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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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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 정도 백미 현미
품종 범주 자포니카 인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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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4호 555호 556호
해양조사연보 통일벼 유물 전기로

1. 개요2. 배경3. 문제점4. 정부 정책5. 결과6. 쇠퇴7. 기타8. 관련 문서

1. 개요

1970년대 대한민국에서 개발된 품종. 통일벼라고도 한다.

1960년대 당시 한국은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식량사정이 나빴다. 지금도 세계적으로는 식량사정이 좋지 못한 나라들이 많은데, 1961년 한국의 GDP는 세계 64위[1]에 불과했다. 하루 세 끼를 먹는다는 걸 저소득층도 아닌 일반 서민조차 상상하지도 못하던 가난한 나라[2]였다. 그런 연유로 박정희 대통령이 식량난 및 식량자급 문제를 해결하라고 농촌진흥청에 지시를 내렸고, 결국 '잘 자라는 을 만들면 된다'는 결론에 이르러 서울대학교의 생물학자 허문회 교수의 주도로 홍성호 연구사[3], 김광호 연구사, 박순직 연구사[4] 3명의 밤낮 없는 연구와 노동을 통해 인디카종(장립종) 쌀과 자포니카종(단립종) 쌀을 교배해서 새로이 만들어낸 벼 품종이 바로 통일미다.

2. 배경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 베이비붐으로 인구는 매년 3%씩 크게 늘어나는 데 반해 주식인 생산량은 답보를 거듭하면서 쌀 부족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졌다. 따라서 '잘 자라는 쌀을 만들면 된다.'는 것밖에는 방도가 없어서 신품종 개발을 시작했다. 이마저도 순탄치 않았는데, 중앙정보부 이집트에서[5] 나다(Nahada)라는 볍씨를 비공식적으로(…) 가져와 농촌진흥청에 건네주었다. 이때 이집트는 종자 반출을 금지했기 때문에, 당시 중앙정보부가 개입해서 종자를 ' 밀수' 했다.[6] 1965년 시험 재배한 결과, 기존의 보다 30% 이상이나 수확이 커서 '기적의 볍씨'로 소개된 적이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자신을 제2의 문익점이라고 으쓱이며 다녔다고.[7] 박정희 대통령은 이 볍씨게 큰 기대를 걸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희농 1호'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그러나 농촌진흥청이라는 곡물 성장에 필요한 환경 통제가 가능한 장소에서 키웠을 때는 저런 결과가 나왔지만, 막상 1967년 일반 농가에 보급되고 나니 씨받이조차 어려울 정도로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희농 1호는 근본적으로 '열대 지방에 맞는 자포니카형'[8] 품종이었으므로 선선한 가을이 있는 한국 기후와는 맞을 리가 없었다.

결국 필리핀을 시작으로 전 세계를 휩쓴 녹색혁명의 일환으로 필리핀에 본부를 둔 국제미작연구소에서 개발한 '기적의 쌀' IR-8을 들여와 연구한 결과 1970년대초 통일벼 계통의 신품종 육성에 성공하여 미곡증산의 커다란 실적을 올렸다.

이 인디카/자포니카 잡종은 사실 일본에서도 과거 개발하려고 했던 전적이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실패하고, 인디카/자포니카 잡종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허 교수는 이때 일본에서 나온 논문들을 구해다가 읽어보고 연구한 끝에 개발에 성공했다고 한다.

통일벼의 개발은 학문적으로도 세계 육종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일본 농학자들이 1920년대에 벼를 인디카 자포니카라는 2갈래로 분류한 이래, 두 아종(亞種)을 교배하면 불임이 된다는 것은 농학계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IRRI에서 개발한 키 작은 다수확 인디카 품종을 한국에 도입하는 방법을 고민하던 허문회는 인디카와 자포니카를 우선 교배한 뒤 그것을 다시 다른 인디카 품종과 교배하여 안정된 품종을 만드는 전략을 시도했다. 인디카와 자포니카를 교배해 얻은 종자는 마치 노새와 같이 씨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중 일부 불임이 아닌 종자를 다시 인디카와 교배하여 번식력을 회복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 결과 1966년 봄에는 IRRI의 유명 품종들과 비슷하게 키는 작고 이삭이 크지만 온대 기후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통일벼를 개발해 내는 데 성공했다. 허문회가 IRRI에서 난쟁이 자포니카를 교배하고자 했을 때에도 연구소의 일본인 동료들은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허문회는 포기하지 않고 수백 가지의 서로 다른 교배 조합을 시험한 결과 전 세계의 벼 육종가들이 경악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이렇게 수백 가지의 교배 조합을 만드는 과정에서 줄기의 길이를 결정하는 유전자의 위치를 확인함으로써 벼의 유전 연구에 이정표를 세웠다. 어떻게든 생산량 좋은 쌀을 만들고자 했던 열정이 여러 의외의 성과들을 많이 발굴해낸 것.

