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dred Days Offensive 백일 공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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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중 서부전선의 일부 | |
백일 공세 당시 영국 육군 병사들과 마크 전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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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
1918년 8월 ~ 11월 | |
교전 지역 | |
아미앵, 몽스, 아르곤, 힌덴부르크 선 | |
교전국 | |
[[프랑스 제3공화국| [[영국|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캐나다 자치령| ]] [[호주| ]][[틀:국기| ]][[틀:국기| ]] [[뉴질랜드|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미국| ]]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벨기에|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포르투갈 제1공화국| ]] |
[[독일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지휘관 | |
[[페르디낭 포슈| [[앙리 필리프 페탱| [[프랑스 제3공화국| [[프랑스 제3공화국| [[프랑스 제3공화국| [[틀:깃발| ]][[틀:깃발| ]][[더글러스 헤이그| ]] [[틀:깃발| ]][[틀:깃발| ]][[존 조지프 퍼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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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파울 폰 힌덴부르크| ]]
병력 | |
[[프랑스군| [[틀:깃발| ]][[틀:깃발| ]][[영국군| ]]: 1,900,000명 [[틀:깃발| ]][[틀:깃발| ]][[미합중국군| ]]: 1,900,000명 [[틀:깃발| ]][[틀:깃발| ]][[벨기에군| ]]: 190,000명 |
[[틀:깃발| | ]][[틀:깃발| ]][[독일 제국군| ]]: 3,560,000명
피해 | |
약 107만명 |
약 117만 명[1] 대포 6,615문 손실 기관총 38,622정 손실 |
결과 | |
독일 제국군의 완패 | |
영향 | |
11월 혁명 발생 독일 제국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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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을 장식한 협상국 최후의 공세.2. 전개
2.1. 배경
독일군의 춘계 공세로 인한 전선의 변화 |
백일 공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1918년 3월 21일부터 시작된 독일군의 춘계 공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아무리 못해도 춘계 공세 막바지인 2차 마른 전투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2차 마른 전투를 거치며 독일군의 공격은 무력화되었으며 역으로 협상군의 반격 때문에 독일군은 기껏 얻은 거대한 돌출부를 상실하였음은 물론, 플랑드르 전선에서 예약해놓은 여섯번째 공세인 하겐 공세를 취소하였고, 돌출부 전선의 붕괴를 막기위해 북쪽에 있던 예비사단 13개를 끌어다 쓰면서 독일군의 북쪽 전선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1918년 7월 24일, 협상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 영국 원정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헤이그, 프랑스군 총사령관 앙리 필리프 페탱, 미국 원정군 총사령관 존 조지프 퍼싱이 모여 회의를 나누었다. 회의에서 포슈는 대규모 반격전을 펼치기에 앞서 '제한적인 공세'와 신속한 연격전을 결합시킨 일련의 파상 공세 계획을 세웠다.
1, 영프연합군(영국 제 4군+프랑스 제 1군)을 주축으로 하여 아미앵 지역의 돌출부를 수복한다.
2, 프랑스군을 위주로 한 연합군의 공격으로 마른 강 돌출부를 수복한다(=2차 마른 전투)
3, 새로 편성된 미군(미국 제 1군+프랑스군 모로코 사단)이 베르됭 동부에 있는 생 미이엘 지역의 돌출부를 수복한다.
이러한 제한적인 공세에 대해 페탱과 헤이그는 회의적인 입장이었으며, 퍼싱은 호의적이었으나 아직 미군의 준비가 끝나지 않아서 시기상조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2차 마른 전투가 진행되면서 상황이 유리해졌다고 판단, 헤이그와 페탱이 이에 호의적으로 변하면서 전략이 채택되었다.
3. 1차 공격
백일 공세는 크게 두 차례에 걸친 공세로 흘러갔는데, 그 중 첫번째 공세는 대규모 공세 준비를 갖추기 이전에 불리한 포지션을 완화하면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 적은 손실로 이득을 얻는 '제한적인 공세' 전략에 충실한 공격전이 진행되었다. 독일군의 춘계 공세로 인해 생긴 2개의 거대한 돌출부와 전쟁 초반에 참호전이 형성되었을때 수복하지 못한 생 미이엘 돌출부를 위주로 공격을 개시했다.3.1. 8월 8일-8월 20일: 독일군의 '암흑의 날'
아미앵 전투 지도 |
페르디낭 포슈는 더글러스 헤이그에게 영프연합군의 공세에 대해 수월한 작전 구성과 진행을 위해 프랑스 제 1군을 영국 원정군 총사령부 휘하에 배치시키는 한편, 영국원정군 총사령관 헤이그와 그의 군대에게 공세 작전을 구성할 전권을 제공하였다. 이에 헤이그는 매우 흡족해하며 영국 제 4군 사령관 롤린슨에게 공세를 위한 작전을 구성하라고 지시했다.
