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2 17:00:53

신간회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 정당
대한제국 ~ 미군정
(1897 ~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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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강령과 규약

1. 개요2. 배경3. 전성기4. 해소
4.1. 해소의 책임론에 대하여
5. 의의6. 관련 문서

1. 개요

新幹會
3·1운동 이후 독립운동 계열의 통합 움직임은 1920년대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이어졌다. 1927년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손을 잡고 당파를 초월한 신간회를 조직하였다. ‘기회주의를 일제 부인한다.’는 강령으로 타협적 민족주의를 배격하고 완전독립을 목표로 하였다. 신간회는 광주학생독립운동·원산노동총파업과 같은 학생·노동운동을 지원하고 민중대회운동, 야학운동 등을 주도하여 일제강점기 최대 항일사회운동 단체로서 활동하였다.
독립기념관 공식 소개문

일제강점기인 1927~1931년에 활동한 사회 운동 단체. 안재홍, 이상재, 김병로, 오화영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홍명희, 허헌 사회주의 세력이 합작한 좌우 연합 독립 운동 단체였다.

본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 46[1] IBK기업은행 버스정류장 일대에 있었다.

2. 배경

중국에서 민족주의 단체인 국민당 사회주의 단체인 공산당이 1차 국공합작을 맺었는데 이러한 현실 속에 세계 코민테른 협회는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선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단결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한반도에서 6.10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조선 민흥회(1926년 7월)가 결성되고 정우회 선언(동년 11월)을 통해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가 합작해 일제에 저항하겠다는 취지를 발표했는데[2] 이에 따라 좌파와 우파가 결합하여 신간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3. 전성기

이 단체는 합법 단체로 전국적으로 여러 지회 지부를 두었으며 최고 절정기에는 회원 수가 4만 명에 육박했다.

신간회는 순회 강연단을 조직하여 전국으로 강연을 하러 다녔고 원산 총파업을 지원하고 갑산 화전민 항일 운동 진상 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수재민 구호 활동을 펼쳤으며 외곽조직인 근우회를 통해 여성차별에 반대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때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고 민중 대회를 개최하려 시도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조병옥, 이관용, 허헌 등 간부만 44명, 총 90여명이 구속되는 대대적 사건이 터진다.

4. 해소

이 사건 이후 최린 송진우 등 자치론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들어온다. 본래 신간회는 합법 단체인 까닭에 일제 당국의 탄압하에서 기대한 만큼의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없는 약점이 있었다. 때문에 광주 학생 운동 이후 자치론 주장하는 민족 개량주의자들이 참여하면서 삐꺼덕 거리기 시작... 김병로로 대표되는 새 지도부가 이들과 협력하려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일체의 기회주의를 배격한다는 신간회의 창립 이념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다. 애초에 신간회가 저 방침을 내놓은 계기가 민족개조론이 나오고 최린의 천도교 신파와 송진우와 김성수 등이 자치주의로 틀려고 한다는 것에 사회주의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공통된 위기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 계기였는데, 이후에 자치 운동과도 손을 잡을 것이면 신간회의 존재 의의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후 자치 성향과 타협주의가 더 강해진 상태로 유지되었다면, 아마 그 이후의 신간회는 독립 운동 단체라고 불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침 대륙에서 장제스가 1차 국공 합작을 깨트리고 공산당을 토벌하기 시작하자 세계 코민테른 협회는 사회주의자는 민족주의자들과 타협해서는 안된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따라서 신간회 내부의 사회주의자들[3]은 코민테른의 영향을 받아 해소를 주창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일제의 해산 시도[4]에, 중앙 지도부는 일제의 집회 금지로 인해서 지회와는 별개로 설립한 동시에 사회주의 세력은 거의 배제된 상태로 출범했고, 노조에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해졌던 지회들은 중앙 지도부와 완전히 다른 성격을 보였다. 이들을 타협시킬 수 있는 정통성 있는 기존 지도부는 모조리 일제에 투옥되어 있는 상황[5]. 내부 분열이 심하게 터져버리고 지회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세력은 해소 후 재창단을 주장, 그리고 여기에 동조하는 지회가 점점 늘어나서 중앙 집행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1931년 전체 대회가 열렸고 격론 끝에 투표를 한 결과, 해소 후 재창단 쪽이 더 많은 표를 받으면서 스스로 해체, 그리고 재창단 시도를 하지만 일껏 해소된 신간회를 다시 창단하게 내버려둘리가 없는 일제가 재창단 행사를 방해하면서 진짜로 없어진다.

