 당시에도 유언을 남길 때 자신을 배제한 것에 불만을 가져 공화당의 맥아더 전쟁부 장관이 정치 초짜인 월레스를 배제하고 손잡자는 제안에 넘어가기도 했다.[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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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2차대전이 끝난 지 몇 달 뒤인 1943년 2월에 핵실험이 완성되었고 1945년 국공내전 때 우한에 사용하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이 본작의 핵실험에도 관여했으리라 보고 있다.[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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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포스터 덜레스
역사가 바뀌어서 맥아더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내게 된다. 강경한 반공주의자로, 은근히 유진을 견제하는 데다가 군인 출신인 그가 반공에 적극적이지 않다고 불만도 품어서 유진과는 다소 긴장 관계였다. 주요 업적으로 아시아로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태평양-아시아판 NATO라고 할 수 있는 PATO의 창설인데, 이름이 이름이고 아시아가 다양성 때문에 뭉치기 어렵다는 것을 아는 독자들을 빵 터뜨렸지만 의외로 잘 작동해서 이후 국무장관이 된 유진도 잘 써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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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
매카시즘의 어원이 된 그 매카시. 유진도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땐 내가 아는 그 매카시가 맞는지 긴가민가했는데 사진을 보고 암약단체 사진의 그 얼굴과 일치하기에 매카시임을 알아보았다. 유진은 매카시의 존재를 알게 되자 마침 자신의 대소련 플랜[158]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적색 공포가 꺾일 필요가 있는데 매카시를 이용해서 날려버리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원 역사대로 민주당이었다가 공화당으로 이적 후 매카시즘의 광풍을 이끄는데, 공화당의 일부 인사들이 유진과 맥아더의 힘이 너무 세진다고 '적당히 힘을 꺾어놓거나 아예 쫓아내자'는 첨병으로 매카시를 내세웠고 민주당도 이에 편승하면서 판이 더 커졌으나 유진의 치밀한 반격으로 히틀러와 동등한 취급을 받는 지경에 처하고, 이에 유진과 미 군부를 빨갱이라고 몰았다가 역풍으로 정치생명이 끝장나고 의회에서도 왕따가 되어서 원 역사처럼 술만 푸다가 정신병원에서 비참하게 사망했다.
원 역사에서는 1950~1954년이 매카시즘이었지만 본작에서는 1946년 시작되어 1947년 유진이 주도한 "매카시즘을 내세우는 놈들은 히틀러 워너비다"라는 새로운 메타에 의해 둘이서 치열하게 부딪친 끝에 1948년 아이젠하워의 대선 정국으로 완전히 진압되어 1~2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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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러셀(Richard Brevard Russell Jr.)
1948년 미국 대선에서 조지아주 상원의원이자 민주당 대선후보로 등장한다. 본작의 1948년 대선은 유진 킴의 개입으로 매카시즘 역풍을 타고 아이젠하워가 대선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본작의 민주당은 루즈벨트가 3선에 사망하고 월레스가 1세대 반공 메타로 재선에 실패한 뒤 공화당의 맥아더가 대통령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민주당 내 진보파와 딕시크랫의 세력이 비슷해서 내홍을 앓고 있었다. 리처드 러셀은 맥아더가 재선을 포기하고 아이젠하워 지지를 선언해 아이젠하워가 공화당 대선후보가 된 상태에서 사실상 패전투수로 유입된 사람이었다.[159]
리처드 러셀은 본작 1948년 당시 민주당의 세력구도와 타협을 그대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러셀은 딕시크랫이지만 <주권민주당> 분당 당시에는 민주당에 남아있어서 맥아더가 당선되었다는 딱지가 없었고,[160] 의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공화당 내 보수파들과도 손을 잡는 <보수 연합>의 핵심 중진이었다. 이 때문에 FDR 재임 당시 여야를 막론하고 보수파를 규합해 루즈벨트의 진보 정책을 저지하려 했지만, 극초기 뉴딜 정책은 강력히 지지해서 뉴딜이 조지아주 농촌을 살릴 거라 주장해 지역구 선거에서 승리하기도 했다. 또 유색인종 차별을 주의 권리라 강력하게 옹호했지만, 동시에 모든 학생은 인종을 가리지 않고 최소한 학교에서 점심만큼은 무료로 먹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40년대 보수파 딕시크랫치고는 이래저래 독특한 인물이었던 것.
러셀은 대선에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생각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조지 마셜에게 접촉했지만 조지 마셜은 자신은 야인으로 살고 싶다며 거절했고, 그나마 악연이 적은 군부 인사들과 접촉하려 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161] 결국 민주당은 현 정권의 과도한 군비와 회복되지 않는 경제를 공격하는 방향을 집중 공략했고, 맥아더-유진+아이젠하워로 이어지는 '군부의 국가 지배 시도' 주장은 지지율 상승에 제법 도움이 되었지만[162] 이때 매카시즘 역풍을 진압하기 위해 바깥활동을 하던 퍼싱이 죽자 대선 정국은 완전히 끝났다.[163] 이후에는 러셀의 등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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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태프트(Robert Alphonso Taft Sr)
1948년 미국 대선의 공화당 경선에서 오하이오주 상원의원이자 아이젠하워의 상대로 등장한다. 민주당의 좌향좌가 FDR때부터 시작되었다면 공화당의 우향우는 19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는데[164] 유진과 아이젠하워로 인해 공화당이 다시 진보화될 기미를 보이자 매카시즘 역풍에서 살아남은 보수파가 내세웠다.[165]
태프트 가문은 미국의 정치적 명문가로 로버트 태프트의 아버지는 미국 27대 대통령이자 대법원장을 역임한 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였다. 로버트 태프트는 뉴딜의 반대파였으며 FDR이 생전 독재를 꿈꾸고 있다고 여긴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골수 고립주의자로 최후까지 2차대전 참전을 반대했으며[166] 중국 내전 개입도, NATO와 PATO의 설립, UN의 설립과 가입 모두 반대했다. 그렇다고 보수이기만 한 건 아니고, 뉴딜 정책에 일괄적으로 반대한 대신 공공임대주택이나 교육에 대한 연방정부 예산 투입과 같은 분야에 한해서는 뉴딜을 옹호해서 동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소련이 사람들의 인식만큼 위협적이지 않으며 소련을 무리하게 봉쇄하려는 기조 자체가 오히려 전쟁 위기를 부채질한다고 판단해 매카시의 행동을 가장 먼저 저지한 의원 중 한 사람이었다.
매카시즘 역풍에서 살아남은 보수파들은 태프트를 중심으로 뭉쳤고, 아이젠하워는 직전까지 군인이었지 프로 정치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TV 경선토론으로 나가면 이길 수 있을 거라 판단해 미국 대선 역사상 최초의 TV 경선토론에 응했지만 아이젠하워는 원 역사에서도 대통령을 할 만큼 충분한 언변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오히려 '안보의식 부족'이라는 딱지만 붙으며 처참하게 패배했다.
4.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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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시오 퀘베도 베르
김유진의 웨스트포인트 동기. 같은 유색인종이라는 점을 계기로 유진과 친해졌다. 사관학교 졸업 후 1차대전에서 93사단을 편성하려던 유진의 부름을 받아 레인저 대대장이 되어서, 함께 아미앵의 기적을 일궈냈다. 2차대전에서는 일본에 대항하는 필리핀 저항군의 수장이 되었고, 종전 후 필리핀 대통령에 취임한다. 이런 행적 자체는 필리핀 초대 대통령 막사이사이의 오마주인 듯. 원 역사에서는 1890년 필리핀 북일로코스 지역에 출생, 실제로 별들의 기수인 웨스트포인트 1915년 졸업자이며 1차대전 참전 후 소령으로 전역했고 미국과 필리핀을 오가며 살았다. 1919년 10월 4일 파즈 베라크루즈 실바와 결혼, 최소 3명의 자녀를 남겼다. 필리핀군의 개혁에 주 역할을 하였으며 정치권에도 끈이 있어서 후크발라합 반란 당시 진압에 상당한 진압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은퇴 후에는 미국으로 넘어가 살다가 1960년에 69세로 사망, 샌프란시스코 프레지디오 공원[167] 육군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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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센테 포티코 림
김유진의 웨스트포인트 선배. 같은 유색인종인 유진을 챙겨주어 유진과 친해졌다. 사관학교 졸업 후 2차대전에서 일본의 괴뢰정부 필리핀의 수장이 되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일본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킨유진 장군의 선배'라서 일제가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입장을 이용해 괴뢰정부 수장으로 국민들을 최대한 보호하고 일본에게 어깃장을 놓기 위한 고육지책의 일환이였고, 태평양 전쟁에서 기회를 노리고 군사를 일으켜 게릴라 활동을 벌이던 아나스타시오를 지원하기도 했다.
일본 괴뢰정부가 무너지고 감옥에 수감되지만 아나스타시오가 대통령이 된 뒤에 사면된다. 하지만 필리핀 입장에선 국내에 머무르게 하기에는 껄끄러웠던 탓에 유엔군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다. 원 역사에서는 일본군과 싸우다가 포로로 잡혀서 고문당하고 살해당해서[168]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르게 된 것에 비하면 행복한 운명을 맞이했다.
5. 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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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
소련의 위대한 영도자이자 강철의 대원수. 김유진과의 대화에서 영감을 얻고 "자신이 소련을 버릴 수는 있어도, 소련이 자신을 버릴 수는 없게 하겠다"며 대숙청을 가속화하게 된다. 이후 카사블랑카 회담, 테헤란 회담, 얄타 회담에서 계속 만나게 되는데, 유진에게 본인의 친필서명이 들어간 자본론을 선물하면서 러시아로 오라고 할 정도로 티격태격하는 사이[169]가 된다. 이 친분 때문에 유진은 미국 정부의 비공식적인 특사 역할도 하게 된다. 참고로 유진은 도넛방석을 자본론의 답례로 준다. 스탈린과의 대화에서 한반도는 소련의 턱밑이 아니라 똥구멍쯤 된다고 하자 치질 드립이 나왔기 때문으로 추정. 참고로 해당 자본론은 유진 킴이 국무장관이 된 후 공산주의 국가의 수장을 만날때마다 서명과 덕담을 받는 용도로 사용되었다.[170][171] 원래는 비싸게 팔아먹을(...) 계획이었으나, 흐루쇼프에 의해 유진이 '공산주의 수장들의 친필 서명이 든 자본론'을 들고 다닌다는 게 탄로나자 차마 판매하지 못하고 박물관에 기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유진 때문에 원 역사보다 미국의 위엄을 처절하게 실감해서[172] 생전에는 원 역사보다 조심스럽게 냉전에 접근했으며, 이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말년에는 맛이 갔다고 한다. 킴 플랜으로 인해 세계 각국의 공산당이 미국 달러를 받아먹고 양다리를 걸치는 것에 크게 분노했지만, 정작 냉전기에도 독소전쟁 때 랜드리스로 미국산에 익숙해진 소련인들이 여러 경로로 미국 물품을 밀수입했다고 한다.[173] 북한 수준의 검열을 가했다는 스탈린 말기에도 이랬으니 상대적으로 유화책을 펼친 흐루쇼프 이후에는 더했을 것으로 보이며,[174] 21세기 당시 공산 국가들이 자본주의 국가들과 정식 수교했으며 원 역사처럼 이름만 공산주의인 국가자본주의 국가가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원 역사와 비슷하게 자본주의화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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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투하쳅스키
김유진이 러시아에 올 때 기계화를 주장한 그가 관심을 가져서 초청했다는 명분이 되었고, 유진이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동안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이후에는 원역사대로 숙청당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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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기 주코프
소련군의 명장. 여기서도 콜라에 환장한 것은 매한가지라 미국산 검은 콜라와 다른 하얀 콜라를 몰래 애용하고 있었다. 원 역사와 달리 베를린 함락은 미군에게 넘어갔다.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를 함락시키고 린츠에서 연합군과 조우했다는 묘사를 보면 베를린 방향만 늦었던 모양. 독자들은 서부전선에서 유진이 2차례에 걸쳐 독일군 주력을 제대로 박살내놓은 덕분에 나머지는 쾌속 진격한 데 반해 소련군은 드네프르 강 진격부터 쉬지 않고 계속 달리기만 했기 때문에 연합군이 베를린 공방전 1달 하는 동안 오데르강에서 주저앉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럴 만도 한 게 민스크에서 베를린까지 950km를 5개월 만에 달린 거라 보통 무리한 게 아니다. #[175]
유진이 베를린 공세를 지시했을 당시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의 베를린 거리는 비슷했지만 소련군은 동프로이센에 진입했을 당시 지나치게 사상자가 많이 나왔다는 언급이 있는데, 동프로이센은 원 역사에서 독일의 고향이라 필사적으로 사수하려 했기 때문에 본작에서는 여기서 상당한 피해를 입고 그동안 공세종말점을 무시한 채 달린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와서 다운된 모양. 린츠에서 연합군과 소련군이 만났지만 프라하는 연합군에게 넘어간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176]
독일의 항복 후 유진과 잠깐 만났던 것을 제외하면 원 역사와 비슷한 행보를 걸었던 것으로 보이며, 전후 좌천됐지만 국공내전 때 미군의 전투력[177]에 경악한 소련 지도부에 의해 복직한다. 스탈린 사후 대권에 가깝게 다가갔지만 부족한 정치력과 군부에 대한 경계로 인해 실각하고 시베리아 오지의 발전소장으로 좌천된다. 이후 말년에는 콤라드(동무들) 콜라라는 러시아의 콜라 브랜드를 직접 만들어서 사업을 해서 대박을 친다. 러시아인들의 고질병이었던 알코올 중독을 콤라드 콜라로 치료해냈다고 하며, 러시아는 물론 한국 등 다른 나라에서도 콜라 하면 다들 콤라드 콜라부터 떠올릴 정도가 되어 현실의 코카콜라 급의 세계적인 음료 브랜드로 성장한다.[178] 한국에서도 치콜을 주문하면 콤라드 콜라가 나올 정도. 그 유진도 2회차에서 죽을 때까지 몰랐다가 3회차가 되고 나서야 알았기 때문에 이걸 알았을 때 당황했다.[179]
러시아의 고질적인 알콜 중독의 근본적인 원인은 지나치게 추운 동네에서 독주를 선호하는 게 원인이기 때문에 보드카를 완전히 끊지는 않았겠지만[180] 알콜 중독을 치료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면 주량을 많이 줄인 건 맞는 모양이다.[181][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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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작중 언급은 거의 없는데, 실제 인물과 비슷하게 스탈린과 주코프 사이를 조율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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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브렌티 베리야
언급만 나오다가 원자폭탄 관련 보고를 하는 것으로 등장. 스탈린의 생일을 맞아 소련에 개인 자격으로 방문한 유진과 대화를 나눈다. 크게 역사가 틀어지면서 잠시나마 소련의 1인자가 되나, 동유럽 사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183]에 불만은 품은 세력들에게 축출되어 숙청되고 만다. 물론 동유럽건에 대해 죽은 스탈린을 죄인으로 만들고 깔끔하게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이미 베리야에 대한 원한이 큰 수련 지도부는 그런 의견 따윈 다 씹고 베리야를 끝장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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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타 흐루쇼프
70세를 넘어서 권력에 취해서 맛이 가는 스탈린의 장난감으로 등장한다. 이후 소련의 권력 투쟁 양상이 조금은 달라지긴 했지만 결국 권력을 잡았다. 서기장이 되어 정상회담을 할 때 아이젠하워에게 유진을 만나게 해달라고 해서 기어이 자본론에 사인을 한다. 아예 대놓고 '그 자본론은 어딨소!' 라고 말했을 정도.
5.1. 코민테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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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들의 분열을 조장하고 사사건건 주인공 김유진의 앞길을 물고 늘어지는 인간 쓰레기로 묘사된다. 임정에서 김유진을 제국주의자, 민족의 배신자로 몰고 가다 이승만과 김유진의 역공에 실각한다. 하지만 그 뒤에도 포기하지 않고 캘리포니아에서 김유진과 그 가문을 공격하기 위해 활동하다가 임정을 견제할 목적으로 조선으로 밀입국하려고 했지만 이 소식을 접한 이승만이 김구에게 박헌영의 암살을 지시하였고, 결국 도주에 도주를 거듭한 끝에 태국의 빈민가에서 덜미를 잡혀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유진은 박헌영이 죽었다는 것을 이승만을 경유하여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해방 이후에도 한반도의 공산주의 단체가 '박헌영은 아직도 행방불명이다'라고 한 걸 보면 진상을 아는 일부를 제외하면 실종 처리된 듯. 당시 공산주의자의 첩보망 수준을 고려하면 꽤 철저히 숨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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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가이
해방 후 미군정의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공산국가를 위해서 프롤레테리아 독재가 필요하기 때문에 조속한 공업화를 주장하긴 했으나, 맥아더 당선 후 냉전이 가시화되면서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방해하기 위해 원 역사의 여수·순천 10.19 사건 같은 무장봉기에 나선다. 하지만 해방 당시부터 이를 예상하고 있던 미군과 임정 세력들에게 수년간 예의주시당하고 있던지라 결국 실패하고 만주로 도주하고, 허가이는 대한민국 국군의 국공내전 참전 명분이 되었다.
6.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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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
철저한 제국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로서 몽고메리를 전폭적으로 후원하면서 대영제국을 보전하고 소련의 영향력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 갖은 공작과 군사적인 삽질을 다 벌인다. 마켓 가든 작전 등 거한 실패를 맛보고도 정신을 못 차려 발암 행보를 이어나가지만,[184] 그의 구상은 FDR은 물론이고 그를 승계받은 월레스도, 공화당 인사인 맥아더 전쟁부 장관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다.[185] 원 역사와 달리 전후에도 미국과의 친분을 강조하여 아슬아슬하게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월레스 정부에서 핵실험이 성공한 뒤 핵기술 이전을 받지 못하자 실각한다.
말년에는 김유진의 필력이 떨어진다고 놀리면서 자신이 글 잘 쓰니까 나와 회고록 쓰지 않겠냐고 제안했다가 김유진이 노벨 평화상을 받자 발작하는 등 개그 캐릭터가 된다. 자신이 왜 노벨 평화상이 아니냐고 항의하자 2차대전 때 노르웨이를 침공하고 냉전기에 소련 핵공격을 주장한 인간이 할 소리냐고 까인 건 덤.[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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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역사와 달리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원정군 사령관으로 투입된 김유진이 미군을 지휘해서 롬멜을 도망가게 만들면서, 원래 신중한 작전을 펼쳐서 롬멜을 잡았던 몽고메리는 제대로 활약하지 못하고 그저 겁쟁이로 전락해버린다. 이와 더불어 실제 인물의 그 인품, 동양인에 대한 멸시까지 겹쳐서 유진을 증오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무능한 건 아니고,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움직임이 느려서 미군의 작전수행에 차질을 주긴 했지만 마음만 먹으면 빠르게 몰아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이탈리아 전선에서도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를 종횡무진하는 모습을 보여 유진이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뿐'이라 평했다. 이탈리아군도 '피해 크게 보기 싫어서 몸 사리던 것뿐'이라 평하는 등 몽고메리의 군사적 능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라고 명시된다. 이탈리아에서는 나름 명성을 날렸지만 몽고메리는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며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후 최대 후원자인 처칠과 함께 마켓 가든 작전을 실행하나 본인의 성격 문제 때문에 여러 갈등과 혼란을 초래했고, 원 역사보다 더 무모한 행동을 벌였다가 모델의 역공에 12군단이 소멸하는 대참사가 벌어져 유진이 복귀한 후 해임된다. 좌천된 이후로도 유진의 전쟁 수행에 추한 훈수를 두는 걸 멈추지 못하다가 결국 불명예 전역당한다. 이후 한동안 언급이 없다가, 유진이 롬멜과 공동으로 집필한 북아프리카 전선 회고록에 자길 까내리는 내용이 있다는 걸 알고 열받아서 본인의 회고록을 집필했다고 언급된다.
원 역사에서는 구설수는 많을지언정 결국 전쟁에는 이겼기 때문에 명장 대접을 받은 것과 달리, 이 세계관에서는 추한 모습은 있는 대로 보이면서 결국 승리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가히 원균에 준하는 졸장으로 기록될 듯하다.[187] 유진은 몽고메리가 지나치게 저평가받은 것을 유감스러워했지만 몽고메리의 무모함 때문에 많은 영국군이 마켓 가든에서 죽었기 때문에 미스터 마켓가든이라 부르며 명예회복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회고록에서 몽고메리를 고의로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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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알렉산더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미군이 영국군 움직임이 너무 느려 손발이 안 맞다고 항의하자 몽고메리에게 빨리 안 움직이냐며 갈구는 것으로 첫등장한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연합군 부사령관이 되었으며, 본인은 이런 애매한 자리를 원하지 않아서 이탈리아 전선으로 전출을 요청했으나, 김유진이 혼절하면서 총사령관 대리가 되었다. 초반에는 처칠의 명을 따라 유진을 밀어붙일 정도로 정치질에도 일가견이 있어 보였으나, 몽고메리의 폭주를 견제하지도 못하고 연합군 내에서 더 큰 불화만 막는 정도의 조율만 하다가 마켓 가든 작전이 처참한 실패로 끝나는 대참사를 겪는다. 이후 유진이 복귀하자 그간의 책임을 물어 부사령관에서 해임되고 포위망 안에 갇힌 21집단군 사령관으로 부임했고, 유진이 상황을 수습한 후에는 희망했던 이탈리아 전선으로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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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테더
영국 공군대장이자 원 역사의 연합군 부사령관. 작중 역사가 달라지면서 몽고메리가 참패하고 부사령관 대리인 해럴드 알렉산더가 해임되어서 영국 육군이 완벽하게 주도권을 잃고 나서야 연합군 부사령관으로 부임할 수 있었다. 1941년 겨울 네덜란드에 공중으로 식량 수송을 보내는 만나 작전을 개시할 당시 그동안 독일 본토 폭격이 힘들겠다고 푸념했지만 유진이 앞으로도 제리들 불태울 기회는 많으니 올 겨울만 감수하자고 하자 웃어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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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오킨렉
유진이 북아프리카 전역에 막 건너올 당시(1939년 10월) 인도에서 영국군 사령관으로서 일본군의 공격을 막고 있다고 언급된다. 본작에서 유진과 몽고메리의 북아프리카 전역 부임 시기가 비슷하고,[188] 이때 이미 일본군이 진주만 공습을 기점으로 동남아시아와 인도 일대를 공격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189] 처칠에 의해 몽고메리와 교체당하고 인도로 가자마자 일본군과 붙은 모양이다. 당시 영국 식민지 중에서 제일 중요한 인도를 일본군에게서 지키는 임무를 맡은 거니 오히려 북아프리카 전역보다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고 봐야 한다.[190] 다만 본작에서 언급되지 않는 루이 마운트배튼이 원 역사처럼 총사령관을 겸하고 있었다면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았을 수는 있다.
이후 몽고메리의 삽질로 벨기에에서 포위망에 갇힌 21집단군을 분리한 저지대 집단군의 사령관으로 등장한다.[191][192] 롬멜에게 깨져 멘탈붕괴한 영국군을 추슬러 반격 작전을 고안한 사람임을 고려하면 적절한 인선이다.
마켓 가든 작전이 평범하게 칼레와 됭케르크를 확보하기 위한 작전이었으면 이 참사는 안 났을 거라 한탄하는데, 포위망에 갇히자마자 벨기에 각지에 틀어박혀 결사의 방어태세를 구축하고 있었고 마켓 가든 작전 때 몽고메리가 미군에게 빼앗은(...) 물자 때문에 다행히 물자에 여유는 남아있었는 데다 오킨렉과 저지대 집단군도 유능해서 주력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193]
복귀한 유진이 파리 사수 연설로 히틀러가 파리를 공격하도록 유도해 저지대 집단군을 향한 독일군의 압박이 다소 약해진 상태였는데, 저지대 집단군 구출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어 걱정했지만 포위망 안으로 벨기에 망명정부 주요 인사들이 파견되어 다소 안도하고 포위망의 압박을 덜기 위해 앤트워프와 스켈트강 일대를 장악 가능한지 시도해보라는 지령을 받자 일단 시도해보기로 한다.[194]
이후 영국군을 구출하기 위해 영국 해군이 임시 항구 하나 설치하거나 공중 수송으로 물자를 뿌리는 등의 방안이 고안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했기 때문에 유진은 우연히 모델과 만났을 때 페이크를 친 뒤 B집단군 본대를 강제로 아미앵에 붙잡고 남은 제21집단군과 미군을 동원해 칼레와 됭케르크를 장악하고 저지대 집단군을 육상으로 연결시켜 B집단군을 C자 형태로 포위하기로 한다. 유진이 비행기 타고 벨기에 포위망 안에 들어오자 유진과 만나고, 유진은 아직까지도 저지대 집단군이 소멸하지 않은 것을 두고 그 역량을 칭찬했다. 브뤼셀 방어에 실패한 책임을 지겠다며 해임은 자신의 선에서 끝내달라고 했지만, 유진은 오킨렉의 공적을 치하하며 육군 원수직을 주었다.[195]
독일군이 아미앵에 정신 팔린 사이 알렉산더가 이끄는 제21집단군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북상하여 베를린의 수뇌부가 상황을 깨닫기 직전 저지대 집단군 구출에 성공하고, 저지대 집단군은 지친 상태라 구출된다고 바로 움직일 수는 없지만 저지대 집단군은 수십만이 넘기 때문에[196] 덩치 자체로 B집단군에게 압박을 가했다. 동시에 신편된 미 제6집단군은 패튼의 제7군이 점령한 메츠를 인수받아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방면에 나서 B집단군을 양익으로 포위하고, 프랑스 1군은 알자스-로렌 지역인 스트라스부르를 공격한다.[197][198] 당연히 독일군은 상태가 상대적으로 나쁜 저지대 집단군부터 노리려고 했기에 유진은 시간벌이를 하고자 브래들리에게 아미앵시(市)를 감싼 작은 포위망 하나를 더 만들라 지시했고 제9군이 시간벌이를 맡았다.[199]
결국 B집단군은 고민 끝에 히틀러의 명령을 씹고 아미앵에서 아헨(독일 본토)까지 걸어서 도주(!)하기로 결심하고,[200] 히틀러는 벨기에의 영국군을 소멸시키면 전황을 역전시킬 수 있을 거라며 왈롱 집단군과 국민돌격대를 파견해 저지대 집단군을 쓸어버리라 지시한다. 하지만 왈롱 집단군은 아직 편성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고, 제대로 된 무장도 없는 국민돌격대의 전투력은 형편없었기 때문에 저지대 집단군은 오히려 서부전선 최강 전투력의 명성에 걸맞게 오히려 앤트워프를 공격한 왈롱 집단군과 국민돌격대를 궤멸시켜 버리고(정확히는 캐나다군) 포위망의 결정타인 브뤼셀을 총력을 다해 두들기는 엄청난 저력을 보였다. 모델이 이끄는 B집단군 본대는 브뤼셀과 샤를루아가 함락당하기 직전에야 브뤼셀 남부의 작은 마을, 워털루에 도달하고[201] 결국 워털루를 빠져나가기 적전 저지대 집단군이 브뤼셀을, 미 제3군이 샤를루아를 함락시키고 포위망을 완전히 닫아버리는데 성공하자 모델은 B집단군 본대에게 항복을 허락하고 자살한다. 워털루가 과거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이 유럽의 정복자 나폴레옹에게 최후를 안겨주었던 바로 그 장소임을 고려하면 영국군의 입장에서도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이후 저지대 집단군은 다시 제21집단군에 통합되었고, 알렉산더 장군은 이탈리아 전선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서부전선의 영국군은 전부 오킨렉이 담당하게 된다. 8월부터 11월까지 3개월에 걸쳐 마켓 가든-독일의 파리 공격-아미앵 대포위까지 일어난 전투로 인해 서부전선 연합군은 한동안 강제 휴식에 들어가야 했고, 그나마 여력이 있던 포위를 안 당한 제21집단군 남은 병력으로 네덜란드 공세를 시도하는 일을 맡게 된다.[202]
영 제21집단군이 북상하자 네덜란드 식량 생산의 중심인 네덜란드 남부가 전장이 되고, 독일군은 네덜란드인 수백만을 모조리 가두어 굶겨 죽이려 했지만 유진과 스탈린의 공갈포에 의해 아사자 수를 원 역사보다 크게 줄이는데 성공한다.[203]
이때는 여력이 충분치 않아 네덜란드는 도중에 멈췄다고 하는데, 1942년 2월 독일 본토 진격 명령 당시 네덜란드 남부 점령은 성공했다고 언급된다. 네덜란드 북쪽 독일군을 밀어내기 위한 양동이 필요하다고 의욕을 보였다고. 이후 서부전선 연합군의 독일 본토 공세 당시에는 영 제21집단군은 네덜란드 북부 해방 대신 남쪽으로 내리꽂아 루르를 북쪽에서 포위하라는 지시를 이행하고 루르 전역에서 마지막 서부전선 독일군 주력을 격퇴한다.
이후 베를린과 프라하 정복 명령이 떨어지자 유진은 영국군은 네덜란드 북부를 먼저 해방하고 이후 함부르크를 장악한 뒤 덴마크로 북상해 노르웨이 방면 추축군을 견제하며 여유가 되면 베를린에 내려오라고 명령한다. 이후 베를린 전투 당시 오킨렉이 네덜란드 북부에서 블라스코비츠 장군의 항복 문서에 서명을 받아냈다고 하며, 히틀러가 자살하기 얼마 전 괴링과 되니츠가 노르웨이 주둔군과 함께 있다고 언급되는 걸 보면 노르웨이 방면으로 갔을 것으로 보인다. 베를린 전투에는 합류하지 못했지만, 마켓 가든 작전을 기점으로 영국군은 베네룩스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고 북유럽에 남은 독일군 수십만 문제도 있어서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긴 했다.
서부전선 후반에 유진의 밑에서 연합군의 한 축으로서 활약했기 때문에 원 역사의 몽고메리의 위상을 대신할 2차대전 영국 육군의 대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사실 원 역사에서도 오킨렉은 비운의 명장 소리를 들었던 인물인 만큼 고증이다.
7.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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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정치에 능한 드럼이 참모장으로 부임해서 원역사보다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덜 했으나, 김유진으로 인한 나비효과로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도 더 강해졌고, 스탈린과 처칠이 랜드리스를 스틸하고 유일하게 받을 수 있는 창구인 버마 로드 확보를 반대하는데다가 내정에서 무능함은 여전해서 원역사 못지 않게 고통받는다. 전후 국공내전에서 결국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고 미국에서 받은 핵무기를 우한에 투하했고, 결국 장강 이남의 중화민국 총통으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외전에서는 떨어진 권위로 인해 군벌들의 내분과 내정의 무능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거센 민주화 시위에 하야하지만, 중공의 대약진 운동의 여파로 혼란이 거세지고 군벌들이 준동하자 그의 복귀 여론이 다시 거세져서 복귀, 군벌들과 피터지게 싸운 끝에 드디어 절대 권력을 얻게 되었다.[204] 하지만 그 과정이 워낙 괴랄했던지라 어째서 내가 이 나라를 발전시키려 할 때마다 모든 게 잿더미가 되는지 모르겠다라 한탄하였다.
이후 중공의 혼란을 틈타 유진의 조언대로 샌 프랑코와 중화민국 정부가 합작해서 촬영한 삼국지 실사판을 시작으로[205] 3S 정책을 펼쳐서 정권을 안정시키는 걸 넘어서 북중국에 문화공격을 가해서 체제 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하는 등 작중 수혜자가 되었다. 장제스도 억압적인 독재자이긴 하지만 공산국가 특유의 검열은 이보다 훨씬 심했기 때문. 아시아판 68혁명 당시에도 군벌 반동 때문에 한국과 일본이 난리난 사이에도 장제스 독재는 건재했다고 묘사된다.
