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메르 제국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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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 제국 ចក្រភពខ្មែ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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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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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년 자야바르만 7세 시기의 최대 강역 | |||||
802 ~ 1431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첸라 | 중세 캄보디아[2] | ||||
란쌍 왕국 | |||||
아유타야 왕국 | |||||
위치 | 캄보디아, 태국,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 ||||
수도 |
마헨드라파르바타(9세기 초) 하리하랄라야(9세기) 앙코르(9세기 후반~143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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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신권정치, 만달라 체제 | ||||
인구 | 500만 명(1200년) | ||||
국가 원수 | 국왕 | ||||
종교 |
힌두교 대승불교 상좌부 불교[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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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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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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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 |
크메르어 |
អង្គរ (앙코르) ខ្មែរ (크메르/크마에) កម្វុជទេឝ (캄부자데샤) |
산스크리트어 | कम्बुजदेश (캄부자데샤) |
한자 | 眞臘 (진랍), 吉蔑 (길멸)[4] |
영어 | Khmer Empi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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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802년부터 1431년까지 629년 동안 캄보디아에 존재한 제국.[5]사실상 캄보디아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대제국으로 한때는 대륙부 동남아시아 대부분과 심지어는 중국 남부 지방까지 직 • 간접적으로 지배했다. 북쪽으로는 중국의 윈난성, 서쪽으로는 미얀마, 동쪽으로는 베트남까지 닿았으며, 국력이 정점에 달했던 자야바르만 7세 시대에는 영토가 최대에 이르렀다.
현대인들에게는 캄보디아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앙코르와트를 건축한 국가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당시 크메르 제국의 수도였던 앙코르에는 앙코르와트를 포함하여 바이욘, 앙코르 톰 등 여러 장대한 건축물들을 지어졌으며 돌만 남은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모든 사원들이 황금과 꽃 등으로 장식되어 있어 대단히 아름다웠다. 크메르 제국의 전성기였던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는 캄보디아 예술과 문학이 꽃 피우면서 엄청난 문화 발전을 이룩했고, 당대 세계에서 가장 도시화가 많이 진행된 대도시이기도 했다. 앙코르의 전성기 인구는 무려 70만 ~ 90만 명이었다. 동시대 런던의 인구는 7만 명이었고, 로마는 3만 명,[6] 베이징의 인구가 70만 명에서 120만 명 사이였다. 바그다드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도를 제외하면 세계적으로도 압도적인 인구수를 가진 거대 도시였던 것이다.
크메르 제국은 800년대에 건국되어 300년 동안 서서히 성장했고, 1100년대와 1200년대 초반에 걸친 수리야바르만 2세와 자야바르만 7세의 치세 아래에서 꽤나 오랜 전성기를 누리며 동남아시아의 유일한 패권국으로 군림하기도 했다. 하지만 1200년대 후반에 들어 원나라의 침략을 받고 기세가 한 번 꺾이고야 말았고, 이후 수코타이 왕국과 아유타야 왕국 등 외세의 침략, 역병, 내전과 왕실 간 내분으로 끊임없이 무너졌다. 결국 태국계 아유타야 왕국에게 수도 앙코르가 몇 차례 함락되어 약탈당하자, 더이상 견디다 못해 1431년 더 방어가 용이한 프놈펜으로 천도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진다.[7]
2. 역사
2.1. 성립 이전
캄보디아 일대에 자리잡은 최초의 정치 세력은 인도-동남아계 왕국인 ' 프놈(부남) 왕국'이었다. 1세기 경부터 6세기까지 존속했고, 전성기 시절에는 중국과 인도에도 사절단을 보내는 등 무역을 활발히 했지만, 국력이 강하지는 못했고 어디까지나 소왕국과 도시들의 집합에 불과했다. 하나의 체계적인 국가를 이루어내는 데까지는 실패했다. 이후 6세기 경 프놈 왕국의 속국, 혹은 그에 속해 있던 소왕국들 중 하나였던 첸라 왕국[8]이 세력을 키워나갔다. 첸라 왕국의 국왕들 역시 옛 프놈 왕국의 전례를 본받아 인도네시아와 인도, 중국을 잇는 중계 무역에 열심이었고 힌두 문화를 중심으로 번영을 유지했다.하지만 첸라 왕국도 7세기 경부터 급격히 몰락했다. 한 비문에는 첸라가 인근 자바 섬의 해적들과 사일렌드라 왕국의 침략을 받아 쇠퇴했다고 하지만 학계에서는 첸라가 과연 외세의 공격으로 쓰러질 정도로 중앙집권화된 국가였는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첸라 왕국마저도 여전히 중앙집권화된 왕국이라기보다는 여러 번국들의 느슨한 연합체에 불과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첸라 왕국은 자야바르만 1세가 죽고 난 뒤 남자 후계자가 없자 자야데비 여왕이 통치하던 707년경 아예 수진랍과 육진랍으로 분열되었다.[9] 이후 수진랍이 사일렌드라로 추정되는 자바 섬의 왕국( 마타람 왕국)에 복속된다. 자바의 침공에 시달리다 못한 수진랍의 왕 마히파티바르만이 신하에게
"내 소원은 자바 왕의 머리를 잘라 내 앞의 쟁반에 놓는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신하는 말조심하시라고 충언을 했지만 교만했던 왕은 아예 신하들을 모아 놓고 자기 소원을 공표해버렸다. 결국 이 말은 자바 왕
산자야의 귀에까지 들어가버렸고, 이에 분노한 자바 왕은 군사를 훈련하고 배 1,000여 척을 모아 수진랍을 침공했다. 결국 수진랍은 패망했고 왕은 생포당했다. 이때 자바 왕은 수진랍을 약탈하지 않고, 오직 왕의 수급만을 교만의 대가로 받아갔다. 이때 잘린 목은 육진랍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2.2. 건국
크메르 제국의 역사는 790년 자바에 볼모로 잡혀 있었던 자야바르만 2세가 자바의 공주와 결혼하고, 자바 왕실의 신임을 얻어 자바의 대리인 자격으로 수진랍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되었다. 자야바르만 2세는 캄보디아 남동부 해안 지역에서 시작해 점점 북서쪽으로 뻗어나갔고, 결국 세력을 키워 분열되었던 영토를 통합해내기에 이르렀다. 790년에는 앙코르에 작은 소왕국을 세우고, 수도를 톤레삽 호수 인근의 마헨드라파르바타로 삼아 근거지를 마련했다. 이후에도 왕국의 세력 확장을 거듭하던 자야바르만 2세는 세력을 충분히 키운 802년 자바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며, 자신을 군주들을 지배하는 유일한 절대자라는 의미의 데바라자, 즉 신왕(神王)으로 선포하며 크메르 제국을 세웠다.[10]자야바르만 2세는 여러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크메르 제국의 정복 사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야바르만 2세는 수도를 마헨드라파르바타에서부터 하리하랄라야로 천도하며 변방 민족들에 대한 정복을 가속화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외치 확장에 신경을 쓰던 자야바르만 2세는 835년 세상을 떠났다. 자야바르만 2세의 뒤를 이어 신왕위에 오른 자야바르만 3세는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한 채 877년에 붕어했고,[11] 그의 뒤를 이어 인드라바르만 1세가 즉위했다. 877년 즈음에 즉위한 인드라바르만 1세는 외치와 동시에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당대 기준으로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거대한 수로를 짓는가하면[12] 선왕과 신들에게 화려한 사원들을 봉헌했다.[13] 이는 건설 사업을 통해 노동력을 이끌어내는 동시에 왕가의 위엄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인드라바르만 1세가 889년에 붕어하자, 그의 아들인 야소바르만 1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야소바르만 1세는 기존 수도인 하리하랄라야를 떠나 신도시이자 앙코르의 첫 번째 도시였던 야소다라푸라를 세워 천도했다. 야소바르만 1세가 굳이 수도를 옮긴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하리하랄라야는 이미 선왕들이 세운 사원들로 가득 포화된 상태로 더 이상 새로운 건물을 축조할 공간이 남아있지 않았고, 이는 새 왕들의 왕권 강화에 심각한 악재였던 탓이 컸다. 뿐만 아니라 야소다라푸라가 위치한 앙코르는 톤레삽 호수와 프놈 쿨렌 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씨엠립 강으로부터 빠르게 물산을 바로 바로 공급받을 수 있었다. 여러 모로 하리하랄라야보다 훨씬 매력적인 수도였던 셈이었다. 야소바르만 1세는 앙코르 한복판에 있던 60m의 언덕에 높다란 사원을 세웠고, 길이 7.1km x 1.7km의 거대한 저수지를 지어 물을 공급하기까지 했다.
야쇼바르만 1세가 붕어하자 하르샤바르만 1세가 새 왕이 되었다. 허나 하르샤바르만 1세의 치세는 상당히 혼란스러웠는데, 기껏해야 13년 정도 밖에 재위하지 못했고, 그의 뒤를 이은 동생 이샤나바르만 2세 역시 몇 년도 못가서 왕위의 불안정으로 쫒겨났다. 이샤나바르만 2세를 쫒아내고 새 왕으로 즉위한 인물은 인드라바르만 1세의 손자였던 자야바르만 4세라는 인물이었다. 서기 928년부터 941년까지 꽤나 오랜 기간 동안 크메르 제국을 통치했다. 자야바르만 4세의 최대 업적은 앙코르 북동쪽 100km 정도 떨어진 코 케 지방에 새 수도를 세워 천도한 것이다. 지금은 대부분이 무너져 폐허만이 남아있지만 당시에는 앙코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멋진 도시들 중 하나였다. 자야바르만 4세는 941년 경에 붕어했고, 그의 어린 아들이었던 하르샤바르만 2세가 잠시 왕위를 차지했지만 3년 만에 사촌인 라젠드라바르만 2세에게 왕위를 찬탈당해 쫒겨났다.