농촌진흥청장에 취임한 김인환은 허문회가 개발한 품종을 적극적으로 육성할 것을 지시했고, 그 결과 1970년 말에는 유망 개체들이 엄선되어 통일이라는 품종명을 받고 농가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통일벼는 기존의 자포니카 품종들과 비교할 때 평균 30% 이상 높은 수확량을 올려 당국자들을 들뜨게 했다. 특히 박정희는 통일벼가 찰기가 없어 인기가 없다는 비판을 의식한 듯, 무기명으로 이루어진 국무위원 시식회에서 일부러 자신의 이름을 적고 맛이 좋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서둘러 보급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불거져 나오기도 했지만,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통일벼는 1973년부터 재배 면적을 급속도로 늘려 나갔다. 1970년대 중반이면 통일벼는 물론 통일벼를 바탕으로 그 형질을 개량한 후계 품종들이 여럿 선을 보였다. “유신”, “조생통일”, “통일찰”, “밀양21호”, “밀양23호” 등이 다양한 지형과 기후에 맞춰 개발되어 1977년 무렵이면 전국 의 대부분이 통일형 품종으로 채워지기에 이르렀다. 1977년에 정부는 “녹색혁명 성취”를 선언하고, 쌀의 생산량이 국내 수요를 초과하여 해외에 수출도 하게 되었음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3. 문제점

그렇게 만들어진 통일미는 인디카종과 자포니카종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양새와 성질은 자포니카종이지만 생산량은 인디카종 못지 않게 높았다. 실제로 지금껏 재배하던 쌀을 모두 통일미로 바꾸니까 생산량은 무려 40%나 늘어났기에, 현대 한국의 식량난을 해결해준 고마운 품종이었다.

하지만 인디카종의 특성이 섞여 있는 탓에 미질(米質)에 문제가 있었다. 바로 맛이 거의 인디카종이었다. 한중일 동북아 지역에서 주로 먹는 자포니카종의 맛이 아니었기 때문에 흔한 일반미 아키바레(秋晴, 추청벼)와는 완전히 다른 맛이 나서 인기가 그만큼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농촌에서는 “ 보리밥 맛이 통일쌀보다 낫다.” 하는 유행어가 돌았을 정도로 통일벼의 미질은 크게 낮았다.[9]

그래서 농민들은 통일벼가 처음 농촌에 들어왔을 때 냉담했다. 사실 농민들의 통일벼 외면에는 이런 점 외에도 여러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시험재배를 거쳐 1972년 전국으로 확대 보급된 통일벼가 정부의 기대와 달리 일부 지역에서 심각한 실패를 기록한 데다, 오랫동안 속고만 살아온 농민들이 정부 정책을 불신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맛뿐만 아니라 통일벼가 지닌 단점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통일벼는 아무리 한국 온대기후에서 클 수 있게 개량했다지만 여전히 냉해에 약한 편이라 물못자리가 아니라 비닐터널이 필요해 자재비가 그만큼 상승했고, 생육기간이 긴 만생종인 특성상 일찍 심어야 하기 때문에 보리 이모작도 거의 불가능했고, 볏짚이 짧고 맥살이 없어서 당시 농민 기준으로 농한기의 부수입원이었던 가마니 새끼줄을 꼴 수도 없었다. 이는 이문구의 소설 '우리 동네 리 씨'에도 나와 있다. 해당 내용은 다음과 같다.
리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농촌 지도소 강사들이 그들에게 백일기도를 드린다 해도 신품종으로 바꿀 사람은 대농 몇 사람에 불과하리라고 그는 믿었다.
리가 알기에도 그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관리자들에게 오랫동안 무시당하고 속아 살아왔으므로, 이제는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믿으려 하지 않는 거였다. 낮은 정치, 높은 행정, 도시 경제가 속이고, 심지어는 가장 정직해야 할 학교 교육마저도 그들을 속였으니까. 게다가 그들은 모두 빚을 지고 있었다. 그들은 대개 시세가 수시로 변하는 쌀을 얻어 썼으므로, 갚을 때에도 현물로 갚아야만 유리한 거였다. 얻어 쓴 쌀은 계 쌀과 마찬가지로 진작 품질 좋기로 이름난 아키바레 쌀이었다. 따라서 같은 품질의 쌀로 갚지 않으면 안 되도록 되어 있었다. 농민들이 통일 계통의 벼를 꺼리는 이유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면역성이 약해 병충해가 빈발하는 것도 큰 흠이었지만, 볏짚이 짧고 맥살이 없어 가마니나 새끼를 꼬지 못하므로 고공품 생산에 의한 농한기의 유일한 부수입이 없어지던 것이다.
소가 싫어하니 여물로도 쓸 수 없고, 천상 군불 때어 재나 받든가 그냥 퇴비감으로 쌓아두고 썩히는 수밖에 없던 것이다.