원 역사에서도 그렇지만 작중에서도 평화로운 치세일 때는 그런대로 유능한 개발독재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개발독재가 별거냐 싶지만 2차대전 이후 독재자 중에서 개발독재를 성공적으로 이끈 독재자는 손에 꼽을 적도로 적고 국가 경제를 뿌리까지 말아먹은 사례가 대부분이라는 걸 고려하면 장제스의 개발독재 능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 남중국 일대는 원 역사처럼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 크리를 안 먹었기 때문에 소프트웨어 리셋 없이 문화적으로는 화려하게 잘나갈 가능성이 높다. 유진 사후 국공내전이 더 일어나 중공군에게 털리는 등의 혼란을 겪긴 했지만 21세기에도 중화민국이 존속했다는 것으로 보아 어찌어찌 수습은 한 모양이며, 극중 역사서에서 킴 플랜으로 형성된 민주국가로 인해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했다고 묘사된 것과 여러 정황상 중화민국은 장제스 사후 원 역사와 비슷하게 민주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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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원 역사대로 항일투쟁을 하는 척하면서 일본군의 침략을 방임하고, 언플로 국제적 입지를 다지면서 대륙 일통을 노리고 있다. 이를 일찍부터 간파한 드럼은 팀킬러라며 이를 갈고 있었을 정도. 국공내전에서도 승기를 잡았으나 만주 전역에서 한국이 개입해 만주를 들쑤셔놓자 하는 수 없이 소련에 많은 걸 양보하며 만주 전역을 소련군에게 일임하고 남정에만 올인했다가 장강 일대에서는 장강으로 올라온 연합군 군함들이 끈질기게 버틴 탓에 장강 도하를 통한 남경 함락에 실패하고, 우한이 핵폭격으로 사라지면서 어쩔 수 없이 UN 주관 하의 휴전협상에 임하게 된다. 유진은 마오쩌둥이 원 역사처럼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을 벌이지 않는 한 이래봐야 몇십 년 안 가 중공에게 중화민국이 멸망할 거라 비관적으로 보았다.
외전에서는 유진이 장제스가 잠시 물러날 당시 북중국이 절대로 남중국을 공격할 이유가 없다고 확신하는 계기가 되는데, 다름아닌 대약진 운동을 진행 중이어서... 본작의 마오쩌둥은 중국 통일에 실패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소련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상태라 스탈린의 위광을 빌려 자신의 권력을 잡았지만 흐루쇼프 치세에 접어들어 소련이 스탈린 격하 운동에 들어가자 이에 반발하였고, 오히려 소련의 경계를 사자 자체적인 경제 발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이런 사고를 쳤다고 한다. 첸쒜썬이 여기서는 없었을 가능성이 높은데도 이런 걸 보면 마오쩌둥의 국가경영 능력 자체가 문제가 심했던 모양. 작중 묘사를 보면 아이젠하워 임기에 벌어진 일인데, 본작 아이젠하워의 임기는 1949~1956년이라[206] 원 역사의 대약진 운동이 1958~1962년에 벌어진 것과 달리 1953~1956년 사이에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207]
이런 자폭으로 인해 대약진 운동이 2년밖에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장강 비무장지대를 통해 수백만이 넘는 탈북자가 남중국에 형성되었고, 지나치게 많은 인구로 인해 남중국 치안과 경제까지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장제스가 재집권한 뒤의 언급을 보면 어떻게든 수습은 한 것 같지만. 한편 산둥과 동북 3성 탈북자는 대한민국 망명을 선택했고,[208] 북한 일대에 자리잡은 탈북자들은 본국과 대규모의 밀수 루트를 형성해 중공과 대한민국 모두를 곤란하게 했다고 한다. 북한 일대의 경제 발전에는 도움이 되긴 했지만...[209]
역사의 변동으로 인해 중공이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하는데,[210] 원 역사처럼 대약진 운동으로 실각했다가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류사오치의 요청으로 다롄에서 베이징으로 달려온 소련군에게 무자비하게 진압당하고 체포당한다. 이 와중에도 린뱌오와 장칭은 대한민국을 통해 제3국으로 망명하는데 성공하는데, '소련이 모택동을 납치했다'고 발언한 것으로 보아 현장에서 죽은 건 아니고 소련으로 끌려간 것으로 보인다.[211]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중공은 모택동을 죽이길 원했지만 소련의 짜증을 돋구어서 죽이지 않고 연금만 했다고 한다. 다만 린뱌오와 장칭이 망명할 때 장칭이 원 역사의 문화대혁명 때처럼 대형사고를 쳤다고 묘사되는 걸 보면 원 역사만큼은 아니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혼란이 꽤 컸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대혁명 사건과 그로 인한 린뱌오, 장칭의 망명 당시 유진은 국무장관을 그만둔 이후라 언급되기 때문에 1956년 이후에 일어난 일로 보인다.[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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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
본작 극초반에 잠깐 언급되는데 1910년대 초에는 미국이 쑨원을 빨갱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후 장제스의 말에 따르면 김유진이 1차대전 때 큰 전공을 세우자 김유진을 칭찬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아시아인들이 열등해서 백인들에게 털렸다는 인종주의가 횡횡하던 당시에 아시아계로서 독일을 무찔렀던 김유진은 인종주의를 부정하는 증거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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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뱌오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위 원로이자 장군으로 자신의 뒷배인 마오쩌둥이 나가리되자 장칭과 함께 배를 타고 한국으로 튀었다. 가족 묘사가 없이 단 둘만 튀었다고 묘사되기 때문에 너무 급박해서 처자식들도 못 데려간 모양. 린뱌오와 장칭은 자신들은 여전히 공산주의자이며 소련이 마오쩌둥을 납치했기 때문에 소련에도 갈 수 없으므로 자신들을 한국이 보호할 의사가 없다면 제3국으로 보내달라 요청했는데, 이런 공산당 최고위급 인사의 망명에 한국 및 남북중국은 완전히 뒤집어졌고 양쪽 다 자신들에게 둘의 신변을 넘기라고 한국을 엄청나게 쪼아대자 짜증이 난 한국은 린뱌오를 제3국인 인도로 보냈다. 그러다 인도에서 중동전쟁이 한창인 이스라엘로 다시 망명해서 패튼과 다시금 전차를 끌고 중동 사막에서 싸움을 벌인다. 이스라엘의 군사 교리는 중공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몇 년 동안 따로 공부를 했다고 하는데, 바뀐 교리에도 그런대로 적응한 편이었지만 패튼을 죽이는 계획을 세우는 외교적인 실책을 범했다. 패튼이 사망한 이후는 언급되지 않으나 이스라엘이 멸망만 간신히 피하고 완전히 몰락해버렸으므로 린뱌오도 편한 말년을 보내지는 못했을 듯하다. 하자만 21세기에도 이스라엘 자체는 존속하고 있고 20세기 말에 이스라엘의 모사드가 프란츠 슈미트를 남미에서 죽이는 등 마냥 망한 것도 아닌 걸로 보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린뱌오를 괘씸죄로 죽이지 않았다면 천수는 누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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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칭
문화대혁명 초반에 원 역사처럼 악명을 떨치다가 소련의 개입으로 빠르게 진압당하자 린뱌오와 함께 나무 쪽배를 타고 대한민국으로 망명했다. 마오쩌둥이 소련에 납치당한 걸 알고 있던 것으로 보아 마오가 끌려갈 때까지는 함께 있었던 모양. 린뱌오와 장칭은 자신들은 여전히 공산주의자들이며 소련이 마오를 납치한 이상 소련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한국이 보호할 의사가 없다면 제3국으로 보내달라 요청했고, 중국 남북에서 합심해서 한국을 쪼아대자 짜증이 난 한국이 둘을 인도로 보내버렸다.[213] 여러 혼란 끝에 최종적으로 이스라엘에 망명했고 이스라엘에서 유폐 상태에 놓이지만 그럭저럭 대접은 받으며 회고록을 쓰는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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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대중에게 잘못 알려진 것과 달리 마오쩌둥의 최측근으로 중화민국 침공을 끊임없이 설득하려고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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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간도특설대가 더 빠르게 만들어지면서 마적으로 토벌당해 사살된다. 허명은 원 역사와 동일하다. 그가 잠시 등장해서 그가 죽는 장면이 나온 게 아니라 몇몇 중국 측 인물이 현상황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흘러가는 식으로 언급되고 끝이다. 단순히 간도특설대가 원 역사보다 작정하고 족치려 든 것도 원인이긴 하겠지만, 본작에서는 소련이 일찌감치 김유진의 한반도 내 이권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214] 김일성의 존재감이 훨씬 약했을 것이고, 이 때문에 김일성이 초조해져 빨치산보다 적극적으로 전면에 나섰다가 죽었을 수도 있다.
원 역사보다 빨리 중일전쟁이 벌어졌고 김일성이 간도특설대에게 빨리 죽었기 때문에[215] 김평일은커녕 1941년생인 김정일조차 태어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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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쉐썬
원 역사와 같이 미국에 유학 와서, 헨리 킴과 형동생하는 사이가 되며 함께 샌프랑코에서 갈렸다고 언급된 이후 나오지 않았다. 원 역사에서는 중국이 중공으로 통일되면서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자 입지가 애매해졌고 매카시즘의 광풍에도 휩쓸리면서 공산주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앙심을 품고 중국으로 귀국했지만 원래부터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던 만큼 작중에서는 중화민국과 중공으로 나뉜 두 국가 중 중화민국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고, 매카시즘이 1~2년만에 박살난 관계로[217] 미국에 앙심을 품지 않고 그냥 남아있을 가능성도 높다. 유진이나 유신이 헨리와 호형호제하는 쉐썬을 그동안 보호해줬을 가능성도 적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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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류사오치와 함께 소련군의 도움을 받아 문화대혁명을 진압하고 북중국의 권력을 잡는다. 이후 에필로그에서 언급된 바에 의하면 중화민국을 기습해 PATO군을 격파하고 서방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붕괴직전이던 소련에 개입해 보리스 옐친의 반란을 진압하여 공산권을 지켜냈다고 한다.
8.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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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 헤이하치로
원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웨스트포인트에 국빈으로 방문했는데 작중에선 유진이 입학한 해였다. 일주일 내내 1학년 생도 교육을 참관하며 유진과 동기들에게 고통을 선사하는데 이때 유일한 동양인 생도였던 유진을 의식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유진을 따로 불러내서 대화를 나눈다. 그제서야 한국계임을 알고는 조선인이었다면 부르지 않았을 거라고 민족 감정을 나름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고, 스스로를 '침략의 주구'라고 칭하면서 가볍게 시험해보지만 유진의 능숙한 처신에 감탄한다.[218] 이후 도고는 자신의 경험을 들어 미군에서는 인종차별로 제 뜻을 펼치지 못 할 것이라며 아시아주의를 내세워 일본으로 오라고 설득하지만 당연히 거절당하자 아까워하며 짧은 만남을 마무리지었다. 이후 유진이 1차 대전의 영웅이 된 후 축전을 보냈고,[219] 전간기에 유진이 일본 주재무관으로 와서 재회해서는 당시 자신이 잘못 판단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대한 해군의 입장을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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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나시 한조
원 역사처럼 유진이 일본에 주재무관으로 갔을 때의 육군대신으로, 유진은 속으로 얼굴에 너무 책임을 지며 산 인상에 활 들고 다니며 여럿 암 걸리게 할 것 같다며 속으로 깠다. 그렇지만 전차 사업 관련해서는 잘 협력했다. 이후 군인들이 설치는 시대가 되면서 상급자들이 없어지면서 총리대신까지 됐는데, 정치질로 살아온 인생답게 관동군의 폭주에 제동을 걸려고 했지만 장개석의 뇌물을 받았다는 헛소문이 퍼져서 몰려온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에 의해 살해당했으며, 죽으면서 일본제국이 끝없이 폭주할 거라고 예견한다. 실제 인물도 부패로 악명 높았는데, 당대 일본제국 군인들이 대부분 그랬듯 그도 군국주의에 심취해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나 정치를 할 때는 꽤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고 무엇보다 1929년에 실각 후 1944년에 사망하기까지 칩거했기 때문에 행적을 창작할 여지가 있어서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작중에서는 폭주하려는 관동군 사령관을 "너 육사 몇기야!!"하며 찍어 누르고 군대의 폭주도 어차피 다 지급 하려고 저러니 화북군 만들어 자리 만들어 주면 다들 만족할 거라며 나름 잘 대처했다.[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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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히사이치
일제강점기 1910년대 철권통지로 유명한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장남으로 유진이 전간기 일본에 방문했을 당시 몇 차례 만났다.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남방군 총사령관으로 파견되었는데, 과달카날 전투 당시 유진의 'I shall return' 연설에 서린 증오 어린 목소리를 듣고 이전 유진과 만났을 때 느낀 위화감이 침략자를 저주하는 눈이었음을 깨닫고 유진이 친일인 척한 반일(정확히는 반 일본제국주의)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진상을 말할 수 없어 혼자만 생각하며 어떻게든 이기면 그 성격상 본심을 숨기겠지만 그걸 대놓고 드러냈을 때 무슨 상황이 일어날지 두려워한다. 그와 별개로 본작에서는 과달카날 전투가 끝나자마자 일본 해군이 동남아에서 대거 철수하고 중국 전선에만 집중하면서 임팔 전투가 일어나지 않아 이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게 되었다.
이후 등장은 없지만 원 역사처럼 수용소에서 죽었다면 데라우치 가문은 몰락할 가능성이 높다. 데라우치는 아들을 동발에 맡겼는지에 대한 묘사가 아예 없기 때문에 동발에 보낸 게 맞다면 그나마 무사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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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마코토
유진이 전간기 일본에 방문했을 당시 조선 총독으로, 유진이 동양교육발전기금을 처음 창설했을 당시 조선인 유학생들을 선발하기 위해 사이토 총독과 합의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사이토 총독의 문화통치 정책과 독립운동가 추방이라는 점이 맞아떨어졌는지 협상은 얼마 안 가 타결되었다. 사이토 총독이 자손을 유학생으로 보냈는지는 불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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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후미마로
등장은 매우 적지만 중일전쟁으로 뻘짓한 것은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그와 별개로 공가의 정점인 고노에가의 당주인 만큼 무능함과 별개로 정치질과 다테마에에는 일가견이 있어 2차대전이 망했다는 걸 일찍부터 직감하거나 히로히토의 무책임한 면모를 속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도조, 히로히토와 달리 전후 묘사가 없지만 여기서도 자살했거나 사형당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대신 아들 장남 후미타카가 원 역사처럼 관동군 갔다가 소련에 끌려가 사망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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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히데키
일본을 방문한 유진을 안내하는 안내장교로 첫 등장. 유진과 대화하면서 개념 있는 모습을 보여 이름만 같은 인물 아닌가 의심했지만 이후 전개를 보면 결국 원 역사에서의 행보를 거의 비슷하게 밟은 모양. 사실 도조 히데키는 본인의 답도 없는 무능함, 특히 인재 보는 무능함과 별개로 직속 부하들에 한해서는 매우 인자한 덕장이라 인사계원이나 헌병사령관은 잘 어울린다는 평을 들었으니 고증오류는 아니다.
아시아의 영웅으로 떠받들여지는 유진에 대한 호감도는 진짜라서 유진이 창설한 미국유학 재단에 장남인 도조 히데타카를 유학 보내고 잘 부탁한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고, 전쟁 위기가 고조되었을 당시에는 오히려 유진에게 히데타카를 귀국시키지 말라는 편지를 보냈다.[221][222] 유진과 히데타카의 사이는 무난한 편이었고[223]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유진이 히데타카에게 돈 쥐어주고 남미로 보내서 무사했다고 언급된다. 전후에는 묘사가 없지만 남미에 남았거나 귀국했을 가능성이 높다.
원 역사에서는 전범재판 후 사형당하는 걸로 끝났지만 여기서는 상부에게 환멸을 느꼈는지 종전 후 자살기도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유진에게 731 부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서 히로히토를 날려버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대가로 사형당할 때 부드러운 재질의 밧줄을 쓰게 해줄까 라고 유진이 잠깐이나마 고민했던 건 덤. 자기는 이렇게 죽는데 히로히토는 안 날아가는 게 억울했다고 하며, 전쟁 때 히데타카를 인질로 삼지 않고 남미로 보내서 보호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한다. 유진의 추측에 따르면 남은 가족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거라고.[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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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후미타카
고노에 후미마로의 장남. 원 역사에서는 중국에 유학 간 것과 달리 본작에서는 동양발전기금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에 파견되었는데, 전간기 일본 고위층 자제는 주로 차남을 유학 보내는 경우가 많았지만 고노에는 차남 미치타카가 이복동생 히데마로의 양자가 되어서 그런지 본인이 직접 왔다. 일제와 미국의 사이가 나빠지자 도조 히데타카와 함께 유진을 설득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전후 묘사는 없지만 원 역사와 달리 후미타카가 소련군에 붙잡혔다 시베리아 형무소에서 옥사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므로[225] 후미타카가 귀국해서 고노에家의 가독을 이었을 가능성이 높다.[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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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히데타카
도조 히데키의 장남으로, 유진에게 호의를 가진 도조의 뜻에 따라 장남임에도 동발 유학생으로 파견되었으며 유진의 말을 잘 알아듣기 위해 조선어까지 배웠다고 한다. 김유진을 처음 만났을 당시 어린 박정희에게 군인과 장래에 대해 진중하게 설명한 것에 감명받았다고. 2차대전 직전 고노에 후미타카와 함께 양국 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우려해 유진을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으며,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유진의 배려로 인질이 되는 대신 남미로 보내져 사실상 석방되었다. 이 와중에 어느 얼빠진 일본 고위층 누구씨가 김유진에게 한일 이중제국에 대한 제안을 하라고 지시하자 김유신에게 알렸지만 김유신은 개소리인 줄 알고 씹었고 김유진에게 보고하지 않는 해프닝이 있었다.
전후 귀국했는지는 불명이나 도조가 히로히토를 몰락시키기 위해 731부대 문서를 유진에게 넘긴 이유가 히데타카를 석방시킨 것에 대한 보답이라는 것으로 보아 무사히 귀국했거나 미국으로 갔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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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야마 하지메
2차대전 도중 어전 회의에서 멍청한 식견으로 중국과 태평양을 2달, 3달 만에 정복할 수 있다고 개소리하다가 히로히토에게 까이는 장면으로 잠깐 나온다. 참고로 고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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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나가 교지
2차대전 도중 지나가듯이 언급된다.
본작에서는 과달카날 전투에서 패배하자마자 동남아 전선을 포기하고 중국 전선 올인을 결정했으므로 필리핀에서 탈영 소동 안 벌이고 평범하게 필리핀에서 철수했을 가능성이 높다. 관동군에 안 갔다면 소련 굴라그행은 아니었을 것이고, 중국 전선으로 파병되었다면 운 나쁘면 중국에서 억류당했을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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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지 마사노부
과달카날 전투 당시 중좌 신분으로 등장. 도조 히데키에게 정신력 운운하면서 각종 헛소리를 하는데 유진을 사로잡겠다는 츠지의 말에 도조는 '작전의 신'이라 부르며 흡족해했다.(...) 20년 동안 유진에게 일본군 고위층들이 뇌물을 너무 많이 받아먹어서 유진을 대놓고 적대시하지 못하는 반면 츠지는 자기가 유진을 사로잡겠다고 헛소리를 늘어놓았기 때문. 이후 등장은 없으나 본작에서는 일본군이 동남아에서 빨리 물러나고 중국으로 옮겼으므로 중국에 갔을 가능성이 높고, 중국에서 붙잡히지 않았다면 전후 귀국해서 처벌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에서 잠적했다 쳐도 1945년 국공내전이 일어나며 이후에는 중국이 국내 정치 문제로 개판이 되기 때문에 운 좋게 끝까지 살아남지 않으면 중국에서 비참하게 죽을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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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야 타다시
2차대전 당시 오언스탠리산맥을 넘으라고 부하들을 갈구는 55사단장과 검각 돌파 작전 당시 부하들이 사고사하든 말든 넘으라고 갈구는 55사단장이 정황상 이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검각 돌파 작전 당시 상부에서는 오언스탠리산맥을 넘은 전적이 있는 산악사단을 편제시켰기 때문. 본작에서는 과달카날 전투에서 패배하고 얼마 뒤 동남아에서 일본군이 물러나고 중국에만 집중했으므로 동남아에서 중국으로 넘어간 게 개연성이 맞다. 하나야가 얼마나 부하 학대로 악명을 떨쳤는지를 생각한다면 아무리 일본군이라지만 부하들이 불쌍할 지경.[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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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무라 마사토미
과달카날 전역에서만 잠깐 등장한다. 본작에서는 키스카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대신 미드웨이 해전이 생략되고 대신 과달카날 전역에서 둘을 합친 피해가 동시에 나오자 과달카날 전역에서 수송 작전을 주도하였고 미 해군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당시 과달카날 전역은 낮에는 미군이, 밤에는 일본군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일반적인 수송선은 느려서 구축함, 순양함을 가지고 밤에만 잽싸게 수송을 하느라 꽤 고생했다고. 단역으로 나왔지만 원 역사처럼 특유의 성격과 능력이 잘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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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타구치 렌야
여기서도 루거우차오 사건에서 급발진해 중일전쟁의 포문을 열었으며, 중국 전선에서 검각을 넘어서 중경 함락을 노리는 작전을 입안하고 실행해서[228] 중화민국 정부를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아넣고 미군을 경악에 빠트린다. 그러나 일본군 장교 출신인 지청천이 일본군의 실상을 정확히 미군에게 지적해줘서 충격을 수습하고 광복군을 선봉으로 해서 격파하는 데 성공한다. 인물 자체는 원역사와 전혀 다르지 않으며, 그냥 아무렇게나 내놓은 작전이 상부의 눈에 들고 일본군답지 않게 각 군의 협조도 원활하게 이뤄져 버린 우연의 산물에 불과했다. 작전이 실패하고 이후 과정은 임팔 작전이랑 별로 다를 게 없었고, 도주하는 과정은 일본군 삼대오물로 지목된 도미나가 교지랑 비슷했다.실제 작중에서 그의 행적이 나왔을 때 상당수의 댓글들에서 나온 말이 고증입니다.였다.[229]
의외로 조선 해방과 국공내전에 엄청 크게 기여했는데, 원 역사에서는 일본군이 대륙타통작전으로 중국 해안선을 장악한 탓에 미군이 대만->조선->일본 순으로 가려다 대륙타통작전 때문에 사이판->이오지마->오키나와->일본 본토 순으로 작전을 바꿔야 했지만 여기서는 검각 작전 덕분에 조선 상륙전이 가능했고, 이 나비효과로 국공내전에서 중화민국이 장강 이남만이라도 사수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원 역사의 임팔 전투와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한 건 해줬다.[23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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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타 타메키치
실존인물로, 일본제국 외무성 소속 외교관으로 1918년부터 하니하라 마사나오의 후임으로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 총영사로 있었던 인물이다. 샌프란시스코 총영사 시절 유진과 처음 만나 커넥션을 맺는다. 미쳐 돌아가는 일본제국 상층부 중 국제적 상황에 대한 그나마 올바른 인식을 갖고 있으며 전후 중용되는 것으로 보아 시데하라 기주로가 모티브로 추정된다. 나름 일본제국에 충성심이 있었지만 도조 히데키가 쓴 편지를 보여주자 군부에 학을 떼고 유진에게 협력하고, 전쟁 말미에 교섭창구로 활동하기도 한다. 도조가 할복에 실패하자 그것도 제대로 못하냐며 쌍욕을 박는다. 의외로 전후에 총리는 안 했는데 총리 이상 가는 일본의 실권자로써 활동한다. 덕분에 '저놈의 나라는 왜 이렇게 흑막정치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디스도 듣지만 실제로 가지고 있는 직책이 없기는 하기에 '소일하는 늙은이'를 자칭하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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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다 히로시
오리지널 인물. 전간기에 샌프랑코 사원이었으나 전간기 말 일본으로 돌아와 미국의 폐해와 일본의 위대함을 알리는 강사로 대외적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샌프랑코의 일본쪽 대리인이다. 그렇다고 나라를 파는 그런 건 아니고 일본이 대외무역을 위주로 식민지가 아닌 주변국과 교류하는 것이 일본의 국익이라 생각하는 애국심을 가지고 활동하는 인물이다. 본인은 부정했지만 이승만은 아시아주의자 아닌가 물어보았다. 샌-프랑코의 아시아 측 대리인이라는 입장 때문에 일본 고관들과 자주 접촉하는데, 이들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자낳괴 취급받고 있다. 전후 유진이 한몫 크게 떼어줘서 재계의 거물로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232], 그가 사업하는 모든 나라의 언어에 능해서 유진이 장관이 된 후 스탈린의 70주년 생일에 초대받았을 때 통역으로 데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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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히토
태평양 전선에서 처음 등장한다. 유진을 생포해 앞에 대령하겠다는 대본영의 말을 듣고 절망을 넘어 체념하면서 '그거 참 기대되는구려'라는 말만 했다. 의외로 웬만한 일본군 장성들보다 전략적 식견은 뛰어난 모습을 보였지만, 무책임하고 자신이 현인신이라는 망상에 쩔어있어 말리지 않고 방관만 하는 우책을 범했다. 일본 백성들에게도 매우 무관심해서 전쟁에서 패배할 때도 오로지 왕조와 천황의 지위 보전에만 관심을 두었고 백성들이 고통받건 말건 무시한 건 덤.
전후 일본 군정사령관으로서 조우한 유진은 히로히토는 지금까지 만난 군주들과도, 추축국 수괴나 악명 높은 독재자들과 같은 특유의 분위기도 느껴지지 않지만 대신 책임회피와 탈룰라 능력에 올인한 사람으로 메타몽처럼 필요하다면 어떤 포지션도 능숙하게 취할 수 있기에 원 역사의 맥아더가 히로히토를 처벌하는 대신 이용했다고 평했다. 유진은 원 역사의 맥아더가 히로히토를 쫓아내고 동생들이나 어린 아들을 내세운다고 한들 히로히토처럼 자신에게 요구되는 포지션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따를지 미지수였기에 차라리 히로히토를 이용했을 거라고. 헤이안 시대 이래 실권 없는 허수아비로도 수천 년간 천황의 존재 자체를 유지할 수 있던 주요 이유 중 하나가 이 능력인지라 어떤 의미로는 누구보다도 '천황'답기는 하다.
이 때문에 유진은 원 역사처럼 히로히토를 이용할까 같은 고민도 잠깐 했지만, 도조 히데키가 알려준 731 부대에 관한 자료를 얻어, 히로히토를 일본의 상징으로 내세우는 걸로 끝내는 것보다 생체실험의 죄를 단죄하여 미합중국의 도덕적 위신을 살리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해 일본인들의 퇴위 여론을 조성, 결국 아들 아키히토에게 양위한다.
황위에서 물러났지만 죽지 않았고 이름뿐이라도 상황 자리를 유지했기 때문에 원 역사보다는 몰락했지만 다른 주요 전범보다는 훨씬 나은 최후를 맞이했다. 일본 황실도 헌법조차 존재가 삭제당했지만 인간문화재로서 실질적인 대우는 큰 차이가 없다고 언급되니 그나마 나은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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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대위
헨리가 격추된 후 해류를 타고 표류된 태평양의 절해고도에 버려져 있던 일본군 중대장. 버려져서 채집과 사냥을 하며 완전히 현지인처럼 살고 있었다. 관동대지진 당시 유진 킴에게 은혜입은 사람들 중 한 명으로, 헨리를 중하게 대접하며 친구가 된다. 이 섬에서는 무전이 잘 되지 않았는지 구출대가 영 오지 않았는데, 그 와중에 꿍쳐놨던 술을 나눠 마시고 취중에 장난삼아 통신망에 유진 킴 대원수의 아들 헨리를 포로로 잡았고 술과 안주를 보내주지 않으면 잡아먹겠다는 개드립을 쳤다가[233] 이게 하필 제대로 송신되었는지 며칠 후 바로 미군 구조대가 와서 포로가 된다. 미군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으려하나 헨리는 친해진데다 자신을 구해준 나카무라가 불이익을 입는 걸 막으려 노력했고, 마침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한번 쓰러지기도 했던 유진 킴도 헨리를 지원해준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이때의 인연으로 헨리와 자주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일제에 악감정을 품고 있는 한국인들도 몇몇을 제외하고는 조심히 대해야 할 정도로 친한 친구로 알려진 듯하다. 의외로 전후에도 군에 남았고, 일본 연방육군 참모총장은 따놓은 당상이라는 세평이 돌고 있다. 1960년대 후반엔 그새 중장까지 진급하여 일본의 아프가니스탄 파병군을 이끌고 있는 모습으로 재등장했다. 2차 세계대전기에 대위였음을 감안하면[234] 20대 중반 정도였을 텐데 평시에 40대 중후반~50대 초반에 중장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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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히토
본작에서는 1942년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한 이후 731부대 문제로 히로히토가 퇴위하면서 열 살도 안 된 나이로 꼭두각시 천황으로 즉위했다고 언급된다. 도조 말에 따르면 일본의 권력자가 되고 싶다면 자기 입맛에 맞는 천황을 앉히는 게 일본의 국룰이라나. 이후 일본 황실은 헌법에서조차 존재가 삭제당했지만 원 역사와 큰 차이 없이 인간문화재로서 대접받고 있기는 하다고 한다. 묘사는 안 되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천황이 된 만큼 천황으로서의 공무는 성년이 될 때까지 둘째 숙부 노부히토가 섭정했을 가능성이 높다.[235]
8.1. 무기
순양전함-
공고급 순양전함
공고,
히에이,
하루나,
기리시마
과달카날 전역에 투입되었다는 언급이 있으며, 전투 한 번에 항공모함을 대규모로 날려먹자 무츠를 과달카날섬에서 퇴각시킨 대신 공고와 키리시마가 투입되었다고 언급된다. 이후의 행적은 불명이나 원 역사와 비슷하게 격침당했거나 대만 해협 전투에서 격침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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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토급 전함 나가토
본작의 과달카날 전역 당시 연합함대 총기함으로 사용된다고 언급된다. 원 역사에서 레이테 만 해전 이전까지 거의 놀고만 있던 데 반해 본작에서는 무츠와 마찬가지로 나름 전면에 나서서 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작에서는 야마토급 전함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나가토, 무츠가 일본 최강의 전함이다.
본작에서 레이테 만 해전 대신 대만해협 해전에서 남아있는 모든 전함과 항공모함을 투입했다가 격침당했다는 것으로 보아 대만해협 전투에서 격침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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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토급 전함
무츠
해군조약에서 일본군이 '무츠는 거의 다 만들어서 버릴 수 없다'고 유진에게 말하는 것으로 언급되며, 본작에서는 '무츠 이후 전함을 만들지 않았다'고 언급되기 때문에 야마토급 전함이 없어 야마토, 무츠가 일본 최강의 전함이다.
여기서도 함대결전 개념으로 인한 삽질이 있지만 원 역사와 달리 육군이 해군보다 정치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기에 해군이 작정했는지 과달카날 전투의 핸더슨 비행장 포격을 공고급 순양전함이 아니라 무츠가 주도했다. 공고급의 12인치를 한참 능가하는 16인치 함포로 쏴버린 거니 위력은 확실했지만 기껏 파괴한 핸더슨 비행장은 미군이 포섭한 조선인 노무자들의 필사적인 수리로 빠르게 복구되었고, 준요, 류조와 함께 다시 미군을 족치러 갔다가 오히려 밑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미군기들에게 준요 대파, 류조 격침이라는 참사가 벌어졌지만 무츠는 명색이 16인치 전함인 만큼 폭격을 여러 대 맞고도 살아남았다.