앙코르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들 중 하나로 꼽히는 반테이 스레이 사원. 현재는 씨엠립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라젠드라바르만 2세는 활발한 정복 군주였다. 그는 즉위 직후 앙코르로 수도를 재천도했고, 사원들을 신축하는 등 수도 재정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편 지방 영주들의 느슨한 조합에 불과했던 크메르 제국을 더욱 중앙집권화시키는 데 힘을 쏟아 국왕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려고 시도했으며, 950년 경에는 동쪽에 있는 최대 경쟁국인 참파와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968년 라젠드라바르만 2세가 붕어하자 그의 10살난 아들인 자야바르만 5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자야바르만 5세 치세의 크메르 제국은 번영을 이룩했다. 불교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평화를 중시하는 풍조가 널리 퍼졌고, 예술가들과 학자를 떠받들어주었던 덕이었다. 자야바르만 5세는 수도 서쪽 근교에 자옌드라나가리라는 이름의 궁전을 세워 거기서 머물렀고, 앙코르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 중 하나로 꼽히는 반테이 스레이 사원, 자신을 위해 세운 타 케오 사원[14] 등을 연달아 세우며 크메르 제국의 기틀을 닦았다.
40년 가까이 크메르 제국의 안정기를 이룩한 자야바르만 5세는 1001년에 붕어했다. 명군이었던 자야바르만 5세가 죽자 크메르 제국도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그가 죽자마자 3명의 후계자들이 동시에 왕위를 주장하면서 제국이 사실상의 내전 상태로 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수리야바르만 1세가 겨우 내전을 봉합하고 유일한 왕으로 즉위하면서 다시 안정을 찾았다. 1010년 크메르의 유일한 국왕으로 등극한 수리야바르만 1세는 저 먼 남인도의 촐라 제국과 외교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다. 당시 인근의 탐브랄링가 왕국[15]이 크메르 제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에 저먼 촐라 제국의 힘을 빌려서 탐브랄링가 왕국을 몰아내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크메르가 촐라와 접촉한 걸 깨달은 탐브랄링가는 반대로 스리위자야 제국의 힘을 빌려 크메르 제국을 견제하려 들었다. 결국 크메르-촐라 연합군과 탐브랄링가-스리위자야 연합군이 전쟁을 벌였고, 이 전쟁에서 크메르-촐라 연합군이 대승했다. 전쟁은 크메르 제국의 동남아 패권 장악으로 끝이 났다.[16]
수리야바르만 1세는 탐브랄링가 왕국과 스리위자야 제국을 몰아낸 이후에도 끊임없는 반란 징조에 시달리면서 40년 가량을 버텼다. 그렇게 수리야바르만 1세가 아슬아슬하게 버티다가 1050년에 붕어하자 그의 뒤를 이어 우다야디티야바르만 2세가 새 왕으로 즉위했다. 우다야디티야바르만 2세는 약 16년 간 재위했지만 바푸온 사원을 건설하고 반란을 한 번 진압한 걸 제외하면 별 업적은 못 남겼고, 1066년 그의 남동생이었던 하르샤바르만 3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하르샤바르만 3세와 그의 후계자였던 자야바르만 6세, 그리고 그 후계자인 다란인드라바르만 1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딱히 없다. 이 시기 참파와의 전쟁에다가 송나라와의 충돌, 그리고 내전 때문에 워낙 흉흉한 시절이라 제대로 남은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하르샤바르만 3세와 그 후계자들은 제대로 된 업적을 남기지도 못한 채 내전들을 진압하느라 진을 빼야만 했고, 이같은 혼란상은 명군인 수리야바르만 2세가 등장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2.3. 전성기
2.3.1. 수리야바르만 2세
크메르 제국은 12세기 동안 군소 왕국들에게 치이는 한편 내전에 시달리면서 상당히 어지러운 세월을 거쳐야만 했다. 이 난세의 한복판이었던 1113년에 즉위한 인물이 바로 그 유명한 수리야바르만 2세였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제국의 지방 통치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지방 거점에서 힘을 길렀고, 어느 정도 세력을 모으자 늙고 무능한 왕 다란인드라바르만 1세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끝끝내 1113년에 다란인드라바르만 1세를 몰아내고, 크메르 제국의 신왕으로 즉위했다.제국 재건의 원대한 꿈을 숨길 생각이 없었던 수리야바르만 2세는 즉위 직후부터 정복 활동에 매진했다. 하지만 수리야바르만 2세는 생각만큼 운이 좋지 못했다. 바로 인근의 참파와 베트남의 리 왕조가 상당한 세력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크메르 제국을 틈틈히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127년 수리야바르만 2세는 리 왕조의 신종에게 봉신국이 되어 조공을 바칠 걸 요구했지만 신종이 이를 거부하자 전쟁을 일으켰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1128년 20,000명의 대군과 700여 척의 대함대를 이끌고 리 왕조로 쳐들어갔다. 4년 후인 1132년에는 참파와 동맹을 맺어 힘이 약해진 대월을 한꺼번에 때리자는 협약을 체결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베트남에서 가장 풍요로운 성들 중 하나였던 응에안 성을 함락시키고 해안가를 약탈하는 성과를 올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베트남 북부를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리 왕조를 복속시키는 데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참파와 크메르 제국의 일시적인 동맹은 1138년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이후 참파가 독자적으로 리 왕조와 화해하고 평화조약을 맺자 크메르와 참파와의 관계도 바로 틀어졌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독자적으로 리 왕조를 공략하려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그 참에 안그래도 괘씸하던 참파에게 관심을 돌려버렸다. 의외로 참파에 대한 초기 원정은 술술 풀리는가 싶었는데, 1145년에는 공격 대상을 리 왕조에서 참파로 돌려 참파를 침공, 참파의 국왕이었던 자야 인드라바르만 3세를 죽이고, 수도 비자야를 약탈하는 성과를 거두기까지 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문제가 잘 풀리지 않았다. 자야 인드라바르만 3세가 죽은 직후 새로 즉위한 자야 하리바르만 1세가 죽을둥살둥 크메르 제국에게 반격하면서 크메르 군대가 참파 지방에 묶여버렸고, 수리야바르만 2세가 참파의 꼭두각시 왕으로 앉혀놓았던 하리데바 왕자가 자야 하리바르만 1세에게 탈탈 털리면서 참파 지방에 대한 영유권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것이다.[17] 수리야바르만 2세는 1150년까지 참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원정을 단행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갔다.
전성기 시절의 앙코르 와트 | 앙코르 와트에 새겨진 수리야바르만 2세의 부조. |
수리야바르만 2세는 참파에 대한 군사 원정 도중인 1150년 경에 붕어했다. 왕위는 다란인드라바르만 2세에게 계승되었지만 아무래도 다란인드라바르만 2세가 전임자만한 카리스마가 없다보니 크메르 제국은 잠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다란인드라바르만 2세가 별다른 업적도 못남기고 1160년에 붕어하자 그의 아들이었던 야소바르만 2세가 새 국왕이 되었지만 6년만에 부하에게 암살을 당해 세상을 떴다. 야소바르만 2세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트리부바나디티야바르만은 야소바르만 2세의 충성파들을 억누르고 간신히 제위를 유지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외세인 참파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내전으로 크메르가 흔들리는 틈을 타 참파가 크메르 제국을 침공해 1177년 트리부바나디티야바르만을 죽이고 수도를 약탈한 것이다.[18] 크메르 제국은 참파에게 수도 앙코르가 털리는 굴욕을 당하며 잠시 망하는가 싶었지만... 또다른 명군인 자야바르만 7세가 나타나면서 다시 중흥을 맞게 되었다.
2.3.2. 자야바르만 7세
자야바르만 7세의 궁정.
자야바르만 7세는 캄보디아 최고의 성군으로 꼽힐 정도로 위대한 군주였다. 참파 군대가 트리부바나디티야바르만을 죽이고 수도 야소다라푸라를 점령했을 당시 그는 이미 50대 중반의 나이였는데, 1178년 크메르인들을 이끌고 참파 군대를 야소다라푸라에서 몰아내면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참파 군대를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수도로 귀환한 자야바르만 7세는 수도의 파벌 싸움을 정리한 뒤 1181년 독자적으로 크메르 제국의 왕으로 즉위했고, 그 직후 참파의 재공격과 인근 소왕국들의 반란을 억누르면서 크메르 제국의 분열을 막는 데 최선을 다했다.
참파에게 수도 앙코르까지 빼앗겨본 기억을 잊지 않은 자야바르만 7세는 참파를 공격하는 데 진심이었다. 그는 1190년에 8년 전 크메르로 망명해온 참파 왕자 비드야난다라를 내세워 참파를 침공했다. 비드야난다라는 크메르의 도움을 받아 참파 군대를 격퇴하고, 수도 비자야를 함락하는 데까지 성공했으며 자야 인드라바르만 4세를 잡아 크메르로 압송해 끌고 왔다. 비드야난다라 왕자는 참파의 왕으로 즉위했지만 1년도 되지 않아 반란으로 비자야에서 쫒겨나 크메르로 도망쳐왔다. 격노한 자야바르만 7세는 다시 군대를 보내 비자야를 다시 한번 함락시키고 자야 인드라바르만 4세와 그 후계자인 자야 인드라바르만 5세를 죽여버렸으며 1203년에는 참파 북부 전체를 아예 크메르 제국의 속령으로 편입했다. 크메르 제국의 참파 통치는 1220년까지 지속되었지만, 이후 크메르 제국의 국력이 점점 약화되자 파라메스바라바르만 2세가 참파의 재독립을 선포하면서 결국 18년만에 종결된다.