8월 8일, 영프연합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더 자세한 내용은 아미앵 전투 참고). 당시 영프연합군과 마주한 독일 제 2군은 영프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낼 충분한 예비대와 포병대를 보유하지 못했으며, 더 나아가 롤린슨의 완벽한 기밀 유지로 인해 공격을 거의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형편없는 상태의 독일 제 2군은 영프연합군의 강력한 제병 합동 전술[2] 앞에서 말 그대로 갈려버렸으며, 영국 제 4군은 하루만에 13km나 전진하면서 사실상 독일군의 참호전선을 완전히 뚫는데 성공하였다. 영국 제 4군을 돕는 역할이었던 프랑스 제 1군의 공격도 그럭저럭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6km를 전진하며 선전하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영프연합군의 강력한 공격에 아미앵 돌출부에 있던 독일군 전선은 붕괴했으며, 독일군 참모총장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이 날을 독일군의 '암흑의 날'이라고 회고했을 정도로 독일군 입장에선 참담한 날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8월 9일부터는 늘 그렇듯 하늘을 찌르던 공격 기세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가면 갈수록 길어지는 보급선과 재빠른 독일군 예비대의 증강, 그리고 포격으로 파괴된 지형을 건너면서 진격 속도가 매우 더뎌진 것이다. 이는 춘계 공세 당시 독일군이나 수아송 전투 당시 프랑스군이 겪었던 딜레마이자, 1차 세계대전 내내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현상이기도 하다. 그렇게 8월 8일의 기세와 속도는 날이 지날수록 감소하여 독일군은 라인을 형성하여 퇴각전을 수행하였다. 8월 14일-16일 쯤 되면 영국군 제 4군 사령관 헨리 세뮤얼 롤린슨이 헤이그에게 독일군 참호선을 찍은 항공 사진을 보여주면서 더이상의 무리한 공세가 불가능하다고 하였으며, 이에 헤이그도 동의하면서 공세가 사그라들어갔다.[3]
3.2. 8월 20일-9월 10일: 또다른 '암흑의 날'
아미앵 전투의 기세가 사그라들고 영프연합군의 공세가 약화되면서 독일군은 드디어 한숨을 돌렸나 싶더니, 8월 20일 저녁에 샤를 망쟁이 이끄는 프랑스 제 10군이 앤 강을 건너 아미앵 돌출부의 측면을 뚫고 들어왔다. 망쟁의 제 10군은 하루만에 4km를 전진하면서 독일군의 측면에 구멍을 냈으며, 영프연합군의 공격을 간신히 막던 독일군은 기껏 유지하던 방어선을 포기해야 했으며,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이날을 또다른 '암흑의 날'이라고 회고했다. 결국 독일군은 솜 강 지역의 방어선에서 완전히 물러나야 했으며, 안그래도 측면이 뚫린 상황에서 전선 유지하겠답시고 발악했다가는 아미앵 돌출부에 있던 야전군이 통째로 포위섬멸당하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미련없이 후퇴하였다.8월 21일에는 정비를 마친 영국 제 3군이, 그리고 8월 26일에는 영국 제 1군이 공세에 참가하여 다른 전선의 협상군들과 더불어 독일군을 쉴 새 없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독일군은 이러한 파상공세를 견디지 못했으며, 9월 2일에는 사실상 대부분의 독일군이 힌덴부르크 선으로 후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독일군 참모총장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미리 건설해 놓은 힌덴부르크 선을 필사적으로 지켜내어 겨울까지 버틴 뒤 이를 협상카드로 활용하여 유리하게 협상을 끌고 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3.3. 9월 12일-9월 16일: 미군의 첫 공세 ( 생 미이엘 공세)
한편, 미국원정군 총사령관 존 조지프 퍼싱은 독립적인 미국 제 1야전군을 편성하였으며, 미군의 주요 담당 전선으로는 베르됭 지역을 선택했다. 그 당시가 1918년 7월 1일이었으며, 이후 영프연합군이 전투를 진행하는 동안 사단 몇개를 지원해주며 준비에 돌입하게 된다.9월 12일, 미군은 생 미이엘 돌출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생 미이엘 공세). 프랑스군에게 상당한 양의 무기를 제공받은 미군은 연막탄과 르노 FT 계열 및 Mk 시리즈 등의 전차부대를 앞세워 제병연합 전술을 펼쳐 공격하였으며, 이미 퇴각할 작정이었던 독일군을 돌출부 안에 가두어 포위섬멸시키려 하였으나, 16일까지의 전투에서 독일군이 돌출부를 완전히 빠져나가면서 포위섬멸에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생 미이엘 공세는 의심의 여지없는 미군의 압도적인 승리였으며, 고작 7,000명의 손실을 입은 미군은 독일군 포로 6,000명과 대포 443문을 노획하는 성과를 올렸고 돌출부를 수복하는데 성공했다.[4]
더 자세한 내용은 생 미이엘 공세 참고.
3.4. 결과
협상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가 구상한 백일 공세의 첫번째 공격전은 매우 성공적으로 끝났다. 연합군은 비교적 적은 피해를 입었으며, 독일군이 4달에 걸친 공격전을 펼쳐 이룩한 전술적 성과들은 사실상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협상군의 철도망 네트워크를 위협하던 독일군의 돌출부를 수복함으로써 향후 대규모 공세를 펼치는 데 있어서 병참로 문제에서 한결 자유로워졌으며, 더불어 돌파해야 할 종심이 짧아짐으로써 대규모 공세 이전에 여러 유리한 조건들을 형성하는데 성공하였다.9월 초부터 협상군은 대대적인 재정비에 들어갔으며, 철도를 수리하고 병력을 교체하는 한편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였다.