4.1. 해소의 책임론에 대하여

워낙에 신간회의 의미가 크다보니 누구 때문에 엎어졌는가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상단에도 적혀 있지만 워낙에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 일단 가장 흔히 거론되고 있는 우파쪽 주장은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은 사회주의자가 주도해서 해소했다 라는 것. 좀 과격한 입장에서는 노농에 대한 이념 침투를 과신해서, 사회주의자들이 민족주의 좌파마저 배제시키고 신간회를 먹으려고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반대쪽 주장은 당연히 자치론으로 기운 지도부 때문에 해소되었다라는 것. 사실 양자 모두가 책임이라면 책임이고, 의도라면 의도이지만 해체의 배경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포함되는 것이 일제의 노력.
  • 일제는 초기 협력 관계의 매개가 된 지도부를 모두 구속하고 신간회가 해소될 때가지 구금 상태를 유지하였으며, 연락할 방법마저 막았다. 또한 해소 후 재창단도 가능할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으며, 결정적으로 신간회 해소를 위한 전국 집회를 허용했다.[6]애초에 신간회의 새로운 지도부가 민족주의계 일색이 되었고, 지회와 유리된 것은 일제가 집회를 금지해서 중앙 집행부가 구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신간회를 해소한다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인다고 하니까, 이건 집회를 허용해서 모이게 해준 것이다. 물론 다음날 재창단을 한다고 다시 집회를 하려고 하니, 이번에는 허용하지 않고 모인 사람들을 해산시키는 것으로 재창단을 틀어막았다. 이 때문에 신간회 해소에 있어서 일제는 강제적 수단을 동원해서 해소를 하지는 않았으나, 신간회가 무너지게 되는데 여러모로 개입했던 정황이 있다.

5. 의의

일제강점기 몇 안 되는 합법적 독립운동 단체이며 한국 내에 존재한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 단체[7]였으며, 가장 대표적인 좌우 연합 단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 단체라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일제가 개입을 했건 유도를 했건 결국 좌우익의 분열로 인해서 5년만에 자진 해소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물론 일제 시대하의 합법적 단체라는 점에서, 규모가 커지는데는 도움이 되었으나 동시에 한계성도 뚜렷하였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신간회 활동 경험은 해방 이후 좌우파 간 관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남한의 경우 좌익의 정략적 의도가 있었다고는 해도 조선인민공화국의 초대내각에 좌우익을 고루 망라하는 등 신탁통치 문제로 좌우대립이 격화되기 전까지는 좌익과 우익 모두 어느정도는 좌우의 협력을 지향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좌우합작운동이 벌어지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다. 한편, 북한의 경우 조만식이 신간회에서 활동했었는데 해방 초기 현준혁 등의 사회주의자들과 협력해서 활동했다.

6. 관련 문서



[1] 지번상으로는 종로 104에 속해 있다. [2] 당시 민족주의자는 두개의 노선으로 나뉘어졌는데 하나가 자치론 등을 주장하며 일제와 타협하자는 타협적 민족주의파, 즉 기회주의자들 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일제에 저항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 이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세력이 크지 않아 다른 세력과 협력을 꾀하였고 그 결과 사회주의자들과 단결을 하게되면서 나온 것이 정우회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3] 대표적인 인물로 강기덕을 들 수 있다. [4] 일제는 합법적 단체가 존재하면 그 단체만 관리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창단을 허용했는데, 그 규모가 상상 이상으로 커지고 기껏 허용한 단체를 다시 불법화 할 명분을 찾지 못해서 어떻게 해산 시킬 것인가를 고민했다. [5] 이들의 대부분은 민족주의 사회주의를 불문하고 해소를 반대했다. [6] 조선총독부에서는 이미 1929년 3월 11일 포고로 신간회의 전국대회를 금지시켰다. 다시말해 신간회 해소집회는 신간회 창립대회 후 처음 열리는 전국대회이자 동시에 해소대회인셈. [7] 상해 임시 정부는 이 시기 굉장히 세력이 축소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