녹색혁명 유전자라 불리는 sd1 유전자는 키를 작게 만들며 분얼의 수를 증가시켜 함께 이삭의 수를 증가시켰다. sd1 유전자를 벼 육종에 이용하기 전까지 재배하던 벼 품종들은 큰 단점이 있었다. 생산량의 증가를 위해 비료를 주면 줄기가 과도하게 길어져 이삭이 익어감과 동시에 쓰러져 버리거나, 약한 태풍에도 견디지 못하고 논바닥에 쳐박혀 버리는 것이었다. (sd1 유전자를 품종 육성에 도입하기 이전에는 장마가 지나가면 사람이 논을 돌아다니며 쓰러진 벼들을 세우는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통일벼가 당시 품종들에 비해 3~40% 이상의 수확량 증가를 달성한 것은 sd1이 유도하는 단간(短稈, 짧은 볏짚) 특성이 크게 작용을 했다. 키가 작으니 당연히 줄기도 짧아서, 짚풀로 생필품을 만들던 당시에는 적지 않은 단점이었다.

통일벼 개발에 참여했던 농학자들은 처음부터 이런 문제들을 지적했지만 유신 시절 정부가 관심갖는 사업이었기에 당연히 다 묵살되었다.

4. 정부 정책

결국 아직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의 일차적 목표는 맛이 없더라도 충분히 먹이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질보다 양이 우선순위였던 정부에게 미질과 농민들의 고충 따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입장 차이 때문에 통일벼 재배를 둘러싸고 정부와 농민 사이에 힘 겨루기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래도 초기엔 각종 홍보와 선전으로 통일벼 키우기를 장려했지만, 통일벼 자체가 가진 문제로 큰 효과를 이끌어내지 못하자, 농민의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작전상황실까지 마련해 놓고 이른바 '통일벼 행정'을 실시했다. 집집마다 할당된 목표치가 정해졌고, 각 마을 회관에는 증산 목표량이 큼지막하게 나붙었다. 심지어 책임생산제를 시행해, 마을 회관 벽에 목표달성 그래프를 그린 벽보가 붙여지기까지 했다[10].

1973년부터는 다수확농가에 대한 시상이 실시되어, 쌀의 계약증산제도를 시행해 목표를 달성한 마을에 대해서는 30만 원부터 1백만 원까지[11] 시상금을 주는 등 상금을 걸고 군과 면에서 증산왕을 뽑았다. 가을이 되면 공무원들이 일일이 들판을 누비며 벼 알을 세고 단위 면적당 소출량을 파악했다. 통일벼 행정도 강화하여 공무원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농가를 돌며 통일벼를 재배하라고 강요해 들판에서는 공무원들과 농민들이 통일벼 재배를 놓고 논쟁과 몸싸움을 벌였다. 심지어 통일벼를 심지 않으면 면장이 직접 모판을 갈아엎거나, 볍씨 담근 통에 약을 쳐서 싹이 안 나게 하는 일들도 적지 않았다. 소설가 이문구의 작품 관촌수필에도 묘사가 나오며, 당대 농업에 종사했거나 관련된 사람들의 입에서 통일벼는 거의 무조건 나오는 편이다. 당시 상황은 거의 전쟁에 가까울 정도였다고... 지금은 꿈도 꿀 수 없지만, 당시에는 농업 자체가 국가 주요산업이다 보니 농진청직원이 방문하면 이장부터 군수까지 다나와 인사하고 쌀 증산표를 보여주면서 굽신굽신했다고 하며, 공무원이 농민과 드잡이는 기본이고 주먹질까지 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담배와 함께 갑질이 유명했던 것이 통일벼다.