4. 2차 공격: Grand Offensive
백일 공세의 2차 공격인 Grand offensive 지도 |
8월 초부터 이루어진 대규모 공세 기간 동안 영프미 연합군은 대대적인 정비를 시작하여 9월 중반까지 정비를 진행하였다. 이미 첫번째 파상 공세를 통해 유리한 교두보를 확보해놓은 상태였으며, 독일군은 힌덴부르크 선에서 최대한 버티고자 하였다. 협상군은 겨울이 오기 전까지 힌덴부르크 선을 돌파하는 것이 목표였으며, 돌파 과정에서 독일군에게 상당한 손실을 입히고자 했다.
4.1. 배경
1918년 8월 30일, 협상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는 대규모 공세 전략을 발표했다.영프연합군(영국 제 4군+프랑스 제 1군)은 생 캉탱 지역의 지크프리트 참호선을 돌파한다.
전선 중앙에 있는 프랑스군은(주로 프랑스 제 5군) 후퇴하는 독일군을 추격하여 지속적인 손실을 강요한다.
미프연합군(미국 제 1군+프랑스 제 4군)은 뫼즈- 아르곤 지역에서 진격하여 메지에르, 스당 지역에 도달한다.
9월 중반이 되면 공세 전략이 수정되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이 틀을 바탕으로 공세 전략이 구성되기 시작했다. 파괴된 철도망과 도로를 수리하는 한편, 군대를 배치하고 재정비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그동안 포슈는 플랑드르 지역에 있던 벨기에군을 중심으로 하여 영국군과 프랑스군 일부를 제공하여 '플랑드르 집단군'을 구성하였다. 플랑드르 집단군의 사령관은 벨기에의 왕 알베르 1세였으며, 영국군 지휘관과 프랑스군 지휘관들이 알베르를 도와 군사적 조언을 해주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포슈는 원래 여러 전선에서 일제히 공격을 가하고자 하였으나, 미군의 병력 재배치 문제와 헤이그의 요구[5] 때문에 결국 공세 날짜를 전면적으로 수정하여 일련의 파상 공세 전략으로 수정하였다.
(1), 9월 26일: 미프연합군이 뫼즈-아르곤 지역에서 진격하여 메지에르-스당 지역까지 도달한다( 뫼즈-아르곤 공세)
(2), 9월 27일: 영국 제 1,3군이 캉브레 지역으로 밀고 들어간다(2차 캉브레 전투)
(3), 9월 28일: 플랑드르 집단군이 이프르 지역에서 독일군 전선을 돌파한 뒤 진출한다(5차 이프르 전투)
(4), 9월 29일: 영프연합군이 생 캉탱 지역의 지크프리트 참호를 공략한다(생 캉탱 전투)
페르디낭 포슈는 전쟁 후반에 형성된 제병 합동 전술 교리를 바탕으로 한 돌파전을 채택, 여러곳에서 독일군 전선을 돌파하여 전선의 균형을 무너뜨린 뒤 독일군이 전선 전체를 뒤로 빼게 만들어 상당한 손실을 유도하고자 하였다. 독일군이 점령한 프랑스 지역과 벨기에 지역을 수복하는건 덤.
4.2. 9월 26일
미국 원정군 총사령관 존 조지프 퍼싱을 필두로 한 미군과 앙리 구로우의 프랑스 제 4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뫼즈-아르곤 공세). 퍼싱은 공세를 계획할 때 독일군이 예비대로 전선을 채우기 전에 신속하게 전선을 돌파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미군은 첫번째 목표인 몽포콩 지역조차 장악하지 못하고 참담한 실패를 겪어야만 했다. 미군은 영프독과 달리 산개전을 선호했는데, 영프독은 산개전을 진작에 버린지 오래라는 것을 감안하면 아직까지 미군의 미숙함이 드러나는 부분. 결국 불균형하게 산개하여 따로따로 뭉친 미군 병력들은 독일군 포병대와 기관총의 주요 타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첫 목표지점인 몽포콩 지역은 독일군이 사수하는데 성공하였으며, 미군은 프랑스군의 진격에 힘입어 진격을 해야하는 상황이었다.미군의 좌측에서 같이 공격하던 프랑스 제 4군 또한 고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군 못지않게 상당한 전력을 제공받은 프랑스 제 4군은 종심전투에 충실한 공격을 펼쳐 고전하는 와중에 꾸역꾸역 진출, 하루만에 4km를 진격하고 독일군 포로 7,000명을 사로잡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미군의 초기 돌파전이 사실상 실패함으로써 결국 포슈가 바라던 그림은 당분간 나오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더 자세한건 뫼즈-아르곤 공세 참고.