어쨌든 자야바르만 7세의 치세 대부분 동안 참파는 크메르 제국의 속국이었다. 자야바르만 7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저 멀리 북쪽으로는 태국의 비엔티안, 남쪽으로는 크라 지협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현대 태국 + 라오스 + 캄보디아의 영토를 모두 합쳐놓은 것만한 거대한 영토의 제국을 이룩했던 것이다. 학자들은 이때를 크메르 제국의 최전성기라고 평가하며 실제로도 국력과 문화는 이때가 최고 정점이었다. 자야바르만 7세는 단순히 영토 뿐만 아니라 수많은 건설 프로젝트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전국 곳곳에 102개가 넘는 병원, 도로를 따라 만든 127개의 휴게소, 그리고 농업 생상력 증대에 필요한 저수지를 건설했으며 덕분에 유통 물산이 전국에 뚫리면서 크메르 제국의 인구 밀도는 급격히 높아졌다.
신비한 미소로 유명한 바이욘 사원이 이때 지어졌으며 아름다운 폐허로 유명한 타 프롬 사원, 폐허도시 앙코르 톰 등이 모두 자야바르만 7세 시절에 만들어졌다. 이 시절이 크메르 건축의 최고 전성기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 시기의 대표작인 바이욘 사원은 나라의 최고 중심이 되는 사원으로 무려 200여 개가 넘는 4면 인면상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크메르 건축의 정점을 찍었으며, 앙코르 톰의 경우 철저한 계획도시로서 이전 크메르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화려함으로 유명하다. 특히 1186년 자야바르만 7세의 모후를 위해 지어진 타 프롬 사원의 경우, 국사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는데, 전성기 시절에는 이 사원에만 18명의 대제사장과 615명의 여성 무희, 무려 80,000명이 넘는 유지 관리 인원이 배속되었을 정도였다. 거대한 나무 줄기가 폐허를 신비롭게 칭칭 휘감은 장면으로 유명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기도 하다.
크메르 제국의 최고 황금기를 이끌었던 자야바르만 7세는 1218년 경, 37년의 재위기간 끝에 붕어했다.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인드라바르만 2세는 별 업적 없이 124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나마 아버지를 닮아 불교도였던 인드라바르만 2세였기에 아버지가 미처 끝마치지 못한 불교 사원들을 모두 완공한 게 거의 유일한 업적일 정도이다. 하지만 군사적으로는 자야바르만 7세에 다다르지 못했기에 인드라바르만 2세 재위기의 크메르 제국은 1220년 경 대월의 견제를 받아 참파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했고, 서쪽에서는 속국으로 살던 태국인들이 봉기를 일으켜 수코타이 왕국을 건국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수코타이 왕국은 200년 넘게 크메르 제국의 국력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치열한 라이벌 경쟁전을 펼치게 된다.
2.4. 원나라의 침략과 쇠퇴
인드라바르만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자야바르만 8세는 불교도가 아닌 독실한 힌두교도였다. 불교라는 믿음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할아버지와 선대 왕들이 세운 불교 사원들을 힌두 사원들로 개조하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는데 그 유명한 앙코르 와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극단적인 힌두주의자였던 자야바르만 8세가 힌두교를 내세우고 불교를 탄압하며 뒤숭숭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던 와중, 국제 정세도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13세기의 아시아는 말그대로 몽골 제국의 독주 무대였다. 원나라로 대표되는 몽골 세력들이 제 앞에 거슬리는 왕국이라면 뭐든지간데 쓸어버리고 다녔던 무법천지의 시대였던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최고 패권국이었던 크메르 제국마저도 전성기 시절의 원나라에 맞서 이길만한 국력은 되지 못했다. 1281년 자야바르만 8세가 몽골 사신을 투옥시키자 화가 난 중국 남부의 총독이자 쿠빌라이 칸의 신하였던 소게투가 크메르 제국을 협박했고, 결국 자야바르만 8세가 이에 굴복해 2년 후부터 원나라에 입조하고 조공을 바치며 물러났다. 하지만 자야바르만 8세는 이 사건으로 위신에 치명타를 입었고, 결국 몬족의 독립을 그대로 용인했으며 서쪽의 수코타이 왕국과의 싸움에서도 연달아 패배하며 몰락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의 사위이자 독실한 불교도였던 인드라바르만 3세가 보다못해 1295년 자야바르만 8세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면서 크메르 제국도 본격적인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원나라가 동남아시아와 크메르 제국을 효과적으로 식민 지배하기 위해서는 동남아시아에 대한 군사적 정보와 기록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원 성종(元成宗) 테무르(鐵穆耳) 칸은 당시 원나라의 무역 상인이었던 주달관(周達觀, 1266~1346)에게 동남아시아의 군사적 정보와 정치 상황, 지도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오라는 칙령을 내리며 1285년 10월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항해도와 나침반의 도움으로 주달관 일행은 진랍국, 즉 크메르 제국에 무사히 진입해 들어올 수 있었다. 주달관의 방문 이후에도 원 성종(元成宗) 테무르(鐵穆耳) 칸의 명으로 크메르 제국은 원나라에게 잘 훈련된 전투 코끼리 부대를 항상 바쳐야했는데 이렇게 잘 훈련된 전투 코끼리 군대가 원나라군의 이민족 부대 중에 편성되면서 원나라는 더욱 더 군사력이 증강되었다. 황제(칸)의 칙령을 받은 주달관은 원나라의 사신 자격으로 멀리 캄보디아의 크메르 제국까지 탐험을 가서 앙코르 사원까지 둘러본 후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를 저술했다. 1296년 중국 원나라의 사신인 주달관(周達觀)(1266년~1346년)이 앙코르에 도착했다. 주달관은 원나라 저장성의 온주 출신으로 테무르 칸의 칙령을 받은 사신이었다. 그는 1296년 2월 20일 온주를 떠나 푸저우 항을 거쳐 하이난을 경유하고, 안남을 거쳐 캄보디아 캄퐁 참의 도시에 메콩 강 수로를 통해서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똔레삽 호수를 향해 작은 배로 갈아타고 12일을 항해하여 당시 수도인 앙코르 톰에 도착했다.
주달관이 쓴 《진랍풍토기》에 의하면 자야바르만 8세가 행차할 때면 가마가 수백 개가 넘었고, 해가리개는 수풀처럼 무성했으며 코끼리는 온통 황금과 보석으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진랍풍토기》에도 '크메르 제국이 주변 수코타이와의 전쟁에 지쳐 전 국토가 황폐해진 상태'였다고 저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미 크메르 제국이 멸망의 길을 서서히 걷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2.5. 외세의 침략, 내전, 역병과 멸망
태국 군대에 약탈당하는 크메르 제국의 수도 앙코르.
크메르 제국은 14세기 내내 꾸준하게 쇠락해갔다. 자야바르만 8세를 쫒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드라바르만 3세도 별다른 수는 없었던지 그의 재위기에도 크메르 제국은 착실히 몰락했다. 그의 뒤를 이은 인드라자야바르만, 자야바르만 9세 등 여러 후계 국왕들도 이미 무너져가는 크메르 제국을 되살리기에는 능력이 부족했다. 사실 크메르 제국이 이렇게 무너지기 시작한 이유는 온갖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끼어있었다. 이미 힌두교도들이 다수를 차지한 크메르에서 다시 불교로의 개종 시도, 왕족들 사이의 끝없는 권력 투쟁, 봉신들의 반란, 외세의 침략, 역병과 가뭄, 생태계 붕괴 등 안좋은 악재들은 죄다 겹치면서 제국의 붕괴는 더더욱 가속화되었다.
크메르 제국의 왕들은 더이상 스스로를 '데바라자'라고 칭하지도 않았다. 신왕이 아니니 굳이 그들을 위해 거대한 사원들을 세워줄 필요도 없었고, 이는 왕실의 위엄이 쇠퇴하는 결과를 유발했다. 한때 관리를 잘해놓았던 저수지나 수로 같은 물 관리 장치들도 시간이 흐르며 못쓰게 되었지만 이를 보수할만한 자금이나 능력은 없었다. 당연히 농업 생산량은 급감했고, 한때 3모작까지도 가능할 정도로 비옥한 토지는 1모작도 겨우 가능할 수준으로 황폐해지고야 말았다. 몬순이 일어날 때마다 막대한 토사가 쓸려내려와 수로 시설을 파괴했고, 수로가 막히자 막대한 이익을 벌어다줄 해양 무역으로 향하는 길도 끊겼다.
역병과 전염병이 크메르 제국의 몰락에 큰 파장을 주었다는 연구도 있다. 당시 크메르 제국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인구 밀집도가 높은 국가들 중 하나였는데, 13세기에 흑사병이라는 초대형 전염병이 크메르 제국을 덮치면서 재앙이 일어났던 것이다. 1330년 경에 흑사병이 이미 중국에서 처음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1300년대 중후반부에는 이미 크메르 제국에서도 흑사병이 대량 유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외에 천연두, 말라리아 같은 고질적인 전염병들도 번지면서 상황이 더더욱 악화되었을 것이다.