이후 레이테 만 해전이 일어나지 않은 대신 대만 해협에서 모든 전함과 살아남은 항공모함을 포함한 함대를 전부 투입했다가 궤멸당했다는 것으로 보아 대만 해협 전투에서 침몰한 것으로 추측된다.
느려서 낙오되었다는 이유로 전투에 못 나가다 원인 불명의 폭침 사고로 허무하게 침몰한 원 역사와 달리 일은 열심히 했다.
항공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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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류
원 역사와 달리 과달카날 전역에서 살아남았고 대신 쇼카쿠가 격침당했다. 하지만 히류가 쇼카쿠보다 소형이라는 걸 고려하면 일본군 입장에서 더 낫다고 볼 수는 없다. 훗날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히류가 격침당할 때 탈출하지 않고 죽었다고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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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카쿠급 항공모함
즈이카쿠
과달카날 전역에서 다른 항공모함들이 격침당할 때 살아남았다고 언급된다. 이후 레이테 만 해전 대신 대만해협 전투에서 전함들과 항공모함들을 모두 투입했다가 궤멸당했다는 것으로 보아 대만해협 전투에서 격침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경항모
원 역사에서는 경항모라는 분류가 없었으나, 본작에서는 편의상 호칭인지 경항모라고 표기된다. 다만 경항모 분류를 정말로 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본작에서는 육군이 해군보다 세력에 우세를 점해 해군에서는 예산 부족으로 전함파가 패배하고 항모파가 승리해서 야마토급 전함 건조를 포기하고 항공모함 건조에 집중했다. 그런데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인해 항공모함도 수량 제한이 있기 때문에 '경항모'는 제한이 없다는 점을 이용해 경항모 분류를 신설해서 경항모를 여럿 찍어내는 편법을 썼을 수도 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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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항모
준요
원 역사에서 전후까지 살아남은 생존력은 어디 갔는지 과달카날 전역에서 류조와 함께 격침당했다. 무츠가 핸더슨 비행장을 폭격해서 날려버린 뒤 준요와 함께 정규항공모함의 양동으로 육상에 있는 미군을 족치러 갔더니 그사이 비행장이 복구되어 비행장에서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적기들을 버티지 못하고 가라앉았다. 당시 준요와 류조는 '이야기가 다르잖아!'라고 화를 냈지만 미군이 조선인 노무자들까지 동원해서 필사적으로 수복시킨 거라 일본군 지휘관들은 당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일본군의 다른 항공모함들과 달리 달리 꽤 오랫동안 두들겨 맞았다는 서술이 있는 걸 보면 나름 끈질기게 버텼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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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항모
류조
과달카날 전역에서 준요와 함께 격침당했다. 원 역사처럼 미끼로 던진 건 아니고, 무츠가 핸더슨 비행장을 폭격해서 날려버린 뒤 준요와 함께 정규항공모함의 양동으로 육상에 있는 미군을 족치러 갔더니 그사이 비행장이 복구되어 비행장에서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적기들을 버티지 못하고 가라앉았다. 당시 준요와 류조는 '이야기가 다르잖아!'라고 화를 냈지만 미군이 조선인 노무자들까지 동원해서 필사적으로 수복시킨 거라 일본군 지휘관들은 당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순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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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미급 중순양함 모가미, 미쿠마, 스즈야, 쿠마노
과달카날 전역에서 전투 한 번에 항공모함을 대규모로 날려먹자 무츠를 과달카날섬에서 퇴각시켜 버린 대신 스즈야를 남겨두었다. 당시 스즈야의 함장은 기무라 마사토미 대좌로 원 역사와 달리 여기서 수송작전에 투입되었다.
9. 대한민국 임시정부 →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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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김유진이 처음으로 만나게 된 역사적인 인물1. 미래인인 유진의 해박한 식견에 감탄하며, 웨스트포인트 입학 추천서를 받을 수 있게 도와준다. 이후 목줄을 채워서 장기말로 쓰려고 이런저런 공작을 했지만,[236] 유진이 공화당 중진 사위에 전쟁영웅까지 되면서 힘의 격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결국 패배를 인정하게 되고 유진한테 숙청당할 것이라는 공포에 휩쌓여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며 애걸복걸했다.[237] 이후 유진의 지시로 우드로 윌슨의 비선실세 의혹을 폭로[238]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건너가 유진의 후광을 등에 업고 임시정부를 장악한다.
이후 임정에서 유진의 대변인으로 실력양성론[239]을 내세워서 장기 집권에 성공하면서 어느 의미로는 원 역사보다 훨씬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임시정부에서 좌익 세력을 쫓아내거나 존버 전략 때문에 반발을 한 독립운동가들도 여럿 있기는 했지만 김가의 엄청난 후원 덕분에 전차 연대만 2개일 정도로 병력을 크게 확충하는데 성공했고, 당시 여운형 같은 온건파가 아닌 소련파나 연안파는 소련과 중공 스파이 노릇도 하고 있던지라 김구를 시켜 이들을 견제한 태도가 크게 잘못된 건 아니었다. 방심하다 털리는 건 한 번이면 족하다며 각 잡고 정치질을 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김가의 후원이 있었다지만 20년 넘게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독립운동가들을 임정 아래 묶는데 성공한 걸 보면 이 양반이 여간내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김유진과의 오랜 유착 때문에 김유진과 척치기보다는 서로 이용하는 쪽으로 머물고 있었고, 오히려 냉혈 자본가였던 최대 물주인 김유신에게 더 쩔쩔맸다. 임시정부에서 쫓아낸 박헌영이 조선에 밀입국하려는 걸 알게 되자 김구를 시켜 태국에서 암살했는데 몇 년이 지나고도 조선 공산당이 몰랐던 걸 보아 조직의 규모가 커진 만큼 원 역사보다 정보력도 훨씬 뛰어났던 모양이다.[240] 중일전쟁 당시에는 유진의 꼬드김에 넘어가 중국으로 부임한 휴 드럼과도 잘 유착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드럼을 이용해 임시정부의 지휘권을 일원화시키고 유진에게 받은 전차 2개 연대를 사천 전역에서 비장의 수로 숨겨놓았다가 무타구치 렌야의 삽질로 검각을 넘어 돌격한(...) 대규모의 일본군을 전차로 격퇴하며 공을 세우는데 성공한다. 이후 국내 좌익 세력과 손잡고 임정의 공작원들을 파견해 경성 탈환에도 조력했다. 원래 유진과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조선 왕조의 적통으로 인정받아 대한민국을 건국하려 했지만, 영국과 프랑스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 문제와 양자대전으로 독립한 국가들의 혼란상 때문에 국내 동발 유학생들이 모여 만든 싱크탱크까지 합쳐 논의한 끝에 유진이 한반도를 탈환해 유진을 중심으로 한 미군정을 잠깐 만들고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일본이 패망한 이후 미국 정계가 1942년 중간 선거 문제로 혼란스러워지자 다른 임시정부 요인들과 달리 D.C로 향해 외교관 노릇을 했는데, 공화당의 파이프는 김가가 맥아더를 통해 꽉 쥐고 있었고 김유신이 유대인 자본가들을 설득하는 동안 이승만은 개신교도라는 점을 이용해 딕시크랫의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에게 접근해서 성과를 봤다. 윌슨 건은 20년도 더 전이고 자업자득으로 몰락한 거라 큰 지장이 안 되었고, 딕시크랫이 인종주의자로 악명 높기는 하지만 동시에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기도 해서 일제의 원시적인 천황 숭배 강요에 맞서 동방의 예루살렘을 만들고자 개신교 신앙을 고수했다는 주장이 꽤 먹혔다고 한다.[241] 이 과정에서 처칠이 블러핑하려고 내건 한반도 4개국 신탁통치 제안을 월레스가 덥석 받아들였다는 정보를 딕시크랫 중진에게 듣자 오히려 '이겼다'고 판단해 유진에게 이를 알린다. 월레스의 내력도 꽤 꼼꼼하게 조사해서 유진에게 월레스는 정치 경험이 전혀 없어 뭘 모르는 먹물쟁이 같은 소리를 하는 거라며 정면에 들이받아 말을 듣게 만들고, 그러고도 안 들으면 윌슨 때처럼 날려버리라고 조언해 유진이 윌슨을 정면에서 찍어내려 일본 본토 상륙과 신탁통치를 물리게 만들기도 했다.
이후 동발 유학생들을 데리고 임정 인사 중 제일 마지막으로 귀국해 잠시 건국준비위원회의 일원으로 참석해 김원봉의 바로 옆자리에 앉으며 신경전을 벌였고, 제헌 선거 당시에는 노동당에 동족상잔을 바라는 무리가 너무 많다며 탈당한 중도좌파 인사인 조봉암을 러닝메이트로 삼아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고 노동당 내란음모 사건 때 여운형이 중상을 입고 부랴부랴 사회민주당을 분당시키는 혼란이 있던 덕분에 초대 대통령이 되는데 성공했다. 제헌 선거 당시에는 미국에서 돈 좀 끌어왔는지 이승만이 만든 한국독립당은 제헌 선거 당시 제일 자금 여유가 많은 당 중 하나였다고 한다.[242]
그놈의 권력욕은 여전해서 장기집권을 할 꿍꿍이를 가졌지만 해방 초기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데다 유진 또한 그의 장기집권을 경계했기 때문에 결국 2선을 끝으로 퇴임하며 정권을 내주었다.[243] 3대 대선 당시에는 이승만의 한국독립당이 호남과 호서를 텃밭으로 삼는데 성공했고, 영남을 기반으로 한 사민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이 캐스팅보트인 수도권과 강원도에서 승리해 여운형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한다. 이승만이 선을 지켜 물러난 덕분에 한국독립당은 1960년대에도 호남과 호서를 기반으로 한 보수주의 정당으로 1, 2위를 다툴 정도의 세를 자랑하며 본작에서는 김대중이 1964년 대선에서 한국민주당 대선후보로 등장해 이승만과 김유진의 정신을 본받자(!)고 선거하는 모습이 나온다.[244]
원 역사에서 부정적 평가를 받게 된 요소들이 유진의 개입으로 거의 다 없어진 덕분에 작중 이승만은 거의 무결점의 독립운동가에, 전승 대통령에, 결정적으로 신생 대한민국에서 임기를 지키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룬 선례를 만드는 업적만이 남게 되어, 이래저래 개변된 역사의 큰 수혜자가 되었다. 경제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했다는 흠은 있었으나 식민지 시기에 극심한 수탈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한국의 경제사정을 고작 8년의 임기만으로는 뭘 어떻게 할 수 없었다는 것이 정론이였기에 참작의 여지는 있다는 평. 해당 세계에서는 진정 국부라고 할만한 위인이 되었는데, 어떻게 보면 유진이 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한 보답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실존 인물의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만큼 등장할 때마다 댓글창에 지저분한 병림픽이 열렸으나, 그와 별개로 본작에서는 독립에 대한 열망, 애국심, 권력욕, 냉정한 현실 파악, 뛰어난 외교력과 정치력이 복잡하게 뒤섞인 입체적인 캐릭터로 그려졌다. 특유의 정치력과 외교력 때문에 의외로 유진과 정치외교적인 측면에서는 가장 말이 잘 통하는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원 역사와 달리 1919년에 중국으로 가서 1942년에 잠깐 D.C로 갔던지라 1934년에 중혼한 후처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했는지는 불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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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
김유진이 처음으로 만나게 된 역사적 인물2. 원역사처럼 임시정부 군무부장이 되었으며, 유진의 안배로 중원 최고의 전차 전문가가 되었다. 작중에서는 암살당하지 않았지만 대한민국이 독립한 뒤에 농촌 근대화에 투신하겠다며 미군정 자문위원직을 고사했다. 유진 킴이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지 않다고 소련의 지원을 받은 좌익 계통에게 비판받을 때 '김유진이를 내가 업어 키웠다!'라고 윽박질러가며 유진의 편을 들었고, 김가의 적극적인 후원과 이승만의 정교한 숙청 능력에 힘입어 임시정부의 군부를 성공적으로 장악한다.
독립한 후 군정사령관으로 부임한 유진 킴과 독대할 때 대원수 각하라면서 말을 높이자 유진이 왜 자기를 후레자식으로 만들려 하냐고 말하는 걸 보면 거의 서로를 삼촌과 조카 수준으로 인식하는 듯. 원 역사와 달리 1928년에 의열단에게 살해당하지 않았는데, 이승만이 1920년대 당시 중국에 머물며 김가의 자금력을 이용해 여러 독립운동 세력을 통제하고 있었고 금주법이 끝날 당시에 김원봉에게 누명 씌워 쫓아냈다는 것으로 보아 의열단을 강하게 통제하는데 성공했던 모양이다. 어차피 본작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계획은 '일제가 1940년대 안에 미국 공격할 테니 그때까지 존버한다'라서 이승만이 쫓아내기 전까지 의열단의 활동을 억제했을 가능성이 높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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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김유진이 생도 2학년 때 처음 만났으며, 유진의 권유로 박용만만 임정에 가고 미국에 남아서 대한인국민회의 일을 본다. 유진이 결혼할 때 주례를 서주기도 했다. 그러다 임정에서 이승만의 입지가 약해지면서 그의 힘까지 빌려야 하는 상황이 와서 결국 임정으로 가게 된다. 오랜 망명 생활에 건강을 잃어 결국 해방 전에 죽고 유골이 된 상태로 고국을 밟게 된다. 본작에서는 1942년에 해방되었기 때문에 4년을 못 버틴 게 안타까운 부분이나, 유진이 히틀러를 잡고 왜놈들을 잡으러 온다는 말에 기뻐하며 필사적인 의지로 원 역사보다 더 오래 살았다고 한다. 유진이 2차대전에 출정한 게 1939년이니 적어도 1년 이상은 오래 산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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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호치민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유럽으로 와서 김유진을 만났다. 유진은 원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날 일과 윌슨에게 받은 명령을 알려줘서 냉정한 국제 사회의 현실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자신에게 조선인의 피가 흐른다는 걸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그를 안심시키고 여비로 쓰라며 거액의 수표를 끊어준다. 이때의 경험으로 유진의 추종자가 된 것으로 보이며, 해방 때는 부통령으로 무사히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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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원 역사와 달리 유진의 개입으로 정치 사상을 갈아치우면서 코드가 맞게 된 이승만과 갈등할 이유가 완전히 없어지면서, 그의 철저한 수족이 되어 경무국을 완전히 장악했다. 앙숙 수준으로 대립했던 원역과 달리 이승만도 그를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신뢰하게 된 것은 덤. 빨갱이라면 치를 떤다는 이승만의 평을 보면 원 역사처럼 좌익을 극혐하는 것으로 보이며,[245] 공산주의자들이 김구의 경무국이 나치 비밀경찰 같다고 욕할 정도로 악랄하고 철저했다고 한다.
원 역사와 달리 미국에 있다 소련의 명령으로 조선에 입국하려던 박헌영을 태국에 자객을 보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하고 해방 이후에도 정보망 빵빵하다는 공산주의자들이 하나 둘 씩 실종되어 행방을 알 수 없던 걸 보면 원 역사와 달리 본작에서는 유진을 비롯한 김가의 후원으로 인해 임시정부의 자금이 빵빵해서 경무국도 원 역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였던 걸로 보인다.[246]
해방 후에는 경찰청장으로 임명되어서 서울의 깡패들을 다 쓸어버리고[247] 좌파들이 여운형을 암살하려 하고 봉기를 일으켰을 때 체포작전을 진두지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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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라초이 식품회사를 운영하던 당시 유일한의 존재를 알게 된 김유진이 샌-프랑코로 픽업했다. 원역에서 유일한의 업적을 아는 김유진은 그를 깍듯하게 대우했지만 정작 유일한 본인은 김유진과 그 동생들의 광기에 휘말리면서 한숨을 쉬는게 일상이였다고. 미국에서 유진의 사업 대리인 등으로 일하다가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동남아 전선에 종군하고 싶다고 유진과 유신을 조르다가[248] 때마침 조선인들이 대규모로 동남아 전선에 노무자로 강제징용되었다가 미군이 포로로 잡은 상황이라 유일한을 보내서 중개하게 했다. 그 와중에 샌-프랑코 지분을 다 유진 킴에게 넘기고 그만큼 물자지원을 받기로 했다고 해서 헨리 킴을 경악시킨다. 헨리 킴에게 삼촌이라 불리는 건 덤. 이후 미국과 협상해 조선인 포로들과 귀국을 결심한 동발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자유대한군단을 창설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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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태
도쿄대 유학생으로 있을 당시 김유진이 일본에 있을 때 한번 뵙고 싶다며 방정환과 함께 찾아왔다. 일본 경찰이 막아서자 왜 조선인은 김유진 장군을 만날 수 없냐며, 그저 얼굴을 한번 뵙고 싶었다며 항변해서 식민지인의 설움을 드러내는 묘사로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지만 역사에 해박하지 않은 유진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이후에는 방정환에게 비중이 완전히 먹혀버리며 등장도 없다. 그래도 맥락상 동양발전기금 장학생으로 선발된 것은 확실하고 이후 전개를 보면 납북되어서 몰년도 모르는 처지도 피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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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
김유진이 일본에 있을 때 한번 뵙고 싶다며 손진태와 함께 찾아왔다가 동양발전기금 장학생으로 픽업된 인물. 장인이었던 손병희를 직접 찾아가 김유진에 대해 대화하다 일본군 헌병이 쳐들어와 자신을 첫 유학생으로 지명하자 처음에는 얼떨떨했지만 김유진의 계획을 깨닫고 받아들였다.[249]
한번 입을 털면 애건 어른이건 홀리게 만든 엄청난 말빨[250]은 미국에 와서도 변함없었고, 유진이 제안한 대로 성경 내용과 기독교적 가치를 집어넣은 트레이딩 카드 게임을 만들어낸다. 이는 전미를 휩쓸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서 '미스터 뱅'이란 이름으로 문화산업의 상징이 되었다. 허나 나치 독일이 자신의 게임을 모방한 카드 게임으로 어린이들에게 나치 이념을 세뇌시키는 것을 본 뒤 극심한 회의감에 빠져 2차 대전 중 미국의 선전 캠페인 참여를 거부한다.
한국이 해방된 뒤 귀국해 아이들을 위한 각종 자선사업 활동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샌-프랑코 게임 산업과의 연줄과 할리우드, 디즈니와의 연줄도 유지하고 있었고 디즈니의 새로운 애니메이션 하청작업을 맡기도 했다.
유학생 시절까지만 해도 원역처럼 고도비만이었으나 이를 염려한 김유진의 지시로 다이어트를 해서 건강도 되찾고 수명이 늘어났다. 또 본작에서는 해방 직후 천도교세가 유지되었는지 기독교 정당처럼 나름 대중적인 천도교 정당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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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희
공산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 신간회 활동을 하다가 조선총독부가 눈엣가시였던 그를 동양발전기금 장학생으로 선발해서 미국에 보냈고, 가족과 함께 총독부에게 털릴 바에는 그냥 미국에서 공부하는 게 낫겠다 판단해 가족들에게는 적당히 둘러대고 동생인 박정희도 데려갔다. 미국인들에게는 생히 팍이라고 불렸다고.
미국 시절 코민테른의 지시로 박헌영 밑에서 반전 운동을 하다가 진주만 공습으로 맞아 죽을 뻔하고, 이는 데려온 막내 동생 박정희가 입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의 이중적인 태도를 보고 점차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다. 2차대전 초에 유신과 방정환이 대화할 때 공산주의자였다가 전향했다며 유신에게 말을 건 사람이 박상희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 유신의 말을 보면 소련이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자 말바꾸기를 시전하는 걸 보고 결국 소련도 러시아 민족주의 국가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던 모양.[251]
해방 이후 귀국해 노동당에 입당하였지만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고 계몽운동에만 전념하다, 노동당 내 공산주의자들이 박상희를 끌어들이려고 적색테러 계획을 밝혔지만 오히려 여운형 암살미수 사건 이후 노동당 내란음모 혐의라고 폭로하였다. 이후 등장은 없지만 정황상 계몽운동가로서 영남 일대에서 활동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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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몸이 약한데도 몇 시간씩 걸어서 학교에 다닐 정도로 학구열이 강하고, 나폴레옹과 김유진의 전기를 끼고 사는 소년으로 등장한다. 이후 동양발전기금 장학생으로 선정된(이라 쓰고 조선총독부에 찍혀 추방이라 읽는다) 박상희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와(동발 유학생은 가족을 동행시킬 수 있다) 미국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본작에서는 미국식 이름인 조니 팍이라고도 불린다. 유진은 그를 알아보고 짧은 대화를 나누는데 군인을 숭상하는 모습을 보면서 실제 인물의 행적을 떠올리며 다소 껄끄러워했지만, 해당 시점의 박정희는 아직 순진한 소년이었기에 "나폴레옹은 국민을 위해 싸웠을 땐 지지 받았지만 자신을 위해 싸우자 외면당했다"는 나름의 충고를 해줬다. 그 말을 들은 도조 히데키의 장남이 유진의 말에 감명을 받아서 유진은 어벤저스 만들려고 동발 만들었더니 갈수록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되어가는 것 같다고 찜찜해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어서 입대할 수 없었지만 혈서를 쓰며 입대에 성공하고,[252] 장교로 임관하여 소대장으로 김영옥과 함께 아프리카 전역에서 활약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원 역사에서 만주군 복무 당시 사무 일을 하던 것과 달리 본작에서는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카세린 계곡 전투에서는 부하들의 선두에 서서 ''알링턴에서 만나자!"라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구호를 외치며 미군판 반자이 돌격을 감행했다.(...) 이후에도 최전방에서 적극적으로 싸웠다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소규모 격전에서도 제 몸 하나 간수한 정도로는 군사적 재주는 있었던 모양이다.
1942년 아미앵 전투 당시에는 대한독립군단으로 이적해서 93사단에서 빠져 무사했다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유색인종 사단인 93사단에서 복무한 모양이다. 김영옥은 자신도 간신히 살아남았기 때문에 호전적이었던 박정희가 아미앵에 있었다면 분명 죽었을 거라며 다행이라 생각했다고. 이후 조선 독립 전쟁에서는 대한독립군단의 연대장으로 고향과 가까운 대구를 해방하는 데 기여했으며[253] 이후 신생 대한민국 국군의 사단장이 되어서 대구에서 근무한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박정희를 끌어들여 반란에 동참하게 만들려고 했지만, 중간에 말을 들은 박상희가 반란을 시도한다는 말에 주저 없이 밀고해서 공산주의자들만 신세를 종쳤다.
원 역사와 개변된 역사의 행적이 절묘하게 섞였다고 평가받는다. 군인을 동경하고 이를 출세의 수단으로 여기는 것은 동일하지만 동경의 대상이 주인공 유진 킴인 데다 어린 시절에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군사 커리어를 만주국이 아니라 미군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거기에 본인은 인종차별에 질려서 시민권도 마다하고 미국을 떠나긴 했지만 미국에서 어릴 때부터 산 데다가 형을 구명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전장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2차 대전 전쟁영웅이라는 든든한 정치적 자산도 갖게 되었다.
이후 외전에 나온 바로는 군인으로 출세해서 국방부 장관까지 한 것으로 보이며, 일본과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이자 국공내전의 승장이라는 막강한 이력을 바탕으로 좌파 계열인 사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어서 1964년 대선에서 우파 계열인 한독당의 후보 김대중과 맞붙어 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명색이 사민주의를 내건 정당 후보였던 만큼 의료보험 등을 비롯한 진보 정책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타고간 기질인지 본작에서도 좌파에 부정적이라 집권당을 분당시켰고 원 역사의 3공화국과 다를 바 없는 악업적인 통치를 해서 부작용이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오면서 원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혼란스러운 임기를 보냈다. 결정적으로 아프간 전쟁에 파병하는 실책을 저질렀고, 김유진의 사후 발생한 아시아판 68 혁명에 시달리며[254] 대통령으로서는 성공적인 임기를 보내지 못한다.
그래도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으로 통치하기는 해도 원 역사처럼 독재자까지는 안 된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본인이 쿠데타에 당할 뻔했다가 김유진이 전화 한 통으로 진압하여 구원받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승만도 여운형도 8년만 집권하고 물러나 장기집권할 명분도 없고 당대 한국의 주요 인재들은 군부를 포함해서 대부분이 동발을 통해 미국과 김유진에게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가 친위 쿠데타를 시도하기는 힘들다. 애초에 사민주의 정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원 역사와 성향이 별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군부에서 빨갱이 소리를 들었다.(...) 사실 원 역사의 박정희도 남로당 이력 때문에 윤보선에게 원조 빨갱이라고 까인 적이 있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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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태
오리지널 인물. 과달카날에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미군에게 구출된 뒤 유진의 장남 헨리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친해졌다. 원래는 서울에서 제법 잘 사는 집안이었지만 앙심을 품고 순사가 된 머슴 때문에 징용에 끌려온 것. 해방 후 머슴을 죽여 원수를 갚았고, 영어가 가능하고 헨리를 매개로 유진과 선이 닿아있는데다가 청렴하고 유능했기 때문에 귀국 후 온갖 곳에서 모셔가려 할 정도로 인생 역전에 성공했다. 유일한의 추천으로 관청에 취직했는데 월화수목금금금으로 혹사당하며 속였구나! 유일한!!을 외쳤다.
이후 에필로그의 김가 회의 장면에서 언급되는데 재무장관까지 올라간 듯하며, 조범석 중장의 외조부인 듯하다.[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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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중일전쟁 후반기, 임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먼저 조선으로 돌아가서 임정과 논란을 빚었다고 한다. 임정에서는 여운형이 사회주의자라서 경계했지만, 정작 공산주의 조직은 여운형을 기회주의자라고 보고 있었다. 사회주의자이기는 해도 진성 공산주의자는 아닌 데다 동생인 여운홍(呂運弘)이 동발 유학생으로 미국에 갔기 때문. 다만 여운형이 여운홍과 협력한다는 언급이 없고 여운홍은 김가에 적극 협력한다는 언급이 있기에 동생과는 성향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유진이 군산으로 상륙해서 삼남 지방을 해방시키는 동안, 조선건국동맹을 구성하고 조선인들의 봉기를 틈타 전차와 그리스건을 빼돌려서 무력으로 경성을 해방시키는 공을 세운다.[256] 한때 유진의 의도를 의심하고 아들 헨리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김 장군은 혹시 해방군이란 명목으로 새로운 조선 총독이 되어서 이 나라를 삼키려 들 욕심이 정말 없는가?'라고 우려를 나타냈으나 헨리의 팩트폭력[257]을 맞고 미군정을 인정하고[258] 자문위원단의 일원이 된다. 김유진이 '동족상잔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때 그럴 리가 있겠냐고 반응했지만 김유진은 여운형이 원 역사에서 암살당한 것 때문에 '당신들은 좀 더 조심해야 한다고'라고 속으로 한탄했다.
이후 좌파 빅텐트 정당인 노동당을 창당하나[259]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은 공산당에게 내부에서 먹힌 상태였고,[260] 본인도 소련의 지령을 받은 노동당 내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할 뻔했지만 심상치 않은 정황을 감지한 죽헌 옹이 방탄복과 지팡이 총을 건네줘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당시 중상을 입어 기절했다가 김구의 공산주의 소탕 작전 직후에 깨어났고, 남은 제헌 선거 기간 동안 직속 세력을 이끌고 사회민주당을 창당해 급히 선거운동을 한 끝에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몸이 다 낫지 않아 거동이 불편한 것 치고는 선전한 편이었다고. 공산주의 세력이 전멸한 이후에도 영남과 강원도의 非공산주의 계통의 사회주의 세력은 살아남았다고 하며, 이승만은 여운형이 빨갱이까지는 아니더라도 다홍색도 붉은 건 매한가지라며 꺼렸다.
3회 대통령 선거에 승리해 이승만의 뒤를 이어 2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 때문에 CIA가 한국에서 반공 쿠데타를 계획했다 유진에게 욕 처먹고 저지당하는 해프닝도 있었다.[261] 당시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헌 시절부터 우세였던 영남과 강원도에 확실히 세를 굳혔으며 이승만 정부의 레임덕을 이용해 경기도, 황해도에서도 승리를 거두어 원내 제1당 자리를 차지하는데 성공했지만[262] 단독 과반까지는 아니라서 한독당을 비롯한 야당들에게 나름 시달린 편이었다고 한다.
당선 후 동유럽에서 촉발되어 동아시아까지 확대된 공산권과의 대립에서 PATO가 개입하는 것에 부정적이라 역시 친소적이라는 평도 받았으나 미국으로부터 제철소 건설을 비롯한 경제 지원을 받아내고는 북진멸공으로 선회하는 자본주의적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사회주의 사상도 공업화를 중시하며 한독당에서 대통령 시절 여운형을 사회주의 빨갱이라 욕한 걸 보면 사회주의 성향을 버린 건 아니고 그냥 돈이 필요해서 좌익 정치인 특유의 강짜 부린 것에 가깝다.[263] 이 때문에 김대중은 초선 시절 국회에서 대통령 시절 여운형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가 국회 공성전이 발발하기도 했다.
외전에서 언급된 바에 따르면 여운형은 재선까지 했으며, 사민당은 이후 대통령 하나를 더 내놓았다가[264] 박정희 vs 김대중이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충돌하였고, 박정희는 지역 따라 사민당 대통령이 되었지만 원래부터 극우적 성향에 가까웠기에 사민당이 분당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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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임시정부가 우파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현실을 의식해서 참고 있었으나, 미국에서 금주법이 철폐되고 임시정부가 돈줄로 삼던 양조 사업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승만의 정치공작이 맞물려 횡령범의 오명을 쓸 뻔하기도 했다. 당시 김원봉을 필두로 한 의열단이 워낙 과격해서 이승만은 의열단을 강하게 통제했다고 하며, 결국 쫓아낸 것도 그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원봉은 김유진이 미 제국주의자라고 생각해 김유진이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것도 꺼렸다고.[265]
조선혁명군에 몸담았었으나 중국 국민당에 별다른 원한이 없어서 중국 국민당을 공격하는 걸 꺼렸으며 공산주의자보다 민족주의자에 가까운지라 이대로 천날만날 기다리다가는 늙어죽을 때까지 못 돌아갈 것 같다며 단신으로 귀국을 결정한다. 하지만 조선혁명군은 김원봉에게 일어날 일을 예측하며 혼자 잘해보라며 김원봉을 비웃고 귀국하지 않았다.[266] 이후 미군정의 자문위원회에 합류했는데 꼬장꼬장한 성격 때문에 인간관계는 별로지만 일제 부역자를 털거나 토지개혁 등의 사안에서는 정파를 가리지 않고 죽이 잘 맞았다고 한다. 이승만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기싸움을 했다고.(...) 다른 독립운동가들도 이왕가를 싫어하지만 김원봉은 의열단 수장 커리어가 어디 안 가서 암살까지 거론하기도 했다.[267] 이때는 김유진에게 제국주의자 운운하는 말이 없는 걸 보면 김유진에 대한 의심은 그럭저럭 풀린 듯하다.[268]
집권세력이 된 우파에서나 동족상잔까지 불사하려던 좌파에서나 특유의 꼬장꼬장함 때문에 거슬리는 인물이라 목숨을 위협받아서 피습 직후임에도 여운형에게 살려달라고 비는 처지에 놓였다. 공산주의자들의 내란음모의 공범으로 몰리자 노동당 내 공산주의자들이랑 어울린 적은 있어도 적색테러에 가담한 적은 없는데 자기까지 공범으로 몰렸다며 여운형에게 조언을 구했고, 여운형은 '공산주의자들이 중국공산당과 소련의 사주를 받아 내란음모를 꾸민 게 문제가 된 것이니 외세에 결탁하지 않았다는 성명을 내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이게 문제가 된 탓인지 이후 본편에서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외전에서는 60년대 말~70년대 초에 재등장한다. 아프간 전쟁에 참전한 후 한국에 돌아와 일하던 전역군인들이 자국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분노해 봉기했고, 시위의 무력 진압 도중 사망자가 발생한 것을 계기로[269] 이들 중 일부를 규합, <서북노동자총연맹>을 만들어 백주대낮에 평양경찰서 폭탄 테러를 일으킨다.[270] 오래 방구석 늙은이 신세였던지라 주동자가 김원봉이라는 말을 들은 박정희는 "그 사람이 아직 살아있었다고요?"라고 말했을 정도.[271] 구 조선의용대 시절 전우들을 소집하고, 2년 가까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고 전국을 돌면서 적색 테러를 일으키다가, 대구에서 군경에 포위당하자 자살했지만 그가 죽은 후에도 그가 뿌린 씨앗까지 끊어지지는 않았고, 동양 삼국(북중국이 아니라 남중국이다)의 노동자들은 국제 네트워크를 구축해 조직적으로 활동했다.[272]
꼬장꼬장한 성격 때문에 독자들에게도 식견이 떨어진다며 평이 좋지 않았지만,[273] 그래도 김원봉의 최후는 상당히 괜찮았다는 평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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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임시정부의 비밀요원으로 접선장소로 쓰이는 요정의 지배인으로 활동하면서 1942년 뒷공작으로 경성을 해방하는 데 공을 세운다. 원 역사에서 '육체의 쾌락은 충분히 즐겼으니 영원한 쾌락을 즐기러'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사람이 육체적 쾌락의 끝판왕인 요정 지배인이 되었다는 아이러니는 덤. 임시정부의 첩보원이지만 샌-프랑코 일본 지사 소속이자 김유진의 첩보원인 야마다와 접선하는 것으로 보아 김유진 직속 첩보망과도 자주 접선하던 사이로 보인다.