4.3. 9월 27일
영국 제 1, 3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영국 제 1, 3군의 공격은 독일군이 장악하던 캉브레 지역을 노린 공격이자, 북쪽에 있던 플랑드르 집단군의 공격이 더욱 용이하도록 어그로를 끌어 독일군 예비사단을 흡수하려는 속셈도 있었다. 오전 5시 20분에 시작된 영국군의 공세는 독일군이 파놓은 운하 때문에 부교를 건설하느라 잠시 지연되기도 했다. 더불어 전차도 얼마 없었기 때문에 진격이 수월하지 못했다. 그러나, 고전하는 와중에 부교를 건설함으로써 운하를 건널 교두보를 마련하는데 성공했다.더불어 이날의 전투로 인해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독일군의 주요 전방 교통 요충지인 캉브레 지역을 지키고자 병력을 캉브레 지역으로 보냈으며, 이로인해 북쪽 전선에 남아있던 예비사단의 숫자가 더욱 줄어들게 되었다.
4.4. 9월 28일
플랑드르 집단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벨기에군을 필두로 한 플랑드르 집단군의 공격은 가장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하루전인 9월 27일에 영국군의 공격으로 인해 독일군 예비사단이 그쪽으로 빠져나간 상태였으며, 덕분에 플랑드르 집단군과 마주한 독일군 전력은 상당한 열세에 처해 있었다. 이는 페르디낭 포슈가 노린 파상 공세 효과의 일부이기도 했다.공세 첫날부터 7km를 진격하면서 독일군의 북쪽 전선을 완전히 관통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이에 당황한 독일군은 즉각 물러나야만 했다.
4.5. 9월 29일
1918년 9월 29일 영국군의 힌덴부르크 선 공격 지도 |
반면 프랑스 제 1군은 지나친 손실을 우려하여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았고, 이에 롤린슨이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4.6. 10월 4일-10월 14일: 재정비
9월 26일부터 시작된 파상공세는 독일군이 건설한 막강한 힌덴부르크 선을 뚫느라 고전하고 있었으며, 이에 독일군 수뇌부에서는 힌덴부르크 선을 지켜낸 뒤 유리하게 협상을 이끌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빠지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미프연합군은 시작부터 발목이 묶였으며, 북쪽의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그럭저럭 진격하고 있었으나 고전하기는 매한가지, 그리고 플랑드르 집단군은 상당한 진격 속도를 보여주다가 급격히 둔화되었다. 당시에만 해도 협상군 지휘관들과 정치인들 상당수는 전쟁이 1919년이나 1920년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으며, 그에 맞게 신병을 등록하거나 무기 생산 계획을 짜기도 했다. 독일군 참모총장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상황을 상당히 낙관하고 있었다.협상군의 공격은 10월 초까지 진행되었다. 10월 4일에 미프연합군이 재차 공격하였으나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영국 제 1,3군이 10월 8일에 캉브레 지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2차 캉브레 전투에서 영국군은 독일 야전군 3개를 밀어내는 데 성공하였으며, 더불어 프랑스 제 1군이 10월 5일에 우아즈 강을 일시적으로 건너 독일군 포로 10,000명과 기관총 1,500정, 대포 100문을 획득한 뒤 밀려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10월 초까지의 공세 이후 협상군은 다시 한번 대대적인 재정비에 들어갔다. 지난번처럼 병력을 로테이션하고 대포를 전진배치하였고 철도망과 도로망을 정비하였다. 공세의 지속을 위해선 보급로를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0월 10일에 페르디낭 포슈는 공세 전략에 관한 지시문을 한차례개정하여 다시 발표했다.
(1) 플랑드르 집단군은 헨트(Ghent) 지역으로 진격한다.
(2) 영국군은 모뵈주(Maubeuge) 지역으로 진격한다.
(3) 미프연합군은 메지에르 지역으로 진격한다.
이는 8월 30일에 발표한 지시문에서 몇몇 부분을 고친 것이었다. 목표지점까지 한참 남은 미프연합군의 목표는 그대로 못박는 대신, 프랑스 제 5군의 공격도 개입시켜 공세를 확대하였으며, 영국군과 협력하던 프랑스 제 1군에게 전차를 추가로 제공함으로써 더 적극적으로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아마 영국군 지휘관들의 불만을 의식하여 취한 조치로 여겨진다.