제국이 멸망에는 외세의 영향도 크게 작용했다. 특히 크메르인들의 속국으로 살았기에 캄보디아를 원수 보듯이 하던 수코타이 왕국은 200년 넘게 끊임없이 크메르인들을 괴롭혔다. 1350년에는 아유타야 왕국이 새로운 태국의 패권국으로 떠올라 수코타이를 병합하고 크메르 제국을 견제하기 시작하여, 1352년에는 아유타야의 왕 우통(Uthong)이 크메르의 수도 앙코르를 포위하기까지 했다. 이때 군주들이 수없이 갈아치워졌는데, 어찌나 혼란스러운 시기였던지 이 시대의 크메르 군주들은 제대로 그 계보가 작성되지도 못했다. 아유타야는 끊임없이 크메르 제국을 전용 샌드백으로 활용했다. 1393년에 또다시 수도 앙코르를 포위한 아유타야의 라메수안 왕은 앙코르를 점령, 약탈한 뒤 방화하고 제 아들을 꼭두각시 왕으로 세우기까지 했다. 결국 보다못한 크메르 제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보롬 리치아 2세가 1431년 방어하기가 힘든 앙코르를 버리고, 프놈펜으로 천도하면서 장대한 크메르 제국의 역사는 종식되었다.
보롬 리치아 2세가 앙코르에서 도망쳐 수도를 옮기긴 했지만 여전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고, 크메르 왕통도 이후 꾸준히 유지되었기에 엄밀히 말해서 크메르 제국이 완전히 멸망한 건 아니었다. 보롬 리치아 2세는 처음에는 인근 도시인 스레이 산토르로 도망갔으나 홍수가 나자 결국 프놈펜에 자리를 잡고 새 왕국을 건설했다. 보롬 리치아 2세는 프놈펜 인근에 6개의 불교 사원들을 건립하고 무려 1469년까지 30년을 더 재위했지만 크메르 제국을 재건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 시기 이후의 크메르 제국은 제국이라고 불리기 민망할 정도로 인근의 태국, 베트남 등 강대국들에게 치이면서 살았고, 때문에 1431년부터 1800년대 후반 프랑스의 식민 정복 이전까지를 캄보디아의 암흑 시대라고 부를 정도이다. 따라서 제국으로서의 크메르는 1431년에 완전히 멸망한 것으로 친다.
3. 사회
크메르 제국은 기본적으로 힌두교적인 계급 사회였다. 사회 피라미드의 최정점에는 신왕(神王) 데바 라자가 있었고, 그 아래에 사제 계급인 브라만, 전사 계급인 크샤트리아, 평민 계급인 바이샤, 노예 계급인 수드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연히 지배층보다는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는 평민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19] 캄보디아 자체가 전통적으로 농업 사회였다보니 농민들의 수가 조금 더 많았지만, 바로 곁에 어획량이 풍부한 톤레삽 호수가 위치한 덕에 어업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수도 매우 많았다고 한다.크메르 제국의 왕들은 살아있는 신이자 하늘과 인간의 중재자로 여겨졌다. 힌두교의 경우 시바의 대리인으로, 불교의 경우 전륜성왕이자 부처의 대리인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왕은 하늘을 대신해서 백성들을 다스릴 책임이 있었고 이를 근거로 거대한 저수지를 짓거나 스스로의 위엄을 드높인다는 명분으로 장대한 사원을 짓곤 했다. 백성을 보살핀다는 유교적 개념보다는 왕이 백성 위에 군림하는 전제군주정의 모습이 훨씬 강했던 국가였다. 하지만 이건 크메르 제국이 잘나갈 때 얘기였고, 훗날 제국이 쇠퇴하면서 왕의 권위가 심각하게 약화되자 사원이고 저수지고 제대로 보수하지도 못하는 일이 왕왕 벌어졌다. 당연히 백성들의 원망의 화살은 왕실에게 날아갔고 이는 크메르 제국의 붕괴를 가속화하는 원인들 중 하나가 된다.
캄보디아 여성들은 당대 기준으로 꽤나 사회에 왕성하게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크메르 제국을 방문했던 주달관의 기록을 보면,
'무역 업무를 볼 줄 아는 자들은 죄다 여자들 뿐이다.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일을 잘하는 여자를 섭외해야만 한다.'
'여자들이 어찌나 일을 많이 하던지 20살의 크메르 여인이 40대, 50대의 중국 여인보다도 더 늙어보인다.'
라는 서술이 있을 정도이다. 그만큼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했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앙코르 시장판은 대부분 여성들의 손으로 돌아갔으며, 유교 사상 때문에
내외의 개념이 있었던 중국과 동아시아권에 비해서 이 시대의 크메르는 훨씬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자유로웠다. 다만 성적으로 평등했다는 이야기까지는 아니었다. 특히 크메르 여성들은 지나치게 빨리 결혼해야하는
조혼 풍습에 시달렸는데, 이는 국가적으로 보면 인구 증가에 기여했지만 여성 개개인의 삶 측면에서 봤을 때 썩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13세기 원나라의 주달관이 보았을 앙코르 시내의 풍경.
크메르인들의 주식은 당연히 쌀이었다. 저수지 근처의 거대한 평야에서 집단으로 벼와 쌀을 경작했고 코코넛, 사탕수수, 야채, 과일 등 다양한 작물들을 함께 길러 먹었다. 바로 인근의 거대한 톤레삽 호수에서는 막대한 양의 물고기들이 잡혔기에 어업에 종사하는 인원도 상당했다. 크메르인들은 톤레삽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를 바로 구워 먹거나 어묵 형태, 혹은 말려 먹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닭, 돼지, 소 따위의 짐승들도 함께 길렀는데, 여유가 되는 짐승들은 시장통에 내다 팔기도 했다. 참고로 앙코르 시장에는 고정 건물이나 좌판대가 딱히 없었다. 그냥 땅바닥에 되는대로 주저앉아 파라솔 하나 피고 좌판을 깔면 그게 곧 시장이 되었다. 가끔씩 관리들이 돌아다니며 상인들에게 세금을 걷긴 했지만 딱히 시장 구획을 정리하지도 않았고, 고정된 건물들을 따로 세우지도 않았다.
참고로 톤레삽 호수는 크메르 제국의 젖줄이나 다름없는 귀중한 호수였다. 300여 종이 넘는 어종들이 득시글거리는 호수인데, 우기가 되어 물이 가득차면 여기 들어있는 물고기들이 미친 속도로 번식을 한다. 우기가 끝나고 건기가 오면 낚시는 더더욱 쉬워졌다. 톤레삽 호수의 수면은 굉장히 빠르게 내려간다. 워낙 수면이 빠르게 하강해서 물고기들이 땅 위에 갇힌 채 펄떡거리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되면 우기에 잔뜩 번식해서 불어났던 물고기들이 좁아터진 호수에 갇혀버리니 정말 세계에서 가장 물고기를 낚기 쉬운 호수라고 불릴만한 장소였다. 대나무로 엮은 덫과 그물을 치기만 하면 물고기들이 떼거지로 걸려들으니 식량 걱정은 없었다. 게다가 톤레삽 호수는 우기에 범람할 때마다 막대한 양의 토사물을 쓸고 내려왔는데, 이때 쌓인 토사물들은 천연 비료 역할을 해주기까지 했다. 농부들은 톤레삽 호수 근처에 매년 자연적으로 형성된 비옥한 농토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축복받은 환경이라 할 만했다.
왕족과 귀족들은 돌로 쌓은 깨끗하고 넓은 집에서 살았지만 평민들은 그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주달관이 남긴 기록을 보면,
'왕자와 귀족들의 저택은 평민들의 것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지배층의 저택 지붕에는 기와들이 덮여 있지만, 평민들의 저택은 죄다 초가로 이어 단 하나의 기와도 찾아볼 수 없다. 평민들의 집은 재력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아무리 부유한 평민이라도 차마 지배층의 것에 필적할 만큼의 집은 감히 짓지 못한다.'
라고 나와 있다. 앞의 언급에서도 볼 수 있듯이 평민들의 집은
대나무 등 짓기 쉬운 목재로 짓고, 바닥에는 돗자리를 깔았으며 위에는 초가로 지붕을 올렸다. 일반적인 평수는 7평에서 20평 정도였다. 평민들의 집은 보통 부모의 안방, 미혼한 딸들의 방,[20] 손님을 맞는 거실 이렇게 3개로 이루어졌다. 밥은 조금 떨어진
주방에서 지었고, 화장실은 집 멀리에 큰 구덩이를 파서 변을 보고 바로 흙을 덮어 처리하는 방식이었다.반쯤은 살아있는 신으로 취급받은 왕은 극도의 사치를 누렸다. 아래는 원나라의 사신이던 주달관이 당시 크메르 국왕이었던 인드라바르만 3세의 왕실 행렬을 직관하고 남긴 기록이다. 당대 크메르 제국의 왕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잘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왕이 나갈 때 군대가 그 앞에서 호위를 선다. 군대가 다 나오면 깃발, 깃대를 든 인원과 악사들이 그 뒤를 따르며, 300명에서 500명 정도의 궁녀들이 꽃무늬 옷을 입은 채 머리에 꽃을 꽂고, 손에 양초를 든 채로 극단을 이룬다. 왕이 행차할 때는 대낮에도 환하게 촛불로 불을 밝힌다. 그 다음 또다른 궁녀들이 손에 황금과 은으로 만든 식기와 기물들을 들고 줄을 이룬다...