처음에는 키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등장하며 임정에서도 그의 본명은 잘 모른다고 언급된다. 이봉창은 일본인의 양자로 들어가 본토 일본인의 호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에게도 출신에 의심을 안 샀던 것으로 보이며,[274] 원 역사와 다른 경로를 걷게 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본작에서는 이승만이 김구를 수족으로 두고 있는 걸 고려하면 김구에게 이봉창에 대해 듣고 이봉창을 일회용으로 쓰기보다 일본인 호적을 이용해 장기적인 정보원으로 쓰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외전에 따르면 광복 후 수십 년이 지난 시점에도 요정 지배인으로 활동 중이며 1960년대 말~70년대 초 김유진의 끄나풀 노릇을 하면서 쿠데타 모의를 무산시키는 데에도 활약한다. 이때 여차하면 그들을 죽이라는 지시를 받은 것인지 장군들이 수상한 모의를 하는 방 밖에서 그리스건을 들고 대기 중이었다. 이봉창은 1900년생이므로 당시 60대 후반~70대 초반이었을 것이다.[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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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우
김유진의 조선 침공이 눈앞에 다가오자 총독부가 조선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그를 끌어들이려 했으나 칭병하면서 다 거절했다. 자존심 이전에 상식이 있다면 누가 봐도 총독부가 가망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응하는 게 더 멍청한 짓이었기 때문. 해방 후에는 자문위원단의 일원이 되었는데, 서로 죽이지는 말라는 유진의 말에 여운형과 함께 그럴 리 있겠냐고 반문하지만 이 말을 한 사람들이 하필이면 원 역사에서 암살당했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이라서 원 역사를 아는 유진은 쓴웃음만 지었다. 이후에는 등장이 없지만 암살미수를 겪은 건 여운형뿐이기 때문에 무사히 천수를 누렸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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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
군산에 상륙한 유진에게 접선한 임시정부 군관으로 등장, 이후 국방부 장관이 된다. 당시 국내 독립운동가 세력이 죄다 좌익계였던지라 파시스트라는 문제점을 감수하고 이승만이 픽업해서 김유진에게 보냈다고. 진성 파시스트답게 유진을 히틀러가 인정한(...) 위버멘쉬로 여기며, 국공내전을 만반스라움을 달성할 기회라고 봤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지라 주장을 접는다. 이승만의 최측근이었음에도 국공내전에 참전하고 이후 내전이 장기화된 것에 대해 여론이 안 좋아서 사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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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본작에서는 언급만 되는데 김유진에게 큰 호감이 있었으며 김유진과 만나고 싶어했지만 해방 당시인 1942년 이전에 사망해 만나지 못했다. 이범석과 잘 아는 사이였는지 이범석이 이를 김유진에게 말하며 아쉬워했다. 김유진-이승만 독립 플랜은 1940년대 일제가 중국 이권 문제로 미국을 공격할 것이고 미국은 일제를 괘씸죄로 멸망시키려 들 테니 그때까지 실력양성을 해 결정적인 때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는데, 실력양성 30년 프로젝트가 실력양성론 독립운동가들에게 꽤 먹혔다는 언급이 있으므로 본작의 신채호는 이승만과 덜 척졌을 가능성이 높다. 원 역사에서는 1938년 옥사했지만 본작에서는 어떤 연유로 1942년 전에 사망한 건지 불명이다.
본작에서는 1910년대 후반부터 조선인들이 김유진을 위버멘쉬라 여기며 추종하는 기조가 강했기 때문에 김유진에게 호감을 가졌다는 걸 고려하면 본작에서는 아나키즘 영향을 덜 받았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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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해방 직후 미군정 체제의 자문위원회의 일원으로 참가해 원 역사처럼 토지개혁을 이끌었다. 토지개혁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동의를 받았지만 그걸로 조봉암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는 것으로 보아 구체적인 플랜은 조봉암이 주도한 듯.
처음에는 좌파 빅텐트 정당인 노동당 소속이었으나 노동당 내 동족상잔을 바라는 이들이 너무 많다고 디스하고 탈당한 뒤 제헌 선거에서 이승만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해 초대 부통령이 된다. 탈당하고 얼마 뒤 노동당 내란음모 사건이 일어난 걸 보면 조봉암이 선견지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276]
분단도 내전도 없어져서인지 이승만도 그를 정권의 동반자로 여기며 편하게 대하고, 국공내전 때의 묘사를 보면 권한도 꽤 부여한 것으로 보여서 원 역사의 비극을 겪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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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원
원 역사와 같이 중일전쟁에서 대활약한다. 일본군에서 성공했지만 광복군으로 탈영하는 한인 병사들의 가족을 돌봐주는 원 역사의 홍사익 같은 포지션이 되었다. 작중에서는 "미국의 김유진, 반도의 김석원, 만주의 김일성"으로 더 유명해졌다. 사실 원 역사에서도 조선인 후배들의 가족들을 챙겨주기는 했다고. 해방 이후에는 몰락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일본군 출신 후배들의 비호가 있었다면 일부 일본군은 형벌 부대로 한국군에 편입되었다 언급되므로 원 역사처럼 한국군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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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천
원 역사랑 달리 해방 이후에도 생존하여 육군참모총장이 되어 1945년 국공내전의 한국군을 지휘한다. 어떻게 소련의 대숙청에서 살아남아 시베리아행이 안 된지는 불명이나, 1920년대부터 김가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임시정부의 세력이 다른 독립운동 세력보다 강성했고 많은 독립운동 세력들이 임시정부 휘하로 모였다는 것으로 보아 제때 임시정부 산하로 들어가서 무사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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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청천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일본 육사 졸업생 장교였다 탈영해 광복군에 합류했다. 무타구치가 원 역사의 대륙타통작전과 달리 검각 작전을 고안해[277] 중경 근처까지 밀고 들어오자 패닉에 빠진 연합군에게 일본군 시절 경험을 떠올려 '우연'이라고 설명해서 안심시켰고 사실이었다. 육사 당시 일본군 기갑 교리를 적극적으로 연구했는데 자기보다 약한 상대하고만 싸우다 보니 자기보다 기갑이 우세한 적에 대한 대응책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고 디스한 건 덤. 사실 김가가 뇌물을 써서 일부러 대전차무기 개발을 방해한 게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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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
원 역사와 달리 일본군에서 탈영해서 광복군에 합류한다.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김유진이 "도쿄에 돌아가겠다"며 살벌하게 선전포고한 뒤 북아프리카에서 악명을 떨친 롬멜을 2개월 만에 패퇴시킨 괴물같은 군공 때문에 일본군 내에서 "이러다 지는 거 아니야"는 두려움이 원 역사보다 더 커 "정말로 미국에게 지면 우리 집안은 기둥뿌리 뽑힌다"고 판단했다고. 실제로 김유진은 친일파 대숙청을 위해 친미 인텔리를 양성한 인물이므로 안 그랬으면 이종찬 집안은 그냥 쫑났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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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친일민족반역자로, 이종찬이 탈영해 광복군에 합류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는 것으로 첫등장. 이후 한국이 독립하자 체포되고, 펜이 칼보다 강하다면 그 죄를 더 엄중히 물어야 한다는 이유로 처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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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덕
경성 육군조병창 제5공장장으로, 야마다, 이봉창 등에게 포섭되어 각종 군 기밀을 빼돌리고 군수창고를 털어먹을 수 있도록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이때의 조력으로 건국동맹의 경성 봉기가 성공하는데 크게 한몫했기에, 기회주의자라느니 인생은 한 방이니 하며 비아냥은 들을지언정 최소한 서대문 민족반역자수용소에 수감되는 일은 모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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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원 역사와 성향이 180도 달라져서 한국독립당 소속으로 전남 목포시 지역구 의원이 되었으며 원 역사처럼 젊은 데다가 잘생기고 뛰어난 연설 실력으로 유명한 신성 보수 정치인이 되었다. 작중에서는 그의 정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분단, 내전, 독재가 없어졌고 역사의 개변으로 인해 호남의 보수 성향이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김대중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278] [279] 원 역사처럼 제헌 선거 당시에는 호남 지주들이 만든 한국민주당이 있었고 3대 대선 당시에 한국독립당이 호남에서 세를 굳혔다는 것으로 보아 한국민주당에 들어갔다 한국독립당으로 옮겼거나 두 당이 합당한 것으로 보인다.
초선 국회의원으로 첫 등장해 여운형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보수 정책 연설을 하다가 국회 공성전이 발발해서[280] 좀 다치는 것으로 첫등장했으며, 한번 전두환을 만나보겠냐는 제안에 왠지 모를 꺼림칙함을 느끼는 개그 장면도 나온다.
외전에서는 1964년 대선에서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우파 계열인 한독당 대선 후보로 출마해서 좌파 계열인 사민당의 후보 박정희와 맞붙으나 낙선한다.[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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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원 역사와 성향이 180도 달라져서,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경남 거제시의 최연소 지역구 의원이자 대통령 여운형의 최측근으로 활약하고 있다. 작중에서는 극한의 이념 갈등이 없기 때문에 '동방의 모스크바'로 불리던 영남의 좌익세가 그대로 유지된 것으로 보이며, 내전으로 모친을 잃지도 않아서 개인적으로 공산당에 증오심을 품을 이유도 없어져서 꿈인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영남에서 강세인 사민당에 입당한 것으로 보인다. 본작의 한국도 반공주의를 내세우기는 하지만 여운형 때문에 사민주의 세력은 살아남아 영남에서 세를 유지 중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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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원 역사와 달리 2차 세계대전이 일찍 끝나서 광복 이후까지 생존했으며, 외전에서 최소 중장급 군인인 60년대 말 아프간 파병 한국군의 사령관으로 등장해서 독자들을 빵 터뜨렸다.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니던 당시 유진이 윤동주의 이름을 듣고 픽업해서 동양발전기금의 장학생으로 뽑혀 미국에 갔고,[282] 해방 이후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실무진이 필요하다는 유진과 유신의 꼬드김에 넘어가 문학이 아닌 이공계 쪽으로 진로를 잡았다. 그러다 2차대전 당시 자유대한군단에 입대해서 한국군 장교가 되었고, 해방 후 다른 동발 출신자들은 대부분 전역했지만 고향이 간도였던 그는 고향이 중공 땅이 되어버리자 군에 말뚝을 박고 남았다.[283]
문학가 이미지가 강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원 역사의 윤동주는 1917년생임에도 키가 176cm에 운동을 즐겼다니 군대에 투신한 것도 어색하지는 않다.[284] 독자들은 별 헤는 밤이 장성들의 별을 헤는 거였냐는 우스갯소리를 하고 있다. 김동주는 1917년생이므로 60년대 말에 중장급이라면 50세에 중장급이 된 셈이니 제법 탄탄대로의 출세를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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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실제 등장은 없지만 김유진이 방한했을 때 호종한 육사 생도였는데, 이름을 알아본 김유진이 대뜸 멩스크, 위연이 떠오른다는 악담을 해버려서 인생이 제대로 꼬였다고 언급된다.
사실 작중 세계관의 대한민국은 분단되지도 않고 동족상잔의 비극도 겪지 않고 유진의 배려로 가난할지언정 안정된 정부를 꾸리고 발전하고 있었고, 작중에서도 언급됐듯 문민통제도 잘 지켜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전두환도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가 되기보다는 그냥 평범한 군인으로 살 가능성이 높았다.[285] 애초에 아무 생도에게 국부라고 할 수 있는 특급 귀빈을 호종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실제 인물과 비슷하게 축구 좋아하고 카리스마 있는 우수한 육사 생도로 취급받고 있었을 수도 있다.실제 인물과 달리 공부도 잘 했을 수도[286] 그러나 유진을 만난 이후 계속되는 주변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육사를 자퇴하고 말았다. 다행히 이후 시작한 사업은 제법 잘 나간다고 한다.[287] 이는 당시에도 큰 논란이 됐었고, 무심결에 내뱉은 한마디에 애먼 젊은이 하나가 인생을 망쳤다며 동정 어린 시선을 받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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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승[288]
본작의 오리지널 인물로 박정희 정권 시기 5사단장. 좌파인 박정희가 공산당에 유화적인 정책을 펼친다며 다른 장군들과 함께[289] 이봉창의 요정에서 쿠데타 모의를 하고 있었으나 김유진의 전화 한 방에 진압당한다. 정작 박정희는 사민주의 정당인 사민당 당적으로 당선되었지만 정책은 원 역사의 3공화국 시절과 똑같아서 사민당을 분당시킬 정도로 극우적 성향이 강했다는 걸 생각하면 헛소리. 원 역사에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본작에서는 쿠데타에 당할 뻔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조성했다.
여담으로 쿠데타 모의할 당시 장군들이 "원내에 공산당이 진입하는 게 말이 되냐" "이러다가 진짜로 한국이 적화되는 게 아니냐"고 걱정한 것으로 보아 60년대 말 당시 한국에 공산당이 창설되어 원내 진입에 성공한 모양이다. 본작에서는 한국, 일본, 남중국 노동자들이 좌익을 중심으로 한 국제 노동운동 네트워크가 결성되어 노동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고[290] 여운형의 사민당도 박정희 시기 분당되었다 언급되는 걸 보아 사민주의 성향의 당원들이 이탈하여 비슷한 성향의 당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좌익이라고 공산당 하나만 있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지만[291] 60년대 말로 가면 노동운동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었고 이에 비례해 좌익 세력도 원내에서 지분을 늘리고 있던 건 확실해 보인다. 본작의 대한민국은 권위주의 통치를 하든 말든 건국 당시부터 자유민주주의라고 국체를 못박아 놓은 상태고 본작의 박정희는 군사 독재자가 아니라 통치만 권위주의적인 것뿐이지 엄연히 자유민주주의 제도에 따라 선출된 대통령이기 때문에 아무리 노동자를 때려잡는다 해도 원내에서 반공주의고 나발이고 좌익 비율이 느는 걸 법적으로 막을 방법은 없다. 애초에 박정희가 좌익인 사민주의 소속 대통령으로 처음 선출된 걸 고려하면 명분도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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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범석
자세한 내용은 조범석(웹소설 캐릭터) 문서 참고하십시오.
10.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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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요제프 괴벨스
악마의 재능을 지닌 선동가로 실제 인물과 거의 비슷한 행보를 보이며, 유진이 유고슬라비아에 잠입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도망친 후 그를 조롱하는 선전을 대대적으로 펼친다. 이후 독일이 패전을 앞둔 시점에서 가족들과 함께 음독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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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헤스
김유진이 유럽 휴가를 갔을 때 히틀러의 초청 의사를 전달했었다. 이후 전쟁이 일어나자 그와의 친분을 내세우면서 원역사처럼 영국으로 몰래 날아갔다가 체포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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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소 폰 만토이펠
365화에서 B집단군이 완전히 포위되기 직전 만토이펠과 직속 부대는 탈출에 성공했다고 언급된다.[292] 모델은 갈 사람은 가야 한다며 최대한 장비를 보존해 빠져나가라 지시했다. 이후에는 원 역사와 비슷했던 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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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폰 만슈타인
동부전선에서만 활동하다 보니 언급만 되는데, 굉장히 잘 싸우다가 히틀러가 대전 말기에 후퇴 금지 명령만 남발하는 삽질을 저질러서 게오르기 주코프에게 졌다는 언급이 있다. 싸우던 시기를 제외하면 원 역사와 별 차이가 없던 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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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괴링
김유진이 출시한 미제 카드게임에 매료되어서 모르핀 중독을 피하고 게임 중독이 되었다. 물론 카드를 모으다가 뜻대로 안 되자 홧김에 모르핀을 맞는 등 더 완전히 끊지는 못한 모양. 이후 급기야 독일판 불법 복제판을 손수 만들고[293] 출시해서 돈을 긁어 모은다. 이후 유진이 독일에 방문했을 때 카드게임 독일판 정식 라이센스를 따내고 좋아한다.
동생 알베르트 괴링의 행동 탓에 전쟁 초반 공군을 더 키우려고 트롤링을 하지 못했고, 히틀러 암살시도가 원역사보다 더 성공해서 히틀러 부재가 길어지자 총통 대행을 맡아서 전선에 퇴각명령을 하달하는 등 원 역사보다 나치 독일의 전쟁 수행에는 도움이 되었다. 이후 히틀러가 자살하면서 대통령으로 지명되고 연합군에 항복한다.[294] 원 역사와 달리 자살하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이 와중에 힘러가 자기 살겠다고 히틀러에게 책임전가하자 감히 총통을 배반하냐고 분노하는 등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마지막까지 히틀러에게 충성했다. 다만 사형당하는 순간까지도 그놈의 카드 사랑을 못버려서 유언이 50년쯤 뒤엔 온 게르만 전국의 듀얼리스트들이 나를 기념하며 괴링컵 듀얼 대회를 열 것이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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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괴링
원 역사와 같이 양심 있는 상식인으로, 나치 정권 초반부터 형 앞에서도 정권에 냉소적인 태도와 불온한 언사를 보인다. 폰지를 통해 수용소 자료를 유출했고, 밀사로 연합군을 여러 차례 방문하는 등 나름 고생을 한다. 원 역사에서는 괴링의 이부동생이 영국의 거짓말이라는 게 정설이지만, 본작에서는 정말로 어머니가 유대인과 바람 피워 태어난 이부동생으로 묘사된다. 그래도 알베르트가 헤르만에게 종종 디스해서 그렇지 형제 사이는 원 역사처럼 매우 좋은 편이라, 괴링이 "프로이센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자에게 충성을 바친다"고 히틀러를 숭배하자 알베르트가 "아무리 생각해도 부도 수표 같은데"라고 딴죽을 걸기도 했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괴링을 살리고 싶어했다.
전후에는 괴링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체포될 뻔했다가 유진의 부탁을 받은 앨리스가 숨겼으며, 이후 프란츠 슈미트가 신분세탁한 채 인권운동가 행세를 하자 알베르트 괴링이 폭로했다는 것으로 보아 알베르트의 대전기 행적이 밝혀져서 풀려난 것으로 보인다. 폰지와 연락이 끊어졌음에도 프란츠 슈미트의 정체를 알고 있던 걸 보아 괴링을 통해 SS와 관련된 주요 명단을 알고 있었거나 이후 아두이노 로렌초로 신분세탁한 폰지와 다시 연락이 되었거나 둘 중 하나인 듯. 정황상 원 역사보다는 괜찮은 말년이었던 것으로 보안다.
괴링이 어머니 바람 건을 알베르트가 지적하자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면서 말을 막은 걸 보면 본작에서는 정말 이부동생이 맞는 모양이다. 원 역사보다 홀로코스트가 빨리 벌어지자 폰지를 통해 홀로코스트를 폭로한 것도 그 때문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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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룀
유진이 가족동반 유럽여행 중 히틀러에게 초대받아 독일에 입국하였을 때 유진 일행을 마중 나오면서 등장하였다. 동성애자인데, 유진을 보고 그윽한 눈으로 군침을 삼키는 모습을 보여 유진을 식겁하게 만든 것은 덤. 이후 원 역사에서처럼 장검의 밤 때 숙청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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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힘러
암살 시도에서 생존한 히틀러가 군부를 대규모로 숙청하면서, 동서로 결정적인 전역에 한 번씩 사령관으로 투입되면서 거하게 말아먹어서 조기 종전에 기여했고, 원 역사와 달리 체포되어서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여담으로 모델에게 개소리를 늘어놓았을 당시 모델은 속으로 '아리아인 제일주의를 외치지만 생긴 건 아리아인은 몰라도 게르만인같이 생기지는 않은 자'라고 디스했는데, 실제로 힘러는 전형적인 일본군같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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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프라하에서 파리로 파견되어서 '유인원 작전'으로 살해당하지 않았다. 특유의 오만함과 권력욕으로 사방에 적을 만들었기 때문에 연합군 측에서 파리를 넘겨주는 대가로 사면을 해준다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태업을 하면서 타이밍만 노리고 있었는데, 히틀러 암살시도가 터지고 파리에서 국방군과 친위대 간의 교전이 벌어지면서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탈출한다. 그러나 레지스탕스들에게 붙잡혀서 벌집이 되고 시체가 조리돌림당하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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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빈 롬멜
원역사처럼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사막의 여우'로 활약한다. 미군 참전 후에도 36사단을 기만작전으로 크게 타격을 입히고 보급고를 따내기도 했지만, 미래인으로서 롬멜 역시 '전술적 승리에 집착하는 프로이센 군바리'란 것을 간파한 유진의 대전략에 휘말려서 참패한다.[295] 자살하려 했으나[296] 히틀러의 밀명을 받은 부하들이 강제로 유럽으로 도주시킨다. 이후로도 몇 차례 큰 패배를 겪었고 적전도주한 장군으로 사회적으로는 죽어버렸다. 그러나 전후 전쟁범죄를 증언하고[297] 본인은 무고함이 증명되어 풀려났다. 원 역사와 달리 빨리 몰락한 덕분에 전쟁범죄 이력도 적어서 경형으로 끝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다[298]겸사겸사 몽고메리를 까내리려는유진의 제안으로 북아프리카 전선 회고록의 공동저자로 참여해 큰 돈을 벌게 되었다고 언급되었다. 참고로, 유진이 찾아온 계기는 에르빈 롬멜을 보러온 게 아니라, 프랑스 동물원에 전시된 사막여우 에르빈이 박제된 걸 보고 착잡해하다가 에르빈 롬멜이라도 봐야겠다고 찾아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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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어 아이케
SS 토텐코프 사단장. 독소전쟁에서 활동하다 유진 킴이 북아프리카 전역에 파병되었다는 보고를 들은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옮겼다. 독소전쟁에서도 사람 가리지 않고 인간백정 노릇한 게 어디 안 가서 미군 포로를 학살하거나 북아프리카 현지 주민들이 토텐코프 사단의 전쟁범죄를 알리는 삐라를 보자 대거 학살하는 사건을 벌여서 국방군이 불안해할 때도 다 죽이면 되지 않냐는 멍청한 소리나 했다. 이때 SS가 친 사고와 이후 프랑스 전선에서 하이드리히를 비롯한 SS가 프랑스에서도 학살을 벌이는 등 원 역사보다 서부전선에서 SS가 깽판을 친 탓에 서방 연합군이 원 역사보다 나치 독일에게 증오를 불태우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299]
친정에 나간 유진 킴에게 발려서 잔당들과 함께 비제르테로 도망쳤지만, 1939년 크리스마스 날 비제르테에 사면초가 작전이 시행되자 SS와 이탈리아군이 갈등을 빚다 패싸움이 벌어졌고,[300] 비제르테에 잠입한 코만도가 퍼뜨린 거짓 소문[301]으로 비제르테 민간인들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자 SS 간부들과 함께 붙잡혀 이탈리아군과 민간인들에게 같이 십자가형을 당하는 최후를 맞이한다.[302]
그 말을 들은 유진은 전범재판에 못 내세워 아쉽지만 자업자득의 최후라고 평했는데, 아이케와 간부들이 십자가형을 당한 거지, 말단들은 이탈리아군이 두들겨 패고 크리스마스 트리에 매달았다고만 나오기 때문에 살아남은 걸로 보인다. 독소전쟁에서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무작위 학살을 벌였다고 언급되며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도 마구잡이 학살을 했다는 암시가 있으므로 자업자득이 맞으나, 다름 아닌 이탈리아군이 토텐코프에 원한을 품고 이들을 죽였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303] 하여튼 토텐코프 사단은 이로 인해 원 역사와 달리 본작에서는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완전히 소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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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라우프
아인자츠그루펜의 단장으로 독소전쟁에서 활동하다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파견되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는 수용소를 만들기 힘들어 트럭을 가스실로 개조해 사용했다고 하며, 여기서도 동유럽과 같은 깽판을 쳐서 국방군, 이탈리아군, 현지 주민들 모두에게 악명을 떨쳤다고 한다.
에르빈 롬멜이 자살하려고 하자 저지하고 롬멜을 독일 본국으로 송환시켰는데,[304] 그런데 본인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같이 안 돌아갔다가 크리스마스 다음 날 추축군이 항복을 선언했을 때 국방군과 이탈리아군이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 놓고 유진에게 상납(...)했다.[305] 라우프는 살고 싶다며 유진에게 빌었고, 유진은 하이드리히와 친하다는 말을 듣고 스파이 활동을 명령하며 일 잘하면 총살형으로 깎아주겠다고 속으로 비웃었다. 하지만 하이드리히가 파리 해방 도중에 프랑스 공산당에게 살해당하자[306] 일 못한다고 유진이 깠고, SS의 수장인 힘러가 연합군에 항복을 시도했을 때 중간에서 줄을 댔지만 연합군은 힘러는 무조건 사형 대상이라며 씹었다.
이후 등장은 없으나 유진이 일처리가 실망스럽다고 평한 만큼 얄짤없이 교수형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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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어 모렐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히틀러에게 이상한 약을 처방해주는(...) 착실한(?) 주치의다. 다른 나치 고관과 달리 히틀러에게는 정치 욕심 없이 착실하게 약물 투여만 해주고 있기 때문에 신임받고 있다. 하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돌팔이가 아닌데, 당시 의사들의 평균 수준이 워낙 막장이라서(...) 모렐 정도면 대단한 거라고 한다. 미래인인 유진의 평에 따르면 그 짓거리를 하고도 10년 동안 살려는 뒀다는 시점에서 대단한 의사라고. 실제로 루즈벨트의 주치의가 모렐과 비교할 수 없는 돌팔이라서 루즈벨트의 죽음을 앞당긴 데 반해, 모렐은 본작의 히틀러 암살미수에서 히틀러가 폭발로 치명상을 입고 몇 주간 의식불명이 되었을 때 뛰어난 약물 실력으로 히틀러를 살려냈다.[307][308] 이후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베를린 전투가 일어나자 히틀러의 허락을 받고 병커에서 나갔으며 이후 등장은 없으나 원 역사와 비슷한 최후를 맞았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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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슈코르체니
히틀러에게 총애를 받는 특수부대 지휘관으로 여러 작전을 성공시키는 활약을 펼친다. 원 역사와 달리 티토를 잡는 작전에 직접 참여했고, 연합군 밀사로 유진이 왔다는 것을 알고 눈이 돌아갔지만 결국 잡는 데는 실패했다. 대역물에서나 실제 역사에서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임에도 전쟁 말기 히틀러가 장광설을 늘어놓는 데 배석한 이후로는 등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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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작중에서는 유진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히틀러가 어디서 부상을 입었냐고 묻자 '오이겐 킴이 제 눈과 손을 가져갔다'고 답한다. 그 직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을 터뜨린 것으로 보이는데, 히틀러에게 중상을 입히고 다수의 고관들을 살해해서 원 역사보다 더 성공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살았으므로 실제 인물과 똑같은 운명을 맞았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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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폰 브라운
원 역사와 같이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미국에 와서 로켓 개발을 맡았으나, 유진이 매카시즘을 진압한 여파로 나치 부역자라는게 부각되어서 쫓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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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폰 그로덱
1차 대전 때 208사단장을 맡고 있었는데, 김유진의 절묘한 유인 및 기만작전과 참수작전에 당해서 사단기를 뺏기고 항복한다. 이때 유진의 나이를 물은 다음 자기 아들보다 어리다며 한탄했다. 이후 장검의 밤 때 끔살당하고 사망진단서가 유진의 집에 협박용으로 배달되었으며, 유대인의 하수인이었다고 고인능욕까지 당했다. 전후 누명이 벗겨지더라도 본작 세계관에서는 전세계 사관학교에서 장차전의 미래를 제시한 기념비적인 전투라고 아미앵 전투를 가르칠텐데, 이때 패장으로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309] 원 역사에서는 훈장도 받고 전후 은퇴해서 조용히 지내다가 자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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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드 슈미트
오리지널 인물로 전쟁에 휘말린 독일 민간인을 대표한다. 프란츠 슈미트의 아버지로, 바르샤바, 탄넨베르크, 뫼즈-아르곤을 다 가보고도 살아남은 비범한 이력을 가진 1차 대전 참전용사이자 철십자 훈장 수훈자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두려워한다.[310][311] 이후 금융인으로 일했지만 프란츠의 언급으로 보면 대공황으로 일자리를 잃었던 듯. 프란츠가 나치뽕에 취해 전장에 나서는 걸 끝까지 막으려고 하지만 실패했다. 이후 독일이 막장이 되어 국민돌격대가 조직되자 전장에 나섰으며, 살아남는데 성공하고 운 좋게 프란츠도 구출한 데다가, 능력이 우연히 눈에 띄어서 미군 협력자로 일한다.
전후에는 서베를린 공무원으로 재취직해 등장한다. 서베를린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베를린 봉쇄 당시 사전에 집에 모아둔 식량으로 미군이 식량 수송을 보낼 때까지 버티며[312] 공무원 일도 같이 하고 있다.
슈미트 일가족은 명원 작가의 차기작인 이 독일은 총통이 필요해요에도 다시 등장하며, 이들의 숨겨진 가족사가 더 자세히 드러난다. -
프란츠 슈미트(만프레드 마이어)
콘라드의 아들로 전쟁의 광기에 물들어가는 독일인을 상징한다. 금발에 큰 체격으로 이상적인 아리아인이라고 떠받들어진 데다가,[313][314] 단지 멋져 보인다는 이유로 히틀러 유겐트에 입단하여 열렬히 활동하는 나치당원. 전쟁을 두려워하는 아버지를 비겁자라고 경멸하며 참전했고,[315] 전쟁의 광기에 휩쓸려 여러 전쟁범죄를 저지르는[316] 괴물이 되면서도 끝까지 살아남는데 성공했다.[317]
이후 신분을 세탁해서 무장친위대 소속이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나치 치하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만프레드 마이어[318] 행세를 하며[319] 인권운동가로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끝내 정체가 밝혀져 모사드에게 암살당한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과 아르헨티나의 사이가 한동안 나빠졌다는 것으로 보아 사망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거주 중이었던 것으로 보이며,[320][321] 프란츠의 자식이 프란츠가 SS였다는 것을 알고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냐고 프란츠에게 항의해서 프란츠를 멘붕시키기도 했다. 여러모로 기가 막힌 삶이었기 때문인지, 일생이 현대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슈미트 일가족은 명원 작가의 차기작이자 프리퀄인 이 독일은 총통이 필요해요에서는 출신 세탁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프란츠 바이젠바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출생 년도도 다르고 친모 엠마가 사망한 이유도 본작에서는 프란츠를 낳다가 죽었지만 독통에서는 폭동에 휘말려 죽는 등 다르며, 엠마와 막스가 만난 계기였던 로젠바움사도 존재하지 않기에 본작의 프란츠와 동일인물이 아닐 가능성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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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게 슈미트
콘라드의 딸. 자기 오빠처럼 나치의 선전에 세뇌된 듯한 기미가 보여 콘라드의 속을 썩히고 자기 아버지가 국민돌격대에 징발된 이후 징발되나 여러사정 덕에 별탈없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콘라드가 구해준 청년 오토와 결혼한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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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마이어
콘라드가 국민돌격대로 끌려가서 전투에 투입되면서 만나게 된 청년으로, 목숨을 구해줬다고 한다. 이후 콘라드와 함께 행동하다 그대로 콘라드의 딸인 잉게와 결혼해서 사위가 되어서 서베를린에 살게 된다.