4.7. 재공격
10월 14일에 플랑드르 집단군이 다시 공격을 재개하였다. 재정비를 마친 집단군은 독일군 전선을 몰아쳤고, 순식간에 코르트레이크(Courtrai) 지역과 메넨(Menin) 지역에 도착, 사실상 힌덴부르크 참호 네트워크의 중앙으로 뚫고 들어왔다. 이로인해 루덴도르프는 플랑드르 전선에 주둔한 독일군을 모두 헤르만(Hermann) 선으로 후퇴하라고 지시했는데, 이는 북쪽의 독일군이 힌덴부르크 선 후방까지 물러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플랑드르 집단군이 공격을 지속하며 벨기에 북서부 지역으로 진입하면서 벨기에 영토를 수복하는 동안, 10월 17일-10월 20일 사이에 영국군이 재차 공세를 펼쳐 라인을 뚫고 발랑시엔(Valenciennes) 지역 근처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10월 15일에 프랑스 제 1군이 생 캉탱 지역과 랑(Laon) 지역 사이에서 공세를 펼쳐 독일군을 Hunding 참호선까지 밀어내는데 성공했다.10월 중반의 공격으로 인해 협상군은 힌덴부르크 참호 네트워크의 중앙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했으며, 독일군 상당수는 전선의 붕괴나 야전군의 포위섬멸을 우려하여 라인을 힌덴부르크 선 후방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10월 24일에 프랑스 제 1군이 다시 공세를 펼쳐 Hunding 참호선에 돌파구를 형성한 뒤 침투함으로써 독일군은 Hunding 참호선을 포기했으며, 10월 27일에는 영국군이 독일군의 대반격을 격퇴하는데 성공하고 역습하여 사실상 다수의 독일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10월 중후반에 들어서면서 독일군이 심혈을 기울여 건설한 힌덴부르크 참호 네트워크는 곳곳에 구멍이 뚫리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협상군 항공대가 꾸준히 프로파간다 선전문을 하늘에서 뿌려대면서 독일군의 의지를 저하시키고 있었으며, 독일군 수뇌부에서도 상황이 매우 나쁘게 흘러가고 있었다. 곳곳에 파업을 하는 독일군 병사들이 속출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와중에도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정신병 문제로 의사에게 진료를 받으며 상황이 나쁘지 않다고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10월 후반에 독일군은 이미 대포 4,000문 이상을 잃었으며, 협상군에게 잡힌 독일군 포로가 250,000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이 막대한 손실은 한차례 더 퇴각하게 된다면 또 발생할 예정이었다.
4.8. ~11월 11일: 힌덴부르크 선 붕괴
10월 중후반에 공격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페르디낭 포슈는 공세 전략 지시문을 다시 한번 갱신했다.(1) 플랑드르 집단군은 브뤼셀 지역으로 진격한다.
(2) 영국 제 1,3,4군은 모뵈주 지역으로 진격한 뒤 아르덴 숲으로 독일군을 몰아낸다.
(3) 영국 제 4군의 우익과 프랑스 제 1군은 이르종(Hirson) 지역으로 진격한다.
(4) 미프연합군은 메지에르 지역으로 진격한다.
미프연합군 부분만 제외한다면 지시문은 2번째로 갱신되었다. 이제 프랑스 영토는 거의 수복이 끝나가는 단계였으며, 벨기에 지역으로 들어서는 협상군 병사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독일군의 마지막 희망인 힌덴부르크 참호 네트워크는 이미 후방이 뚫리기 시작함으로써 사실상 독일군의 희망은 진정한 의미에서 끝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루덴도르프는 휘하 지휘관들에게 천천히 퇴각하라고 하여 그들을 경악하게 만드는 한편, 독일 내부에서도 큰 변화가 불어왔으며, 10월 28일에는 루덴도르프가 카이저 빌헬름 2세에게 자신의 정신병 증상을 이유로 사임을 요청하였으며, 빌헬름 2세는 수락했다.
11월 1일, 점진적으로 북상하던 미프연합군은 한차례 돌파전에 성공함으로써 중요한 목표지점이었던 메지에르 지역으로 향하는 길을 활짝 여는 데 성공하였다. 특히 미군의 참호전 에 대한 경험치가 쌓이고 프랑스군이 손실을 우려하여 더 차근차근 진격하면서 미군이 프랑스군과의 격차를 급속도로 따라잡으며 독일군을 밀어내고 있었다. 이에 대해 포슈는 페탱에게 왜 기동전을 안하고 천천히 진격하냐며 비판하였으나, 프랑스군의 운용에 있어서만큼은 포슈의 권한보다 페탱의 권한이 더 컸기에 페탱의 결정을 꺾기가 어려웠다. 결국 미군이 수차례의 돌파전으로 독일군의 예봉을 박살내며 빠르게 진격하는 동안 프랑스 제 4군은 차근차근 진격하였다.
결국, 11월 5일이 되자 독일군 수뇌부에서는 전선을 더이상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독일군 라인을 다시 한번 후퇴시켰다. 독일군은 힌덴부르크 선에서 나와 후방에 건설 중이던 안트베르펀- 뫼즈 강 참호선으로 물러났는데, 당시 안트베르펀-뫼즈 강 참호선은 미완성된 참호선이었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힌덴부르크 선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의미가 되겠다. 그리고 그 날에 독일측에서는 스위스를 경유하여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과 협상을 시도하였으며, 윌슨은 단호하게 항복을 주장하였다. 그러자 더욱 불리해지던 독일 측에서는 11월 7일에 페르디낭 포슈를 만나 휴전 관련 협상을 벌였다.
그러다 1918년 11월 11일 오전 5시 15분에 콩피에뉴(Compiegne) 지역에 있던 한 열차칸에서 휴전이 성사됨으로써 지옥같았던 서부전선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11월 11일이면 미프연합군이 메지에르-스당 지역에 도달한 상황이었으며, 당시 메지에르 지역은 독일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철도망이 있던 지역이었으므로, 이 지역을 빼앗긴다면 독일은 사실상 26년 뒤 아르덴 대공세 직후 나치 독일처럼 끝장난 거나 다름없었다. 겨울에 공세가 좀 둔화된다 치더라도 어차피 다음해에는 본토가 전쟁터가 되고 병력도 바닥나 결국 항복을 해야 할 판이었고, 그러기 전에 그나마 최악은 피하고자 협상의 여지를 남기는 형태로 전쟁을 끝냈던 것이다.