궁녀들이 창과 방패를 들고 왕의 개인 친위병들과 함께 행진한다. 염소와 말이 끄는 수레는 모두 금으로 만들었다. 신하와 왕자들은 코끼리를 타고 있고, 그 앞에는 수없이 많은 붉은 우산들이 늘어뜨려졌다. 그 뒤에 왕의 아내와 후궁들이 가마와 코끼리, 수레와 말을 타고 앞선다. 100여 개가 넘는 금으로 장식된 우산들이 그들을 따른다. 그들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야 손에 신성한 검을 쥔 채로 코끼리 위에 서있는 국왕이 등장한다. 국왕이 탄 코끼리의 엄니는 금박으로 얇게 감쌌다.
오직 국왕만이 꽃무늬로 온통 화려하게 장식된 천으로 옷을 지어입을 수 있다. 목에는 약 3파운드의 큼직한 진주를 달고 있으며, 손목, 발목, 목에는 고양이 눈이 박힌 금팔찌와 반지를 차고 있다. 외출할 시에는 손에 순금을 녹여만든 검을 들고 다닌다...
궁녀들이 창과 방패를 들고 왕의 개인 친위병들과 함께 행진한다. 염소와 말이 끄는 수레는 모두 금으로 만들었다. 신하와 왕자들은 코끼리를 타고 있고, 그 앞에는 수없이 많은 붉은 우산들이 늘어뜨려졌다. 그 뒤에 왕의 아내와 후궁들이 가마와 코끼리, 수레와 말을 타고 앞선다. 100여 개가 넘는 금으로 장식된 우산들이 그들을 따른다. 그들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야 손에 신성한 검을 쥔 채로 코끼리 위에 서있는 국왕이 등장한다. 국왕이 탄 코끼리의 엄니는 금박으로 얇게 감쌌다.
오직 국왕만이 꽃무늬로 온통 화려하게 장식된 천으로 옷을 지어입을 수 있다. 목에는 약 3파운드의 큼직한 진주를 달고 있으며, 손목, 발목, 목에는 고양이 눈이 박힌 금팔찌와 반지를 차고 있다. 외출할 시에는 손에 순금을 녹여만든 검을 들고 다닌다...
앙코르 시내 한복판의 일상적인 좌판 풍경. 석재 건물은 사원이나 일부 유력 집안의 대저택을 제외하면 존재하지 않았다.
크메르의 핵심 종교는 힌두교였다. 훗날 불교가 스리랑카 및 인도에서 유입되어 큰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사회의 기본 틀은 힌두교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다만 힌두교 자체가 계급적인 성향이 강하다보니, 사제인 브라만이 집전하는 힌두 의식들은 주로 왕족이나 귀족들 같은 사회 지배층만이 참여가 가능했고, 일반 평민들은 참석이 어려웠다. 이후 13세기에 들어 만인의 평등을 중시하는 불교가 스리랑카에서 유입되며 널리 퍼지자 하층민들은 믿기 쉬운 불교에 귀의하는 경우가 더 많아지게 된다. 결국 국왕 자야바르만 7세가 아예 불교로 개종하고 난 이후부터는 힌두교보다도 불교의 영향력이 훨씬 커졌다.
크메르 제국의 병사들은 딱히 갑옷이나 무구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주달관의 기록에 따르면 크메르 군대는 창과 방패 같은 정말 기본적인 무기로만 무장했을 뿐, 통일된 갑옷이나 병갑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수코타이 왕국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아무 것도 주지 않은채 맨손으로 나가 싸우라고 떠밀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투석기, 갑옷, 투구 같은 것들도 없었다. 그냥 천으로 만든 바지에 두건 하나 두르고 나와서 싸웠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나마 고관이나 왕 같은 지휘관들은 금속으로 만든 그럴듯한 갑옷을 걸쳤지만 이는 철저히 의례용이었을 뿐, 실제로 전쟁에서 실용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톤레삽 호수에서 치러진 일부 해전에서는 활과 화살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마저도 해전을 제외하면 잘 등장하지 않는 걸 보아 활과 화살도 잘 사용하지 않고 오직 육탄전으로만 승부했던 것으로 보인다.[21]
크메르인들도 사람이었던지라 당연히 외양에 신경을 많이 썼다. 하지만 덥고 습한 동남아시아 특유의 기후 탓에 옷을 칭칭 두르고 다니지는 못했다. 평민들은 '삼폿'이라 불리는 옷을 입었다. 긴 직사각형 모양의 천을 허리춤에 빙빙 두른 다음 사타구니 사이로 꺼내 허리띠로 고정하는 형식의 옷이었다. 여성은 가슴을 가리기 위해 상체에도 천을 걸쳤다. 남녀를 불문하고 단순한 형태의 천을 이마나 팔뚝에 두르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옷가지들을 통틀어 '크라마'라고 부른다. 여유가 많은 왕족과 귀족들은 중국에서 수입해온 비단 같은 값비싼 작물로 만든 옷을 입거나 황금, 보석으로 만든 악세사리들을 주렁주렁 걸쳤다. 특히 자신을 과시하기 좋아하던 상류층들은 중국에서 들여오는 수입품에 환장했다. 주달관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크메르인들은 가는 이중사로 만든 비단을 대단히 귀하게 여긴다. 전저우의 백랍 도자기, 원저우의 칠기 접시와 천저우의 청자도 많이 찾는다. 콩과 밀은 특히 많이 찾지만 거기까지 수송하기가 어렵다.'
라고 쓰기도 했다.4. 건축
4.1. 재료
아름다운 크메르 문화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분야. 화려한 건축물들이 많은 동남아에서도 독보적일 정도로 유난한 미를 뽐내는 분야이기에 크메르 건축에 대한 연구도 매우 많이 이루어졌다. 크메르 건축의 대표적인 특징은 거대한 돌들을 깎아 그대로 쌓아올리는 형식인데 이는 인도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지만 인도 사원 건축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것만은 절대로 아니었는데, 크메르 특유의 둥근 얼굴상, 넓은 이마와 독특한 머리 장식 등은 오직 크메르 제국의 사원들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들인 것이다.크메르인들은 여러 재료들을 사용해서 건물들을 지었다. 하지만 영원성이 중요한 사원과 신전만을 벽돌과 암석으로 지었고, 궁전이나 거주지, 시장 등 일반 건물들은 가공하기 훨씬 쉽고 재료도 많은 나무와 흙을 사용했다. 크메르 유적들 중 제대로된 주거지 유적이나 궁전이 남아있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것. 수 백년의 세월 동안 죄다 삭아버렸기 때문이다. 신전을 쌓을 때에는 반면 벽돌, 사암, 라테라이트 등을 사용했다. 극초기에는 벽돌을 사용해서 사원을 쌓았다. 힌두경전 베다에도 '신성한 건물을 쌓을 때는 접착제를 사용하지 말라'라고 나와있는데 벽돌을 사용하면 굳이 접착제를 쓸 필요가 없었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빠른 시간 내에 짓기가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벽돌로 만드는 데에도 한계는 있었다. 구워내다보니 아무래도 단단함이 지나치게 약했고 경도도 약해 오랫동안 건물의 하중을 견뎌내지도 못했다. 결과적으로 벽돌로 지은 사원들은 그 크기가 작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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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로 지어진 프레아 코 사원. | 사암으로 지어진 타 케오 사원. | 라테라이트로 지어진 프라사트 프랑 쿠 사원. |
사암과 벽돌로만 그 거대한 건물 기반을 쌓는다는 건 재료가 너무 많이 들어 불가능했다. 그래서 크메르 인부들이 사용한 것이 바로 점토 라테라이트였다. 땅에서 채취할 때에는 부드럽지만 태양빛과 공기에 노출되면 점차 단단해지는 것이 특징인데, 부드러울 때 잘만 가공하면 매우 다루기가 쉬워서 자주 애용됐다. 라테라이트로 기단을 쌓고 대강 형태를 만들어놓으면 그 위에 바위를 깎아서 포장했던 것. 앙코르 와트나 바이욘 사원 등을 봐도 겉면만 벽돌과 사암으로 깎아놓았지 그 탑 안에 무너진 속을 보면 이 라테라이트를 안에 쌓아서 만들어진 것이다. 게다가 지하에 수분이 많은 크메르 지방에서 물을 흡수하고 더 단단해지는 특징마저 있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 하지만 라테라이트는 무언가를 정교히 새기기에는 지나치게 울퉁불퉁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크메르인들은 일부러 건물 표면에 부드러운 치장 벽토를 바르고 벽토가 마르기 전 돋을새김 등 부조를 새기는 방법을 썼다. 이렇게 하면 웬만한 정도를 능가하는 엄청나게 화려한 부조를 새기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고.