이 때문에 재래종 볍씨가 담긴 독을 안방에 앉히고 볍씨를 틔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공무원들의 등쌀에 못 이겨 통일벼가 전국적으로 심어졌다. 심지어 담당 공무원들이 강력한 상부지시를 따르기 위해 재배면적확보에 집착하다 보니 신품종 종자를 외상으로 공급해 수확기에 풍작을 이루지 못한 경우 종자대금을 받지 못하는 사례도 발생하는 등 통일벼 보급을 둘러싸고 심한 홍역을 앓았다.

이런 행정의 기억 때문에, 정부미[12]는 맛없다, 정부에서 보급하는 종자는 맛없는 품종이다, 맛있는 건 경기도에 보급하고 영호남에는 맛없는 걸 보급한다는 인식이 생겼다. 그래서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일본에서 종자를 직접 들여다 자기 논에 파종하는 농민들이 있었다. 후자에 대해서 농진청은 억울해했는데, 외국 품종을 들여오더라도 가장 먼저 수원의 시험장에서 재배하면서 한국 환경에 맞게 개량해 종자를 양산해야 했고, 그런 다음에 남부지방의 기후에 맞게 개량한 품종을 해당 지역에서 개발해야 했기 때문이다.

위 문단이 사실 그대로라고 하면,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영호남 농민들이 불평하는것도 당연한 일이다. 전라도, 경상도만 합해도 전체 쌀 생산량의 50%가 넘으며 # 충청남도까지 포함하면 77% 를 넘는다. 그런데 굳이 중부지방에 맞게 종자를 개량하느라 시일을 날려야 할 이유가 없고, 일본에서 잘 짓고 있는 쌀 품종 받아다 쓰면 남부지방일수록 기후가 적합하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수확이 가능하니까. 굳이 우선적으로 중부지방에 맞게 종자를 개량할 명분이 없다. 이 문제는 아마 농촌진흥청의 수원시험장이 일제강점기 설립된 이래 내려온 관성으로 추정된다. 2014년 농촌진흥청은 수원을 떠나 전주로 이전했으므로, 이것도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5. 결과

농촌에선 심한 반발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심었기 때문에 증산에는 성공했고, 1976년 기다리고 기다리던 자급에 성공했다. 수확량은 3,621만 석이었다. 자급 달성을 자축하기라도 하듯, 박정희 대통령은 이 해 11월 쌀 소비 억제 정책의 키워드와 다름 없었던 무미일을 폐지했다.(1석을 144kg으로 잡으면 얼추 521만t의 수확량이다)

이후로도 풍년은 계속돼 1977년엔 쌀 생산량이 4천만 석을 돌파해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 다수확국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대풍을 기념하기 위해 대통령은 이 해 12월 4천만 석 돌파 기념탑을 세웠고, 농촌진흥청을 방문해서는 쌀 자급 달성의 기쁜 마음을 표현하기라도 하듯, '녹색혁명 성취'라는 휘호를 남겼다. 정부는 “녹색혁명 성취”를 선언하고, 쌀의 생산량이 국내 수요를 초과하여 해외에 수출도 하게 되었음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쌀이 남아돌자 박 대통령은 쌀 막걸리 제조를 금지한 지 14년 만인 1977년 12월 쌀 막걸리 제조를 허가했다. 쌀 막걸리의 등장은 그해 10대 뉴스에 포함될 만큼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한국인들은 쌀의 자급자족 성공으로 보릿고개 혼분식 장려 운동, 무미일, 절미운동 같은 단어들을 기억의 창고 속에 보관해 놓고, 가장 먼저 그동안 한이 맺혀 있던 흰 쌀밥을 배부르게 먹는 데 소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사람들이 배를 채우기 위해 먹을 수 있는 거라면 맛이 좋은지 나쁜지 따질 겨를도 없이 뭐든 먹어야 하는 시대였다 보니까, 통일미는 꾸준하게 재배되었다.