5. 결과
콩피에뉴 휴전 협정 |
11월 11일에 휴전이 성사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물론 휴전이 성사됐다고 바로 전쟁이 끝난 게 아니라, 휴전 체결 다음날부터 발효하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그날 자정까지 전투가 계속되고 독일이 휴전 이후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지분을 확보할 심산으로 악착같이 저항하여 양측 모두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동유럽 쪽에서는 계속 전쟁이 벌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최대 후원자인 러시아가 빠진 이상 애초에 이 지역의 주도권은 독일이 쥐고 있었으므로 의미가 없었고, 일단 가장 큰 전장은 종결되었음이 분명하다. 전쟁이 휴전으로 종결된 이유는 약간 복잡했는데, 우선, 휴전을 거부하고 전쟁을 지속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엄연히 있었으며,[6] 실제로 상당한 손실로 인해 저항력이 극도로 떨어져 다음해쯤 되면 무너질 게 분명했던 독일군과는 달리 협상군은 손실을 꽤 입어도 지속적으로 오는 미군으로 어느 정도 보강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점, 그리고 협상국의 막대한 군수 생산[7]과 미국의 든든한 지원이 있기에 독일 제국이 굳이 발악한다면 전쟁이 더 길어져도 독일 제국 본토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협상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는 독일 측에서 협상국의 항복 조건을 모두 수용한다면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는데, 왜냐하면 프랑스가 워낙 피폐해져 독일과 크게 다를 게 없는 상황인데다[8] 미국의 지분율 확대를 경계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지분율 확대는 포슈뿐만 아니라 조르주 클레망소와 필리프 페탱도 경계하는 부분이었다. 잘 생각해보면, 프랑스 입장에선 피를 상당히 흘리고 승리했는데 미국이 지분율 많이 확대하는 바람에 이겨놓고도 목소리를 크게 못내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 백일 공세 후반에 프랑스의 지분율과 비중은 떨어지고 있었으며, 영국은 지분율을 간신히 유지하는 상황인 반면 미국은 지분율이 급격히 올라가고 있었다. 따라서 포슈는 독일의 휴전을 받아주는 대신 외교를 통해 철저히 약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애초에 영국과 프랑스, 미국은 공공의 적인 독일을 상대하기 위한 전략적인 동맹이었지, 혈맹같은게 아니었다.[9] 그래서 1차 세계 대전을 살펴보면 영국과 프랑스가 여러차례 지분율을 두고 얼굴을 붉힌 사례가 있었으며, 미국원정군 총사령관 존 조지프 퍼싱은 영프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미군을 구성하려고 노력을 한 것만 봐도[10] 협상국 내에서 지분율 문제가 웃어넘길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외교적 차이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이어지게 된다.
5.1. 독일 제국군은 그저 배후중상설 때문에 무너진걸까?
정확히 말하자면 독일 제국의 패배를 배후중상설로만 돌리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배후중상설의 주요 근거가 바로 협상국이 독일 제국 본토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이유인데, 협상국이 못 들어간게 아니라 안 들어간 거다. 협상국이 아예 말살전으로 나왔다면, 독일 제국이 항복 안하고 버틸 경우 당연히 독일 제국 본토로 밀고 들어갔다.독일 제국의 항복 원인은 여러가지인데, 일단 기본적으로 서부전선에서 간신히 라인 유지하면서 후퇴하고 있는 상황인데, 거기에 발칸 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이 뚫리면서 불가리아 왕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항복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불가리아와 오헝제국의 항복으로 협상군 전력이 독일 남부 지역에도 출몰하게 되었으며, 일단 방어에는 성공했으나 이는 안 그래도 서부전선도 못막고 밀려나던 독일군에게 있어서 또다른 부담으로 다가왔음이 분명하다. 거기다 아직까지 유효한 영국의 해상 봉쇄와 이로인한 독일 내부의 궁핍한 사정, 덕분에 독일 제국 내부에서 반란과 항명이 잇따랐던 것도 원인이었다.
1차 세계 대전의 양상을 보면, 협상국[11]은 발칸 전선에 생각보다 많은 관심을 쏟았는데, 왜냐하면 발칸 전선에서 오스트리아와 독일 제국 남부를 공략할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제국 남부는 "부드러운 뱃살"이라고 불릴 정도로 방비가 허약한 지역이었다. 독일 제국의 약점인 독일 남부 지역은 오스트리아와 불가리아의 도움으로 인해 안전한 상황이었는데, 그 둘이 무너지면서 도루묵이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협상국의 전력을 어느 정도 분산할 수 있었던 오스만 제국 역시 10월에 결국 휴전해버리면서 전선을 이탈했다.