10.1. 무기
육군아돌프 히틀러의 성격상 자세한 묘사가 없어서 그렇지 원 역사에 있던 무기 대부분이 있던 걸로 보인다.[322] 본작에서는 전차 개발 속도가 워낙 빨라서 독일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독일군 쪽에서 히틀러의 요구 때문에 군수체계가 지나치게 난잡하다고 불평하는 장면이 있다.[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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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전차
1938년 폴란드 침공 때 등장해서 폴란드군을 곤란하게 했다. 원 역사와 달리 폴란드 기병의 대전차무기도 안 통했을 텐데 어떻게 5주 가까이 버틴 건지 신기할 정도.[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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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전차
1939년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본작에서는 M4 셔먼도 이때 첫등장하기 때문에 셔먼과 열심히 치고박았을 듯.[325] 북아프리카 전역 이후 히틀러가 4호 전차 후기형의 개량으로는 적군 전차에 못 미친다며 강력한 병기들을 만들어내라고 독촉하자 개발자들은 무기는 그렇게 난잡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며 속으로 4호 전차의 생산이 더 필요하다고 한탄한 걸 보면 개발자들은 4호 전차 개량에 우호적이었던 걸로 보인다. 북아프리카 전역 당시부터 미군 전차의 파워팩에 관심을 가지는 모습이 나와서 후기형은 엔진 문제가 덜했을 수도 있다.[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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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 전차 티거
북아프리카 전역 말기부터 등장했으며, 이탈리아 전선에서도 약간 나온다. 원 역사와 달리 M4 셔먼의 잔해를 본 히틀러가 이것보다 뛰어나게 만들라고 명령해서 경사장갑을 채용했기 때문에 외형은 원 역사와 제법 달랐던 것으로 보이며 독일군이 파워팩에 관심을 가지는 묘사가 있기 때문에 엔진도 비슷하게 흉내냈다면 엔진 성능도 더 좋았을 수 있다. 빠른 등장으로 이름을 날리는가 했지만 본작 미국의 전차 개발이 워낙 빨라 M10 잭슨의 90mm 포에 뚫리거나 스탈린그라드 전투 때 등장한(!) M47 패튼급 성능의 M26 퍼싱에 발리는 등 원 역사의 위용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물론 1세대 MBT급인 본작의 퍼싱을 상대한 거니 티거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도 하지만. 그래도 경사장갑을 채용하거나 엔진에 신경 쓰는 등 티거의 성능도 더 올라서 무시할 정도의 성능은 아니라 미군이 경계하는 모습이 종종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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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전차 판터
마켓 가든 작전 당시 완성되어 첫등장한다. 마켓 가든 작전과 벨기에-북프랑스 전역에서는 강력한 성능으로 이름을 날렸다. 유진이 미군에게 티거와 판터 좀 구별하라고 잔소리하는 장면을 보면 본작의 티거와 비슷하게 생긴 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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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처
1941년 벨기에-북프랑스 전역 말기 왈롱 집단군이 사용한 전차로, 은신 능력 때문에 하지의 제3군이 대응에 애먹었다고 묘사된다. 유진도 구축전차지만 2차대전 후기 독일군의 명품 전차라고 평했을 정도. 하지만 왈롱 집단군의 전체적인 상태 자체가 영 좋지 않던지라 헤처로 열심히 버텼지만 결국 제3군에게 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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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거 2
서부전선 말기에 사용되었다는 언급이 있다. 언급을 보면 등장 시기가 늦은 데다 미군의 엄청난 숫자의 퍼싱을 앞세운 기겁 웨이브에 못 버틴 걸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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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전차 마우스
1942년 베를린 전투 당시 무식하게 큰 전차가 있다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당시 연합군 병사들의 반응을 보면 베를린 전투 직전에 와서야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크릭스마리네
비스마르크급 전함을 만들지 못한 채 2차대전을 시작해서 "우린 이제 죽는 일만 남았다"라고 되니츠가 불평하는 모습이 있는 걸 보아 U보트 원툴로 버틴 모양이다. 발터 모델도 크릭스마리네는 영국 해군 절대 못 막는다고 평한 걸 보면 어그로용으로 소소하게 활약한 티르피츠 포지션도 없었으니 U보트로 버텨도 더 쉽게 발렸을 가능성이 높다.
루프트바페
기종은 묘사되지 않으나 괴링이 삽질을 덜 해서 평범하게 비행기 뽑으며 일했다는 묘사가 있다.
11.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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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추축국의 엄연한 한 축임에도 언급 외에는 등장이 없다.[327] 원 역사대로 전후 폐위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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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토 무솔리니
역시 작중 인물에 대한 언급 외에는 등장이 없으며, 원 역사와 같은 행적에 똑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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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2세
독일이 무솔리니를 빼돌리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포박했을 당시 탈출에 성공하여 국왕 대리로서 이탈리아 내전을 주도했다. 병력은 2개월 만에 정리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항복을 받아낸 이탈리아군 수십만 명을 연합군이 넘겨주었고 이탈리아 왕조가 오랫동안 남부를 기반으로 해서 남부에서 전향한 이탈리아군이 많았다고 한다. 미군은 이탈리아 산맥에 질색해서 빠졌지만 대신 물자를 빵빵하게 주었고 버나드 몽고메리를 기점으로 한 영국군과 함께 북상해 나폴리를 수도로 임시정부를 세우고 국왕으로 즉위한다. 그 덕분에 왕정의 명맥을 유지하고 자신의 사후 국체를 결정하는 국민투표를 하게 되었다.
12.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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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드골
자유 프랑스의 수장으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처음 등장한다. 미국은 비시 프랑스를 정통으로 취급했고 소련은 "몇 개 사단이나 되세요?"라고 무시하는 굴욕을 겪는다. 그도 그럴 게 당대 프랑스인들은 자유 프랑스가 아니라 비시 프랑스를 정통으로 인식했다. 당시 프랑스는 각종 트롤링을 벌인 영국에게 이를 더 갈았기 때문에 전직 국방차관이 사단 2개 가지고 독일과 싸우겠다고 '배신자' 영국에 빌붙어 정통 운운하는 드골을 결코 좋게 보지 않았고 기껏해야 의기가 가상하다는 정도였다. 학자들도 하필 나치라서(...) 취급이 나쁜 거지 독일제국 수준의 도덕성만 있었어도 비시는 정통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고 평한다. #
자기 뒷배인 영국에게조차 각종 생떼를 부리는 등 성깔은 어디 안 가서 유진조차 생각이 있는 거냐고 속으로 깠을 정도. 미 국무부에게 처음 지원을 요청받았을 당시 국무부는 "유진에게나 가라"면서 유진에게 떠넘겨 버렸고, 드골은 왜 훗날 상관이 될 사람 대하듯이 하는 거냐고 어리둥절해했지만 유진이 군복 입은 외교관 같은 능숙한 외교적 수사법을 구사하자 이놈 군바리 맞냐고 당황한다. 유진도 비시 쪽에 접근하는 게 낫다 생각해 샤를 놀렛을 북아프리카로 불러들이고 북아프리카의 비시 프랑스군을 설득시켜 연합군에 합류시키기도 했다.
북아프리카 전역 당시 독일이 비시 프랑스를 없애고 직접 군정에 들어가면서 결과적으로 자유 프랑스의 세력만 남게 되지만, FDR은 드골을 꺼려 자신의 세계 전략에 따라 배제하려고 했다. 사실 당시 드골이 힘도 없으면서 미국과 영국에게 생떼만 쓰던 상황이라 유진조차 화를 낼 정도로 드골의 처신이 마냥 좋았던 건 아니고, 냉정하게 말해서 드골은 생각보다 이름값이 떨어지는 편이었다.[328] 이 때문에 미국에서는 유진이 데려온 샤를 놀렛을 밀어주려고 했을 정도. 그리고 드골의 당시 정치력은 끽해야 정치질 좀 하는 군바리 수준이라 국내 세력기반도 전혀 없었고 오히려 프랑스 공산당이 훨씬 굳건했다.[329]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유진은 FDR의 지시에 따라 드골에게 노르망디가 아니라 남프랑스 상륙에 참가하라고 지시했으나 드골은 영국과 짜고 노르망디에 출몰해 유진이 FDR의 세계 전략이 정말 통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었지만 능숙한 정치질로 처칠과 드골을 몰아붙이고, 드골은 결국 FDR에게 해명하러 D.C.로 달려가야 했다. 그런데 그사이 히틀러 암살미수로 인한 혼란을 이용해 남프랑스에 상륙한 패튼과 르클레르를 대표로 한 자유 프랑스군이 파리로 급발진해(...) 일드프랑스에 도달해 버리고, 총통 대리를 맡게 된 괴링과 유진의 밀약으로 파리에 철수하면서 파리를 해방시켜 파리 해방에는 결과적으로 기여한 것이 없는 채 1941년 6월 25일 파리 해방 선언만 하는 손해를 본다.
파리 해방 전에 루스벨트가 급사하면서 루스벨트는 죽기 직전 유진에게 후임자인 월레스는 드골을 통제하지 못할 테니 드골을 프랑스의 임시 수장으로 인정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이에 유진은 드골을 프랑스의 수장으로 인정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드골은 바로 안심은 안 되었는지[330] 유진과 대화에서 프랑스가 다시 서기 위해서는 무슨 희생이 있더라도 독일을 짓밟아야 한다며, 자신이 그를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연구했다며[331]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예로 들어서[332] 유진을 납득시킨다. 진짜 이유는 랜드리스 대금 이자 문제 때문이었지만.
마켓 가든 작전에는 동의했지만 유진이 쓰러져서 공백이 되자 해임시키자는 의견에는 불안감을 느꼈는지 반대했으며, 마켓 가든 작전을 대판 말아먹은 이후에는 확실히 유진 코인에 탑승해서 유진과 적극적으로 협조해 아미앵 3중 포위망 당시에는 25만의 1군을 창설해 알자스-로렌 지역인 스트라스부르를 함락시켰고 이후 독일 진공에도 협력했다. 다만 얄타 회담 당시에는 막 나치강점기를 벗어난 여파로 정치적 위신이 심히 부족해서 미국과 프랑스에게 쌍으로 털린 끝에 알자스-로렌을 비롯한 일부만 인정받는 결과를 불러 분통을 터뜨렸지만 위신이 없는 상태라 별 수 없었다.
전후 프랑스가 내각책임제가 되자 대통령을 때려치운다. 원 역사에서는 1946년 총선에서 드골이 3%(...)밖에 득표하지 못해 제대로 망하고 4공화국 후기까지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었다는 것과 한동안 은거했다는 본작의 묘사를 보아 본작에서도 한동안은 별 세력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본작에서는 프랑스 해방 당시 지분이 원 역사보다 훨씬 없는 편이라서 프랑스인들이 보기에 드골은 미국(정확히는 유진)과 영국 호가호위나 한 인간이라는 인식이 더 강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 파리 해방에 아무것도 한 거 없이 호가호위만 한 인간이 어디 프랑스 수반 타령이냐고 공산당에게 신나게 쪼였을 가능성이 높다.
외전에서는 몇 년이 지나 프랑스가 알제리 전쟁에서 똥볼을 차고 땅을 줄 생각들을 하자 자기를 추종하는 군부의 지원과 미국의 묵인으로 힘입어 원 역사와는 다르게 대통령이 아닌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여기서도 원 역사처럼 현재의 5공화국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총리가 된 뒤 미국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을 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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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놀렛
1차 대전에서 프랑스군 36군단장으로 재임 중 백일 공세의 아미앵 전투 당시 유진이 사단장을 맡은 93사단을 임시로 휘하에 두면서 처음 만났다. 유진이 독일군 208사단 하나를 이틀 만에 소멸시키자 반격의 기회가 왔음을 깨닫고 36군단 전체에 대규모 반격을 주도하여 독일군의 공세를 좌절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놀렛이 제때 나서지 않았으면 오히려 93사단이 208사단을 소멸시켰음에도 다른 독일군들의 공격으로 역포위당해 전멸했을 거라고. 이틀만에 사단 하나로 사단 하나를 소멸시킨 유진의 활약에 나폴레옹의 계시라도 받았냐며 기뻐하고 루덴도르프를 욕하먼서 왈츠를 추는 개그를 보여준다.
미군에서 흑인 병사들의 공을 인정해주지 않고 93사단을 다시 원대 복귀시키려고 하자, 이를 알고는 자기가 군단장이니 돌아가는 길을 정하는 건 자기 마음이라며 파리를 찍고, 개선행진을 하고 훈장을 들려줘서 돌아가게 해준다. 이건 프랑스가 미국과 영국을 엿먹이고 프랑스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유진과 93사단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이후 대장까지 진급하고, 전쟁부 장관도 잠깐이나마 맡으며 괜찮은 인생을 살았다. 전간기 미군 군축으로 인해 기갑 병과 자체가 폐지 직전까지 가자 유진이 놀렛에게 도와달라는 편지를 썼고, 이에 놀렛은 프랑스인답게 감정적인 편지를 쓰며 전차 도움 잘 받았는데 네들 필요없으면 프랑스가 전차의 종주국이 되겠다고 어그로를 끌어서 기갑 병과 사수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백일 공세 당시의 전공 덕분인지 레지옹 도뇌르 수훈자라고 한다.
그러다 2차 대전이 터진 후 나치의 하켄크로이츠가 파리에 휘날리는 걸 보며 분통을 터뜨리다 북아프리카 전역에 파견된 유진이 몰래 놀렛에게 도와달라는 편지를 받자 인생의 마지막에 할 일이 생겼다며 주저 없이 북아프리카로 건너갔다. 북아프리카에 건너가 북아프리카에 있는 비시 프랑스군을 설득해 연합군에 합류시키는 공을 세웠고, 그로 인해 독일이 비시 프랑스를 바로 없애버리고 독일 군정으로 전환하면서 프랑스 정통정부를 자유 프랑스 하나로 통일시키는 결과를 불렀다. 유진이 놀렛을 불렀던 이유는 드골을 마땅찮아한 FDR이 대신 내세울 인물 구해오라고 지시하자 자신이 알고 있는 프랑스에서 도움 받을 만한 중진이 놀렛밖에 없어서였다고.
드골을 꺼린 미국은 드골 대신 놀렛을 프랑스의 지도자로 내세우려 했고, 유진도 그런 미국의 지령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드골보다 이름값과 전공이 훨씬 높고, 정치와 외교 쪽에서도 당시의 드골보다 놀렛이 훨씬 뛰어난 모습을 보인 데다, 프랑스 입장에서도 유진이 유럽 연합군 총사령관인 상황에서 1차대전 때 유진의 상관이었던 놀렛 쪽이 유진에게 존중받기 쉽기 때문.[333]
하지만 놀렛은 나이가 너무 들어서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전에 사망하고 알제리에 묻힌다. 북아프리카에 건너갈 때부터 살아서 프랑스에 돌아가지 못할 것은 알고 있었다고.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드골이 털렸다는 말을 듣고 애초에 지금 우리는 나라 없는 신세인데 거기 가서 좋은 대우를 받을 리 있겠냐 평하고, 미국이 나를 드골 대신 내세우려는 건 알지만 나는 곧 죽는다고 대답하는 등 생전에는 드골보다 정확한 정치적 판단력을 보였다.
죽기 직전 유진에게 미국이 전후에 프랑스 식민제국을 해체할 생각인 거 안다며 다른 식민지는 다 내놓을 수 있으니 본토(...)인 알제리만큼은 가져가지 말아달라 부탁했다.[334] 식민지 출신인 유진은 그놈의 식민지가 뭐라고 나라가 망한 상황에서 죽기 직전의 노인까지 이런 말하게 만드는 거냐고 지긋지긋해했지만 결국 국무부에게 알제리는 놔두자는 유언을 전해주며 들어주었다.
나치가 파리를 빼앗길 바에는 없애버리겠다고 난리 칠 당시 드골이 나치 놈들에게 더럽혀진 파리는 빛의 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설령 나치가 파리를 없애더라도 프랑스인이 있는 한 되살릴 수 있을 거라 주장하며 강경하게 나가자 유진은 놀렛이라도 같은 대답을 했을 거라고 평했다. 프랑스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정말로 그러기는 했을 듯.
이후 직접적인 묘사가 안 나왔을 뿐 냉전기 알제리 전쟁에서 프랑스가 궁지에 몰렸다는 서술이 있기 때문에 본작에서도 알제리는 결국 독립했을 가능성이 높다.
독자들 사이에서는 알제리 건을 빼면 진정한 프랑스인이라며 평이 좋다. 작중에서도 놀렛의 행보를 감안하면 프랑스에서는 진정한 영웅이라 추앙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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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페탱
1차대전에서 미국이 참전했을 당시 프랑스군 총사령관으로서 미국이 만든 전차를 대규모로 발주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이전처럼 알보병으로 참호 돌파하다 개죽음당하지 않을 거라 프랑스군을 독려하는 모습으로 첫 등장한다.
아미앵 전투에서 유진이 프랑스 36군단 휘하 용병으로 참전해 대승을 거두자 샤를 놀렛의 주선으로 김유진과 만나나, 특별한 대화를 하진 않는다. 페텡을 만난 유진은 구국의 영웅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페텡이 훗날 비시 프랑스의 수장이 되어 역사에 반역자로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을 떠올리고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후 미국의 산업력에 힘입어 전차 수천 대로 독일군의 참호를 신나게 때려부수며 원 역사보다 수월하게 1차대전의 승리를 이끌었다.
2차대전 당시에는 원 역사대로 비시 프랑스의 수반이 되었지만 미군이 북아프리카 전선에 상륙했을 당시 비시 프랑스의 병력 일부를 포섭하자 비시 프랑스를 불신한 히틀러가 비시 프랑스를 날려버리고 독일군이 직접 통치하게 되면서 빠르게 망했다. 1938년 11월에 비시 프랑스가 들어섰고 1939년 10월에 비시 프랑스가 철폐되었기 때문에 11개월밖에 안 갔다. 본래는 비시 프랑스가 정통으로 인정되고 있었지만 비시 프랑스가 사라지고 독일 군정이 사라진 이후에 자유 프랑스가 인정되었다.
나치에게 죽은 건 아니고 연금 상태에 놓였다고 하며, 비시 통치가 워낙 짧았기 때문에 본작에서는 전후 사형판결 뒤 종신형에 놓이는 수준까지는 안 갔을 가능성이 높다. 원 역사에서도 프랑스인들은 전후 재판 당시 페텡의 사형은 부당하다는 게 주론이었기 때문에 빨리 망했다면 더더욱 그런 의견이 강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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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르클레르
자유 프랑스군의 지휘관으로,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패튼과 함께 남프랑스에 상륙했다 유진이 히틀러 암살 미수를 이용한 혼란을 틈타 리옹에서 파리까지 450km를 질주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패튼과 함께 며칠만에 일드프랑스로 전속전진해서 파리 해방을 주도했다. 처음에는 망설였다가 패튼이 "파리, 당신네들의 수도 안 되찾을 거냐!"라고 꼬시자 "파리 안 가고 싶으면 사람이냐!"라고 홀랑 넘어가는 장면이 압권. 미군이 프랑스 현지인들에게 철도를 빌려 고속으로 달리는 걸 도왔다고. 당시 드골은 미국의 분노를 사서 FDR에게 해명하러 D.C.에 간 상황이었던지라 결과적으로 드골은 쩌리가 된 채 알아서 파리를 해방하게 되었다. 이후에는 등장이 없지만 프랑스에서 파리 해방의 주역이라 영웅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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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허이의 노인
2차 대전 중 모허이를 점령한 독일군이 민간인들의 협조를 요구할 때 대표자로 끌려나온 노인. 팔순이 넘었다는 묘사를 볼 때 보불전쟁 때도 살아있던 것으로 추정되며, "너희 독일놈들은 하도 자주 와서 올해가 몇 년인지도 헷갈린다"는 능청으로 시작해서 격전으로 눈이 뒤집힌 친위대원들 앞에서 이들의 전쟁범죄들을 꾸짖는 패기를 보였다가 분노한 프란츠에게 뺨을 맞고 소년병까지 동원하는 광기에 절규하듯 분노하며 집으로 돌아갈 것을 설득하지만 바로 살해당한다. 여담으로 1차대전 당시 아미앵 전투에서 독일군을 음식으로 꼬셔 함정에 빠뜨린 마을이 바로 모허이이기 때문에 유진과 간접적인 연이 있는 인물이다.
13. 기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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쁠랙 피분송크람
유진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승리한 후 일본 관료들과 회동하면서 잠깐 등장한다. 라마 7세가 1차 대전 때 유진과 만나서 훈장을 수여했던 것을 프로파간다로 계속 해왔고 그도 쿠데타를 일으킨 후에 정권 안정을 위해 계속한지라, 일본과 함께 유진과 싸우는 게 가능하겠냐고 반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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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1차 대전 후 김규식과 함께 '완애국'이라는 가명[336]으로 김유진을 방문한다. 역사지식이 먼나라 이웃나라 수준이던 유진은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한 걸 넘어 '호치민이 찾아온 게 아닌 게 다행인가'라고 생각하는 개그를 선보이는 것은 덤. 이후 향후 미래에 대한 조언을 청하자 유진은 호치민에게 "내가 아는 프랑스는 명예와 진흙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대개 후자를 선택한다."며 베트남 전쟁을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여비라도 보태주기 위해 수표를 끊어줬다.
그리고 유진은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재회해서야 그 유학생의 정체가 호치민이라는 것을 알게 됐는데, 그때의 친분과 아시아인의 유대감으로 2차 대전 때 중국으로 무기 수송 사업을 돕기도 하며, 유진의 설득으로 프랑스가 물러난 후 선거로 정권을 잡아서 명예직인 베트남 대통령이 된다. 작중 비중은 적지만 남북분단과 베트남 전쟁을 겪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서 작중 역사개변의 큰 수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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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프 브로즈 티토
김유진이 발칸에서 새로운 전선을 열 수 있는지, 전후 미국과 친선을 맺을 수 있는지 탐색할 목적으로 몸소 잠수함을 타고 넘어가서 회견을 했다. 역사적 공통점과 술을 매개로 친분을 맺게 되었으며, 오토 슈코르체니가 벌인 작전으로 붙잡힐 뻔했지만 유진의 임기응변으로 탈출에 성공했다.[337] 이후에도 절친한 사이가 되었지만, 원 역사에서 그랬듯이 서방에 유연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은 변함이 없어서 냉소적인 면모도 갖고 있다. 그와 별개로 유진 덕분에 원 역사보다도 서방권 국가들과 친해서 무역 이익은 꽤 많이 봤다고 하며, 3세계 영향력을 확대하려다 타이밍 문제로 인해 유진의 분노를 사서 '경고'를 듣기도 했다.
본작의 유고슬라비아는 2020년대에도 존속한 것이 확인되는데, 본작에서도 2차대전 도중 크로아티아 대학살이 일어났음에도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피하는데 성공한 모양이다. 정확한 이유는 불명이나 본작의 티토는 2차대전 때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고 히틀러의 착각으로 발칸에서 원 역사보다 훨씬 많은 군대를 보내 대학살을 벌인 탓에 티토가 유고슬라비아 전 인민의 지지를 받아 자체적으로 군대를 만들어 독일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통일된 민족의식'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338] 현대에도 세계의 화약고 중 하나로 거론되는 발칸 반도가 본작에서는 하나의 국가로 굴러가고 있는 만큼 발칸 분쟁 문제는 아예 없거나 아주 심각한 수준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통일 유고슬라비아의 완성을 평생 숙원으로 한 티토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니 본작의 티토는 원 역사보다 훨씬 행복한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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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카르노
본작에서는 일본군이 과달카날 전투에서 패배하자마자 동남아 전선을 포기하고 중국 전선에 올인하는 것으로 작전을 바꾸면서, 연합군을 엿먹이기 위해 동남아 현지 세력을 대거 독립시키고 들고 튀기 힘든 기갑장비 등을 뿌리고 후퇴했는데 그중 인도네시아 세력의 수장이 수카르노였다. 하지만 수카르노를 비롯한 동남아 현지 세력들은 당시 일본군 상황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연합국(정확히는 미국)에게 협상을 시도했고, 미국은 당시 유럽 연합군의 형편없는 전과(...)[339] 때문에 유럽 식민제국의 항의 따위 씹고 암묵적으로 합의했다.
2차대전이 끝난 뒤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 식민지를 사수하기 위해 미국의 원조금으로 전쟁을 벌였고, 식민제국을 사수하기 위해 처칠의 주도로 영국군이 대신 인도네시아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수카르노는 "유진은 위대한 아시아인이었지만 네덜란드인들은 히틀러에게 다 죽었어야 했다"고 악담하며 역으로 영국군을 쓰러뜨리고 독립에 성공했다.[340] 영국 경제가 심각하게 파탄나서 배급제를 돌리는 상황이었음에도 원조비를 전비에만 쏟아부은 탓에 미국의 압박이 들어갔고 성과가 안 나서 분노한 영국인들에 의해 처칠이 끌어내려진 건 덤. 여기에 미국의 동남아시아 개입으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에서 대거 철수하고 친미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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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마드 모사데크
유진이 국무장관이 되면서 CIA의 쿠데타 기획을 엎고, 대전략의 일환으로 영국을 설득해서[341] 이란 석유 계약을 공정하게 변경하게 하는 수혜를 입었다. 등장 없이 언급만 되었지만 유진이 매우 큰 일을 한 것인데, 이란 혁명 없이 이란에 세속적인 입헌군주정이 정착될 확률이 높아졌다.
이후 외전을 보면 개혁을 성공시킨 덕분에 이란은 중동의 지역 강국이 되었고, 모사데크도 무사히 퇴임한 이후에도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왕권 축소에 위기감을 느낀 국왕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서 그를 살해했으나, 국민들의 대규모 시위로 왕정은 모든 권한을 빼앗기고 입헌군주정으로 간신히 명맥만 이어가게 됐고 이란은 완전한 민주 국가로 거듭나게 되었고 한국, 일본과 합작해 핵보유에까지 성공했으나 보유 사실에 대해서는 다른 두 국가와 함께 NCND로 일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 역사에 비하면 살아서나 죽어서나 조국이 부강해지는데 기여했으니 작중 수혜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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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프랑코
언급만 되었지만, 유진이 국무장관이 된 후 2차 대전 때 원한을 갖게 된 프랑스의 요구로[342]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힘을 합친 제재와 공작을 당하게 되어서 원 역사보다 더 빠르게 정권을 잃을 위기에 처했고, 결국 이후 프랑스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원 역사보다 거의 20년은 더 이르게 권력을 놓게 된다. 이후 묘사를 보면 스페인은 거의 속국 수준으로 프랑스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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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말 압델 나세르
유진이 식민지 국가 출신이라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거라고 오판하고 원 역사처럼 수에즈를 국유화하겠다며 침공했으나, 하필 그때가 동유럽의 정세 불안으로 핵전쟁의 위기에 놓였을 때라 유진이 이를 갈게 되고, 소련과 협상에 다다르고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자 영프의 침공을 묵인해서 묵사발이 난다. 이후 유진은 직접 그와 접견하고 수에즈 운하 지분에 대한 합리적인 처분[343]과 동양발전기금 장학생 파견, 인프라 차관,[344] 군사고문단 지원 등을강매미끼로 물러서게 되었다. 외전에서는 용병업체를 차린 패튼과 계약을 하는데, 미국 정부의 공식 군사고문단인줄 알고 받았다가 아니라는 걸 뒤늦게 알고 황당해 하면서도 패튼이 이집트군을 조련하는데 악역을 떠맡기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는 능숙한 정치인의 모습을 보인다. 미국의 지원으로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을 박살낸 이후[345] 미국에서는 '엉클 나세르'로 대표적인 친미 지도자로 알려졌고 아랍권의 맹주로 떠오른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여파로 중동 전역에 이슬람 공산주의가 퍼지면서 결국 몰락했고 이는 신 소련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1]
샌 프란시스코와 코리아를 합쳐서 명명한 이름이다.
[2]
유진 킴은 사실
그레이였다던가
프리메이슨과 결탁한
렙틸리언이였다던가 등등.
[3]
왜
제사를 저렇게 썼냐면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제사와는 완벽하게 다른, 그야말로 놀자판이기 때문. 무려 가장 커다란 제사를 지냄에도 한 쪽에서는 듀얼을 하고, 한 쪽에서는 포커 치고 있는 그야말로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완연한 개판...이지만 저기에서는 저게 전통이다. 참고로, 우보크 역시 제사의 형식 중 하나인 음복을 음차한 것이다. 왜 음복이냐면 제주(祭酒), 즉 술을 나눠먹는 전통이 있기 때문.
[4]
여담으로 이 Je-Sa의 경우 미국의 금주법을 피하기 위해 전통 의식으로 위장하기 위한거다....
[5]
워낙 역사가 길고 문중 소속자가 많은 만큼 조선 후기에는 같은 경주 김씨라도 분파와 출신 집성촌마다 지위 차이가 매우 났다.
[6]
물론 이게 신라계
김해 김씨라는 뜻은 아니다.
[7]
금주법 시대 마피아들에게 있어 공식적인 경로로 밀주를 팔 수 있고 높으신 분들과 유착하기도 편한 라인인 우보크에 눈독 들이고 협력을 요구한 건 이상한 게 아니다. 루치아노의 본거지인 뉴욕에도 우보크가 있었고 루치아노가 유통업으로 친하다고 언급한 걸 보면 밀주 문제로 친해진 게 맞는 모양.
[스포일러]
유진 킴이 사망하는 날까지도 멀쩡히 살아계신다. 어머니보다 먼저 골로 간 대원수. 남편 상준의 경우 조선이 막 독립한 뒤에 막내 유신이와 같이 귀국하고
아주 멀쩡한 모습으로 자문 위원회에 초대 받아서 맹렬히 활동 하다가 급격히 약해지면서 사망한다.
[9]
실제 역사에서 찰스 커티스의 자녀는 1남 2녀만 있었다.
[10]
실제로 동기들과 함께 파티에 참석하러 캔자스로 갈 때, 캔자스가 고향인 아이크 집에서 자다가 토네이도에 휘말려 날아간다는 드립을 쳤다. 이때부터 복선이 깔려 있었던 셈.
[11]
작중 표현에 따르면 유진에게 청혼받으며 반지를 꼈을 때 타노스 같았다고 한다.
[12]
유진이 아미앵 전투에서 타던 군용 차량. 이때 최전선에서 싸우다 전투의 흔적으로 수많은 연꽃 모양 총탄 자국이 생겼으며 이후로도 계속 탑승하면서 사람들에게도 그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차량이기도 하다.
[스포]
에필로그 마지막화에 유진처럼 패튼 가의 딸로 환생했고 다시 김조윤과 이어졌다. 유진처럼 미래인 출신도 아니었던 일반인이지만 환생을 한 것은
프리퀄인
이 독일은 총통이 필요해요에서 밝혀진 정황상 조범석과 아르민이 산신령과 담판을 지으면서 유진이 일을 마친 후 연인과 재회할 수 있도록 조건을 넣어줬을 가능성이 높다.