6. 쇠퇴

그러나 문제점에서 언급하다 시피 통일벼는 냉해에 상당히 약하다는 약점이 있었는데, 1980년 최악의 냉해로 통일벼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1980년은 쌀 생산량이 30% 감소한 역대 최악의 흉년이었다.(어느정도였냐면 한국이 농림부를 세운 1949년 이후 지금까지도 이정도의 생산량이 한꺼번에 감소한 해는 없었다.) 결국 1981년 통일벼 강제 정책이 폐기되었고 식량난이 대강 해결된 1980년대 후반때가 되자 맛이 없어서 통일미는 당연히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쌀 농사는 1977년 풍년 이후 1980년에는 냉해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1981년부터 1985년까지 해마다 풍년이 들어 쌀이 남아돌아 쌀 증산이 아닌 감산 요구가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1991년을 끝으로 통일미의 정부 수매도 종료되었다. 그리하여 현재는 더 이상 재배되지 않고 있다. 대신 농촌진흥청 산하 연구소 같은 곳에서 서산벼 등의 이름으로 종자를 따로 보관은 하는 듯하다.

식량안보목적의 다수확 품종 자체의 연구는 통일벼를 심지 않게 된 뒤로도 계속됐고 성과가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가 되면 식생활이 서구화되고 주식에서 쌀 비율이 줄어들면서, 쌀 자급은 했는데 식량수입 의존도가 오히려 올라가게 된다. 그래서 통일벼 강제정책이 폐기되자 통일벼는 1984년부터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2000년대부터 태국 요리, 베트남 요리 등이 본격적으로 유행하여 인디카쌀 수요가 조금씩 늘고 있지만, 어차피 의무수입 물량으로 커버 가능한 정도고 통일벼는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라 아웃 오브 안중.

또한 통일벼는 도열병 피해를 입기도 했는데, 이 병은 한 번 제대로 걸리면 그해 농사는 끝장인 대신 같은 벼도열병이라도 자신의 균주, 그러니까 특성에 따라 자신이 감염시킬 수 있는 벼의 품종이 달라지는 특징이 있다.[13] 여태껏 한국에서 토종 내지 일본 도입종들만 괴롭히고 놀던 토종 벼도열병 입장에서 전혀 새로운 유전자를 잔뜩 품고 나타난 통일벼는 굉장히 생소해서 쉽게 공략법을 찾을 수 없었고, 그렇게 몇 년 동안 병충해 없이 평화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 몇 년 동안 벼도열병 측에서 무수히 많은 돌연변이를 찍어낸 결과 일부 균주가 마침내 통일벼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데, 하필 통일벼들이 전 국토에 쫙 깔려 있었으니 한꺼번에 몽땅... 그래서 1978년 도열병 타격을 받았다.

이렇게 아주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정부는 이후 수십 가지의 품종을 지역별로 적당히 나누어 심도록 계도한다. 한 품종이 망하더라도 나머지 품종들은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하여 나라 전체의 농사가 망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7. 기타