게다가 서부전선에서도 독일군은 이미 여러 차례 패배하고 있었다. 포슈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협상군의 파상 공세 전략은 독일군을 포위섬멸하지는 못해도 그에 걸맞은 상당한 출혈을 강요하고 있었는데, 8월 8일부터 11월 11일까지의 대규모 공세에서 협상군은 무려 포로 385,500명과 대포 6,615문을 노획하는데 성공하였다. 춘계 공세에서도 독일군의 총 손실 숫자는 백일 공세 때보다 조금 적은 수준으로 보이지만, 춘계 공세 때와 달리 백일 공세에서는 포로와 노획당한 대포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것이 문제였으며, 잃어버린 기관총 숫자까지 합친다면 예상도 못할 정도의 손실을 입었음이 분명하다. 1차 세계 대전의 핵심인 대포를 저렇게 잃은 것도 모자라 40만에 육박하는 포로가 발생한 독일군의 저항력은 극도로 약화되었음이 분명하다.
5.2. 페르디낭 포슈의 뛰어난 전략적 안목
백일 공세에 있어서 협상군 총사령관인 페르디낭 포슈의 전반적인 큰그림과 공격 컨셉은 당시 참호전을 풀어나갈 열쇠로 작용되었음은 분명했다. 페르디낭 포슈는 지난 4년간 피를 흘리며 쌓아온 모든 노하우들과 현대화된 연합군을 총 집결시킨 대규모 파상 공세를 펼쳤다.포슈는 협상국 수장들과의 회의에서 자신의 공세 전략을 몸짓으로 표현했는데, "오른쪽 펀치, 왼쪽 펀치, 다시 오른쪽 펀치, 그리고 강력한 킥!"으로 요약되는 이 몸짓은 향후 펼쳐보일 강력한 파상 공세를 아주 잘 암시한 행동이었다. 1차 세계 대전 후반에는 넓게 공격하는 방식이 저물고 깊게 공격하는 방식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었는데, 후티어 전술의 독일군은 물론 프랑스군과 영국군 모두 병력을 깊게 배치하여 깊숙히 찔러 들어가는 한편 로테이션이 용이하게 이루어지도록 배치를 구성하고 있었다. 각종 신기술들[12]의 발전과 응용으로 인해 공격은 더욱 세련되었으며, 전쟁 초기와 달리 후기에서는 참호를 뚫는 경우가 훨씬 비일비재했다.
이러한 돌파력의 상향에 힘입어, 포슈는 전선 여러곳에서 병력의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깊숙히 전선을 뚫고 들어가는 파상 공세 전략을 선보였다. 이는 독일군이 전선을 메우기도 전에 쉴새없이 찔러들어가고 압박하는 방식이었으며, 곳곳에서 전선이 뚫린 독일군은 후방이 노출되어 온갖 불리한 시뮬레이션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좋든 싫든 전선 전체를 뒤로 빼는 수 밖에 없었다. 독일군이 전선을 빼는 과정에서 성급한 퇴각으로 인해 상당한 포로와 버려진 장비들이 발생하였으며,[13] 더불어 독일군이 장악하고 있던 프랑스/벨기에 땅도 조금씩 토해내면서 협상 카드를 잃어가고 있었다.
특히, 전선 여러곳에서 찔러 들어갈 때 보면 주로 철도 교차로와 같은 주요 교통 요충지를 찔렀으며, 더불어 협상군의 폭격까지 겹치면서 독일군의 교통망이 극도로 마비되었다는 점도 퇴각전에서 상당한 손실을 유도하게 해주었다. 실제로 영프연합군의 폭격기는 독일군의 철로와 퇴각하는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폭격했다.
포슈는 과거 로베르 니벨이나 독일군이 사용했던 전략적 돌파[14]가 당시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15] 더불어 넓은 전선에 걸쳐 균등한 병력으로 밀고 들어가는 산개전 또한 효율이 상당히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 둘의 단점을 상쇄한 파상 공세 전략으로 독일군의 피를 무자비하게 뽑아낸 것이다.
물론, 백일 공세의 공이 모두 페르디낭 포슈의 공은 아니다. 수많은 유능한 야전 사령관들과 포슈를 정치적으로 보호해준 조르주 클레망소, 그리고 미국의 비전투물자 지원과 영국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프랑스만의 힘으로는 실행 불가능한 공세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가장 최선의 공세 전략으로 독일군을 무너뜨리는데 크게 일조한 포슈의 전략적 안목이 배후중상설과 미국의 도움이라는 이유로 부정되어서는 안된다.
6. 영향
이 전투의 결과로 독일에선 킬 군항의 반란이 벌어짐과 동시에 독일 11월 혁명이 발발해서 협상국들에게 휴전을 타전하게 된다. 그러나 휴전 이후 맺어진 베르사유 조약이 수 많은 독일인들을 분노케해 훗날 또다른 전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기갑-보병-포병-항공 등 전 병과의 유기적인 조화가 보였기에 현대 기동전의 시초가 되는 전투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7.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미국의 더 로스트 바탈리언(The lost battalion)이라는 2001년작 전쟁 영화에서,9월부터 벌어진 뫼즈-아르곤 공세를 다룬다.당시에 찰스 휘틀시(Charles W. Whittlesey) 소령이 이끄는 미군 77보병사단 소속 308대대가 뫼즈-아르곤 공세 중,홀로 독일군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가 버티는 내용이다.총 554명의 대대원이 참전하여 107명 전사,63명 실종,190명이 부상당했고,승리했다.덕분에 휘틀시 소령은 공훈을 인정받아 의회명예훈장을 수훈했다.