4.2. 건축 양식
앙코르 사원의 최중심부에는 '중앙 성소'가 존재한다. 독보적으로 높게 솟은 탑 형태의 구조인데 힌두교의 신들이 거주하는 성산(聖山) 메루 산을 상징했다. 힌두 사원일 때에는 보통 시바나 비슈누의 신상이, 불교 사찰일 때에는 불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내부는 의외로 상당히 협소한 편이었다. 일반 대중이 예배용으로 사용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신이 직접 깃들어있는 장소였기에 신상 정도만 들어가면 충분했기 때문. 가로폭과 세로폭 모두 몇 m가 넘지 않았고 실제로도 들어가면 몇 명도 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매우 비좁다. 하지만 그 중요성만큼은 사원 전체에서도 가장 높았기에, 언제나 신전 최중앙에만 위치했으며 그 위에 얹혀진 장식의 높이, 화려함, 벽의 장식 따위도 기타 건물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화려했다.앙코르 와트의 모습을 보면 화려한 탑처럼 생긴 높다란 구조물 5개가 중앙에 배치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이 탑 형태의 구조물을 '쁘랑(ប្រាង្គ)'이라고 부른다.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작아지는 다층 구조의 탑 형태지만 실제로 안에는 속이 꽉 차있다. 멀리서보면 마치 손가락이나 연꽃과도 비슷해보이는 독특한 외양으로 널리 알려진 편. 쁘랑을 높게 지으면 실제 높이보다도 더 높다래보이는 착시효과를 줄 수 있었다. 참고로 크메르 제국의 쁘랑 건축은 훗날 제국이 무너진 뒤 태국으로도 건너갔다. 수코타이나 아유타야 왕국의 기술자들이 크메르의 쁘랑 기술을 습득해서 태국식으로 재현했던 것이다. 다만 크메르의 쁘랑들은 모두 사암 조각으로 지었던 반면 태국의 쁘랑들은 화려한 도자기나 벽토로 덮어 훨씬 색조적으로 화려한 편이다. 뿐만 아니라 태국 왕실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사찰들에만 한정적으로 지어졌던 것도[22] 모든 사원에 쁘랑을 두었던 크메르와의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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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성소 | 쁘랑의 모습. 화려한 탑 형태의 건축물이다. | 앙코르 톰의 전형적인 크메르 고푸람의 모습. |
회랑과 갤러리들을 드나들기 위해서는 입구나 통로가 필요했다. 이 용도로 지어진 건물이 바로 '고푸람'이다. 사실 크메르만의 독특한 구조물은 아니고, 흔히 '인도 사원'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높다란 사다리꼴 형태의 입구 구조물을 모두 이 고푸람이라고 부른다. 크메르 제국 역시 인도 지방에서 고푸람 문화를 수입해서 사원 건축에 도입하였는데, 크메르 고푸람의 경우 보통 십자 형태의 독특한 모양이며 사원의 정방향 중앙에 뚫려있는 경우가 많다. 고푸람의 꼭대기에는 높다란 탑을 하나 세워놓는 경우도 있었으며 앙코르 톰의 고푸람에는 독특한 모습의 사인상을 새기기도 했다. 사원들의 출입구이자 얼굴이기도 했기에 주변에 난간이나 박석을 깔고 무희 무늬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위의 것들이 전형적인 크메르 사원에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건축 요소들이었다면 시대에 따라 등장하거나 사라지는 용도의 건물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12세기 자야바르만 7세 시절에 많이 지어진 '무희들의 홀'. 타 프롬 사원, 프레아 칸, 반테이 크테이 사원 등에서 볼 수 있는데 힌두교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무희 압사라들을 벽에 새겨놓아서 '무희들의 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보통 사원의 동쪽 축 정면, 중앙 성소 앞쪽의 직사각형 부지에 지어놓았고 4개의 회랑으로 나뉘어졌다. 12세기 후반에는 '다르마살라'라고 해서 '불의 집'이라는 이름의 독특한 건물이 등장하기도 했다. 두꺼운 벽과 기둥을 가진 석조 건물이었는데 용도가 확실하진 않지만 사원을 방문한 순례객들이 쉬어가는 공간 정도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1296년 크메르를 방문한 주달관이 이 다르마살라의 아름다움에 대해 경탄하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 그 외에 성스러운 불을 보관하는 공간이 아니었나하는 추정도 있다.
앙코르 와트와 그를 둘러싼 거대한 인공 저수지의 전경. 전성기 시절에는 저 저수지가 신성한 경내와 속세를 구분하는 역할을 맡았다. 크메르 제국이 몰락하고 사원이 버려진 후에도 물이 채워진 저수지가 열대우림이 사원 내부로 침투하지 못하도록 막아주었기에 상대적으로 유적에 대한 훼손도가 덜해졌다.
'도서관'이라는 용도로 지어진 건물들도 있었다. 앙코르 와트 사원 앞쪽에 2개의 건물이 뚝 떨어져 지어진 걸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도서관 건물이다. 이름은 도서관이지만 정확히 무슨 용도로 지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종교 경전들을 보관하거나 제례 용기들을 따로 놔두던 장소였을 가능성을 높게 쳐서 '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 뿐이다. 보통 사원 정면 앞쪽 넓은 공터에 2개씩 짝을 지어 존재한다. 입구는 일반적으로 서쪽으로 뚫려있다.
사원 주위에는 '바레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저수지, 혹은 해자를 파내고 물을 채웠다. 종교적으로는 신성한 사원을 속세와 구분한다는 의미가 있었고 사원 방어와 농경에 필요한 물 공급이라는 실용적인 목적도 겸했다. 앙코르에 남아있는 가장 거대한 2개의 바레이는 앙코르 톰 양편에 위치한 '이스트 바레이'와 '웨스트 바레이'. 웨스트 바레이는 그 크기가 7.8km x 2.1km에 달했고 이스트 바레이 역시 비슷한 사이즈였다. 개중 이스트 바레이는 완전히 말라버렸지만 웨스트 바레이는 아직까지도 물이 남아있다.
크메르 사원들의 독특한 특징들 중 하나가 '템플 마운틴(Temple Mountain)' 기법이다. 거대한 돌들을 마치 산처럼 쌓아올리고 그 위에 사원을 지어놓은 것을 따로 부르는 명칭이다. 힌두교의 메루 산을 현세에 재현한다는 의미가 있었고 주변에 파낸 해자는 신성한 바다의 경계를 의미했다. 템플 마운틴 기법으로 지어진 것들 중 가장 유명한 사원은 뭐니뭐니해도 '바콩 사원'이다. 바통 사원은 5층의 피라미드 형태의 높은 사원인데, 881년 인드라바르만 1세가 지었으며 아마 저멀리 자바의 보로부두르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크메르의 왕들은 이 높은 사원들을 정례적으로 올라가 그 위에서 제사를 치러야 할 책무가 있었다. 그래서 굳이 사원을 높게 지은 것이 크메르 왕들의 체력을 시험한다는 의미가 있지 않았나하는 추정도 있는데, 높은 계단을 올라가지도 못할 정도로 노쇠했다면 전쟁이 비일비재한 크메르에서는 더이상 왕의 책무를 수행할 자격이 없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23]
4.3. 건축 기술
앞서 여러 차례 언급한 사실이지만 앙코르식 전통 건물들은 으리으리한 외관에 비해서 안이 매우 좁은 편이다. 크메르인들은 제대로 된 곡선 아치의 존재를 발명하지 못했기에 경사진 코벨 아치를 사용했는데, 코벨 아치는 곡선 아치에 비해 버틸 수 있는 하중이 훨씬 적어서 공간을 넓게 내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코벨 아치 자체가 벽 양 옆에서 조금씩조금씩 경사지게 돌을 비스듬히 쌓아올려가는 방식이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참고로 이 코벨 아치 방식으로 지어진 유적들은 현재까지도 캄보디아 정부의 골머리를 썩히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적이 허물어지는데 코벨 아치 특성상 잠시만 잘못하면 건물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내려버리기 때문. 그래서 일부러 아치 사이에 목재 빔을 걸쳐두거나 임시로 때우는 경우가 허다하다.크메르 건물들은 기둥들을 세우고 그 위에 상인방들을 얹은 다음, 상인방 위에 삼각형 모양의 페디먼트나 팀파눔 등 복잡한 장식들을 마구 쌓아올리는 형식이었다. 페디먼트나 팀파눔 등은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차례 교체가 가능했지만 상인방은 아예 건물을 통째로 들어내지 않는 한 교체가 불가능했기에 사원의 건축 시간대를 측정할 때에는 보통 상인방의 형태로 추정한다. 상인방에 가장 자주 새겨진 형태는 시간의 괴물 칼리, 물의 뱀신 나가, 바다괴물 마카라, 그리고 여러 힌두 신들이었다. 특히 하늘의 신 인드라는 북쪽에, 지옥의 신 야마는 동쪽에, 해양의 신 바루나는 남쪽에, 부의 신 쿠베라는 서쪽에 새기는 것이 관례였다.
'크메르식 상인방'이라고 하면 다 비슷비슷한 무늬들 같겠지만 그 안에서도 연도와 사원에 따라 종류가 나뉜다. 가장 유명한 것은 당연히 앙코르 와트의 상인방 장식. 중앙에 장식들이 집중된 채로 여러 층으로 나뉘어져 압사라와 신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여백은 거의 없는 수준이며 나가들은 돌돌 말린 채 등장한다. 가장 아름다운 상인방 장식은 9세기 경 지어진 프레아 코 사원의 상인방 양식이다. 시간의 괴물 칼리가 아가리를 쩍 벌린 채 중간에 새겨졌고 그 주위로 덩굴이 뻗어나가는 유려한 모습이다. 가루다에 올라탄 비슈누의 형상이 칼리 위에 새겨져 있기도 하다. 그 외에도 주요 인물상 없이 작은 신상들만 조그맣게 새겨진 바이욘 양식, 프레아 코 양식의 축소판인 바 켕 양식 등 여러 상인방 장식 형식들이 존재한다.