[14]
퍼스트네임 '헨리'는 유진 킴의 후원자인
헨리 포드가 사실상 대부로서 직접 요구한 이름이며, 미들네임 '드와이트'는 유진 킴의 절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원수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름에서부터 금수저라고 광고하는 격.
[15]
1915년~1997년. 현리보다 1살 연상의 실존인물로, 원 역사에서는 독신으로 살았다.
[16]
정확하게는 참전 경력 없이는 유진의 유산을 통제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이후 이는 아예 킴 가문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각 가문을 잇고 싶다고 한다면 무조건 군 경력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17]
다만 그게 큰 흠은 아닌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비행기보다야 파일럿이 훨씬 더 귀한 군사자산인데다가, 어쨌든 KDA가 1은 넘어가고 그 중 군함 격침도 한 개 포함되기 때문에 격추를 좀 당했더라도 파일럿이 살아돌아온 시점에서 무조건 교전비상 미군 쪽 이득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후방 기총사수석도 없는 1인승 전투기를 몰았기 때문에 전우가 죽어나가는데도 혼자만 꾸역꾸역 살아왔다는 오명도 없고, 수천미터 상공에서 추락하여 망망대해를 표류하다 꾸역꾸역 살아돌아와서 다음 전장에 출격했다는 것 자체가 죽을 위기를 여러번 넘겨가면서 전쟁에 기여했다는 증거이니 흠이 아니라 오히려 훈장인 셈이다. 물론 생각이상으로 자주 격추당하다 보니 후술되있듯 비행기좀 작작 날려먹으라는 가벼운 훈계와 놀림은 많이 받았다.
[18]
이 때문에 사고를 당하기 전 조윤의 기억이나 상식 같은 것이 전혀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의심받을 일은 없긴 하지만.
[19]
이 화 제목이 밈이 된
샤이닝 로드의 결말부 '이 새끼 웃는데요?'여서 졸지에 독자들도 함께 진짜
아시발꿈 엔딩이 나올까 봐 공포에 떨었다.
[20]
다만 이것은 흔히 보이는 상속 싸움과는 다르다. 헨리나 앨리스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가문의 이름과 명예를 잇기 위한 면이 강하다.
[21]
작중에서 언급은 안 되지만 사실 사교계에서 아버지에게 여자가 꼬이는 걸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 당시 사교계에서는 전쟁영웅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이 많았고 그 때문에 불륜 해프닝도 잦았는데 김유진은 돈 많음+외모 무난+상대적으로 젊음+가정적으로 소문남 콤비 때문에 많은 여자가 접근하기 쉬운 인물인데,(이 정도 조건이면 사교계 여자 입장에선 아시안도 큰 디버프가 안 된다) 사교계에서 앨리스가 유진의 파트너였다는 것으로 보아 그 문제를 막기 위한 것도 있던 모양이다. 퍼싱도 1차대전 때 약혼녀인 패튼 여동생(...)을 데려갔다 프랑스 사교계에서 더 젊은 여자와 눈 맞아서 깨지는 사건도 있었다.
[22]
가정적인데 웬 불륜이냐 싶지만 당시 상류층 남성들의 '가정적'이라는 기준은 (안 피면 최고지만) 바람을 안 피는 게 아니라 와이프든 애인이든 자기 여자에게 젠틀하단 뜻이라서 집에서는 처자식에게 잘하면서 밖에서 바람 피는 경우도 많았다. 어려운 남자로 소문 나서 오히려 의욕을 불태우는 여자들도 있었을 것이고. 오죽하면 도로시는 1차대전 때부터 남편에게 여자 꼬이는 거 아니냐고 걱정했다. 황색언론 기자들이 그리 파헤쳤음에도 염문 하나 찾을 수 없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동안 도로시가 사교계에서 철저히 막은 듯하지만, 2차대전 당시에는 도로시가 런던에 갔을 때도 파리 사교계는 앨리스가 대신한 걸 보아 프랑스에는 안 간 걸로 보인다.
[23]
연합군 총사령관 딸과 영국 총리 아들이 엮인 해프닝이라서 유야무야시켰다고 한다. 참고로 그 망나니 아들은 당시 국회의원이자 현직 장교였다고. 이래저래 막장.
[24]
도로시도 앨리스를 시집 보내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유진과 합의 하에 선을 보게 만들었다.
[25]
결혼하기 전 셜리가 지금의 남편과 동침했고, 이걸 알게 된 유진이 샷건을 들고 쫓아간 적이 있는 듯하다.그리고 그 썰을 몰로토프에게 풀었다
[26]
예를 들면 헨리가 플로렌스에게 잘 보이려고 일부러 앞에서 비행기 운전을 하면서 관심을 끌려고 했는데, 저런 일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한 편지를 남겼다고 한다. 그 내용이란, 기름 채워놔라. 그거도 다 돈이다...
[27]
쿼터백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쿼터백은 피지컬과 머리 모두가 따라줘야 한다.
[28]
시카고대로 옮기고 나서도 여전히 미시간대를 관리했다.
[29]
작중에
조병옥,
우장춘,
최린(친일파라서 서대문 형무소에서 갇혀있다 비밀리로 임시 석방되었다.)이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30]
초대 대통령은 여기에서도 이승만이고,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딴 바 있다.
[31]
비글의 악명이 하도 잘 알려져 있어서, 댓글란에서는 '유진과 같은 미친놈과
지랄견이라면 딱 어울린다'라는 칭찬(?)들이 나왔다.
[32]
몰로토프에게 소개해주니 유진을 평화의 사도라고 칭하며 전쟁 같은건 깔끔하게 포기했다고한다. 하지에게 그일을 전했더니 평은 진짜 미치광이를 만나서 그냥 짓눌려버린 것 같다고...
[33]
아이젠하워 이후 조지프 케네디 주니어-트루먼-JFK-닉슨으로 가면서
린든 B. 존슨은 아예 삭제당한 게 대표적인 예시다.
[34]
공화당에 진보 성향 대통령이 당선되도록 후원하고 원 역사보다 공화당 좌향좌가 되도록 유도했으며, 흑인과 아시아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이 유진의 영향으로 공화당의 주 지지층이 되었다. FDR의 생전 숙원이던 공화당과 민주당의 성향 역전이 실패한 이유가 유진 때문이다. 민주당 진보화는 케네디 형제 덕분에 FDR 사후 보수화되었다 다시 진보화가 시작되었지만.
[35]
히스패닉은 20세기 후반부터 빠르게 불어나 21세기로 접어들면 흑인과 아시아인 이상의 영향력을 미국 사회에 가지게 된다.
[36]
정확한 일자는 공개되지 않았다.
[37]
1925년 3월 4일에서 7일도 되지 않아 사망했다고 한다. 정확한 일자는 불명이나 4~11일 사이로 추정된다.
[38]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선된 것은 당시 미국 사회의 분위기 상 이런저런 거창한 정책을 시민들이 하고 싶어하지 않았는데 그런 상황에서 윌슨의 비선실세 논란으로 인한 하야라는 초유의 사태 때문에 질려버린 미국인들이 '4년만 좀 쉬자'라며 일부러 하딩을 뽑았던 것. 천조국이 아니라 방구석에 틀어박힌 열강이었던 당시의 미국이라 가능했던 일이다.
[39]
당시 미국에서는 양심 없는 우유 유통업자가 상한 우유에 분필이나 마약을 타서 파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40]
당시 미국은 편지 배달 하나도 카우보이와 마피아, 원주민들과 전투를 벌이며 옮길 정도로 유통업자의 무력이 요구되었다. 같은 이유로 세금징수원이 시크릿 서비스(대통령 경호원)의 기원이 될 정도. 대전의 참전용사인 만큼 전투력은 확실하니 어울리는 직업이긴 했다.
[41]
그 외에도 장인인 커티스의 지역구가 낙농업 중심이라 커티스에게 도움이 된다는 정치적 이유도 있었다.
[42]
맥아더의 임기에서 프랭클린과 함께 등장하면서 사실로 밝혀졌다(...). 2023년 5월 15일 공개된 외전에서 주인공과 FDR 유령의 듀얼을 심판 보는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43]
공화당 중진이 이 말을 하자 충격받은 민주당이 대통령에게 해명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윌슨이 백악관 밖에 나오지 않아 이상함을 깨달은 민주당의 반 윌슨 세력이 대대적으로 조사해서 진상을 밝혀냈다.
[44]
검마대에서 그 천하의 유진이 거의 유일하게 겁을 먹어서 쫄게만든 인물이여서 그 이후로도 가끔씩 유진은 이 경고를 떠올릴때마다 잠깐잠깐 소름돋는 장면을 보여준다.
[45]
광란의 20년대의 부작용 때문에 어차피 대공황은 터질 수밖에 없었다.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46]
미국 부통령이 진정한 미합중국의 2인자가 된 것은 2차대전 이후 미국 대통령이 천조국 황상이 되면서 업무량을 버틸 수 없게 된 이후부터다.
[47]
애초에 U.S.Milk가 만들어진 주 이유가 민영 우유유통기업들이 상한 우유에 분필을 타서 파는 등의 행동으로 민영에 대한 신뢰도를 상실한 게 원인이었다. 이 때문에 원 역사에서는 우유 유통 문제를
알 카포네가 해결했다.(...)
[48]
이 때문에 본작의 트루먼은 상원의원 시절 유진에게 공화당이 링컨의 진보정당이었던 시절은 이때부터 이미 끝났다고 평했다. 실제로 민주당의 진보화는 루스벨트부터지만, 공화당의 보수화는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49]
잠깐 상황 보러 갔다가 1차대전 때 전우였던 93사단 전우회 멤버들을 보고 당황한 사이 경찰들이 기관총 들고 진압하러 온 탓에 얼떨결에 시위대에 말려들었다. 상황을 알게 된 유진은 시위대에게 무장해제와 자신들의 처지를 자세히 설명한 서류작성을 요구한 뒤 서류를 들고 탱크로 진압하러 온 맥아더에게 달려가 진상을 보고했다.
[50]
6월에 사망한 것만 확실하고 일자는 불명이다. 루스벨트가 사망하고 얼마 안 가 알베르트 괴링이 밀사로 파견되어 파리 철수에 대한 밀약을 나누는 데 며칠 소모되었고 독일군이 철수해서 파리를 되찾는 데 또 며칠 걸려 6월 25일 파리 해방 선언이 이루어졌으므로 6월 초~중순으로 추정된다.
[51]
원 역사에서 4선 초반에 사망한 것과 달리 본작에서는 3선 초반에 사망하였다.
[52]
사실 후버 국장과 함께 자작극을 계획 중이었지만 위험성 때문에 망설이다가 나치가 알아서 해줬다.
[53]
유진과의 첫 만남에서 노련한 정치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헤어진 후에 큰 실수를 저질렀다며 전설 카드 좀 달라고 해볼걸...이라고 후회하는 게 개그 포인트.
[54]
루즈벨트의 약칭인 FDR을 악의적으로 나쁜 단어들로 채워넣은 전설급 카드이다.
[55]
이후
주인공과 아이크의 목숨을 걸고(…) 듀얼을 하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56]
이는 유진 킴과 개인적으로 친했던 맥아더, 아이젠하워, 패튼 등의 군부와 그의 정치력을 가장 절실하게 알고 있었던 장인 커티스, 에드거 후버 등의 인물들도 정확히는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유진 킴의 아내인 도로시는 유진 킴이 대통령이나 상원의원 직책 등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언제라도 남편이 정치적으로 높은 자리를 원할 때 쟁취할 수 있도록 안배는 하고 있었다.
[57]
물론 히틀러나 스탈린처럼 독재자로서 권모술수를 부린 것과는 스타일이 다르다.
[58]
맥아더가 당선된 이유가 이 분당으로 인한 표 분산이 원인이었다.
[59]
장인이 공화당인 데다 20세기 초반 미국 군부는 당시 딕시크랫이 주로 민주당에 속해 있던 문제 때문에 민주당을 싫어했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몇 세대 안 되었던 게 원인. 이런 상황에서 맥아더와 아이젠하워 모두 공화당 대통령이었고, 비백인인 유진이 두 정부에서 모두 본의는 아니지만 실세로 군림하면서 공화당의 성향 역전이 덜 일어났다.
[60]
당시 공화당과 민주당의 다른 파벌은 고립주의와 뉴딜 취소를 외치는 등 상황 파악을 여전히 못하는 모습을 보여 FDR이 "대전쟁과 뉴딜, 팍스 아메리카나 모두 잘 해낼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있었으면 3선 안 하고 온천 휴양 갔지"라고 맥아더에게 투덜거리는 모습이 있다. 이런 상황이니 다른 파벌의 거물을 부통령으로 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원 역사의 월리스와 트루먼 모두 그런 이유로 부통령이 되었고. 맥아더는 대전쟁과 팍스 아메리카나는 몰라도 뉴딜 유지는 불가능하다고 명시되고, 유진은 그놈의 인종 문제와 집권 의지 부재로 기각되었다. 독자들은 만약 유진이 백인이었고 집권 의지가 있었으면 (유진의 당과 상관없이) 3선 안 하고 유진에게 대통령직 넘겼을 거라는 게 중론이다.
[61]
당장 맥아더가 전쟁부 장관으로 거국내각에 속한 상태에서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이적해 공화당과 사이도 좋지 않고 정치 감각도 떨어지는 월리스를 부통령으로 앉혔다는 건, 자신이 도중에 죽을 거라는 생각을 아예 안 했다는 뜻이다. 원 역사에서도 4선 당시 몸이 많이 나빠 누가 봐도 4선 다 못 채울 것처럼 보였음에도 본인만은 4선 끝까지 살 거라 생각해 트루먼을 부통령으로 앉힌 것과도 유사한데, 월리스와 트루먼의 능력 차이가 하도 나서 문제가 되었다.
[62]
루스벨트 3선 잔여 임기를 대신했다. 원 역사에서는 루스벨트가 3선 임기를 완료하여 대통령이 되지 않고 부통령직으로 끝났다.
[63]
본작에서는 수정헌법 20조에 대한 언급이 없으나 정황상 원 역사처럼 1월 20일로 조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64]
근데 그것도 루즈벨트가 봤으면 멱살을 잡았을 정도로 자기 식대로 멋대로 해석한 방식이었다.
[65]
문제는 유진 킴과 대화에서도 유진 킴이 자신의 뜻을 좋아할 거란 망상에 빠져있었기에 이런 유진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헛소리를 반복했다. 유진은 이 때, 조선 상륙을 손이 벌벌 떨릴 정도로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상륙과 무관하게 갑자기 일본으로 빠지게 하려고 하는 것에 제대로 꼭지가 돌아버린 상태였다.
[66]
하지만 멍청한 헛소리와 괴상한 망상을 반복해서 처칠과 스탈린조차 외계인으로 볼 정도로 비상식적인 인물이었으며, 군부에서도 그냥 미친놈으로 취급할 정도로 평균적인 지능조차 없는 수준이었다. 이승만의 평가로는 뭐 하나 제손으로 얻어 본적 없는 정치 초보자.
[67]
원 역사의 월리스는 농무 장관으로서는 역대 최고라는 평을 들으며, 행정과 농무, 상무 장관으로서는 뛰어났지만 정치 감각은 부정적인 평을 듣는다. 본작에서도 농무 업무는 잘했다는 언급이 있으므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마디로 허버트 후버처럼 전형적인 행정관료 타입의 인물.
[68]
원 역사의 루스벨트 4선이자 트루먼 1기 행정부 임기를 대신하였다. 월리스와 마찬가지로 원 역사에서는 대통령이 아니었던 본작 오리지널 대통령 2.
[69]
1948년 대선에 당선되었고 이후 재임했다고 명시된다. 원 역사의 트루먼 행정부 2기~아이젠하워 행정부 1기 임기로 4년 앞당겨졌다.
[70]
이를 본 유진은 '저 머저리 도박쟁이가 그 아이젠하워냐'라고 어이없어하는데, 사실 원 역사에서도 아이젠하워는 '
포커 잘 쳤던
미국 대통령'으로 알음알음 알려져 있으니 사관학교 시절 동기들과 내기를 벌여서 털어먹는 모습이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71]
당시 민주당은 내부 분쟁이 심해서 아이젠하워를 끌어들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당시 군부가 민주당 딕시크랫들과 악연이 심해서 꺼리기도 했고.
[72]
그 외에도, 1921년 자신의 장남을 사별하게 된 아이젠하워가 군인직을 내려놓을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유진 킴이 찾아와서 후일 5성 장군과 대통령이 될 사람일 아이젠하워라면 고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위로 아닌 위로를 통해 그의 퇴역을 막기도 했다. 후일 이 일화를 선거 캠프에서 일하면서 듣게 된 리처드 닉슨은 단순한 혜안을 넘어선 유진 킴의 예지력에 경악하고 유진 킴의 예언을 맹신하는 수준에 다다랐다.
[73]
1964년 사망했다고만 나오고, 후임인 트루먼이 얼마 안 가 죽었다고 나오기지만 정확히 얼마 했는지 안 나오기 때문에 트루먼이 사망한 9월 28일 이전인 것만 확실하다.
[74]
원 역사의 아이젠하워 행정부 2기, 케네디 행정부, 린든 B. 존슨 1기 행정부에 속한다. 원 역사의 존 케네디는 1963년 11월 22일에 사망했다. 원 역사에서는 대통령이 아니었던 본작 오리지널 대통령 3.
[75]
유진은 JKF가 아니라 JPK가 출마했다는 말을 듣고 의아해서 조사하고 나서야 알았다.
[76]
적군 군함 1척은 정황상 대만해협 전투일 가능성이 높다. 본작에서는
과달카날 해전에서 패배하자마자 동남아 전선을 포기해서 동남아에 물자 지원을 간간히 해주긴 했지만 군함 생존을 최우선시해서 통상파괴전을 열심히 하던 잠수함 빼고는 큰 피해가 없었을 것이고, 대신 대만해협에서
필리핀 해 해전+
레이테 만 해전+
이오지마 전투+
오키나와 전투 피해가 여기서 모두 나왔다. 일부 항공모함을 제외한 수상함을 다 끌고 와서 다 가라앉았다고 했으니 군함 격침 전공을 세우기 용이했을 것이다.
[77]
당시 가톨릭은 반공주의 성향이 굉장히 강했으며, 나치의 홀로코스트 피해자들 중 하나였다. 아직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78]
사회적 진보화가 빨라졌다고 해서 인종 문제 해결이 빨라진 건 아니라, 인종 문제 해결은 원 역사와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다만 인권 의식 개선은 유진 덕분에 확실히 더 빨라지기는 했다. 원 역사의 1950년대 이후 대규모 민권 운동이 1940년대부터 이루어지던 인권 의식 개선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음을 고려하면 의미가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79]
2차대전 이전에도 딕시크랫은 남부 밖으로 나가면 별 인기가 없어서 경쟁력이 약했다.
[80]
본작의 민주당은 유진의 영향으로 공화당과 성향 역전이 덜 일어나 유진이 죽을 때까지 진보파와 보수파가 반반씩 나뉘어 충돌했다.
[81]
당장 패튼도 그의 임기 중에 전사했다. 또한 드럼이나 마셜도 죽었고 맥아더 역시 그의 임기 중에 병원에 실려갔다가 결국 죽었다. 맥아더 曰 그가 뭔 짓 꾸민 것도 아니고 나이든 인간이 죽을 때가 돼서 죽은 것뿐인데 별 소리 다 듣는 재수없는 놈.
[82]
엄밀히는 루즈벨트 사후 민주당 진보파가 당의 주도권을 잡는데 실패해서 민주당의 보수 우위 성향이 그대로 이어졌다고 보는 게 맞다. 1948년 대선 당시 딕시크랫인 리처드 러셀이 대선후보가 된 점이 이를 방증한다.
[83]
1964년 9월 29일 새벽부터 몇 시간 전에 사망했다고 한다. 1964년에 조지프 케네디 주니어가 사망해 얼마간 대통령직하다 사망했지만 정확한 기간은 알 수 없다.
[84]
원 역사의 린든 B. 존슨 1기 행정부의 임기 일부에 속한다.
[85]
맥아더가 재출마를 포기하고 아이젠하워에게 공화당 후보 자리를 넘기는 것. 유진과 아이젠하워 모두 전쟁영웅으로 명성이 자자하며 유진은 소수민족, 아이젠하워는 백인 표를 끌어모을 수 있다. 당시 민주당은 보수파와 진보파의 갈등이 봉합되지 않아 아이젠하워를 데려올 여력이 없었다.
[86]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1934년에 트루먼이 상원의원에 처음으로 당선됐다면 대선에 출마할 때 얼추 3~4선의 중진의원일 것이다.
[87]
유진은 원 역사의 트루먼이 대통령이었던 것 때문에 나름 부채를 느끼고 있어서 진심으로 도와줄 의향이 있었다.
[88]
원 역사에서도 이 점 때문에 루스벨트 4선 당시 부통령으로 선택되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인 셈. 본작에서는 딕시크랫이 루스벨트 사후에도 여전히 당에서 세가 강해 1948년 대선 당시에는 딕시크랫인 리처드 러셀이 대선후보가 될 정도였는데, 민주당에서 재 좌향좌를 추구하던 조지프 케네디 주니어에게 있어 트루먼은 파트너로서 적합했을 것이다.
[89]
부통령직이 실세가 된 이후 대통령은 자기 출신의 부족한 점을 메우기 위해 일부러 반대의 특성을 가진 부통령을 러닝메이트로 선택하는 특징이 있다. 젊은 대통령+원로 부통령 조합은 원 역사 오바마 행정부의 바이든 부통령과 트럼프 1기의 펜스 부통령에 속한다.(트럼프는 당시 고령이었지만 정치 경력은 신인이었다)
[90]
원 역사보다 약 8년 일찍 사망했다.
[91]
대통령이 되긴 했으나, 그가 냉소적으로 받아친 것처럼 나라가 위기에 처한 때 대통령이 되어서 상술한 유진과의 대화가 둘 다 실현되었다(...).
[92]
1971년 10월 19일 주인공
유진 킴이 사망할 당시까지 JFK 집권기라 나온다. 21세기 에필로그의 역사 강의에서 JFK가 암살당했다는 언급이 없으므로 재선에 성공해서 임기를 다 채운 걸로 보인다.
[93]
원 역사의
린든 B. 존슨 행정부 2기와
리처드 닉슨 행정부 1기에 속한다. 이로 인해 원 역사의 린든 B. 존슨 행정부 자체가 본작에서는 삭제되었다.
[94]
원 역사에서는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모두 거쳤다.
[95]
초임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42세,
율리시스 S. 그랜트 46세,
그로버 클리블랜드 47세,
프랭클린 피어스 48세,
제임스 A. 가필드 49세,
제임스 K. 포크 49세 등이 있다. 원 역사까지 포함하면 원 역사 JFK 본인 43세, 이후의
빌 클린턴 46세,
버락 오바마 47세도 있다.
[96]
본작에서는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성향 역전이 덜 일어나 진보파와 보수파의 세력이 반반이며, 케네디 형제는 당시 민주당에서 가장 진보적인 성향이었다고 한다. 케네디 가가 당대 '하얀 흑인'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백인 사회에서 멸시당하던 아일랜드계-가톨릭 출신이었기 때문. 미국 사회의 집권층은 예나 지금이나 WASP로 대표되는 잉글랜드계-청교도 출신이다.
[97]
유진이 죽기 며칠 전 미국 민권 운동을 주장하다가 백인우월주의자에게 죽을 뻔했다. 유진이 지팡이 총으로 제압해서 미수로 끝났지만 이 때문에 유진이 죽을 당시 딕시가 유진을 죽게 만들었다고 논란을 빚었다.
[98]
1971년 유진이 사망할 당시까지 JFK 집권기였고, 이후 21세기 에필로그에서 대통령을 했다고만 나와 정확한 임기는 알 수 없다.
[99]
JFK 행정부 2기 바로 다음에 대통령이 되었다면 1973년 1월 20일부터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원 역사의 닉슨 행정부 1기가 JFK 행정부 2기로 밀리면서 닉슨의 재임기간도 4년 밀린 것으로 보인다. 원 역사의 닉슨 2기가 본작에서는 닉슨 1기가 되는 것.
[100]
만약 닉슨이 재선까지 성공했을 경우 1973년 1월 20일~1981년 1월 20일이 된다. 원 역사의 닉슨 2기,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행정부 시기가 된다.
[101]
해당 장학금은 동양교육발전기금과 별개로 킴가가 미국인들을 지원해주는 별도의 자선사업으로 이루어졌다. 유진은 일찍부터 캘리포니아 사회에서 킴가의 영향력을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인종을 가리지 않고' 교육지원과 자선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쳤고 대공황 당시에는 무료급식소 같은 자선사업으로 캘리포니아인들이 킴가에 큰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캘리포니아 출신이었던 닉슨도 자연스레 킴가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02]
본작의 닉슨은 킴가에 큰 도움을 받은 처지라 보수파에게 있어 '옐로 몽키 똘마니 백인'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에 더 가깝다. 닉슨 개인의 입장에서도 어려운 때 유색인종의 도움을 받았는데 보수 정책을 주장하는 건 배은망덕하다는 프레임에 휩싸이기 쉽고.
[103]
3차 대전의 위기가 지나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모스크바에 핵을 쏴야 한다고 말했다.
[104]
작중 캘리포니아가 킴 가문의 영향으로 공화당 텃밭인 점, 후일 대선 후보로 선출되는데 대선 후보로 선출되려면 예나 지금이나 상원의원이 필수 코스인 점을 미루어 보아 아마 캘리포니아 주 연방상원의원에 당선된 것으로 보인다.
[105]
유진이 사망할 당시는 JFK 집권기였다.
[106]
유진 킴이 아프간 참전에 대해 마켓 가든 작전만큼이나 대차게 말아먹을 것'이라고 닉슨에게 언급을 했고, 일전에 아이젠하워의 선거 캠프에서 일하면서 유진 킴이 아이젠하워에게 했던 위로 아닌 위로(장남을 잃었던 아이젠하워에게 너는 5성 장군이자 대통령이 될 사람이라고 했던 말)를 전해 듣고 그의 (원 역사에 기반한) 탁월한 혜안에 감복해있던 닉슨은 유색인종 권리 증진을 위한 기부랍시고 지갑을 탈탈 털고 나오기도 했다. 그때 닉슨의 묘사는 '저 하늘로 치솟는 입꼬리를 도저히 가릴 수가 없었다.'고...
[107]
원 역사의 닉슨은 하버드대에 합격하고 장학금까지 받았는데도 생활고에 발목 잡혀서 진학하지 못했다.
[108]
심지어 유진조차 마셜이 먼저 진급해 유진의 상관이었던 짧은 시기 동안 여기 잡혀와서 갈려나갔다.
[109]
패튼의 여동생이라든가 맥아더와 연적이 된다던가...
[110]
이때 경쟁은 원역사에서
베를린 전투를 두고 벌어진 소련의
주코프와
이반 코네프의 경쟁을 연상시키는 부분.
[111]
에디슨전기협회(EEI)의 전신으로 전미 전기회사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다.
[112]
전임자 曰 저기서는 총 소리가 나도 신경 쓰지 마.
[113]
프레덴달은 원 역사에서도 이미지가 상당히 좋아, 마셜, 맥네어, 아이젠하워, 패튼 모두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물론 참패를 당해 문제가 드러나기 이전까지만.
[114]
다만 유진이 생각한 진짜 문제는 인종 문제였는데, 이걸 꺼내들었다가는 중에 한 사람이 죽거나 옷을 벗을 때까지 싸울 것이기 때문에 보고서에서는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마셜과 멕네어도 유진이 인종 문제를 진짜 원인으로 꼽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것만 보면 끝장을 보는 것까지는 원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보이지만, 유진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프레덴탈 대신 깽값을 내줄 마셜과 멕네어에게 청구서를 내민 것이다.
[115]
훈장 수여식에서 알아챘는데, 이전에 아미앵 전역에서
은성훈장을 서훈받았으니 유럽 전선 종결 후 받은 훈장은 아마도 육군
수훈십자장일 것으로 추정된다.
[116]
한반도의 말도 안 되는 추위를 알고 있던 유진은 미군에게 미리 방한 장비 갖추라고 쪼아댔지만 미군에서는 말이 되냐며 대충 준비했는데
나폴리보다 위도가 낮은
평양에 도착한 당시부터 -1℃를 찍는 등 기하급수적으로 기온이 내려가 미군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다. 결국 유진은
청천강 일대에서 북진을 정지시켰고, 미군과 소련군 양쪽에 치인 일본군은
개마고원으로 도주했다가 모두 얼어죽었다.
[117]
어느 팬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군산상륙작전이 있던 1942년 10월 3일 당시 최고기온은 29℃였고, 11월에 접어들자 북한 일대가 -10℃로 하락했다고 한다. 겨우 1개월 만에 40℃가 하락한 것이다(!)
평양,
신의주는
나폴리보다 위도가 낮고,
중강진은 북위 41.47도로
로마보다 위도가 낮다. 남유럽은 겨울 평균기온 12℃고 한반도에 무슨
알프스산맥,
히말라야산맥,
로키산맥 수준의 고산지대가 있는 것도 아니니 추워 봐야 얼마나 춥겠냐고 착각한 건 무리가 아니었다. 심지어 10월 초까지 후덥지근했던 만큼 더더욱.
# 원 역사의
6.25 전쟁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서 UN군을
충공깽에 빠뜨렸으며 미 해병대가 한반도=극기훈련지역(...)으로 인식하는 주 원인이기도 하다.
[118]
추가로 1942년
백두산-
중강진 일대는 -47.5℃라는 비공식 최저기온이 나왔는데 (후대 이 기록은 갱신된다) 원 역사에서 그
소련군이 30만의 사상자를 내게 만든
겨울전쟁 당시 핀란드의 겨울은 평균 -15℃에 최저기온 -43℃였다. 현장에서 측정한 '비공식 기록'이 '공식 기록'보다 더 정확한 사례가 많으며(
두만강 전방부대에서 비공식 측정한 기온이 -45℃인데 뉴스에는 -30℃ 찍는 사례가 수두룩하다고) 한반도의 추위가 워낙 비상식적이다 보니 -47.5℃는 실제 온도일 가능성이 높으며, 백두산-중강진은 공식 기온도 몇 년에 한 번씩 -40℃를 찍어주는 미친 동네다.
#
[119]
참고로
관동군을 패퇴시키고 남하하던 소련군도
압록강-
두만강 라인에서 진격을 멈추고 포격만 퍼부었는데,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팬덤에서는 남유럽 급으로 남하했음에도 기온이 올라가기는커녕 시베리아 기준으로도 극한지의 기후를 찍고 있는 것에 경악해서 '어차피 중공에게 넘겨줘야 하는데 고생해서 더 남하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멈췄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한다.
[120]
유진 킴이 전쟁 끝났다고 전역하려는 장교들을 붙잡아 두려고 '내 딸 소개시켜줄게' 하고 꼬드겼는데, 막상 앨리스는 마초맨들뿐인 군바리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러다 만난 것이 같은 한국계에 순둥순둥한 성격이니 마음이 간 것.
[121]
아예 도경 킴이라는 인물의 1차 대전 행적도 유진 킴과 닮은데다 성격도 이러니, 아예 막내동생 설리는 도경 킴을 보자마자 앨리스 킴에게
엘렉트라 콤플렉스가 아니냐고 물어볼 정도.
[122]
이 때문에 유진 킴을 목표로 한 매카시즘의 첫 번째 대상자가 되었고, 유진 킴의 조언을 받아들여 전역 타령은 집어치우고 바로 약혼 관계였던 앨리스 킴에게 청혼을 하고, 결혼까지 골인한다.