  • 통일미는 한국이 품종을 개발하고, 보급, 사후관리하는 능력을 갖추고, 그런 인프라, 시스템을 어느정도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농업 환경이 훨씬 좋은데도 이런 인프라가 안되다 보니 한국보다 농업 생산 효율이 훨씬 떨어지고, 품종 개발과 인프라 개발을 외국에 의존하는 국가가 넘쳐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 통일미 이후에 통일미를 금세 손절할 수 있었던 것도 한국이 저런 인프라를 갖춘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 통일미 개발과 비슷한 시기 북한 김일성도 통일벼의 증산에 자극받아 단위면적당 생산량을 높이는 데 주력하여 1980년대 초반 이북도 한때 단위면적당 생산량에서 세계 최고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 성공에 지나치게 고취된 나머지 북한의 80년대 3대 실정을 낳았고 그 결과는 고난의 행군이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이야 소련붕괴로 농기계를 제대로 돌릴수없게 되고 비료생산량이 급락한것이 가장 크기는 했지만 말이다. 햇볕정책 당시에 한국에서 통일벼 종자 지원을 제안하자, 북한 측에서 "우리 쪽에서 슬쩍해서 키워봤는데 별로 안 자란다"고 말하면서 취소되었다고 한다. 사실 북한은 이미 남한에서 개발한 우량 종자를 훔치는 목적으로 간첩을 보냈다가 붙잡힌 전적이 있다. ( 최정남·강연정 부부간첩 사건) 통일미는 한때 전국에 쫙 깔렸던 데다가, 농촌 지역에서 상당 기간 애물단지 취급되다 보니 종자를 훔쳐가는 것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자라지 않은 이유야 북한은 위도가 더 높은 만큼 날씨도 평균적으로 더 추웠다.
  • 중국 역시 벼의 교잡으로 쌀 생산량을 높이려 했으며 이 분야에서는 위안룽핑(袁隆平)이라는 과학자가 유명하다.[14] 그리고 이쪽 교잡 벼도 맛이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물론 중국이야 자포니카와 인디카 둘다 소비하는 나라이고,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인디카로 만든 쌀밥과 자포니카로 만든 쌀밥을 둘다 먹으므로 인디카 종 맛이 난다고해도 큰 문제는 아니다.
  • 2012년에 포스코의 지원으로 마다가스카르에 시험 재배를 했는데, 생산량이 기존에 쓰던 종자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식 모내기 기법이나 농기구도 전파했다. 그 동네야 한국보다 따뜻하니 통일미의 단점인 냉해에 약하다는 점도 큰 문제가 아니고, 그 동네 사람들은 인디카 계통 쌀을 좋아해서[15] 밥맛 없다는 소리도 안 나온다고... 시험 재배 이후 종자 요청이 쇄도했다고 한다. 이 이후 농촌진흥청에서 '한-아프리카 농식품기술협력협의체'(KAFACI, Korea-Africa Food and Agriculture Cooperation Initiative)를 구성해 말라위, 말리 등에도 통일벼를 개량한 3개 품종이 등록되고 아프리카에도 국가품종시험 대상으로 확산되는 중. #[16]
  • 쌀을 주식으로 먹는 세네갈에도 현지에 맞게 개발한 벼 품종인 '이스리'(ISRIZ-6, ISRIZ-7)를 육성하는 데에 통일벼 계열 '밀양 23호'와'태백'이 모본으로 사용되었다. 현지에서 원래 재배되던 품종인 '사헬'보다 더 비싸게 팔린다. 농촌진흥청 블로그
  • 오십원화 뒷면에 있는 벼가 바로 통일벼다. 1972년 통일미 재배 성공으로 식량난을 해결한 것을 기리기 위해 새겨놓았던 것.
  • 통일벼의 아버지 허문회 교수는 2010년 83세로 별세하였는데, 고향인 충북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 선사유적 박물관 2층에 그를 기리는 전시실이 있다.
  • 재미있게도 1980년대 흉년 때, 잠시 수입한 미국 캘로즈(calrose) 쌀이 중립종이어서 단립종인 일반미보다는 통일미에 가까웠을 텐데도 그 나름대로 호평을 받아 ' 미국 쌀, 주한미군부대 쌀 맛있다.'는 소문이 났던 데다가 당시 부유층에서는 일부러 캘로즈를 사다먹기까지 했었다. 당시 KBS가 이 현상을 취재하고 내린 결론으로 캘로즈가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가 '당 코팅'이 되어 달달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는데, 정확히는 당시 미제에 대한 환상과 통일벼의 좋지 못한 미질로 인한 상대적 대조 때문이었다. 훗날 2006년 쌀수입으로 캘로즈가 수입되었을 때는 너무 안 팔려서 캘로즈 재고가 썩어나갈 정도였다...[17]