앙코르 와트를 다녀와 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겠으나 크메르식 사원들의 계단들은 하나같이 높이와 경사가 상당하다. 거의 45도에서 70도를 왔다갔다할 수준이니 까딱하면 뒤로 자빠질 수준까지 높아지기도 한다. 굳이 계단을 올라가기도 힘들 정도로 경사지게 만든 데에는 종교적인 의미가 있었다. 계단의 경사를 급하게 만들면 올라갈 때 어떻게든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게 된다. 속세의 사람이 신들의 공간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건축학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사원의 크기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다.
4.4. 부조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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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의 무희 압사라 | 드바라팔라 | 가루다의 모습. 비슈누의 탈것이자 신성한 새로 숭상받았다. |
가장 유명한 건 압사라지만 그 외에 여러 신들이 많다. 창과 몽둥이 따위로 무장한 채 사찰을 수호하는 수호자 '드바라팔라(Dvarapala)'는 보통 험상궃은 얼굴을 한 채 사찰의 입구 등에 세워놨다. 사자의 몸과 코끼리의 머리를 가진 신화 속 동물 '가자심하', 사자의 머리와 코끼리의 몸통, 용의 꼬리를 가진 '리치시' 등이 있으며 비슈누의 탈것인 가루다도 있다. 신화속 동물들 중에서는 이 가루다가 가장 묘사되는 빈도가 잦은 편. 가루다는 보통 부조에서 상부 구조를 지지하는 기둥에 새겨져 있는 경우가 많으며 물의 뱀신 나가를 격퇴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뱀의 머리와 코끼리의 몸을 가진 채 악어 또는 용과 닮은 형상의 괴물 '마카라'도 있었다. 상인방이나 고막, 벽에 주로 새겼고 보통 다른 괴물들을 거대한 아가리 속에서 뱉어내는 모습으로 자주 등장한다.
꽤나 인상적인 모습을 자랑하는 괴물들 중에는 힌두교의 신 칼리가 있다.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시간을 상징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당대 크메르에서 그 위상이 굉장히 높은 편이었다. 부리부리한 눈과 거대한 코, 긴 이빨이 특징인데 주로 상인방 장식이나 벽장식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고, 독자적으로 묘사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독특하게도 칼리는 아래턱이 없는 모습이다. 학자들은 이게 고대 캄보디아 시대에 두개골을 전시하는 풍습에서 유래되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두개골을 전시하면 살점이 썩어 떨어져나가며 아래턱이 사라지게 되는데, 크메르인들이 이 모습에서 모티브를 따와 공포스러운 칼리의 모습을 만들었다는 것. 물론 확실한 설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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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의 모습 | 입에서 괴물을 토해내는 마카라 | 링가 | 나가 형상의 석조 다리. 나가의 몸통을 잡은 신들의 모습이 보인다. |
크메르 제국이 힌두교를 믿던 시절 시바 신을 모시는 사원의 가장 중심에는 '링가'를 모셨다. 시바 신의 창조력을 묘사하는 거대한 남근상인데, 광택이 나는 돌 하나를 통째로 깎아서 만들었다. 링가는 자궁을 상징하는 '요니'라는 이름의 평평한 받침대 위에 세웠다. 남근과 자궁의 신성한 결합을 의미했던 것. 일부 링가는 표면에 시바 신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를 따로 '무할링가'라고 구분해서 부른다. 어떤 링가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있기도 했다. 창조신 브라흐마를 상징하는 사각형 바닥, 유지신 비슈누를 상징하는 팔각형의 기둥부분, 파괴신 시바를 상징하는 둥근 끝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삼신의 결합이 하나의 조각 안에 모두 들어있었던 것. 금이나 귀금속이 아닌 돌덩어리를 깎아 만들었기에 약탈당하지 않아 의외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링가는 꽤나 많은 편이다.
물의 뱀신인 나가는 매우 중요한 대접을 받는 존재였다. 부채 모양의 여러 머리를 가진 거대한 뱀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크메르인이 인도의 브라만 왕자와 캄보디아의 뱀 공주가 결합해서 만들어졌다는 신화가 있을 정도였기에 나가는 굉장히 신성한 대접을 받았다. 악신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고행 중인 석가모니 위에 나타나 비늘을 펼쳐 빗물을 막아준 뱀왕 무칼린다의 전설처럼 선한 존재로 등장하는 사례도 많았다. 주로 상인방에 기다랗게 새겨넣거나 벽에 장식했지만 그 기다란 특성을 이용해 난간 장식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우유 바다 휘젓기' 설화를 보면 신과 악마들이 나가를 휘어잡고 우유 바다를 휘젓는 모습이 나오는데, 여기서 착안해 나가의 몸통을 난간으로, 신과 악마를 그 받침대로 활용해 다리를 꾸몄던 것이다. 현재 앙코르 톰의 정문으로 들어가는 다리에서 이 나가 다리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5. 기타
- 크메르인들은 국왕이 죽으면 신과 하나가 된다고 믿었기에 역대 국왕들은 자신과 하나가 될 신의 사원을 지었는데, 대표적인 사원이 바로 비슈누 신의 사원인 앙코르 와트였다. 무려 50,000명에 달하는 인부들이 37년 동안 이룩한 대사업이었다. 그런데 후기로 갈수록 큰 사원을 짓기 위해 무리하게 국력을 소모한 것이 쇠락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타 프롬 사원 위에 자라난 사펑 나무. 그림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명실상부 캄보디아의 최고 촬영 명소들 중 하나다.
- 인상적인 형태의 사원 폐허들로 제일 유명하다. 특히 무너져내리는 사찰들이 굵은 나무줄기에 칭칭 휘감긴 채 서서히 쓰러져가는 모습이 굉장히 다양한 감정을 일으키기도 한다. 뿌리가 땅 위로 그대로 드러난 독특한 형태의 나무는 벵골보리수, 즉 반얀나무의 일종인 사펑 나무이다. '타 프롬 사원'의 모서리에 자라난 거대한 사펑 나무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 툼 레이더>의 모델이 된 것으로도 유명해 캄보디아의 필수 관광코스들 중 하나로 꼽힌다.
- 크메르 제국은 바레이 혹은 바라이라는 인공호수를 많이 지었다. 바라이는 수로 역할를 하며 물을 길어다 쓰는 관개농업에 많이 사용되었지만, 호수 한가운데에 사원을 세워둠으로써 힌두교에서의 우주의 중심인 메루산( 수미산)을 상징하는 종교적인 역할을 했다고 추정한다. 이 바라이는 앙코르 유적을 가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원나라의 사신으로 크메르를 여행했던 주달관은 당대 크메르인들의 생활상에 대해 자세한 기록인 《진랍풍토기》를 저술했다. 《진랍풍토기》에 따르면 남녀 모두 머리를 길게 길렀으며 묶고 다녔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이색적인 크메르인들을 신기해하면서도 경멸하는 자세를 취했는데, 크메르인들의 까무잡잡한 피부가 혐오스럽다고 까는가 하면 크메르 여인들이 서서 오줌을 누는 풍습이 미친 짓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 앙코르 와트의 화려함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의외로 크메르식 건물들을 짓는 데는 큰 기술이 필요하지는 않다. 크메르 제국의 건축술은 로마 제국의 그것에 비해서도 확연히 떨어졌다. 방들은 낮고 좁았으며 석조 건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조 건축 양식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면도 있었다. 그나마 막 파냈을 때는 부드럽지만 햇빛에 노출되면 단단해지는 라테라이트, 캄보디아 특유의 부드러운 붉은 사암의 존재 덕분에 훨씬 쉽게 거대한 건축물들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크메르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창조한 앙코르 석공들의 노력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 크메르 제국의 첫 번째 수도였던 마헨드라파르바타를 항공 지도 기법으로 발견했다고 한다. #
- 유럽의 합스부르크 제국과 엇비슷한 면이 있다. 두 나라는 전성기에 각각 각자의 지역에서 맹주가 되었고, 전성기가 끝나자 주변국과의 전쟁에서 연전연패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는 제1, 2차 세계대전으로, 크메르(캄보디아)는 태국과 베트남의 침략으로 국토가 결정적으로 축소되어 현대에는 두 나라 모두 영세중립국이 되었다. 다만 중립을 잘 지켜낸 오스트리아와는 달리 캄보디아는 중립이 파토가 나 공산화 직후 헬게이트를 겪다가 탈냉전 이후에 왕정복귀가 되면서 겨우 안정을 되찾는다.
투계 두 마리에 각각 내기를 걸고 있는 남자들을 새긴 부조.
- 바이욘 사원에는 단순히 종교적 상징이나 불상 외에도 당대 크메르인들의 생활상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 부조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면 재미있는 것들이 많은데, 예를 들어 점쟁이, 병원, 선술집, 미용실, 낚시하는 어부 등의 모습들이 새겨져 있다. 활 사냥꾼, 멧돼지 사냥꾼, 어린 소녀의 두건을 빼앗으려는 남자의 모습, 수염을 뽑는 남자, 닭싸움에 내기를 거는 남자들, 심지어 웃으면서 몰래 저울에 손가락을 얹어 중국 상인들에게 사기를 치는(...) 캄보디아 여인들의 모습마저도 새겨놨다.