[123]
원로들은 우리 시절에는 안 저랬는데 갈수록 미친놈들이 늘어난다고 한탄했으며, 목줄 쥔 유진이 제일 미친놈이라서 마셜이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고 평했다. 얘들을 정신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게 마셜이었기 때문.
[124]
유진과는 아예 주먹다짐을 한 적도 있다. 유진의 1인칭 시점으로 묘사될 때는 얼굴을 판다로 만들었다며 일방적으로 발라버린 양 으쓰대더니 정작 시점이 바뀌자마자 본인도 쌍코피가 터졌다는 게 밝혀지면서 그냥 개싸움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묘사가 매우 웃기다.
[125]
유진은 맥나니를 종종 속으로 '
점순이'라고 부른다.
[126]
실제로 맥나니는 흑인을 자기 휘하에 두는 것을 꺼렸으며, 흑인이 백인들과
같은 수준을 갖추려면 아직 멀었다는 발언도 했다고 한다. 후술할 커티스 르메이는 반대로 훈련 과정이 동일하면 흑인인지 백인인지 여부는 임무 수행 능력과 관계가 없고 일하려는 사람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면서 흑인의 조종사/기술자 보직으로의 진출을 적극 추진했다.
[127]
실제 인물은 대장까지 진급했으며, 아이젠하워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후 미국 독일 군정 사령관을 맡았지만 이때 모종의 이유로 업무에 의욕을 보이지 않아서 귀국,
미합중국 공군물자사령부 사령관이 되었다. 그 시기가 칼 스패츠가 공군참모총장이 된 때이다.
[128]
이건 처칠이 틀린 말한 게 맞는데 처칠이 거론한 리틀 윌리는 개발부터 1개월 뒤였는 데다 리틀 윌리의 특성상 후대 전차에게 자신의 특성을 전혀 물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전차의 원조라고 하기도 애매한 무언가다. 굳이 따지면 프랑스에서 비슷한 시기 독자적으로 비슷하게 개발한
르노 FT를 주장하는 게 더 개연성이 있다.
[129]
당시 조선 주둔 일본군은 유진과 밀약을 맺고 총독부 수뇌들과 함께 만주로 도망쳤다가 만주로 내려온 소련군에 밀려 관동군과 함께
개마고원으로 도망쳤다 1942년 유례 없는 한파를 맞이한 개마고원에서 거의 다 얼어 죽었다고 묘사된다.
[130]
도중에 태국과 베트남 경로를 거쳐야 해서 태국 정부와 호찌민이 상당수를 유진과의 담합 하에 슬쩍했다고 한다.
[131]
중일전쟁 초반에 중국군 전차들이 대부분 일본군에게 격파당해서 남아있는 전차가 별로 없었다.
[132]
그 와중에 일본군이 이 전차에
대전차총검술을 하자 가시 등을 용접하여
거북선처럼 만들었다.
[133]
정확히는 1939년 후반에 이미 개발되었지만 엔진 문제로 인해 유진과 채피가 논의하여 해결하는데 좀 더 시간이 걸렸다. 아마 그 '엔진 문제'가 있던 시제형이 원 역사의
M26 퍼싱이었을 것이다. 퍼싱의 엔진 문제를 해결하고자 만든 게
M46 패튼이고 여기에 파워팩 문제까지 해결한 게
M47 패튼이다.
[134]
스탈린이 산업스파이를 보내 미군 전차 설계도를 빼갔다는 언급이 있기 때문에 묘사가 없어서 그렇지
T-54도 2차대전 도중에 완성되어 싸웠을 수도 있다. 원 역사에서도 T-54는 2차대전 말기에 개발이 거의 끝난 상태였다.
[135]
본작에서는
야마토급 전함의 건조를 포기하고 항공모함 중심으로 건조했다는 것으로 보아 총톤수는 밀렸을 수도 있으나, 두 전투를 합친 수준인 만큼 크게 꿇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야마토급이 없어도 양군 합쳐 전함만 수십 척이 충돌했다는 서술이 있으며 일부 항공모함과 수송함을 제외한 나머지 수상함이 전부 격침당했다고 서술되기 때문.
[136]
본작에서는
야마토급 전함의 건조를 포기하고 항공모함 중심으로 건조했다는 것으로 보아 총톤수는 밀렸을 수도 있으나, 두 전투를 합친 수준인 만큼 크게 꿇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야마토급이 없어도 양군 합쳐 전함만 수십 척이 충돌했다는 서술이 있으며 일부 항공모함과 수송함을 제외한 나머지 수상함이 전부 격침당했다고 서술되기 때문.
[137]
킴가의 사업은 록펠러와 겹치지 않기 때문에 큰 갈등 없이 공존한 것으로 추측된다. 오히려 킴가의 주 사업 중 하나는 군수사업이었는데(유진 말년에는 손 뗐지만) 탱크, 비행기 등은 대량의 석유를 요구하기 때문에 석유 사업이 주였던 록펠러와 친했을 가능성이 높다.
[138]
1933년으로 원 역사보다 3년 이르다.
[139]
그 카드게임이 문화적 흐름이 되어버려서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140]
당시 미국은 대공황으로 인해 가장들의 주머니 사정이 비싼 장난감을 사주기 힘들게 가벼워진 상황이었다. 그래서 비싼 장난감보다 싼 카드팩 몇개를 사가는 수밖에 없었다는 사정도 있다.
[141]
딕시를 비롯한 치킨 호크 인종차별주의자들이 깜둥이가 건방지다며 93사단 참전용사를 박해하고 죽이자 유진이 향우회를 조직해서 구출했다.
[142]
이 과정에서 팔머가 고용한 후버가 잠깐 짤리는 사건이 있었지만, 이후 후버가 FBI의 국장이 되었다는 묘사를 보면 어찌어찌 복귀한 모양이다.
[143]
에필로그에서 유진이 후버에게 스파이 요령도 이것저것 배웠다고 언급된다.
[144]
일본계 집단들은 집단 전체가 수용소가 갇히는 것보다 일부를 팔아넘기는 게 나아서 자신들이 '알아서' 죽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145]
2차대전 당시 OSS는 주로
태평양 전쟁에서 활동했는데 본작의 아이젠하워는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 방면 총사령관이었다.
[146]
그와 별개로 유진이 아이젠하워 정부 시절 국무장관 하던 당시에는 CIA의 여러 삽질을 저지했다는 것으로 보아 CIA를 직접 통제했던 것으로 보인다.
[147]
작중에서는 홀로코스트가 강조되지만 T-4 프로젝트도 넘어갔다.
[148]
독한 사기꾼으로 유명했던 폰지는 보자마자 구토를 하고 잠을 못 이뤘으며, 정보기관의 잔인한 수장으로 이름난 그 후버조차도 증거를 보고 동요해서 손을 떨다 담뱃불을 못 붙일 정도였다.
[149]
독자들은 폰지가 본래 이탈리아계 미국인이라는 점과, 이후 신분세탁한 가명이 이탈리아어라는 점에서 이탈리아로 도망쳐 신분세탁한 뒤 스페인이나 남미로 도주한 것으로 추측한다.
[150]
찰스 폰지 본인이 아두이노 로렌초는 사실 과거에 찰스 폰지였다고 밝히고 죽어야 동일인물로 기록될텐데, 정작 아두이노 로렌초는 도덕적인 나치 사냥꾼이고 찰스 폰지는 그저 사기꾼이니 굳이 동일인물이라고 밝혀봤자 아두이노 로렌초라는 이름의 명예만 더러워질 것이라고 본 듯하다.
[151]
알 카포네가 세간에 유명해서 그렇지 당애 마피아 업계에서는 이 사람을 제일로 쳤다.
[152]
마피아들 입장에서 불법 경로로 밀주를 파는 것보다 일단은 합법인 우보크로 파는 게 법망에 안 걸려서 편하기도 하고, 우보크가 합법이라는 점을 이용해 높으신 분들이 드나들며 밀실정치에도 애용했기 때문에 김가와 친하게 지내도 이상하지 않다. 알 카포네 우유 유통 일화를 보면 알겠지만 의외로 뒷세계 범죄조직은 범죄로 버는 돈보다 건전한 사업으로 버는 돈이 더 많아서 정상적인 사업체도 한둘 정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153]
독자들은 김가가 루치아노뿐만 아니라 이탈리아계와 아일랜드계 마피아들과 사실 친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154]
금주법 시대 우보크가 전형적인 마피아 발상이라는 것, 초기 샌프랑코가 범죄조직들과 싸우며 재산을 사수했다는 것, 김가가 캘리포니아에 세를 굳힌 게 금주법 시대인데 당대 중국계와 일본계를 비롯한 여러 인종과 민족들이 각자의 깡패 세력을 거느린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을 모두 제압하고 김가의 밑에 넣은 점, 마피아들의 본보기나 다름없는 순환출자나 탈세 수법 같은 합법과 불법을 넘나드는 사업 수완, 라스베가스 건립에 김가가 크게 보태고 있는 것, 류큐에 마땅한 사업이 없자 마카오마냥 대형 카지노를 연 것 등.
[155]
거기다 현실의 마약상들은 대리 화폐로 야구 카드나 유희왕 카드를 애용하는데, 샌프랑코가 개발한 TCG 카드는 당시 가치가 매우 높았고 본작의 21세기 금주법 시대 마피아의 상징 중 하나가 TCG인 걸 보면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던 걸로 보인다.
[156]
당시 본작에서는 공화당 의원이었던 맥아더가 루즈벨트의 거국내각 제안으로 전쟁부 장관에 입각한 상태였지만, 루즈벨트가 죽고 정치 초짜였던 부통령 월레스가 대통령직을 승계한 상황에서 야당 거물과 여당 내 반대세력이 손잡고 힘없는 대통령을 날려버리려는 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157]
본작에서는 1939년 홀로코스트가 전세계에 폭로되었기 때문에 미국으로 망명한 아인슈타인이 이를 알고 충격을 받아 핵실험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158]
전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공산당 세력들을 매수해서 미국에 우호적으로 만들어 소련의 세력을 꺾는 것.
[159]
참고로 상원의원이었던 트루먼에게 부통령 후보 제안이 들어왔지만 상황 파악이 빨랐던 트루먼은 거절했다.
[160]
주권민주당 분당 사태가 없었으면 민주당이 선거인단에 앞서서 이길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딕시크랫은 민주당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지만 딕시크랫과 가문 단위로 악연이 있던 맥아더에게 합류할 수 없어 민주당으로 복당했다.
[161]
당시 군부는 남북전쟁 당시 딕시크랫과의 악연이 이때도 남아있어서 공화당 지지세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매카시의 개소리로 인한 빡침+딕시크랫 대선후보니까 당연히 거부할 수밖에.
[162]
이를 우려한 유진은 공직을 맡지 않으려 했지만 아이젠하워는 유진 지지층을 확실히 규합하고 유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일방적으로 국무부 장관직을 못박아버렸다.
[163]
한편 공화당은 매카시즘 역풍을 피하는데 성공한 보수파가 로버트 태프트를 경선 상대로 내세웠지만 최초의 경선 토론 방송에서 아이젠하워가 가볍게 승리해 공화당 대선후보로 선출되었고 공화당은 그대로 대통령직부터 상하원 의석까지 모두 휩쓰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164]
20세기 초반 유진의 발상으로 나온 U.S.Milk(우유 유통 연방정부 공기업)가 공화당의 마지막 진보 정책으로 하딩 시절에 만들어졌지만 공화당의 허버트 후버 집권기 대공황을 핑계로 해체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오죽하면 트루먼은 유진을 처음 만났을 때 공화당이 링컨의 진보정당이었던 시절은 20세기 초반에 이미 끝났다고 평했을 정도.
[165]
당연하지만 매카시즘 역풍에 제대로 말려들었던 공화당 보수파들은 정치적 생명 연장을 위해 엎드리느라 바빴다.
[166]
본작의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한 이유가 나치가 금산 김가에게 저지른 테러와 홀로코스트 및 T-4 프로젝트 사전 폭로, 바르바로사 작전과 진주만 공습이 우연히 같은 날 일어나 독일과 일본이 짜고 미국을 공격했기 때문이라 미국이 착각한 게 발단이라는 걸 고려하면 정말로 강력한 고립주의자였던 셈.
[167]
금문교를 접하고 있는 공원이다.
[168]
참수당했다는 설도 있다.
[169]
그것 말고도 인민영웅 칭호와
러시아 미녀 30명과
미동 30명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170]
스탈린부터 시작해 호치민, 티토, 흐루쇼프까지 해당 책에 서명을 남겼다.
[171]
정확하게는 스탈린에게 처음 받았을 때는 유진의 요구로 찝찝해 하면서 서명을 했지만 이후 호치민을 설득할 때 자신은 민주주의 인물이면서 사회주의 두목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증명으로 보여주면서 사인 받았지만 이후 티토를 만났을 때 둘이 회담 잘하고 난 뒤에 그책을 왜 안보여주냐고 언급하면서 반 강제로 싸인했다. 흐루쇼프의 경우 후술했다시피 본인이 거의 강제로 사인을 남겼다.
[172]
상성상 우위인 독일군을 처절하게 발라버리고 베를린도 미군이 함락시켰으며 국공내전 때는 독소전을 겪은 소수민족 부대를 의용군으로 보냈더니 아시아 주둔 2선급 미군에게 발렸다. 냉전 초기에 킴 플랜으로 세계 각국의 공산당이 쇼미더머니 때문에 미국과도 양다리를 걸친 건 덤.
[173]
유럽 경로로는 미국과 양다리를 걸친 유고슬라비아가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 마피아를 통해 밀수입한 다음 주변 동유럽 국가로 밀매하고 이를 유럽 지역의 소련인들이 밀수입하는 구조이며, 아시아 경로는 한국, 일본, 남중국이 장강 비무장지대를 통해 북중국에 밀매하고 북중국이 이를 소련에게 밀매하는 구조였다. 그 외에도 두만강 일대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물건을 밀수입한 다음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유럽 일대에 뿌려지는 경로도 있었으며, 이를 뒤늦게 안 유진은 '보이지 않는 손이야말로 신이다'라고 경악했다.
[174]
대약진 운동 이후 북중국 일대에서 대규모 탈북자가 형성되었고 이들이 자본주의의 맛을 알고 대규모 밀수 루트를 형성했다고 하니 소련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175]
원 역사에서 쿠르스크 전투에서 바그라티온 작전을 거쳐 베를린 전투까지 도달한 게 1년 9개월이었다. 아헨에서 베를린까지는 520km로 연합군이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섬멸을 해서 뚫었다는 걸 고려하면 아무리 본작의 서부전선이 독일군 정예 수백만을 갖고 갔다지만 대체 소련군이 얼마나 무리한 건지 상상이 안 갈 정도다.
[176]
다만 베를린을 비롯한 동유럽 분할은 사전에 합의되었기 때문에 원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냉전권 판도를 만들기는 했다. 하지만 프라하를 연합군이 점령했던 사건은 스탈린 사후 정쟁이 일어났을 당시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분할해 체코를 1세계가 가져가는 결과를 불렀다. 본작의 21세기에도 소련과 동독이 존재한다는 언급을 보면 그 외에는 구도가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지만.
[177]
독소전쟁을 경험한 소련군 출신 소수민족 의용군이 2선급 전력으로 취급받던 아시아 주둔 미군에 일방적으로 패배했다.
[178]
그런데 이 꼼라드 콜라의 마스코트가 북극곰 코스프레를 한
쿠마미미 스탈린(...)이다.
[179]
주코프가 선호한 콜라는 흰 콜라이기 때문에
사이다 탄산음료와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미국산 검은 콜라도 본작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검은 콜라도 완전히 명맥이 끊어지지는 않았을 듯하다.
[180]
시베리아급의 추위를 자랑하는 북한에서 왜 소주가 전통적으로 유행했는지 생각해보자. 북한은 현대에도 도수가 20도 미만이면 술 취급도 안 한다.
[181]
사실 이거 굉장한 업적인데, 꼼라드 콜라의 시장 지배 한방으로 음주운전, 주폭, 알코올계 질병발병률, 알콜중독 문제 등등이 깔끔하게 히틀러랑 같이 지옥에 처박히고, 평균수명 떡상에 가정환경의 안정화로 인재풀의 질이 한순간에 고속으로 상승해 버리는 결과가 나온다. 주코프가 콜라로 알콜중독 때려잡은 것만으로도 주코프는 스톨리핀, 스탈린, 알렉산드르 넵스키, 표트르 1세 등등과 동급 취급 받을 수 있다. 대신 설탕중독 문제가 있겠지만 알콜중독으로 인한 사건사고보다는 나으니까. 오죽하면 본작의 소련이 2020년대에도 해체되지 않고 현대까지 존속하는 이유가 1990년대 옐친 시절 소련에 덩샤오핑이 개입한 것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알콜중독에서 벗어나니까 이성이 돌아와서 그런 게 아니냐는 말이 있을 정도.
[182]
독자들은 콜라에 알콜을 섞는 게 맛이 괜찮기 때문에 섞어 먹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지만, 그래도 콜라를 넣으면 생으로 먹는 것과 달리 당분과 수분이 보충되어 취기와 숙취는 확실히 덜해진다. 적어도 만취로 인한 사건사고는 안 일어날 테니 생보다는 낫긴 하다.
[183]
군부(와 주코프)를 견제하기 위해 유화책을 펴다가 그만 체코를 서방 세계에 넘겨주고 말았다.
[184]
객관적으로 유진은 처칠의 생명의 은인이다. 마켓 가든을 본작에서 너무 말아먹은 나머지 하마타면 영국 육군 그 자체가 소멸할 뻔했고, 이에 분노한 영국 시민들이 처칠을 생물학적으로 죽이려고 했다.(...) 유진이 포위당한 영국군을 구출한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거지 그대로 영국 육군이 소멸당했으면 그 시점에서 대영제국은 끝이었다. 영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유진에게 크게 빚을 진 거나 다름없는데, 정작 본작에서 영국군의 전적은 형편없다 못해 유진이 지휘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말기 전까지 트롤러 수준이었다.(...)
[185]
반공과 소련 견제에서는 뜻이 맞지만, 미국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찬 맥아더는 제국주의자 처칠을 마뜩치 않게 생각하는 데다가 처칠이 후원한 몽고메리의 삽질로 미군 군단이 소멸하는 대참사를 겪은 후엔 '친영파' 딱지가 붙는 건 정치인으로서 자살행위가 됐기 때문.
[186]
본작에서는 미국이 진주만 공습 전에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원 역사보다 초기 상황이 나았는데 처칠이 당시 중립국이었던 노르웨이를 일방적으로 침공했다가 오히려 독일에게 북유럽을 통째로 털리는 역효과를 냈다. 이 때문에 북유럽 전선 상황이 원 역사보다 더 나은 결과를 초래했지만 이 문제는 히틀러가 이탈리아와 발칸에 원 역사보다 더 많은 병력을 파견하는 것으로 겨우 상쇄되었다.
[187]
당장에 아프리카 전선에서도 결국은 영국이 이기긴 했겠지만 유진 킴의 활약으로 그 기간이 확실하게 단축된 데다 주로 활약을 했던 것도 미군이었고, 마켓 가든 작전은 유진 킴이 아예 지휘권을 놓았던 상황에서 몽고메리의 강력한 주장으로 입안된 작전이라 몽고메리의 역량은 축소되고 실책은 훨씬 드러난 상황이기 때문이다.
[188]
몽고메리가 막 북아프리카로 파견될 당시 처칠 앞에서 그 눈 찢어진 스키타이인(유진)은 여우 면상도 못 볼 거라 의기양양하는 장면이 있다. 당시 유진은 북아프리카 전역 파견이 확정된 상태였으니 거의 같은 시기다.
[189]
본작에서는 1939년 6월 25일 바르바로사 작전과 진주만 공습이 동시에 일어났고 유진과 몽고메리가 북아프리카 전역에 파견된 건 1939년 10월이다.
[190]
물론 이집트 수에즈 운하 사수도 중요하지만, 북아프리카 전역은 당시 롬멜이 이집트까지 도달하지 못한 반면 당시 인도는 일본군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휩쓸고 인도 직전까지 몰려오고 있었다.(태국은 점령당하진 않았지만
과달카날 해전에서 일본군이 미군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친일에 가까웠다)
[191]
원 역사에서는 인도로 좌천된 이후 버마,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동했고 이탈리아의 몬테카시노 전투에서 이름을 날렸는데, 본작의 이탈리아 전선은 미군이 빠지고 이탈리아 왕국군과 영국군만 싸웠음을 고려하면 인도에서 일본군 관련으로 성과를 내고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약해서 승진한 모양이다.
[192]
제21집단군 예하 제2군 사령관이 저지대 집단군 사령관을 겸한다는 지령을 보아 2군 사령관이었다 저지대 집단군 사령관으로 승진한 모양이다.
[193]
저지대 집단군은 원 역사에서도 본작에서도 서부전선 연합군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
[194]
알기 쉽게 설명하면, 남쪽 탈출구를 만드는 걸 포기하고 북상해서 앤트워프 항구 장악을 노린 것이다.
[195]
원 역사에서는 전후인 1946년에 원수가 되었다. 이때의 유진은 미영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전권을 쥐고 있었기에 가능했거나 영국군을 설득한 모양이다.
[196]
마켓 가든 전투 시작 당시 영국군 50만, 캐나다군 10만이었고 이 시점에서 영국군과 캐나다군 합쳐 50만 있었다고 한다.
[197]
알자스-로렌 일대 방어선이 제법 견고해서 프랑스군을 고기방패로 쓴 거지만, 독일에게 3공화국이 멸망당하고 3년 동안 나치강점기를 겪다(1938년 11월~1941년 6월 25일) 파리가 해방된 지 2달만에(8월) 파리가 다시 노려지는 상황에서 알자스-로렌 일대의 수복은 프랑스의 위신과 직결된 문제라 많은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독일과의 오랜 국경분쟁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꼭 점령해야 했다.
[198]
스트라스부르는 당시 B집단군 주력이 있던 벨기에와 아미앵 일대에 비해 너무 동쪽 아니냐 의아할 수도 있는데, 당시 독일군은 베네룩스를 거쳐 파리를 공격했던 B집단군 본대만이 아닌 알자스-로렌을 포함한 프랑스 동부 일대에도 많은 독일군이 있었다. 이 때문에 변수를 줄이고자 조공으로 스트라스부르 공격을 행한 것이다. 파리 사수 연설과 동시기에 패튼에게 메츠 점령을 지시한 것도 그 때문이다.
[199]
당시 브래들리가 지휘하던 미 12집단군은 1군, 7군, 9군, 15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7군은 메츠 함락으로 힘이 다 빠져 후방으로 물러났고 15군은 한창 편성 중이라 제외, 1군은 저지대 집단군을 구출하러 간 영 제21집단군을 호위하러 동쪽으로 진격해서 9군이 아미앵시를 포위하고 1군은 SS 제1사단을 포함한 독일군을 사정없이 궤멸시키며 진격했다. 당시 독일군은 차량이 아닌 우마(牛馬)에 보급하는 열악한 보급 상황, 지속적인 격전으로 인한 소모, 끝없는 폭격으로 인해 역량이 소진된 상황이라 막을 수 없었다.
[200]
다른 곳에 있던 독일군이야 낫지만, 아미앵에서 아헨까지 가는 데만 330~350km다.(...)
[201]
퇴각 당시 아미앵이 아니라 릴, 몽스, 아라스, 캉브레에서 시작해 탈출 난이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던 만토이펠을 비롯한 일부 부대는 탈출에 성공했다.
[202]
독일의 1개 집단군을 궤멸시키고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해방하는데 성공한 상황에서 현재 독일 본토인 아헨을 공격하는 건 무리지만 이 시점에서 마지막 남은 농경지인 네덜란드를 해방시키면
순무의 겨울이 재림하기 때문.
[203]
유진이 식량을 공중 수송하는 동안 독일군이 건드리지 않으면 그곳을 폭격하지 않을 테니 이걸 거절하면 유고에서 1명당 백 명 죽였듯 아사자 1명당 나치당원 10명 처형하겠다 엄포를 놨고, 그 말을 들은 스탈린은 "일단 만 명 총살하고 시작해야 할 거 아니냐"고 대답하자 결국 독일군이 물러났다.
[204]
그가 있을 때는 비난이 많았지만 그를 몰아내고 난 뒤에 군벌들의 행적이 더 엉망이라
장제스가 더 나았다는 소리를 들으면 복귀하여 지지를 얻는다. 장제스가 하야한 이유도 이를 예상한 유진이 몇 년 안에 돌아올 테니 안심하고 잠깐만 물러나라고 장제스를 설득했기 때문.
[205]
이 영화도 제법 괴랄한데, 수상할 정도로 마오쩌둥을 닮은 조조가 참새 먹방을 선보이고 엑스트라를 진짜 백만 명 동원해서 찍는
대륙의 기상을 보여주었다.
[206]
1948년 대선에 당선되었다고 언급된다. 원 역사에서는 트루먼 행정부 2기 때 일이다. 본작에서는 1941년 루즈벨트 3선 사망, 1942년 2차대전 종전, 1945년 제2차 국공내전으로 타임라인이 원 역사보다 전체적으로 빨라져서 아이젠하워 임기도 4년 일찍 시작해서 4년 빨리 끝났다. 본작에서는 그 공백을 JFK의 형인 조지프 케네디 주니어가 메웠다.(원 역사에서는 2차대전 도중 아프로디테 계획 사고로 사망)
[207]
스탈린 사후에 벌어진 일이라 명시되며, 대약진 운동이 2년 갔다고 했으니 그 안에 일어난 건 확실해 보인다.
[208]
원래는 미국이나 남중국으로 가려고 했지만 남중국은 장강 난민이 너무 많아서 불하, 미국은 간 사람도 있고 여러 이유로 대한민국에 정착한 사람도 있다.
[209]
북한 일대는 남한 일대와 달리 제1세계 무역에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어서 남한 일대보다 경제 성장이 확연히 늦었다. 이 때문에 스탈린 시대부터 두만강 일대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한 소련 밀무역이 성행했지만, 이것만으로 북한 경제가 발전하는 건 무리였다.
[210]
남중국 일대가 건재한 데다 미국이 PATO라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군사동맹이 체결되어 군사적 위협을 강하게 느낀 탓에 다롄을 소련에게 돌려받은 이후에도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211]
이걸 알게 된 중공과 중화민국은 각각의 이유로 신병 인도를 요청했지만, 양쪽에서 시달리자 짜증이 난 한국이 그냥 제3국으로 보내버리는 것으로 응수했다.
[212]
원 역사의 문화대혁명이 1966~1976년에 벌어져 대약진 운동 종결로부터 4년 뒤에 일어난 것을 고려하면 1959~1960년에 일어났다 몇 달 안 가 진압된 것으로 보인다. 장칭이 문화대혁명 때 대형사고를 쳤다는 언급이 있는 걸 보면 하루아침에 진압된 건 아니고 문화대혁명이 최소 몇 주는 간 걸로 보인다. 소련 입장에서 개입할지 말지 논의하는 데만 며칠은 갔을 테니 당연하긴 하다.
[213]
이때 중공이 장칭을 죽이겠다고 이를 간 걸 보면 그 잠깐 사이에 대체 뭔 난리를 쳤나 싶을 정도. 이 때문에 덩샤오핑은 인도까지 가서 대한민국 외교관들과 접촉했을 정도였다.
[214]
1920년대부터 소련에서는 김유진을 '조선 차르'로 인식하고 있었다. 2차대전 당시에는 미국 정계에서의 폭발력 때문에 미국 정계에 진출할 바에는 한반도에 처박히는 게 낫다고 여겼을 정도.
[215]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군 소속 조선인이 배신할 것을 우려해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간도특설대를 만들어 김일성을 죽였다고 언급되며, 본작의 시기를 계산하면 1939~1940년에 벌어진 일이다.
[216]
설령 김정일이 태어났더라도 본작의 정황상 소련에 귀화해 일반인 유리 킴으로 살다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217]
1946년에 매카시즘이 시작되었는데 1947년에 역풍이 불기 시작해 1948년에 매카시즘이 완전히 진압되었다.
[218]
유진은 자신은 어디까지나 미국인이며 미국과 일본은 선린우호 관계임을 강조하며 민족감정을 건드리는 도발을 가볍게 넘겨버렸다. 이에 도고가 군인이 아니라 정치인을 할 재목이라며 감탄하자 제 피부색이 워싱턴에 일자리가 없다고 알려줬다는 개드립을 날려주며 도고를 폭소시키고, 도고는 유진 같이 야심과 재능이 있지만 혈혈단신인 젊은이라면 군대는 최고의 선택이라며 맘에 들어한다.
[219]
당시 일제 해군이 유진의 존재가 조선에 알려져서 논란이 되고 있다고 걱정했지만 도고는 공식적으로 미 육군에 속한 유진과 일제 해군인 자신들이 직접 맞부딪힐 일이 뭐 있냐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일본과 미국이 전쟁하지 않는 한.
[220]
실제 역사에서는 고노에 총리가 급발진하면서 중국 토벌!!을 주장하자 군부도 질 수 없다!! 하고 급발진해버렸다.
[221]
유진은 전쟁이 일어나자 히데타카를 남미로 보냈지만 전쟁 중이라는 걸 고려하면 사실상 석방이나 다름없다. 이 때문에 도조가 행복회로를 불태우기도 했을 정도.
[222]
이게 뭔 해괴한 짓이냐 싶겠지만, 사실 일본 역사의 집권층이 자신이 패배했을 경우에도 가문을 존속시키기 위해 반대편에 자식 하나를 딸려보낸 건 전국시대부터 있던 관습이다. 원 역사의 미국과 달리 유진과는 이래저래 인연이 있고 유진은 미국에 온 일본 상류층을 활용하는 타입이지 숙청해서 미국에서 지지 얻는 타입은 아니기 때문에 당시 일본 고위층의 태도는 도조와 별 차이가 없었다. 실제로 이들이 전후 귀국해서 그대로 신 일본의 집권층이 되기 때문에 '가문'만 보면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223]
이는 고노에 후미타카와 마찬가지다.
[224]
사실 원 역사의 도조도 전범재판 초기에는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규탄했지만 연합군이 히로히토를 세탁해서 써먹으려는 것을 알자마자 태도를 바꿨기 때문에, 이런 도조의 행동은 고증이 맞다. 본작에서는 유진이 자기 가족들을 보호하는 게 확실한 이상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225]
원 역사에서는 중국에서 고위층 딸과 눈 맞아 충칭 가려다 헌병대에게 붙잡혀 강제 귀국했지만 본작에서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전쟁 기간에 미국에 남아있었고 공가나 구 다이묘 가문들은 특히 '보험'으로 아들 하나 남겨두는 풍습이 있었으므로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226]
원 역사에서는 차녀 고노에 아쓰코의 차남 호소카와 모리테루가 고노에家의 양자가 되었다. 여담으로 모리테루의 형이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다.
[227]
만약 검각 때까지 살아남은 게 맞다면 이 인간 진짜 운이 좋은 거다. 원주민조차 넘는 걸 포기한 오언스탠리 산맥을 넘는 데만 엄청난 희생을 치렀는데,(이건 원 역사도 마찬가지다) 고생하며 넘어 공격한 포트모르즈비 전투 이틀 만에 퇴각 명령이 떨어져서 다시 오언스탠리 산맥을 넘어 중국으로 가야 했다. 이 때문에 장병들이 지금 장난하냐며 대본영 놈들 대가리 다 날려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었을 정도. 실제로 오언스탠리 산맥을 다시 넘을 때는 원주민들과 갈등을 빚어 원주민들에게도 공격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평소에도 부하들이 죽이겠다고 이를 갈던 하나야인데, 이 정도면 진짜 살해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
[228]
일본군 참모진들은 그
삼국지의 검각인데 말이 되냐고 반대했지만
도조 히데키는 어차피
대륙타통작전의 필요성도 줄어들었겠다
중경을 어떻게든 함락시키는 게 낫겠다며 결재해버렸다.