영국 BBC3에서는 2014년, 제1차 세계 대전 100주년을 기념한 3부작 드라마 "아워 월드 워(Our World War)"를 방영하였고, 3화에서는 전차부대의 아미앵 전투를 다루었다. #
배틀필드 1의 오퍼레이션 "지옥을 정복하라(Conquer Hell)"가 백일 공세 중의 미합중국 육군 제 1군과 독일군 간의 접전이었던 뫼즈-아르곤 전투를 다루고 있다.
[1]
포로 38만 5,000명 포함. 그 중에 장교는 7,990명이었다.
[2]
후티어 전술과 상당히 유사하다. 정확히는 후티어 전술은 독일군 특유의 전술이 아니며, 후티어 전술을 최초로 시행했던 건 초기 독일이 벨기에와 프랑스 일부를 점령하고 수비로 태세 전환하자 실지 회복을 위해서 공세에 나선 프랑스군에서 시행됐다. 돌격대로 유명한 스톰트루퍼처럼 프랑스에도 느투아예흐 드 트랑시라고 불리는 참호 청소병이 있었다.)
[3]
그나마 독일군이 압도적인 물량의 미군에 비해 유리한 것이 딱 하나 있긴 했는데, 바로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쌓은 실전경험이었다. 이것 덕분에 그나마 저항은 벌일 수 있었다.
[4]
공격자인 미군의 입장에서는 사망자만 아니면 후송해서 치료해서 복귀시키거나 못해도 제대시켜 집으로 보내줄 수 있다. 흘린 장비나 물자도 회수 가능. 하지만 방어가 실패해서 후퇴한다면 호송하지 못하는 부상자는 그대로 포로가 되어 복구 불가능한 손실이다. 대포같은 중장비도 고스란히 손실. 7천명이 사망자인지 부상자인지 알 수는 없지만 공격자가 명백히 불리한 참호전에서 7천명 손실로 포로 6천명+사상자를 안겼으면 확실히 미군 측의 대승이다.
[5]
당시 영국 제 4군이 공격할 지크프리트 선이 너무 강력해서 공략하기 까다롭다고 판단, 헤이그는 먼저 다른 전선의 연합군이 어그로를 끌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6]
샤를 망쟁,
존 조지프 퍼싱,
필리프 페탱이 대표적이다.
[7]
대표적으로 프랑스는
FT-17 경전차를 10,000대 이상을 주문한 상황이었으며, 당장 보유한 전차만 해도 3,000대가 넘고 미국 본토에서도 르노 경전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8]
프랑스의 농업 생산력이 뛰어난데다 미국의 경제적 지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량난을 겨우 면했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못했다. 만일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프랑스가 진작에 먼저
순무의 겨울을 맞았을 것이 틀림없고, 영국 역시 프랑스 전선에 병력이 계속 빨려들어가면서 내부적으로 전쟁에 대한 반발여론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그래서 독일도 서부전선에서 언젠가는 이길 거라는 믿음으로 전쟁을 수년간 끌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걸 뒤집은 게 미국의 참전이었다.
[9]
미국, 영국, 프랑스는 제국주의 열강답게 서로가 식민지를 놓고 다투던 경쟁 국가였다. 더군더나 불과 100년전엔 영국 육군과 해병대를 영국 해군이 실어날라 미국 백악관과 수도를 불태운 바 있다. 심지어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전간기에 작성한
색부호 전쟁 계획에서 대서양과 아메리카 대륙의 주도권을 두고 벌어질 지도 모를 영국과의 전쟁은 가장 심도 있고 세심하게 기획되어 있었다. 물론 영국과 프랑스가 이후 미국을 견제하지 않게 된건 사실이다. 전후 복구와 대공황으로 인해 내부 수습에 급급해졌고, 복구 좀 하자마자 터진 2차대전과 식민지 해체로 나라가 결딴나버렸기 때문. 그 다음엔 어딘가 어설펐던 러시아 제국과는 비교를 거부하는 공산국가 소련의 위협에 직접적으로 시달리면서 안했다기보다는 못했다고 보는 게 맞다.
[10]
결국
2차대전 때는 독립적인 미군이 문제가 아니라 미군이 오히려 총사령부를 맡게 된다.
[11]
특히
영국.
[12]
전차, 차량화 기동 포병, 항공기, 독가스, 화염방사기, 참호 박격포, 경기관총 등
[13]
실제로 10월 말에 협상군이 노획한 독일군 포로가 250,000명, 대포가 4,000문을 조금 넘는 정도였는데, 11월 5일에 독일군이 대퇴각을 벌이고 11월 11일에 보면 총 노획한 독일군 포로가 385,000명, 대포가 6,615문으로 수치가 대폭 올라갔다는 것이 보인다. 즉, 독일군이 한차례 대퇴각전을 거칠 때마다 상당한 손실이 발생했다는 뜻.
[14]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스 침공에서
나치 독일군이 쓴 방식과 비슷하다.
[15]
니벨 공세와
춘계 공세에서 봐도 전략적으로 실패한 싸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