- 춤은 굉장히 중요했다. 특히 여성 무희들이 단체로 추는 무용이 중시되었는데, 이에서 영향을 받아 압사라 부조들이 탄생한 것이다. 자야바르만 7세 시절 궁정에는 최소 600여 명이 넘는 여성 무용수들이 고용되어 있었다. 참고로 고대 크메르 제국의 춤은 매우 극단적이고 신체적으로 수행하기가 도저히 어려운 동작들이 많다. 손가락을 손등 뒤로 구부리는 동작, 한 발을 반대쪽 허벅지에 대고 골반을 대각선으로 기울이는 등 연체동물처럼 유연하지 않으면 시도조차도 어려운 동작들이 넘쳐난다.
- 지금이야 사찰들이 시간에 퇴락되고 무너져 회색빛으로 칙칙한 상태지만 예전 전성기에는 훨씬 밝은색으로 칠해져 있었을 뿐더러 황금과 각종 귀금속, 꽃 등으로 뒤덮여 매우 아름다웠다.
6.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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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자야바르만 2세 | 자야바르만 3세 | 인드라바르만 1세 | 야소바르만 1세 | 하르샤바르만 1세 | |
제6대 | 제7대 | 제8대 | 제9대 | 제10대 | |
이샤나바르만 2세 | 자야바르만 4세 | 하르샤바르만 2세 | 라젠드라바르만 2세 | 자야바르만 5세 | |
제11대 | 대립 |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
우다야디티야바르만 1세 | 자야비라바르만 | 수리야바르만 1세 | 우다야디티야바르만 2세 | 하르샤바르만 3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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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난 국왕 · 첸라 국왕 · 캄보디아 국왕 | }}}}}}}}}}}} |
순서 | 왕 | 재위 기간(년) |
초대 | 자야바르만 2세 | 802 - 835 |
2대 | 자야바르만 3세 | 835 - 877 |
3대 | 인드라바르만 1세 | 877 - 889 |
4대 | 야소바르만 1세 | 889 - 910 |
5대 | 하르샤바르만 1세 | 910 - 923 |
6대 | 이샤나바르만 2세 | 923 - 928 |
7대 | 자야바르만 4세 | 928 - 941 |
8대 | 하르샤바르만 2세 | 941 - 944 |
9대 | 라젠드라바르만 2세 | 944 - 968 |
10대 | 자야바르만 5세 | 968 - 1001 |
11대 | 우다야디티야바르만 1세 | 1001 - 1002 |
대립 | 자야비라바르만, 수리야바르만 1세 | 1002 - 1010 |
12대 | 수리야바르만 1세 | 1010 - 1050 |
13대 | 우다야디티야바르만 2세 | 1050 - 1066 |
14대 | 하르샤바르만 3세 | 1066 - 1080 |
15대 | 자야바르만 6세 | 1090[24] - 1107 |
16대 | 다란인드라바르만 1세 | 1107 - 1113 |
17대 | 수리야바르만 2세 | 1113 - 1145 |
18대 | 다란인드라바르만 2세 | 1150 - 1160 |
19대 | 야소바르만 2세 | 1160 - 1167 |
20대 | 트리부바나디티야바르만 | 1167 - 1177 |
21대 | 자야바르만 7세 | 1181[25] - 1218 |
22대 | 인드라바르만 2세 | 1219 - 1243 |
23대 | 자야바르만 8세 | 1243 - 1295 |
24대 | 인드라바르만 3세 | 1295 -1308 |
25대 | 인드라자야바르만 | 1308 - 1327 |
26대 | 자야바르만 9세 | 1327 - 1336 |
27대 | 트라사크 파엠 | 1336 - 1340 |
28대 | 니피안 바트 | 1340 - 1346 |
29대 | 롬퐁 리치아 | 1346 - 1351 |
30대 | 소랴봉 | 1357[26] - 1363 |
31대 | 보롬 리치아 1세 | 1363 - 1373 |
32대 | 토마 사오크 | 1373 - 1393 |
33대 | 인 리치아 | 1394[27] - 1421 |
34대 | 보롬 리치아 2세 | 1405 - 1431 |
7. 각종 매체에서
-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에서도 초기 시나리오에 플레이할 수 있는 국가로 나온다. 전용 아이디어, 스킨, 이벤트까지 있어서 대접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대체로 옆동네의 아유타야나 윗동네의 다이 비엣에게 순삭당하는 신세다.
8. 관련 문서
[1]
크메르 제국의 공식 국기. 국기로는 흔치 않은 삼각형 모양으로, 금색 바탕에 녹색 테두리를 가진 형태였다.
[2]
크메르 제국의 왕통 자체는 유지되었지만 1431년
앙코르를 떠난 이후
프랑스에 복속된
19세기까지 몇 백년 동안 인근
강대국들에게 착취당하여
암흑시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3]
1295년 이후 크메르 제국의 국교로 자리매김했다.
[4]
이는 원, 명대의 표기이고 현대 중국식 표기로는 高棉(고면).
[5]
802년에
자야바르만 2세가 데바라자 의식을 치르며 제국이 성립된 것으로 여겨지며, 1431년에 수도인
앙코르가
아유타야 왕국에게 함락되면서 사실상 멸망한 것으로 본다.
[6]
다만 이 시기의 로마는 옛 전성기 시절인
로마 제국의 로마가 아니었고,
교황과 귀족들의 갈등, 세속 군주들의 개입 탓에 제대로 된 인구도 보유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지나치게 심한 정치 갈등과 내전 때문에 정상적인 수준의 인구조차 보유하고 있지 못하고 쇠퇴하던 최악의 시대였다. 훗날 로마가
르네상스의 중심으로 떠오르며 인구수는 다시 폭증한다.
[7]
엄밀히 말하면 최후의 국왕 보롬 리치아 2세가 살아남았고, 왕통도 그대로 보존되었기에 제국 자체가 망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후의 크메르는 완전 태국과 베트남 등 인근 강국들에게 치이면서 암흑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국력이 약화되었다. 때문에 패권국으로서의 크메르 제국은 1431년에 끝났다고 본다.
[8]
중국식으로는 '진랍'이라고도 부른다. 이 시기 캄보디아 역사를 중국인들의 기록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해서 한자어 그대로 진랍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다.
[9]
다만 진랍을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진랍'이라는 이름하의 여러 소국들의 집합으로 보고, 그 소국들이 육진랍과 수진랍으로 통합됐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데이빗 챈들러(David Chandler)가 대표적이다. 한국사로 예를 들자면
마한과 비슷한 케이스라고 보면 된다.
[10]
학계에서는 자야바르만 2세가
제정일치 사상과
신왕 제도를 자바 왕실에서 배워 왔다고 여긴다.
[11]
코끼리를 사냥하며 쫒다가 죽었다는 말이 있다.
[12]
이는 훗날 후대 국왕들이 더 거대한 수로와 저수지들을 마구 지어대며 빛이 바랬다. 게다가 지금은 기후 변화로 저수지가 말라버려서, 몬순 기간에도 약 750만 입방미터 정도의 물만 담을 수 있다고 한다.
[13]
인드라바르만 1세가 지은 사원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건 바콩 사원이다. 힌두교의 성스러운 메루 산을 형상화한 독특한 탑 형태 신전의 원형으로 훗날 앙코르 사원들의 기본이 된다.
[14]
참고로 이 타 케오 사원은 처음으로 전체가
사암으로 만들어진 사원이었다. 그러나 공사 도중 낙뢰를 맞아 악마를 퇴마하는 작업을 치렀지만 결국 끝끝내 완공하는데 실패했다.
[15]
말레이 반도에 위치한 인도계 소왕국. 1001년에는
송나라에까지 사신을 보냈고, 전성기에는
스리랑카를 침공하기까지 했지만 결국 13세기 경에 태국의
수코타이 왕국에 병합되어 멸망했다.
[16]
이 전쟁에서 함께 싸운 크메르-촐라는
불교계였고, 이에 맞서 싸운 탐브랄링가-스리위자야는 힌두교계였기에 종교전쟁의 의미도 있었다.
[17]
그 외에 밤사라자라는 이름의 배신자가 자야 하리바르만 1세를 배신하고 참파를 뒤엎으려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리 왕조로 도망쳤다. 밤사라자는 훗날 자야 하리바르만 1세에게 살해당했다.
[18]
톤레삽 호수에서 치러진 해전에서 트리부바나디티야바르만이 이끌던 크메르 함대가 대파당하고, 참파의 자야 인드라바르만 4세가 수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19]
10세기 경의 크메르 제국에는 왕을 포함한 최고 지배 계급이 기껏해야 4,000여 명을 넘지 않았다. 이들은 제국의 부를 틀어쥔 채로 많으면 1,000명이 넘는 노예를 부릴 정도로 부유했다.
[20]
아들은 결혼을 했든지, 하지 않았든지 어디에서 자든 상관이 없었다. 허나 미혼 처녀의 경우, 순결의 의무 때문에 독자적인 방을 할당받았다.
[21]
코끼리에 쌍궁을 장착해 사용하는 부조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이는 크메르 제국의 정규 병종이라기보다는 크메르에 고용된
참족 용병들이 자기들끼리만 썼던 것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22]
태국 최고의 사원이자 에메랄드 불상을 봉안한
왓 프라깨오에는 6개의 쁘랑이 존재한다.
[23]
크메르인들은 바콩 사원 꼭대기의 신전에 시바 신이 현신한다고 믿었다.
[24]
참파의 침입을 받아 10년의 공백기간이 있었다.
[25]
공백기간동안 참파 왕 자야 인드라바르만 4세의 지배를 받았다.
[26]
공백기간(시암의 지배.)
[27]
공백기간(시암의 지배).