[229]
여담으로 검각을 넘을 당시 검각에서 장병들이 사고사하든 말든 검각을 넘으라고 장병들을 갈구는 사단장이 나오는데, 정황상
하나야 타다시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230]
다만 해당 세계선에서는
과달카날 전투에 패배하자마자 동남아 전선을 대폭 축소하고 중국 전선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굳이
대륙타통작전을 감행할 필요성이 줄어든 것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과달카날 직후 사이판, 이오지마, 오키나와에 강력한 요새를 건설했기 때문에 이 노선으로 갔으면 원 역사보다 큰 피해가 났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무타구치가 한 건 했다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동남아에 안 박아넣으니까 중국에서 그만큼 더 삽질한 셈...
[231]
사실 검각 작전이 무타구치가 아무렇게나 만든 작전이긴 하지만 당시 일본군 입장에서 중국군에게 항복을 받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물론 자타공인 미친 작전이라서 당연히 망했지만.
[232]
미쓰비시 그룹을 하사받았다고 언급된다.
[233]
같이 취해 있던 헨리는 다른 병사들끼리 벌이는 스모를 구경하다가 옆에서 '끼에엑 일본군 너무 무서워 끼에엑'하고 맞장구를 치다가 그대로 필름이 끊겨서 둘이 같이 나동그라진다.
[234]
물론 당시 2차 세계대전의 패색이 짙은 일본군이었음을 감안하면 더 젊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235]
히로히토는 이미지상 안 되고, 첫째 숙부
야스히토는 1940년부터 폐결핵으로 인해 내내 요양하다 1953년에 죽었기 때문에 공무는 무리다.
[236]
그 과정에서 유진의 부친 김상준과도 원수가 됐지만, 김상준도 그의 애국심은 인정하고 있었기에 해방 후에 자연스럽게 응어리를 해소했다.
[237]
실제로 유진은 이승만의 권력욕과 암살을 포함한 권모술수 능력을 경계하고 있어서 여차하면 그냥 태평양에 담가버리려고 했다. 이승만은 유진을 초면부터 군인보다 정치인에 가까운 사람이라 바로 알아봤기 때문에 이런 결말을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238]
이승만에게 프린스턴대 박사 학위를 수여한 사람이 바로 우드로 윌슨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폭로였다. 아예 무관계한 사람이, 그것도 동양인이 폭로를 했다고 하면 헛소문으로 일축될 수 있었을 것이다.
[239]
원 역사의 이승만과 같이 처음에는 실력을 배제한 외교독립론을 주장했었으나,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도 독립 못한 자신들을 포함한 다른 사례를 예시로 들면서 독립에 필요한 외교력의 확보를 위해서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논리로 전환하면서 본인의 입지를 잃지 않으면서도 실력양성론이 주류이던 임정의 주요 인물들을 설득할 수 있었고, 유진 킴이 자신을 후원해준다는 배경에 힘입어 임정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240]
덤으로 김일성은 간도특설대에게 마적 두목으로 사살당해서 이승만이 손쓸 필요도 없었다.
[241]
한반도가 당시부터 동양에서 가장 개신교도가 많은 편이었던 건 사실이다.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렸을 정도. 실제로는
천도교가 더 강세였지만 유의미하게 많았던 건 사실이다.
[242]
그 외에는 호남과 호서의 지주들이 창당한 한국민주당이 있는데, 한국민주당은 이후 등장하지 않으며 호남과 호서에서 한국독립당이 세를 굳혔다는 것으로 보아 합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243]
여운형이 좌익이라는 걸 싫어한 CIA가 쿠데타를 계획했다 유진에게 대판 까이고 여운형이 정권 잡게 놔뒀으며 곧바로 줄을 갈아타서 한국독립당이 미국 정부에게 불만을 가졌다는 언급이 있다.
[244]
원 역사와 정반대 구도라서 놀랍긴 하지만 원 역사에서도 해방 직후 정치 성향은 이랬기 때문에 통일 한국과 중국 분할로 성향이 그대로 내려왔다고 보면 된다.
[245]
원 역사에서도 김구가 죽인 독립운동가들의 시체로 산을 쌓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백색테러가 심했다.
[246]
전차만 100대 넘게 굴리고 있었다고 언급될 정도면 임시정부의 규모 자체가 원 역사와 비교할 수 없는 규모였다는 뜻이다. 단순히 돈만 대준 게 아니라 김가를 보고 '어? 조선 독립 되겠네?'라고 생각해서 독립에 뛰어든 사람들도 원 역사보다 많았을 것이고.
[247]
이때
김두한도 체포당해 수감되었다고 언급한다.
[248]
유일한은 원 역사에서 나이 50세에 OSS 산하 국내 침투 작전인
냅코 프로젝트에 투신할 정도로 전투를 꺼리지 않은 성격이었다.
[249]
조선 유학생들의 상상수가 종교단체나 시민단체의 추천을 받아서 갔기 때문에 일제 시절 상당한 세를 가진 천도교 유학생들도 제법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50]
직접 만나본 유진 킴 왈, 2020년대에 맨몸에 웹캠 달린 PC만 안겨서 집어던져 놔도 구독자 100만 스트리머가 될만한 재능 이라고 평한 바 있다.
[251]
김유진도 티토에게 소련은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게 되자 러시아 민족주의를 내세우고 있다며 소련이 주장하는 모든 인민의 소비에트 연방은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252]
본인의 권력욕과 미국의 인종차별 매운맛을 겪은 실망, 당시 박상희가 공산주의자라는 것이 밝혀져 위험에 처해 구명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253]
박상희가 대구에서 꽤 유명한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에 박상희 동생이라는 연을 통해 사람들을 포섭했다고 한다.
[254]
김유진이 죽고 온갖 루머가 떠돌았는데, 이를 늘 하던 대로 폭력 진압하려 했으나 오히려 이것이 국민들이 폭발하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255]
작가의 후속작
이 독일은 총통이 필요해요에서 조 중장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제복군인의 정점까지 올라갔다는 말이 있는데, 원 역사에선 박기태와 김유진의 아들이 만날 일도 없었고, 그렇기에 징용에 끌려간 박기태도 돌아오지 못했거나 온전치 못한 상태로 돌아와서 집안이 가난한 채로 남았을 것으로 보인다.
[256]
이 말을 들은 김유진은 김일성도 박헌영도 없음에도 공산주의자의 세력이 한반도에서 꺾이지 않은 것에 전율했고, 이참에 소련의 프락치 노릇을 할 공산주의자와 타협 가능한 사회주의자를 걸러내기로 결심한다.
[257]
'아버님께선 마음만 먹으셨으면
백악관까지 도전했을 분인데도 현 위치에 만족하시는 분입니다. 대체 이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가 무슨 가치가 있다고 그런 욕심을 부리겠습니까?'라고 내질러버렸다. 단 헨리 입장에서도 처음부터 여운형과 한국을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고, 유진을 의심하는 여운형이 답답해서 유진에게 그런 불순한 욕심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려다가 한 실수였다. 이 말을 들은 여운형은 '애초에 김유진 장군과 미국은 우리와 수준 자체가 다르구나.'라며 허탈해 한다.
[258]
단 완전히 경계를 풀지는 않았다. 김유진이 가난한 조선에서 부와 권력을 노릴 이유가 없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그가 조선에서 원하는 것이 돈과 권력이 아닌 다른 무언가라면 '그 무언가'를 충족한 뒤 다른 나라에 조선을 팔아넘기고 손 터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 하지만 그 '무언가'에 대해서 도저히 짐작 가는 것이 없었고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기에 결국 미군정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259]
원래 생각했던 이름은
조선로동당이었는데 유진이 반대해서 노동당이 되었다. 여운형은 처음에는 의아해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260]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고, 김유진의 미군정과 인수인계가 워낙 잘 되어서 많은 정당들이 안정적으로 등장하였고 분당과 합당을 반복하며 제헌 총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노동당은 빅텐트를 추구한 부작용으로 색깔이 희미하다 보니 자기 색깔이 강한 사람들이 떠나간 탓에 결과적으로 스탈린주의, 마오주의자 같은 진성 공산주의자거나 여운형 직속 세력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261]
CIA는 이외에도 세계 각국에서 반공 쿠데타와 내전을 계획했다가 유진에게 모조리 반려당했다. 독자들이 저것만으로도 유진이 노벨 평화상 받을 자격이 있다고 평할 정도.
[262]
반대로 이승만의 한국독립당은 호남과 호서(충청)를 텃밭화하는데 성공했다. 이승만 정부 당시 경제개발 정책이 남중국 무역의 중심지인 호남과 호서 지역에 집중되었기 때문.
[263]
애초에 본작의 한국은 통일 한국이라 북중국, 소련과 국경을 직접 맞대고 있어서 조금만 잘못되어도 둘에게 침공당할 처지다. 그런 상황에서 티베트 같은 별 상관도 없는 듣보잡 나라 때문에 개입하라는 요구를 들으면 돈 받아내는 게 지극히 당연하다. 철강소 정도면 미국 정부 예산은커녕 샌프랑코나 김유진 비자금 정도로 충분한 푼돈(?)이니 여운형 입장에서는 겨우(...) 이 정도도 못 받아내냐고 반응하는 게 더 당연하다.
[264]
누군지는 안 나온다. 독자들은 대체로
장면이나
윤보선으로 추정한다.
[265]
당시 좌익 세력은 김가가 비정상적으로 지원을 많이 한지라 김유진이 미국의 힘을 빌어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건가 의심했다. 여운형조차 김유진이 조선의 독재자가 되려는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 이 문제는 찢어지게 가난한 조선 따위가 미국에서 엄청난 부와 권력을 쥔 유진의 눈에 차겠냐는 헨리 킴의 말로 해결되었지만.
[266]
하지만 이들은 김유진의 치밀한 공작으로 인해 중공의 힘으로 귀국한다는 계획과 달리 다시는 귀국하지 못했다.
[267]
이후 이왕가는 노동당 내란음모 사건 직전 좌익의 언론플레이를 차단하기 위해 귀국시켰다. 이후 행적은 불명.
[268]
김유진을 계속 제국주의자라고 여겼으면 김원봉 특유의 앞뒤 없는 성격상 노빠꾸로 암살 시도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자문위원회에 합류해 성실하게 일한다는 건 결국 그럭저럭 신용한다는 뜻이다.
[269]
김원봉 본인이 손자처럼 아끼던 애가 경찰 손에 죽었는데도 가만 있겠냐며 설득받았다.
[270]
노동자 고문 현장에 난입하며 이게 대한민국 경찰인지 미와 경부인지 모르겠다 말한다. "내 이름은 지옥에서 도조 히노끼한테 물어봐, 이 인간말종 새끼들아."라며
시밤쾅을 시전했고, 서장은 벌집핏자로 만들었다.
[271]
김원봉은 1898년생이라 60년대 말~70년대 초면 70 전후로 살아있어도 이상하지는 않다. 워낙 젊은 시절부터 이름을 날렸던지라 세간에서 나이 많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그런 듯.
[272]
원 역사에서도 1960~80년대 노동운동계는 좌익계가 많았고 본작에서는 사민주의 세력이 해방 직후부터 건재하기 때문에 특이한 건 아니다. 자생적으로도 좌익이 생기던 시절에 전국에서 1, 2위를 다투는 정당까지 있으면 그 규모는 말할 것도 없다.
[273]
김유진 건은 그렇다 쳐도 노동당 내란음모 당시에 공범으로 몰렸을 때도 자기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숙여야 하냐고 상황 파악을 못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여운형이 한숨을 쉴 정도였다. 멍청한 건 아니지만 눈치 없는 성격이라고.
[274]
이봉창의 일본인 호적은 전향 전에 얻은 것이며 이봉창은 처음에는 일본인으로 살려다 조선어가 가능하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은 데 충격을 받아 전향한 사람이다. 조선총독부라도 이봉창의 일본인 호적이 진짜니까 의심 안 한 게 당연하다.
[275]
팬덤에서는 원 역사에서는 히로히토 즉위식에 참가하려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은 것 때문에 전향한 것과 달리 본작에서는 위버멘쉬인 김유진을 숭배하게 되어 김유진의 수족 노릇을 하는 게 아니냐 추정하고 있다.
[276]
사실 여운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당수가 당원을 믿지 않으면 어떡하겠냐고 망설이다가 죽을 뻔했다.
[277]
작중에서는
과달카날 해전에서 처발리자마자(
미드웨이 해전을 안 한 대신 과달카날 해전에서 둘을 합친 피해가 동시에 나왔다.) 동남아 전선을 대폭 축소하고 중국 전선에 집중해서 대륙타통작전을 할 이유가 없었다.
[278]
김유진에 의해 최초로 해방된 대한민국 영토인 데다가 국지적인 공산당 봉기를 겪었고, 중화민국이 장강 이남에서 생존에 성공하면서 중계무역지로 더 발전하고 한독당이 확고한 지역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투자를 했다. 특히 노동당 내란음모 사건 때 마오주의자들이 호남에서 깽판을 친 탓에 호남에서 좌익 세력이 전멸하고 가장 강한 반공 성향을 띠게 되었다고 한다.
[279]
당시 연안파들이 호남에서 해방구를 만들겠답시고 지주 계층을 족치려다 역효과를 냈는데, 김대중의 아버지가 일제시대 하의도의 의장이었고 김대중도 서자로 태어났다 첩인 어머니가 정실이 되면서 적자로 승격되었던 이력을 고려하면 오히려 김대중이 연안파에게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다.
[280]
이걸 본 기자들은 '임정 시절처럼 총은 없으니 좀 낫나?'라는 블랙 유머를 기사에 실었다.
[281]
그런데 경선 당시 한 말을 들어보면 보수 정치인임에도 원 역사와 성향이 마냥 다른 것도 아니다. 당시 한국 정치사회의 문제점이었던 지나친 저임금, 없다시피한 의료보험, 지나친 밀실정치와 골품제 관료주의를 비판하며 젊은 세대가 이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 다만 우보크 밀실정치를 비판한 것과 별개로 이승만과 김유진의 뜻을 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보면 김유진을 마냥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은 듯하다. 미국이 아닌 한국에 우보크를 도입한 건 김유진이 아니기도 하고.
[282]
윤동주가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닌 건 1935년이기 때문에 이즈음에 뽑힌 것으로 보인다.
[283]
본작에서 중공 만주 일대와 한국이 밀무역으로나마 대규모로 교류하기 시작한 건 마오쩌둥이
대약진 운동을 말아먹어(...) 대규모 난민을 초래한 1960년대부터였다.
[284]
주인공 유진 킴이 독백으로 '윤동주나 이육사가 문학을 했던 것은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이 할 수 있는 게 문학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이 현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가장 전도유망한) 의대를 가지 않았겠는가'라는 언급을 한 적이 있는데, 이와도 일맥상통하는 결과인 셈이다.
[285]
전면적인 내전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최초의 정규 육사 생도라는 공통점으로 뭉친
하나회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286]
물론 전두환의 육사 성적이 안 좋은 편이긴 했지만 어쨌든 오늘날에도 입학에 높은 고교입시 성적을 요구하는 육사이고 전두환이 입학한 5~60년대라면 입학이 더더욱 빡셌을 것인데, 그 육사에 입학해서 졸업까지 한 걸 보면 육사 내부에서만 딸릴 뿐 머리가 아예 멍청이 수준으로 나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소설 속 전두환은 특급 귀빈을 호종시킬 정도의 육사 생도였으니, 실제 역사와 달리 육사 성적도 우수했을 가능성이 높다.
[287]
사실 유진이 빗댄 멩스크나 위연도 그 인격이나 악행을 제하고 보면 능력 하나만큼은 출중했던 인물들이다. 어찌보면 유진의 평가가 맞아 떨어진 것.
[288]
명원 작가의 댓글에 따르면
실제 정치인과는 무관하게 그냥 친구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289]
그러나 그들 중 가장 짬이 딸렸다.
[290]
물론 전부 다 좌익은 아니고 우익이지만 노동계와 아프간 파병의 부작용으로 인한 혼란 때문에 참가한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시대 배경이 으레 그렇듯 대부분은 공산주의, 마오주의, 사민주의 같은 좌익계의 비중이 컸다.
[291]
좌익도 성향 따라 다양한 정당으로 나뉜다.
[292]
당시 만토이펠은 아미앵이 아니라 릴에 있었기 때문에 아미앵의 본대가 퇴각하자마자 본대와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탈출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당장 자기 살아남는 것도 힘든데 아미앵에서 330km를 돌파해야 하는 본대와 합류할 바에는 그냥 알아서 도망치는 게 더 합리적이긴 하다.
# 이외에도 50만도 들어가기 힘든 당시 아미앵의 도시 규모와 여러 정황상 아미앵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곳에 있던 나머지 잔존 부대들은 정황상 일부나마 독자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것으로 추측된다.
[293]
해적판을 만든 이유도 골때리는데, 자기가 원하는 카드가 안 나와서 없으면 내가 만들면 되잖아?라는 이유였다.
[294]
본작의 보어만은 히틀러 암살미수 때 사망해서 원 역사처럼 보어만의 누명으로 실각하지 않았기 때문.
[295]
여담으로 유진이 보내준 아내가 만들어준 케이크를 먹으며 개인적인 식료품을 보급해줄수있는 미군의 보급 역량에 대해 속으로 기겁하긴했으나 독을 탔을지도 모른다는 부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망설임 없이 먹긴했다. 먹고 바로 배탈나긴 했지만... 물건에 뭐 탄게 아니라 굶주린 배에 기름지고 단걸 집어 넣었으니 배탈나는건 당연했다.
[296]
유진은 롬멜은 에고가 강하니 항복하거나 자살하면 모를까 도주는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나름 정확한 예측이었다.
[297]
그래서 자기는 모른다고 오리발 내밀던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은 가석방되지 못한 채 계속 수감되게 되었다.
[298]
이 생활고라는 것도 당장 먹을 것이 없는 수준은 아니고 그냥 자식들 대학 등록금을 내고 혼수 마련하기 빠듯한 정도.
[299]
모델은 미군이 남의 나라 원정임에도 이 정도로 의욕이 넘치는 것에 의아해했는데 이게 그 때문이다. 거기다 홀로코스트가 일찍 폭로당해서 자신들이 지면 나치가 맨해튼에다 가스실을 만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더욱.(미국 유대인은 더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홀로코스트가 폭로되자 당시 부자가 아니었던 미국 유대인들이 대규모로 미군에 입대했기 때문)
[300]
비제르테의 이탈리아군은 크리스마스 휴일 동안은 미군 기지에 가서 놀고 싶어했지만 SS 멤버들이 총통에 대한 반역이네 뭐네 깽판을 쳐서 말싸움을 벌이다 SS가 먼저 총을 쏘자 분노한 이탈리아군이 SS를 두들겨 패서 크리스마스 트리에 매달아 버렸다. 이때 이탈리아군은 숫자에서 앞선 것과 별개로 SS를 일대일 격투에서도 발라버렸다고. 원 역사에서도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이 격투에 능했다는 일화가 있으므로 고증이 맞다.
[301]
미군이 비제르테에 쳐들어왔다는 것. 당시 미군은 크리스마스 휴전을 즐기고 있었고 협정대로 다음 날 06시에야 진입했다. 착각한 국방군 사령관이 자살한 건 덤.
[302]
당시 국방군은 당시 SS가 죽든 말든 무시하고 미군 기지에 놀러가서 초콜릿 얻어먹고 있었다. 평소 국방군과 SS의 사이가 나빴는 데다 당시 비제르테는 대부분 이탈리아군이라서 숫자에서도 밀렸기 때문.
[303]
이탈리아군이 졸전 일화로 유명해서 그렇지 북아프리카에서는 전형적인 파시스트 학살자였다. 그런 이탈리아군조차 토텐코프의 행동이 지나치다며 질색했다는 묘사가 있을 정도면 진짜
답이 없다.
[304]
이때 대령 신분으로 중장인 롬멜에게 거만하게 굴다 걷어차였다. 롬멜이 싸움은 제대로 못하는 게 힘없는 사람만 마구 죽이는 1급 인간백정이라고 디스한 건 덤.
[305]
이때 국방군와 이탈리아군의 발언을 보면 본인들도 악행을 많이 했지만 아인자츠그루펜은 조직 자체의 특성상 쓰레기라고 엄청나게 경멸을 샀던 모양. 롬멜도 1급 인간백정이네 뭐네 욕한 걸 보면 이들 입장에서도 도저히 답이 안 보이는 놈들이었던 모양이다. 사실 본작의 롬멜이 감옥에 몇 년 살다 나오는 수준의 경형으로 끝난 걸 보면 롬멜은 전쟁범죄를 덜 한 모양이지만.
[306]
좌익 레지스탕스라고 언급되는데 원 역사와 본작의 정황을 보면 프랑스 공산당일 가능성이 높다.
[307]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거냐면, 필로폰을 비롯한 각종 고위험 마약 중독자가 폭탄 맞아 파편이 몸에 박히고 화상에 대량의 출혈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파편 빼고 혈압 조절하고 화상 치료해서 한 달은 걸렸지만 의식 차리게 만드는 걸 성공했다는 뜻이다. 21세기에도 중증 마약중독자의 혈압을 조절하며 대수술하는 건 매우 성공 확률이 낮은데, 모렐은 마약을 비롯한 고위험 약물들을 가지고 1941년에 이걸 해냈다. 진짜로 명의가 맞는 것.
[308]
참고로 유진은 당시 의사의 답도 없는 평균 수준 때문에 절대로 병원을 찾지 않았다.
[309]
물론 어지간한 역덕이 아닌 이상
칸나이 전투의 패장을 기억하는 사람이 드문 것처럼 오명이 크진 않을 수 있다.
[310]
이 전투력은 배나온 아저씨가 되어서 국민돌격대에 징병된 때도 여전해서 7:1로 무쌍을 찍는다. 독자들은 '게르만 슈퍼솔져'라고 부른다.
[311]
이외에도 금융업에 종사했으며, 4개 국어가 가능한 비범한 인물이다.
[312]
1차대전과 2차대전 때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다 보니 지하실에 반년은 버틸 만한 식량을 늘 모아두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1차대전은 몇 년이나 전 국민이 순무와 톱밥만으로 버텼다고.
[313]
콘라드가 사위 오토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사실 프란츠는 친아들이 아니라 여동생이 유대인 남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조카를 양자로 거둔 것이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다 죽었고 아버지까지 죽은 뒤 거둘 친인척이 없어서 자신이 거두었다고.
[314]
거기다 콘라드가 프란츠가 공부를 평소에 안 해서 자신이 왜 부모와 안 닮았는지 의문을 안 느꼈다는 것으로 보아 금발벽안은 오히려 유대인 친부의 영향일 가능성이 더 높다. 나치의 아리아인 제일주의가 얼마나 웃긴지 말해주는 예시. 물론 히틀러가 그걸 알아도 그에게 사실 아리아인의 피가 흐리기 때문이라고
정신승리하겠지만...
[315]
정작 아버지는 1차 대전의 모든 격전지에서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생존한 베테랑이었고, 수훈한 철십자훈장 덕분에 친위대에 입대할 수 있었다는 게 아이러니.
[316]
모허이 학살마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중기관총으로 포로들을 쏴죽이거나 노인을 쏴죽이고 그 시체 옆에서 손녀를 강간한 적도 있다고 한다.
[317]
콘라드가 기어코 프란츠를 살려내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고, 이때 오토 마이어와 만나 마이어에게 모든 진실을 밝힌 뒤 SS 제복을 몰래 벗겨서 숨겼다. 콘라드는 마이어에게 가족을 부탁하며 여차하면 출생의 비밀을 가르쳐줘 SS라는 걸 숨기라고 요청했는데, 결과적으로 둘 다 살아남기는 했지만 이후 그의 행적을 보건대 신(작가)이 그가 편히 죽는 걸 바라지 않았던 듯.
[318]
콘라드 슈미트가 오토 마이어를 처음에 만프레드 마이어라고 잘못 불렀던 데에서 따온 이름
[319]
생환한 콘라드가 오토에게 밝히길 사실 양자로 유대인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니 나치 치하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이 맞긴 한 것.
[320]
원 역사에서도 나치 잔당이 주로 도망친 곳이 아르헨티나였다. 폰지 사기로 유명한 폰지가 본작에서 독일에 잠입했을 당시 홀로코스트와 T-4를 알고 나치를 극혐하게 되었는데 이를 이용해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기 전에 전 세계에 알베르트 괴링의 도움을 받아 자료를 뿌린 뒤 신분세탁했고, 세탁한 신분으로 전후 나치 잔당을 남미에 보낸 뒤 모사드에 인물 정보를 넘겨 돈도 받고 극혐하던 나치 잔당도 죽이는 일석이조를 취했다고 한다. 현대에는 둘이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21세기에 돌아온 김유진=김조윤은 '내가 아는 폰지가 이랬나?'라며 믿지 않았다. 미국에서 쫓아낸 뒤 만난 적이 없어 심정 변화를 알 리 없었기 때문.
[321]
본작 세계의 이스라엘은 3차 중동전쟁 이후 몰락했지만 친소 정책과 핵우산 덕분에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현대에도 남아있기는 하며 유대인 네트워크도 완전히 죽지는 않아 여전히 모사드가 꽤 악명을 떨쳤다고 한다.
[322]
다만 2차대전이 1938~1942년으로 대거 압축되어 진행된지라 전부 완성되지는 못한 걸로 보인다.
[323]
학계에서도 나치 독일은 강력한 전차를 추구하는 방향성은 옳았지만 지나치게 난잡해서 군수체계 파편화 문제가 심해 종류를 줄였어야 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324]
전간기에 M1917이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로 많이 팔렸다는 언급이 있기 때문에 구식 전차로 어떻게든 버틴 걸 수 있다.
[325]
다만 본작의 셔먼은 북아프리카 전역 당시 이미 후기급 성능이라서, 4호 전차가 초기형이었다면 불리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개발자들이 이후 4호 전차 개량을 한계까지 했다는 언급을 보면 중후기 정도였을 수도 있고.
[326]
본작에서는 원 역사보다 셔먼 때부터 파워팩을 비롯한 엔진 강화가 이루어졌다.
[327]
독일군이 원 역사보다 기민하게 움직여서 무솔리니를 빼돌릴 때 왕을 인질로 잡았기 때문이다.
[328]
원 역사에서도 드골을 싫어한 미국이
앙리 지로나
프랑수아 다를랑을 밀어주다 지로는 정치력에 밀려 실패했고, 다를랑은 암살당해서 실패했다.
[329]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는 70% 이상이 프랑스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 세력이었고 이를 기반으로 1946년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프랑스 공산당은 당시 크렘린의 시녀 소리 들을 정도로 소련에 충성했기 때문에 하마타면 프랑스가 적화될 뻔했을 정도.
[330]
그도 그럴 게 드골의 입지는 사실 별로 좋지 않았다. 원 역사에서도 드골이 호가호위나 했다는 이유로 1946년 총선에서 3%의 득표율밖에 못 건진 채 개털렸고 3공화국과 나치강점기의 대혼란을 모두 버틴 프랑스 공산당과 기독교당 같은 진성 썩은물들이 연합해 72%의 득표율을 건졌는데, 본작에서는 비시 프랑스가 빨리 몰락했지만 놀렛 생전에는 놀렛과 스포트라이트를 나눠 가졌고 파리 해방에서 드골은 결과적으로 한 게 0이기 때문. 파리 익스프레스는 패튼과 르클레르가 주도했고 프랑스 총독인 하이드리히와 게슈타포는 프랑스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 레지스탕스가 죽였다.
[331]
기갑 전공이기 때문. 기갑을 이용한 기동전의 개념을 역사상 처음으로 선보인 1차대전 아미앵 전투는 기갑에 속한 군인이라면 누구나 배운다고 한다. 독일군도 예외는 아니었을 정도.
[332]
만약 한반도가 해방되고 조선이 독립이 된 뒤에, 조선인들에게 국토를 재건시키는 일과 바다 건너 일본에게 반격하는 일 중 하나를 택하라 하면 조선인들은
무엇을
고르겠느냐고 반론한다.
[333]
1차대전 당시 드골은 일개 위관이었고,
백일 공세 당시에는 독일군 포로 신분이라 한 게 없었다. 오히려 사단장으로 아미앵과 뫼즈-아르곤 전역에서 큰 공을 세웠던 유진이 프랑스에서 더 유명했을 것이다. 2차대전이 개전되면서 아미앵 전투가 영화화되어 히트를 쳤으니 프랑스에서도 주목을 받았을 것이고.
[334]
알제리는 프랑스 본국과 지중해 바로 너머일 정도로 가깝고 해안지대의 기후가 프랑스 남부와 유사해 본토 행정구역에 넣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검은 발'이라 불린 프랑스 이민자 집단의 수가 다른 식민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알제리 원주민들에 대한 지나치게 가혹한 태도와 이런 검은 발 문제는 알제리 독립 과정이 매우 잔혹했던 원인이 되었다.
[335]
그 외에는 하이드리히와 게슈타포를 죽이고 철도 까는 걸 도왔던 프랑스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 레지스탕스가 있다.
[336]
阮愛國. 실제로 호치민이 베르사유 회의에 참가할 때 사용한 가명이다. 베트남어로는 응우옌아이꾸옥(Nguyễn Ái Quốc).
[337]
정확하게는 체르니크의 배신으로 그들에게 포위당했으나 유진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자 그를 잡거나 죽여봤자 그 뒷감당이 힘들거라는 인식을 일깨워줘서 포위했던 병력이 그들을 풀어주고 탈출하게 해줬다.
[338]
한국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정체성이 삼한으로 완전히 통합되었던 시기가 40년에 걸친 대몽항쟁이 원인이었고 역사적으로 '독립전쟁'을 통해 일국의 정체성을 형성한 사례는 제법 된다. 원 역사보다 훨씬 가혹하지만 그만큼의 성과가 돌아온 전쟁이었으니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문제만 잘 해결된다면 유고슬라비아 유지가 불가능한 건 아니다.
[339]
네덜란드, 프랑스는 이때도 해방이 안 되었고, 영국은 당시 전과가 없었다.
[340]
어떻게 성공했는지는 안 나왔지만 M1917 일본 라이센스 버전을 일본군이 인도네시아 현지 세력에게 넘기고 후퇴했고 정글 게릴라전까지 합쳤다면 불가능하진 않다. 영국군의 동기가 덜했던 것도 있고.
[341]
이대로 쥐어짜봐야 이란은 소련과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근시안적이라 지적하면서, 대신 영국이 그토록 원하던 핵무기를 이전해주겠다고 설득했다. 영국은 미국과 같이 핵개발을 했지만 미국이 핵을 완성하자마자 약속을 어기고 핵확산금지조약을 체결했는데, 이에 분노한 영국이 프랑스를 끌어들여 자체 핵개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1950년대까지도 대전 후유증으로 자본이 모자라서 고생하고 있었는데 이를 노린 유진이 영국에게 핵 이전을 약속했고, 영국은 이를 받아들였다. 핵 받자마자 영국이 프랑스를 통수친 건 덤.
[342]
본작에서는 스페인 내전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프랑스 침공이 일어났기 때문에 원 역사보다 더 빨리 프랑스가 무너졌다. 독자들이야 원 역사의 프랑스 6주컷을 알지만 본작의 프랑스는 스페인 견제 때문에 병력 분산이 일어나 독일에게 털렸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게 다 프랑코 때문이다!'라며 이를 갈게 된 것.
[343]
중립국인 미국을 중개인으로 끼고 수십년에 걸쳐 수에즈 운하 지분을 매입하게 하는 것.
[344]
작중에서는 아스완 댐이 미국의 기술과 자본으로 지어지게 되었다.
[345]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스라엘은 종전후 소련에 붙어 겨우 명줄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