8. 관련 문서


[1] 당시 대부분의 식민지가 독립하지 않았음을 고려했을 때, 거의 꼴찌에 가까운 순위다. 몇년~10년 후에 독립하게 되는 식민지 경제를 개별국으로 따로 나누었다면 100위를 한참 넘었을 것이다. [2] 하루 두 끼만 배불리 먹어도 소원이 없겠다던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매일매일 먹는 하루 세 끼라는 개념이 1960년대 당시에는 부자의 상징이었다. [3] 전 중앙종묘(주) 대표이사 사장 [4]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농학과 교수 [5] 이집트에서도 쌀을 먹는다. 쿠샤리 참조. [6] 사실 중정만 이랬던 것이 아니고 세계 각국 정보기관들은 이런 일을 업으로 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스라엘의 모사드고 (이쪽은 종자 빼돌리기보다는 주로 기술을 유출시킨다), 북한 노동당 3X호실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7] 사실 이런 식으로 좋은 벼 종자를 대량재배하여 수확량을 늘리려는 정부 차원의 정책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문종 때 이징석이 50일 만에 수확이 가능한 벼를 보고하며, 백성들이 잘 쓰지 않아 종자가 적으니 나라 차원에서 보급에 나서자는 주장을 했고 문종도 이를 받아들였다. 세조 때에는 노삼이라는 사람이 당도종이라는 품종을 중국에서 들여와 세조에게 바쳤는데 이는 바닷가 근처에서도 재배할 수 있는 품종이었다고 한다. 다만 그 뒤 얘기는 없으므로 통일벼처럼 실패한 모양이다. [8] 이집트산이라고 꼭 인디카는 아니다. [9]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꾸준히 재배되던 재래벼들을 대신해 일본벼들을 도입하기 이전까지 한반도 벼는 인디카형, 열대자포니카형, 온대자포니카형, 심지어는 인도의 향미 바스마티와 같은 아로마틱형까지 다양했다. # 다만, 한국 전통 쌀 조리법이 전부 자포니카 기준이었고 인디카 기준이 아니라는 점을 보면 대다수가 자포니카였을 것이다. 한 마디로, 아프리카벼 빼고 다 도입을 해 본 것. [10] 박정희 시기 성공한 정책들은 절대다수가 시장경제의 발상에서는 나올 수 없는 정책들이었다. 이런 정책들의 원조는 이오시프 스탈린 시기 소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었고, 이걸 만주국 만철조사부에 소속된 공산주의-사회주의 성향의 경제학자들이 만주국에 맞게 최적화해서 만주국의 공업화를 성공시켰다. 그리고 이런 통제경제체제는 전후 일본 한국의 경제 관료들과 학자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11] 참고로 1973년 기준으로 30만 원 정도면 직급이나 지역, 직종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1년치 봉급 되는 금액이니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12] 정부미란 단어가 초기에는 통일미를 뜻했다. [13] 비유를 하자면, 셰퍼드와 진돗개는 분명히 같은 개이고 스코티시 폴드와 샴고양이는 분명히 같은 고양이지만 셰퍼드는 스코티시 폴드만 때릴 수 있고 진돗개는 샴고양이만 때릴 수 있다는 것이다. 뭔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분야에서는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14] 비교적 최근인 2021년 5월에 노환으로 사망하고 현지에서 대대적으로 언론을 타면서 한국에도 어느 정도 알려졌다. [15] 마다가스카르의 주 민족은 가까운 아프리카계 민족들이 아닌 동남아시아에서 인도양을 건너 도래한 민족들이다. 사실, 마다가스카르만 이런 게 아니라 아프리카의 적지 않은 수가 인디카나 아프리카쌀을 주로 먹는다. [16] KAFACI 회원국 : 한국, 앙골라, 카메룬, 코트디부아르, 콩고민주공화국, 에티오피아, 가나, 가봉, 케냐, 말라위, 모로코, 나이지리아, 세네갈, 수단, 튀니지, 우간다, 짐바브웨, 코모로, 르완다, 잠비아 = 도합 20개국(한국 + 아프리카 19개국). 가입 가능한 국가는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모든 국가이다. 한국은 창립국으로서 가입. [17] 사실 1970~80년대에도 적당히 돈 좀 있다던 사람들이나 캘로즈를 사다 먹었지, 진짜 부유층들은 아키바레(추청)만 찾아먹거나, 일본에서 알음알음 들여온 고시히카리 혹은 그에 뒤지지 않던 사사니시키 쌀만 찾아 먹었다. 결국 한국인의 입맛에는 이래저래 단립종이 맞는다는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